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관포지교의 유래
중국 춘추시대, 기원전 690년경.
관중과 포숙아는 제나라 사람으로서 어릴 때부터 친구였으며, 함께 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하였다.
같이 장사를 하면서 관중은 포숙아보다 배 이상의 돈을 가지고 가고, 전쟁에 나갔을 때는 싸움터에서는 항상 후대에 서고 싸움이 끝나고 돌아 갈 때는 항상 맨 앞에 서서 걸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장사를 하면서 관중이 왜 배나 많은 돈을 가지고 가느냐?'고 불평을 하고, '관중은 겁쟁이거나 비겁한 자'라고 비난하면, 포숙아는 항상 관중을 두둔했다.
다른 사람들이 돈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하면, 포숙아는 “관중은 구구한 돈을 탐해서 나보다 배나 많은 돈을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집안이 가난하고 식구가 많다. 내가 그에게 돈을 더 가지고 가도록 사양한 것이다. 그대들은 오해하지 마라”고 변명했다. 관중을 비겁한 자라고 비판하면, 포숙아는 “관중은 용기가 없거나 비겁한 것이 아니다. 그에겐 늙은 어머니가 계신다. 자기 몸을 아껴 길이길이 늙은 어머니에게 효도하려고 하는 것이다. 어찌 관중이 싸움을 겁내리오”하면서 두둔했다.
아울러 포숙아는 “사람은 누구나 때를 잘 만날 수도 있고 불우할 때도 있다. 만일 관중이 때를 만나 일을 하면 백번에 한 번도 실수가 없을 것이다. 그대들은 함부로 관중을 비난하지 마라”고 하였다.
관중은 이런 소문을 들을 때 마다 길이 찬탄했다. “나를 낳아준 사람은 부모며,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포숙아다”
마침내 그들은 생사를 함께하자는 교우의 의(義)를 맺었다. 이를 후세에서 관포지교(管鮑之交)라고 한다.
※ 후에 포숙아가 제환공에게 관중을 추천하여 재상으로 등용되었다. 관중은 40년간 제 환공을 주군으로 모시면서 제환공이 춘추오패의 첫 번째 패자가 되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이제 재상으로 등용되는 과정 등을 설명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