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인 참된 지도자상을 확립하라!
디도서 1:5-9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도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십시오.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영감이 여러분의 심령 속에 철철 넘치게 하십시오. 세상의 그 어떤 지식보다 더 위대한 것이 하나님의 영감입니다. 오늘 주 앞에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는 가운데 하나님의 계시적 영감을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의 예언으로 채우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붙들고 도전하십시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예수를 믿고 할 이야기가 있는 사람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한 나라와 단체의 성장은 지도자의 지도력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잠언 11장 11절에 보면 정직한 지도자의 축복으로 인하여 한 도성이 부흥되지만, 반면에 부정직한 지도자의 입으로 말미암아 그 도성이 무너진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지도자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인간 홍수의 시대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지도자를 찾기가 어려운 흉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온 백성들이 흠모할 만한 바른 지도자를 찾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상대주의에 갇혀 있는 오늘 우리들은 절대적인 지도자를 거부하기도 하지만, 모든 백성들이 존경하고 따를 수 있는 지도자를 찾기도 어렵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시대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도자를 꿈꾸십시오. 그러나 내가 지도자가 되겠다고 생각만 해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지도자는 스스로 끝없는 변화를 장려해야 됩니다. 지도자는 단지 변화를 견디어 낸다거나, 마지못해서 변화에 밀려가서는 안 됩니다. 지도자는 실제적으로 변화를 주도하고 변화를 만들어내야 됩니다. 바른 지도자의 자질은 끝없이 배우고 익히려고 하는 겸손함이 있어야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세상에 된 지도자는 없습니다. 되어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교회 안에는 지도자에 대한 두 종류의 극단적인 견해가 있어 왔습니다. 첫째는 지도력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지도자를 우상화함으로써 절대적 지도자를 세우려는 경향입니다. 이러한 견해에 바탕을 둔 대표적인 교회 제도가 바로 로마카톨릭 제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 역사를 통해서 한 사람의 지도자가 잘못 되었을 때 교회 전체가, 심지어는 그 영향을 받았던 전세계가 암흑의 역사 속에 떨어졌던 시대가 있기도 했습니다. 로마카톨릭 교황의 권위가 절정에 달했던 13세기 중세 암흑기 시대에 인노첸시오 3세라는 교황은 자신을 가리켜 태양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강력한 지도력에 대한 반발로서 지도자를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는 개신교 운동들도 없지 않아 있어 왔습니다. 그렇지만 종교개혁자들은 로마카톨릭의 교황제도는 거부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에서의 어떤 혼돈과 무질서가 초래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올바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교회 안에서의 지도력을 중요시했습니다. 그래서 제2스위스 신앙고백의 제18장에 보면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 지상에 있는 한 하나님은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이처럼 교역자들(지도자들)을 사용하신다.” 뿐만 아니라 교역(지도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들이 경험하는 바는 결국 적절한 지도력이 없이는 공동체가 성장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적인 지도자관은 이 두 가지 극단의 중간에 위치합니다. 성경은 지도자의 존재 이유와 그 필요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성경은 한 사람이 과오를 범할 때 그로 인해 파급될 수 있는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서 한 교회 안에 되도록 많은 지도자를 세워야 한다는 사실도 강조합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가운데 사도 바울이 각 교회에 보낸 편지들은 그 수신인이 장로들이나 감독들, 즉 복수 지도자로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디도로 하여금 그레데 섬에 세워진 교회의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격려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디도가 그레데에서만 오래 머물면서 계속 사역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디도가 떠난 후에는 그레데 섬에서 복음의 사역이 힘 있게 이어지기 위해서는 앞으로 이 그레데 사역에 헌신하는 훌륭한 지도자가 세워져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본문 5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그레데 섬은 앞의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지중해에 있는 섬으로 결코 작지 않은 섬이었습니다. 이 섬은 산이 많았지만 골짜기는 비옥하고 인구가 많았으며 부유했습니다. 그리고 100개의 성읍이 있는 큰 섬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레데 섬의 각 도시마다 거기에서 사역할 지도자들을 세우게 하려함이라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사도 바울은 성경적인 올바른 지도자의 특성과 자질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디도에게 주는 권면을 통해서 나타난 우리가 붙잡아야 할 성경적인 참된 지도자상은 인격과 기능이 균형 잡힌 사람이어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는 당시 초대 교회에서 영적 지도자들을 부를 때 사용했던 두 가지의 호칭이 나오고 있습니다.
첫째는, 장로라는 호칭입니다.
‘장로’와 ‘감독’은 별개의 직분에 대한 호칭이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똑같은 사람을 처지와 상황에 따라 ‘장로’와 ‘감독’이라고 달리 구별하여 불렀습니다. 장로가 곧 감독이고, 감독이 곧 장로라는 말입니다. 다만 ‘장로’는 인격적인 호칭이며, ‘감독’은 기능적인 호칭이라는 것이 차이점일 뿐입니다.
‘장로’에 대한 헬라어 ‘프레스뷰테로스’라는 말에서 영어의 “Presbyterian”(장로교회)이 파생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의 본래 뜻은 “수염이 난 사람”입니다. 수염이야 20세에도 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아무나 수염을 기를 수 있던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우선 수염을 기를 자격이 늙은 사람에게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나이가 들었다고 해도 인격적인 성숙을 갖추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수염을 길러도 다른 사람들의 비웃음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 당시에 수염을 기른다는 것은 그 자체가 성숙의 상징이요 신뢰를 얻었다는 신임도의 상징이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존경을 받고 있다는 표시였음이 틀림없습니다.
본래 이 장로라는 호칭은 구약 시대에 한 성읍의 지도자들을 그렇게 불렀던 데서 유래합니다. 그 장로들은 성문 앞에 앉아서 백성들이 문제들을 가지고 나올 때 시비를 가려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는 지혜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신임도였습니다. 시시비비의 문제에 걸린 사람들이 장로에게 가서 해결을 구할 때에는 두 사람이 그 장로를 신임할 수 있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장로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은 사람들의 신임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장로’라는 단어는 철저하게 인격적인 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정말 인격적인 자질이 갖추어진 사람을 장로님이라고 부를 때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푸근해집니까? 반면, 그런 자질이 부족한 분에게 장로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또 얼마나 어색합니까?
둘째는, 감독이라는 호칭입니다.
‘장로’가 인격적인 측면이 강조된 단어라고 한다면, ‘감독’은 기능적인 측면이 강조된 단어입니다. 사실 ‘장로’라는 말은 히브리적인 배경에서 나온 단어인 반면에 ‘감독’이라는 말은 헬라적인 요소를 가진 단어입니다.
‘감독’은 헬라어로 ‘에피스코포스’입니다. 교회의 여러 교파 가운데 ‘에피스코팔’(Episcopal)이라는 교파가 있는데,, 이것은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가 미국에 들어오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에는 소위 감독(Bishop)이 있는데, 감독은 교회의 어떤 계급이 아닌 기능을 지칭하던 칭호입니다.
“Bishop”에는 세 가지 중요한 뜻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로, “돌본다.”는 뜻이 있으며, 둘째로 “감시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즉, 돌보되 잘못되지 않도록 감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셋째로 “다스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런 세 가지 개념을 다 포함하고 있는 영어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oversee”입니다. 이것은 “위에서부터 잘 본다.”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결국 공동체 안에서 여러 사역들을 수행하고 또 그것을 감독하고 교정하며,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는 기능을 맡았던 사람을 감독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은 기술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떻게 돌볼 것인가?”,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이미 오래 전부터 감독의 가장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는 선한 방법과 좋은 기술을 가지고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동일인이라도 인격적인 존경심에서 부를 때는 ‘장로’라고 했고, 또 그가 행하는 기능적인 사역에 초점을 맞추어 부를 때는 ‘감독’이라고 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서 영적 지도자를 호칭하던 이 두 가지 개념 속에서 우리는 성경적인 참된 지도자의 특성에 관해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를 발견하게 됩니다. 즉, 하나는 인격이고, 또 하나는 기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지향하는 영적인 지도자란 인격과 기능을 겸비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비단 목사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지도자의 위치에서 사역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요구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스스로에게 한 번 물어보십시오.
나는 신임 받을 만한 인격으로 성숙하고 있는가? 내 인격에 합당하도록 내게 주어진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추었는가?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고 또한 이 말씀을 가르칠 수 있는가? 나는 중요한 행정상의 업무를 처리하며 공정하게 조직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오늘 본문 6절부터 9절에서는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여러 가지의 자질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바울은 특히 ‘순결’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본문에는 순결이라는 말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바울이 말하는 여러 사항들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단어가 결국 ‘순결’이 아닐까 하여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하는 ‘순결’은 영어의 ‘purity’와는 조금 의미가 다릅니다. 그보다는 ‘integrity’라는 단어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단어는 번역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단어입니다. 순결할 뿐만 아니라 그 순결함 때문에 신임을 받을 수 있으며 자기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덕, 이런 것을 가리킬 때 우리는 integrity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편의상 그냥 ‘순결’이라고 번역하겠습니다.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인 이 ‘순결’은 다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지도자는 관계적인 순결이 있어야 합니다.
관계적인 순결이란 문자 그대로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요청되는 덕으로서의 순결입니다.
“책망할 것이 없고”(6절).
여기에서 사용된 “책망할 것이 없다.”는 말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혹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결정적으로 책망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개인적인 생활 속에서 전혀 책망할 것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책망할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6절 말씀에서는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에게 완전을 요구하는 것으로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본문에서 어떤 관계에서의 순결을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첫째로, 불신자와의 관계에서 순결해야 합니다.
디도서와 함께 목회서신이라고 일컬어지는 디모데전서에서도 교회 지도자의 자질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3장 7절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여기에서 ‘외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교회 밖의 사람들, 그러니까 믿지 않는 불신자들을 말합니다. 교회 지도자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저 사람은 괜찮다.”고 하는 선한 증거를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불신자들에게서도 평판이 좋아야 합니다. 만약에 불신자들에게 “어떻게 저런 사람이 지도자가 될 수 있겠는가?”라는 평판을 받는 사람이 지도자로 세워졌다면 과연 그 공동체는 세상에 얼마만큼이나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겠습니까? 아니, 영향력은 그렇다 치더라도 사탄에게 고소할 기회를 만들어 주어서 양 떼들을 인도할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 지도자는 불신자들과의 관계에서 결정적인 흠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둘째는, 부부간의 관계에서 순결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6절에서 사도 바울은 지도자의 자격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 아내의 남편이며.”
이 말은 부부 관계에서도, 특별히 성적 순결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여기에서 “한 아내의 남편”이라는 말을 다음과 같이 번역해도 조금도 잘못된 번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여인의 남자.”
원문에서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한 여인만의 남자”라고 번역하면 “한 아내의 남편”이라는 말보다 어감이 더 강하게 들립니다. 왜냐하면 두 여자를 거느린 남자가 많기 때문입니다. 부부 관계를 형식적으로는 유지하면서도 숨겨 둔 여자가 둘셋 정도 있는 남자들도 있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의 성적인 순결이 부부 관계에서 지켜져야 함을 영적 지도자들에게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자녀와의 관계에서 순결해야 합니다.
본문 6절에서는 계속해서 지도자의 자격에 대해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이 말씀에 따르자면 만약 자녀가 믿음의 자녀가 아니라면 그는 방탕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나 자신의 삶 가운데 질서를 상실하며, 불순종한다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은 이미 그 자녀가 참된 믿음 안에서 자라나지 못했으며 믿음의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와 비슷한 권면이 디모데전서 3장에도 나옵니다. 바울은 자기 집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교회를 다스릴 자격이 없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삶으로 자기 자녀에게 거룩한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사람이 한 교회 안에서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영적으로 선한 영향을 끼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영적 지도자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자녀를 믿음으로 양육해야 하는 것이 하나의 심각한 과제로 대두됩니다.
따라서 모름지기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고, 또 지도자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순결해야 합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에 대해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지도자는 개인적인 순결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영적 지도자의 개인적인 순결을 위해 7절과 8절에서 다음과 같이 열한 가지 사항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이것은 금전적인 문제에서 깨끗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청지기적인 삶의 아름다운 간증이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 자기 고집대로 하지 않아야 합니다.
고집이 센 사람에게 제일 커다란 문제는 하나님의 뜻 앞에 순종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의지가 너무 강하면 하나님의 뜻 앞에 순종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주님의 뜻 앞에 순종할 수가 없다면 그 사람은 영적 지도자로서 실패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집이 센 사람은 영적 지도자의 길을 걸으려고 하는 생각을 포기해야 합니다. 고집이 꺾이고 자아가 깨어지지 않는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세 번째, 급히 분내지 않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20절에 보면, 분냄과 관련하여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우리는 분노할 때 본질적으로 분노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지배를 받을 수가 없게 되어 그 분의 뜻과 의를 온전히 이룰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분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의 쓰임을 받지 못합니다.
네 번째, 술을 즐기지 않아야 합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이 에베소서 5장 18절에 있습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술의 지배를 받을 때 우리는 결코 성령의 지배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다섯 번째, 구타하지 않아야 합니다.
영적 지도자들 가운데도 주먹이 먼저 앞서는 사람이 간혹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손에 총이 쥐어지면 여지없이 발사되고 말 것입니다. 그의 손에 야구방망이가 쥐어지면 가차 없이 야구방망이를 휘둘러댈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구타하는 것은 그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여섯 번째,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않아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에서 사도 바울은 경건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서 자족하는 마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자족의 정반대 개념으로 돈을 사랑하는 것, 즉 이득을 탐하는 것으로 보고 그것이 지도자의 경건을 해치는 가장 무서운 악이라며 경계했습니다. 이득을 탐하는 데서 모든 악이 파생되기 때문입니다.
일곱 번째, 나그네를 대접해야 합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로서 소극적인 의미에서 무엇을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개념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보다 적극적인 개념으로 무엇을 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권고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이 기록되던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호텔이 없었습니다. 또 그 때에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이 한 장소에 머물지 않고 여기저기로 여행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래서 교회 지도자들은 항상 자기 집의 문을 열어놓고 그들을 대접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핍박이 있었던 때였으므로 도망 다니는 성도들을 숨겨주고 보살펴야 할 때가 허다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로 나그네를 대접할 줄 아는 것이 강조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원리적인 면에서 지금도 적용이 가능합니다. 사역한다는 것은 결국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집을 개방하여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교제하기가 싫으면 사역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여덟 번째, 선행을 좋아해야 합니다.
선행이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행을 좋아한다는 말은 주님의 뜻을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됩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모든 일에 적극적인 헌신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아홉 번째, 신중해야 합니다.
‘신중함’이라는 단어 속에는 통제의 의미가 들어 있지만 더 중요한 뜻은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주지 않으며 나아가서 다른 사람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위하여 마음의 상태를 살피는 행동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역을 한다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것인데, 그들의 필요가 무엇인가를 아는 통찰력이 없다면 지도자로서의 사역을 온전히 수행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열 번째, 의롭고 거룩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해 성경이 가장 크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 의와 거룩함입니다. 하나님은 자신과 동일한 성품을 그 분의 사람인 지도자들에게 요구하십니다.
열한 번째, 절제해야 합니다.
이것은 자신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다스림은 공동체를 다스리기 위한 선행 조건입니다.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고, 또 지도자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무엇보다 자기를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순결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다른 사람들에게 영적 지도력이 발휘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에 대해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지도자는 교리적인 순결을 지켜야 합니다.
본문 9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지도자의 길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말씀을 잘 가르치는 자가 되라고 하기에 앞서 말씀의 가르침을 솔선해서 지켜야 한다고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이렇게 먼저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말한 후에 바른 교훈으로 교인들을 권면하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른 교훈, 바른 교리, 건전한 교리, 올바른 교리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올바른 교리”라는 단어를 바울은 단순히 내가 믿어야 할 올바른 진리를 알아야 한다는 차원에서만 강조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교훈에 의해서 지배받는 삶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적 지도자는 말씀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권면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삶 속에서 진리의 요소를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면 그가 아무리 소리 높여 말씀을 가르쳐도 그 말씀에 권위가 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다른 사람들을 책망하려면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삶에 대해 떳떳하지 못하면 아마도 그는 책망하기를 포기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아니, 다른 사람들을 책망해도 권위가 서지 않습니다. “자기는 더 하면서 …”라는 반응이 당장 나올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권면하고 책망할 때든, 말씀을 가지고 어떤 사역의 자리에 서든, 그 메시지가 진정 권위 있는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말씀이 내 삶을 지배하는 교리적인 순결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보다 말씀을 자기의 삶 속에 소화하고 적용하는 측면에서의 순결함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한다면 결국에는 영적 지도자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3장 1절을 보면 신약성경은 지도자의 범주를 특별한 종류의 사람들로 국한시키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실 기왕에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상, 좋은 의미에서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갖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3장 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저 추종자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돌보고 섬기고 다스리고 가르치며 영향을 끼치는 영적인 지도자로 쓰임을 받고 싶다는 마음에서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고 하는 것, 그 자체는 선한 일을 사모하는 바람직한 자세입니다. 그래서 어느 성경학자는 이 구절에 대한 주석을 붙일 때 영적인 지도자가 되기를 추구하는 것을 “선한 야망”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선한 야망을 가지십시오. 목사만이 지도자가 아닙니다. 영적으로 장성한 사람은 모두가 다른 성도들을 돌보고 양육하는 지도자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한 교회의 건강함은 그 교회에 얼마나 많은 지도자들이 설 수 있느냐는 사실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언급된 지도자에 대한 메시지가 바로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될 수 있음을 인식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시야를 넓히십시오. 저는 이런 거룩하고 선한 야망을 갖는 사람들이 우리 교회 안에서 늘어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므로 주 앞에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나를 지도자로 세워 주십시오.”
이것은 지극히 합당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기도에서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영적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갖추어 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믿은 지 얼마나 오래 되셨습니까?
언제까지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신앙적으로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혼자만의 신앙을 유지하느라 허우적거리는 삶을 사시겠습니까?
삶을 마감하는 시점에 다다랐을 때, 부족한 대로 나도 하나의 작은 지도자가 되어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영적인 영향을 끼치면서 살아왔노라고 고백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이만 먹어서는 안 됩니다. 나이를 먹어갈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격적으로 존경과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도자가 되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영혼을 잘 다스리고 돌보는 지도자가 되셔서 부족한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사역의 도구로 쓰임 받는 지도자가 되는 꿈과 비전을 가지십시오.
그러기 위해 자기를 변혁하고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전환하고 자기를 개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한 사명, 한 믿음, 한 소망으로 주신 이 믿음의 집단 안에서 존경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아, 저분을 따르고 싶다. 저분을 본 받고 싶다.”
이런 아름다운 욕망이 일어나게 하십시오.
기억하십시오. 믿음의 지도자는 사람을 모아서 나와 함께 하나님의 일에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일을 시키는 능력이 나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