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산(稷山) 유학 박기덕(朴基德)이 상언(上言)하기를,
“신의 6대조
박승종(朴承宗)에 대하여 전후에 걸친 조정의 논의에서 그 하자를 논박한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계축년의 옥사 때 참여하여 국문했다는 것과 궁문을 막아지켰다는 것과 이라고 하여 다른 두 사람과 함께 거론되었다는 것 등입니다. 그러나 계축년의 옥사 때 참여하여 국문했다는 문제는, 저의 할아버지가 그 당시 의금부 판사를 지내고 위훈(僞勳)의 명단에 이름이 끼었으므로 그에 대한 시비는 반드시 응당 받아들여 잘못을 인정할 일이긴 합니다만, 그 당시 명사들 가운데 누구는 위관(委官)이었고 누구는 위훈의 명단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대강 손꼽아 셀 수가 있는데, 지금 옥사를 다스렸다는 한 가지 일을 가지고 신의 할아버지에게만 죄를 돌렸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궁문을 막아지켰다고 하는 문제는, 그 당시 윤리가 장차 없어지고 서궁(西宮)이 곧 유폐될 상황으로서 흉악한 진당들이 틈을 엿보면서 무당굿을 기회로 삼아 변란을 꾀하기까지 하는 등 화가 일어날 조짐이 계속 터졌으니, 군사를 풀어 궁문을 지킨 것이 어찌 깊은 뜻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막아지킨 한 가지 일만 가지고 곧장 그 마음가짐과 행사를 판단하였으니, 어찌 극히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여러 들은 모두 때 벼슬을 지내고 그 당시의 일을 눈으로 직접 본 사람들이었으나 반정을 한 뒤에는 모두 신의 할아버지가 서궁을 보호한 공을 말하였고 대궐 군사로 막아지킨 것을 죄로 삼았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니, 이 또한 그 마음을 이해하고 그 행위를 용서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창이라고 싸잡아 함께 거론되었다는 문제는, 저의 할아버지가
유희분(柳希奮)·
이이첨(李爾瞻)과 불행하게도 모두 왕의 외척 신분으로서 다 함께 중용(重用)되었고 봉호에 창(昌)자가 들어간 것도 우연히 서로 같았으므로 당시에 사실 삼창이라고 지목을 받은 적은 있으나 그 마음가짐이나 행사를 논한다면 그들과는 너무도 달라서 향초와 악초, 얼음과 숯불덩이의 차이 정도만이 아니었습니다. 고 상신(相臣)
조익(趙翼)의 차자 내용에 언젠가 ‘
이이첨은 항상 옥사를 일으켰고
박승종은 보호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삼창이란 명목으로
이첨의 무리와 똑같이 취급하고 분간하지 않았으니, 이 어찌 영원토록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유감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할아버지는 왕의 외척으로서 혼란한 때를 만난 분이었습니다. 자신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물러나자니 종묘 사직과 흥망을 함께 하는 의리를 도외시할 수도 없었고 왕의 뜻을 거역하여 죽어버리자니 양궁(兩宮)을 보호할 책임을 부탁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10년 세월을 애쓰면서 온갖 일을 미봉해 나가다가 에 와서야 비로소 영의정이 되자 허균(許筠)·김개(金闓)가 모두 역모죄로 사형을 당하고 삼사(三司)가 비로소 이첨을 공격하였으니, 이는 신의 할아버지가 흉악한 무리를 배척한 성과입니다. 아버지를 보면 지돈령(知敦寧) 박안세(朴安世)가 인목 대비를 서인으로 폐하자는 정청(庭請)의 반열에 참가하지 않았고 아들을 보면 교리(校理) 박자응(朴自凝)이 위경(偉卿)의 상소문을 직접 찢어버리는 등 한 가문에 3대가 모두 충효를 가다듬었습니다.
그 고심과 피어린 정성은 언제나 윤리를 부지하고 바른 선비를 심는 데에 있었으나 다만 그 처지가 특별했던 관계로 밖으로는 권세를 탐한다는 비난을 받으면서 심적으로는 왕과 함께 죽어야겠다는 뜻을 지켜 가죽띠 주머니에 비상을 넣고 다니고 입춘날 지은 시에는 죽기를 빌었으니, 그 시를 읊는 사람은 천년 뒤에도 상심하기에 충분합니다.
승평 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瑬)·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가 아뢴 말중에는
박승종이 아니었더라면 서궁(西宮)이 보전될 수 없었고 신들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끝내 목숨을 내던진 것은 곧 본디부터 자처하던 것이었으나 조용히 의리를 지켰으므로 식견이 있는 자들은 칭찬하였습니다.
돌아가신 지 한 달이 지난 뒤에 비로소 소급하여 벼슬을 삭탈하는 처벌을 가하였는데 당초의 처분은
능창 대군(綾昌大君)을 용서하지 않은 것까지 소급하여 문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일이었으므로
홍호(洪鎬)가
한(漢)나라 주유(朱鮪)의 일을 인용하여 주인을 위해 죽은 절개를 덮어버리지 말 것을 청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의 할아버지가 폐조(廢朝)를 위하여 죽은 것은 절의라고 말할 것이 못된다고 하지만 예로부터 순절한 신하는 모두 혼란한 때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몇해전
유몽인(柳夢寅)에 대해 관직을 복구하고 시호를 내릴 때 임금께서 그를
길재(吉再)와
김시습(金時習)에게 견주기까지 하셨으니, 신의 할아버지의 진퇴가
몽인과는 비록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자기가 섬기는 사람을 위하여 본분을 다한 점을 가지고 논한다면 마땅히 구별이 없어야 합니다. 신의 할아버지
승종의 벼슬과 그의 아들
박자흥(朴自興)의 벼슬을 회복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의금부가 복계(覆啓)하기를,
“
승종이 지은 죄가 과연 어떤 것인데 세대가 이미 멀어진 지금에 와서야
기덕(基德)이 감히 함부로 논변을 한단 말입니까. 천만 놀라운 일입니다. 그의 상언을 들어주지 말고 해조로 하여금 법에 따라 엄중히 처벌하게 하소서.”
하니, 판하하기를,
“
박승종의 일은 오랜 세월 동안 공론이 결정되어 있지 않았으나 옛사람이 임금께 아뢴 말은 증거로 삼을 만하다. 그리고 그와 같은 처지로서 그처럼 특별한 면이 있었으니, 이를테면 주머니에 독약을 넣어두어 자기 혼자서만 살아남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나 억울한 옥사는 반드시 구제해주려 한 일, 흉악한 주장은 한사코 배척한 일 등이다. 그러므로
승평 부원군과
연평 부원군 등 몇 명의 공신들은
승종이 아니었더라면 서궁이 보전되지 못하고 신들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하였을 뿐만 아니라,
홍호(洪鎬)는
한나라 주유(朱鮪)의 일을 인용하여 주인을 위해 죽은 절의를 표창하자고 청하였는데, 그의 아비
박안세(朴安世)는 정청(庭請)에 참가하지 않았고 그의 아들
자응(自凝)은
위경(偉卿)의 상소문을 손수 찢어버렸다. 이 때문에 그의 집안 사람이 몇 해전 억울한 사정을 호소했을 때 마땅히 참작해보도록 하겠다는 뜻으로 판하했던 것이다.
본 사건은 여느 경우와는 약간 다르므로 기왕에 시행했던 비슷한 경우의 규례를 곧장 시행할 수는 없더라도 그 호소를 도외시해 버리는 조처를 취한다는 것은 시대 상황에 맞게 조처하는 법칙에 어긋나는 듯하다. 께서 반정했던 초기에는 조정의 처분상 그와 같이 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늘의 시점에서 성조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삼아 밖으로 드러내지 못했던 깊은 뜻을 드러내려고 한다면 또한 그 호소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춘추의 대의는 풍경을 구경할 때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모양이 바뀌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대신과 전임 금오 당상(金吾堂上) 등 여러 사람에게 이 문제를 물어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삼가 판부하신대로 대신과 전임 금오 당상 등 여러 사람에게 물었더니, 좌의정
이병모는 말하기를 ‘이전에
박기덕(朴基德)이 호소하였을 때 그는 신의 선조인
문정공(文靖公) 이식(李植)이
홍호(洪鎬)를 변호하고 구제했던 일을 근거로 삼았으나 신의 할아버지가 연석에서 극력 아뢰었던 것은 특히
홍호가 별다른 뜻이 없었다는 것만 밝혔을 뿐,
박승종이 억울한가 억울하지 않은가에 대해서는 언급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 당시 의논을 드릴 때 그와 같은 사실은 대강 진술한 일이 있습니다. 지금은 다시 다른 의견을 드릴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우의정
이시수(李時秀)는 말하기를 ‘
박승종에 관한 일은 그 후손이 억울함을 거론할 때는 항상 속마음과 행사는 달랐다는 것으로 말하지만 수백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는 단지 지극히 엄중한 명분과 의리만 있을 뿐, 그 진실을 밝힐 만한 증거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속마음과 행사가 같았는가 달랐는가 하는 문제는 사실 가려내기 어렵습니다. 종전에 있는 조정의 논의에서 약간 유동성이 있었던 것은 특히 죽음을 바친 한 가지 일 때문이었으나 도망가서 자살한 것은 나라의 어려움을 구제하다가 죽은 것과는 큰 차이가 있으니, 벼슬을 회복시켜주는 조처는 섣불리 논의하기 어렵습니다.’ 하였습니다.
봉조하(奉朝賀)
홍수보(洪秀輔)는 말하기를 ‘
박승종에 관한 일은 언젠가 야승(野乘)속에서 여러 사람들이 기록한 것을 상고해보았더니, 그의 속마음을 논하고 행사를 근거로 삼아 어떤 사람은 역사서에서 그 오명을 씻어줘야 한다 하였고 어떤 사람은 신원해 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쓴 것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중에,
정인홍과
이이첨 등 여러 흉적이 찾아와 속마음을 떠볼 때 마침 당 아래에서 새와 벌들이 날아다니는 것을 보고 저처럼 하찮은 것들도 군신과 모자간의 윤기를 안다는 등의 말로 책망하는 뜻을 분명히 보임으로써 마침내 그 두 흉적과 맞서게 되었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그러고보면 서궁을 보호하고 흉악한 논의를 극력 막았던 자취를 이것을 통하여 대강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에는 몸을 빠져 도망쳐 나와 부자가 함께 한 가닥 끈으로 목매달아 죽었으니, 이로써 그 속마음과 행사는 다시 논의할 만한 소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나 명분과 의리란 극히 엄중한 것이고 관계되는 바 또한 막중하므로 한두 가지 용서할 만한 단서로써 섣불리 용서해주는 조처를 논의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한성 판윤(漢城判尹)
이조원(李祖源)은 말하기를 ‘
박승종이 서궁을 보호하고
이첨과 사이가 좋지 않은 사실에 대해 비록 두 공신이 연석에서 아뢴 말이 있긴 하지만,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아 구제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유도하였고 결국에는 형세가 불리하여 돌아갈 곳이 없게 되자 절간으로 도망가서 스스로 목을 매었으니, 그 죽음이 애매합니다. 그런데 지금
유몽인(柳夢寅)에 실시했던 전례를 인용한다는 것은 신은 과연 옳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지돈령
이병정(李秉鼎)은 말하기를 ‘
박승종에 관한 일은 그 후손이 억울함을 거론할 때 비록 속마음과 행사는 서로 다른 점이 있다고 말하긴 하지만 다만 행사란 사실 환히 드러나는 것이고 속마음은 밝히기 어려운 법이므로 그 행사를 가지고서 속마음을 논한다면 과연 다르다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관계되는 바가 극히 중대하고 명분과 의리란 매우 엄중한 것이니, 신원하는 조처는 섣불리 논의할 수 없을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형조 판서
이득신(李得臣)은 말하기를 ‘
박승종에 관한 일은 속마음과 행사가 비록 다르다 하더라도 공론으로 볼 때 오히려 용서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 후손이 호소하는 사정은 혹시 인정할 수 있더라도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그 죽음이 일단 애매하고 범한 죄가 명분과 의리에 크게 관계되는 것이므로 수백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벼슬을 복구시키는 문제는 섣불리 논의하기 어렵습니다.’ 하였습니다.
병조 판서
이재학(李在學)은 말하기를 ‘
박승종에 관한 일은 반정 초기에 내린 처분이 엄정할 뿐만 아니라 사안이 막중한 의리에 관계되고 지은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처지이니 연대가 오래된 지금에 와서 그 후손의 호소로 인해 용서해준다는 것은 섣불리 논의할 수 없을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공조 판서
황승원(黃昇源)은 말하기를 ‘
박기덕이 그의 할아버지
승종을 위하여 억울함을 호소한 말은 비록 그와 같다 하더라도 세월이 오래된 문제를 혹시 조금이라도 잘못 처리한다면 앞으로 의리가 흐려지고 국법이 엄중해지지 않을 것이니, 이점이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기덕의 이른바 세 가지 큰 죄안에 대해 변명한 것은 이미 분명히 증명할 만한 단서가 없는 이상 그가 한 말은 모두 흐리멍덩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당시 성조(聖朝)께서 내린 처분이 지극히 엄중하고 단호하였으며 오늘날까지 백여 년 동안 굳게 지켜온 문제를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어렵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지중추부사
서유대(徐有大)는 말하기를 ‘
박승종의 범죄사실은 과거의 서책에 분명히 실려있는 이상, 비록 그 후손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일이 있더라도 관계되는 바가 극히 중대한 점으로 볼 때 용서해주는 조처는 섣불리 논의하기 어렵겠습니다.’ 하였습니다.
행 호군(行護軍) 이한풍(李漢豊)은 말하기를 ‘신은 지식이 모자라고 본디 고사에 어두워 지금 물어보신 것에 대해 감히 억지로 대답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이조 참판
이조승(李祖承)은 말하기를 ‘
박승종의 죄악은 공사간의 문헌에 모두 근거가 있습니다. 대체로 어린 종에게 압슬형(壓膝刑)을 가하여 무옥(誣獄)을 만든 것과 궁문을 굳게 닫고 조사를 배치하여 막아지킨 것은 곧
승종이 지은 죄상이며, 저 거사하던 날 밤에는 그의 아들
박자흥(朴自興)과 성을 넘어 도망가다가 체포망이 바싹 좁혀든다는 말을 듣고 으로 뛰어가 스스로 목을 매었으니, 이것이 곧
승종이 죽은 실상입니다. 지금
승종의 후손
기덕이 올린 상언(上言)의 내용으로 살펴보면 그 말들이 외람될 뿐만 아니라 사실을 꾸며댄 정상을 마디 마디 엄폐하기 어렵습니다. 그 중에서도 신의 선조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신
이귀(李貴)의 말을 인용한 내용은 온 세상사람이 다 모르고 있는 것을 그가 혼자 어디서 얻어들었단 말입니까. 여기서 더욱 그 심술이 교묘하고 나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밝혀낼 만한 것이 있습니다.
이첨이 형벌을 받기 직전에 소리치기를 「서궁의 변고에 대하여 나는 극력 그 논의는 중지하였는데 어찌하여 나를 죽인단 말이냐.」 하자, 신의 선조가 대답하기를 「너는 그 당시 비록 논의를 중지시켰다고 하지만 당초에 이 논의는 너에게서 처음 나왔으니 그 죄를 면할 수 있겠느냐.」 하였으니,
승종이 옥사를 조작하여 서궁의 변고를 조성한 것은
이첨과 갈라서 다르게 간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의 선조가 어찌
승종에게 대해서만 차이를 두어 말씀을 하였겠습니까. 그리고 정언
홍호(洪鎬)가 상소하여
승종을 변호할 때 신의 선조가 그 말을 엄하게 물리쳐 연석에서 아뢰기까지 하였는데, 더구나
승종에 대하여 어찌 용서하였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인묘조께서 내리신 분부속에 「
승종의 부자는 권력을 주물러 국사를 그르치고 무고한 사람을 모함해 죽인 죄는
희분(希奮)과 똑같다.」 하는 말씀이 있었고, 또 하교하기를 「
승종은 비록 서궁을 폐서인 하자는 논의를 극력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비밀히 사주하여 옥사를 일으킨 것은
이첨과 다를 것이 없다.」 하셨으며, 삼창(三昌)의 죄악은 서로 차이가 없는 것 같다는 분부를 내리기까지 하시고 특별히 처분을 가하셨습니다. 도저히 용서 될 수 없는
승종의 범죄에 대해서는 비록 연대가 멀어진 뒤라 하더라도 마땅히 국법을 굳게 지켜 변동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신은 달리 드릴 만한 말이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병조 참판
홍성연(洪聖淵)은 말하기를 ‘
박승종에 관한 일은 그 마음과 행사를 논한다면 비록 용서할 만한 단서가 있다 하더라도 그 죄명을 돌아보면 실로 관계되는 바가 중대합니다. 신의 얕은 소견에는 달리 논의하기가 어렵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예조 참판
정대용(鄭大容)은 말하기를 ‘
박승종에 관한 일은 전후의 뛰어난 인물들이 정상을 참작하여 용서하자는 논의가 없지 않았으나 증명문건에 죄명이 확실히 드러나 있고 역사서에 여기 저기 기록되어 있으므로 세월이 오래 지난 오늘날에 와서 감히 아래에서 뭐라고 의논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행 호군
김이익(金履翼)은 말하기를 ‘신은 일찍이 서궁(西宮)의 옛사건에 대해 생각이 미치기만 하면 쓸개가 뒤틀리는 것 같고 말이 미치기만 하면 두 눈이 금방 찢어졌었는데, 지금 뜻밖에 흉악한 역적
승종의 후손
기덕이란 자가 삼척(三尺)의 국법을 무시하고 백대의 공안을 어지럽히기 위해 함부로 상언을 올렸으니, 놀랍고 분개하여 사실 아무말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고 상신
이정귀(李廷龜)의
《문견록(聞見錄)》에 말하기를 「
심우영(沈友英)의 10여 세된 어린 아들이 대군(大君)을 왕으로 추대하였다.」고 허위로 자복한 뒤에 의 노복들을 고문했는데 누구 하나 승복한 자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12세된 아이종이 하나 남았는데 율관(律官)이 나이가 아직 어려 형장을 칠 수 없다고 말하자
박승종이 큰소리로 말하기를 『
김가의 노복으로는 이 아이 하나만 남았으니 이 아이에게 형장을 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단서를 찾아낼 길이 없다. 형장은 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압슬(壓膝)도 할 수 없단 말이냐.』 하여, 마침내 그 아이를 압슬하니 무당
고상(高祥)이 드나들었다고 거짓으로 자백하였고,
고상은 대비께서 항상 성상의 나이가 어느 때가 좋고 나쁜가에 대해 물었다고 거짓으로 자백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이 옥사는 계축년에 그 조짐이 조성되었다가 이때에 와서 현실로 드러났는데, 사실은
승종이 어린아이에게 압슬형을 가함으로 인해 그 무함이 대비에게 미침으로써 서궁에 유폐시키는 단서를 열어놓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을묘년 정월에 있었던 일로서 그 달이 넘어가기 전에
광해가 대비를
경운궁(慶運宮)으로 옮겨모시고 분사(分司)를 설치해 지켰는데,
승종이 연석에서 금병의 수효를 늘려 궁문을 막아지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계해년 3월 반정한 다음 그달 19일에 전교하시기를 「삼창(三昌)의 죄는 서로 차이가 없는 것 같다.」 하시고
승종의 벼슬을 소급하여 삭탈하고 적몰(籍沒)할 것을 명하셨으니, 임금께서 진실을 보신 것이 똑바르고 하신 말씀 또한 분명합니다. 이것이 어찌
승종에 대한 일대 단안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삼가 우리 나라의 역사기록을 상고해보았더니 「반정하던 날 저녁에
승종은 수상(首相)으로서 국청(鞫廳)에서 도망하여 자기집으로 돌아와서는 사돈집 의 상복을 얻어입고 그의 아들인
경기 감사 박자흥(朴自興)과 함께
수구문(水口門)을 넘어 곧장 그의 친족인 양주 목사(楊州牧使)
박안례(朴安禮)의 임지로 달려가
안례로 하여금 군사를 출동시키게 하여
두험천(豆險川)에까지 갔다가 비로소 왕위가 바뀌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승종 부자는 자기집 선산으로 달려가 무덤 밑에서 마침내 약을 마셨다.」고 하였습니다. 설사
승종이 능히 왕사(王師)와 대항하여 싸우다가 칼에 맞아 죽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죽어도 속죄를 못한 것으로서
《춘추》에서 이름을 써주지 않고
《강목(綱目)》에서 죽었다고 인정해 주지 않은 경우에 불과합니다. 이 때문에
승종의 벼슬을 삭탈하라는 명이 내리던 날
홍호(洪鎬)가 상소하여 그를 변호하자, 헌부가 계사를 올려
홍호의 죄를 논하고 아울러
승종의 패역한 행위를 언급하였는데, 그속에 「
승종의 죄는
이첨 희분과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라고 한 말이 있고, 끝부분에 가서는 또 「몸을 빠져 도망갔다가 처지가 다급하고 힘이 모자라자 화를 면하지 못할 줄 알고 자결하였다.」라고 단정지었으니, 이는 곧 극히 엄정한 필단이며 공공연한 성토입니다.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신
이귀(李貴)는 가슴에 품은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아뢰고 무슨 일이건 말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 곧 그의 평소 집념입니다. 혹시
승종의 마음과 행사에 대하여 용서할 만한 단서가 털끝만큼이라도 있었다면 숨김이 없는 그의 성품으로 볼 때 반드시 집안에 전하는 문자가 있을 것인데, 지금 그의 문집에 조금이라도 비슷한 말이라고는 아예 없습니다. 고 상신
조익(趙翼)의 일로 말하더라도
조익이 계해년 5월에 차자를 올려
홍호를 구제하기를 「
홍호의 말이 비록 망녕된 것이긴 하지만 신하가 가슴에 품은 생각이 있을 경우 반드시 아뢰는 의리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니, 하교하시기를 「
승종이 비밀히 사주하여 옥사를 일으킨 죄는
이첨 등과 다를 것이 없는데 너는 그러한 사정을 잘 몰라 이런 말을 하는가.」 하셨습니다. 그 당시 사실들은 이런 정도에 지나지 않은 만큼
승종이 그런 문제로 인하여 죄명을 벗을 만한 계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른바
박안세(朴安世)가 정청(庭請)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문제는,
안세가
승종을 아들로 두었는데
승종이 그 당시 임금의 악을 조장하며 아침저녁으로 가까이 지내는 상황이었으니
안세가 비록 백번을 참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 벌을 받을 염려가 있겠습니까.
박자응(朴自凝)이
위경(偉卿)의 상소문을 손수 찢어버렸다는 문제는, 대체로
위경이 그 상소문을 썼던 때는
승종과
이첨이 이미 사이가 벌어져 서로 다투었기 때문에
위경의 상소문이
이첨의 지시에 의해 나온 것을 미워하여 그랬던 것이며
자응이 결국에는 또
효립(孝立)의 옥사에 끼어들어갔으니, 대대로 악행을 저질은 작태를 이로써 더욱 볼 수 있습니다. 저
박기덕(朴基德)이란 자는 감히 세대가 오래된 것을 빙자하여 그의 조상의 오명을 지워볼 심산으로 함부로 임금의 은혜를 빌어 마치 예사로운 일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처럼 하였는데, 이는 비록 근래에 인심이 날이 갈수록 무엄해지는 풍조에서 나온 것이긴 하나 사실은 국법이 너무 허술하고 은전이 무뢰하게 내려지는 점들이 그와 같은 행위를 유도한 것입니다.
기덕이 상언한 뒤에 담당 승지는 외람되게 생각하여 곧장 빼버리지 않고 무턱대고 임금에게 올렸으며 의금부는 특별한 내용으로 그 죄를 논박하지 않고 관례에 따라 회계하였으니, 국법을 엄하게 지키고 한 사람을 징계하여 백 사람을 격려하는 도리로 볼 때 마땅히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행 호군
이면응(李冕膺)은 말하기를 ‘지금
박승종의 후손
기덕이 사실을 호도하여 여러 번 임금께 호소한 행위는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무엄한 것이며, 비록 그가 스스로 변명한 말을 가지고 논한다 하더라도 하나도 믿을 만한 단서가 없습니다. 그가 인용한
연평 부원군 이귀는 곧 신의 선조인데 문집과 상소문을 상고하고 집안에 전해내려오는 말들을 살펴보아도 본디 한 마디나 반 마디도
승종을 변호한 것은 없습니다.
홍호가 상소하여
승종을 두둔하였다는 문제도 사적인 사정으로 한쪽을 두둔하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서 그 당시 대간의 논의가 크게 일어나 성토가 엄중하였으며, 신의 선조께서도 법으로 처단하고 위엄을 적용해야 한다고 청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증거가 될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승종은 곧 이른바 삼창(三昌)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것과
능창 대군(綾昌大君)을 모함하여 해치고 어린 종에게 압슬형을 가하여
광해군을 저주했다는 옥사를 조성한 것과 군졸을 둘러싸서 서궁을 유폐한 조치를 취하게 한 것이 세 가지 큰 죄안인 것입니다. 연대가 오래된 지금 그 후손이 거짓으로 꾸민 말을 가지고 섣불리 달리 논의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공조 판서
이서구(李書九)는 말하기를 ‘
박승종은 한 나라의 수상으로서 윤리가 두절되는 것을 좌시하여 임금의 악을 유도하고 비위를 맞추었을 뿐, 한 마디도 그 잘못을 바로잡은 적은 없었으며, 옥사를 혹독하게 다스리고 서궁을 엄중하게 지키는 일들이 또한 다 그의 손에서 나오기까지 하였으니, 설사 순절로 목숨을 바쳐 자기가 섬기는 왕에게 충성을 다했다 하더라도 기왕에 지은 죄를 한번의 죽음으로 갚기에는 너무 부족합니다. 더구나 그 죽음 또한 스스로 그 죄를 알고 계책이 궁해 달리 빠져나갈 곳이 없었던 것에 불과한 것이니, 어찌 두 마음을 갖지 않기로 맹서하여 죽더라도 뉘우침이 없었던
유몽인과 똑같이 견줄 수 있겠습니까. 명분과 의리가 극히 중하고 국법 또한 엄중하므로 신원하고 벼슬을 회복시키는 조처는 논의하기 어렵겠습니다.’ 하였습니다.
대사성
이만수(李晩秀)는 말하기를 ‘
박승종에 관한 일은 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런 저런 논의가 여러 번 나왔습니다만, 수상으로 있으면서도 삼창의 지목속에 달갑게 끼어 들었고 흉론을 직접 보고서도 그것을 바로잡는 말은 한 마디도 없었으니, 명분과 의리가 극히 중하고 죄안이 명명 백백합니다. 이른바 이란 당호(堂號)와 주머니에 약을 넣고 다녔다는 말 등 밖으로 나타난 흔적으로 속마음을 추리한다는 것도 아무래도 미심쩍습니다. 다만, 그가 최종에 한 번 죽은 것이 비록
유몽인이 뛰어나게 스스로를 깨끗하게 보전한 경우와는 크게 차이가 있긴 합니다만,
성조께서 반정하신 당시에 조정에 벼슬하던 사람으로서 자기 생명을 바친 자는
승종 한 사람 뿐이었으니, 자기가 섬긴 임금에게 마음을 다했다는 것을 가지고 용서해 준다면 혹시 전하의 관대한 정사에 도움이 될 듯합니다. 그러나 신원하고 벼슬을 회복시키는 조처는 사안이 극히 엄중하므로 신의 얕은 소견으로는 감히 억측으로 대답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도승지
민태혁(閔台爀)은 말하기를 ‘
승종의 범죄사실은 나라의 역사서에 실려있을 뿐만 아니라 계해년 부제학
조익(趙翼)이 올린 차자에 대한 임금의 비답에 「비밀히 사주하여 옥사를 일으킨 죄는
이첨과 다를 것이 없다.」는 분부가 계셨고 벼슬을 삭탈하고 재산을 몰수하였습니다. 아, 서궁의 화는 모두가 삼창의 죄이지만
승종이 궁노(宮奴)에게 혹독하게 압슬형을 가한 이후에 가서는 그가 삼창의 괴수라고 말하더라도 맞습니다. 지금 만일 그의 후손이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하여 죄를 벗겨주는 조처를 취한다면 앞으로 몇 개의
박기덕(朴基德)이 꼬리를 물고 일어날지 모릅니다.’ 하였습니다.
호조 참판
이의필(李義弼)은 말하기를 ‘
박승종이 서궁을 보호한 사실이 과연 두 공신이 임금께 아뢰었던 대로라면 그 본심을 따져볼 때 비록
이첨 등 다른 적들과는 약간 차이가 있긴 합니다만, 그는 임금과 인척관계에 있는 신하로서 수상의 자리에 앉아 윤리의 큰 변괴를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그것을 바로잡는 말이 한 마디도 없었다는 것이 곧 그를 평가하는 단안이니,
유몽인과 견주어 똑같은 경우로 논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행 호군
윤필병(尹弼秉)은 말하기를 ‘
박승종에 관한 일은 비록 용서해 줄 근거로 삼을 만한 문헌과 논의가 있다 하더라도 그 당시 공신들이 아뢴 것과 옥당의 차자 내용이 서로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의리가 극히 엄중한데 어찌 감히 달리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동지중추부사
심기태(沈基泰)와
유한모(兪漢謨)는 말하기를 ‘
박승종에 관한 일은 조야의 기록에 여기 저기 나타난 것을 보면 혹자는 그 마음을 동정하는가 하면 혹자는 그 행적을 따지고 드는 등 이 사람 저 사람 하는 말이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초에 내린 처분이 일단 엄정한 것인 만큼 이제 와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은 참으로 외람됩니다.’ 하였습니다.
대사간
송전(宋銓)은 말하기를 ‘
박승종이 윤리가 끊어질 당시 있는 힘을 다하여 보호하였으니 그 마음이 가상하고 반정으로 해와 달이 다시 새로워졌을 때 목숨을 끊어 스스로 속죄하였으니 그 사정이 애닳습니다만, 명분과 의리가 극히 중하고 국법 또한 엄중하기 그지 없으므로 섣불리 달리 논의하기란 어려운 듯합니다. 대체로
승종은 곧 삼창 가운데 한 사람의 적신(賊臣)입니다. 흉론을 맨 처음 제기한
이첨과는 다르지만 서궁의 문을 막아지킨 조처는 사실 그의 손에서 나왔으니, 설사 형편과 사정에 구애되어 그런 것일 뿐 진정으로 하고 싶어서 한 일은 아니라 하더라도 나라에 화를 입히고 윤리를 파괴함으로써 죄악이 극에 이른 상황으로 볼 때 그 속마음과 행사가 다르다는 것을 가지고 논할 일은 아닙니다. 더구나 그의 아들이 군사를 동원한 문제는 오로지 폭군을 돕자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 결국 천리를 범한 행위이니, 자신의 절개를 깨끗이 지킨
유몽인의 의리와는 너무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 가서 자살한 문제는 궁지에 몰려 달리 빠져나갈 길이 없었던 결과에 불과한 것으로서 그것은 진정
《춘추》에서 이름자를 써주지 않는다든가
《강목》에서 죽음을 인정해 주지 않는 경우에 해당 됩니다. 어찌 세월이 오래 지났다 하여 엄중하기 그지없는 의리에 대해 정상을 참작하여 용서해주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박기덕이 인용한 여러 설들은 다 분명한 것이 아닌데 그것을 가지고 여러 차례 임금을 번거롭게 하는 작태는 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상언 속에 들어있는 사연은 들어주지 마소서. 신은 마땅히 그 죄에 해당되는 벌을 적용할 것을 청할 일이지만 이미 대신과 전임 금오 당상 등 여러 사람에게 물어서 아뢰라는 명이 계셨기 때문에 우선 의견을 올려 상께서 재결하시길 청합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47책 20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