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구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북서쪽 서문 앞 아담한 매봉산이다.야트막한 작은 언덕이다.
그래도 산이다.해발 90 m의 높이를 자랑한다.매봉산 둘레길은 지역 주민들에게는 산책길로 사랑을 받고 있다.
요즘 어딜 가나 둘레길을 만난다.가볍게 운동하기에는 제격인 둘레길이 여기 저기서 시민들을 맞이하고 있다.
매봉산 자락길 입구이다.매봉산 둘레길은 여기서 출발한다.걸어서 1시간 걸린다고 한다.둘레길의 길이는 1km이다.
조선시대 대장장이들이 많이 살았던 서울 마포구 성산동 499번지의 풀무골이다.이 마을은 야동(冶洞)이라고도 불리었다.
풀무란 불을 피울 때 바람을 일으키는 기구를 말한다.조선시대 이곳에 엽전을 만드는 대장간이 많아 대장간의 상징인
풀무로 동네의 이름을 지은 것이라고 한다.풀무골은 동래 정씨 한양 조씨 전주 이씨 가문의 집성촌이었다.
서울 월드컵경기장을 건설하면서 풀무골은 철거되었다.2001년 6월 향토문화자원을 되살리기 위해 매봉산 자락에 풀무골을
복원한 것이다.
풀무골은 조선 효종때 김자점(金自點1588~1651)이 역모(逆謀)를 준비하던 곳이다.
역모 하는데 필요한 군사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위조엽전을 만들었던 사주전(私鑄錢)이다.
이 풀무골에서는 엽전도 만들고 각종 병기도 만들었다.1950년대 초기만 해도 이 일대에서
녹슨 옛날 엽전을 적잖이 발견할 수 있었다.
김자점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성지(成之), 호는 낙서(洛西)이다.
그는 성혼(成渾)에게 수학하고 음보로 벼슬에 나아가 병조좌랑에까지 이르렀으나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비논의에 반대하다가
정계에서 축출당하였다.이에 최명길(崔鳴吉).심기원(沈器遠).이귀(李貴) 등과 함께 반정을 모의하였고, 1623년에 군대를 모아
이귀·이괄(李适) 등과 함께 홍제원을 넘어 궁궐로 진격해 옴으로써 반정에 성공하여 정사(靖社)1등 공신에 봉해졌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김자점은 인조를 강화도로 호종하는 임무를 담당하면서 왕과의 유대관계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1737년 그는 청나라의 움직임에 대비할 목적으로 평안도에 파견되어 수비체제를 바꾸는 등 노력하였으나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철저히 대처하지 못하고 토산(兎山)에서 크게 패하였다. 이에 전쟁이 끝난 직후 패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절도에 유배를 당하였으나 인조의 도움으로 풀려나 강화부윤을 지냈고, 우의정에 올랐다.그 후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에 봉해졌고,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인조의 후의로 영의정에 오르고 효명(孝明)옹주를 손자 며느리로 맞게 되었다.
그러나 김자점은 이러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소현세자를 죽이는데 가담하였고, 세자빈 강씨에게 인조를 시해하고자 했다는
혐의를 씌워 사사시켰다.또한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소현세자의 아들과 강빈의 형제들을 제거하고,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던
임경업(林慶業)이 귀환되자 고문으로 죽게 하였다.
1649년 효종의 즉위로 전횡을 일삼던 김자점은 탄핵을 받아 홍천에 유배당하게 되었다.
김자점은 효종을 제거하기 위해 청나라에 사람을 보내어 효종이 청나라를 정벌하려 한다고 고발하고 명나라 연호가 기록된 장릉
시문(長陵 時文)을 증거로 제시하였다. 이에 격분한 청나라는 즉시 군사를 국경선에 배치하고 사자를 보내어 그 진위 여부를
가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고발사건은 효종의 기민한 수습과 중신들의 활약으로 수습하게 되고 김자점은 다시 광양으로
유배되었다. 그 후 각지 수령과 지방 장수들과 내통하여 숭선군(崇善君)을 추대하고자 했다는 김자점의 역모가 폭로되어
아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전남 보성군 벌교읍 원동리 저수지이다.김자점이 태여난 생가터이다.
그가 역모로 몰리자 그의 집터와 부친의 묘를 파헤쳐 연못(沼)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그의 선친 묘는 옥산(玉山 63m) 앞 큰 연못(鑛沼) 자리에 있었다.
옥산에서 옥(玉)이 난다 하여 옥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최근까지 큰 연못(鑛沼)으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여름철이면 이곳에 사람이 빠져 익사하는 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주민들이 그 연못을 메워버렸다.지금은 논으로 일구어져 있다.
지역민들 사이에는 오래전부터 '낙안면 원등마을 앞에 있는 저수지는 김자점의 집터'였다고 믿고 있다.
한때 문화재 도굴꾼들이 저수지 바닥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는 사실도 그것을 방증해 주고 있다.
능양군 이종을 왕위에 올리는 쿠테타, 그 반정에 앞장선 인물로 김자점(金自點)이 있다.
그의 이름 김자점(金自點)은 아버지가 지어준 것으로 거기에는 기이한 사연이 있다.
그 옛날 낙안읍 고을에 해마다 15세 처녀를 재물로 바처야 고을이 무사하여 연중행사가 있었다.
이상하게도 이 고을 사또로 부임하는 사람은 첫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나라에서는 기백이 장대한 인물을 뽑아 보내고자 전국에 방을 써서 부쳐 신임사또를 구했는데
마침 김자점의 아버지(김균태)가 이 고을 사또로 임명장을 맏았다.
김자점의 부친이 낙안으로 부임한다는 소문이 낙안고을에 퍼지자 육방거족들이 새 사또가 오는 것을 보고
'똑똑하게 생겼지만 인생이 불쌍하다'고 혀를 찼다.
신임 사또 김균태는 부임하자마 명주실과 독한 담배를 준비하라고며 육방에 알리고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육방들은 사또의 하직 밥을 정성드려 만들어 올렸다, 사또는 태연스레 밥을 먹은 후에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렸다.
명주실을 잡아당기면 잘 나가도록 길게 풀어 놓고 독한 담배를 방에다 피우고 화롯불을 켜게 했다.
자정이 가까워오자 오디선가 '쿵쿵쿵'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슬그머니 열리었다.
연기 때문에 전혀 앞을 볼 수 없었다. 순간 '버스럭 버스럭'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뒤로 물러서고
다시 앞으로 나왔다가 뒤로 물러서는 것이었다. 사또는 큰 기침을 하며 인적을 나타내었더니
"스르르 스샤샥샥'하는 소리가 들렸다.
날이 새자 아전 육방이 문을 열러보니 사또는 태연히 앉아 있다가 명주실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보게 하였다.
명주실은 지붕 위로 끌려간 것을 알고 용마루 사이에 큰 지네가 숨어 있었다. 사또는 칼로 지네의 허리를
내려치자 피가 튀어 사또의 이마에 떨어졌다. 그 후 사또는 아이를 가졌는데 그 아이가 태어나서 아들의
얼굴을 살펴보자 자신이 얼굴에 핏자국이 묻었던 바로 그 자리에 점이 찍혀 있었다.
이것이 과연 좋은 일인지 불길한 징조인지 몰라 궁금해 하면서도 아이가 너무나 영특하므로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지냈다. 스스로 생긴 점이라 하여 자점(自點)이라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그는 1588년 안동에서 태어났다.-<마포자료총서 제7집 마포의 역사인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