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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암 소재 시가의 배경과 성격
- 시민 문화공간으로 개발하기 위한 기초 연구
The Backgrounds and Characters of Ipam-mattered Poems
김윤규(한동대학교 교수)
1. 도입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에 있는 立巖 28경은 임진왜란 시기에 旅軒 張顯光이 명명한 뒤로 많은 문인들이 경치를 완상한 시편들을 남김으로써 한국문학사에 중요한 유적이 되었다. 또한 명명시로부터 400년을 지나면서 이제는 당시의 선인들이 완상한 경관을 따라가면서, 그분들의 학문과 문학적 성취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유적으로서의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
죽장면은 옛 신라시대 長鎭이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영천지역 臨皐郡의 속현으로 있었다. 그 뒤 고려시대에는 한때 竹長部曲이 되어 慶州府 소속의 任內지역이다가 조선 초기에 竹長縣으로 승격되고 조선 후기에 면제도가 시행되면서 慶州郡 竹長面이 되었다. 그 뒤 다시 淸河郡 竹長面으로 바뀌었다가, 청하군이 영일군에 병합되면서 迎日郡 竹長面이 되고, 시군통합으로 현재 浦項市 竹長面까지 변천되어 왔다. 그런데 이런 변천의 과정 속에서도 죽장면의 중심지인 立巖里만은 원래 永川郡 北村 古新驛里로서 임고군 장진현이 죽장부곡으로 바뀔 때 그대로 영천군 관내에 남게 되어 越在他邑하게 되었으므로 越境地 또는 飛入地로 불리었다. 이처럼 경주 또는 청하 관내에 동떨어진 영천 땅이 들어 있는 현상은 조선 시대까지 지속되어서 입암지역은 여러 자료에 永川 臨皐 또는 紫陽 立巖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금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는 죽장면소재지이며 죽장 장터가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 청년들이 많이 떠나면서 인구는 줄었지만, 포항 청송간 31번 국도와 포항 상옥 옥계간 923번 지방도로가 만나는 갈림길이므로 교통량이 많다. 장터거리 입암리 갈림길에서 동북방향 상옥리 쪽으로 300미터가량을 가면 입암이 있으며 이 부근에 입암 이십팔경이 흩어져 있다. 입암 앞을 흐르는 시내는 佳士川이며 입암 뒷마을은 솔내, 솔안마을로 한자로는 松內라고 써서 秘記類 신봉자들에게 피란지로 알려져 있다.
이곳 입암이 전국적으로 명소가 되고 문학작품의 산실이 된 것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 旅軒 張顯光(1554-1637)이 와서 살면서 각 명소를 명명하고 시를 지으면서부터이다. 旅軒은 1592년 임진왜란기에 이곳을 방문한 이후 1596년 43세경부터 정유재란기에 立巖에 머물렀다. 그 뒤 이곳의 경치와 학문여건을 사랑하여 정자를 짓고 문하를 모아 학문을 강토하고 저술하였으며 다양한 出處를 거쳐 1637년 84세에 이곳에서 별세하였다. 立巖書院은 旅軒 사후에 그 강학 완상하던 곳에 여헌과 당시 선비들을 제향하여 세워진 서원이다. 여헌 당년에 그를 따랐던 東峯 權克立(1558-1611), 愚軒 鄭四象(1563-1623), 綸庵 孫宇男(1564-1623), 守庵 鄭四震(1567-1616) 등의 선비들이 먼저 이곳을 답사하고 터를 잡고 집을 지은 다음 여헌을 청하여 머물게 했다고 하며, 여헌은 그들과 함께 인근 절경들의 이름을 짓고 노래하며 찬상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름을 얻은 곳이 立巖 二十八景으로 크고 작은 것들이 다 빼어난 경치를 지니고 있고 그 이름들도 명명자의 학문적 태도와 풍류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 분포는 멀리 입암리 남쪽 일광리 북쪽 洗耳潭으로부터 입암리 일원과 동쪽 매현리 産芝嶺에 이르기까지 걸쳐 있다. 일찍이 포항의 다른 지역에서도 자주 선인들이 명명한 팔경 또는 십경류들이 있었다. 그러나 몇몇 예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이를테면 西嶺暮雨 南亭送客 등으로 관념적인 정경을 다룬 데 반해 입암이십팔경은 그러한 관념을 배제하고 인공적인 건조물을 포함하지 않은 전적인 實景으로만 명명되었다는 것이 의미있다.
현재 입암 인근의 정황은 다음과 같다. 여헌 당시에 명명된 사물들 중에 원래 인공 건조물이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의 인공 구조물들은 그 뒤 부가 건축된 것들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1657년에 건립되었다가 훼철과 소실을 거쳐 1972년에 다 복원된 입암서원이 있고, 여헌 당시에 지었다고 전해지는 萬活堂, 역시 당시에 지었으나 누차 소실되고 복원된 日躋堂이 있다. 그 밖에 입암서원 서쪽 만활당 뒤편 언덕에 동봉 권극립을 기념하는 비석이 최근에 세워졌으며, 피세대 건너편 하천부지에 노계 박인로 시비가 2001년에 건립되었다.
명명된 자연물들 중에도 훼손된 것들이 있다. 입암 서쪽에 響玉橋라는 돌다리가 있었으나, 새마을운동 과정에서 새 다리를 놓으면서 시멘트로 덮어서 옛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다. 향옥교 하류방향으로 畵裏臺가 있었으나, 농민들이 땅을 갈아엎고 돌을 골라내서 지금은 당시의 모습과 다른 것으로 보인다. 화리대 건너편으로 입암에서 장터거리까지 惹烟林이라는 숲이 있고 나무가 울창했다고 하지만, 지금은 다 농지로 개발해서 숲은 전혀 없다. 장터거리 북쪽으로 31번 국도가 청송으로 나가는 머리에 佳士川과 紫玉川이 만나는 곳으로 合流臺가 있었는데, 도로를 내면서 파괴하여 지금은 자옥천 쪽 일부만 남아있다. 합류대 하류방향 죽장초등학교 뒤편으로, 두 내가 합류한 직후 좀 넓은 여울이 만들어져 비교적 천천히 흐르면서 釣月灘이 있었는데, 주택지를 만들면서 강을 좁히고 매립하여 지금은 찾을 수 없다. 입암 28경의 가장 바깥쪽 경물은 洗耳潭이었는데, 영천에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오다가 招隱洞 골짜기 맞은편의 절벽 아래가 깊은 소였다고 하는데, 국도를 내면서 물길을 바꾸어서 지금은 맞은편이 소가 되어 있다.
이처럼 당시의 경물과 달라진 부분이 없지 않지만, 28경 중에서 5경 정도가 당시의 모습을 잃었을 뿐, 비교적 큰 변화 없이 대부분 경물이 현재도 당시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 경물을 잘 소개하고 선인의 문학적 성취를 잘 정리하면 현대인에게 문화적 감화를 주는 유용한 유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문은 경주대학교 문화컨텐츠 연구의 일환으로, 입암의 경관을 배경으로 창작된 시편들을 정리하고 번역하여 각 경물들과 대응 검토함으로써, 이 경관들을 노래한 선인들의 문학적 태도를 점검하고, 경관의 아름다움이 문학적으로 구현되는 양상을 설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입암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을 연구한 업적은 적지 않다. 그러나 이들 업적이 거의 여헌 장현광과 노계 박인로의 문학에만 집중되어 있고, 연구중에 다른 작가들을 예거하더라도 극히 일부 작품만 들어서, 입암문학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는 크게 미흡한 바 있었다. 이에 이 논의에서는 입암을 소재로 한 시편들을 최대한 수집하여, 아직까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한시들을 포함하여 현재로서는 전량 정리하였다. 필자의 미숙함으로 인해 미처 정리하지 못한 시들이 있으면 다음 기회에라도 추가하여 번역 정리함으로써 입암시편들에 대한 완역을 꾀할 것이다. 이미 번역된 작품들도 다시 검토하여 지역의 정서와 경물에 맞추도록 노력하였고, 새로 소개되는 작품들도 번역하여 자료로 삼기로 했다. 논의하는 본문에서 한문시가를 인용하는 경우, 논문의 산만함을 줄이기 위해 원문만을 인용하고, 목록과 원문과 번역문은 말미에 자료로 첨부하였다.
2. 입암 소재 시가 창작의 경과
입암 이십팔경이 문학의 소재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은 명명자인 여헌 자신의 시편 <立巖十三詠>에서부터이다. 여헌은 입암에 들어온 뒤 입암의 경물들을 즐기면서, 바로 각 사물에 대한 명명을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각 명명된 사물에 대한 설명과 감상을 붙여 기문을 지어 남겼다. 이렇게 명명한 경물들에 대해 여헌은 계속하여 애정을 가지고 다양한 형식의 글로 입암을 찬상하였다.
입암에 대한 여헌의 산문작품은 위의 <立巖記>와 <立巖精舍記>(이상 여헌집)의 두 기문이 있고, <立巖說>(여헌속집)이라는 잡저가 있다. 시문으로는 <立巖十三詠>(여헌집)에서 명명당시의 의도와 근사한 표현을 보였으며, 개별 작품으로 <立巖>, <精舍>, <前澗>, <戒懼臺>(이상 여헌집), <避世臺>, <小魯岑>, <起予巖>, <日躋堂>, <主靜齋>, <合流臺>, <隔塵嶺>, <鶴浴潭>(이상 여헌속집)이 따로 있으며, 장편 賦로 <萬活堂賦>(여헌집)가 있다. 이들 작품은 여헌 당년의 작품이며 여헌의 경물 명명 의도가 강하게 드러나 교술적 성격이 짙은 작품들이다. 여헌은 이들 작품에서 자신의 학문적 성취와 가치관을 교훈적으로 강조하였다.
여헌과 함께 입암에 살았던 이른바 四友의 문집에서는 입암을 노래한 시편들이 발견되지 않았다.
여헌과 함께 입암을 노래한 당시의 시인으로 蘆溪 朴仁老가 있었다. 노계시가로는 <立巖> 연작시조와 <立巖別曲>이 있는데, <立巖> 연작시조는 현재 29수가 전해지고 있으며, <立巖別曲>은 필사본 상태에서 발견되었다. 노계는 무관직에서 은퇴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여헌을 찾아온 것으로 보인다. <立巖> 연작시조는 “旅軒先生 命題”라고 되어 있다고도 하며, 노계집에서는 여헌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라고 하였다. 노계는 입암에서 여헌을 만나 자신의 학문적 성과에 큰 도움을 받았고, 문학작품으로서의 성취도 많이 이룰 수 있었다.
그 뒤 입암지역에서는 東峯의 후예들인 안동 권씨들과 愚齋 孫仲敦의 후예들인 경주 손씨들이 함께 문화적 선두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 중에서 영조때의 선비 東窩 權得重은 동봉의 현손이며, 逋庵 權周郁은 동와의 5대손, 何山 權丙洛은 포암의 손자이며 是巖 權錫瓚과 聾石 權丙基도 그 일족이다. 동와는 <偕鄭汝輝煜登戒懼臺>와 <次孫重器浴鶴潭>을 남겼고, 포암은 <次立巖二十八景韻>을 남겼다. 시암은 <日躋堂小會>, <合流臺會話>, <避世臺會話>, <嘆合流臺無痕> 등을 썼고, 농석은 <次立巖二十八景韻>을 남겼다.
우재의 후예로는 魯岑 孫汝斗와 逸休齋 孫汝奎의 후손들이 작품창작에 다양하게 참여하였다. 이들의 문학활동은 경주 손씨 가문의 종합문집인 魯村世稿에 정리되어 있는데, 노잠의 아들 鶴潭 孫是完은 鶴潭逸稿에서 <浴鶴潭>을 남겼고, 일휴재의 아들 松窩 孫是椅의 아들인 영조 정조 시대의 문인 含翠亭 孫東杰은 <立巖書院二十八景吟>과 <戒懼臺次鄭梅軒韻>, <日躋堂呼韻贈鄭梅軒> 등을 남겼다.
입암지역에 세거하는 가문만이 아니라, 입암을 다녀가는 사람들에 의한 입암시가도 많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영조시절 안강의 선비로 입암에서 머무른 바 있는 梅軒 鄭煜은 <立巖二十八景>을 시로 남겼다. 이러한 각 시편들은 일차적으로 여헌의 명명의도를 존중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가지지만, 각 시인의 개성과 지향에 따라 독자적인 인식태도를 보이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3. 입암 소재와 시가의 대응
입암 이십팔경을 노래한 시편들은 각 시인마다 독자적인 순서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창작자의 판단에 의한 것일 터인데, 상이한 순서가 큰 의미차를 가진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어떤 경우에도 立巖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고, 그 밖의 경물은 시인의 안목에 접한 순서대로 창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제 입암의 사물들을 소재 시가와 대응하면서, 일단 순서는 명명자인 여헌의 <立巖記>를 기준으로 하여, 현재의 위치를 설명하고 현황을 살핀 뒤에 그 사물에 대응하는 시편들의 특징을 들어 이해를 돕도록 한다.
3.1 立巖
立巖은 이 지역 지명의 근원이며 모든 경치의 중심사물이다. 위치도 이십팔경의 한가운데 있으며, 크기와 빼어남이 독특하여 가장 먼저 눈에 띈다. 立巖은 나중에 그 성격을 강조하여 卓立巖이라고도 불렸는데 일제당의 서쪽에 있다. 면소재지 장터거리에서 입암마을 평지리 앞으로 해서 상옥쪽으로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바위이다. 立巖의 앞에 鏡心臺와 數魚淵이 있고, 뒤에는 戒懼臺와 起予巖이 있다.
여헌은 <立巖記>에서 이 바위를 설명한 뒤에 자신의 시 <立巖十三詠>의 선두에서 “老矣無可往 從今學不移”라 하여, 이 바위처럼 흔들리거나 움직이지 아니함을 본받으리라는 생각을 구현한 시를 남겼다. 여헌은 十三詠 이외에 또 다시 장시 <立巖>을 지어, “此樣旣往萬 此樣應來億 不倚是中道 不回惟經德”라고 노래하였다.
노계는 <立巖> 연작시조의 10수를 동원하여 이 입암을 노래하였다. 그러면서 “만고애 곳게선 저 얼구리 고칠적이 업다”라든가, “사도 이 바회면 大丈夫가 노라”라는 표현에서는 입암의 直立不倚함에 대한 찬양을 보여주었다. 또한 노계는 바위에게 묻고 바위가 답하는 형식의 시조를 통해 바위의 교훈적 장점을 하나하나 열거하고 있다. 이러한 노계의 태도는 입암을 단순히 바위로 파악하지 않고 성리학적 가치관의 상징물로 인식한 여헌의 태도로부터 영향받은 바 컸을 것으로 보인다.
함취정 손동걸은 입암 연작차운시에서 입암을 卓立巖이라 부르고, “誰借巨靈斧 劈成卓爾巖 高堅彌鑽仰 聖道宜玆監”라고 노래하면서 그 높고 굳음과 함께 그것이 성인의 가르침을 구현하고 있음을 칭송하였다.
여기에 비해 농석 권병기는 그의 입암 차운시에서 “總括煙霞饒作榷 此山之外多虛殼 挺然高出雲端危 也是天台露一角”라고 노래하여 교훈적 의탁보다 구체적이고 절실한 묘사에 주력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매헌 정욱은 입암연작시에서 역시 탁립암이라고 부르고 “獨立萬千年 高堅終不拔 風波容易度 能似丈夫節“라 하여 그 흔들리지 않음을 대장부의 절개와 비슷하다고 노래하였다.
결국 어느 시기의 작가이든지, 대체로 입암을 노래한 시인들은 바위의 물질적 성격을 넘어서 바위의 우뚝함과 불변함을 강조하여 교술적으로 인식하고 형상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3.2 起予巖
起予巖은 立巖의 북쪽이며, 日躋堂에서 小魯岑 방향의 바위언덕이다. 소로잠 앞의 마을에서 입암쪽으로 나오다가 들 가운데 우뚝 솟은 바위언덕인데 위에는 험한 바위들과 해묵은 나무들이 서 있고 남면은 절벽이다. 오를 수 있는 길은 서쪽에만 있으며, 위에는 바위가 험해서 앉을 수 없다. 戒懼臺에서 오르려면 서쪽으로 돌아서 바위틈으로 올라야 한다. 그 명칭은 논어에서 유래하였으며 여헌 자신은 自有所起發하다 하여 기여암이라 부른다고 했다.
여헌은 독립된 시 <起予巖>에서 “耄性本自頑 名巖躬實警 起者何獨予 吾徒試共省”라고 하여, 바위를 통해 완고해진 우리 자신을 반성해야 한다고 읊었다. 이는 공자의 起予者商也 이미지를 받아들여 표현하려는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며, 載道의 문장을 쓰는 전범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 명명 자체가 이렇게 되어 있으므로 어떤 작가라도 같은 이미지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노계는 “夫子의 起予者 商也라 드러더니/오 起予者 말업 바회로다/어리고 鄙塞던 이 절로 롭다”라고 노래하여, 여헌이 처음에 의도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함취정 역시 “相看兩不厭 特立一奇巖 引以喩啇也 名言知不凡”라는 시에서, 名言의 교훈을 변이없이 받아들이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농석도 “有巖矗立日躋傍 夫子高風尙激昂”라고 하여 공자의 높은 풍도를 찬양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다.
다만 매헌은 같은 기여암을 노래하면서도 기여암 자체를 노래하지 않고 그 아래 뿌리내린 대나무를 대상으로 잡아 “特地高標旅老墟 一般商賜孔門於 此君不是無心在 巖下亭亭又起予”라고 노래하여 비유의 대상을 확대하는 효과를 얻고 있다.
3.3 戒懼臺
戒懼臺는 起予巖과 立巖의 사이에 있는 절벽이다. 기여암에서 남쪽으로 약간 낮은 바위 평면이 있는데, 그 평면의 남쪽면은 깎아지른 절벽이다. 그러므로 이 대 위에 서는 사람은 누구든지 두려운 마음을 갖는다고 해서 중용의 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에서 戒懼라는 이름을 지었다. 또한 이는 잠시라도 道를 떠나지 않도록 敬畏하여 마음에 천리본연의 상태를 유지해야 함을 함축한 말이기도 하다. 여헌 자신은 입암의 여러 경물 중에서 이 계구대를 자주 언급하고 시편으로 형상화하기도 했다. 그것은 이 대의 깎아지른 모습과 戒懼의 어의가, 여헌이 추구했던 유교적 덕목과 유관하기 때문이었다. <立巖記>는 명명된 이유를 “三面皆危壁 必常有臨深戒懼之心 故名其臺曰戒懼”라고 했다.
여헌은 십삼영 가운데 계구대를 노래한 시에서 “聖訓戒危微 何人無此心 此學不傳久 陳篇誰復尋”라고 하여 성인의 가르침을 잇지 못하는 세태를 한탄하였고, 별도의 시 <戒懼臺>에서 “臺在巖盡頭 下可尋五六 上者一失足 傾墜在瞬目 爲此名戒懼 常使心淵谷...... 世間危險地 不是玆臺獨 內有一方寸 四邊千尋瀆”이라고 하여 戒懼의 의미를 실제 생활과 연결하여 교훈적으로 노래하였다.
노계 역시 이러한 태도를 노래하되, 비교적 현실적 표현과 교훈을 드러내고 있다. “戒懼臺 올라오니 믄득 졀로 戰兢다/臺上애 살펴보며 이 치 저홉거든/못보고 못듯 히야 아니 삼가 엇지리”
동와 권득중은 계구대 자체만을 노래하는 것에서 나아가, <정여휘 욱과 함께 계구대에 오름(偕鄭汝輝煜登戒懼臺)>이라는 시에서 계구대에서의 선비간의 교유를 노래하고 있다. “偶然乘興至 團坐石爲茵 無限風光好 宛如世外人”라는 부분은 계구대의 교훈적 의미보다 경물로서의 아름다움에 더 가치를 둔 것으로, 당시의 지식인들이 교유 강학하는 배경으로서의 자연관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계구대는 형상과 명명이 모두 교훈적 가탁에 치우쳐 있었으므로 함취정은 “戰兢一言要 怳如函丈陪”라고 하였으며 농석은 “層巖削立勢如虧 欲步斯臺此可規 努力躋攀深有戒 才蹉一足十分危”라고 교훈을 받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고, 매헌 역시 “一念安危地 登來誰不敬”이라고 직접적으로 교훈을 드러내고 있다.
3.4 九仞峯
구인봉 역시, 아무리 노력하고 공부한다고 하여도 마지막 한 방울의 땀이 부족하면 모든 일이 헛것이 된다는, 유교적 교훈을 전제하고 명명된 경물이다. 계구대 또는 입암에서 정남 방향으로 냇물을 건너 마주 선 봉우리가 九仞峯이다. 지금 입암마을에서 서원을 지나 매현리 쪽으로 가는 다리 松內橋를 건너기 직전 오른쪽으로 붙은 산인데 동쪽 면이 절벽으로 되어 있고 명명자는 <立巖記>에서 “峯在溪之南 立巖在溪之北 若相拱揖者然”이라 하여 입암과 서로 읍하는 형상이라 했다.
여헌은 원래 명명한 의도대로 功虧一簣를 경계하여 “有峯仞至九 豈待簣土積 來爲立巖對 瞻向窮朝夕”라고 하여 조석 상읍의 경지를 형상화하였다.
노계의 구인봉에 대한 시조는 여헌의 명명 의도를 평이한 언어로 풀이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巍巍한 九仞峯이 重山中에 秀異코야/下學工程이 이 山하기 갓건마/엇디라 이제 爲山은 功虧一簣 하게오”. 이렇게 해서 이 시조는 조선 전기 교술적 성격의 시조문학이 가진 형식과 내용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 되었다.
함취정은 “聖道雖云遠 攀躋可攝蹤”라고 하여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쪽보다 노력하는 자세를 강조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고, 농석은 원 명명 의도대로 “論功要在積功密 九仞終成拳石一”이라고 노래하였다.
한편 매헌은 이루어진 이름도 쉬 이지러진다는 것에 주목하여, “有山皆石面 簣土不容積 只借易虧名 丁寧戒後學”라는 시로 후학들을 경계하는 시를 남겼다.
3.5 吐月峯
토월봉은 입암 뒤 계구대에서 동쪽으로 고개를 들면 보이는 산봉우리를 가리킨 것인데, 원경을 보고 명명한 것이다. 솔안마을의 뒷산줄기가 서원 뒤쪽으로 흘러 서원의 동편에 이룬 둥근 봉우리이다. <立巖記>는 “日暮臺上 山人方歡 欲燈不可 欲燭不宜 于斯時也 共注目東望以待月出 而一片冰輪 出自峯上 有若峯吐而生者”라고 했다.
여헌 자신은 다시 그 이름을 象天峯이라고 하여, 둥근 모양을 강조하고, 이에 대해 “團圓秀列峀 得名宜象天 居人欲象山 立心盍無偏”라고 둥글고 편벽됨 없는 인격을 지향하라는 교훈을 노래하였다.
노계는 달이 떠오르는 봉우리라는 명명에 집중하여 “峯頭에 소슨 이 山中의 비취노다/九萬里長天이 멀고도 놉건마/高山이 揷天니 돌우흐로 나덧다”라고 노래하였는데, 비교적 서정적인 명명에 비해 시조의 태도 자체는 경물을 충실히 묘사하는 데 그치고 있다.
이처럼 사실적 묘사에 치중한 것은 함취정의 “曾聞月出海 今見吐東峯 卽景固如是 峯高隔海重”에서도 보이고, 농석의 “碧天如洗一峰奇 月上其巓故遣遲 忽到光明治世象 乍疑傳說降精箕”에서 서정성을 보이기도 한다.
토월봉에 대한 시 중에서 매헌은 “曾聞石補天 今看峯吐月”라고 달이 떠오르는 데 대한 정밀한 묘사와 감상을 말한 뒤에, “來向懷中照 任他滄海闊”라는 표현으로 달이 떠오른 뒤의 광경과 느낌까지 표현하였다.
3.6 小魯岑
일제당 동쪽으로 뒷부분에 늘어서 있는 마을이 송내리 솔안마을이다. 이 솔안마을의 서쪽으로 비교적 급한 경사를 이루면서 솟아있는 산이 소로잠이다. 이 산은 아주 높지는 않으나 경사가 급하고 거침없이 솟아 있어서 실제보다 높게 느껴진다. 이 산에 대하여 여헌은 공자의 登東山而小魯 登泰山而小天下 고사를 인용하여 一登乎是岑 效宣尼登東登泰之遊 則一片靑丘 曾不滿於一眄라 하여 小魯岑이라고 명명하였다.
여헌은 이 산을 소로잠이라고 명명한 뒤 노나라가 작다고 한 공자의 심경을 의탁하여 “大聖生小魯 行潦與滄溟 何但魯地小 擧世風雨冥”라는 시에서 온 세상이 다 작고 복잡한 것을 한탄하였다.
노계시조는 특별한 감상이 없이 “南魯岑 이 일홈을 뉘라서 지은게오/夫子登臨도 이 東山 아니런가/萬古靑山이 只麽히 놉하시니 아무줄 모로라”라는 표현으로 노래하였으나, 함취정은 여헌의 생각과 거의 일치하게 계승하여 “夫子東山日 邦畿䏚一岑 箕封亦地狹 比魯豈無心”라고 하면서, 중국의 노나라가 작은 것만이 아니라 이 땅은 더욱 작은 것을 표현하여 지식인의 호방한 세계인식을 보이려고 하였다.
농석도 “三韓窄窄一拳岑”라고 하여 같은 태도를 가졌는데, 매헌은 “夫子先生若是班 各得胸次小區寰 縱然賢聖殊高下 未必東山勝此山”로, 소로잠에 대한 교훈적 의탁만이 아닌 경물로서의 아름다움이라는 남다른 인식방법을 보이고 있다.
3.7 産芝嶺
産芝嶺은 遠景으로 명명된 것이기 때문에 위치나 장소가 세밀하지 않다. <立巖記>도 産芝嶺에 대해 다만 “吐月峯之東 有嶺深秀 半藏半露 蒼然蔚然 樵夫採客 鮮或跡焉者”라고만 하고 있을 뿐, 구체적으로 골짜기나 봉우리의 위치를 지적하지는 않았다. 현지의 고로들은 浴鶴潭의 뒷산 골짜기와 봉우리를 가리킨 것이라고 하였다. 吐月峯의 동쪽이라 했지만 含輝嶺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산지령의 산이 서쪽으로 가서 함휘령을 이루었다고 했고, 산지령 설명에서 반은 감추이고 반은 드러났다고 한 것으로 보아서도 역시 욕학담 뒷산이 옳을 것으로 보인다. 여헌 자신이 명명을 설명하면서 “芝不必産于此也 而名之以産芝者 何也 昔者四皓避焚坑之虐政 寄身世於商山之深谷 獨遠懷乎唐虞之盛世”라고 商山四皓의 紫芝歌 고사에 대한 존경을 표하고 있는 것도 구체적 경물보다 관념적으로 그 일대를 가리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여헌은 자신의 시에서 “覓芝芝不見 遑遑如有失 何必求諸外 一敬奇效實”라는 표현으로, 실제로 영약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수양을 통해 경(敬)을 찾고 수련하는 것에서 약보다 더한 효험이 있다는 가르침을 드러내었다.
노계의 시조는 이런 여헌의 생각과 일치하지는 않았다. “産芝嶺 올나오니 一身이 香氣롭다/四皓商山도 이 芝嶺 아니런가/山路애 구룸이 깁흐니 모줄 모로다”라는 표현으로 보아, 당시에 노계 자신도 그 위치를 강조한 것이 아니라 교훈적 의미를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포암은 “靈芝本秀三 生在煙霞嶺 安得採其根 練丹挽暮景”라 하여 관념적인 토로를 하고 있고, 농석은 “金丹歲暮人何去 徒見蒼蒼嶺上婁”에서 막연한 심경을 드러내고 있으며, 매헌도 “靈根眞有否 人仰彼山節”라고 하여 구체적 경물이라기보다 관념적 회고미를 드러내는 데 그치고 있다.
3.8 含輝嶺
함휘령은 구인봉의 뒤쪽 등성이를 타고 올라가 동쪽으로 멀리 뻗은 산마루이다. 계구대에서 보아서 남동쪽으로 가장 멀리 보이는 산 능선이며, 역시 遠景으로 명명된 것이다. 여헌은 “以取夫朱晦庵玉蘊山含輝之義也 山之能韞玉與否 固未可知矣 然良玉之所儲者 必名山也”라고 하여 주자가 말한 바와 같이 산이 옥을 품었으면 반드시 감춘 광휘가 있을 것이라는 뜻으로 이름지었다. 그러므로 이를 노래한 시가들 역시 좋은 인격을 품어 광휘를 갖추자는 내용으로 흐르게 되었다.
여헌 자신은 함휘령에 대해 시를 짓지 않았으며 노계도 함휘령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작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대의 시인들은 빠짐없이 이를 소재로 삼아서 인격수양의 교훈을 드러내었다. 대표적으로 함취정은 “良玉在深山 光輝生疊嶺 存中必粹盎 聖訓宜要領”라고 표현하여 여헌의 명명의도를 직접적이고 명료하게 대변하였다. 곧, 성인의 가르침을 따라 깊은 인격 가운데 수양의 빛이 나게 하자는 교훈적 의도를 存中必粹盎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이는 농석의 “似櫝深山久鞰圭 粹明瑞氣夜光齊”에서도 같은 소재로 취택되었고, 매헌의 “賢馥中藏同蘊玉 洞天巖壑摠生輝”에서도 같은 태도로 나타나고 있다.
3.9 停雲嶺
含輝嶺에서 서쪽으로 뻗은 줄기를 타고 눈을 내려오면, 九仞峯의 뒷줄기인 停雲嶺이 된다. 그러니까 戒懼臺에서 남쪽으로 바라보면 마주치는 것이 九仞峯이며, 구인봉의 산줄기를 타고 올라간 그 뒷 봉우리가 停雲嶺이다. 정운령의 서쪽으로 다시 마을을 향해 낮아지는 봉우리는 隔塵嶺이다. 기문은 “每見白雲停聚於其頂 或如冠巾之戴首 或如橫帶之在腰 有或崖壑掩藏盡者 有或峯巒露出半者”하다고 하여 꼭 어느 지점이라기보다 그 일대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인 경물이나 지점을 가리킨 것이 아니므로 여헌은 이를 시의 소재로 삼지 않았으나 노계는 그 아득함을 노래하여, “停雲嶺 라보니 天中에 두렷괴야/陟彼崔嵔면 五雲蓬萊 보련마/病目애 눈물이 얼니 바보기 아득다”라고 하였다. 이는 역시 경물의 구체성을 택하지 않고 그 높고 아득함만을 시적 소재로 삼은 것이다.
함취정은 이 산의 구름을 강조하여 “昨暮忽油然 今朝霈四境”라고 그 시원한 경지를 노래하였고, 농석은 구름의 그윽함과 인간에서 멀어짐을 노래하여 “奇峰疊疊嶺頭停 陡絶千尋其下壁”라고 하였다. 한편 매헌은 명명하던 시기의 선인들을 추모하여 “攙雲一髮似高人 想得當年四友親 曠百如今猶有感 思將風味敬書紳”라는 시를 지었다.
3.10 隔塵嶺
隔塵嶺은 이름 자체가 뛰어난 경물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명명자의 주관적 관념을 드러낸 것이므로 위치도 구체적이지 않고 풍경도 특이하지 않다. 전체적으로 입암 28경의 원경은, 입암의 동쪽 멀리 산지령에서 서쪽을 향하여 아름다운 함휘령, 다시 서쪽 곧 입암의 맞은편 멀리 정운령을 거쳐 서쪽으로 경운야를 향해 내려서면서 형성된 봉우리가 隔塵嶺, 그 바깥쪽 보이지 않는 곳이 招隱洞과 尋眞洞이다. 이 격진령이 구체적인 경물은 아니지만 여헌 자신은 바깥 세상과의 단절에 의미를 두어 “旣有是嶺 隔絶內外 故吾立巖溪山之奇勝 自作一區之秘藏 而山外之塵蹤俗跡 不得以冒躡焉”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여헌 자신이 별도의 시를 지어, “風塵能汙人 無隔隨人入 幸此村口嶺 斷盡經來俗”라고 하여 속세의 풍진이 사람을 따라 이 깊고 아늑한 골에 들어오는 것을 이 봉우리가 막아준다고 하였다.
노계는 “隔塵嶺 하 놉흐니 紅塵이 머러간다/득이 먹은 귀 싯슬록 먹어가니/山밧긔 是是非非를 듯도 보도 못로다”라고 노래하였는데, 여헌이 처음 의도한 정결 이미지가 노계에 오면서 피세은둔의 경향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함취정은 “桃源與武陵 爭似此幽靜”라면서 그윽하고 고요함이 무릉도원에 비길 수 있음을 자랑했고, 농석은 “層嶂揷天勢嶾嶙 塵寰萬事付之哂”에서 세상을 떠나는 정서에 집중하였다. 이 정서는 매헌에게 계승되어 “纔度嶺來塵事斷 肯敎回首慕浮榮”라는 표현을 낳았다.
3.11 耕雲野
죽장면 입암리 지금 입암면 사무소 뒤에서 동으로 자리잡은 마을이 입암 큰마을 평지동이다. 이 마을에는 주로 東峯 權克立의 후손인 안동권씨들이 世居하고 있는데, 현재의 마을자리와 거기서 입암쪽 들이 耕雲野이다. 입암에서 바라보면 隔塵嶺이 이 들 뒤로 내려오면서 바깥 세상을 가로막고 있고, 입암 아래로 흘러 가던 佳士川은 이 들 앞으로 사라진다. 여헌은 기문에서 ““溪之南有一野 距村纔一二里 野之田 宜稻宜麥宜黍宜粱 如能力耕足以無飢 披雲而耕帶雨而鋤 固山中之勝事 莘野耕叟 南陽臥龍 或樂堯舜之道 或託管樂之比 則吾儕獨不可以志伊尹之志 心臥龍之心乎 野名耕雲有所慕也”라면서 각별한 관심으로 이 명명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였다.
또한 여헌은 스스로 경운야를 소재로 시를 지어 “峽居謀卒歲 夾鋤以晨昏 往來雲煙裏 父子與季昆”라고 하여 전원생활의 즐거움과 혈육상애의 기쁨을 노래하였다. 노계는 여기서 더 나아가 전원은둔의 정서까지 표현하여 “沮溺의 가던 밧치 千年을 묵어거/구룸을 허여드러 두세이렁 가라두고/生涯를 足다사 가마 부거슨 업노왜라”라는 시를 이루었다.
이에 대해 함취정은 “嚴光老富春 伊尹在莘野 從古無懷地 耕雲付隱者”라고 노래하여 여헌의 명명 의도에 직접 호응하였고, 농석은 “若敎暫捨都荒蕪 用意朝來暮入室”라는 표현에서 귀거래의 심경을 노래하였다. 매헌은 이런 정서와 함께 몸소 밭가는 즐거움에 집중하여 “代食誰云好 躬耕夫豈欲 白雲隴上多 願學先民樂”라는 시를 이루었다.
3.12 惹烟林
야연림은 입암에서 하류 방향으로 계류의 남쪽 강변을 따라 늘어서 있던 숲이다. 지금은 농토개발로 인해 흔적조차 없으며, 실제로 그 정서조차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여헌 당시에는 이곳에 우거진 숲이 있었으며, 그것이 매우 서정적인 모양과 정서를 가지고 있었음을 여헌은 “溪流之傍 林木連靑 自生自長 參差亂茂 村人朝暮之炊 遊客茶魚之烹 靑煙一痕 惹作微色 以供詩人之口 或迷歸鳥之眼”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헌도 노계도 야연림에 대해 직접 시를 지은 것은 없으며, 함취정은 “南北淸煙起 依微籠小林 山禽飛不到 正避網羅心”라고 하여 피세적 성격을 강조하였다.
농석과 매헌은 도리어 야연림의 서정적 정경에 주목하여 “幸有東風吹不消 綠絲連織岸邊柳(농석)”, “川外長林林外村 炊烟一抹報朝昏 隨風入樹籠成帳 靑白新粧侈洞門(매헌)”라는 표현을 이루었다.
3.13 招隱洞
초은동과 심진동은 여헌이 명명한 경물 중에서 가장 도교적 성향이 짙은 것들이다. 그 중에서 招隱洞은 입암 28경의 가장 남쪽 입구에 해당된다. 포항이나 영천에서 입암을 향해 가다가 일광리를 지나 도로가 굽은 곳에서 죽장이 보일 때쯤 길 건너편에 바울기도원 들어가는 입구가 보이는데, 그 골짜기가 招隱洞이다. 입구는 좁고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지만, 한참 들어가면 좀 넓어지면서 지금은 한 가구, 옛날에는 띄엄띄엄 몇 가구가 살았던 흔적이 있다. 여헌은 이곳에 사는 사람이 세상을 등진 은자들처럼 보고서, 사실은 은자를 부른다는 뜻이 아니라 벼슬살이 고난 중에 나가 살면서 돌아올 줄 모르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긴다고 하여 “洞在下口者 名以招隱 憐夫迷溺於宦海而莫之返者也”라고 명명 이유를 밝혔다.
여헌이나 노계 자신이 초은동을 직접 노래한 것은 없으며, 함취정은 “物外常淸凉 塵中多澒洞 招招名利人 富貴眞如夢”라는 시에서 명명자의 의도를 직접 부연하였고, 농석은 이와 달리 “南山秋暮桂花芳 洞裏招招欲與卬 大隱何須猿鶴友 仙鄕知是不離房”라는 시에서 이 세상이 반드시 신선의 땅이 아닐 것도 없다는 뜻을 드러내었다.
3.14 尋眞洞
심진동은 초은동에서 죽장쪽으로 좀 더 올라간 계곡이다. 곧 개일리 개일골 안쪽인데, 지금 서운사가 있는 곳이다. 이 골짜기는 초은동보다 더 깊고 넓으며, 현재도 사는 사람이 많다. 여헌은 이 골짜기를 명명한 의도에 대해 “洞在溪上者 名以尋眞 思夫抱眞肥遯者而不得見也”라고 하여 진리를 안고 숨어사는 사람을 만나고자 하여도 만나보지 못한 안타까움을 뜻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이 소재는 은둔자를 찾는다는 도교적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당연히 이를 소재로 한 시들도 그런 경향을 가지게 되었다. 여헌은 이를 직접 시로 읊지 않았고, 노계는 시조에서 “尋眞洞 린 물이 巖下애 구븨지어/不舍晝夜야 亭子압 드러 오니/어즈버 洛水伊川을 다시 본 여라”라고 하여 옛 은둔자를 만난 듯하다고 하였다. 함취정은 “入山山更幽 雲鎖神仙洞 從此欲尋眞 蓬壺先入夢”라고 하여 명명자와 노계의 정서에 맞추었다.
그러나 농석은 “此山只在尋何處 非是眞人雜糅鬼”라는 특이한 표현으로 신선취향을 비판적으로 표현하였고, 매헌은 신선과 자신이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此地投笻悟有因 肯敎凡骨謾探眞 白雲且莫遮前路 我亦烟霞洞裏人” 표현을 시로 나타내었다.
3.15 採藥洞
採藥洞이라는 이름도 피세은둔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戒懼臺에서 마주 보이는 가까운 봉우리가 九仞峯이고 구인봉 뒤로 멀리 보이는 봉우리가 停雲嶺인데 지도상으로 해발 610미터의 烽火峯이다. 이 정운령에서 입암 방향으로 흘러 내리는 골짜기를 採藥洞이라 했다. 여헌은 명명에서 “藥不必如外方之徒丹砂石髓之誤人者也 居閒養病 保嗇性命 亦不可以無藥物 故洞多其産 所以名之也”라고 하여 채약동의 의미가 지나치게 도교적 취향으로 흐르는 것을 막으려 하였으며, 오히려 구체적인 약물의 의미에 가깝게 표현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위치 자체가 구체적인 지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노계가 松下問童子 言師採藥去 只在此山中 雲深不知處(賈島, 甚隱者不遇)라는 한시를 전문 번역인용한 시조에서 보듯이 구체적으로 승경을 지적한 것은 아니라 멀리 보이는 아름다운 골짜기를 정운령의 의미와 조화하여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
여헌 자신의 시작은 없으며, 노계는 앞에서 본 바, “솔알 아드라 네 얼운 어가뇨/藥러 가시니 하마 도라 오렷마/山中에 구룸이 깁흐니 간곳 몰라 노라”로 거의 직접적인 가탁을 보이고 있다.
함취정은 “山翁不出山 採藥白雲洞 蔘朮自療飢 胸中煎疾痛”에서 가슴 속에 아픔과 고민을 가진 은둔자의 삶에서 약을 캐는 행위는 남의 아픔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괴로움을 태워없애는 것이라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농석은 “小洞幽深長百卉 誰能濟衆嘗其味 當年採入良醫手 肯使吾人病俗胃”에서 채약의 의미가 많은 사람을 구제하는 의원의 이미지로 전환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매헌은 “壽民却是吾家事 前脩猶自註參同”로 의원의 성향과 도교적 은둔지향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3.16 鏡心臺
여헌이 기문에서 “立巖之底 有石平鋪於溪流之中 稜角磊磈 出沒縱橫 中有石隙 長廣纔能尋丈 溪流得此而停深 澄澈爲一小淵 淵之上下 石有呈露而盤陁者 流漲則沒 水落則出 然沒時少而出時多 坐其石 淵可俯焉 或濯或漱 以觀游魚之往來者 於是 名其石曰鏡心臺”라고 했던 경심대는, 입암의 동쪽 바닥 일제당 앞쪽 강바닥이다. 넓은 돌들이 혹은 삐죽삐죽 솟고 혹은 평평하게 펼쳐져서 물이 넘지 않을 때면 앉아 쉴 수 있을 정도이다. 그 아래 흐르는 맑은 물이 마음을 비출 수 있다 하여 鏡心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여헌 자신이나 노계의 시는 없으며, 함취정은 “奔流洗石面 水落卽爲臺 端坐忘機處 此心無点埃”에서 경심대의 형세와 모양을 묘사하고 그 위에서 탈속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음을 노래하였다. 농석은 이를 더욱 정밀하게 묘사하여 “雲淡波澄俯碧潯 絶無塵蘚逼相侵”라 하였으며, 매헌은 경심대 물의 맑음을 강조하여 “似鏡淸如許 吾心照水心”라고 표현하였다.
3.17 數魚淵
물 속에 고기가 노는 것을 셀 수 있다는 뜻에서 명명된 數魚淵은 입암 바로 앞에 있는 계곡의 일부이다. 계구대에서나 일제당에서 입암의 앞쪽으로 돌아나오면 踏苔橋를 밟고 鏡心臺 위에 서게 된다. 경심대는 널찍한 암반인데, 이 암반 가운데로 계곡이 흐르고, 암반 가운데 깊게 패인 부분이 數魚淵이다. 그러므로 수어연은 흐르는 물의 한중간에 있어서 항상 물이 마르지 않으며, 고이지 않은 물이므로 맑은 물이 흘러 물고기가 늘 헤엄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여헌은 명명 의도에서 “坐其石(경심대) 淵可俯焉 或濯或漱 以觀游魚之往來者 於是 名其石曰鏡心臺 名其淵曰數魚淵 巖影倒落淵中 蒼苔綠叢 似作淵魚巢也 恨淵不能稍廣 有以容乎小舠 石不能稍高 有以免於漲沒也”라고 하여 그 아름다움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서정적 감상을 더하였다.
여헌 자신은 수어연에 대해 직접 시를 짓지 않았으나, 많은 시인들이 맑은 물과 물고기에 대한 감상을 시로 읊었다. 노계는 “淵泉이 하 말그니 가 고기 다 보인다/一二三四를 낫낫치 혜리로다/童子야 새물에 고기를 다시 혜여 보아라”라고 하여 입암 연작시조 중에서 빼어난 서정적 표현을 얻었으며, 함취정은 “淸川流石上 中坎作深淵 坐數魚遊泳 非吾負爾然”에서 수어연을 묘사하고 한가한 逸士의 심경을 노래하였다. 한편 농석은 수어연의 서정성과 함께 자연스러운 삶의 태도에 대한 선망을 표현하여 “淡淡波心立立葦 有魚潛伏數凡幾 從知此理孔昭昭 活潑天機自掉尾”라고 하였으며, 매헌은 “止水開新鏡 潛魚察可知”라고 하여 수어연의 형상을 직접 묘사하였다.
3.18 避世臺
입암에서 맞은편으로 지방도 923번이 지나가는데, 구인봉의 앞쪽으로 지방도를 내면서 가사천에 시멘트 다리를 건설하였다. 이곳은 지형 자체가 태극모양으로 되어 있어서, 흐르는 물도 현재의 입암서원 앞에서 오른쪽으로 휘돌아 만활당 앞에 오면 다시 왼쪽으로 감겨서 입암 앞으로 흘러가게 되어있다. 이런 흐름에 의해 곳곳에 깊게 패인 소와 깎인 바위를 만들었는데, 물이 정면으로 부딪쳐오는 九仞峯의 동쪽 면은 깎은 절벽으로 되어 있고, 절벽의 아래로 흐르던 물은 지금 시멘트로 만든 보에 의해 소를 이룬 뒤에 흘러나간다. 서원쪽에서 바라보면 내 건너편에 절벽이 펼쳐지다가 보에서 상류 방향으로 구인봉 아랫자락에 바위가 평평하게 방처럼 패인 곳이 있다. 그러니까 지금 노계시비를 세워놓은 곳에서 바로 건너다 보이는 곳에 있는 꽤 널찍하고 움푹한 바위굴이다. 이곳이 避世臺인데 여헌은 “後負危崖 前臨險流 又爲九仞之所蔽擁 幽閑深寂 漠然與外人若不相接”이라 하면서 “旣平且廣 亦可立數間茅也 但不稍高 遇漲而沈 故屋不可設焉”라고 하여 초옥 수간을 지을 수 있겠는데 다만 높지 않아서 물이 불으면 잠기므로 짓지 못하겠다고 했다.
피세대는 땅이 생긴 형상과 바위의 패인 모습이 특이하여 주목할 만하거니와, 여헌 자신도 그 의미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立巖十三詠>에서 “隱有市中者 何須深處覓 農人斷崖徑 猶勝枝掃迹”라고 그 은둔피세의 성격을 강조한 뒤에, 따로 <避世臺>시를 지어 “方今値聖明 佇見唐虞際 誰復遯嘉肥 窮山空自滯”라고 하여 당시의 세상을 긍정하는 태도로 전환하고 있다. 여헌의 이런 태도는 유교적 교술성향의 영향으로 인한 것으로 보이나, 여헌에 비해 성리학적 세계관의 압박을 덜받고 있던 노계의 경우는 피세은둔의 기본적 의미에 집중하여 “名利예 지업서 뵈오 막 집고/訪水尋山야 避世臺예 드러오니/어즈버 武陵桃源도 여긔런가 노라”라는 은둔시조를 남기게 되었다.
피세은둔에 대한 이런 논의는 유교적 발상이 강한 선비들로서는 현실에 대한 집착과 참여의지로 나타나게 되었다. 함취정은 “峯轉水環抱 層層石作臺 已知塵想絶 何必到蓬萊”라 하여 세상으로부터 명리욕을 끊었다면 일부러 봉래를 찾을 필요가 없다고 하는가 하면, 농석은 피세대에서 도리어 “第看臺前千挺松 風霜高節出根氐”라 하여 소나무의 절개를 찾아내고 있기도 하다. 매헌 또한 “臺自無心在 人因避世來 莫言明聖際 巖穴有遺材”라는 시에서 피세은둔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보이고 있고, 시암은 “白首相逢盡布衣 天球弘璧世攸稀 風雨爭揮高士軸 煙霞深鎖主人扉 千重岳色黃鸝喚 十里沙盟白鷺歸 烹狗煮葱雖美事 剛憐時早釣魚磯”라고 노래하여 피세대에서 개를 잡고 국을 끓이거나 낚시를 하며 노는 모습까지 묘사함으로써 경물의 교훈성보다 유락적 기능에도 주목하고 있다.
3.19 尙嚴臺
尙嚴臺는 피세대에서 계곡을 따라 한참을 올라간 곳에 있다. 계곡으로 길이 좋지 못하므로 도로를 따라 올라가다가 浴鶴潭 못미쳐 논길 건너 계곡 속에 있다. 그쪽에는 바위들이 다 기이하고 웅장하므로 어느 바위가 꼭 상엄대인지 집을 수는 없으나 그 일대가 상엄대라고 할 수 있다. 여헌은 이곳을 명명하면서 그 모습보다 의미에 중점을 두고 “從避世臺 涉溪而行 未及一里而橫流 有石自成徒杠 若不遇漲 則不濡足而可渡矣 中有二大石 斗高而廣 可坐臥其上 又其南崖有巖隙 亦成一臺 可鋪一葉席 直俯溪潭 最宜釣磯 遂以尙嚴名其臺 嚴卽嚴子陵也 其人出狎至尊 則動天上之星象 來把一絲 則扶漢家之九鼎 固亦一世之丈夫也 名臺之義 所以尙其節也”라고 하여 한나라때의 엄자릉을 숭상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였다.
여헌이나 노계는 상엄대에 대해 직접적으로 시를 짓지는 않았으며, 함취정은 “深深似七里 更有釣魚臺 想像古人趣 一竿淸颷來”에서 엄자릉에 대한 추모를 낚시로 표현하고 있으며, 농석 또한 이 소재를 그대로 차용하여 “髣髴桐江七里汀 閒翁心事問山靈”라고 노래하였다. 매헌은 “桐江垂釣叟 地與人俱遠 尙友誰無意 此臺適我願”에서 은둔 지식인의 이상적인 피세처가 바로 이곳이라고 노래하였다.
3.20 浴鶴淵
浴鶴淵은 입암 28경 중에서 서정적으로 명명된 것 중에 속한다. 그러나 산중의 깊은 沼를 욕학이라 하는 것까지는 여헌의 서정적 명명법이지만, 명명에 사용된 鶴이라는 소재로 인해 전체적으로 신선적인 감각이 승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여헌은 “自尙嚴臺而溯 行及數里許 得一淵於兩峽之間 淵廣足容中船 溪作三派而瀑落 淵中水聲 常淅瀝焉 淵之兩邊 皆磐石 石爲漲磨 漫渙平滑 炯爛皓潔 坐其上 如藉以琉璃筵也 其東峽之巖 尤極奇壯 蒼苔綠蘿 蓊蔚埋覆 殊非煙火中人所可遊息也”라고 하여 세상 사람이 와서 쉴 곳이 아니라고 하였다. 지금은 계곡보다 지방도로 입암서원에서 800미터쯤 따라 올라가서, 기북으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지점에서, 오른쪽에 큰 바위가 우뚝 솟은 곳을 보고 냇가로 내려가면 욕학연에 이를 수 있다. 다만, 욕학담을 구성하고 있던 바위는 지금도 있지만, 욕학연은 시멘트로 보를 막아 물을 가두어두는 바람에 원래의 바위계곡 풍치가 없어졌다. 욕학연 옆에 섰던 바위는 등산하는 청년들이 암벽등반 연습장으로 써서 곳곳에 암벽용 쇠못이 박혀 있다. 그러나 이런 훼손을 겪고도 아직 욕학연 일대는 뛰어난 풍치를 가지고 있어서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여헌은 十三詠에서 학욕담(鶴浴潭)이라는 제명으로 “山在樂聞後 有潭名鶴浴 鶴亦物之靈 影斷何嘗浴”라는 시를 지어 기본적으로 욕학연에 대해 노래한 뒤에, 다시 별도의 <鶴浴潭> 시를 지어서 “眞如遯世士 不處塵埃域 而今鶴何處 潭空山影夕 我來始濯纓 神魂爽碧落”이라고 하여 자신의 정신과 몸을 맑히는 곳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노계도 이 경치의 아름다움에 주목하고 흥겨운 유락을 “浴鶴潭 근 물에 鶴을 조차 沐浴고/訪花隨柳야 興을 고 도라오니/아무려 風乎舞雩詠而歸들 불을 일이 이시랴”라고 노래하였다.
욕학담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시를 지어 唱和하였다. 東窩 權得重은 <次孫器重浴鶴潭韻>애서 “衆流成瀑落層層 時帶淸風噴雪冰 欲問仙禽曾浴處 須從卄八記中憑”라고 하여 여헌의 기문을 읽고 따라 감상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또한 鶴潭도 <浴鶴潭>에서 “梅香滿袖饒仙趣 竹葉浮盃瀉客憂 這裡乾坤塵想絶 從知奇勝甲靑丘”라고 하여 이곳에 신선경의 풍취가 있으며, 속세의 근심을 끊을만 하니 우리 나라 최고의 경치라고 찬상하였다.
그 밖에 함취정은 욕학담의 경치를 묘사하여 “水聲籠一壑 湍激下成潭 仙鶴時調羽 淸音徹翠嵐”라는 시를 써서 여헌의 명명을 잇는 맑은 시상을 보여 주었다. 농석은 “沙晶石白水盈湄 爲潔縞衣浴雪姿”에서 학이 몸을 씻던 맑은 물을 강조하였고, 매헌은 “空然潭水深 一去難尋躅”이라고 하여 공허감을 잘 드러내었다.
3.21 畵裏臺
입암에서 입암장터 쪽을 향해 佳士川 남면을 따라 걸으면 그 길이 惹煙林이 있던 자리이다. 여헌이 명명하던 당시에는 이 냇가를 따라 짙고 전아한 숲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은 숲을 전혀 볼 수 없고 923번 지방도로가 숲이 있던 자리에 닦여 있다. 이 야연림 자리를 따라 서원을 향해 오다가 솔안마을 들어가는 響玉橋 못가서 내 건너편 북쪽 산에 붙여 선 바위가 畵裏臺이다. 畵裏臺는 그 자체의 모양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 일대의 경치가 뛰어나다는 것으로 명명되었기 때문에 여헌의 기문에서도 “若自鏡心臺 沿流而下 水觸西崖 又成小潭 潭上有巖 巖上有松 因其臺焉 雖不能自奇 而諸嶺諸峯諸巖諸石凡一眼所收得者 怳惚難狀 依依畵中 似非眞面”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곳에서는 화리대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보이는 입암 전경을 즐기는 곳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여헌 자신은 이를 시의 소재로 삼지 않았고, 노계는 “江上山 린 긋 솔아 너분 돌해/翠嵐 丹霞ㅣ 疊疊이 둘러시니/어즈버 雲毋屛風을 그린 여라”라는 시조에서 모든 경치를 병풍처럼 둘러볼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畵裏臺의 이러한 조망적 가치에 대해 함취정은 “如夢復如畵 依然中有臺 登臨試一望 怳我訪天台”라고 하여 하늘궁전에 오른 듯이 황홀하다고 찬상하였으며, 농석은 “眞境誠難抽寫盡
更敎蘇子記凌虛”에서 진경으로 그리기조차 어렵다고 하였고, 매헌은 이 경치의 아름다움을 칭찬하여 “造物何年効此工 斷崖疑展小屛風 由來水石嫌全露 奇處當看似畵中”라고 하여 도리어 모두 보이지 않고 약간 감추어진 것이 더욱 그림처럼 아름답다고 노래하였다.
3.22 合流臺
입암 앞을 흐르는 물은 佳士川이다. 이 물은 惹烟林 자리와 畵裏臺 사이로 흘러 죽장 장터 뒤편으로 나간다. 거기에서 청송방향 꼭두방재에서 흘러온 紫湖川 물과 합류하여 전체적으로 자호천이 되어 영천댐으로 흘러들게 되어 있다. 이렇게 두 물이 합류하는 곳에 전에는 合流臺라는 큰 바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입암1교와 입암2교를 건설하고 하천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폭파되었다. 그러고도 남은 부분이 죽장에서 청송으로 나가다가 죽장중고등학교 맞은편에 보이는 멋진 바위들이다. 여헌은 “西南行至二里許 有巖壘然成丘 以臨是流”라면서 이 바위 위에 정자를 짓고자 했지만 힘이 미치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합류대는 입암리 입구에 해당되며, 청송쪽에서 들어오거나 나가는 사람에게는 산모퉁이를 돌아 送迎하는 자리가 될 수 있었다.
여헌은 이 바위의 인문적 기능을 중시하여 “二溪適相合 于我臺前流 人別同志友 亦足斯淹留”라고 하여 송영처로 이 바위를 썼음을 보이고 있다. 노계는 “合流臺 린 물이 보기예 有術다/彼此 업시 흘러가고 左右에 逢源하니/分時異 合處同을 이 臺下애 아라고야”라고 하여 양편 모두에 근원을 가진 물이라고 재치있게 파악하였다.
여헌이 인식했던 逢別의 이미지는 시암에 의해 <合流臺會話>에서 “一聲相應一場遊 人是合歡水合流”라는 구절에서 잘 형상화되었다. 한편 함취정은 이를 봉별이나 송영으로 파악하기보다 쉬지않고 흘러가는 이미지로 파악하여 “流東復自北 相會澗邊臺 日夜盈科進 朝宗入海隈”라고 하였고, 농석은 이를 병행 진취하는 이치로 파악하여 “分異方知合處同 幷行理似鳥之翼”라고 하였으며, 매헌은 그 정서적인 가치를 중시하여 “挾山雙水到成叉 巨石龍盤戴老査 異趣同流焉足取 只堪閑坐侶魚蝦”라고 하였다. 다만 최근에 와서 합류대가 없어지고 선인의 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된 데 대해 최근까지 생존했던 시암(權錫瓚, 1878 - 1957)은 따로 <嘆合流臺無痕>이라는 시에서 “大陸沈陰知勢去 名區異昔覺悲來 憤憶那時天水事 摩挲遺躅獨徘徊”라고 읊으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3.23 釣月灘
죽장장터 뒤쪽 입암1교와 임압2교 사이 아래쪽으로 매립된 곳이 合流臺를 깨고 釣月灘을 메꾼 부분인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는 강폭을 좁히고 강둑을 바르게 하여 농사지을 경지와 집지을 생활용지를 확보하느라고 조월탄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그러나 釣月灘 역시 여헌에 의해 정서적 명명법으로 이름지어졌으며, 여헌 자신과 후일의 문인들에 의해 깊이 사랑받으며 시에 동원되었다. 여헌은 “臺前合流之處 水頗演漾 石多奇美 不知渭水之陽 其能勝於此乎 遂名其灘曰釣月 以溪之上流 皆在山底 得月最晩 此灘則距東嶺已遠 月光先受 固宜於夜釣 釣卽呂太公之事也 身蘊濟世之具 閒老江湖之邊 手持一竿 若將終身 非斯人 吾誰與從焉 此名灘之義也”라고 하여 이곳이 달빛을 먼저 받아 밤낚시를 하기에 알맞으며, 달뜨는 밤에 하는 낚시는 세상을 구할 경륜을 품은 이들이 함께할 일이라고 하였다.
노계 역시 은둔자의 제세경륜을 연상하여 “낙대를 빗기 쥐고 釣月灘 라려/불근 역귀 헤혀고 알 안시니/아모려 桐江興味 불을 주리 이시랴”라고 읊으면서 이곳의 풍치가 더욱 아름답다는 시조를 남겼다.
함취정 역시 낚시하는 정서를 노래하여 “垂綸忘日暮 蟾影落前灘 此老非漁者 將期月上竿”이라는 서정적 표현을 썼으며, 농석 또한 “一絲風動波心攪 志不在魚興自飽 罷釣歸來至夜深 南傾北斗西傾昂”라고 하였으며, 매헌도 이런 점에서 낚시의 탈속적 정취를 “不是求魚把釣垂 爲多淸趣故遲遲”라고 노래하였다.
3.24 洗耳潭
여헌이 기문에서 “從(조월)灘而下 至招隱洞之口 溪之成潭者 倍於上流之淵 外人之入此洞者 山人之出是山者 皆過於是潭 塵雲仙凡 此焉皆分 故潭名曰洗耳 意欲追巢許也 凡所以收諸奇勝 以歸夫立巖之總管者 上自浴鶴淵 下至洗耳潭而至焉 其間一州一石之俱可得名者 何可勝數 而今所名者 只取其最勝且大者焉爾”라고 하면서 세이담에 대해 가장 하류 끝부분이라고 설명하였다. 이 설명에 의하면 세이담은 하나의 沼가 아니라, 조월탄 이하로 28경의 입구에 이르는 많은 못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중에서 그 후에 세이담으로 지목된 것은 지금 포장도로가 지나가면서 매립된 부분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도 곳곳에 아름다운 소들이 있어서 세이담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또한 洗耳潭의 명명이 소부와 허유 고사를 전제한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명리와 격리된다는 의미를 강하게 가지고 있다.
이렇게 세이담의 성격이 단일한 사물이 아니고 관념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서인지, 여헌 자신이 세이담에 대해 노래한 것은 없으며, 노계도 이를 직접 시조로 형상화하지 않았다.
함취정은 소부 허유 고사에 등장하는 영수에 대해 직접 언급하여 “穎水明如鏡 纖塵不汚潭 如何謾洗耳 終古却懷慙”라고 하였으며, 농석 또한 “欲洗羞塵問古渚 誰能飮犢上流去”에서 정면으로 그 고사를 다루었다. 매헌은 “悠悠世事不須談 伴老雲烟分所甘 有耳莫將潭水洗 千秋巢父未應三”라고 하여 전체적으로 관념적인 시작 태도를 보이고 있다.
3.25 響玉橋
響玉橋는 입암 바로 하류에 있다. 여헌이 “至於由外路而入村者 必涉巖下之流 橫排白石 用爲片橋 躡橋之際 有響琤琮 故其橋之名曰響玉”이라고 한 돌다리가 바로 향옥교이다. 지금 경심대와 수어연에서 하류 방향으로 몇 발자국 내려가면 큰길에서 솔안마을로 들어가는 시멘트 잠수교가 있다. 이 부분이 響玉橋 자리이다. 다리를 밟으면 영롱한 쟁종 소리가 난다고 했으나 지금은 들을 수없고, 다만 아직도 아름다운 인근의 바위들만 볼 수 있다.
여헌 자신은 향옥교를 시로 다루지 않았고, 노계는 이 소재를 취택하여 먼 길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발길을 연상하여 “磯頭에 누엇다가 라니 이 다/靑藜杖 빗기집고 玉橋를 건너오니/玉橋애 말근 소를 자 만 아놋다”라는 시적 정서로 드러내었다.
함취정은 이 다리를 세상과의 단절로 파악하여 “不待彈琴曲 襟懷絶世囂”라고 노래하였고, 농석은 이 다리의 모양과 소리의 아름다움에 집중하여 “淸流觸石響琳瑯 其上爲橋不可方 無復世間顧陸手 畵圖那得盡夸張”라고 표현하였으며, 매헌은 특별히 이것이 다리라는 것을 강조하여 “穩步聽環珮 危行奏磬鼖 肯數梵家物 靑雲與白雲”이라고 하였다.
3.26 踏苔橋
계구대에서 입암의 앞으로 해서 서쪽 면으로 돌아가려면 경심대 반석을 밟고 나가면서 약간 물가를 디디게 되는데, 여기에 몇 개의 바위들이 있어서 이를 여헌은 踏苔橋라 하였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듯이 당시에도 실제로 이것이 다리 모양을 하고 있거나 다리 구실을 한 것은 아닐 것이, 여헌이 기문에서 “自戒懼臺 紆步而下 將欲觀魚於鏡心臺 則其入也 亦必有石橋 橋在巖底叢林之中 石面易生綠苔 故其橋之名曰踏苔 亦爲幽興之助也”라고 하면서 助興을 위해 명명한 것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여헌과 노계는 답태교를 시로 읊지 않았는데, 이는 역시 이 경물이 실제적인 감각을 가지지 못했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후대의 시인들은 답태교의 실물보다 그 고답적 명명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각자의 시에서 이를 표현하였다. 함취정은 “石逕人蹤斷 蒼苔生小橋 浪吟扶杖過 塵慮頓除消”라는 아름다운 시를 이루었고, 농석은 그 실제적인 아름다움을 “故渡人稀水噴漚 蒼苔沒石篆橋頭”라는 표현으로 드러내었고, 매헌은 그 바위의 상징적 의미를 찾아 “水漲頭全沒 笻稀綠半封 誰知山磵裏 猶臥未雲龍”라고 하여 때를 기다리는 경륜가의 모습으로 형상화하였다.
3.27 勿幕井
물막정의 위치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견이 있다. 여헌은 기문에서 이 우물의 이름을 물멱정(勿冪井)이라고 하면서 “井在起予巖之側者 寒且洌焉 澤物之功 不可不博 故取易井卦上六爻辭 以勿羃名之 井而羃之則功不施也”라고 설명하였다. 이 말에 의하면 차고 맑은 물이 기여암의 측면에 있다고 했는데, 현재는 기여암 옆에서 우물을 찾을 수 없고 만활당 뒤쪽 입암서원 가는 오솔길 가에 늙은 느티나무 아래에 오래된 우물이 하나 있다. 그러나 이는 기여암으로부터는 마을 건너편에 해당되므로 기여암 옆이라는 말로 설명하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다. 그러나 이 우물이 오래되고 서정적이어서 대체로 이를 물막정으로 부르는 이들이 있다. 勿冪의 뜻은 덮지 말라는 뜻이었는데 나중에 이를 勿幕으로 바꾸어 부르면서도 뜻은 역시 덮지 말라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여헌과 노계 시에서는 勿幕井을 노래하지 않았고, 함취정은 “地勢似盤中 甘泉有冽井 從來勿幕稱 羲易發深省”이라고 해서 여헌의 명명을 설명하는 태도를 가졌고, 농석은 당시 우물의 실상을 묘사하여 “甃深甁小短垂綆 羣汲相爭不得靜”라고 하였는데, 당시에 우물가에 모여서 다투어 길어내는 정경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 매헌은 이 우물의 이름과 혜택을 여헌의 가르침과 연관하여 “勿幕名斯井 吾知戒不食 如何當世人 未被先生澤”이라는 교훈적 시를 남겼다.
3.28 象斗石
象斗石은 입암의 바닥에 옆으로 흩어져 있는 돌들을 가리켜 이름지은 것이다. 여헌이 기문에서 “石在立巖之傍者 有數至七 而象似斗星 故名之曰象斗石 四時之運日月之行 皆於斗星而取法 則北斗之於星辰 其係最大 而石之數與象 適與之符焉 亦一奇也”라고 한 것은, 실제로 그 돌들이 북두성의 모양을 닮은 것이라기보다 그 숫자를 맞추고 모양을 추상하여 일치시킨 것이다. 지금도 입암 옆으로 돌들이 흩어져 있으며, 일제당 앞쪽으로 놓인 돌들은 2002년에 강변 정리공사를 하면서 일부는 없어지고 일부는 더 잘 드러나게 놓여 있다.
여헌이나 노계는 상두석을 시로 노래하지 않았고, 함취정은 북두성이 사물과 방위의 중심임을 강조하여 “造物本多情 星羅七點石 至今常指東 正似春無易”라고 하였다. 농석도 북두성의 모양을 본떴다고 하여 “蒼蒼鍊色補媧天 仰看星文好象斗”라고 하였고, 매헌은 더욱 경쾌하게 그 모양을 표현하여 “石豈知乾象 頑然本不靈 化翁太喜事 在地又成形”라고 노래하였다.
3.29 이십팔경 이외의 경물을 노래한 시
여헌이 28경을 명명한 뒤로 후세인이 이를 더하거나 뺀 경우는 없었다. 그러므로 후세로 내려올수록 시인들은 28경에 고착하여 불변의 경물로 정해놓고 노래하였다. 그러나 여헌 당년에는 아직 28경이 고착되지 않아서 가끔 다른 경물을 시로 표현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여헌 자신도 <立巖十三詠>에서 이미 28경 이외에 立巖村, 晩勖齋, 四事軒, 守約寮, 引鶴山, 道德坊 등을 노래한 바 있고, 여헌선생속집에도 28경 이외에 前澗, 主靜齋 등이 포함되어 있다. 노계는 입암 연작시조에서 精舍 한수를 28경 이외에 창작하였으며, 다른 시인들은 자신의 삶터에 대해 창작한 경우는 있어도 28경에 대해 더하거나 빼지 않았다.
여헌과 노계가 노래할 때 立巖精舍로 불렸던 日躋堂은 입암의 바로 뒤 계구대의 동쪽에 있다. 북서면으로 기여암과 계구대를 두고 남면하여 지은 집인데 앞에 象斗石이 깔려 있고 도로와는 시내를 격해 세워졌다. 지금은 진입로에 민가가 있어서 그집 마당을 통해 오를 수 있다. 이 건물은 처음 선조 33년(1600)에 건립하기 시작해 1607년에 완성되었으며 이때는 立巖精舍로 불리었다. 중건을 거쳐 1907년에 화재로 완전소실된 것을 1914년에 복원했다. 정면 日躋堂과 동쪽 방 友蘭齋, 서쪽 방 悅松齋의 양편 방이 있다. 이 건물은 입암 28경에 포함되지 않았으나 노계는 시조로 읊었다.
여헌이 창작한 28경 이외의 작품들은 거의 다 여헌의 면학 수련의 의도를 드러내는 교훈적 작품이다. 여헌은 이들 작품에서 자신의 창작의도를 밝혀서, “老矣無可往 從今學不移(立巖村)”라고 움직이지 않음을 배우려는 태도를 드러내거나, “末路人事茂 誰從早時勖 此固耄翁悶
勉修如不及(晩勖齋)”처럼 쉽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특히 당시에 이미 노년에 들었던 여헌은 “近思耄年業 守約爲大要 事事能不煩 身可出雲宵(守約寮)”라는 등으로 늙어가면서 간략하고 중요한 일에 집중하는 삶을 교훈적으로 노래하기도 했다. 이처럼 28경 이외의 소재를 가진 작품들이 교훈적 성격을 강하게 가진 이유는, 28경에 포함된 구체적 경물이 아니고 인공건조물이기 때문에, 지은이의 교훈적 의도를 직접 드러내기에 용이하고 애초에 건립 의도 자체가 교훈적이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4. 입암소재 시가들의 영물태도
입암 28경의 명명자인 여헌을 중심으로 보면,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들은 문학적 성취에 대해 높은 가치를 두지 않았다. 성리학자들에게 있어서 주된 관심은 학문적 성취와 실천이었기 때문에, 어떤 다른 활동도 그것을 보조하는 데 유용할 것이 요구되었다. 여헌을 포함한 당시 학자들의 이러한 문학관을 道文一致의 태도라고 할 수 있는데, 여헌은 “文者 道之發於功用 形於模象”이라고 하여, 문학은 道가 발현된 것이라고 정리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들이 창작한 문학작품은 자신들의 추구와 깨달음을 문학으로 드러내는 도구로 파악되었다. 여헌은 이러한 문학관으로 입암의 경물을 명명하여, 명명 자체에 자신의 학문관이 담겨 있었으므로, 그것을 소재로 하여 창작되는 문학작품들도 載道的 성격을 가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여헌 자신의 시가들은 자신의 명명 의도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산수자연을 읊은 시들이 많았지만, 거의 모두 자연 자체를 노래하지 않고, 이를 통해 자신을 다시 다잡고 더욱 면려해야겠다는 생각을 드러내는 도구로 삼고 있었다. 이에 따라 여헌은 자신이 명명한 입암 28경에 대해 모든 경물을 다 作詩의 소재로 삼지 않고, 취사하여 세계관 중심으로 다루었다. 그 결과, 어떤 경물은 소재로 선택되지 않았는데, 戒懼臺는 거듭하여 작품의 소재로 사용되게 되었다. 그러면서 두 경우 모두 “聖訓戒危微 何人無此心”이라든가, “所以明哲人 不暫忘兢肅 須將處臺心 奉身恒踧踧”이라고 늘 조심하고 계구하여 바른 삶을 살 것을 스스로 다짐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명명자인 여헌의 이런 창작태도는 다른 시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후대의 시인들은 여헌의 명명 의도를 어기지 못하고 문학적 발상의 폭을 거의 같게 유지하고 있어서, 특히 立巖이나 戒懼臺, 起予巖 등에 대해서는 여헌 자신보다 더 고착된 세계관을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비교적 성리학적 압박이 적은 경물을 노래하거나 변동된 문화적 풍조, 또는 세월이 흐르면서 변동이 생긴 것을 한탄하는 경우에는 자유로운 사고전환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약간의 변이가 있었지만, 漢文으로 창작된 시편들은 사용된 문자의 특성과 창작자의 세계관적 제한성으로 인해 급격한 변이상을 보이지는 않았다. 이런 점에서 한글로 창작된 노계시조의 태도가 주목된다.
앞서 논의한대로 조선 전기에서 중기까지의 성리학자들은 “글이란 도를 꿰뚫는 도구이다.”라는 태도를 기본으로 가지고 있었다. 이런 단정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논의하는 것이 문학현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 문학보다 먼저 전제되어 있는 철학적 명제구현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문학은 인간과 학문에 대한 깨달음과 그 과정에 대한 전환표현의 도구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좋은 글로 평가되는 문장은 道文一致의 구현일 경우여야 했다. 이런 태도와 논의에서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었고, 실제로 그의 창작행위가 그러하든 아니든 일단 도학자적 문장관을 갖추고 있곤 했었다.
그러나 조선의 후기로 들어서면서 이러한 문학관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반드시 일치하는 흐름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허균 등으로 대변되는 변화의 조짐은 문학론과 문학작품으로 감지될 수 있었다. 허균은 “文以通上下之情”이라는 말로 자신의 문학관을 드러내었고, 禮敎보다는 任情의 가치관을 공공연히 주장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비로소 정철 등이 한글로 쓴 서정우위문학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가능하게 되었다.
노계의 시대(1561 - 1642)는 이런 두 조류가 교차하는 시기였다. 그는 아직 道文一致의 엄격함에서 자유롭지 못했지만 스스로 그 가치관을 체득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다른 문사들과 달리 武科에 급제했으며, 실제로 武官의 벼슬을 살았고, 從軍한 바 있어서 문인으로는 특이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또 그는 문장을 잘 짓고 재미있게 표현하는 데에 특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문집에는 같은 운자를 늘어놓은 唱和詩들이 남달리 많이 있는데, 이는 시를 엄격한 규격으로 짓기보다 즐거운 취미로 짓는 호방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노계는 자신이 존경하고 따랐던 여헌 등의 도의문장관과 자신의 성격과 경험이 낳은 창의적 문장관 사이에서 나름의 창작태도를 가지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노계에게 주어지는 작품외적 부담은, 이미 앞 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입암의 아름다운 경치에 대한 명명태도가 명명자의 가치관을 드러내고 있다는 데 있었다. 그것은 삶의 전 부면이 진리추구에 집중되고 있어야 한다는 성리학적 인생태도의 영향이었을 것이며, 또한 명명자나 창작자가 부인할 수 없는 긍정적인 명제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리학자들은 자연물을 완상하거나 그것들을 대상으로 창작하면서, 대상들의 외형을 묘사하거나 작자의 주관적 서정을 표현하기보다는, 그 대상들에 대한 작자의 해석, 그 중에서도 성리학적 진리의 구현으로 대상을 파악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입암의 경물 중에서 이런 태도로 명명된 것이 기여암, 계구대, 구인봉, 소로잠 등인데 이들은 사물로 존재하면서 교훈으로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경물에 대해 노계는 자신의 시조들에서 비교적 충실히 그 교훈을 따르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입암을 대상으로 한 10수의 시조들은 한결같이 곧고 당당하고 지속적임에 대해 찬상하고(萬古애 곳게 선 저 얼구리 고칠 적이 업다) 선망하고(애다 可히 사이오니 돌마도 못랴) 본받기를(卓然直立니 法바담즉 다마) 소망하고 있다. 나중에 立巖을 卓立巖이라 개칭한 데서 보듯이, 진리를 사람보다 잘 드러내는 바위라는 태도에 변함이 없다. 이 점은 기여암이나 계구대나 구인봉 또는 소로잠을 대상으로 한 작품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노계에게 가해지는 세계의 압력은 거의 그 명명자의 의중을 시조형식으로 편집하여 옮겨놓는 방법으로 소화되고 있다.
그러나 비교적 당대 가치관의 압력이 덜한 경물들에 대해서는 노계도 훨씬 자유롭고 창의적인 창작으로 대응하고 있다. 여헌은 그런 경우에도 자연물을 통해 도를 체득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반면, 노계는 훨씬 자연친화적이고 주관적인 서정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표현상으로도 채약동을 노래한 시조에서는 완전히 중국의 기존 시를 번역하는 방식을 보이기도 하고 욕학담에서는 風乎舞雩詠而歸 등을 인용하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인용보다는 창의적인 문구와 고유어 표현을 선호하여 實景讚賞의 좋은 모범을 보이고 있다.
避世隱遁의 선경지향은 당시 시인들의 일반적인 주관지향 중의 하나였다. 입암일대의 경물들에 대한 명명에서도 尋眞洞, 招隱洞, 隔塵嶺, 産芝嶺 등은 그런 지향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들이다. 이 점에서 노계의 피세은둔지향 시조들은 같은 피세은둔의 심경을 드러내면서도 고유어와 시조형식의 특장을 이용하여 이를 효과적으로 형상화하였다. “어즈버 武陵桃源도 여긔런가 노라(피세대)”의 경우에는 거의 규격화된 상투적인 어구를 쓰고 있지만, “童子야 새물에 고기를 다시 혜여 보아라(수어연)”나 “玉橋애 말근 소를 자 만 아놋다(향옥교)”, “病目애 눈물이 얼니 바보기 아득다(정운령)” 등은 다른 시조에서는 찾지 못할 창의적인 표현이며 실경을 노래하는 노계의 현실적 감동을 잘 전달해 주는 부분이다. 그러면서 이런 선경에 은둔한 자신의 삶에 대한 만족감을 “불을 일이 이시랴(욕학담)”, “불을 주리 이시랴(조월탄)”, “부 거슨 업노왜라(경운야)” 등으로 표현하였다. 이런 작품들은 노계 연작 시조들 중 입암을 제외한 숫적인 대부분을 차지하며, 작품 내부적 견고함도 잘 갖추어져 있어서 지은이의 지향이 이쪽으로 기울어 있음을 알게 한다.
결국, 입암 28경을 노래한 시인들 중에서, 여헌은 자신의 명명 의도를 충실하게 시로 표현하였고, 당대에 여헌과 종유하였던 노계는 한문이 아니라 한글문학이라는 점과 함께 시계관적으로도 비교적 자유로운 변이를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보다 뒤에 창작에 참여한 시인들은, 시기적으로나 학문적으로 훨씬 앞서 있는 여헌의 의도를 변이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성리학적 세계관을 충실히 표현하는 창작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그러면서, 창작 당대의 문화적 실제적 변화를 시의 내용에 포함시키는 정도의 변화를 보이고 있기도 하다.
5. 맺음말 - 문화공간으로서의 입암
立巖은 400년전 몇몇 선현들이 교유 강학하던 장소로만 고정된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당시에 이미 빼어나게 아름다운 경치를 찬상하여 28경이 명명되었고, 이를 노래한 많은 시편들이 창작되었거니와, 입암을 찬상하는 시들은 그 뒤에도 계속해서 창작되었고, 입암의 경치를 완상하는 발걸음은 현재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입암 28경은 명명 당시부터 다른 지역의 경물류와 현저히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명소들은 인공적인 건조물이나 인문적 환경을 소재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상으로 하는 절이나 정자나 인물이 없어지면 당연히 큰 변화가 오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입암은 인공적인 것은 전혀 포함하지 않고 전적으로 자연물로만 28경을 명명했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흘러도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산업사회가 되면서 인구와 교통의 변화가 있어서 약간의 변이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물들은 명명 당시의 위치와 모습에서 변하지 않은 채 지금도 같은 느낌으로 완상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또한 입암은 현대 생활환경인 도시에서 너무 가까워서 해를 입거나 너무 멀어서 잊혀진 다른 경치들과 달리 포항에서 30분, 경주에서 50분, 안동에서 1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어서 자연스런 아름다움을 유지하면서도 접근이 까다롭지 않은 좋은 입지를 가지고 있다.
입암의 문화적 가치는 단연 입암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들의 가치로 인해 두드러진다. 여헌이 명명한 입암 28경에 대해 많은 시인들이 각각 그 경물에 합당한 표현을 구하고 이를 한시와 시조로 표현하여 한국문학사에 큰 기여를 하였다. 旅軒 張顯光 자신의 한시들은 조선 중기를 이끌어가던 위대한 성리학자의 깨달음과 추구를 잘 드러내고 있고, 당시 국문학사의 한 산맥으로 받아들여지는 蘆溪 朴仁老의 입암 연작시조들은 현재까지도 중기 시조의 교과서적 전범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 뒤에도 입암지역에 세거하거나 교유한 시인들인 東窩, 鶴潭, 含翠亭, 聾石, 梅軒, 是巖 등의 작품들은 각 시인마다 사물과 삶에 대한 깊은 인식과 깨달음을 드러내면서 한국문학사상 드물게도, 한 곳에서 이렇게 다양하고 품격높은 문학작품이 집중적으로 산출된 풍성함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 입암에 대해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지극히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아직 입암은 물놀이 장소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곳은 조선 중기에 민족사적 스승의 한 분이 세상을 뜨기까지 사랑하며 거닐던 우리 강산이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학문의 앞날과 나라의 앞길을 걱정하는 선인들의 강학 장소였으며, 조선 말기에는 점점 약해지는 나라에 압박해오는 도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절망적 싸움에 몸 던진 山南義陣 의병들이 침략자들과의 싸움에서 꽃처럼 산화해간 통한의 산하이기도 하다.
이제 입암의 문화적 역사적 가치를 문화시민에게 돌려주는 일이 시작되어야 한다. 다행히 입암에는 여헌과 4선생을 기념하는 입암서원이 있어서 좋은 교육 및 답사처로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지금 입암에 세워진 동봉 기념비와 노계 시비와 함께 입암 28경에 대한 상세하고 입체적인 안내판이 세워져야 하고, 각 경물마다 창화된 시들이 번역되어 시민에게 제공되어야 한다. 더욱이 단지 경치가 아름다운 명승지라는 의미 이외에, 조선 말기 산남의진의 산화처라는 설명과 교육이 입암의 의미를 더욱 깊게 할 것이다.
(Abstract)
The Backgrounds and Characters of Ipam-mattered Poems
Kim, Yun-kyu(Professor, Ph. D., Handong University)
Ipam(立巖), located at KyungSangBuk-do, Pohang-si Ipam-ri has been named by Yuh Hun Jang Hyun Kyang(旅軒 張顯光) and his pupils at the end of 16th century. From the end of 16th century until present, "Ipam 28 sites"(立巖二十八景) has been the subject matter of many poetries. At that time it expressed the worldview of confucianism that led the direction of many poems, but there was some difference between few poet's point of views that has shown some creativeness. Each and every scenery of Ipam has special characteristics of Confucianism teachings, Taoist monasticism, beautiful scenery appreciation. The poets at Ipam composed their poems out of their experience within the beautifulness that showed a plenteous enrichment in the history of Korean Literature.
Since the naming of Ipam, it maintains the natural beauty. Also in the sudden change of Korean history Ipam served as the activity background for the patriotic activity. For all the reasons stated above, Ipam should be advertised to the citizens and be developed as a historical and educational site. This will serve not only to distinguish Ipam, it will also serve as a function for education and a nice place to rest for the citizen of Pohang who doesn't have many space for cultural life.
(첨부 자료)
立巖素材 詩歌의 총목록 및 번역
(이 자료는 현재까지 입수한 입암 관련 시가를 다 수록하고 번역한 것이다. 국역 여헌집에서 번역된 것은 번역을 참고하고, 필요한 경우 수정하였다. 아직 입수하지 못한 작품이 있을 경우 추가로 번역하고 정리할 예정이다.)
1. 장현광(張顯光)
1.1 입암십삼영(立巖十三詠)(旅軒集)
1.1.1 입암촌(立巖村)
1.1.2 만욱재(晩勖齋)
1.1.3 사사헌(四事軒)
1.1.4 수약료(守約寮)
1.1.5 계구대(戒懼臺)
1.1.6 학욕담(鶴浴潭)
1.1.7 피세대(避世臺)
1.1.8 인학산(引鶴山)
1.1.9 상천봉(象天峯)
1.1.10 산지령(産芝嶺)
1.1.11 구인봉(九仞峯)
1.1.12 도덕방(道德坊)
1.1.13 경운야(耕雲野)
1.2 입암(立巖)(旅軒集)
1.3 정사(精舍)(旅軒集)
1.4 전간(前澗)(旅軒集)
1.5 계구대(戒懼臺)(旅軒集)
1.6 피세대(避世臺)(旅軒續集)
1.7 소로잠(小魯岑)(旅軒續集)
1.8 기여암(起予巖)(旅軒續集)
1.9 일제당(日躋堂)(旅軒續集)
1.10 주정재(主靜齋)(旅軒續集)
1.11 합류대(合流臺)(旅軒續集)
1.12 격진령(隔塵嶺)(旅軒續集)
1.13 학욕담(鶴浴潭)(旅軒續集)
1.14 만활당부(萬活堂賦)(旅軒集)
2. 박인로(朴仁老)
2.1 입암 이십구곡(立巖二十九曲)(蘆溪集)
2.1.1 입암(立巖)
2.1.2 정사(精舍)
2.1.3 기여암(起予巖)
2.1.4 계구대(戒懼臺)
2.1.5 토월봉(吐月峯)
2.1.6 구인봉(九仞峯)
2.1.7 소로잠(小魯岑)
2.1.8 피세대(避世臺)
2.1.9 합류대(合流臺)
2.1.10 심진동(尋眞洞)
2.1.11 채약동(採藥洞)
2.1.12 욕학담(浴鶴潭)
2.1.13 수어연(數魚淵)
2.1.14 향옥교(響玉橋)
2.1.15 조월탄(釣月灘)
2.1.16 경운야(耕雲野)
2.1.17 정운령(停雲嶺)
2.1.18 산지령(産芝嶺)
2.1.19 격진령(隔塵嶺)
2.1.20 화리대(畵裏臺)
2.2 입암별곡(立巖別曲)(手筆本寫本)
3. 권득중(權得重)
3.1 해정여휘욱등계구대(偕鄭汝輝煜登戒懼臺)(東窩集)
3.2 차손중기욕학담(次孫重器浴鶴潭)(東窩集)
4. 손시완(孫是完)
4.1 욕학담(浴鶴潭)(鶴潭逸稿)
5. 손동걸(孫東杰)
5.1 입암서원이십팔경음(立巖書院二十八景吟)(含翠亭逸稿)
5.1.1 탁립암(卓立巖)
5.1.2 계구대(戒懼臺)
5.1.3 기여암(起予巖)
5.1.4 상두석(象斗石)
5.1.5 경심대(鏡心臺)
5.1.6 답태교(踏苔橋)
5.1.7 수어연(數魚淵)
5.1.8 소로잠(小魯岑)
5.1.9 토월봉(吐月峯)
5.1.10 피세대(避世臺)
5.1.11 물막정(勿幕井)
5.1.12 구인봉(九仞峯)
5.1.13 함휘령(含輝嶺)
5.1.14 상엄대(尙嚴臺)
5.1.15 심진동(尋眞洞)
5.1.16 욕학담(浴鶴潭)
5.1.17 향옥교(響玉橋)
5.1.18 야연림(惹烟林)
5.1.19 화리대(畵裏臺)
5.1.20 경운야(耕雲野)
5.1.21 산지령(産芝嶺)
5.1.22 합류대(合流臺)
5.1.23 정운령(停雲嶺)
5.1.24 조월탄(釣月灘)
5.1.25 채약동(採藥洞)
5.1.26 격진령(隔塵嶺)
5.1.27 세이담(洗耳潭)
5.1.28 초은동(招隱洞)
5.2 계구대차정매헌욱운(戒懼臺次鄭梅軒煜韻)(含翠亭逸稿)
5.3 일제당호운증정매헌(日躋堂呼韻贈鄭梅軒)(含翠亭逸稿)
6. 권병기(權丙基)
6.1 차입암이십팔경운(次立巖二十八景韻)(聾石集)
6.1.1 탁립암(卓立巖)
6.1.2 기여암(起予巖)
6.1.3 피세대(避世臺)
6.1.4 초은동(招隱洞)
6.1.5 경심대(鏡心臺)
6.1.6 수어연(數魚淵)
6.1.7 토월봉(吐月峯)
6.1.8 상두석(象斗石)
6.1.9 답태교(踏苔橋)
6.1.10 세이담(洗耳潭)
6.1.11 화리대(畵裏臺)
6.1.12 계구대(戒懼臺)
6.1.13 경운야(耕雲野)
6.1.14 정운령(停雲嶺)
6.1.15 함휘령(含輝嶺)
6.1.16 산지령(産芝嶺)
6.1.17 채약동(採藥洞)
6.1.18 조월탄(釣月灘)
6.1.19 구인봉(九仞峯)
6.1.20 욕학담(浴鶴潭)
6.1.21 소로잠(小魯岑)
6.1.22 물막정(勿幕井)
6.1.23 심진동(尋眞洞)
6.1.24 야연림(惹烟林)
6.1.25 상엄대(尙嚴臺)
6.1.26 향옥교(響玉橋)
6.1.27 합류대(合流臺)
6.1.28 격진령(隔塵嶺)
7. 정욱(鄭煜)
7.1 입암이십팔경(立巖二十八景)(梅軒公逸稿)
7.1.1 탁립암(卓立巖)
7.1.2 계구대(戒懼臺)
7.1.3 경심대(鏡心臺)
7.1.4 수어연(數魚淵)
7.1.5 상두석(象斗石)
7.1.6 구인봉(九仞峯)
7.1.7 물막정(勿幕井)
7.1.8 향옥교(響玉橋)
7.1.9 답태교(踏苔橋)
7.1.10 피세대(避世臺)
7.1.11 경운야(耕雲野)
7.1.12 산지령(産芝嶺)
7.1.13 상엄대(尙嚴臺)
7.1.14 욕학담(浴鶴潭)
7.1.15 토월봉(吐月峯)
7.1.16 기여암(起予巖)
7.1.17 소로잠(小魯岑)
7.1.18 화리대(畵裏臺)
7.1.19 야연림(惹烟林)
7.1.20 함휘령(含輝嶺)
7.1.21 정운령(停雲嶺)
7.1.22 합류대(合流臺)
7.1.23 심진동(尋眞洞)
7.1.24 채약동(採藥洞)
7.1.25 초은동(招隱洞)
7.1.26 조월탄(釣月灘)
7.1.27 세이담(洗耳潭)
7.1.28 격진령(隔塵嶺)
8. 권석찬(權錫瓚)
8.1 일제당소회(日躋堂小會)(是巖集)
8.2 합류대회화(合流臺會話)
8.3 피세대회화(避世臺會話)
8.4 탄합류대무흔(嘆合流臺無痕)
1. 장현광(張顯光) 출전: 旅軒先生文集, 旅軒先生續集
1.1 입암(立巖)에서 13수를 읊다.(立巖十三詠)
1.1.1 입암촌(立巖村)
孤村巖底在 바위 아래 있는 외로운 마을
小齋性足頤 작은 집이지만 본성에는 편안해
老矣無可往 늙었으니 이제 갈 곳도 없어
從今學不移 이제부터 옮기지 않는 이 바위 배우리라
1.1.2 만욱재(晩勖齋)
末路人事茂 말로에 인간사 하도 복잡해
誰從早時勖 그 누가 일찍부터 노력할 줄 알까
此固耄翁悶 이는 진실로 늙은이의 걱정거리
勉修如不及 늘 부족한 것처럼 힘써 수양하리
1.1.3 사사헌(四事軒)
康節此詩意 소강절이 이 시에서 노래한 뜻
膾炙山人口 산중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네
雖不關世務 비록 세상 일 관여치 않으나
自有貧中富 가난 가운데에 절로 부유함이 있으니
1.1.4 수약료(守約寮)
近思耄年業 근래에 생각하니 노년의 사업은
守約爲大要 요약을 지킴이 제일 중요하네
事事能不煩 일마다 능히 번거롭지 않으면
身可出雲宵 이내 몸 하늘 높이 솟아나리
1.1.5 계구대(戒懼臺)
聖訓戒危微 성인의 가르침 위미를 경계하셔
何人無此心 그 누구인들 이 마음 없을까
此學不傳久 이 학문 전해지지 않은 지 오래이니
陳篇誰復尋 묵은 책 어느 누가 다시 찾을른지
1.1.6 학욕담(鶴浴潭)
山在樂聞後 산은 낙문산 뒤에 있는데
有潭名鶴浴 이곳에 학욕이란 못이 있네
鶴亦物之靈 학 또한 물건 중에는 영물인데
影斷何嘗浴 그림자도 못봤으니 언제나 한번 목욕할까
1.1.7 피세대(避世臺)
隱有市中者 시중에도 숨은 은자가 있는데
何須深處覓 하필 깊은 곳에서 찾아야 할까
農人斷崖徑 농군들 벼랑 길을 끊어놓으니
猶勝枝掃迹 나뭇가지가 자취를 쓰는 것보다 낫구나
1.1.8 인학산(引鶴山)
浴鶴潭上山 욕학담 위에 있는 산 하나
山名稱引鶴 산 이름 인학산이라 부르지
邇來鶴不至 그동안 학이 오지 않았는데
何人名耦鶴 어떤 사람 우학이라 이름하였나
1.1.9 상천봉(象天峯)
團圓秀列峀 둥글둥글 솟아올라 늘어선 봉우리들
得名宜象天 이름을 지으면 상천봉이 마땅해
居人欲象山 여기 사는 사람들 산을 닮고자 한다면
立心盍無偏 마음가짐 어찌 편벽되게 하겠는가
1.1.10 산지령(産芝嶺)
覓芝芝不見 지초를 찾아도 지초가 안보여
遑遑如有失 황황하여 무엇을 잃은 듯하네
何必求諸外 하필 밖에서 구할 것이 있나
一敬奇效實 한 경(敬) 자 기이한 효험 진실한 것을
1.1.11 구인봉(九仞峯)
有峯仞至九 산봉우리 있는데 높이는 아홉 길
豈待簣土積 어찌 삼태기 흙으로 쌓기를 기다리리
來爲立巖對 와서 입암과 상대해 있으면서
瞻向窮朝夕 아침저녁 다하도록 향하고 있노니
1.1.12 도덕방(道德坊)
身往無非道 몸 가는 곳마다 도 아님 없고
心存皆是德 마음에 둔 것이 모두가 덕이라오
吾人所同得 우리 인간 똑같이 얻은 것이니
知行我何獨 지(知)와 행(行) 내 어찌 홀로 하겠는가
1.1.13 경운야(耕雲野)
峽居謀卒歲 산중에 살며 이 세상 마치려고
夾鋤以晨昏 호미 끼고 일하지 새벽부터 저녁까지
往來雲煙裏 구름과 연기 속에 오고 가는 길에
父子與季昆 아버지와 아들, 형과 또 아우
1.2 입암(立巖)
立從地闢始 개벽하던 태초부터 우뚝이 솟아
抵今方不易 지금까지 있어도 바뀌지 않네
風雨幾萬變 풍우의 변고 몇만 번이던가
歲月誰記曆 그 오랜 세월 그 누가 기억할지
巍將一顔面 우뚝한 한 얼굴을 가지고
肯隨千飜革 어찌 천 번 뒤바뀜을 따르겠는가
此樣旣往萬 이 모양 이미 만고에 그러하였으니
此樣應來億 이 모양 앞으로 오는 억년에도 그러하리
不倚是中道 치우치지 않음은 바로 중도이며
不回惟經德 간사하지 않음은 떳떳한 덕이리니
寒暑自往來 추위와 더위는 절로 오고가고
晦明任闔闢 어둠과 밝음은 닫힘과 열림에 따르네
溪流流不返 시냇물은 흘러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百卉紛開落 온갖 꽃들은 어지러이 피고 지네
雲煙互變態 구름과 이내는 서로 모양 바꾸는데
爾獨今猶昔 너만 홀로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一立立終古 한번 서고는 영원히 우뚝하니
何物能撓得 어느 물건이 너를 흔들 수 있으리
爲爾設小齋 너를 위해 작은 집 지어놓고
忘言對日夕 말을 잊은 채 밤낮으로 마주하네
1.3 정사(精舍)
負巖開小齋 바위 등지고 작은 집 지었더니
澗流當前過 바위 사이 시냇물 앞으로 지나가네
階因巖趾築 섬돌은 반석을 기대어 쌓았고
簷與松柏摩 처마는 소나무 잣나무와 부딪치네
炎夏納潭凉 무더운 여름에는 강 바람 불어오고
凍寒來陽和 추운 겨울에는 온화한 양기 들어오네
同棲二三子 두서너 사람들과 함께 머물며
晝夜相切磨 밤낮으로 서로 공부하여 절차탁마하네
龕儲備經傳 감실에는 경전을 갖추어 놓으니
且便相講劘 서로 강론하고 익히기 편리하며
日晡數酌罷 해 저물면 몇 잔 술 마시고
携上南臺哦 함께 남쪽 누대에 올라가 시를 읊지
洞天時異趣 골짜기는 때때로 정취가 다르나
立巖恒不頗 입암은 항상 기울지 않네
老夫勖諸益 노부가 여러 벗들에게 당부하노니
盍觀醜頭皤 이 못난 백발 노인 어이 보지 않는가
年齡及耳順 나이는 늙어 이순이 되었어도
進步坐蹉跎 진보를 못하고 그대로 멈칫거리네
立脚貴及早 자신을 바로잡기 이를수록 좋으니
勿追世奔波 세상의 시끄러운 파도 따르지 말게
藏修宜惜日 공부하고 수련함은 부디 날짜를 아끼게
歲月疾如梭 세월은 베짜는 북처럼 빠르다네
1.4 앞시내(前澗)
小澗流齋下 작은 시냇물 서재 아래로 흘러
日夜響潺湲 밤이나 낮이나 물소리 졸졸
源從底處出 근원은 깊은 곳에서 나왔으되
出出會無艱 나와도 나와도 어려움이 없고
流向底處歸 흘러서 다시 깊은 곳으로 돌아가
歸歸且不慳 돌아가고 돌아가도 그치지 않네
始見花爛浮 처음에는 꽃잎 떨어져 떠감을 보았는데
旋作黃流灣 문득 황톳물 가득히 흘러가고
纔觀玉宇涵 금방 하늘이 담긴 것을 보았는데
復聽冰下灘 다시 얼음 밑에 여울소리 듣노라
爽或起松籟 상쾌함은 솔바람이 이는 듯하고
怒或雷凝寰 노할 때에는 우주에 벼락이 치는 듯해
過續足立懦 지나가고 이어짐은 게으른 자 일으키고
潔淸能廉頑 깨끗하고 시원함은 완악한 자 청렴케 하네
誰勸往無已 누가 권하기에 끊임없이 흘러가며
孰催忙未閒 누가 재촉하기에 그처럼 바쁜가
隨時呈百趣 때에 따라 온갖 정취 드러내지만
不息終一般 쉬지 않음은 끝내 한 가지
愛玩每臨流 사랑하며 즐기노라 매양 물가에 앉아서
不覺身恫癏 몸의 괴로운 병도 깨닫지 못하겠네
1.5 계구대(戒懼臺)
臺在巖盡頭 대가 바위 끝에 있으니
下可尋五六 아래로는 대여섯 길이나 되지
上者一失足 오르는 자 한번 헛디디면
傾墜在瞬目 떨어지는 건 눈 깜짝할 사이
爲此名戒懼 이 때문에 계구대라 이름하여
常使心淵谷 마음은 항상 깊은 골짝과 못에 임한 듯
戒至無可戒 경계하여 더 이상 경계할 게 없으면
履危如平陸 위태한 곳 밟아도 평지처럼 편안하며
懼至無可懼 두려워하여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으면
轉險來胡福 험한 것을 바꾸어 큰 복을 오게 하네
由能不弛心 마음을 해이하게 하지 않으므로
身終免顚覆 몸이 끝내 전복됨을 면할 수 있지
若非戒懼稱 만약 계구대라 부르지 않았으면
幾人泥骨肉 골육이 진흙된 이 몇이나 있었을까
世間危險地 사람사는 세간에 위험한 곳이
不是玆臺獨 홀로 이 계구대만 있는 게 아니네
內有一方寸 안에는 사방 한 치 마음이 있어
四邊千尋瀆 사방에 돌아가며 천길의 깊은 못
外有羊腸路 밖에는 아홉 굽이 양의 창자 길
不啻車絶軸 수레의 축만 부러지는 게 아니지
所以明哲人 이 때문에 똑똑하고 명철한 사람들은
不暫忘兢肅 잠시라도 조심함을 잊지 않나니
須將處臺心 부디 계구대에 처하는 마음으로
奉身恒踧踧 몸을 받들어 항상 조심하리
1.6 피세대(避世臺)
吾人生世間 이 세상 사는 우리 인간들
未死當在世 죽기 전에는 세상에 있지
奈何欲避世 무슨 일로 세상을 피하려 하여
名臺思自蛻 피세대라 이름하고 스스로 벗어나나
羲軒邈矣古 복희 헌원이 아득히 멀어
古道今時戾 옛날의 도는 지금과 어긋나니
難將齟齬蹤 세상과 모순되는 종적으로
處世爲疣贅 혹과 무사마귀처럼 세상에 처하기 어려워라
臺在水北頭 피세대는 물의 북쪽 끝에 있는데
谷邃山重蔽 골짝은 깊고 산은 겹겹 가리웠네
屛巖後圓峻 병풍바위는 뒤에 둥그렇게 솟아 있고
碧潭流擁砌 푸른 시내는 돌을 끼고 흐르네
只合保幽貞 단지 그윽한 정조 보전하기 좋으나
俗夫難投袂 세속 사람들은 옷깃을 던지기 어렵겠지
天地久慳秘 천지가 오랫동안 이곳을 숨겼으니
應畀碩人憩 응당 훌륭한 사람에게 주어 쉬게 하리
方今値聖明 이제 성군의 명철한 시절 만나
佇見唐虞際 요순 같은 태평성세 보게 되었으니
誰復遯嘉肥 누가 다시 깊이 은둔하여
窮山空自滯 궁벽한 산속에 부질없이 숨어 있나
獨此一棄物 홀로 버려진 이 한 사람
隨分棲叢桂 분수에 따라 계수나무 속에 살고 있지
1.7 소로잠(小魯岑)
大聖生小魯 대성이 작은 노나라에 태어나시니
行潦與滄溟 길바닥 물과 큰 바다와 같다네
何但魯地小 어찌 노 나라 땅이 작을 뿐이겠는가
擧世風雨冥 온 세상이 비바람에 어둑한 것을
1.8 기여암(起予巖)
耄性本自頑 늙은이 성질이 본래 완고했는데
名巖躬實警 바위에 이름지으며 실은 이몸이 깨닫네
起者何獨予 일으켜지는 것이 어찌 나 혼자뿐이랴
吾徒試共省 여러분 우리 모두 함께 살펴보았으면
1.9 일제당(日躋堂)
成湯聖且敬 성탕은 성스러우면서도 공경하였는데
況吾初無志 하물며 우리들이 뜻을 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恢築願及時 때맞추어 더 넓게 새로 지어서
永作藏修地 길이 공부하고 수련할 곳 되었으면
1.10 주정재(主靜齋)
中正仁義功 중정과 인의를 닦는 공부는
主靜爲之本 정(靜)을 주장하는 것이 근본이라네
人極此焉立 사람의 극(極)이 여기에 세워지니
趣味愈在晩 이러한 취미 더욱 말년에 있다네
1.11 합류대(合流臺)
二溪適相合 두 시냇물이 마침 서로 모여
于我臺前流 나의 대 앞에서 흐르는구나
人別同志友 누구든 뜻을 같이하던 벗과 작별할 때
亦足斯淹留 여기서 붙잡는 것도 또한 좋겠군
1.12 격진령(隔塵嶺)
風塵能汙人 풍진이 능히 사람을 더럽히지
無隔隨人入 막는 것이 없으면 사람 따라 들어오네
幸此村口嶺 다행히 마을 어귀에 이 잿마루
斷盡經來俗 세속에서 오는 것들 끊어버리네
1.13 학욕담(鶴浴潭)
兩峽劈作洞 두 산이 자른 듯이 골짝 이루어
一潭成以石 못 하나 있는데 돌로 만들었네
上注懸於瀑 위로는 물줄기 폭포에 매달렸고
下流盈出積 아래로는 가득히 모였다가 넘쳐 흐르네
淵泫更澄澂 이 못 깊은데 또 맑고 깨끗해
一塵寧容得 한 티끌인들 어찌 용납하겠는가
凡蹤不可近 속세의 종적 가까이할 수 없으니
潭名卽浴鶴 못 이름을 바로 학이 목욕한다 하였네
鶴爲鳥中仙 학이야 새 중의 신선이지
水不淸不浴 물이 맑지 않으면 목욕하지 않는 것을
遊必騰雲衢 놀 때에는 반드시 구름 높은 거리에 날고
巢必無人跡 둥지는 반드시 인적이 없는 곳에 마련하지
肯從鵝鴨群 어찌 오리 거위 따위를 따라다녀
不擇池汚濁 못이 더러운지 가리지 않겠는가
飛止自淸高 날고 멈춤이 절로 청고하니
誰能馴逸翮 누가 높이 나는 나래 길들일까
眞如遯世士 참으로 세상에 은둔하는 선비
不處塵埃域 진세에 처하지 않음과 같다오
而今鶴何處 지금 학은 어느 곳에 있는가
潭空山影夕 못은 비고 산 그림자만 저녁에 드리워져
我來始濯纓 내 와서 처음으로 갓끈 씻으니
神魂爽碧落 정신과 혼이 하늘 높이 상쾌하여라
夜歸夢仙客 밤에 돌아와 꿈속에 신선을 만나
□我同淸約 나와 맑은 약속을 함께 하였네
1.13 만활당부(萬活堂賦)
最靈吾人 가장 영명한 우리 인간은
得血氣而有身 혈기를 얻어 몸을 가졌으니
非枯木之無生 생명이 없는 마른 나무가 아니며
能知覺而爲心 알고 깨달아 마음을 쓰니
豈死灰之無情 어찌 감정이 없는 꺼져버린 재이겠는가
戴無往而非天 머리 위에 이고 있는 것은 모두가 하늘이요
履無適而非地 발로 밟고 있는 것은 가는 곳마다 땅이로다
目無觸而非物 눈으로 보는 것은 모두가 물건이요
手無爲而非事 손으로 하는 것은 모두가 일이로다
惟在在焉皆理 오직 있는 곳마다 다 이치이니
故見見其都活 이 때문에 보는 것마다 모두 활발하도다
益可驗於靜觀 고요히 보고 있으면 더욱 징험할 수 있으니
堂用是而揭目 당호를 이것으로 걸어놓았네
察夫上下察者 위와 아래에 드러난 것 살펴보니
巖何爲而常立 바위는 어이하여 항상 서 있으며
澗何爲而不息 시냇물은 어이하여 쉬지 않고 흐르는가
山何爲而高低 산은 어찌하여 높고 낮으며
壑何爲而橫直 골짝은 어찌하여 종횡으로 있는가
林孰使之榮枯 숲의 나무는 그 누가 꽃피고 시들게 하며
鳥孰使之飛止 새는 그 누가 날고 멈추게 하는가
風何心而往來 바람은 무슨 마음으로 오고 가며
雲何情而滅起 구름은 무슨 정으로 없어졌다 일어나는가
松千歲於巖角 소나무는 바위 모서리에 천년 동안 우뚝하고
菌朝生而不夕 버섯은 아침에 났다가 저녁에 없어지네
苟非太極之爲極 만일 태극이 법이 되지 않는다면
烏能物物兮各形其形各色其色 어찌 물건마다 각기 형체와 색깔을 간직하고 있을까
若乃爛錦屛於四圍 봄이면 사방에 비단 병풍 둘러쳐서
敷化工之妙蘊 조화의 오묘함 다 펼치며
虩驚雷於屯雲 여름이면 우레소리 구름 속에 일어나
沛百彙之競奮 온갖 물건 다투어 분발하게 하네
爽凉颷之入牖 가을이면 시원한 바람 창문으로 들어와
已玉宇之寥廓 옥처럼 깨끗한 하늘 고요하고 넓다네
恍洞天之迷茫 겨울이면 골짝이 아득하여
見松崖之騰六 소나무 우뚝한 산에 눈발이 날리는구나
月纔盈而必虧 달은 겨우 차면 반드시 이지러지며
日旣南而復北 해는 남쪽으로 가면 다시 북쪽으로 돌아오지
夫何一理之宰運 어찌하여 한 이치가 운행하여
紛萬變之迭作 갖가지 변화가 차례로 일어나는가
山中旣云幽邃 산중이라 이미 그윽하니
堂自爲之闃寂 당은 절로 조용하네
塊對案而窮年 우두커니 책상 대해 한 해를 보내니
剩堯夫之觀物 사물을 관찰하는 요부인 듯
探鬼神之能事 귀신의 훌륭한 일을 탐구하며
翫造化之奇迹 조화의 기이한 자취 찾아보네
以言其常兮 변함 없음에 대해 말하자면
歷萬古而如昨 만고를 지나도 어제와 같고
以言其變兮 변한다는 이치에 대해 말하자면
雖一日而莫測 비록 하루도 측량하기 어려워라
自其異者而觀之 각기 다른 점에 대해서 관찰하면
幾巨細之類族 크고 작은 것이 유형별로 나누어지고
自其同者而觀之 모두 같은 점에 대해서 관찰하면
孰非性夫天則 어느 것인들 하늘의 법칙 아니겠나
見得及乎所以然之妙兮 소이연의 묘한 이치 발견하니
手舞足蹈之不覺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춤추고 발로 뛴다오
主人翁飢喫山蔬 주인옹은 배고프면 산나물 먹고
渴飮泉寒 목마르면 차가운 샘물 마시며
晝伴黃卷 낮에는 서책을 대하고
夜聽嗚湍 밤이면 여울물소리 듣는다오
一今古於閒中 한가로운 가운데 예와 지금 하나로 보고
心乾坤於靜裏 고요한 속에 건곤의 이치 생각하니
道已通於形外 도는 이미 형체의 밖을 통하고
思亦窮乎物始 생각 또한 사물의 시초 연구하네
卷參三之事業 삼재(三才)에 참여하는 사업 거두어
付一室之佔畢 한 방의 도서(圖書)에 부쳐두며
會貫萬之道理 만 가지를 꿰뚫는 도리 모아
爲方寸之獨樂 마음 속에 홀로 즐거워하니
夫孰知窮山裏一茅堂坐臥 궁벽한 산속 한 초가집에 앉고 누워서
有可以與天地萬物相爲流通 천지 만물과 서로 유통하여
恒浩浩而洋洋 항상 너르고 충만함 알겠는가
到此地頭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吾堂爲天地耶 나의 집이 천지인가
天地爲吾堂耶 천지가 나의 집인가
萬物爲我耶 만물이 나인가
我爲萬物耶 내가 만물인가
今日爲太古耶 금일이 태고인가
太古爲今日耶 태고가 금일인가 알 수 없네
形分大小 형체가 크고 작음으로 나뉘고
質分彼此 바탕이 저것과 이것으로 나뉘며
時分前後者 때가 앞뒤로 나뉘는 것을
殊之謂兮 서로 다름 수(殊)라고 이르니
天地自天地 하늘과 땅은 각자 하늘과 땅이요
吾堂自吾堂 나의 집 역시 나의 집이라
我自我物自物 나는 나이고 물건은 물건이며
今自今古自古也 지금은 지금이고 옛날은 옛날이라오
大小皆此理 크고 작은 것이 모두 한 이치이고
彼此皆此理 저것과 이것이 모두 한 이치이며
前後皆此理者 앞과 뒤가 모두 한 이치인 것을
一之謂兮 일(一)이라고 이르니
吾堂而天地 나의 집이 바로 천지이고
吾身而萬物 나의 몸이 바로 만물이며
今日而太古也 금일이 바로 태고라오
此旅翁之假主乎玆堂 이는 여헌 노인이 이 집에 임시 주인이 되고
取萬活爲其契活 만활을 취해 깊은 뜻을 두어
曾不自知其貧寠者也 일찍이 스스로 가난함을 모르는 이유라오
銘曰 명하여 가로되
天地之大德曰生 천지의 큰 덕은 물건을 낳는 것이며
生之理流行曰活 낳는 이치가 유행함을 활(活)이라 하네
此理一日不流行 이 이치는 하루만 유행하지 않으면
天地不能爲天地 천지가 천지가 되지 못하니
萬物況得爲萬物 하물며 만물이 만물이 될 수 있겠는가
然則立此天地之中 그렇다면 이 천지의 가운데에 서서
首此萬物之上 이 만물의 우두머리가 되어
盍思有以體會夫此理 이 이치 알고 체행할 것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體之伊何 체행은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曰敬而已 경(敬) 한 가지 뿐이라오
放之則彌六合 풀어놓으면 육합에 가득하고
卷之則退藏於密者 거두면 은밀한 이치에 감추어짐은
由一敬之終始 한 경으로 말미암아 공부의 시작과 끝이 이루어지니
一日不敬 하루라도 공경하지 않으면
心死一日 하룻동안 마음이 죽게 되고
一刻不敬 한 시각이라도 공경하지 않으면
心死一刻 한 시각 동안 마음이 죽으니
其心死兮 마음이 죽으면
生之理息 낳는 이치가 종식되는 법
勖哉主人 주인은 부디 노력하여
常令此心活也 항상 이 마음 살아 있게 하라
2. 박인로(朴仁老) 출전: 蘆溪集
2.1 입암 연작시조
2.1.1 立巖
無情히 서 바회 有情야 보이다
最靈 吾人도 直立不倚 어렵거
만고애 곳게선 저 얼구리 고칠적이 업다
江頭애 屹立니 仰之예 더욱 놉다
風霜애 不變니 鑽之예 더욱 굿다
사도 이 바회면 大丈夫가 노라
卓然直立니 法바담즉 다마
구 깁흔 峽中에 알 리 잇사 자오랴
努力躋攀면 奇觀이야 만니라
말도 업슨 바 사괼일도 업건만은
古貌眞態 벗마 안시니
世上애 益者三友를 사괼 모노라
繩墨업시 삼긴 바회 어 規矩 알니마
놉고도 고다니 貴야 보니다
애다 可히 사이 오니 돌마도 못랴
世情이 하 殊常니 나 본 반길넌가
枉己循人야 내 어 올아가료
山됴코 물됴 골의 삼긴대로 늘그리라
天皇氏 처음부터 니 深山의 혼 이셔
너보고 반기기를 멧사 지내던고
萬古애 許多英雄을 드러보려 노라
巢許 지낸 後에 嚴處士를 만낫다가
낫비 여희고 알니 업시 배렷더니
오 너를 만나니 時運인가 노라
從容히 다시 뭇쟈 너 나건지 몃 千年고
네 나흔 必然하고 내 나흔 젹건마
니제나 너과 나와 긔 늘쟈 노라
唐虞를 그제 본덧 漢唐宋을 어제 본덧
치 지내다가 나믄 해도 적다마
十二會 못다간 드란 나도 너와 늘그리라
2.1.2 精舍
草屋 두 세 間을 巖穴에 부쳐두고
松竹 두 빗치 病目애 익어시니
이 中에 春去秋來를 아므젠줄 모로라
2.1.3 起予巖
夫子의 起予者 商也라 드러더니
오 起予者 말업 바회로다
어리고 鄙塞던 이 절로 롭다
2.1.4 戒懼臺
戒懼臺 올라오니 믄득 졀로 戰兢다
臺上애 살펴보며 이 치 저홉거든
못보고 못듯 히야 아니 삼가 엇지리
2.1.5 吐月峯
峯頭에 소슨 이 山中의 비취노다
九萬里長天이 멀고도 놉건마
高山이 揷天니 돌우흐로 나덧다
2.1.6 九仞峯
巍巍한 九仞峯이 重山中에 秀異코야
下學工程이 이 山하기 갓건마
엇디라 이제 爲山은 功虧一簣 하게오
2.1.7 小魯岑
南魯岑 이 일홈을 뉘라서 지은게오
夫子登臨도 이 東山 아니런가
萬古靑山이 只麽히 놉하시니 아무줄 모로라
2.1.8 避世臺
名利예 지업서 뵈오 막 집고
訪水尋山야 避世臺예 드러오니
어즈버 武陵桃源도 여긔런가 노라
2.1.9 合流臺
合流臺 린 물이 보기예 有術다
彼此 업시 흘러가고 左右에 逢源하니
分時異 合處同을 이 臺下애 아라고야
2.1.10 尋眞洞
尋眞洞 린 물이 巖下애 구븨지어
不舍晝夜야 亭子압 드러 오니
어즈버 洛水伊川을 다시 본 여라
2.1.11 採藥洞
솔알 아드라 네 얼운 어가뇨
藥러 가시니 하마 도라 오렷마
山中에 구룸이 깁흐니 간곳 몰라 노라
2.1.12 浴鶴潭
浴鶴潭 근 물에 鶴을 조차 沐浴고
訪花隨柳야 興을 고 도라오니
아무려 風乎舞雩詠而歸들 불을 일이 이시랴
2.1.13 數魚淵
淵泉이 하 말그니 가 고기 다 보인다
一二三四를 낫낫치 혜리로다
童子야 새물에 고기를 다시 혜여 보아라
2.1.14 響玉橋
磯頭에 누엇다가 라니 이 다
靑藜杖 빗기집고 玉橋를 건너오니
玉橋애 말근 소를 자 만 아놋다
2.1.15 釣月灘
낙대를 빗기 쥐고 釣月灘 라려
불근 역귀 헤혀고 알 안시니
아모려 桐江興味 불을 주리 이시랴
2.1.16 耕雲野
沮溺의 가던 밧치 千年을 묵어거
구룸을 허여드러 두세이렁 가라두고
生涯를 足다사 가마 부거슨 업노왜라
2.1.17 停雲嶺
停雲嶺 라보니 天中에 두렷괴야
陟彼崔嵔면 五雲蓬萊 보련마
病目애 눈물이 얼니 바보기 아득다
2.1.18 産芝嶺
産芝嶺 올나오니 一身이 香氣롭다
四皓商山도 이 芝嶺 아니런가
山路애 구룸이 깁흐니 모줄 모로다
2.1.19 隔塵嶺
隔塵嶺 하 놉흐니 紅塵이 머러간다
득이 먹은 귀 싯슬록 먹어가니
山밧긔 是是非非를 듯도 보도 못로다
2.1.20 畵裏臺
江上山 린 긋 솔아 너분 돌해
翠嵐 丹霞ㅣ 疊疊이 둘러시니
어즈버 雲毋屛風을 그린 여라
2.2 입암별곡(立巖別曲)
塵世上 살암들아 立岩風景 보앗다
武陵이 죳타들 이예셔 나쇼냐
峯頭애 白鶴은 雲間애 츔을츄고
深源의 숨은 杜鵑 月下의 슬피 운다
蓬萊가 어듸메오 瀛州가 녀긔로다
日躋堂 올나안 二十八景 도라보니
卓立岩 두렷야 淸州의 砥柱되고
起予岩 삼겨나셔 戒懼臺 도여시니
臨危戒懼 신말 닛예 뫼왓덧
九仞峯 놉 봉 功虧一簣 죠심쇼
吐月峯 거동 峯頭生出 덧다
小魯岑 올나안 天下을 젹단 말
孔夫子의 大觀이라 우리어이 의논니
産芝嶺 올나가셔 紫芝歌 생각고
含輝嶺 래보이 玉蘊山含 비치로다
停雲嶺 놉흔 재예 가 구 머무덧
隔塵嶺 둘려시니 世路을 긋쳐라
耕雲野 도라드니 隱者의 취미로다
惹烟林 落落松에 暮烟이 겨셔라
招隱洞 쟈드니 숨 사 부덧
尋眞洞 어드매오 松下의 童子로다
紫門에 무려본들 白雲이 덥폇더라
採藥洞 도러가니 百草을 심겨덧
鏡心臺예 鳶飛고 數魚淵에 魚躍이라
避世臺 안쟈시니 世念이 전혀업
尙嚴臺 건간이 富春이 니곳진덧
浴鶴淵 磐潔處에 舞鶴岩이 더욱 긔타
畵裏臺 구어보이 모든 景을 긔렷덧
合流臺 노힌 바회 一鶴을 그렷더라
釣月灘 려가셔 근달 말근물에
銀鱗을 낙가내니 이 띄여 나오덧
洗耳潭 도라드니 巢夫許由 긔아닌가
響玉橋 건네오니 溪聲이 琤琮고
踏苔橋 바오니 石面에 苔生일쇠
勿幕井 근 이 井卦上六 깃쳐 잇고
象斗石 노힌돌이 七星을 버렷더라
一區 屳境을 임재업시 려이셔
新羅 一千年과 高麗 五百載예
몃 英雄 몃 豪傑이 수업시 지내던고
天公이 有意셔 四友 깃치시이
一半華山으오 旅軒을 請신대
靑藜杖 부들부 陳園公 본을 바다
淸風에 半醉셔 田老을 期約야
日齊堂 놉히 짓고 友蘭悅松 齋號셔
經傳을 사하두고 道義을 講劘니
三隱에 加兩이오 四晧에 倍一이라
命名신 卄八景이 眼前에 버려시니
都都 屳味을 塵外예 알니업다
渭水에 고기 낙고 南陽에 밧가덧
閒隱에 겨시니 리 긔뉘런고
이러 杖屨所을 千秋에 깃쳐시니
溪山物色이 절로절로 렷더라
山절로 水절로 山水間에 나도 절로
아마도 절로 린 人生이 절로절로 늘리라
3. 권득중(權得重) 출전: 東窩集
3.1 정여휘 욱과 함께 계구대에 오름(偕鄭汝輝煜登戒懼臺)
偶然乘興至 우연히 흥을 타고 이곳에 이르러
團坐石爲茵 바위를 자리삼아 둥글게 앉았네
無限風光好 끝없는 이 경치 참으로 좋으니
宛如世外人 완연히 신선이나 된 것만 같구나
松古無絃瑟 소나무는 늙어서 악기가 쓸모없고
臺平不製茵 계구대는 평평하니 자리 만들 필요 없네
相看未卽去 서로 마주보며 헤어질 줄을 몰라
風月解留人 바람과 달이 사람들을 흩어주고 있네
3.2 손중기의 욕학담 운에 차운함(次孫器重浴鶴潭韻)
衆流成瀑落層層 여러 물길 폭포되어 층층이 떨어지고
時帶淸風噴雪冰 때때로 맑은 바람 흰 포말을 뿜어내네
欲問仙禽曾浴處 신선의 학이 목욕하던 곳을 물으려면
須從卄八記中憑 모름지기 이십팔경 기문을 읽으시게
4. 손시완(孫是完) 출전: 鶴潭逸稿(노촌세고 권3)
4.1 욕학담(浴鶴潭)
一肩高聳碧波頭 한쪽 어깨 푸른 물머리에 높직이 솟아
此日披襟俯玉流 오늘은 옷깃을 열고 맑은 물결 굽어보네
雲外層巒千疊翠 구름 밖에 층층 산은 천겹으로 푸르고
風前細柳萬絲柔 바람 앞에 가는 버들 만가지가 하늘하늘
梅香滿袖饒仙趣 매화향기 소매에 가득 신선 흥취 풍요하고
竹葉浮盃瀉客憂 대나무 잎 잔에 뜨니 객수를 씻어내네
這裡乾坤塵想絶 남다른 이 세계에 세상시름 잊었으니
從知奇勝甲靑丘 알겠구나 이 경치가 온 나라에 제일인 걸
5. 손동걸(孫東杰) 출전: 含翠亭逸稿(노촌세고 권4)
5.1 立巖書院二十八景吟
5.1.1 탁립암(卓立巖)
誰借巨靈斧 그 누가 크고 신령한 도끼 빌어다가
劈成卓爾巖 깎아내어 그대 솟은 바위 만들었나
高堅彌鑽仰 높고 굳어 우러를수록 뚫고 솟은 듯하여
聖道宜玆監 진리의 길 마땅히 여기서 굽어보리니
5.1.2 계구대(戒懼臺)
平原忽陡起 평평한 들판에서 문득 솟아올라
俯水削立臺 물을 굽어보며 깎은 대 서 있네
戰兢一言要 두렵고 조심스러워 한 마디만 한다면
怳如函丈陪 황공하옵기가 어른을 모신 듯해
5.1.3 기여암(起予巖)
相看兩不厭 마주봐도 둘이 서로 싫지를 않아
特立一奇巖 우뚝 솟아오른 한 기이한 바위라네
引以喩啇也 인용하시기를 밑바탕에 비유하셨지
名言知不凡 높으신 말씀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겠네
5.1.4 상두석(象斗石)
造物本多情 하나님이 본디 다정하셔서
星羅七點石 일곱 돌을 별처럼 늘어놓았네
至今常指東 오늘까지 아직도 동쪽을 가리키니
正似春無易 봄날이 변치 않음과 이렇게 똑 같구나
5.1.5 경심대(鏡心臺)
奔流洗石面 물굽이 쏟아지면 돌표면을 씻고
水落卽爲臺 물이 마르면 문득 좌대가 되는구나
端坐忘機處 단정히 앉아 기심을 잊는 곳
此心無点埃 이 마음에 한 점 티끌도 없는 것을
5.1.6 답태교(踏苔橋)
石逕人蹤斷 돌길에 사람 자취는 끊어지고
蒼苔生小橋 푸른 이끼 사이로 작은 다리 놓였네
浪吟扶杖過 노래 읊으며 막대 짚고 지나노라면
塵慮頓除消 세상 근심은 문득 사라지고
5.1.7 수어연(數魚淵)
淸川流石上 맑은 냇물은 돌 위를 흐르고
中坎作深淵 그 속 구덩이는 깊은 연못 되었네
坐數魚遊泳 헤엄치는 물고기를 세면서 앉았을 뿐
非吾負爾然 너를 잡으려는 내가 아니로다
5.1.8 소로잠(小魯岑)
夫子東山日 공자님 동산에 오르시던 날에는
邦畿䏚一岑 나라 땅이래야 한눈에 들만큼 작았지
箕封亦地狹 이 나라 땅도 마찬가지로 작아서
比魯豈無心 노나라만이나 하니 어찌 무심할 수 있으리
5.1.9 토월봉(吐月峯)
曾聞月出海 일찍이 들으니 달은 바다에서 뜬다던데
今見吐東峯 이제 보니 동봉에서 솟아오르네
卽景固如是 보이는 경치와 진실로 같다면은
峯高隔海重 봉우리가 겹겹이 바다보다 높을 것을
5.1.10 피세대(避世臺)
峯轉水環抱 봉우리 돌아 물을 둘러 안고
層層石作臺 층층의 바위는 좌대를 이루었네
已知塵想絶 이미 세상 생각은 끊어진 줄 알았다면
何必到蓬萊 무엇하러 꼭 봉래산에 가야하나
5.1.11 물막정(勿幕井)
地勢似盤中 땅 생긴 것은 쟁반 가운데 같은데
甘泉有冽井 맛있는 샘이 있어 찬물이 솟네
從來勿幕稱 예로부터 물막이라 이름지은 것은
羲易發深省 복희씨 주역에서 깊이 반성하라는 것
5.1.12 구인봉(九仞峯)
非關覆蕢土 한 삼태기 흙 때문은 아니겠지만
屹立自成峯 우뚝 솟아 스스로 봉우리가 되었네
聖道雖云遠 진리의 길이 비록 멀다고 하여도
攀躋可攝蹤 오르고 또 밟으면 발자취 닿을 것을
5.1.13 함휘령(含輝嶺)
良玉在深山 좋은 옥이 깊은 산에 있으니
光輝生疊嶺 그 빛은 첩첩이 산봉우리에 나는구나
存中必粹盎 그 가운데 반드시 진수가 있으리니
聖訓宜要領 성인의 가르침에 깨달음이 뚜렷하네
5.1.14 상엄대(尙嚴臺)
深深似七里 깊이 깊이 들어와 일곱 마을 지났는데
更有釣魚臺 문득 다시 보니 고기 낚을 넓은 터전
想像古人趣 옛 사람 정취를 그윽히 생각하니
一竿淸颷來 낚싯대에 불어오는 한 자락 회오리 바람
5.1.15 심진동(尋眞洞)
入山山更幽 산은 들어갈수록 더욱 그윽하고
雲鎖神仙洞 구름은 신선의 마을 빗장을 질렀네
從此欲尋眞 이제부터 진인을 찾고자 한다면
蓬壺先入夢 술병을 차고 꿈에부터 들어야지
5.1.16 욕학담(浴鶴潭)
水聲籠一壑 굽이치는 물소리 골짜기를 에워싸고
湍激下成潭 힘차게 떨어져 연못을 이루었네
仙鶴時調羽 선학은 때때로 날개를 고르고
淸音徹翠嵐 맑은 울음 푸른 산을 뚫고 오르네
5.1.17 향옥교(響玉橋)
錚錚戞玉響 쟁쟁 울리는 맑은 옥소리
步步生寒橋 걸음걸음 차가운 돌다리가 생겨나네
不待彈琴曲 거문고 곡조를 기다릴 것 있으랴
襟懷絶世囂 마음속에 세상 소리 끊어진 지 오랜 것을
5.1.18 야연림(惹煙林)
南北淸煙起 남과 북으로 맑은 연기 오르더니
依微籠小林 아련하게 작은 숲을 둘러쌌구나
山禽飛不到 산새는 날아가 오지 않으니
正避網羅心 어지러운 세상 생각 피할 수 있도다
5.1.19 화리대(畵裏臺)
如夢復如畵 꿈만 같더니 다시 보니 그림 같고
依然中有臺 의연히 그 가운데 높은 대가 하나 있네
登臨試一望 대 위에 올라 한 번 바라보니
怳我訪天台 황홀하여라, 내가 하늘궁전에 올랐는가
5.1.20 경운야(耕雲野)
嚴光老富春 엄광은 부춘에서 늙어갔으며
伊尹在莘野 이윤은 신야에서 밭갈이했지
從古無懷地 예로부터 마음에 품은 땅 없었더니
耕雲付隱者 경운야가 숨은 선비 붙여주는군
5.1.21 산지령(産芝嶺)
靈芝本秀三 신령한 버섯은 본래 셋이 솟아
生在煙霞嶺 연하 잿머리에 자라고 있다지
安得採其根 어찌하면 그 뿌리를 캐어볼까
練丹挽暮景 저무는 햇살 아래 단약만 쓸어보네
5.1.22 합류대(合流臺)
流東復自北 동에서 흐르는 물 북에서 오는 물
相會澗邊臺 냇물 가 언덕에서 서로 만나네
日夜盈科進 낮이나 밤이나 갈 길을 재촉하면
朝宗入海隈 마침내 큰 강 되어 바다에 이르리니
5.1.23 정운령(停雲嶺)
高山縱出雲 높은 산에는 가로 걸린 구름
靈異著玆嶺 신이한 일은 이 봉우리에 많았지
昨暮忽油然 어제 저녁 문득 흐려지는가 했는데
今朝霈四境 오늘 아침 온 산하 쏟아지는 폭우
5.1.24 조월탄(釣月灘)
垂綸忘日暮 낚싯줄 드리우니 해 저문 줄도 잊고
蟾影落前灘 달 그림자 앞 시내에 떨어지는 것을
此老非漁者 나야 원래 고기잡는 늙은이도 못되는 걸
將期月上竿 장차 달이나 낚아 볼까나
5.1.25 채약동(採藥洞)
山翁不出山 산중 늙은이 산 밖에 나가지 않고
採藥白雲洞 흰 구름 골짝에서 약이나 캐지
蔘朮自療飢 산삼이나 백출이면 배고픔도 이기고
胸中煎疾痛 가슴 속 아픔도 태워 없애지
5.1.26 격진령(隔塵嶺)
巨嶽鎭東西 큰 산이 동과 서를 지키고
相叉若一嶺 서로 엇갈려 한 봉우리 같네
桃源與武陵 도원이나 무릉이라고 하면
爭似此幽靜 여기 그윽함과 비슷할른지
5.1.27 세이담(洗耳潭)
穎水明如鏡 깨끗한 물 맑기가 거울과 같아
纖塵不汚潭 티끌만한 먼지도 오염되지 않았네
如何謾洗耳 어떻게 하다가 조심없이 귀를 씻어
終古却懷慙 예로부터 문득 부끄럽게 되었을까
5.1.28 초은동(招隱洞)
物外常淸凉 사물 밖에서는 항상 청량하지만
塵中多澒洞 티끌 세상에서는 어지러운 것도 많아
招招名利人 명리에 잡힌 이들 부르고 부르노니
富貴眞如夢 부하고 귀한 것은 진실로 꿈인 것을
5.2 계구대에서 정매헌 욱의 운에 차운함(戒懼臺次鄭梅軒煜韻)
有松能作盖 소나무 있어 덮개가 되었으니
坐石不須茵 돌에 앉아도 깔자리가 필요없네
千古溪山興 천고부터 계곡과 산천의 흥취들이
都輸吾輩人 모두 우리를 위해 모여들었군
相攜步水月 손잡고 물과 달을 즐기며 걷자니
風滿芰荷衣 바람은 가득히 옷깃에 담겨오네
山外多塵事 산 밖에는 세상일이 너무도 많기에
煩君莫早歸 일찍 가지 말라고 그대를 붙잡는 걸세
5.3 일제당에서 운을 불러 정매헌에게 줌(日躋堂呼韻贈鄭梅軒)
欲留楓錦待君來 앉고싶은 단풍 비단 그대 오기 기다렸는데
其柰秋深葉自頹 어찌하리, 가을이 깊어 낙엽되어 쌓이네
頹葉滿山山逕閉 쌓인 낙엽 산에 가득, 산길이 막혔으니
莫摧歸轄出巖隈 돌아가려고 바위 밖에 나가기를 서둘지 말게
6. 권병기(權丙基) 출전: 聾石集
6.1 입암 이십팔경운에 차운함(次立巖二十八景韻)
6.1.1 탁립암(卓立巖)
總括煙霞饒作榷 연하를 휘어잡아 구름다리 되었으니
此山之外多虛殼 이 산 이외에는 헛이름만 많았더라
挺然高出雲端危 기운차게 높이 솟아 구름 끝에 뾰족하니
也是天台露一角 참으로 하늘 궁전 한 끝이 드러난 듯
6.1.2 기여암(起予巖)
有巖矗立日躋傍 일제당 옆에 우뚝 솟은 바위 있어
夫子高風尙激昂 공자님 높은 풍도 격앙을 숭상하고
卜氏起予同睿獎 복상이 나를 일으킴 함께 칭찬하였듯이
巍巍不是志亢亢 높고 높다고 뜻이 거만함은 아닌 것을
6.1.3 피세대(避世臺)
蹈東大義尊周禮 우리 동방 대의가 주례를 존중하여
挽得滄溟欲一洗 푸른 바다 끌어당겨 씻어보고 싶구나
第看臺前千挺松 피세대 앞 천그루 소나무 찬찬히 보노라니
風霜高節出根氐 풍상 앞에 높은 절개 뿌리에서 나왔구나
6.1.4 초은동(招隱洞)
南山秋暮桂花芳 남산에 가을이 깊어 계수 꽃이 피었는데
洞裏招招欲與卬 골짜기 안에서는 서로 불러 우러르네
大隱何須猿鶴友 숨은 선비들 왜 하필 원숭이와 학만 벗하나
仙鄕知是不離房 신선의 땅이 사는 곳에서 먼 것이 아닌데
6.1.5 경심대(鏡心臺)
雲淡波澄俯碧潯 구름 옅고 파도 맑아 굽어보니 푸른 물결
絶無塵蘚逼相侵 세상 먼지 조금도 침노함이 없구나
空平鏡面無私照 공평한 거울면은 편벽됨이 없으며
一片靈臺似我心 한 조각 신령한 터전 내 마음과 비숫하네
6.1.6 수어연(數魚淵)
淡淡波心立立葦 맑고 맑은 물결 속 꼿꼿한 갈대
有魚潛伏數凡幾 물속을 헤엄치는 몇 마리 물고기
從知此理孔昭昭 일찍이 이 이치를 훤하게 알았는지
活潑天機自掉尾 활발한 천성으로 스스로 꼬리치네
6.1.7 토월봉(吐月峰)
碧天如洗一峰奇 푸른 하늘 씻은 듯한데 솟아오른 봉우리
月上其巓故遣遲 그 꼭대기 달 떠올라 심심함을 밀어내네
忽到光明治世象 문득 광명에 이르러 밝은 세상 되었으니
乍疑傳說降精箕 옛 이야기 여기 내렸나 잠깐 의심하였네
6.1.8 상두석(象斗石)
石列堂前數不偶 집 앞에 늘어섰는데 숫자는 짝이 안 맞아
風磨雨洗輒相吼 바람과 비에 씻겨 서로 부딪쳐 소리나네
蒼蒼鍊色補媧天 창창한 깎인 색깔 하늘 빛을 더했는데
仰看星文好象斗 별자리 쳐다보니 북두성을 닮았구나
6.1.9 답태교(踏苔橋)
故渡人稀水噴漚 건너가는 사람 적고 물은 맑게 뿜어
蒼苔沒石篆橋頭 이끼는 돌을 덮고 바위머리 깎이었네
筮身無若還山隱 몸 숨길 곳으로는 산만한 곳이 없어
念到陶翁畫示牛 도옹이 소 그려 보임을 생각하게 되었네
6.1.10 세이담(洗耳潭)
欲洗羞塵問古渚 세상 먼지 씻고자하여 옛 물가를 물었는데
誰能飮犢上流去 그 누가 송아지 먹이려 상류로 올라갔나
云云氣穎數千年 수천년이 흘러도 영수의 기개 얘기
丙子高風驚士女 병자년 높은 풍모 사람들을 놀라게 하네
6.1.11 화리대(畫裏臺)
生綃幅裏此臺居 새 비단 폭 속에 이 대가 있으니
臺下淸流爲問渠 대 아래 맑은 물을 누구에게 물어볼까
眞境誠難抽寫盡 진짜 경계 모두 그리긴 참으로 어려우니
更敎蘇子記凌虛 다시 소자로 하여금 능허도를 쓰게 하네
6.1.12 계구대(戒懼臺)
層巖削立勢如虧 층암 절벽 깎아 세워 금방 넘어질 듯
欲步斯臺此可規 이 대에서 걸으려면 이것을 조심해야
努力躋攀深有戒 힘써 걷고 오르는 데 깊은 교훈 있으니
才蹉一足十分危 한발만 잘못 디뎌도 완전히 위험한 걸
6.1.13 경운야(耕雲野)
耕不盡雲雲更出 구름을 다 못 갈고 구름은 다시 나오고
山人無暇自安逸 산 사람은 여가 없어도 스스로 편안하네
若敎暫捨都荒蕪 잠시만 버려 둬도 모조리 황무해져
用意朝來暮入室 마음쓰며 아침에 나와 저녁에 돌아가네
6.1.14 정운령(停雲嶺)
出峀無心起處逖 구름이 산골짝에서 나오되 이는 곳은 아득하여
閒雲時入幽人覿 한가한 구름이 들어오니 숨은 이만 바라보네
奇峰疊疊嶺頭停 기이한 봉우리 첩첩한 잿머리에 머무르니
陡絶千尋其下壁 그 아래 절벽까지 천길 낭떠러지 끊어졌네
6.1.15 함휘령(含輝嶺)
似櫝深山久鞰圭 독처럼 깊은 산에 오랫동안 보석 품어
粹明瑞氣夜光齊 순수한 밝은 기운 야광주와 맞먹었네
五星聚井同符驗 다섯 별이 모인 것과 증험이 똑같으니
天意爲賢必應奎 하늘 뜻 현인을 낳으매 꼭 규성에 응하리니
6.1.16 산지령(産芝嶺)
三秀靈芝洞轉幽 세 가닥 솟은 영지 골짜기는 그윽한데
聞歌始覺採來留 노래 듣고 깨달으니 약초 캐러 왔었구나
金丹歲暮人何去 신선의 땅에 해 저무는데 어디로들 갔는지
徒見蒼蒼嶺上婁 헛되이 푸르고 푸른 잿마루 별만 바라보네
6.1.17 채약동(採藥洞)
小洞幽深長百卉 작은 골짝 그윽하여 백초를 기르는데
誰能濟衆嘗其味 뉘 능히 맛보아서 뭇사람을 구제하리
當年採入良醫手 그날에 좋은 의원 손에 들어갔더라면
肯使吾人病俗胃 능히 우리들 속된 뱃속 고쳤으리
6.1.18 조월탄(釣月灘)
一絲風動波心攪 한 줄기 바람 일자 파도가 일렁이네
志不在魚興自飽 고기잡을 생각없이 흥만 가득하지
罷釣歸來至夜深 낚시 걷어 오는 길 밤은 깊어가는데
南傾北斗西傾昂 남으로 비낀 북두 서쪽으로 기울었네
6.1.19 구인봉(九仞峰)
論功要在積功密 공력을 논할 때는 세밀한지가 중요하지
九仞終成拳石一 아홉길 산이라도 마지막엔 한 주먹 돌
借問山前荷簣人 묻노라 산 앞에 삼태기 멘 사람아
累塵築土幾年畢 먼지로 쌓아올려 어느 해에 마치려뇨
6.1.20 욕학담(浴鶴潭)
沙晶石白水盈湄 모래 곱고 돌 흰데 온 강에 가득한 물
爲潔縞衣浴雪姿 흰 저고리 정결하게 하얀 몸을 씻어내네
鶴去潭空秋月映 학은 가고 물은 빈데 가을 달만 휘영청
餘痕留在啄苔觜 이끼를 쪼던 부리만 흔적으로 남았구나
6.1.21 소로잠(小魯岑)
三韓窄窄一拳岑 우리 땅은 작아서 한 줌 작은 산만 해
睥睨人間大眼臨 인간을 훑어보는 큰 눈이 임하였네
小魯東山深意在 동산에서 노나라 작다는 말 깊은 뜻이 있으니
聖門傳道有曾參 공자님 도를 증자가 전하였네
6.1.22 물막정(勿幕井)
甃深甁小短垂綆 담 깊고 입구 작은데 짧은 줄을 드리우고
羣汲相爭不得靜 여러 사람 길어내니 물 맑을 여가 없네
爲愛山隣淸味分 산 가까워 맛 맑음을 내 사랑하노니
名之勿幕許同井 물막이라 이름함도 이 우물의 약속이지
6.1.23 심진동(尋眞洞)
散漫遊雲望靉雲氣 이리저리 흩어진 구름 바라보니 아득하고
所懷不見長噓唏 품은 생각 안 보여도 언제나 한탄스러워
此山只在尋何處 이 산에 있다지만 어디에서 찾을건가
非是眞人雜糅鬼 진인이 아니고 잡스런 귀신인가
6.1.24 야연림(惹煙林)
朝籠午起出山臼 아침일 낮에 마쳐 산머리를 나서니
著樹輕輕散地黝 큰 나무 우뚝우뚝 곳곳에 검은 그늘
幸有東風吹不消 다행히 동풍이 불어가지 않았더니
綠絲連織岸邊柳 푸른 실 냇가 버들에 이어서 엮이었네
6.1.25 상엄대(尙嚴臺)
髣髴桐江七里汀 흘러오는 동강 칠리 물가에서
閒翁心事問山靈 한가한 늙은이 마음 산령에게 묻고 있네
尙高不獨嚴陵在 높음을 숭상함은 엄자릉만이 아니어서
隨處天心動客星 곳곳에 하늘 가운데 객성이 움직이네
6.1.26 향옥교(響玉橋)
淸流觸石響琳瑯 맑은 물 돌에 닿아 영롱한 소리나고
其上爲橋不可方 그 위에 생긴 다리 자연스런 모양이네
無復世間顧陸手 다시는 세간에서 손을 댈 필요없이
畵圖那得盡夸張 그림으로 그린다해도 어찌 다 그려내리
6.1.27 합류대(合流臺)
二川襟合一臺側 두 냇물 한 언덕 옆에서 하나로 합쳐져서
晝夜盈科流不息 밤이나 낮이나 쉬임없이 흘러가네
分異方知合處同 나뉜 뒤에 비로소 함께함을 알았으니
幷行理似鳥之翼 병행하는 이치가 새 두 날개 비슷하네
6.1.28 격진령(隔塵嶺)
層嶂揷天勢嶾嶙 층층이 하늘을 가려 형세는 가파른데
塵寰萬事付之哂 세상의 온갖 일들 한 웃음에 부쳤노라
藤蘿丈丈巖巖路 덩굴풀 우거진 속 바위벼랑 깎은 길
自是遊人不上軫 이래서 유람한 이들 수레에 못 올랐지
7. 정욱(鄭煜) 출전: 梅軒遺稿
7.1 입암 이십팔경(立巖二十八景) - 丁卯 寓巖時
7.1.1 탁립암(卓立巖)
獨立萬千年 홀로 우뚝 선지 천년인지 만년인지
高堅終不拔 높고 단단하여 끝내 흔들리니 않네
風波容易度 바람과 파도라도 쉽게 견뎌내니
能似丈夫節 능히 장부의 절개와 흡사하다 하겠구나
7.1.2 계구대(戒懼臺)
俯臨深水頭 깊은 물 머리를 굽어보면서
仰眺尖巖頂 뾰족한 바위 끝을 우러러보노라
一念安危地 한 마음 안위를 생객하는 곳
登來誰不敬 이곳에 오르면 그 누가 불경하리
7.1.3 경심대(鏡心臺)
磵邃塵無染 골짝은 깊어 먼지 하나 없고
風微波不侵 바람은 잔잔해 파도도 일지 않네
似鏡淸如許 거울같은 맑음이 이와 같은데
吾心照水心 내 마음 물 가운데 비치고 있네
7.1.4 수어연(數語淵)
止水開新鏡 맑은 물 새 거울을 만든 것 같애
潛魚察可知 저 물 속 물고기도 다 살필 수 있겠네
同流無限意 물과 함께 흘러 끝없는 그 마음
看取鳥過時 새가 지나갈 때 볼 수 있겠구나
7.1.5 상두석(象斗石)
石豈知乾象 돌이 어찌 하늘 모양을 알까
頑然本不靈 굳기가 본래 영물이 아닌 것을
化翁太喜事 조물주 워낙 일하기를 즐겨서
在地又成形 땅에다 하늘모양 또 만들어 두었지
7.1.6 구인봉(九仞峯)
有山皆石面 산이 다 돌로만 만들어져서
簣土不容積 한 삼태기 흙도 쌓을 수 없었네
只借易虧名 이름은 다만 쉽게 이지러지는 것
丁寧戒後學 후학들을 깨우침이 정녕하구나
7.1.7 물막정(勿幕井)
勿幕名斯井 이 우물을 물막이라 이름함은
吾知戒不食 우리가 알기에 불식의 가르침
如何當世人 어찌하여 당시의 사람들은
未被先生澤 선생의 은혜를 입지 못했을까
7.1.8 향옥교(響玉橋)
穩步聽環珮 조용한 걸음으로 패옥소리 들으며
危行奏磬鼖 좁은 다리 걸으면 아름다운 돌소리
肯數梵家物 불가의 물건들을 세어보네
靑雲與白雲 청운과 백운
-靑雲白雲皆橋名- (청운 백운은 다 다리이름이다.)
7.1.9 답태교(踏苔橋)
水漲頭全沒 물이 넘으면 위에까지 다 잠기고
笻稀綠半封 사람 걸음 드물어 반남아 덮인 이끼
誰知山磵裏 누가 알리, 이렇게 깊은 산속에
猶臥未雲龍 구름 못 탄 용 한 마리 누워있는 것을
7.1.10 피세대(避世臺)
臺自無心在 대는 무심하게 있을 뿐이지만
人因避世來 사람은 세상을 피해 오곤 하지
莫言明聖際 말하지 말게, 성군의 시대에
巖穴有遺材 암혈에 좋은 인재 숨어 있었다고
7.1.11 경운야(耕雲野)
代食誰云好 남의 손에 먹는 일 그 누가 좋다하리
躬耕夫豈欲 몸소 밭가는데 다른 무엇 바라랴
白雲隴上多 흰 구름 언덕 위에 피어오르면
願學先民樂 옛 백성들 즐거움을 배우고 싶어
7.1.12 산지령(産芝嶺)
靈根眞有否 신령한 뿌리는 있을까 없을까
人仰彼山節 사람들은 저 산에서 절개를 우러르네
不是芝爲貴 약초 영지가 귀한 것이 아니라
商顔歌者哲 상안 노래 부른 이가 현인이었지
7.1.13 상엄대(尙嚴臺)
桐江垂釣叟 동강에 낚시 드리운 늙은이
地與人俱遠 땅이나 사람이나 아득하구나
尙友誰無意 벗을 숭상함에 누군들 뜻 없으리
此臺適我願 이 대가 바로 내 원하던 그 곳
7.1.14 욕학담(浴鶴潭)
仙禽今底處 학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我欲與同浴 내 바라기는, 함께 씻었으면
空然潭水深 텅 빈 연못, 물은 깊지만
一去難尋躅 한 번 간 뒤로 자취도 없구나
7.1.15 토월봉(吐月峯)
曾聞石補天 돌이 하늘을 돕는다고 들은 적 있던가
今看峯吐月 이제 보니 봉우리가 달을 토하는군
來向懷中照 떠올라 내 마음까지 비추어주는데
任他滄海闊 비치는 곳마다 바다처럼 넓어지네
7.1.16 기여암(起予巖)
特地高標旅老墟 여헌 계시던 터에 솟아오른 땅에
一般商賜孔門於 복상에게 주신 말씀 공자님 가르침
此君不是無心在 대나무 또한 무심하지 않은 것이
巖下亭亭又起予 바위 아래 꼿꼿이 서 나를 또 일으키네
-巖下有竹故云- (바위 아래 대나무가 있어서 이렇게 말함)
7.1.17 소로잠(小魯岑)
夫子先生若是班 공자님과 선생님이 다 마찬가지로
各得胸次小區寰 각각 마음을 터놓으니 한 구역을 이루었네
縱然賢聖殊高下 비록 성현에 고하가 있다 해도
未必東山勝此山 동산이 이 산보다 낫다고는 못하실 걸
7.1.18 화리대(畵裏臺)
造物何年効此工 조물주 어느 해에 이 공력을 드러내서
斷崖疑展小屛風 절벽을 깎아내어 병풍처럼 둘렀는지
由來水石嫌全露 예로부터 수석이 다 드러나기 싫어해서
奇處當看似畵中 기이한 곳 마땅히 그림처럼 보이는군
7.1.19 야연림(惹烟林)
川外長林林外村 냇물 밖에 긴 숲이고 숲 밖에는 마을
炊烟一抹報朝昏 밥짓는 연기 한 줄 아침 저녁 일려주네
隨風入樹籠成帳 바람따라 숲에 들어 장막처럼 둘러싸니
靑白新粧侈洞門 청백색 새 치장이 마을을 꾸미었네
7.1.20 함휘령(含輝嶺)
山因人得美名歸 산은 사람 때문에 이름을 얻었지만
人去山存名不非 사람 가고 산만 있어도 이름은 그대로
賢馥中藏同蘊玉 현인처럼 가운데에 같은 옥을 품었으니
洞天巖壑摠生輝 골짝이며 바위들이 모두 광채 나는 것을
7.1.21 정운령(停雲嶺)
攙雲一髮似高人 솟은 구름 한 조각 높은 선비 비슷하여
想得當年四友親 생각건대 당년에 네 벗님 친함같애
曠百如今猶有感 백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감동있어
思將風味敬書紳 그 풍미를 사모하며 공경하여 묶는 글
7.1.22 합류대(合流臺)
挾山雙水到成叉 산을 낀 두 줄기 물 서로 엇갈렸는데
巨石龍盤戴老査 큰 바위 용같은 반석 늙은 뗏목 이고 있네
異趣同流焉足取 다른 흥취 함께 흐르니 무엇을 취할 건지
只堪閑坐侶魚蝦 다만 한가히 앉아 물고기나 벗하고 있네
7.1.23 심진동(尋眞洞)
此地投笻悟有因 여기서 지팡이를 던짐은 인연을 깨달은 것
肯敎凡骨謾探眞 세속의 사람에게 쓸데없이 찾게 하랴
白雲且莫遮前路 흰 구름 또한 앞길을 막지 말 것이
我亦烟霞洞裏人 나 또한 안개 덮은 골짜기 안 사람이니
7.1.24 채약동(採藥洞)
鼎蟠龍虎羽流功 꿈틀대며 얽힌 용호 새들도 애쓰지만
採藥胡爲此洞中 약초를 캐는데 어찌 이 골짝 뿐이리요
壽民却是吾家事 백성을 살리는 길은 우리가 해야할 일
前脩猶自註參同 이전부터 공부하되 참동에서 배웠었지
7.1.25 초은동(招隱洞)
世間何士脫盆膠 세상에선 어떤 선비 막힌 생각 벗어나나
腐鼠爭拏意自饕 썩은 쥐들 밀고 당기며 욕심만 가득한데
松桂滿山人不見 소나무 계수나무 온산인데 사람은 없고
遂初吾賦豈須招 우리 처음 생각 따라갈 뿐 부른들 무엇하리
7.1.26 조월탄(釣月灘)
不是求魚把釣垂 낚시를 드리움은 고기잡자는 게 아니라
爲多淸趣故遲遲 맑은 흥취가 많아 일부러 느리게 앉아있네
無端蟾影如相戱 아련한 달그림자 함께 노니는 듯
落在波心欲上絲 물결 속에 떨어지니 낚시줄을 올리고 싶어
7.1.27 세이담(洗耳潭)
悠悠世事不須談 생각많은 세상일들 다 말하여 무엇하리
伴老雲烟分所甘 구름과 함께 늙어감이 분수에 감사한 일
有耳莫將潭水洗 귀 있지만 억지로 씻을 일도 없는 것이
千秋巢父未應三 천추에 소부라도 세 번 한 건 아니라네
7.1.28 격진령(隔塵嶺)
兩山交峙洞門成 두 산이 엇갈리며 동문을 이루었고
石竇流泉一道淸 돌길에 샘물이 흘러 길도 맑은 것을
纔度嶺來塵事斷 잿마루만 넘어서면 세상일은 단절되니
肯敎回首慕浮榮 다시 머리돌려 헛된 영화 사모하랴
7.2 일제당(日躋堂)
鼎立奇巖勢互凌 정립한 기암형세 서로 겨루는 듯
溪山得主美名增 산계곡이 주인 얻어 좋은 이름 더하였네
幽貞可愛松兼竹 그윽한데 더 좋은 건 소나무에 대나무
瑩澈須看月又冰 거울같은 물을 보고 얼음같은 달도 보며
無我詩前佳景在 내 시가 있기 전에 경치는 원래 있고
有斯亭後幾人登 이 정자 있은 후에 몇이나 올랐던고
今來先祖從遊地 우리 선조 노시던 곳 이제와 올라보니
敬挹遺風愴不勝 삼가 유풍을 모셔 감창함을 못이기네
-先祖雙峯公早遊旅門且作日躋堂上樑文故結句如此-(선조 쌍봉공께서 일찍이 여헌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시고, 또 일제당 상량문을 지으셨으므로 시를 이처럼 지었음)
8. 권석찬(權錫瓚) 출전: 是巖集
8.1 일제당의 작은 모임(日躋堂小會)
先生何日此山中 선생이 어느 날 이 산중에 계셨던지
削立群峰道氣隆 깎아지른 봉우리들 도학의 기운 높아
萬樹痕生三日雨 나무마다 흔적마다 선생의 혜택입고
百花香送一軒風 꽃마다 향기로이 선생의 바람 이네
白鷗心上佳賓到 흰 물새 나는데 좋은 손 오셨고
黃鳥聲邊暮靄空 꾀꼬리 노래 끝에 저녁 안개 흩어지네
笑爾檻前流去水 웃음짓는 난간 앞에 흘러가는 저 물결
人間長出不從容 사람살아 항상 조용할 수 없었으니
8.2 합류대에서 이야기를 나눔(合流臺會話)
一聲相應一場遊 한 소리로 응하고 한 자리로 흘러와서
人是合歡水合流 사람은 반갑게 만나고 물도 합류하는 곳
宿霧凝嵐藏古壑 묵은 안개 산에 어리어 옛 골짜기 숨기고 있고
孤松聽澗老荒邱 외로운 솔 물소리 들으며 언덕에서 늙어가네
山陰向午鷄登屋 산그림자 낮이 되면 닭소리 집을 넘고
水氣承秋雁下洲 물기운 가을을 맞으니 기러기는 물가에 내려
江草菲菲葭露白 강가 풀은 시들어가고 갈대에 이슬은 흰데
騷人無處不曾愁 시인은 이 마음 풀 곳 어디에도 없구나
8.3 피세대에서 이야기를 나눔(避世帶會話)
白首相逢盡布衣 흰 머리로 만나보니 다 벼슬없는 늙은이들
天球弘璧世攸稀 하늘이나 땅이나 세상일은 성긴 것을
風雨爭揮高士軸 풍우는 다투어 선비의 마음을 흔들어도
煙霞深鎖主人扉 연하는 깊이깊이 주인의 빗장을 잠그었네
千重岳色黃鸝喚 산빛은 천 겹으로 꾀꼬리를 부르는데
十里沙盟白鷺歸 십리 모래밭엔 흰 두루미 돌아오네
烹狗煮葱雖美事 개 잡아 국 끓이면 참 좋은 일이지만
剛憐時早釣魚磯 낚시하기 이른 것이 참으로 아깝도다
8.4 합류대가 흔적이 없어지게 됨을 탄식함(嘆合流臺無痕)
昔賢當日命名臺 옛 현인 당년에 이름지은 합류대
有喙餘生不敢開 아직까지 솟아있어 감히 열지 못했었지
指點歸人徒倚杖 가리키며 돌아오는 사람들 다 지팡이 짚었고
登臨遊客幾啣盃 올라본 유객들 몇 잔이나 기울였나
大陸沈陰知勢去 세상은 우울해져 형세도 기울어가
名區異昔覺悲來 명소마다 달라지고 슬픈 마음만 들어
憤憶那時天水事 하늘과 물의 일을 어찌할고 생각하며
摩挲遺躅獨徘徊 남기신 자취를 쓸며 홀로 배회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