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둘째 딸의 수제 화분>
< 내가 요구하는 디자인 >
- 아차! 글을 쓰는 이제야 갑자기 깨닫는 나의 어처구니없는 실수!! 좋아서 히죽거리는 친구 옆에 서 있었던 건 잘 생긴 신랑이었다!!! 게다가 딸이라고 축(祝) 화혼(華婚)이라고 봉투를 준비했는데!!!! (일반적으로 화혼은 여자에게, 결혼은 남자에게 보낸다고 하고 결혼은 일본식 용어라 혼인을 써야 한다고 하니까 하는 말이다. 차라리 가의를 쓸 걸) 그리고 그것도 못 오는 동기 3명의 봉투도 모두 화혼(華婚)!!!!! 하지만 화혼은 ‘남의 결혼을 아름답게 일컫는 말’이라고 국어사전에 나와 있으니 남녀 구별을 못 한 나의 실수는 용납되겠지. 국어 선생에게 국어사전은 헌법이다.
그랬더니 구미에 가셨으면 NO1모직 공장에 있는 아울렛 매장에 가보라고, 자기는 대구 올 때 일부러 들러 산다고 알뜰주부 9단임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를 들어서가 아니라 구미역으로 오는 도중에 중고차 시장이 끝나고 조금 오니 TV선전에 나오는 아웃도어 할인 매장을 다 모아 놓은 듯 길 양쪽으로 쭉 이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기차 시간이 한 시간이나 남았고, 운전하는 친구도 별 갈 때가 없었고, 길가에 주차하기도 좋았지만 그러나, 옷을 사는 것은 나의 일이 아닌지라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핑계야 큰딸과 집사람의 서너 시간 소일거리를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옷 사는 일 자체가 나와 상관없는 것이라는 생각과 나의 옷을 내가 사본 경험이 거의 없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왜 나는 내가 입을 옷을 스스로 사려고 하지 않을까? 드디어 기차간에서 한 시간 20분 정도 행할 생각의 화두가 마련된 것이다.
오후 5시가 다되어 갈 무렵, 청도행 무궁화 열차에 타고서 먼저, 집에 있는 옷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살다보면 유행이 바뀐다든지 하면 집사람이 판단해 양복을 구입한다. 입어 보면 멋있다든지 내가 잘 생겨 보인다든지 하는 생각보다 괜찮네 내지는 이제 유행에 뒤지지는 않겠네 정도의 생각만 한다. 그리고 한번 입고 옷장에 넣어 놓는다. 각종의 예식이나 의식 때가 아니면 양복을 입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남들이 양복을 깔끔하게 입은 것을 보면 좋아 보인다. 내가 입고 싶지 않은 것이지 싫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20년 전에 맞춤옷인 콤비 상의가 새것처럼 보여 추울 때나 어중간할 때 가끔 입는데 이건 편하다. 그리고 잠바도 여러 벌이되 철마다 서너 번씩 입어준다. 이런 것을 보면 나의 옷에 대한 태도가 미적 기준이 아니라 실용적 기준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즉, 대강 걸쳐 편하고 기후에 적합하면 그만이지 그걸로 나의 외모를 향상시키려는 태도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걸 입더라도 별 차이가 없으니 내가 사지 않아도 관계가 없는 것이다. 나의 옷에 대한 태도가 실용적 기준이란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럼 왜 나는 실용적 태도로 옷을 대할까? 미적 기준으로 대하지 않는 것은 양복이 나의 외모를 그렇게 확실히 향상시켜준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건 양복 탓이 아니라 내 외모 탓이다. 양복은 오랜 시간의 연구와 인체실험을 거쳐 완벽한 외형과 질감과 색깔을 가졌으되 내 외모는 오히려 완벽한 양복에 누를 끼쳐 내가 양복에게 조금 도움을 받는 대신 양복은 나로 하여 치명적인 미적 타격을 받는 듯하다. 양복에게 미안한 느낌을 가져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오늘 처음 깨달았다. 아마 나는 무의식적으로 이런 미안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고 그래서 양복을 회피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외모로 말미암은 불가피한 실용적 노선의 선택이 아마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 될 듯하다. 이래서 한 번씩 하나의 화두로 깊이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럼 이런 실용적 노선은 나에게 어떻게 작용할까? 세 번째 의문은 유비추리로 해결해 보자. 김제동이 눈이 작다고 놀림을 받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쌍꺼풀 수술을 해 눈을 조금 키운다면 그건 김제동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할까? 오나미가 못 생겼다는데 – 어딜 고쳐야 하지? - 성형수술을 한다면 남자들이 오나미의 미모에 환호할까? 쌍꺼풀 수술를 한 김제동도 김제동이지만 문제는 사람들이 싫어한다는 것이다. 성형을 한 오나미는 오나미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은 눈과 못 생긴 외모는 이미 그들 삶의 중요한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이기에 이러한 신체적 단점을 극복했을 때 - 그건 완벽한 극복이 되지 못하고 일반인의 평범한 수준에 도달한 것에 불과하다 - 사람들은 긍정적으로 보기보다 낯설어 하고, 평범해져버린 그들의 외모에 실망을 느낄 것이다. 즉 작은 눈과 못난 외모가 남들에게 없는 그들만의 아이템이라 하겠다. 결국, 현명한 김제동은 쌍꺼풀 수술보다는 그 돈으로 책을 선택했고 그래서 작지만 총기에 반짝이는 눈을 가지게 되었고, 오나미는 성형 대신 몸매에 힘을 써 뒤태 미인이 되어 있지 않은가? 이를 나에게 대입시킨다면, 나에게 양복을 입어 외양을 가꾸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으니 내면적인 지혜나 더 나은 인격을 위해 독서를 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어진 것에 대한 긍정과 이를 바탕으로 한 내면 가꾸기가 나에게 적합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결국 난 제대로 갈 길을 잘 가고 있는 것이다. 김제동이 작은 눈으로도 모든 사물을 보고 오히려 남이 보지 못하는 사물 이면까지도 보니 힘써 행할 일은 따로 있는 듯하다. 그리고 청도에도 다 왔다. 내리면 되네.
(2014. 04. 27.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