1. 굴비 / 박현
한때는 용왕을 꿈꾸고
삼천정병을 이끌고 토끼를 잡으러 가고 싶었을게다
속살까지 퍼렇게 물든 바다에서 혁명을 꿈꾸다
태어나 처음 공기를 맛보고
은빛 비늘이 벗겨지고
아가미에 소금이 뿌려진 채로
제 태어난 바다를 동공에 담고
나일론 끈에 효수당한 채로
석 달 열흘을 매달려 있다가
지폐 몇 장에 팔려
불빛 가난한 이의 밥상에 누웠다
우르르 달려든 쇠꼬챙이에
몸뚱이는 산산이 부스러지고
앙상한 뼈와 헤진 내장을 드러낸 채
누웠다
두 눈 부릅뜨고
누웠다
아버지가
누웠다
2. 승냥이, 울다 / 박현
논산장례식장 주차장
한 떼의 펭귄이 열을 맞춰 걷는다
선두의 펭귄은 다리를 전다
대학생 막내에게 도가니를 빼먹였을 터이다
가슴을 움켜쥔
파마머리 펭귄은
벌이가 시원찮은 아들 탓에
밤봇짐을 싼 큰며느리를 어르느라
간과 쓸개를 빼먹였을 터이다
입을 오물거리는 합죽이 펭귄은
발정 난 둘째에게
하늘의 이치를 가르치느라 데려온
베트남 새아기에게
금니를 빼어 먹였을 터이다
거죽만 뒤집어쓴 펭귄들
대학병원 마크가 커다랗게 찍힌
조제약 봉투를 찢어
여봐란 듯이 입에 털어 넣으며
간과 쓸개와 도가니의 빈자리를
효심으로 변성한
화합 물질 덩어리로 채우고는
갱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장례 예식장으로
먼저 간 펭귄을 애도하러 간다
승냥이, 운다
동냥젖으로 키운 승냥이
부러진 어미 날갯죽지
살집 살피며 목청 높여
건울음 운다
3. 새해 시인의 노래 / 박현
하얀 함박눈이 내리며
한 해를 지우고 새 장은 밝아온다.
새털구름 시름없이 떠가는데
옷깃을 스치는 한 올 바람은
아침에 이슬 빛 눈을 뜨고
새로운 진실의 나래 펴라 하네.
하늘이 있고 내가 있어
진실의 현을 울리면 꽃은 피고
꽃잎에 빛 방울 미소 어린다.
그처럼 보배로운
함박웃음 길이 되라 하네.
그처럼 그리운
파랑새 나래 시가 되라 하네.
그처럼 보고픈
향기로운 세월의 문이 되라 하네.
박현 약력
충남 예산출생 본명 박종덕
충남대학교 국문과 동대학원 졸업(문학박사)
2007년 《애지》로 등단
시집 『굴비, 공동사화집』 『나비, 봄을 짜다』
『아, 공중사리탑』, 『날개가 필요하다』,
『버거씨의 금연캠페인』 등.
4. 나비, 봄을 짜다 / 김종옥
햇빛이 겹겹이 매어놓은 날줄 속으로 나비 한 마리
들락날락 하루를 짭니다.
찰그락찰그락 어디선가 베틀 소리 들립니다.
그가 짜는 능라인지
화르륵 꽃분홍 철쭉이 핍니다.
길 끝에서 언덕으로 언덕에서 산으로 오르는
저 나비,
연둣빛 북입니다.
팽팽하던 날줄이 툭툭 끊어집니다.
저 붉은 노을
그가 토혈을 하고 있습니다.
그 속으로
낙타같이 능라를 진 산들이 지고 있습니다.
김종옥 약력
인천 출생
2005년 《애지》로 등단
시집 『잠에 대한 보고서』
사화집 『나비, 봄을 짜다』
『능소화에 부치다』 등
5. 쌀의 오독 / 신현락
평생, 쌀을 팔러 다니는 것은
쌀을 주식으로 하는 종족의 운명이다
간식이 주식보다 귀하던 시절엔 주머니에 한 웅큼
쌀알을 넣고 다녔다 깨물면
오독오독(誤讀誤讀) 소리가 났다
어린 어금니 깨지는 소리가 났다
쌀을 판 날은 밤 새워 책을 읽었다
가난한 세상을 읽어내는 일생이
오독뿐이라고 해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때로는 쌀을 사러 다니기도 하였다
쌀을 살이라고 발음하는 여자를 만난 이후였다
쌀과 살 사이에서 그 여자의 덜 여문 살을 주무르자
내 손등에는 쌀알 같은 소름이 흘러내렸다
바닥에 흩어진 쌀알은 이별의 점괘를 가리켰다
쌀을 사는 것은 살을 파는 것이다
쌀을 파는 것은 삶을 사는 것이다
죽어서도 쌀을 입에 물고 쌀을 팔러 다니는 것은
쌀 한 톨이 생사의 안팎을 관장하는 종족의 운명이다
한 됫박의 쌀로 사랑을 구하고
아침과 저녁을 먹는 동안이 내 평생이었다
6. 금 / 신현락
한때는 그랬네.
땅 위에 금을 그으며
여기 넘어오면 안 돼, 넘어오면 죽는 거야, 하면서
네 편 내 편 서로 금을 밟지 않으려고
금 밖에서 빙글빙글 돌았던 적이 있었네.
나도 그랬네.
누군가 금만 그으면
여기에서 저기로 넘어가지 못하는 줄 알았네.
그날 밤 나와 너 사이에 그어진 금을
내 새끼손가락은 얼마나 넘어가고 싶었던가.
땅 위에 금을 그으며
여기는 내 집이야.
순금으로 지은 집이라고 착각한 옛날도 있었네.
나도 너의 금이었을까.
넘어가서는 안 되는 국경처럼
머나먼 금기의 이역에서
깃발만 펄럭이고 있었을까.
한때는 너와 나
금 밖에서 서성거렸으나
이제는 금 안에서 금 밖을 기웃거리네.
지금 저 금 밖에서 우는 사람아
그곳은 금 밖이 아니고 금 안이라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금 안에서 우는 거라네.
신현락 시인 약력
*1992년 《충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시집 『따뜻한 물방울』, 『풍경의 모서리, 혹은 그 옆』, 『히말라야 독수리』
*논문집『한국현대시와 동양의 자연관』
7. 겨울 감자 / 박정남
푸르죽죽한 얼굴로 앉아 계신 감자 한 알
언젠가 본 듯한 눈에 선한 모습이다
어머니! 하고 손목을 붙잡으니
주름투성이에 탈수증까지 앓으셨는지 더욱 쪼그라든다
오냐 너냐 하시며 허공으로 틔운 싹으로
내 손등만 연신 쓰다듬어주신다
그 속에서 뭐 하세요?
희뿌연 먼지 낀 창 너머로 얼어붙은 하늘 강
고무장갑도 없이 언제 얼음은 깨셨는지
첨벙첨벙 빨래하고 계신다
한숨 놓고 계신다
빨갛게 언 손가락이 공중에 떠 있다
이제 그만 나오셔야죠
포대자루 속에 들어앉은 어머니를 고이 모셔다
햇볕 좋은 베란다 화병에 앉혀드리니
비로소 예의 그 자줏빛 미소를 보이신다
겨울 한철이 푸르러지겠다
8. 그 여자의 화분 / 박정남
그 집에는 물받이 있는 빨간 화분에
꽃 대신 볼펜이 피고
때 묻은 모나미 사인펜이 피고
내일을 기약하던
구 대동은행 연필이 꽂히고
동그란 두 눈을 뜬 청색 가위
키가 큰 투명 자가 목을 빼어 서 있고
노란 뚜껑의 초강력 무독성 딱풀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 옆 또 다른 화분에는
점선 방향으로 찢어 주셔요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는 모카골드 커피믹스
스틱들이 꽂히고
빨간 석류알의 석류차, 15ḡ 한차 스틱들
멀티 비타민 미네랄 오렌지 자몽맛이
피고지고 피고지고
그 여자의 식탁인 듯
책상도 아닌 곳에
여자는 한때 꽃을 가꾸고 싶었던 거지요
해마다 식목일은 다가오고
아직 꽃을 보기에는 까마득히 먼 여자의 일상
우선 볼펜을 꽂아놓고
30센티 키 큰 투명 자를 세워 두고
가끔 한 잔 차로 마음을 데우며
꽃 같은 것을 그리며 앉아있겠지요
《현대시학》 2014년 4월호
박정남 약력
197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숯검정이 여자』『꽃을 물었다』등이 있음.
대구시인협회상, 상화시인상 수상.
9. 북향 / 김왕노
밤새 꼬옥 부둥켜안고 있다가 가슴에 힘이 풀려
하늘로 새벽 새떼를 돌려보내는 고목
풀 이파리 이파리마다 맺혔던 이슬마저 표면장력의 얇은 껍질을 버리고
톡 터져 푸른 예감을 게워낼 때
밤새 밤을 경전으로 읽어도 끝내 깨달음이 없었는지
개울물은 여전히 졸졸졸 세상을 읽으면서 흘러간다
콩밭에 콩꼬투리 부풀어 오르고 북향의 솟대는
지난 태풍에도 기울어지지 않고 여전히 꼿꼿이 북향이다
나는 아직도 북향으로 고수레를 하게 하는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와
한 번 월남해버리자 다시는 못가는 어머니 고향인 함흥을 향해 골똘해진다
창이 등에 꽂힌 사슴이 잠시 멈춰 서서 여기서 푹 고꾸라져 무릎 꿇어버릴까
아니면 조금 더 달리다 고꾸라질까 순간 골똘해지는 것처럼 골똘해지는 것이다
10. 오동나무 꽃 편지 / 김왕노
저 꽃 편지
저 가파른 비탈에 선 오동나무가 오늘은 보랏빛 꽃을 피웠다.
뿌리가 아버지의 무덤에 닿아서 아버지가 보낸 기별인진데
친근하게 바라볼 뿐 머지않아 뚝뚝 져서 비탈을 수놓다가
길바닥까지 굴러올 저 오동나무 꽃 문장을 쉽게 읽을 수 없다.
저 꽃 문장에서 말똥 냄새 나는 것 같아 평시의 아버지 꿈
북벌의 말달리자라는 아버지 오래된 말씀 같다.
보랏빛 저 오래된 말씀, 꽃으로 온 말씀, 비탈까지 기어오른 말씀
오동나무 꽃 어법을 모르지만 가만히 바라보면 의미가 닿는 말씀
아버지 말씀, 보랏빛 오동나무 꽃이 피어나면 나도 말 먹이라는 말씀
대초원을 찾아 편자를 갈아주고 방목해 갓 돋는 풀로 말을 살찌우라는 말씀
때 되면 살찐 말로 천군만마를 이루어 북벌의 말달리라는 말씀
오독인지 몰라도 내 나름대로 풀어가는 오동나무 꽃 편지
아직도 우리의 풀꽃, 우리의 새가 울고, 우리의 하늘이 흐르고
우리의 강물이 출렁이는 고구려 옛 땅이나 발해의 수복을 위해
말달리라는 육탈한 아버지의 꼿꼿한 뼈대로 써보냈을 저 꽃 편지
내가 보든 안 보든 저 아찔한 벼랑 위에 세우신 아버지 말씀
소인도 찢지 않고 봉투에도 넣지 않는 저 알몸으로 온 편지
다 읽었는지 못 읽었는지 따지지 않고
때 되면 오동나무 꽃으로 뚝뚝 질 깔끔한 오동나무 꽃 편지
저 가파른 비탈을 올라 나도 오동나무 키와 맞추어 섰을 때야
오동 오동 하면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저 오동나무 꽃 편지
굴러떨어질까 아찔아찔한 순간이 올 때마다 깨달음처럼
조금씩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오동나무가 송이송이 매단 저 보랏빛 문장
봄밤을 보랏빛으로 물들이다가 하나둘 꺼져갈 저 환한 꽃등 편지
아버지가 가까스로 저 비탈에 수복의 깃발처럼 세워주신
세상을 보랏빛으로 물들이고 선 문장
깎아지른 절벽보다 더 깎아지른 아버지 말씀
《현대시학》 2014년 7월호
김왕노 약력
1957년 포항에서 출생.
*1988년 공주교대와 2002년 아주대학교 대학원 졸업.
*199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 <꿈의 체인점>으로 등단.
*시집으로『슬픔도 진화한다』 (천년의 시작, 2002)와 『말달리자 아버지』(천년의시작, 2006),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천년의시작, 2010), 『그리운 파란만장』(천년의시작, 2014)이 있음.
*2006 년 제7 회 박인환 문학상, 2008 년 제3 회 지리산 문학상,
* 2013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문학창작상 등 수상,
*현재 시인축구단 글발 단장, 계간 『시와 경계』 주간.
11. 안개꽃 / 복효근
꽃이라면
안개꽃이고 싶다
장미의 한복판에
부서지는 햇빛이기보다는
그 아름다움을 거드는
안개이고 싶다
나로 하여
네가 아름다울 수 있다면
네 몫의 축복 뒤에서
나는 안개처럼 스러지는
다만 너의 배경이어도 좋다
마침내 너로 하여
나조차 향기로울 수 있다면
어쩌다 한 끈으로 묶여
시드는 목숨을 그렇게
너에게 조금은 빚지고 싶다
12. 입춘 무렵 / 복효근
혼자 살다가, 버티다가
딸내미, 사위들 몰려와서
가재도구 차에 나누어 싣고
앞집 할머니 콜택시 불러 요양병원으로 떠난다
아프면 아프다 진작 말하지
요 모양 요 꼴 되어서
이웃에서 전화하게 만들었느냐고
노모를 타박하는 딸년도
눈시울 뭉개져 아무 말 없는 노인네도
무던하다 생이 그렇다
겨울 지나는 입춘 바람이 맵다
살던 집 둘러보는 노구의 구부러진 그림자를
휘청 담벼락이 받아준다
거기가 요양하는 곳이라면 얼마나 좋으랴만
당신도, 나도 우리도 다 안다
대합실 같은 곳, 대기소 같은 곳
그러나 다행이다
더 요양할 삶이 남아 있지 않다
아무튼 나는
손수 가꾸어 가지런히 다듬어서 주시는 부추와
생도라지와 달래나물을 다시는 못 얻어먹겠구나 싶어서
눈앞이 자꾸 흐려지기도 하였다
《현대시》2015년 3월호
복효근 약력
1962년 남원에서 태어나
1991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버마재비 사랑』『새에 대한 반성문』
『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법』
『목련꽂 브라자』『마늘촛불』이 있고
시선집『어느 대나무의 고백』등이 있다.
편운문학상 신인상.
시와시학상 젋은 시인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