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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자성어 ‘불가상서(不可尙書)’유행
위계정이 선종에게 만춘의 호화주택 철거와 관등절에 춤을 추라는 지시의 불가함과 부당함을 지적한 사건이 일어난 후 공에게는 『불가상서(不可尙書)』란 별명이 관료들 사이에 유행했다. 즉, “왕의 정치가 옳지 않을 경우 그 부당함을 직언했던 상서 위계정의 행실에서 유래”한다. 곧 사실대로 직언하는 사람을 이른 것이다. 그러나 종4품인 어사중승과 정3품인 추밀승선 때의 일이니 과연 정3품인 상서 때의 것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어떻든 왕에게 직언을 했다는 사실은 관료사회에서 거의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다.
(6) 2차(二次) 사행(使行)과 빈손 귀국(歸國)
선종은 1090년(庚午) 음 7월 호부상서 이자의(李資儀)와 예부시랑 위계정(魏繼廷)을 정부 사은진봉사(賜恩進奉使)로 송나라에 보냈다. 이때의 사행은 그동안 송나라에서 보내준 각종 한약재와 한의사를 파견해 왕과 왕족들을 치료해준데 대한 사은과 고려 토산품을 주기 위한 것이다. 이때 정사 이자의와 다른 수행원들은 귀국할 때 그곳의 진귀한 물건을 산더미처럼 구입해 돌아왔다. 그러나 부사 위계정만은 단 한 가지 물건도 사지 않고 빈손으로 귀국했기 때문에 이전의 ‘불가상서’에 ‘청백리’가 더해졌던 것이다. 그런데 두 번째 사행 때 품계와 일부 사서의 기록에 문제가 있다. 첫째는 부사 위계정의 관직품계이다. 처음으로 송나라에 갔을 때의 관직이 예부시랑이었는데 3년 후에도 같은 품계인 것이다. 그동안 그의 관직은 1088년에 △어사중승 그 이후 △추밀승선과 ‘불가상서’라는 사자성어까지 세 단계나 올랐던 것을 감안하면 품계가 맞지 않다. 그리고 일부 사서에는 이때 송나라 황제로부터 ‘신의보구방(神醫普救方)’과 ‘태평어람(太平御覽)’ 1천권 등의 책을 희사 받아 가져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잘못 전해진 것이다. 이들 책 가운데 ‘신의보구방’은 1101년(辛巳) 임의(任懿)와 백가신(白可臣)이 정부사로 가서 가져왔으며4), ‘태평어람’도 같은 해 왕하(王嘏)와 오연총(吳延寵)이 정부로 가서 황제로부터 무려 1천권에 이르는 책을 기증받아 가져왔다5). 당시 송나라 황제는 사은진봉사가 귀국하는 시점에 관반(館伴)으로 와서 송나라에서 없어진 황제침경(黃帝鍼經) 9권을 “고려에서 찾아 보내주라”고 부사 위계정에 부탁한 바 있다. 그래서 그는 귀국한 이후 왕에게 말해서 황제가 부탁한 책을 보내준 사실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太平御覽》은 무슨 책인가?
1,000권이며, 이 책을 완성하는데 6년 9개월이 걸렸다. <역(易)> 계사편에 기초하여, 전체를 천·시서·지(地)·황왕·편패·주군 등의 55문(門)으로 나누어, 모든 사류를 망라하고 있다. 각 문은 나아가 유(類)로 나뉘는데 모두 4,558류가 된다. 인용서는 1,660종에 달하며, 현재는 70∼80%가량이 실전됐다. 자료의 보고로서 학문적으로 중요한 서적이다. 본래 인용서 전부가 송초에 없어서 전대에 만들어진 <수문전어람(修文殿御覽)>·<예문류취(藝文類聚)>·<문사박요(文思博要)> 등의 유서에서 인용한 것도 많다. 책명의 표기도 통일되지 않으며, 간혹 잘못된 경우도 있기에 이용할 때 주의해야 한다. 송초엔 <태평광기(太平廣記)>·<문원영화(文苑英華)>·<책부원구(冊府元龜)>가 편찬되었는데, 이를 ‘송4대서’라고 한다. 이방(李昉)은 태종의 칙명으로 977년에 착수해 983년 완성했다. 《태평총류(太平總類)》라 했으나 태종이 하루에 3권씩 읽어 1년 만에 모두 읽었다 해 《태평어람》이라 개칭했다. 송나라 이전의 잡서로부터 채록한 것이나, 많은 일서(逸書)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특히 사이부(四夷部)란에는 신라와 고구려 등에 관한 기록이 보여 한국 역사 연구에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사이는 중국이 자신의 인접국을 오랑캐로 얕잡아 보는 동이(東夷), 남만(南蠻), 서융(西戎), 북적(北狄) 등을 일컬었던 나라들이다.
(7) 생일(生日) 하천안절(賀天安節) 표전(表箋) 작성
위계정은 과거에 급제한 이후 초급관리 시절부터 왕의 조서나 국서를 초안하는 사신(詞臣)으로 일했다. 좌보궐이나 지제고(知制誥)와 추밀원(樞密院) 등의 관직들은 이 같이 글을 쓰는 일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다만「하천안절표(賀天安節表」표전(表箋)의 제작시기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요(遼)나라 도종(道宗)의 생일을 축하하는 국서인 것은 틀림없다. 따라서 그의 재위기간이 1085년(乙丑)부터 1094년(甲戌)까지 9년간이니 고려로서는 선종(宣宗) 재위기간으로 볼 수 있다. 표전이 실린 <동문선(東文選)>이나 <장흥 위씨족보>에는 요와 송의 구별이 없어 혼동을 주고 있다. 그가 남긴 유고로는 송나라에 가서 지은 한시와 다음의 <하천안절 표전>이 있을 뿐이다.
■ [賀天安節表] 表箋6)
<원문>
鳳簫鸞笙。協寒若之休徵。龍渥彪祥。屬誕彌之慶節。愷懌之甚。遐邇不殊。中賀。伏惟皇帝。端穆凝尊。溫文啓哲。垂衣裳而理天下。大致混同。象日月以授人時。永無差忒。逮復舜生之旦。盛陳塗會之儀。川岳効珍。蠻夷納欵。臣逖居桑野。叨襲茅封。周室侯班。展覲未肩於八百。羲皇曆數。馳誠但祝於萬年。
<해설>
봉소(鳳簫)가 음률을 조절하니 추위가 순조로움이[寒若] 아름다운 징조에 맞고, 용악(龍渥, 聖恩)의 상서를 빛내는 성체(聖體)를 탄생한 경절을 맞이함에 즐겁고 기쁨이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나 다름이 없나이다. 엎드려 생각건대, 황제께서 단정 목목(穆穆)하게 존엄하고 온화하며 문아(文雅)하고 밝으셔, 의상을 드리운 채 천하를 다스려 크게 통일을 이루고, 일월을 관상(觀象)하여 역서(曆書)를 반포하니 어긋남이 없나이다. 이제 순(舜)임금이 탄생하신 날에 즈음하여 도산(塗山)의 모임이나 우(禹)가 만국의 제후를 도산에서 모이게 해서 같은 성전(盛典)을 거행하오니, 산천이 진기(珍奇)한 것을 바치고 만이(蠻夷)가 정성을 바치나이다. 신이 멀리 상야(桑野)7)에 살며 외람되게 모봉(茅封)8)을 세습하므로 주실(周室) 제후들의 입근(入覲)하는 반열에 어깨를 나란히 못하나, 희황(羲皇) 역수(曆數)에 만년수(萬年壽)를 봉축(奉祝)하여 정성을 전하나이다. 이상의 글은 모두 115자에 불과한 문장이다. 이 글자로 황제의 비위를 맞춰 조공국의 예의를 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그의 글 솜씨는 이 짧은 문장을 통해 유감없이 보여주기에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필자 주>
4. 군신(君臣)과 선후배(先後輩)와의 신의(信義)
선종이 1094년 음 5월에 죽자 헌종(獻宗, 1084∼1097) 제14대 왕으로 등극(1094∼1095)했다. 선종의 장남이자 제2비 사숙왕후 소생으로 1084년 6월에 출생했으며, 이름은 욱(昱)이다. 유아부터 당뇨병으로 누워 있어야 했다. 대신들은 왕권이 선종의 동생들 중에 한명에게 넘어갈 것으로 생각했다. 태후가 청정(聽政)하여 군국대사(軍國大事)를 처결했다. 1095년(헌종1) 정월 초하루에 해 옆에 혜성(慧星)이 나타났는데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해의 곁에 혜성이 있음은 근신(近臣)의 난이 있을 징조이니, 제후 중에 반하려는 자가 있겠습니다.”라고 했다. 타고난 천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웠지만 나이가 어려 수성(修省)할 줄 모르고, 다만 내의(內醫) 3, 4명을 불러들여 방서(方書)를 토론하고, 서화를 익힐 뿐이었다. 같은 해 7월에 헌종의 외숙인 이자의(李資義)가 선종과 자신의 여동생 원신궁주(元信宮主)의 소생인 한산후(漢山侯) 왕윤(王胤)을 보위에 오르게 하려고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침범했다. 그러나 계림군이 이끈 병력에 의해 진압돼 주살됐다. 사람들이 “선종은 총명한 아우가 5명이나 있었는데도 어린 아들에게 왕위를 전한 탓으로 반란이 일어났다.”라고 했다. 이자의의 쿠데타를 진압한 계림공 희(熙)는 그해 8월 중서령으로 임명되더니 그해 10월에 어린 조카를 폐하고 왕위에 올랐다. 헌종이 제서(制書)를 내려 선위(禪位)할 때 근신 김덕균(金德均)을 보내어 계림공 희를 종저(宗邸)에서 맞이하고, 자신은 후궁으로 물러났다. 왕에서 물러난 헌종은 지병과 공포로 1097년 2월 흥성궁에서 1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이때의 정치상황을 보면서 위계정도 괴로웠을 것이다. 숙종은 사실상 왕위를 찬탈해 제15대 왕위에 올랐다. 권력이란 부자나 형제간에도 목숨을 거는 무자비한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처지에서도 그는 군신간의 의리와 신료간의 신의를 올곧게 지켜냈다. 이제 그가 정치를 하면서 그 의리와 신의를 어떻게 실천하며 공복의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자.
1) 김부식(金富軾)을 직한림(直翰林) 추천
숙종이 즉위하면서 2년째부터 위계정의 관료생활은 전성기를 이룬다. 나이도 한참 일할 타이밍인데다 왕의 신임 또한 두터웠기 때문이다. 그의 관직품계는 승승장구했다. 그러면서도 선배를 극진하게 대접하고, 후배를 지극정성으로 이끌어 주었다. 그의 이 같은 배려는 당사자의 기록과 사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기 그 대표적인 몇 사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후배의 승진을 추천한 경우이다. 오늘날 《삼국사기》의 저자가 김부식(金富軾)이라하면 모른 사람이 없다. 그러나 그가 급제해서 초급관료로 있을 때 직한림으로 추천한 사람이 위계정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런 사실은 당사자인 김부식이, 위계정이 추천해준데 대해 고마움을 표시한 「사위추밀칭예계(謝魏樞密稱譽啓)」라는 유고에 나타나있다.
《謝魏樞密稱譽啓[金富軾]》
<원문>
右某。昨於內庫副使李某處。伏聞相公謂某有才能。再三稱道者。仲尼之褒。寵踰華衮。季布之諾。貴比黃金。載思知憐。彌集榮感。伏念某少好學問。粗攻簡編。當役役於時文。雕蟲篆刻。實倀倀於大道v。擿埴索塗。洎乎鈍根少開。養性內照。知學求爲君子。不敢沽名。恥道不如古人。居常責己。誓無反聖。擬不隨流。獨以飢寒之憂。難拋名利之學。翻然背馳聖人之趣。斐然狂簡小子之裁。適値國家嚴甲乙之科。取雄傑之士。拔出寒地。置之靑雲。去辱得榮。積時累月。日加慵惰。時復趨馳。舊學忽忘。初心缺落。括囊誰譽。
弊箒自憐。但懼沒世無稱。豈望在家必達。伏惟樞密相公。經綸之寄。宰相之才。高歷前賢。傑立當世。故自立揚之始。常居淸要之班。爲朝廷之羽儀。作文章之宗匠。申甫就列。周政幾於中興。韓柳揮毫。唐文至於三變。天下想望其風彩。士流鄭重其品題。詆訶一開。白日若無光景。眄睞所指。寒谷變爲陽和。奈何行能得此推許。昔智伯遇豫讓以國士。叔向賢鬷蔑以一言。此皆觸焉而始知。試焉而後譽。如某者。文卷未甞瀆明公之鑒。議論未甞發明公之前。今此之言。從何而出。柳子厚之言曰。古之知己者。不待來求而後施德。擧能而已。其受德者。不待成身而後拜賜。感知而已。昔讀其文。今見其實。自顧不肖。何克承當。謹當箠策駑慵。琢磨頑鈍。自強文學之務。無辱吹噓之恩。過此以還。未知所措。東文選卷之四十五
<해설>
앞에 글을 쓰는 사연은, 모(某)가 어제 내고부사(內庫副使) 이모(李某)의 처소(處所)에서 삼가 상공(相公)께서 모가 재능이 있다고 재삼 일컬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중니(仲尼)의 포상(褒賞)은 은총이 화곤(華袞) 보다 낫고 계포(季布)의 승낙은 귀하기 황금(黃金)에 비할 만한데, 이에 알아주고, 사랑해 주심을 생각하니, 영광스러운 마음이 더욱 모입니다. 엎드려 생각하오니, 모(某)는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나, 대강 간편(簡編 책)을 다스려서, 항상 시문(時文)에 골몰하여 전각(篆刻)만을 다듬다보니, 실로 대도(大道)에는 길을 못 찾고 아득했습니다. 갈팡질팡 어둔데서 헤매었습니다. 그러나 둔한 재주가 조금 열리며 성품을 기루어 안으로 비추매 학(學)은 군자가 됨을 구해야 할 줄 알고, 감히 이름을 사지 않았으며, 도(道)가 고인보다 못함을 부끄러워하여 항상 자기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성현에게 어김이 없을 것을 맹세하고 세류에 좇지 않으려 하오나, 홀로 굶주리고 추운 근심으로 명리(名利)의 학문을 버리기는 어려웠었는데 번연(翻然)히 성인의 뜻에 배치되었으나, 아름답게 광간(狂簡)9)한 소자(小子)를 재단하셨습니다. 마침 국가에서 갑ㆍ을의 과거를 엄하게 보일 때에, 웅걸한 선비들을 취해서, 한지(寒地)에서 뽑아내어 청운에 올려 주심으로써 곤욕을 버리고 영화를 얻은 것이 철이 거듭되고 달이 쌓이자, 날로 더 게을러져서 때로 다시 세속에 달렸습니다. 구학(舊學)은 홀연히 잊어지고, 처음 마음이 이지러졌나이다. 말을 않고 있으니[括囊] 누가 칭찬해 주겠습니까. 낡은 빗자루를 스스로 아낄 뿐입니다. 다만 죽어서 일컬음이 없을 것을 두려워할 뿐이지 어찌 집에만 있으면서 반드시 영달할 것을 희망하겠습니까. 삼가 생각하오니, 추밀상공(樞密相公)께서는 경륜을 맡았고, 재상의 재주라, 높이 전현(前賢)을 지나치고, 당세에 우뚝이 서 계십니다. 그러므로 출세하는 처음부터 늘 청직(淸職)과 요직의 반열에 있었고, 조정의 우의(羽儀 모범)가 되었으며, 문장(文章)의 종장(宗匠)이 되었습니다. 신백(申伯)과 중산보(仲山甫 주 선왕(周宣王)을 보좌한 어진 재상)가 반열에 나아가심에 주(周) 나라 정사(政事)가 거의 중흥하게 되었고,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이 붓을 휘두르며, 당(唐) 나라 글이 세 번 변함에 이르렀습니다. 천하(天下)에서 그 풍채(風彩)를 사모하여 선망하고, 사류(士類)들이 그 비평을 정중히 여기어 한 번 꾸짖자 백일(白日)이 빛이 없고, 가리키는 곳에는 찬골짜기가 따뜻한 곳으로 변하니, 어떠한 능력으로 이렇게 추허(推許)함을 얻었습니까. 옛날에 지백(智伯)은 예양(豫讓)을 국사(國士)로 대우하였고, 숙향(叔向)은 종멸(鬷蔑)을 한 마디 말로써 어질다 했으니, 이것은 모두 접촉해 보아야 비로소 알고, 시험한 뒤에야 일컫는 것입니다. 저와 같은 자는 저의 저술한 문권(文券)을 명공(明公)께 보인 일도 없었고, 이론을 명공 앞에서 꺼낸 일도 없었는데, 지금 이 말이 어디로부터 나왔습니까. 유자후(柳子厚)의 말에 이르기를, “옛날에 자기를 알아주는 이는 와서 구하기를 기다린 뒤에야 덕(德)을 베푸는 게 아니요, 재능을 들어서 쓸 뿐이며 그 덕을 받는 자는 출세하기를 기다린 뒤에야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줌을 감사할 뿐이다.” 했으니, 옛날에 그 글을 읽고, 지금 그 사실을 당해보니 자신의 불초(不肖)함을 돌아볼 때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노둔(駑鈍)하고 용렬(庸劣)함을 채찍질 할 뿐이요, 완(頑)하고 둔(鈍)함을 쪼으고 갈아서 스스로 문학(文學)의 임무에 힘쓰고, 헛되이 칭찬해 주신 은혜를 욕되지 않게 할 것
입니다. 이것 밖에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 김부식(金富軾)은 누구인가?
김부식은 신라 왕실의 후예로 신라가 망할 때 그의 증조부인 위영(魏英)이 태조에게 귀의하여 경주지방의 행정을 담당하는 주장(州長)에 임명됐다. 그 뒤 김부식 4형제가 중앙관료로 진출할 때까지의 생활기반은 경주에 있었다. 1096년(숙종 1)에 과거에 급제해 안서 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의 사록(司錄)과 참군사(參軍事)를 거쳐, 직한림(直翰林)에 발탁되면서 20년간 문한직에 있었다. 그는 자신이 공자·맹자의 학문을 종지로 받든다고 표방했을 뿐만 아니라, 유교 윤리의 실천을 주장했고 유교이념의 실현에 노력한 유학자다. 즉, 이자겸이 인종 초년에 왕의 외조부 겸 장인으로서 참람한 행위를 하고, 예의에 어긋난 일을 하려고 하자 이를 반대했다. 또,《삼국사기》의 사론에서 유교적 이념의 제시를 보여 주었으며, 예종·인종 때의 강경에서도 유교적 이념을 강조했다. 김부식은 경주세력의 구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1125년 이자겸의 난을 거치면서 재상으로 승진한 때부터 관직에서 은퇴한 1140년(인종 18)까지에 이루어졌다. 이자겸이 제거된 직후에 두 번째로 송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이때 사신 파견의 목적은 송나라 고종의 등극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송나라와 금나라의 정세에 대한 정확한 정보입수의 목적이 곁들여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이를 감지한 송나라의 반대로 수도 개봉(開封)은 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자겸 일파의 정계축출로 인해 승진이 용이해져 1130년 12월에는 정당문학 겸 수국사(政堂文學兼 修國史)로 승진, 재상이 된 뒤 다음해(1131년) 9월에는 검교사공참지정사(檢校司空參知政事)로, 그 이듬해(1032년) 12월에는 수사공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守司空 中書侍郎 同中書門下平章事)에 승진했다.
注)
4) 신의보구방 : 고려사 권 11 숙종 6년 5월 갑신
5) 태평어람 : 고려사 권11 숙종 6년 6월 丙申
6) 동문선(제31권) : ≪동문선≫은 대제학이던 서거정(徐居正)이 중심이 되어 노사신(盧思愼)· 강희맹(姜希孟)· 양성지(梁誠之) 등을 포함한 찬집관(纂集官) 23인이 작업에 참여했다. 이책 이외에 또 신용개(申用漑) 등과 송상기(宋相琦) 등에 의하여 편찬된 것 등 3종이 있는데, 서거정의 정편 ≪동문선≫, 신용개의 것을 ≪속동문선≫, 송상기의 것은 신찬 ≪동문선≫으로 구별해 부르기도 한다. 신라의 김인문(金仁問)·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을 비롯한, 편찬 당시의 인물까지 약 500인에 달하는 작가의 작품 4,302편을 수록했다. 목록 상권 첫머리에 서거정의 서문과 양성지의 <진동문선전 進東文選箋>이 실려 있다. 서거정은 작품의 취사선택의 기준을 제시해서 ‘사리(詞理)가 순정(醇正)하고 치교(治敎)에 도움이 되는 것’을 선택했다고 명시하고 있다.
7) 상야(桑野) : 중국전설에 동쪽 바다의 해 뜨는 곳에 있다는 신성한 나무 즉, 부상(扶桑)을 이르는 말이다.
8) 모봉(茅封) : 제후를 봉하여 줄 때에 띠[茅]에다 흙을 싸서 준다.
9) 狂簡 : 뜻만 크고 일에 소략함을 이른다.子在陳曰 歸與歸與 吾黨之小子 狂簡 斐然成章 不知所以裁之 ; 공자 진 나라에 있을 때 가로되, ‘돌아가야 하리, 돌아가야 하리. 우리 고장 사람들이 광간하여 문채(文彩)를 이루었으되 마를 줄을 알지 못하듯 하도다.’ 했다.)<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嗟予狂簡無所裁 亦幸托契相綢繆(주무) ; 아아 나는 광간하여 마를 줄을몰랐더니, 다행히 그대와 교분을 맺어 서로 굳게 맺어 있네.)<변계량卞季良 증권중려우(贈權中慮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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