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에서 터의 기(氣)가 유난히 세기로 유명한 인사동 과부골이다.
큰절이 있었다고 해서 큰절골(大寺洞)으로 불리우던 곳이다.
그 기(氣)가 몹시나 세었던 큰절골이다. 큰절이 들어서 그 터의 기를 평(平)하게 만들었다.
공주에게 국가에서 명당(明堂) 길지로 내준 큰절골 이 터다. 그녀는 신혼 때 새 집을 지어 살았다.
독녀혈(獨女穴)로 기가 드센 이 터로 공주는 과부로 살게 된다는 사연을 안고 있는 이곳이다.
조선의 대학자 이율곡은 이 드센 과부골 독녀혈에서 비교적 순탄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 후로는 왕의 아들도 이 터에 별궁을 지어사나 그 역시 힘들고 고단한 생애를 보내야 했다.
최근 예식장과 요정이 자리를 잡고 영업을 하였으나 별 재미를 보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지금은 모텔 두 곳과 SK건설 그리고 주차장 등이 그 터를 깔고 앉아 장사를 하고 있다.

SK건설과 두 모텔 사이 공터는 돋보이게 치장을 하고 있다.
300년 된 거목 회화나무를 중심으로 난간석을 두르고 다양한 석물로 이 터를 장엄하게 가꾸고 있다.
성종 때 예종의 큰 딸 현숙공주가 임사홍의 아들 임광재와 결혼한다.
성종은 현숙공주 부부에게 옛 숭문원 터인 이곳 명당길지를 하사한다.
“제왕의 기운이 서린 곳으로 궁궐을 지을 수 있는 명당자리에 집을 짓는 것은 불가하옵니다.”
신하들은 성종에게 간한다.
“그 땅은 이미 세종이 둘러보고 궁궐을 짓기에 마땅치 않다 하며 버린 곳이었고,
벼락을 맞은 땅이며 독녀혈(獨女穴)로 그 땅에 사는 사람 중 과부되는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감히 다른 마음이 있을 리 없다." 성종이 묻는 말에 임광재의 할아버지 임원준이 말한다.
실제로 조사 결과 이전에 이곳에 살았던 세종의 아들 수춘군이 일찍 죽어 젊은 과부가 나왔으며
나라에 두 번씩이나 빼앗긴 땅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에 성종은 현숙공주 부부로 하여금 그곳에 집을 짓고 살게 한다.
현숙공주와 임광재는 극렬한 반대를 무릎 쓰고 그 터에 집을 짓고 살림을 차린다.
현숙공주는 예종과 안순왕후 한씨 사이에서 태어난 공주이다.
예종의 적통장자인 제안대군을 제치고 왕위에 오른 성종은 제안대군은 물론 예종의 딸인 현숙공주 또한
후대하며 부족한 것이 없도록 각별하게 살펴 주었다. 현숙공주와 성종은 사촌간이 된다.
1494년(성종 25) 현숙공주의 여종인 청옥이 안순왕후에게 공주의 유모 대이(大伊)와 보모 소비(小非),
대이의 아들 이근수 등이 공주의 식사에 비상을 타 독살하려 했다고 아뢰었다.
인혜대비는 크게 놀라 관계자들을 잡아들이고 국문하게 하였으나 뚜렷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성종도 영의정 이극배 등에게 명해 이 사건을 조사하게 하였으나 용의자인 유모 등이 혐의를 부인해
사건은 좀처럼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50여명이 옥에 갇히고 그 중 40여명이
고문을 당해 유모 대이를 비롯한 1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성종과 인혜대비는 이 사건의 배후에 공주의 남편인 임광재가 연루되어 있다고 의심한다.
성종은 도승지를 의금부로 보내 죄인들에게 임광재가 양가집 규수를 첩으로 둔 사건에 대해
아는 것을 이야기하면 풀어주겠다고 회유하였다.
이후 임광재가 양첩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풍천위는 귀양을 가게 된다.
공주의 독살 미수 사건은 공주의 유모 등이 임광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저지른 사건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 사건에 대하여 남편의 외도를 질투한 공주의 자작극이라고 보아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사신이 논평하기를, “임광재(任光載)는 성상께서 총애하여 매일 좌우(左右)에서 모시지 않음이 없었으니,
은사(恩賜)를 계산할 수가 없었다.
공주(公主)는 투기하고 사나워 비복(婢僕)이 임광재(任光載)를 우연히 가까이하면 반드시 손수 장(杖)을 잡고 쳤으며,
임광재를 원망하여 해(害)하기를 도모하였다. 그 유온(乳媼)과 보모(保母)가 항상 직언(直言)하여 규찰하고 책망하니,
드디어 노여움이 쌓이어 죽일 것을 도모하고, 유온(乳媼)이 약(藥)을 넣어 나를 죽일 것을 도모하였다고 무고(誣告)하여,
옥(獄)에 내려 국문하여 다스리도록 하여 장사(杖死)케 하였다.
그 친척(親戚) 및 보모(保母)와 일에 관련되었던 노비(奴婢)로 죄없이 죽은 자가 7, 8인이나 되니,
참혹함을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끝내 비록 자복을 받았다 하더라도 사실(事實)이 애매(曖昧)하니,
이 일과 이덕숭(李德崇)의 옥사[獄]는 가장 뭇사람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하였다.

이 땅에는 이율곡이 집을 짓고 살았다.
과부가 나는 땅에 이율곡과 같은 대학자가 살았다는
풍수상의 이유를 현장 안내문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안내문은 율곡 이후에도 여전히 독녀혈이라는 이름이
전해지는 것은 무슨 까닭도 비교적 쉽고 재미있게 전하고 있다.
현장 안내판은 풍수학자 김두규교수의 책 '내 운을 살려주는
풍수여행'을 인용해 설명한다고 밝히고 있다.
" 영탑산사 학암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독녀혈은 3대에
한 번씩 큰 요동을 치는 자리로써 보이지 않는 큰 구멍이 있다.
그 구멍이란 다름아닌 여인의 자궁을 상징한다. 3대에 한 번씩
요동칠 때마다 불운이 있다. 큰 구멍은 하나의 큰 기둥을
벗삼아 살아야 하기에 그 깊은 구멍에 큰 나무를 심어야 한다.
' 현재 이곳의 큰 회화나무는 바로 그런 까닭에 세워진 것이고
율곡과 같은 대학자는 요행히 3대에 한 번씩 요동치는
그 시기를 비켜셨기 때문에 아무 탈이 없었다는 설명이다."
이 회화나무는 수고 20미터 둘레 3미터 나무나이
300년 추정이라고 이 지역의 설명판은 전한다.
그 절골(寺洞)에는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이
살던 사동궁(寺洞宮)이 있었다.그 의친왕의 삶 역시 순탄치 않았다.
그는 1919년 대동단과 모의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망명을 결정하여
김가진·전협(全協) 등과 함께 33인 명의로 최후의 1인까지 항전을
벌일 것을 강조한 선언서를 준비하고 11월 탈출을 감행하여
압록강을 건너 대한국령 간도의 안동에 도착했으나
일본제국주의 경찰에 붙잡혀 강제 송환되었으며
일제의 도일(渡日)을 거부했고 일제의 삼엄한 감시하에
배일정신(排日精神)을 고수했다.
1950년대에는 서울에서 비교적 유명한 예식장이 있었다.
"이 예식장에서 결혼한 사람들은 이혼하거나 과부가 된다."는
소문에 시달리기도 했다고 한다.
1990년까지는 장안에서 유명한 요정 도원이 자리하였다.
2천년 들어서 요정 도원은 헐리고 그 일대 주차장과 SK건설빌딩이 들어섰다.
아직도 이 독녀혈 과부골 이야기는 이 동네에서는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