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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귀제*
[文 裔문예 11대]1360~ ?[형양공파]
*초휘(初諱)는 회형(淮衡)으로 태종2년 문과급제하여 생원 영산유학 교도로 아들5명과 손자3명까지 문과급재 하여 한집에 9급재가난 명문대가로 명성이 높았다.
영천이씨 대부인과 혼인하여 영천 도동에서 영천북 대전리로 이거하신 대전동 입조이시다.
아들은[종소.귀소.지소.치소.의소]이다.
*생원공 문예묘표 는 9세손 성균생원 碩胄가 撰하다*
*생원공 문예의 묘소*
[文 繼문계 11대] ?[형양공파] *(여기에 나오시는 派祖분들의 기록물은 추후
*생원 문예의 동생으로 3파의 派祖이시다* 보충함)
[文 孫문손 11대] ?[형양공파]
*생원 문예의 막네동생으로 4파의 派祖이시다*
[文 備문비 11대] ?[형양공파]
*이산현감 휘(英)과 청주양씨 대부인의 아들로
문과급제.좌군사정을 지내신 (진위부위공) 5파 派祖
[文 彧문욱 11대] ?[형양공파]
*이산현감을 역임 했고 휘(英)의 둘째 아들로 6파 派祖
증손자 山琨산곤과 山瑚산호 형제는 임란시에 동래에서 적과 싸우다 전사 하셨다.
산곤의 호는 강수요 벼슬은 고령군수를 역임했고 산호는 군기감정을 역임하였고 두분모두
선무원 공신에 올랐다.
산곤의 아들 사관은 참의요 사관의 아들 하필.도 참의.가 증직되고 산호의 아들 사남은 승지요 사남의 아들 성문은 참판.성문의 아들 익주.도 승지.가 증직 됬다.
[亨 之형지 11대] ?[형양공파]
*봉익대부 휘(林)의 동생 휘(浩)의 4세손으로 號는 만호공으로 7파의 派祖이시다.
[希 孫희손 11대] ?[형양공파]
*내시주부公 휘(謙牧)의 둘째아들 휘(次延)의 7세손으로 8파의 派祖이시다.
도사공 휘는 희손이요 벼슬은 의금부 도사이다 공은 조정에 중신으로 벼슬하시다가 낙향 하시여 공은 오직罔僕節義망복절의 를 지키며 고향 영천으로 은퇴하시어 경학에 전념하고 충신행의 로써 자손을 훈회하며 선세 소목을 바로알게 하기위해 세계시를 적어 전하시니 후손들에게 끼치신 공이 위대함이 明德齊家명덕제가 의 공적이 영원히 빛이 났도다.
도사공께서 3남이 있으니 長은 지은이요 次는 효신.次는 지한.이다 지은.은 거우와 구성을
효신은 이인과 이의를 두시나 이인은 무후이고 지한은 호인과 호신이 있고 몆대를 내려가다.지한의 후도 무후이다.
희손의 5대손에는 인헌과 인서가 있고 인헌은 조카 대영.대용.대유.와 함께 의병을 규합하시여 흥해.문천,울산등지에 많은 왜적을 격파하고 연이어 경주성 복성전투에도 참전 하시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도사공 희손의 묘소*
[從 韶종소 12대]1388~ ?[형양공파]*송간선생.인언의 주손으로 생원 문예의 장남*
*字는(가정) 號는(정헌)이요 영산유학교도 (문예)의 장남으로 외3촌 大田公 이보흠 문인으로
1447년 식년 문과급제하여 성균관 학유로 성삼문.박팽년.이개.류성원 등과 동방이시고.
성균관.학유.학록.학정.박사.를 거처 이조좌랑 이후 榮川君守때 향약을 제정해 향서당을 짖고 기문하니 후에 점필제공(김종직)이 공경해 主公의 어뜸이라 하시고 烏川鄭선생님 이라 일컬었다 의성.예천군수.안동진관첨 절제사.함양군수.경연관봉상 사정사성(司成)으로 관직을 끝으로 하고 .이대전공과 단종을 도운 유신으로 계룡산[숙모전]에 배향되었다.
배위는 파평윤씨 尹統 과 영천이씨부인 사이에 태어나신 따님이시다.
사성공 아들은 [이휘.이교.이심]이시다.
*사성공 행장은 이태일이가 쓰고.묘지명은 9세손 매산 重器가.가장은 후손 진소가 쓰다.
*사성공 종소의 묘소 오른쪽 위 배위 파평윤씨 묘소*
(*李甫欽이보흠 1397~1457 자는 경봉.이고 호는 대전.사호는 충장.이다
(玄實)현실의 장남으로 순흥부사로 있을시에 영월 단종을 문후 드리고 금성대군(瑜)유와
단종복위운동 결탁후 격문을 짜다.이 격문을 금성대군의 시녀와 관노가 결탁해 격문을 훔처
한양으로 가던중 풍기군수가 이를 알고 격문을 빼앗아 상경하여 세조께 고변해 금성대군과 이보흠이 참수된다. 참수당시에 이보흠의 동생 보관이 관군몰래 형을 따라가 형이 참수되시자 생질인 종소와 함께 형의 시신을 거두어 고향 대전까지 가져와 아무도 몰래 화남 죽곡 단애에 묘를 지었다.)
(*이보흠의 후손이 바로 임란의병시 우리 호수공 휘하에 있다 경주전투에서 전사하신 李廷芬이정분 이시고 대전공의 동생 이보관의 후손이 창대공 정대임의 휘하 李영근인데 역시 경주전투에서 전사 하셨다.)상세한 기록은 이재태.저에 실려있다.)
*이대전공 이보흠의 유허비*
유허비외각과 경내
[歸 韶귀소 12대]1424~1487[형양공파]
*자는 진옥으로 司成公 종소의 동생으로 문과급제하고 벼슬은 (사헌부 감찰)이시니
바로 이분이 감찰공이시다.
감찰공의 아들은 이주와 이은이시며 이주의 증손자가 성강공 휘得賢이요.
이은의 증손자는 孝存이요 효존의 아들이 원호공 千里이시다.
[至 韶지소 12대] ?[형양공파]
*문종때 문과급제.=교도를 지내셨고 무남1녀로 인한 후는 无后다.
[致 韶치소 12대]?[형양공파]
*생원문예의 넷째아들로 단종2년에 문곽급제하여 벼슬은.감찰부좌랑.이다.
좌랑공의 아들은[이길.이상]이요,이길의 아들은 금.이고 이상의 아들은 (굉과 강)이다 굉의 아들은 인개요 인개의 아들이 복재공 湛이며.강의 아들은 의개와 예개요 의개의 손자가 충효재 碩男.예개의 아들은 光胤.宗윤.熙윤.이시다.
[依 韶의소 12대]?[형양공파]
*좌랑공 치소의 동생으로 형과 합께 동시문과급제하여 성균진사.훈도.역임하다
단종이 폐위되고.외3촌도 참수되니 모든형들과 낙향했다.
훈도공의 아들은 [이숙.]시다.이숙의 아들은 윤담과 윤식이시니 윤담은 용을.용의 아들이 大任이시고 윤식의 손자가 大仁이시다.
[鎭진 8대]1378~1418[감무공파]
*대제학 홍의 아들.시호는 端元 무과에 급제.자헌대부.숭록대부.공조판서를 역임하고
오천부원군에 봉해졌다.
[淵연 8대]1389~1444[감무공파]
*진의 동생.자는 仲深 호는松谷 시호는 貞肅 안평대군의 장인으로 사마시 합격하고 지평.
종부시 소윤.장령.동부대언.형조참판.역임했다.
[保보 13대][형양공파]
*종성의 아들 호는雲谷 학문이 뛰어나 세종에게 총애를 받았고 성삼문.박팽년과 친교가
두터웠고.벼슬은 감찰.
사육신들의 무죄를 주장하다 세조에 알려져 처형의 명이 내려지나 좌우에서 문충공의
손자를 처형하는것이 불가하다는 조신들의 간청에 유배되었다.
[孝 孫효손 9대][감무공파]
*부원군 진의 아들.1454년.계유정난으로 동생 효전이 화를 당하자 연좌되어 아들 維碩은 거제로 유배당해 죽음을 당하고 차남臣碩은 남해.유배됬다 풀려났다.
[孝 順효순 9대][감무공파]
*역시 동생 (全)의 일에 연좌되 진도에 유배되어 풀려났으나.차남錫禮는 첨지를 거쳤으나
가산 몰수형을 당했다.
[孝 康효강 9대]?~1454[감무공파]
*지병조사.형조참의.에 올랐지만 동생의 일과 안평대군의 일로 인하여 보성관에 노비가 되었다가 父子는 교수형.처자는 노비가 되었다.
[孝 完효완 9대][감무공파]
*효강의 동생으로 부사를 지내며 화를 피했다.
[孝 全효전 9대]0000~1453[감무공파]
*홍의 막네손자로 방원의 딸 숙정옹주와 혼인하여 일성군에 봉해졌고.병조판서.삼군 도진무사.등을 지냈으나 단종1년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켜 중신들을 살육하자 病을 핑계해 조정에
나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양대군이 파면하니 公이 집에서 의분을 참지 못하고 피를 토하고
죽었다.
이듬해 죄를 추론당하여 부관참시 당했고.이후 성종때 복원되어 忠景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以 揮이휘 13대]?[형양공파]
*문과 방목에서의 기록은 병술,세조12년 1466년에 고성춘시(高城春試) 2위.로 급제하고,
기해 1479년에 전력(前歷),서령(署令),지평(持平),찰방,등을 역임 했고,父는 鄭從韶, 祖父는 鄭淮衡,증조부는 鄭井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字는 자건.이요 초휘는以恭이고 영천대전동에서 사성공 從韶의 장남이시다 병술(1466년)문과 급제하여 장수도찰방.지평.를 거치며 부공과 4분의 숙부님과 문사를 이루신 점필제공(김종직)과도 교분이 두터워 자주 시문을 주고 받으며 지내셨다.
부공과 숙부님들께서 단종사건때 낙향하여 성종때 다시 벼슬했으나 연산군(무오사화)의 화를 피하여 부공과 숙부님들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배위는 창녕오씨와 춘천박씨이다.
찰방공의 아들은[차순.차성.차근]이요.
[以 橋이교 13대]14??~?[형양공파]=김천문중의 입조=
*字는 子美요 호는 아무리 많은 술을 마셔도 취중의 行이 처음과 같아 자호를 만취당이라 했다 종소의 둘째 아들로 성종조에 문과 중시에 급제하여 한림전랑.장경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교리를 거처 무오사화때 직간하시다 함경남도 함흥으로 유배가셔서 유배지에서 돌아가니.처자는 외가에(김천)로 이거하여살았다.
교리공께서 유배를 가실때 형 이휘와 김종직공이 함께 배웅하는 자리에서 비오는날 누각에 앉아 시문을 지어 주고 받은 것을 문헌과 조선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교리공의 아들은 [공징.공건.공필.공청.공예.공쌍]이시다.
공징은 서윤이요 공건은 첨정.이요 공필은 군수요 공청은 현감.공예는 참봉이다.
공징의 5세손인 통제사 후량과 공필의 아들 좌랑 창무와 증손에 헌납 維藩유번이 있고 공예의 현손에 벼슬이 승지로 계주가 있다.
*대평제*
*비한제*
*교리공(만취당)묘역*
[以 諶이심 13대]?*형양공파*구미 선산문중 입조=
*교리공 이교의 동생으로 字는 려경.초휘는 而得이요. 號는 (魯山)노산이며 중형과 함께 문과급제하여 통훈대부.사헌부 지평.하시고 있었으나 백형은 낙향하고 중형이 함흥으로 유배길에 오르니 또한 벼슬을 버리고 화를 피해 낙향하여 고향 대전을 떠나 사시다 돌아가시니 어디에 묘소가 마련됬는지 후손들이 잘모르며 다만 중형 자리 옆이라하고 또한 포은선조와 가까운 곳에 있다 전하나 확실한것은 모른다.
지평공의 아들은 [공준.공형이시고 공준의 아들은 원문.인문.응문이요
공형의 아들은 원충]이시고. 후손에 참판.석용이 있다.
그러나 최근에 영천문중.김천문중에서 함께 힘써 찾았다고 전한다.
[洵순 10대]1456~1527 [감무공파]
자는 老泉.병조판서 휘 淵의 손자.(自叔)의 아들로 성종8년에 진사가 되고 음직으로 지평.1510년 식년 문과에 급제해 광주목사.판결사.첨지중추부사를 거쳤다.
[浣완 11대]1473~1521[감무공파]
淵의 증손 溱의 아들로 字는 新之요 號는 (謙齋)겸재 조선의 문신으로 남효온과 함께 학문을 닦다가 연산(갑자사화)로 영천으로 유배.중종반정으로 풀려나 벼슬은 능참봉.공조 호조정랑 을 지냈다.
[允 湜윤식 15대]1513~1569[형양공파]
字는 언호.이숙의 아들로 8.9세에 경서와 사기를 외웠고 명종때 진사.국자상상.으로 진안현감.때 송사가 있으면 한번 단정을 하면 번복하는 일이 없었고 백성을 사랑하여 자식과 같이하여 농사를 권하고 학풍을 일어켜 향약을 정하여 향음주레를 행하여 예절을 가르키니 교화가 크고 뻗혀 풍속이 순화 되었다 또 봉화현감으로 나가 선정을 베푸니 백성들이 어버이와 같이 섬기니 명성을 전해들은 임금께서 궁궐로 불러 어전에 들어 섰을때 임금께서''어찌 경의 얼굴이 그렇게 단정한가 하시고 公의 손목을 잡았기에 公은 ''평생동안 그 손목에 비단을 감고 다녔다한다.이분이 바로 임란의병이신 대인의 조부 이시다.
[允 良윤량 15대]1515~1580[형양공파]
字는 元佐고 호는 魯村이요 次謹의 장남으로 퇴계선생 문하에서 수학하고 성리학을 탐구했으며 공자를 추앙하여 동네 명칭을 노항으로 고치고 자호를 노촌이라했다.
퇴계의 동문 문하생으로 (明山 金應生)명산 김응생과 서당을 지어 자양서당이라 현판걸고 朱子를 추모하여 후진교육에 힘쓰고 (小庵 盧遂)소암 노수.명산 김응생과 함께 (圃隱)포은선생 고향 부래산 고천리 아래 집을지어 太學의 제도와 같이하니 퇴계선생에게 (廟宇)묘우의 (額)액을 청하여 (學規)학규를 정하니 이것이 바로 (임고서원)의 발상이 되었다.
또한 公이 어린나이에도 정성을 다하여 부모에게 효도하니 향인들이 정효자라 칭했다.
公이 어린나이에 父公께서 돌아가시니 노승 설학대사가 정효자에게 묘자리를 점지해준 자리가 바로 청룡백호가 세겹으로 둘려진 자리인 영천 자양 선곡리에 있는 그 유명한 (하천제)이다.
동생은 允恭으로 벼슬이 봉사 이시니 봉사공이시며. 노촌공의 아버지는 선무랑 차근이고 어머니는 벽진이씨다 윤량의 배위는 영천최씨 최봉사德琴의 따님이요 후처도 역시 덕금의 딸이시다. 아들은 본부인에는 世雅요 후부인에게는 만수와 영수 이다.
*노촌공 묘지명 병서는 세마/이광정.쓰다.
*하천제입구*
*하천제숲*
*하천제*
[世 弘세홍 14대]1503~1553[형양공파]
자는 의백이고 사정 문비의 증손으로 문장이 통달한 큰선비로 회재 이언적선생과 친교했고 흥해훈도에 천거되어 후진양성에 힘쓰고 사후에 유림의 추천으로 승의랑에 제수되어 1555년 신령현감 금계 황준량이 지언 비문에 "휼륭한 군자로 아름다운 이름이 빛이나니 벼슬은 뜻이 없고 덕망은 높은 소리 진동하네" 하고 찬양하였다.
[仁 契 인개 15대]1522~1590
자는 원직 훈도 굉의 아들로 1556년 별시무과 급제 훈련원 직장.참봉.동부주부.사헌부 감찰 . 정의현령.1579년 다시 감찰이 되었다.
성품이 엄정하고 법도가 있었으며 사람들이 관후장사라 불렸다한다.
[王居 거 15대]?[형양공파]
字는 公路로 승의랑 흥해훈도 세홍의 아들로 1549년 생원되고 임고서원을 창건시에 윤량.노수. 김응생.등이 사당을 지어 예와 의를 가르치고 효자리 비각을 세움에 公은 발문을 쓰 게판했다.
[暻 禧경 희 16대]?~1592[형양공파]
호는 설천.으로 직장 차순의 손자로 벼슬은 어모장군이며 회재선생 이언적의 문하에 올라 지결을 들었다.
[世 雅 세 아 16대]1535~1612[형양공파]*임란영천의병장*조선의 학자,큰 문신 선비*
*字는 (和叔)화숙 號는 湖수.요 노촌공 윤량의 장남으로 영천 노항에서 태어나 퇴계선생 이황의 문인으로명종13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진사가 되어 나라의 의논이 어지러움을 걱정하여 요승 (普雨)보우를 처단하도록 상소를 올려 몰아냈고 평생을 벼슬에 관심이 없었고 일생을 자양 산장에 (江湖精舍)강호정사를 지어 오직 학문에만 힘셨다.
선조대왕 원년 임란1592년4월13일 왜놈이 바다건너와 조선을 노락질하니 公이 책을 덮고 친히 아들 의번과 안번으로 격문을 짖게하여 의병을 소집하니 모두들이 병서에 밝고 학문의 덕망이 높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여 영천성과 경주성을 복성하고도 (賞)상을 의논할때는 공훈을 모두 남에게 모두 나누어 주시고 公은 부모의 나라가 위태로울때 백성된 자가 당연히 해야할 도리 이니 상을 받으려 한일이 아니다 하시고 받지 않았다.
(芝山)지산선생.항봉선생.등이 조정에 정세아의 공상을 올리니 나라님은 누차에 걸처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시고 나가지 않았다. 이러한 일과 높은 학문의 덕망을 전해들은 오리 이원익공이 친히 천리먼 한양에서 영천 강호정에 찾아와 나라의 존망의 일을 해결할 업을 논하여 상경하여 천거하여 公이 이원익 대감의 청을 이기지 못해 잠시 황산도 찰방을 역임할때 선정을 배푸니 백성들이 선정비를 세웠다.
자호정사에 돌아와 임란때 유실된 임고서원을 다시짖고 허물어진 인심을 다스려 예를 숭상하여 향풍을 바로잡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그의 덕을 따라 안전하게 되었다.
公은 (朱子書節要)주자서절요를 즐겨읽었고 주자학에 깊이 연구하여 밝았으니 당대의 선비 들 [금계 황준량][창석 이준][노계 박인로][지산 조호익][여헌 장현광][모당 손처눌]등등 의 학자들이 노항 강호정에 자주찾아와 公에게 학론하시고 배워갔다.
公이 돌아가시고도 ''창석''선생께서 **호수노인을 사모하여 강호정에 찾아와 아쉬운정을 시를 지어 남기니..[정(호수)노인 노닐던 곳에 푸른 절벽에 파란 이끼 끼었도다. 봄바람은 옛 벗의 눈물인데 저녁 나절에 홀로 대에 올랐다 가노라!]**창석 이준1560~1635 자는 화평 호는 창석 류성룡의 문인으로 조선의 대학자''이시의 구절만 보더라도 호수선생의 높은 자질을 알겠도다.또한 여헌 장현광이 지은 제문에 ''[아~公께서 사람됨이 어찌 가히 이 세상에서 쉽게 얻을수가 있겠나이까? 현광이 이곳을 왕래함에 일찌기 여러차례 문안을 드리고 공경을 드렸는데. 공은 또한 술병을 가지고 술잔을 건네면서(하석지문)에 취하기도 하였는데 그 담소 하는 즈음에 가만히 생각하니 감동해 느낀바가 많은 것이 있겠더니 이제는 다~끝이 났구나!
높은 인품과 정성스러운 모습 뇌란한 말씀을 다시는 접할수가 없겠도다. 아~슬프고 슬푸도다 친구와 함께 감히 술과 찬을 차려 치전을 올려 조그마한 정성을 이루 나이다.]씀. 후에 막네아들 호군공(수번)이 귀하게 되어 시호를 (剛義)강의 라는 시호와 신도비가 내려지고 불천위에 봉안을 받았다.公의 배우는 일직손씨 손모당의 고모님 이시다.
아들은 의번.유번.안번.수번.이시다.
*호수선생 강의공 신도비명.은 영의정/조현명.이 묘지명 병서는 좌의정/송인명이 짓고.쓰다.
*강호정 외각*
[大 任대임 16대]1553~1594.6월[형양공파]
*자는 중경이고 호는 창대 훈도공의 손자 용과 증 참판 김응생의 따님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
종조부 윤식에게 글을 배웠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대장으로(倡義精勇軍)창의정용군 이라는 깃발을 들고 엄한4개의 군율을 세워 영천성을 복성시 왜장(유한법화)등의 수천명을 섬멸하고 당지산 전투에서도 많은 공을세웠으며 경주전투.울산 태화강 전투에 종일 역전하여 공을 세우고 1593년 예천군수.경상도 병마우후를 역임하며 병을으로 낙향하여 임종 직전에 아들을 불러 전란일기와 실기등 모두 불사르게 하고 별세하시니 그 또한 공의 뜻을 알겠도다.
선무원종공신2등훈에 책록되고 사후에 가선대부,호조참판이 증직되었고.창대서원에 봉안되어 제향되고 있으며 [팔공산 회맹시]가 강인한 공의 기상을 전하고 있다.
*창대서원
*창대고택*
[大 仁대인 16대]1554~1619[형양공파]
*현감 윤식의 손자요 자는 영중.이며 재종형 대임을 따라 창의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고 벼슬은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중추원을 지냈다.
[三 畏삼외 16대]1547~1615[형양공파]
자는 덕경이요 호는 망모당으로 통덕랑 유의 아들로 여헌 장현광의 문사로 임란이 일어나자 동생(三戒)삼계와 함께의병을 일어켜 영천전투.경주전투에도 참가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정유재란때도 곽재우 장군 진영에 들어가 수성에 공을 세워 군자감 주부에 제수되고 사림의 청계로 증 병조참판의 증직이 내려졌다.
[滋자]1515~1547[감무공파]
조선의 문신으로 자는 (敏古)민고.호는(淸莎)청사 판관 (惟沈)유침의 아들로 송강 정철의 형이다.1540년에 진사.1544년 정언.다음해에 이조정랑.을사사화때 대윤인 윤임의 처남이라하여 소윤에 의해 광양으로 유배.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에 또다시 연류되어 경원으로 이배 도중에 별세했다.
[澈철]1536~1593[감무공파]
조선의 문신.시인.자는 (季涵)계함 호는 松江이니 판관 유침의 아들.기대승.김인후.양응정의 문인이요.어려서 인종임금의 귀인이신 맏누나와 계림군 유의 부인이 된 둘째누나 때문에 자주 궁중에 출입하여 어린 경원대군과 친숙했다.
1545년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관련되자 그 일족으로 父公이 유배 갈때 배소에 부공을 따라 다녔다 1551년 특사로 풀려나자 온가족이 장평으로 이주하여 여기서 김윤제의 문하가 되어 성산 기슭의 松江송강가에서 10년동안 수학하는 동안 기대승.등 당대의 석학들에게 師事 하여 이이.성혼등과도 교유했다.
1561년 진사시.다음해에 별시문과에 각각 장원하여 지평.전적.등을 역임하고 1566년 직장. 헌납.지평.을 거처 함경도 암행어사를 지낸뒤 이이와 함께 (賜暇讀書)사가독서 했다.
1568년 선조1년에 수찬.교리.지평.1575년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그러나1578년에 장악원정으로 기용됬고 사간.집의.직제학.승지에 올랐을때 진도 군수 李銖 가 뇌물사건에 동인들의 공격을 받자 사직하고 낙향.
1580년 강원도 관찰사로 등용.되어 강원도.전라도.함경도의 관찰사로 지내며 드디어 한사람의 시인으로 그의 천재적인 재질을 나타낸 작품들을 솠아냈다.[관동별곡][금강산][관동팔경]등 두루 산수를 노래하고 고사 풍속을 그려낸[훈민가]등의 16수는 백성을 교화함에 있어 포고문이나 유신문을 대신해 시조로 지어냈다.
[훈 민 가]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풀어 나를 주오
나는 젊멋거니 돌이라도 무거울가?
늙기도 서러워 하건데
짐을 조차 지실까.] 송강 정철
1583년 얘조참판.형조와 예조판서.1584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동인의 論斥논척 으로 도다시
사직 낙향.고향에서[사미인곡.속미인곡.성상별곡]등 많은 가사를 지었다.
1589년 우의정으로 발탁되자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다스리게 되니 서인의 영수로서 철저하게
동인들을 추방했고 1590년에 좌의정에 올라 建儲問題건저문제를 제기해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와 같이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하나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의 책봉을 건의했다 이때 선조임금은 신성군을 생각하고 있던 선조의 노여움에 파직 당하고 진주로 유배되어 다시 강계로 이배 된다.
1592년 임란이 일어나 부름을 받고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며 왜놈이 평양 이남에 머무루고 있을시에 경기.충청.전라도.체찰사를 지내고 다음해에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또다시 동인들이 모함하기에 사직.강화도의 송정촌에 우거 하며 만년을 보내며 당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고산.유선도와 더불어 조선의 시가사상 쌍벽으로 일커렸다.
**동인과 서인의 당파 싸움에 어지러운 이때 바로 오리 이원익 대감이 노항 호수공을 찾으려가며 지은 시가 바로이때다..[관산 달을 바라보고 통곡하며 압록강 바람에 상심하는 도다. 조신들이여~ 오늘 이후에도 동인이니.서인이라 하겠는가?].하는 유명한 시조이다.
송강 정철은 사후에 복원되어 창평 송강서원.연일 오천서원 별사에 제향되고 시호를 文淸이라 받았다.
[湛 담 16대]1552~1634[형양공파]
자는 청운.이며 호는 복재.요 감찰 인개의 둘째아들로 한강.정구와 지산.조호익의 문인이다.
1585년 식년.사마시/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조정에 천거되어 주부의 제수가 내렸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족형 세아 진영의 족제 대임의 군영에서 찬획종사로 휼륭히 진도지휘 하여 많은 공을 세웠고 왜적이 두려워 도망하여 돌아와 公이 세운 계책을 보고 중국의 제갈공명도 이보다 나을리 없다 하고 감탄하였다 한다.
영천성과 경주성. 복성의 공으로 승훈랑.직첩과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일생을 학문 연구에만 힘쓰시다.
[千 里천리 17대]1548~1609[형양공파
초휘는 찬.이요 字는 양지.호는 원호.이며 감찰공.귀소의 둘째아들 이은의 증손자로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 하여 천리로 개명했다고 전한다.
선조대왕때 무과에 급제하여 첨정에 역임하다 임란이 일어나자 족숙 세아.대임.담과 더불어
영천의병에 참가하여 당지산 전투.박연 전투에서 적을 무수히 무찌르고 7월27일 영천 복성전에는 화공할 준비를 하여 의성 감사졸500명을 거느리고 마현산에 잡복했다가 진영의 신호에따라 바람을 이용하여 성중에 불을 지르니 적들은 혼란에 빠지고 이를 틈타 영천의진 군영의
일재공격에 복성했다.
이어 경산.자인.경주의 적들을 수없이 무찔렀다 그 공훈으로 훈련원 주부가 되고 원종훈3등에 기록되고 사후에 영천 백의사에 제향되었다.
[仁 獻인헌 16대]1532~1613[형양공파]
자는 사전.호는 사의.의금부 도사 希孫희손의 5대손으로 호조참판 嗣周사주의 아들로 추곡리 에서 출생하여 어릴때 흥해 동부리에서 자라나며 성품이 영명하며 학문을 좋아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흥해에서 분개하여 향인 (이열).족제/삼외와 동생 仁恕인서의 아들 대영.대용.대유.와 영일의사 김현룡등과 합세하여 형산강에서 적을 참살했다.
연이어 문천으로 진을 옮기고 언양에서 올라오는 적을 금오산 기슭에 매복해 활과 돌로 적을 겪파하기도 했으며 영천성 전투.경주성.악견산성.울산 도산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우고 아울러 망우당 곽재우와 창의하여 용사세강록.문천회맹록.팔공산회맹록.등에 실려 있고 훈공으로 계공랑 군자감 직장에 올랐고 전란이 평정되자 사이정을 지어 여생을 보내고 사후엔 승정원 좌승지.겸 경연참관에 추증됬다.
[以 常이상 13대]?[형양공파]
자는 자경으로 좌랑공 치소의 아들로 1474년 성균생원이 되고 생졸의 기록이 없고 묘는
영천시 청통면 계지리에 있고 산아래 지강재가 있다.
[次 諄차순 14대]?[형양공파]
자는 (和補)화보 호는 沙皐사고 이며 목사공 이휘의 장남으로 벼슬은 직장으로 화남면 사천리의 입향조 이시며 문헌으로는 4세단비문.완의좌목이 있고 묘는 방학산이다.
[次 誠차성 14대]?[형양공파]
호는 華隱화은이요 차순의 동생으로 능계 입향조로 천성의 자태가 효도하고 우애하며 식견이 높고 밝았다 전하며 벼슬은 찰방을 지냈다.
묘는 신녕 대양곡 이고 지금도 산아래 지나는 사람마다 큰 어른의 산소라 명명한다.
[次 謹차근 14대]14.. ~15..[형양공파]
자는 신보요 선무랑충순위로 5남1녀중 창녕오씨 소생인 차함.차성.차순.이고 춘천박씨 소생은 차성.차근 이다 오씨 소생인 차함과 차성은 어릴때 일찍 돌아가시고 목사공과 오씨께서 차성을 자식중 가장 사랑하여 박씨 소생인 차성을 오씨 손에 자랐고 차근은 박씨손에 대전동에서 태어나 자랐으나 연산군 무오사화의 (禍)화를 피해 1498년 자양면 누루목(노항) 현재 자양면으로 이거하신 자양의 입향조 이시며 배위는 벽진이씨요 아들은 윤량과 윤공이시다.
*선무랑공 차근의 묘소*
[召宏 굉14대]1492~1528[형양공파]
자는 굉지.이고 좌랑공 아들 생원 이상의 장남으로 영일훈도를 지냈다.
[石工 강14대]
굉의 동생으로 벼슬은 참봉이고 증손 신도의 고귀함으로 증직이 좌통례이다.
형과 함께 묘는 북안면 금오산이다.
[三 戒삼계 16대]1556~1622
자는 덕신.으로 통정대부 瑜유의 아들로 백형 삼외를 따라 종형제 삼빙.삼호와 함께 창의하여 안강전투.언양.영천.경주전투에 공을 세웠고 팔공산.화왕산회맹에 참전했다.
선무원종공2등훈에 녹훈되었다.
[三 顧삼고 16대]1557~
자는 덕계.호는 만포로 지평 침의 아들로 흥해 동부리에서 출생하고 음직으로 사재감정에 이르렀다 종형제/삼외.삼계.와 더불어 임란창의 하여 종형들과 함께 전투에서 많은 수성의 공을 세우고 전란이 평정되고 선무공으로 가선대부 동지의금부사에 제수되었다.
[四 震사진 17대]1567~?
자;군섭.호;수암.사정공 문비의 5대손으로 공조정랑 삼변의 아들로 임고면 우항리에서 출생하여 여헌 장선생 문하로 임진왜란때 창의하여.영천 원당리 단석산에 잠복하여 적을 참하고.경주.전투에도 공을 세우고 팔공산회맹과 정유유란시 화왕산회맹에도 참가하여 전공을 거두고
선무원종공3등에 녹훈되었다.
첫댓글 기구한 운명을 보낸 선조님들이 의외로 많군요. 저희와 감무공파를 구분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원보님! 8파 파조이신 도사공(휘 희손)께서는 포은 선조님과 같은 시대의 분으로 포은선생의 순국과 아래 형제 휘 과(過), 휘 도(蹈) 두 분의 순절을 보시고, 고향인 영천으로 은퇴하여 망복의 절의를 지키기 위해서 삼대(三代)에 걸쳐 조선조(朝鮮朝)에서 벼슬을 하지 않았습니다. 단종 폐위 때 낙향하셨다는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래 내용에 누가 누구를 데리고 창의를 하였다는 것인지 구분이 안됩니다. “인헌과”를 → “인헌은”으로 고쳐야 될 것 같습니다.
"지은.은 거부와 구성을"에서도 거부가 아니고 거우(居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