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로부터 시작된 영적 부흥운동
에스라 9:1-15
인류 역사에서 오늘처럼 풍요로운 삶을 누렸던 때는 없었을 것입니다. IT로 불리는 최첨단 기술의 발달로 오늘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지금까지의 인류 세대가 누려보지 못한 문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낙심해 하고 있습니다. 쓸쓸함과 외로움으로 지쳐 있습니다. 그 영혼이 딱딱한 시멘트 벽 안에 갇힌 것처럼 시들어가고 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말할 수 없는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서 끝없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현대인들이 방황을 끝내는 길은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때문에 모든 인생들이 불러야 할 영원한 생명의 노래가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딱딱한 시멘트 벽 안에 갇혀 있는 우리의 영혼이 풍성함을 얻고 참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어떤 고난 앞에서도, 어떤 절망의 순간에도, 어떤 낙심의 순간에도, 어떤 무너지는 순간에도, 설령 육체의 질병으로 내가 송두리째 무너지는 그 순간에도 우리의 소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어떤 절망의 늪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희망의 돌을 캐십시오.
어거스틴이 쓴 책 가운데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410년에 로마제국은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을 당합니다. 지중해 건너편에서 이 소식을 듣게 된 어거스틴은 큰 충격을 받고 413년에 이 책을 쓰기 시작해서 426년, 그러니까 어거스틴이 죽기 4년 전에 완성을 합니다. 무려 13년간에 걸쳐서 쓴 대작입니다. 당시 기독교 신앙이 없었던 많은 이방인들은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수용한 이후에 이와 같은 멸망의 시기를 겪었다는 것은 로마제국이 이방 신들을 버렸기 때문이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에 대한 가장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답변을 시도한 것이 바로 어거스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책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어거스틴은 당시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였지만 실상 로마제국은 가장 세속적인 지상의 도성이었음을 증언합니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도성과 세속적인 지상의 도시를 구별하는 중요한 기준점은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멸시하기까지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집착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도시가 바로 지상의 도시였습니다. 반면에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에 의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고 하나님만을 높이는 도시가 바로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이 책에서 거대한 로마제국이 망했던 원인은 당시 제국에 성행하고 있었던 우상숭배와 로마인들의 교만이었다고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도성」 제7권과 제9권에 보면, 하나님이 아닌 자연을 숭배하고 있었던 자연신앙과 마귀 숭배 사상이야말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혼잡하게 만듦으로서 로마를 타락시킨 가장 중요한 퇴폐적인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사랑, 자기 교만, 그리고 자기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불의가 득세하던 도성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시대에도 종교적 세속화를 조심해야 합니다. 복음의 절대성이 아닌 상대화시킴으로써 신앙의 영역을 모호하게 만들려고 하는 세속주의적 신앙을 거부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와 여러분이 이러한 세속주의적 신앙에 이미 상당 부분 오염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이제 드디어 시온의 땅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도착한 에스라를 놀라게 했던 사실은 지나간 날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그들을 바벨론 포로가 되게 했던 동일한 죄악이 예루살렘에 그대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 죄는 당시의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인들과 소위 잡혼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상숭배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의 저속한 음행을 그대로 따라하면서 타락하고 있었습니다. 거룩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한 이방인들과 뒤섞이면서 철저하게 세속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거룩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그것을 에스라는 가증한 죄라고 본문을 통해서 꾸짖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채찍으로 들어 이스라엘을 망하게 했던 그 죄악의 수렁에 처박혀 영적 황무지가 된 시온의 땅 예루살렘의 민낯을 바라보아야만 했던 에스라가 취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우상숭배와 저속한 음행으로 또 다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에 직면해 있는 예루살렘, 탈출구조차 보이지 않는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에스라가 생각했던 유일한 처방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회개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회개만이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우리가 읽었던 에스라 9장 전체는 민족을 대신해서 에스라가 회개의 기도를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의 회개가 이스라엘 민족을 살리는 거룩한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시대, 우리나라의 모습이 에스라가 통회하며 바라보아야 했던 당시의 상황과 전혀 다르다고 할 수가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에스라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더 이기적이고, 더 세속적이고, 더 타락한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 민족을 살리기 위해서, 아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를 살리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가정과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참된 회개는 어떻게 시작되어야 할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인적 응답입니다.
본문의 4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가 사로잡혔던 이 사람들의 죄 때문에 다 내게로 모여오더라 내가 저녁 제사 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앉았더니.”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적 회개의 시작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인적 반응으로부터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여기에서 전인적이라는 말은 언제나 인격의 지식, 감정, 의지라는 세 가지 요소가 포함이 됩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알고, 그것을 온 몸으로 느끼고, 거기에 응답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알고, 느끼고, 결단하는 반응을 가리켜서 우리는 전인적 반응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일찍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들을 숭배하고 이방인들과 관계를 가지면서 저속한 음행을 그대로 따라 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했습니다. 그와 같은 그들의 죄악 때문에 바벨론에 넘겨져 죽임과 약탈과 포로생활과 공개적인 수치를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조상 때로부터 지금까지 죄의 수렁에서 빠져 나오지를 못했습니다. 조상들이 지었던 그 죄의 모습들을 그대로 행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온의 땅 예루살렘에 돌아온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와 같은 타락의 모습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스라를 비롯한 일부의 백성들이 기가 막혀 주저앉았다고 말합니다. 지금 이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거룩한 근심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본문 5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 근심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이 근심은 거룩한 근심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근심을 두 가지의 근심으로 구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 근심입니다. 이것은 결코 우리를 유익하지 못하게 하는 근심입니다. 이러한 근심은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이러한 근심은 우리의 뼈를 마르게 합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를 좌절시키고, 우리를 더 타락시키고, 우리를 더 낙심시키게 합니다. 그러나 세상 근심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근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이 근심은 우리에게 참으로 유익한 근심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근심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고린도후서 7장 10절의 하나님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세상 근심은 전혀 유익하지 못한 근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하나님의 뜻대로 온전히 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것 때문에 근심하는 근심은 참으로 우리들에게 필요한 근심입니다. 그와 같은 근심은 거룩한 근심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나를 살리는 근심입니다. 내 영혼을 풍성하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근심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런 근심을 해 보셨습니까?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가운데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대대로 살지를 못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워하는 근심 말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근심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 3절이 그 증거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그렇다고 근심하기 위해서 반드시 속옷과 겉옷을 다 찢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수염을 뜯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우리가 갖는 회개의 표현은 그 시대마다, 문화마다 다를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가 처음 이 땅에 들어왔을 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회개하는 표현으로 이런 말을 많이 썼습니다. “나는 그때 뒷동산에 올라가서 나무뿌리를 뽑으며 회개하며 기도했다.” 그래서 옛날 신앙의 선배들은 산에 올라가서 나무뿌리를 뽑으며 기도했던 적이 있습니다. 저도 그랬던 경험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 여름 수련회를 가면 전도사님과 선생님들이 저녁 산상기도를 하게 하면서 산 속에 들어가서 나무뿌리가 뽑힐 정도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오늘 산에 올라가서 나무뿌리를 뽑으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의 문화적 표현에 불과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전인격적으로 진지하게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지적하고 있는 죄 문제에 대한 거룩한 슬픔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에스라는 느헤미야와 같은 시대의 사람입니다. 에스라가 먼저 오고, 조금 있다가 느헤미야가 등장을 합니다. 그런데 느헤미야 8장에 보면, 에스라를 통해서 본격적으로 영적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 사실을 증언하고 있는 느헤미야 8장 8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에스라가 말씀을 선포했을 때 백성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이어지는 9절이 그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9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그러니까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인적인 반응을 합니다. 그래서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가슴이 찔리고, 통곡하고, 눈물을 쏟으며 회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서 성경적인 회개가 시작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말씀 앞에 보여주는 온 마음을 다하는 전인적인 반응입니다. 그리고 참된 회개는 그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회개는 단순히 “지금 내가 잘못했어”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의 전 존재를 던지는 인격적인 반응에서부터 진지한 회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와 같은 전인적인 반응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 앞에 자신의 전 존재를 비추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내 혼과 영과 골수를 쪼개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때 에스라의 민족을 살렸던 회개 기도는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두 번째는, 예배를 통한 공동체의 공개적인 응답으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지나간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한 역사 속에 거대한 영향을 끼치는 영적 부흥이 일어났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그냥 ‘영적 부흥’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때로는 ‘영적 대각성’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영적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는 때를 보면, 그 한 복판에 누군가가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사건이 항상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1907년에 평양에서 일어났던 평양대부훙운동입니다.
1910년은 역사상 우리 민족이 가장 힘들었던 한 해였습니다. 그 해에 우리나라는 일본의 강압으로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는 ‘한일강제병합조약’을 체결해야만 했습니다. 일본으로부터 강제로 나라의 주권을 빼앗김으로써 남은 것이라고는 비탄과 절망뿐이었던 당시의 백성들은 무엇이든지 손에 닿기만 하면 그것을 붙잡아야 했던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처럼 민족사에서 가장 처참하고 암울한 시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하나님은 이 땅에 거대한 영적 부흥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식민지 시대의 어두움을 견디게 만드는 중요한 준비였을는지도 모릅니다. 교회마다 회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는 거룩해졌습니다. 그 교회에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장차 한국 기독교를 만드는 위대한 한 해가 바로 1907년이었습니다.
정확하게 평양대부흥운동은 1907년이 시작되는 1월 2일부터 15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평안남도 겨울남자도사경회’가 열렸습니다. 그러니까 한국교회의 부흥회는 오늘처럼 감정적인 그런 부흥회가 아니라 사경회였습니다. 사경회라는 말은 성경을 공부하는 모임이라는 말입니다. 이 사경회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영적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평양대부흥운동의 중심에는 길선주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때 당시 길선주 목사님은 장로였습니다. 집회가 마쳐 가는 14일 저녁 길선주 목사님은 설교를 하는 도중에 갑자기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설교를 하는 도중에 마룻바닥에 엎드려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이 축복을 우리에게 주실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내 친구가 죽어가며 아내 대신 재산을 정리해 달라고 맡긴 돈 100달러를 제 마음대로 가로챘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해 온 사람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 공동체를 축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일 아침 나는 그 돈을 미망인에게 돌려드리겠습니다. 오 주님, 그리고 여러분!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의 회개가 고백되는 바로 그 순간, 길선주 목사님의 회개는 마치 뇌관에 불을 붙인 것처럼 청중들 가운데 갑자기 강력한 성령의 임재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일어나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온 교회는 회개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날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났던 회개운동은 마치 전염병처럼 주변의 교회로, 주변의 교회에서 또 다른 주변의 교회로, 그리고 그 다음 도시로 옮겨가기 시작했습니다. 온 삼천리강산을 휩쓴 진정한 회개운동의 시작을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에스라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날마다 드리는 제사가 있었는데, 그 제사를 상번제라고 했습니다. 이 상번제는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아침 제사와 저녁 제사입니다. 아침 제사는 혼자 드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두 세 사람이 드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녁제사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와서 드리는 일종의 공개적인 집회의 특성을 갖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저녁이라는 시간은 하루의 마무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저녁은 새로운 내일의 출발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이런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그러니까 아침이 되고 그 아침이 저물어 저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안식일을 말할 때 그 안식일은 토요일입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말하면 안식일의 시작은 금요일 저녁입니다. 금요일 저녁부터 시작해서 토요일에 안식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금요일 저녁이 안식일을 준비하는 저녁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저녁은 하루에 대한 단순한 마무리가 아니라 내일이라는 새로운 날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녁 제사가 중요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5절과 6절에 보면, 바로 이 저녁 제사에서 지도자 에스라에 공개적인 참회가 시작이 됩니다. 5절과 6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민족의 영적 대각성운동의 진정성은 한 사람의 회개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한 지도자, 혹은 누군가 한 사람의 진지한 회개에서부터 온 민족을 회개시키는 거대한 운동으로 확산되는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참된 부흥은 다수의 군중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전인적인 반응을 하는 한 두 사람의 회개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우리는 모든 세상이 다 변해야 부흥이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부흥은 언제나 한 두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도 우리의 예배가 진정한 부흥의 현장이 되려면 그냥 와서 예배를 드리고 가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전인격적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 앞에 드러난 자신의 죄를 바라보며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가 진정한 회개를 시작하는 바로 그 자리가 부흥의 자리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한 사람의 회개가 한 공동체를 살리고, 한 민족을 살리는 놀라운 영적 대각성 운동의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내가 살면 내 가정이 삽니다. 내가 살면 우리 교회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살아나면 우리 민족도 살아날 것입니다. 누군가 한 사람의 진지한 회개가 바로 우리를 살리는 부흥의 거룩한 씨앗이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에스라 시대의 부흥은 바로 그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에스라의 회개 운동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보십시오.
그것은 세 번째로, 남은 자들에 대한 긍휼을 구하는 기도로 이어집니다.
본문 15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니 우리가 남아 피한 것이 오늘날과 같사옵거늘 도리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이로 말미암아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하니라.”
여기에 보면 “남아 피한”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이것은 그 동안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도,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 가운데서도 환난을 피해 남아 있는 자들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남아 있는 자들이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 될 것을 기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목적 때문에 그들을 남겨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남아 있는 자들조차도 범죄했습니다. 남아 있는 자들조차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를 못했습니다. 문제는 남아 있는 자들조차도 하나님을 실망시키고 있다면 어디에서 역사의 희망을 찾아야 할까요?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면서 중요하게 붙잡아야 할 사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남은 자 사상’입니다. 여기에서 ‘남은 자들’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역사에 그루터기와 같은 자들을 가리킵니다. 아무리 나뭇가지를 다 잘라버렸어도 그루터기가 살아 있으면 그 나무는 다시 살아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든 그 시대가 아무리 부패하고 어두워져도 남은 자들을 남겨두십니다. 그리고 그 남은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부흥을 가져오게 하십니다.
스바냐 3장 12절과 13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네 가운데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거짓된 혀가 없으며 먹고 누울지라도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
이것이 바로 남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에스라가 왜 탄식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목적을 위해서 보호하고 남겨두신 자들마저 부패하고, 악을 행하고, 거짓을 행한다면 우리의 역사에 희망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남은 자 사상이 처음 등장한 것이 노아 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 시대에 죄악이 가득한 세상을 홍수로 깨끗이 심판하십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자들이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었습니다. 창세기 7장 23절에 보면 이런 표현이 등장합니다.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 성경을 읽어보면 여기에서 처음으로 ‘남은 자’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께서 노아의 방주 속에 들어가 있던 사람들을 남겨두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홍수의 심판이 지나가고 하나님께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때 그들을 통해서 그 새로운 역사를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서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방주 속에 남겨두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에든 역사를 바꾸시기 위해서 남은 자들을 남겨주십니다. 엘리야 때는 7천명의 남은 자들을 두셨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 도성에 남은 자들조차 부패하고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그 도성을 심판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그랬습니다. 예루살렘이 그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은 자들은 역사의 마지막 소망, 마지막 잎새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어두워도 남은 자들이 있으면 우리는 역사에 새로운 희망을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지금 이들 남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의 역사, 이 땅에서도 남은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 남은 자들일까요? 아니 그 남은 자들이 되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시대가 악하고 어두울 때 하나님은 악인들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남은 자들을 보십니다. 그리고 그 남은 자들을 찾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남은 자, 역사에 그루터기와 같은 존재들인 남은 자가 살아나면, 그래서 이 남은 자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으면 그 남은 자들을 통해서 가정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교회가 새로워질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은 자만 제대로 남아 있다면 역사는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예레미야 선지자와 더불어 이런 고백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2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직도 진멸하지 아니하시고, 이 땅을 완전히 소멸하지 아니하시고 남겨두신 이유는 기억하십시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하심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그 사랑 때문에, 아니 우리를 통해서 다시 그 역사를 살려내기 위해서, 우리 가정을 살려내기 위해서, 우리의 교회를 살려내기 위해서, 이 세상을 살려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언제나 남은 자들을 남겨두십니다.
그러므로 남은 자들이 엎드려 회개를 시작하면, 남은 자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기 시작하면 그 땅, 그 역사는 다시 희망을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가 있습니다. 역대하 7장 14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대에 저와 여러분이 그 남은 자가 되어 정말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기 시작한다면 하나님은 그 남은 자들인 우리를 통해서 이 땅을 고칠 수 있다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가슴을 찢는 회개로부터 시작된 평양장대현교회에서의 영적부흥은 당시 한국인 교인과 외국인 선교사들 간에 있었던 갈등과 반목이 사라지고 서로를 이해하며 하나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됨은 36년이라는 일제의 식민지를 지내야만 했던 암울했던 시기에 일본이 교회를 박해할 때에도 흩어지지 않고 교회를 지키며 민족 해방을 위해 기도하게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회개는 단순히 개인의 내면적인 죄를 고백하는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웃에게 피해를 입힌 행위에 대해 직접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손해를 배상하고 용서를 구하는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민족의 암울한 시기에 빛이 되고 희망이 되었던 한국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언제나 그루터기라고 하는 남은 자들을 남겨두십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한 때를 위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한 시대를 만들기 위해서 선별하여 두신 가정도 있고, 교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은 자들이 영적으로 살아나야 합니다. 남은 자들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람들이 회개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내려놓고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그리고 참으로 이웃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이 땅에 다시 한 번 부흥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의 회개는 우리의 가정을 살릴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를 살릴 것입니다. 우리의 민족을 살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새로운 역사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동터오는 하나님의 도시를 보게 될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진정한 영적부흥은 남은 자들인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이 부흥을 진심으로 기대하십니까?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이 희망의 남은 불씨가 되기 위해 주 앞에 엎드려 먼저 우리의 죄를 회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