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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낙민
2. 테러활동
아나키스트들은 민중의 직접행동에 의한 사회혁명을 주장하였는데, 민중으로 하여금 직접행동에 나서게 하는 수단으로는 ‘사실에 의한 선전’을 중시하였다. 1876년 베른대회에서 ‘사실에 의한 선전’이 슬로건으로 채택된 이후, 아나키스트들은 테러를 주요한 선전수단으로 채택하였다. ‘사실에 의한 선전’은 직접행동에 의한 선전을 의미하지만, 거기에서의 직접행동은 주로 테러를 지칭하였다. 1880년 12월 25일 크로포트킨은 그가 간행하던 신문 『반항자』에서 “말에 의한, 문서에 의한, 단도에 의한, 총탄에 의한, 다이나마이트에 의한 반항 … 합법성을 문제로 삼지 않는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이 정당하다”고 하였다. 註61)이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킨다는 논리로서 테러·폭동 등 아나키스트들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한국인 아나키스트들도 ‘사실에 의한 선전’을 표방하면서 테러 등의 직접행동을 통한 선전을 강조하였다. 직접행동이 민중들을 각성시켜 그들 스스로 봉기·폭동·파업 등에 참가하게끔 할 수 있 는 주요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즉 암살이나 파괴 활동으로써 일제의 식민지 권력을 타도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직접행동을 통해 아나키즘을 선전하고 민중들을 각성시켜 민중들 스스로 혁명 과정에 참가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에게 테러는 하나의 선전수단이었다. 테러적 직접행동론을 민족해방운동의 방법론으로 정립한 사람은 신채호다. 그는 「조선혁명선언」에서 민중직접혁명론에 입각하여 테러적 직접행동론을 민족해방운동의 방법론으로 체계화하였다. 금일 혁명으로 말하면 민중이 곧 민중 자기를 위하여 하는 혁명인 고로, ‘민중혁명’이라 ‘직접혁명’이라 칭함이며,… 우리 혁명의 제1보는 민중각오의 요구니라. 민중이 어떻게 각오하느뇨? 민중은 신인神人이나 성인이나 어떤 영웅호걸이 있어 ‘민중을 각오’하도록 지도하는 데서 각오하는 것도 아니요, ‘민중아, 각오하자’ ‘민중이여, 각오하여라’ 그런 열규熱叫의 소리에서 각오하는 것도 아니오. 오직 민중이 민중을 위하여 일체 불평·부자연·불합리한 민중 향상의 장애부터 먼저 타파함이 곧 민중을 각오케 하는 유일 방법이니, 다시 말하자면 곧 선각한 민중이 민중의 전체를 위하여 혁명적 선구가 됨이 민중 각오의 제1로路니라. … 우리의 민중을 환성喚醒하여 강도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민족의 신생명을 개척하자면 양병養兵10만이 일척一擲의 작탄灼彈만 못하며 억천장 신문·잡지가 일회 폭동만 못할지니라. 註62) 위의 글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신채호는 한국 민족이 해방되는 길은 민중직접혁명이며, 혁명을 하기 위해서는 민중이 각성되어야 하고, 민중을 각성케 하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테러적 직접행동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이는 적 요인이나 적의 기관에 대한 암살·파괴 활동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구조에 파열구를 낼 뿐 아니라, 민중들의 독립의식과 해방의지를 자극하여, 민중들 스스로 봉기·폭동 등을 일으키도록 만든다는 것으로서, 선전수단으로서의 테러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이에 의하면 봉기·폭동·총파업 등과 같은 민중들의 직접행동이 계속해서 일어나서 모든 민중이 참가하게 되면, 결국 일제의 식민지 권력과 자본주의 사회는 타도된다고 보았다. 이리하여 테러적 직접행동론은 매국노나 일본제국주의자들을 단지 복수적 감정에서 처단하던 차원에서 벗어나, 민족해방운동의 방법론으로 체계화되었다. 이후 신채호의 테러적 직접행동론은 일제강점기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의 가장 주요한 투쟁방법론 중의 하나로 되었다.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사실에 의한 선전’론에 입각하여 1910년대 말부터 테러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그것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아나키스트 사회를 건설하고자 한 것이다. 테러활동은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이 전개한 민족해방운동의 주요한 부분이었다. 1920년대 이후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에 의해 전개된 테러활동을 지역별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1. 국내
1920년대 초반 국내 아나키스트들은 의열단의 주도하에 전개된 테러활동에 직간접으로 관계하였던 것으로 사료된다. 하지만 아나키스트 들이 테러에 직접적으로 관계하였다는 사실을 밝혀주는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확인되는 바로는 길로틴단원이었던 김상혁金相赫·어해魚海·박제호朴齊浩·전무全無·김선희金善姬등이 테러적 직접행동론에 입각하여 파괴활동을 도모한 최초의 아나키스트들이다. 이들은 1923년 10월 중순 무렵 서울에 잠입해 있던 일본 아나키스트 고도삼치高島三治·고전대차랑古田大次郞·부강정富岡正일파와 연계하여 활동하였다. 註63)아나키스트 단체로서 테러적 직접행동론을 민족해방운동의 방법론으로 채택한 조직은 일본 아나키스트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진우연맹이다. 대구지역의 아나키스트들은 1920년대 중반 공산주의자와의 공동투쟁에 회의를 느끼고 독자적 이념 연마와 결속을 도모하였다. 방한상은 1925년 7월 무렵부터 신재모와 협의하여 동지를 규합하기 시작하였다. 註64)그러한 작업의 결과 학술연구단체를 표방한 진우연맹이 신재모·방한상·서학이·정명준鄭命俊, 黑濤·하종진河鍾璡·김대산金大山·서동성 등에 의해 1925년 9월 29일 대구노동공제회관에서 결성되었다. 이후 안달득이 가입하였다. 아나키즘을 기초로 한 신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결성된 진우연맹은 국체國體를 변혁하고 사유재산제도를 철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진우연맹원들은 1925년 10월 무렵 귀국한 흑우회원 김정근金正根과 장래의 운동방법에 관해 협의를 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진우연맹은 일본 아나키스트들과 적극적인 교류를 도모하였다. 그를 위해 1925년 11월 방한상을 동경·대판·명고옥에 보냈는데, 방한상은 약 3개월 체류하면서 자아인사自我人社의 율원일남栗原一男, 흑화사원黑化社員량본운웅椋本運雄, 자연아동맹自然兒聯盟·길로틴단團등 일본 아나키스트들과 김정근 등을 만나 현안문제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후 진우연맹은 일본 아나키스트 단체와 운동상 깊은 관계를 맺었다. 방한상과 신재모는 김정근·량본운웅 등과 연락을 취하였으며, 서학이·방한상·정명준·신재모 등은 1926년 5월 김정근이 신재모에게 보내준 「반역아연맹선언서叛逆兒聯盟宣言書」를 읽고 그 취지에 공감하여 반역아연맹에 가입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와도 연락을 취하였다. 즉 당시 상해에 있던 유림柳林, 高自性, 高三賢이 방한상에게 편지를 보내어 아나키스트 단체를 증설할 것을 선동하고, 상해에서 계획 중인 원동무정부주의자총연맹遠東無政府主義者總聯盟이 성립하면 거기에 가맹할 것을 권유하였던 것이다. 1926년 4월 율원일남이 이른바 ‘대역사건’으로 구속된 박렬이 사형될 경우 시체 인수에 필요한 위임장과 금자문자의 입적入籍에 관한 용무로 박렬의 형 박정식朴定植을 만나기 위해 입국하였다. 그는 대구에서 신재모·서동성·서학이·마명馬鳴·우해룡禹海龍, 禹海雲·정명준 등을 만나 일본 아나키스트 단체 흑색청년연맹黑色靑年聯盟의 활동상황 특히 동 연맹원이 1926년 1월 21일 은좌통銀座通에서 상점을 파괴한 직접행동의 상황을 설명한 뒤, 현재의 강권주의의 치하에서는 자유를 옹호하기 위해서 파괴·암살을 행하는 것이 아나키스트들의 사명이라고 역설하였다. 진우연맹은 율원일남의 권유로 흑색청년연맹에 가입하였다. 서동성·신재모·방한상·서학이·정명준·하종진·김소성·마명·우해룡·안달득 등 12명은 4월 12일과 13일에 신재모의 처인 이금이李今伊집과 신재모 집에 모여 앞으로의 운동계획에 대해 협의하였다. 이들은 아나키스트 운동을 실현하기 위한 제1보로서 흑색청년연맹의 테러를 본받아 부호로부터 자금을 조달하고, 2개년 이내에 대구에 있는 도청·부청·경찰서·재판소·은행·회사·정거장 등과 그 외 중요 건물을 일거에 폭파하고, 또 도지사·경찰부장 이하 중요 관헌 역시 암살하며, 일본인 시가지인 원정元町과 대화정통大和町通일대를 파괴하고, 계속해서 전국에 아나키즘을 선전하기로 합의하였으며, 그것을 실행할 파괴단을 조직하였다. 註65) 진우연맹은 파괴활동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준비작업을 해 나갔다. 상해에 있던 김관선金官善에게 연락하여 폭탄 구입을 의뢰하였다. 그리고 방한상은 율원일남과 함께 서울에 도착하여 평양인 김원金元을 만나서 폭탄을 구입해줄 것을 의뢰하였다. 이에 김원은 상해에 있던 자신의 친구에게 연락하여 폭탄 구입을 위한 활동을 구체화시켜 나갔다. 하지만 1926년 5월 안달득이 절도로 체포되어 취조를 받는 과정에서 진우연맹 결성 사실이 탄로되었다. 이로 인해 1926년 6월 초순 신재모·방한상·우해룡·마명·하종진·정명준·이모李某등 7명이 체포되었다. 사건은 확대되어 8월 4일 서동성·김경호·차경수·서학이 등 4명이 추가 검거되었으며, 10일에는 선산에서 김동석이 다시 체포되었다. 그리고 8월 13일에는 일본에서도 율원일남·량본운웅·김정근 등이 체포되어 국내로 호송되었다. 이 중 차경수와 김경호 두 사람은 풀려났으나, 신재모·방한상·김동석·정명준·마명·우해룡·서동성·서학이·하종진·김정근·안달득·율원일남·량본운웅 등 13명은 기소되었다. 이들의 죄명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아나키즘을 선전하였다는 것이다. 진우연맹원들은 체포되어 반년이 넘도록 예심을 종결하지 않는 데 항의하여 옥중투쟁을 감행하였다. 1927년 2월 21일 밤 구치소 벽을 두드리고 고함을 지르는 등 서로 호응하여 소동을 피웠다. 22일부터는 단 식투쟁에 돌입하여 26일까지 계속했다. 결국 1927년 7월 5일 방한상·신재모·김정근·서학이 등은 징역 5년, 율원일남·량본운웅·서동성·마명·우해룡 등은 징역 3년, 정명준·안달득은 징역 2년, 김동석·하종진은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언도받았다. 김정근은 복역 중 1927년 7월 29일 급성폐렴으로 옥사했다. 註66) 진우연맹이 테러 등 파괴행위를 주된 방법으로 설정하였던 것은 그들이 테러적 직접행동론을 방법론으로 채택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진우연맹이 테러적 직접행동론이라는 방법론을 채택한 것은 일본의 아나키스트 단체인 흑색청년연맹黑色靑年聯盟의 영향으로 보인다. 그러나 테러 등은 민중들에게 선전선동의 효과를 어느 정도 거두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보다는 일제의 탄압을 초래하여 오히려 운동역량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다. 진우연맹과 비슷한 시기에 허무주의적 입장에서 테러활동을 도모한 아나키스트도 있었다. 윤우열은 중동학교와 중앙기독교청년회 영어과를 중도 퇴학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경도 모某중학과 동경 정칙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를 졸업한 뒤, 1923년 여름에 귀국하여 대구에서 대구청년동맹·대구칠성단·경북사회운동자동맹 등을 조직하였다. 동시에 대구의 모자조합에도 관계하여 그 조합을 이끌었다. 이후 서울로 가서 흑풍회청년당을 조직하였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서울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흑기연맹에도 가입하였으나 간부가 아니었던 관계로 1925년의 흑기연맹사건 당시 검거는 면하였다. 1925년 7월 조선청년총동맹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던 중 박흥곤을 만나, 기존의 사회운동이 지니고 있던 한계에 대해 논의하고 테러를 계획하였다. 이들은 테러활동을 전개할 자금을 확보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박흥곤이 죽는 상황까지 발생하자 낙담한 윤우열은 테러행위로 사회의 이목을 충동하고 동지를 규합하고자 했다. 1925년 12월에 「파괴의 투탄을!」이라는 제목의 허무당선언서를 작성하고 이를 인쇄하고자 서울로 갔다. 1926년 1월 2일 안병희·하은수 등의 도움을 얻어 청년총동맹 사무소에서 허무당선언서를 인쇄하였으며, 1월 4일 선언서 200여 통을 우편국을 통해 서울시내 신문·잡지사와 사회운동단체, 일본 정계의 영수와 명사, 중국내의 일본 신문사, 일본내의 신문·통신사와 노동단체 등에 우송하였다. 註67) 윤우열은 허무당선언서에서 “희망도 이상도 장래도 아무 것도 없고, 포악한 적의 착취와 학대와 살륙과 조소와 회욕이 있을 뿐인 암흑한 수라장에서 야망으로 혈안이 된 적의 난무가 있을 뿐”이라면서, “이 전율할 현상을 타파하지 못하면 조선은 영원히 멸망”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현 질서 내에서 합법적으로 혁명을 완수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사갈과 같은 정치·법률 및 일체의 권력을 파괴”하는 방법은 오로지 폭파·방화·총살의 직접행동만이 있을 뿐이라면서, 허무당을 조직하여 폭력으로써 혁명을 완수할 것을 역설하였다. 註68) 윤우열은 1926년 1월 12일 팔판동에서 종로경찰서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체포된 사람은 윤우열·하은수河銀水 ; 종범·안병희安秉禧 ; 방조·양명梁明 ; 범인은닉·강정희姜貞姬 ; 범인은닉·이윤재李允宰 ; 범인은닉등이었 다. 註69)윤우열사건 이후 국내 아나키스트들의 테러활동은 거의 전개되지 않았다. 2. 재일본 한국인
재일본 한국인 아나키스트 중 제일 먼저 테러적 직접행동론을 방법론으로 채택한 사람은 박렬이다. 박렬은 「음모론」에서 테러적 직접행동만이 국가 타도의 유일한 수단임을 밝혔다. 그의 테러적 직접행동론의 골자는 첫째 지배와 착취를 목적으로 구성된 제국주의적 자본주의 국가를 붕괴시키지 않고서는 무산자계급이 자유를 회복할 수 없다는 것, 둘째 이 국가를 타도하는 데에는 의회주의 즉 참정권 획득운동으로서는 불가능하며 무권력자와 무산자가 국가를 타도할 수 있기 위해서는 군대와 경찰을 말살할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한다는 것, 셋째 무산자들이 당연히 취해야 되는 것은 직접행동이며 소요·폭동·반란 등이 가장 유효한 수단이라는 것, 넷째 폭동이나 반란은 어느 정도 국가의 규율과 권위가 이완되고 또 사회적 정세가 혼란스러운 무대를 필요로 한다는 것, 다섯째 일본에서는 경제적 직접행동인 총파업 등으로는 폭동화·반란화에 이를 수 없으며 음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 여섯째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키므로 음모가는 어떠한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자신의 목적을 관철시켜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註70) 박렬은 그의 처 금자문자와 함께 아나키스트 동지들을 규합·단결시키고 폭력에 의한 직접행동을 통하여 권력을 파괴하고자 하였다. 그들 은 흑우회의 활동이 지지부진하자 흑우회에 포괄하지 못하는 아나키즘에 소원한 사람들을 규합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註71)1923년 4월 정태성·김중한·홍진유·최규종崔圭悰, 崔圭淙, 崔奎倧, 崔圭宗·육홍균·서동성·장상중·하세명河世命, 河一, 河州明·한현상韓峴相, 韓睍相·서상경·야구품이野口品二·율원일남·소천무小川武, 小川茂·신산초대新山初代, 神山初代등과 함께 불령사를 조직하였다. 註72) 불령사는 아나키스트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다수 동지를 규합하고 혁명적 분위기를 촉진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따라서 무산자동맹회·자진회自進會또는 후테이선인사フテイ鮮人社등과 협력하거나 조선형평사를 선동하여 한국내에 소요를 야기하고자 기도하였으며, 혹은 반대파에게 폭행을 가하는 등 소위 직접행동을 실행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註73)그리고 정례회의를 개최하여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형평운동에 대해 불령사 명의로 축전을 보내는 것, 사회주의자를 욕한 『동아일보』 기자인 친일파 김형원金炯元, 金烱元을 구타하는 것, 마산에서 발생한 선로 인부 스트라이크에 대해서 불령사 명의로 후원 전보를 치는 것 등에 대해 토의하였다. 註74) 박렬은 불령사를 기반으로 하여 1923년 10월에 거행되는 일본 황태자 결혼식 때에 황태자와 요로要路의 대관大官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그 박렬의 일본 황태자 저격미수사건을 보도한 국내 신문기사 준비를 진행하였다. 하지만 준비 과정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박렬이 체포된 것은 관동關東대지진으로 인한 것이었다. 즉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동경 경시청이 불령사 관계자들을 예비구금하였고, 이때 박렬도 함께 구금되었던 것이다. 취조 과정에서 박렬의 일본 황태자 암살계획이 드러났고, 이는 ‘대역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이 사건으로 박렬 이하 19명이 검거되었으며, 그것과 동시에 불령사는 파괴되었다. 註75)이로써 박렬의 일본 황태자 암살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흑전사黑戰社, 일명 一聲團도 테러적 직접행동론을 방법론으로 채택하였다. 흑전사는 1928년 3월 하순 일본 동경에서 정찬진丁贊鎭·김호구金豪九·오병현吳秉鉉, 金秉元·장명학張命學, 張明岳·이지활李之活, 李鶴儀, 李爀義·김양복金養福, 金用福·송주식宋柱軾, 宋仲二등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기밀 엄수, 이탈 불허, 변절자 제재 등을 행동규칙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일본제국주의의 상징인 천황을 암살하고 중요 기관을 파괴할 것을 투쟁목표로 삼았다. 이들은 만주나 상해에 동지를 파견하여 무기를 견습제조하거나 구입하여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일제히 행동할 것을 꾀하였다. 1928년 10월 15일부터는 기관지 『흑전黑戰』을 5회에 걸쳐 발행하여 평안도와 황해도 등지에까지 우송하는 등 국내에도 아나키즘 선전작업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1929년 5월 김호구와 오병현이 무기 구입과 선전작업에 대한 국내에서의 반응을 살피기 위하여 고향인 평남 용강으로 돌아왔다가, 단오절 씨름대회를 이용하여 총독정치의 억압과 착취를 폭로하고 농민은 단결하여 강권체제 타도에 궐기할 것을 호소하는 내용의 격문을 살포한 것으로 인해 흑전사의 전모가 드러나고 말았다. 이리하여 7월 중순에 30여 명이 체포되었으며 결국 흑전사는 와해되고 말았다. 註76) 이후 적의 기관을 파괴하고자 하는 테러활동은 재일본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에 의해 더 이상 전개되지 않았다. 3. 재중국 한국인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1910년대 말부터 테러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하지만 국내에서 대중운동이 성장하면서 테러활동에 대한 비판이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제기되었다. 이에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테러활동의 정당성을 입증할 논리를 개발할 필요를 느꼈고, 그 역할을 담당한 자가 신채호였다. 신채호는 테러활동을 민족해방운동의 주요한 수단으로 규정한 민중직접혁명론을 제기하여 테러적 직접행동론을 아나키즘에 입각한 민족해방운동론으로 체계화하였다. 이후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신채호의 테러적 직접행동론에 입각하여 테러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테러활동을 주도하던 의열단이 분열된 이후 처음에는 개인적 차원에서 테러활동을 전개했다. 류자명은 이규준李圭駿·이규학李圭鶴·이성춘李性春등을 도와 1923년에 다물단多勿團을 조직케 하였으며, 신채호가 그 선언문을 작성해주었다. 註77)다물단은 1925년 3月 30일 의열단원 이인홍·이기환 등과 합작하여 일제의 밀정 노릇을 하던 김달하를 북경에서 살해하였으며, 註78)이어 곧 박용만까지 살해하였다. 註79)그리고 류자명·신채호는 이지영과 함께 1926년 7월 21일에 행해진 나석주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파사건에도 관계하였다. 하지만 1920년대 중반 무렵부터는 테러적 직접행동론에 입각하여 활동하는 단체들이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1926년에는 1월 1일 상해에서 약 50명으로 조직된 살인단과 1926년 무릅 북경에서 결성된 북경흑료구원회北京黑療救援會등은 일제의 밀정을 처단하거나 국내에 있는 일제의 식민기관을 파괴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한 가운데 1927년 국내에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연합으로 신간회가 결성되자, 이에 대항하여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을 결성하고, 테러적 직접행동론을 방법론으로 채택하였다.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은 강령에서 운동은 오직 직접방법직접 선전과 폭력적 직접행동으로 한다고 밝혔다.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은 상해연맹과 북경연맹을 중심으로 테러활동을 전개했다. 상해연맹은 『탈환』 간행을 통하여 아나키즘을 선전하는 한편, 백정기·김지강·엄형순·이달·박기성·이용준 등을 포섭하여 각종 직접행동을 전개하였다. 註80)상해연맹은 테러활동을 전개 함에 있어 남화한인청년연맹과 함께 했다. 남화한인청년연맹 결성은 최석영·신현상이 국내 은행으로부터 58,000원이라는 거액의 자금을 인출하여 중국으로 건너간 것에서 비롯되었다. 북경으로 잠입한 이들은 류기석과 협의하여 이 돈을 테러활동자금으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류기석은 테러활동을 전개할 동지를 규합하고자 상해로 가서 류자명·장도선·정해리·안공근 등과 함께 1930년 4월 20일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테러활동 계획을 세우기 위해 북경에서 무정부주의자동양대회 註81)를 개최하여 전 중국에 산재해 있는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을 소집하였다. 註82)이 대회에서 자금 사용처를 둘러싸고 갑론을박이 벌어졌으나, 이회영의 중재로 만주에서 김종진·이을규 등이 전개하고 있던 민족해방운동기지 건설운동에 자금을 투입하기로 결정하였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의 본격적 테러활동은 1931년 9월 정화암 등 만주에서 철수한 일단의 아나키스트들이 남화한인청년연맹에 합류하면서부터 전개되었다. 남화한인청년연맹과 상해연맹이 단행한 주요한 테러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일제의 밀정 이규서李圭瑞·연충렬延忠烈을 암살하였다. 1932년 12월 정화암·이달·백정기·원심창·김지강·박기성·오면직 등은 이규서와 연충렬이 이회영을 일제 경찰에 밀고한 것으로 단정하고 이들을 살해할 것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규창이 김구 등을 만나 독립운동을 재건하는 것에 대해 논의하자고 양인을 입달학원立達學院으로 유인하였다. 백정기와 엄형순 등이 그들을 남상역南翔驛철교 부근 으로 데리고 간 뒤, 그들로부터 일제의 밀정 노릇을 한 것을 자백받고 살해했다. 註83) 둘째, 일제의 밀정 안경근의 처 생질인 이종홍李鍾洪을 교살하였다. 1933년 5월 남상南翔입달학원에서 정화암·오면직·엄형순, 김지강, 안경근 등이 회합을 가지고 이종홍을 일본 총영사관의 밀정으로 단정하고 살해할 것을 공모하였다. 동일 오후 3시경 안경근이 이종홍을 남상 입달학원 부근 상이강常爾康의 집으로 유인한 뒤, 오면직·엄형순·김지강 등이 그로부터 일본 총영사관 밑에서 활동한 사실이 있다는 것을 자백받고 그 자리에서 목을 졸라 질식사시켰다. 註84) 셋째, 일제의 밀정 노릇을 한 옥관빈玉觀彬을 사살하였다. 1933년 7월 22~23일경 옥관빈이 일본 군대를 위하여 약 2만 원어치의 재목을 제공하고 일본 관헌에게 혁명운동에 관한 밀정 행위를 한 사실을 포착한 오면직과 엄형순은 정화암과 연락을 취하면서 옥관빈의 형인 옥성빈玉成彬, 玉勝彬의 집 맞은 편 중국인의 집 2층에 수일간 잠복하여 사살할 기회를 엿보았다. 1933년 8월 1일 밤 엄형순이 옥성빈의 집으로 들어가던 옥관빈을 사살하였다. 상해연맹에서는 8월 9일 한인제간단韓人除奸狀의 명의로 「역도 옥관빈의 죄상을 선포한다」라는 제목의 참간장斬奸狀을 각 방면에 살포하여 옥관빈의 주구적 죄상을 6개조의 죄목으로 만천하에 폭로하였다. 한인애국단과 합작하에 이루어졌던 이 사건이 한인제간단의 명의로 발표됨으로써, 이후 김구측과 상해연맹의 관계가 틀어져 1933년 11월에 김구에 의해 오면직이 소환당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註85)
넷째, 옥관빈의 형 옥성빈을 사살하였다. 옥성빈이 불조계佛租界공부국工部局에서 형사로 근무하면서 독립운동을 방해하자 1933년 12월 18일 김해산金海山, 金文凞의 집 입구 노상에서 저격하였다. 註86) 다섯째, 상해조선인거류민회上海朝鮮人居留民會부회장을 지낸 이용로李容魯를 암살하였다. 이용로는 일제의 경찰이 민족해방운동가들을 체포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하여 민족해방운동가들의 동정과 주소를 몰래 조사하여 일본총영사관에 보고할 뿐아니라, 상해에 거주하던 한국인들을 모두 거류민회에 입회시켜 민족해방운동가들의 활동 범위를 축소시키고 있었다. 이에 엄형순·이달·이용준·김지강 등은 정화암의 제안에 따라 1935년 3월 18일 이용로를 살해할 구체적 방법 등에 관해서 협의하였는데, 엄형순이 실행을 담당하고 이규창이 망을 보기로 결정하였다. 1935년 3월 25일 엄형순과 이규창은 정화암이 마련한 권총으로 이용로를 습격하여 후두부를 명중시켜 사살에 성공하였으나, 양인은 모두 현장에서 중국 경찰에게 체포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엄형순은 사형, 이규호는 징역 13년에 처해졌다. 註87)
여섯째, 1935년 11월 7일 남화한인청년연맹원 김창근이 일제의 밀정으로 추정되던 이태서李泰瑞를 권총으로 사살하였다. 註88) 일곱, 중일전쟁 발발 이후 후방교란책으로서 친일 한국인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1937년 11월 11일 김현수는 조선민족혁명당원 최원삼崔元三, 崔榮植과 함께 상해공동조계 맥특혁사탈로麥特赫司脫路카페 ‘난데스까’에서 상해조선인거류민회장上海朝鮮人居留民會長이갑녕李甲寧을 암살하고자 권총으로 저격하였으나 경상을 입히는 데 그치고 말았으며, 12월 6일 일본총영사관 경찰부에 검거되었다. 사건 발생 후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라디오를 이용하여 영어·중국어·한국어로써 본 사건을 항일적으로 왕성하게 선전하였다. 註89) 1930년대의 테러활동을 주도한 상해연맹과 남화한인청년연맹은 테러활동을 전개하면서 김구 중심의 한인애국단이나 중국 아나키스트들과 합작하기도 하였다. 김구와 합작은 1931년 만주에서 철수하여 남화한인청년연맹에 합류한 정화암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이들이 김구측과 합작이나 중국 국민당정부의 지원하에서 테러활동을 전개한 데에는 만주에서 한족총연합회 활동을 통해 대종교 계통의 민족주의자들과 연합하였던 경험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아나키스트들의 반공산주의적 정서 또한 민족주의자들과의 합작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공산주의자에 의한 김좌진 암살은 아나키스트들의 만주에서 민족해방운동기지 건설을 실패로 몰고가는 치명적 요인이 되었고, 이에 아나키스트들의 반공산주의적 정서는 강화되었으며, 공산주의를 타도하기 위한 어떠한 행동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민족주의자와의 연합이 쉽게 이루어진 것이었다. 부족한 자금문제 또한 아나키스트들로 하여금 민족주의자들과 합작하게끔 유도했다. 자금 부족으로 상당한 곤란을 겪고 있던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김구측으로부터 자금 지원 제의가 들어오자 이들과 합작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다. 북경연맹 역시 항일운동의 기세를 높이기 위해 류기석을 중심으로 테러를 결행하였다. 류기석은 재북평동북의용군후원회在北平東北義勇軍後援會와 복건福建방면의 항일회 등으로부터 자금 7천원을 받고, 테러에 참가할 동지를 물색하러 1932년 10월 상해로 갔다. 거기서 남상 입달농학교立達農學校에 근무하던 류자명을 방문하고 그로부터 원심창을 소개받았다. 원심창·이용준李容俊, 田里芳, 田理芳, 田里方, 全理芳, 千里芳, 千理方, 千里放, 千里秋, 麗朶, 李起泰, 李春成, 陳爲人, 李東俊, 林原植, 盧子英, 陳國輝·김야봉金野峰, 金夜烽과 함께 북경에 도착한 류기석은 정래동丁來東·오남기吳南基·국순엽鞠淳葉·류기문柳基文등 북경연맹원들과 협의한 후, 테러를 단행할 장소를 물색하였으나 당시 북경에는 장학량張學良군대 30여만 명이 주둔하고 있어 정세가 불리하였다. 이에 1932년 11월 14일 천진으로 갔다. 16일 오후 이용준은 일본총영사관 관저에, 류기석은 일본군사령부에, 류기문은 법조계法租界마두碼頭에 정박 중이던 일본 기선에 각각 수류탄을 던져 일본총영사관 관저 외곽의 벽돌담 일부를 파손하였다. 그러나 사령부에 던진 수류탄은 불발이었고, 기선에 던진 수류탄은 바다에 떨어지고 말았다. 註90)
남화한인청년연맹원들은 사업에 소요되는 자금을 충당하기 위하여 ‘약掠’이라 칭하는 행동도 취하였다. 아나키스트들이 상해에서 단행한 주요한 강도 행위는 다음과 같다. 첫째, 1931년 12월 상순 무렵 이용준·엄형순·김지강 등은 백정기의 제안에 따라 연맹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금은교역상金銀交易商겸 과물상果物商인 한국인 이명섭李明燮의 집을 습격하여 금품을 강탈하였다. 註91)둘째, 1933년 7월 2일 김문희金文凞집에 한국인 3명이 침입하여 금품을 강탈·도주하였다. 註92)셋째, 1933년 7월 5일 이용준·정화암·이달·박기성 등이 운동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원창공사元昌公司주인인 한국인 조상섭趙尙燮의 집을 습격해 인삼 60~70근 외 현금 약간을 강탈·도주하였다. 註93)넷째, 1933년 7월 12일 금은金銀거래소 김창우金昌宇와 박모朴某의 방에 한국인 3명이 일차 침입하였으며, 13일에 3명이 재차 침입하여 양인을 납치하여 은행예금을 인출하려다 실패하여 도주하였다. 註94)다섯째, 1933년 7월 13일 이성용李星鎔의 집에도 한국인이 침입하였다. 註95)여섯째, 1935년 조상섭의 집을 또 한 차례 침입했다. 1935년 1월 21일 엄형순·이규창·이달·김지강 등은 정화암과 협의하에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운동자금을 조달할 목적으로 조상섭 의 집을 습격하여 돈을 강탈하고자 하였으나, 이 사실을 미리 간파한 조상섭이 도주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註96)일곱째, 마약밀매상 한규영韓奎泳을 강탈하였다. 1936년 11월 18일경 정화암과 박제채朴濟彩가 회합하여 연맹의 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한규영을 습격하여 금품을 탈취할 계획을 세웠다. 11월 23일경 박제채는 정화암에게 한규영 집의 구조도면 1통을 건네주면서 한규영의 가족상황 등을 정화암에게 자세히 알려주었다. 1937년 1월 22일 오전 8시경 정화암·이하유 외 4명이 한규영 집에 침입하여 중국은행권 800원과 헤로인 4온스시가 400원 정도를 강탈하였다. 註97)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약’은 한국맹혈단韓國盟血團에 의해서도 전개되었다. 1933년 11월 한국국민당으로 복귀하였던 오면직은 1936년 1월 김구와 안공근安恭根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김동우·한도원韓道源, 李國華, 王少山등과 함께 김구와 결별하고 상해로 가서 아나키스트 대열에 합류하였다. 김창근과 민족혁명당을 탈퇴한 김승은金勝恩, 金革, 金影, 金華등을 규합하여 남화한인청년연맹의 별동대로 맹혈단을 조직하였다. 오면직·김창근·류형석柳瀅錫, 張天民, 百雲·한도원은 1936년 1월 중순경부터 동년 2월 중순경까지 조상섭·이갑성李甲成·공개평孔凱平, 李東彦·이철진李鐵鎭·박진朴震·정찬성鄭燦星·김하종金河鍾·황복용黃福用·최영택崔泳澤등에게 활동자금을 제공해줄 것을 강요하였다. 이렇게 획득된 자금으로 남화한인청년연맹의 기관지 『남화통신』을 발행하는 한편, 1936년 2월 맹혈단 결당식을 거행하였다. 맹혈단은 김동우와 오면직을 단장 및 재정부장으로 선출하고 다음의 사항을 결정하였다. ① 금후 한국독립당재건파와 제휴하고, 새로이 혁명단체를 조직하여 중국인 방면으로부터 활동자금을 얻어 대대적으로 활동할 것 ② 김동우는 항주杭州로 가서 재건파 조소앙·박창세와 교섭하고 그것을 합체하여 강력한 혁명단체로 발전시킬 것 ③ 오면직 기타는 당분간의 활동자금을 상해 재류 한국인으로부터 모집할 것 ④ 우리들은 남경에 있는 야심정치가 등처럼 타락하지 않고 혁명도덕에 비추어 행동할 것 위의 결정에 따라 김동우는 항주로 가서 한국독립당재건파와의 제휴를 모색하였으며, 오면직은 김승은 등의 단원과 함께 상해에 있던 한국인 자산가들에게 맹혈단 명의의 협박문을 보내거나 강제로 면회하여 자금을 제공해줄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자금 모집은 신통치 않았다. 김동우는 1936년 2월 22일 상해 민국로民國路어느 다방에서 류형석을 만나, 종전과 같은 자산가들로부터 기부를 받는 방식으로는 활동자금 모집이 여의치 않으므로 강탈하는 방법을 취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에 류형석 등은 2월 23일 ‘약’을 행할 목적으로 상하이 정안사로靜安寺路장두철張斗徹집에 침입했다. 류형석은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며, 3월 5일과 6일 양일에 걸쳐 한도원·김승은·김창근·오면직 등도 체포되는 등 김동우를 제외한 전 단원이 일본 영사관 경찰에 의해 검거되고 말았다. 1937년 12월 27일 김동우까지 검거되면서 맹혈단은 궤멸 상태에 빠졌다. 註98) 상해 맹혈단 활동 신문기사
정화암이 주도하였던 남화한인청년연맹과 맹혈단은 일제의 요인이나 기관에 대한 테러는 거의 행하지 않았다. 단지 김창근과 이회영의 암살계획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김창근은 상해 일본총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고, 상해 일본영사관 등정藤井경부보 집에 폭탄을 장치하여 암살을 기도하였다. 註99)이회영은 1932년 9월 초 중국 아나키스트 오치휘와 이석증李石曾등을 만나 앞으로의 운동방향에 대해 논의하였는데, 그 결과 이회영이 만주로 가서 일본제국주의의 만주 침략의 선봉인 무등武藤관동사령관을 암살하고 그 거간巨幹과 중추기관을 파괴하기 위한 준비공작을 하기로 하였다. 구체적 사업으로는 ①만주에 시급히 연락의 근거지를 만들 것, ②주변四圍정세를 세밀히 시찰하고 정보를 수집할 것, ③장기준을 앞세워 지하조직을 계획할 것, ④무등 관동사령관 암살계획을 세울 것 등을 선정하였다. 이회영이 무사히 만주에 안착하면 오치휘·이석증을 통해 장학량의 협조를 얻어 중·한·일 공동의 유격대와 각 도 시에 편의대便衣隊·파괴부대를 배치하여 도시와 촌락에서 동시에 항전을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회영은 1932년 11월 초 만주로 가다가 이규서와 연충렬의 밀고로 대련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제경찰의 손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이회영은 잔인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사하였다. 註100)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1930년대 정화암 등에 의해 주도되었던 남화한인청년연맹·상해연맹과 맹혈단의 테러활동은 1920년대의 테러활동과는 달리 주로 친일파 처단이나 ‘약’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1920년대의 테러가 폭력적 직접행동론에 입각하여 행해진 것이라면, 1930년대의 정화암 등에 의해 단행된 테러는 자포자기적 상태에서 행해진 허무주의적 경향을 띤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힘을 쏟아 부었던 만주에서의 민족해방운동기지 건설사업이 일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합작했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실패로 끝나고 중국 관내로 철수할 수밖에 없던 상황에 망연자실했다. 그러한 상태에서 중국에서 대중을 가지지 못한 그들이 취할 수 있었던 수단은 자포자기적 테러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결국 그들은 남화한인청년연맹에 합류하여 테러에 매달렸다.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의 테러 활동 중 일부는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항일구국연맹·중한청년연합회 등 중국·일본 기타 지역의 아나키스트들과의 국제적 연대조직에 의해 행해졌다. 동아시아 아나키스트들의 국제적 연대는 1921년부터 시작되어 1927년에 무정부주의동방연맹 결성으로 이어졌다. 1927년 9월 중국 서건黍健의 발의로 한국·일본·중국·대만·안남·인도 등 6개국 대표자 120여 명이 북경에서 회합하여 무정부주의동방연맹 창립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창립대회는 각각 자국으로 돌아가 서로 연락을 취하면서 목적을 달성할 것과 본부 를 상해에 설치할 것 등을 결정하였다. 註101)무정부주의동방연맹의 목적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국체를 변혁하여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는 동시에 자유노동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註102) 이필현李弼鉉, 이지영과 함께 한국인측 대표로 무정부주의동방연맹 창립대회에 참가하였던 註103)신채호는 무정부주의동방연맹 창립대회의 결정을 실천에 옮기고자 하였다. 그는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의 역량을 한군데로 모으기 위하여 1928년 4월 천진에서 한국인 아나키스트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는 신채호가 작성한 선언문을 채택하는 한편, 잡지를 발행하여 아나키즘을 선전하고 적의 기관을 파괴할 것을 결의했다. 즉 북경 교외에 폭탄과 총기공장을 건설하고, 러시아·독일인 폭탄제조 기사를 초빙하여 폭탄과 총기를 제조하여 각국으로 보내어 대관 암살과 대건물 파괴를 도모하는 한편, 선전기관을 설치하고 선전문을 인쇄하여 세계 각국에 배부·발송하기로 결정하였다. 신채호는 당시 우체국에 근무하던 임병문林炳文과 협의하여 외국환을 위조하여 이 사업에 소요되는 자금을 조달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위조한 외국환 8만원을 대련·여순·의주·평양·서울·인천·하관下關·기타 등 일본과 대만에 있는 우체국에 송부한 뒤 각지에서 현금으로 인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임병문이 대련과 여순에서 4천원을 인출하여 한국으로 향하였으나, 이러한 사실이 발각되어 1928년 4월 27일 체포되었다. 신채호도 1928년 5월 8일경 대만 기륭항基隆港에서 일본 수상서水上署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체포된 사람은 신채호·이필현·이경원李鏡元, 대만인 임병문, 중국인 양길경楊吉慶등 5명이었다. 註104)
신채호 등이 체포되면서 무정부주의동방연맹의 활동은 위축되었다. 이를 재정비하기 위하여 다시 연맹조직준비회가 꾸려졌다. 연맹조직준비회는 동방아나키스트대회를 계획하면서 국내와 재일본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에게도 대표 파견을 의뢰하였으며, 국내와 재일본 한국인 아나키스트계에서는 대표를 선정하여 파견하였다. 연맹조직준비회는 1928년 6월 14일 상해 이매로李梅路화광의원華光醫院에서 한국인 류기석·이정규, 일본인 진희동秦希同, 赤川啓來, 중국인 모일파毛一波·왕수인汪樹仁·등몽선鄧夢仙·역자기易子琦·오극강吳克剛외 수명이 회합한 가운데, 일본 제국의 국체변혁아나키즘의 실현 즉 권력 부인을 목적으로 하여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같은 날 중국·베트남·인도·필리핀·한국 등과 그외 5개국 지방의 유지 대표를 소집하여 동방아나키스트대회를 개최하였으며, 동 대회에 출석한 백수십 명의 각국 유지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정식으로 결성했다.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은 1930년 무렵까지 테러적 직접행동을 통해 민중들을 각성시켜 그들로 하여금 일제의 식민지배에 맞서 봉기하도록 유도하고자 상당히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는 등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운동의 중심 단체로서 역할을 다하였으나, 1931년 무렵이 되면서는 활동이 침체되었다. 註105) 일제가 만보산사건을 야기하여 만주침략을 본격화하자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하여 아나키스트들의 국제적 연대 활동은 다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한국·중국·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이 항일구국연맹을 창립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1931년 11월 상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간부 왕아초王亞樵와 고문격인 화균실華均實이 백정기를 찾아와 유명무실해진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대신할 단체를 조직할 것을 제의하 였다. 이 제안을 백정기가 받아들여 1931년 11월 중순 백정기, 중국 아나키스트 화균실·왕아초, 일본 아나키스트 좌전일랑佐野一郞田華民, 田化民, 吉田등에 의해 항일구국연맹이 결성되었다. 항일구국연맹은 전 세계에 대해서 혁명적 수단으로 일체의 권력 및 사유재산제도를 배격하고 진실한 자유평등의 사회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우선 한국을 일본으로부터 독립시키고 한국에 아나키스트사회를 건설한 다음, 일본의 입헌군주제도 및 사유재산제도를 폐지하고, 중국 기타 각국에서 아나키스트사회를 건설하는 것 등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현사회의 모든 권력을 부정하고 새로이 세계 전 인류가 인생의 모든 방면에서 자유·평등을 향수享受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강령으로 채택하였다. 11월 말 경제부·선전부·정보부 등의 부서를 설치하고, 상호 책임을 분담하여 왕아초가 경제부, 좌야일랑이 선전부를 맡았다. 그리고 국제적 단체라는 점을 고려하여 한국인부·중국인부·일본인부를 두고, 각국인은 자국의 사정에 정통하니 자국의 동지 규합과 정세 연구와 선전을 책임지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하에 백정기가 한국인부, 화균실·왕아초가 중국인부, 좌야일랑이 일본인부를 각각 맡았다. 이들은 동지를 규합하여 모든 힘을 동원하여 파괴활동을 전개할 것과, 각 단원은 국적에 따라 자기 나라에 대한 파괴공작을 기회 있을 때마다 실행할 것을 결정하였다. 경제부는 왕아초의 주도하에 단원의 생활비 약 2천 불일본돈 약 6천엔을 준비하였으며, 언제라도 행동할 수 있도록 폭발탄·수류탄·대소형 권총까지 구매하였다. 선전부는 불조계 서문로西門路에 공도인쇄소公道印刷所를 설립하였는데, 류자명·정해리·백정기·오면직·정화암 등이 중국 아나키스트 왕아초·화균실·파금 등과 함께 경영하였다. 이 인쇄소에서 항일구국연맹은 1931년 11월부터 기관지 『자유』를 주간으로 발행하여 아나키즘 이론투쟁을 전개하고 동지를 규합하였다. 『자유』는 류자명이 주필이었으며, 파금이 그를 도왔다. 발행 은 양여주·정해리가 맡았고, 왕아초는 선전사업에 사재 2만 불을 지출하였다. 『자유』지는 1932년 4월에 상해 불조계 당국에 의해 발행정지당하고 정해리는 체포되어 6개월간 옥살이를 하였다. 항일구국연맹은 조직의 확대·강화를 적극적으로 도모하였는데, 그 결과 1931년 12월 3일에 박기성과 이용준이, 12월 8일에는 김지강·이달·엄형순·오면직 등이 백정기의 권유로 가맹하였다. 맹원이 늘어나면서 부서개편대회를 개최하였다. 한국인 이회영·백정기 등 7명과 중국인 왕아초·화균실 등 7명, 일본인 좌야일랑·시전부용사矢田部勇司등이 참석한 가운데 연석회의를 열고 선전·연락·행동·기획·재정 등 5부를 두고 각 부에 위원 약간 인을 두었다. 그리고 적의 기관 파괴와 요인 암살, 친일분자 숙청, 배일선전 등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행동대를 편성했으며, 러시아인부·미국인부미국통신원 존슨·대만인부林成材를 증설하였다. 이회영이 위원인 기획부에서는 조계 밖 중국 거리에 미곡상 점포를 차려놓고 비밀리에 ①적 군경기관 및 수용기관 조사 파괴, 적 요인 암살, 중국 친일분자 숙청, ②중국 각지의 배일선전을 위한 각 문화기관의 동원, 선전망 조직, ③·①항과 ②항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인원 및 경비의 구체적인 설계 등에 관한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왕아초가 재정과 무기 공급을 맡아 1932년 10월까지 화균실을 통하여 매월 40원 내지 300원씩 합계 1,200원을 제공하였다. 조직 확대작업도 계속 이루어져 1932년 8월 정화암과 연락이 이루어져 원심창이 가맹하였으며, 이강훈도 백정기의 권유에 의하여 1933년 2월 20일 무렵에 참가하였다. 이외에도 김야봉을 비롯하여 일본인 시전부용사伊藤, 吳秀民, 吳世民과 중국인 모일파毛一波외 5~6명이 참가하였다. 註106)
행동대는 적의 기관이나 친일파들을 처단하는 데 앞장섰다. 화균실·좌야일랑·이용준 등은 상해 북군참北軍站에서 친일적이고 유약한 외교정책을 펼치던 남경정권南京政權의 외교부장 왕정위를 저격했다. 그러나 잘못하여 그의 부관을 죽이는데 그치고 말았다. 천주에서는 그곳에 있던 아나키스트들이 하문厦門일본영사관을 폭파하였다. 註107)그리고 왕아초는 장개석蔣介石암살을 시도하였으나 중국 국민당과 관계를 맺고 있던 정화암 등의 비협조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註108) 1932년 2월 일제의 제1차 상해 침공 이후 채정해蔡廷楷의 19로군과 남경정부 사이에 정면충돌이 발생하면서 19로군과 연결되어 있던 왕아초와 화균실은 남경정부와 남의사藍衣社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거기에다가 1931년 6월 중광공사重光公使와 동행하던 송자문宋子文을 암살하기 위하여 상해 북정거장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의 주모자가 왕아초와 화균실인 것이 드러났다. 이에 양인은 검거를 피해 1932년 5월 홍콩으로 도피하였고, 중국측의 중심 인물이 빠지게 됨에 따라 항일구국연맹은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註109)
1933년 3월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에게 장개석이 일본과 야합한다는 불길한 소식이 들려왔다. 즉 주중 일본공사 유길명有吉明이 황본荒木육상陸相의 밀명으로 4천만엔을 휴대하고 도중渡中하여 국민당정부 군사위원장 장개석을 매수하여 2월 중순에 밀약을 체결하고 귀국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던 것이다. 그 밀약의 내용은 국민당정부와 군벌로 하여금 만주를 포기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에 1933년 3월 5일 무렵 백정기·원심창·이강훈·오면직·엄형순·김지강·정화암·이달·박기성·정해리·허열추 등 항일구국연맹의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회합을 개최하여 대책을 논의했다. 원심창이 유길명이 귀국하여 밀약이 성립되면 아나키스트들이 설 땅을 상실하게 될 것인바,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유길명을 암살해야 한다는 내용의 제안을 하자, 이들은 유길명암살을 통해 국민당정부의 기만을 양국 민중 앞에 폭로하여 밀약을 와해시키고 중국 민중의 반장反蔣감정을 촉발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3월 17일 밤 유길명이 육삼정六三亭연회에 참석하였다가 돌아가는 길에 암살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준비에 착수했다. 서로 암살에 참가하고자 하는 바람에 제비뽑기를 통해 결정하였는데, 백정기가 선발되었고 백정기는 이강훈에게 함께 거사할 것을 제의했다. 이들은 시전부용사를 통해 유길명의 사진을 입수하고 자동차 번호를 조사하였으며, 암살 후 그것을 발표·선전하는 데 필요한 백정기와 이강훈 양인의 사진을 준비하고 선언서를 기초하였다. 선언서는 흑색공포단의 명의로 발표하기로 하였다. 3월 13일 오후 7시에는 원심창의 안내로 현장답사까지 실시하였다. 이날 밤 원심창·백정기·이강훈·시전부용사 등은 유길명을 암살하기 위해 폭탄 1개, 수류탄 1개, 권총 2자루를 휴대하고 공동조계 중국요리점 송강춘松江春에 잠입하여 기회를 노렸으나, 일본총영 사관 경찰에 사전에 발각되어 시전부용사를 제외한 3명이 체포되었다. 일제경찰에 정보를 제공한 것은 일본 아나키스트 대정모大井某였다. 註110) 유길명암살은 비록 실패했지만 이 사건은 신문에 대서특필되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장개석과 유길명의 밀약은 세상에 폭로되어 반장 세력을 결집시키는 등 중국 정계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으며, 장개석 정권을 위기로 몰고 갔다. 국제적 연대하에서 테러활동은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9월 중순 한국인 아나키스트와 중국 아나키스트들에 의해 결성된 중한청년연합회라는 중한합작단체로 이어졌다. 중한청년연합회는 10월 5일 기관지 『항전시보抗戰時報』를 창간하여 각 방면의 중한인 아나키스트와 기타에게 배포하거나 강도·협박 등의 행동으로 자금을 획득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註111)그러나 1936년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에 의하여 민족전선론이 제기되면서 테러활동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한 이후라 활발한 활동은 없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 정세가 급변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남화한인청년연맹도 류자명·류기석 등에 의해 조선혁명자연맹으로 개조되었다. 註112) [註 64]『조선일보』 1927년 5월 29일자 ; 송상도, 『기려수필』, 국사편찬위원회, 1971, 352~353쪽 ; 方漢相 증언자료(丁英鎭 소장)(박찬숙, 「일제하 무정부주의 단체 진우연맹 연구」, 국민대석사학위논문, 1995, 14쪽에서 재인용) ; 『중외일보』 1927년 5월 21일자.☞
[註 65]『동아일보』 1927년 6월 15일자에 따르면, 진우연맹 관계자들은 파괴단 결성에 관한 혐의는 증거불충분으로 예심에서 면소되었다. 그러나 증거불충분으로 면소되었다는 사실이 곧 파괴단을 조직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註 66]이상에서 서술한 진우연맹의 창립과정과 활동은 『동아일보』 1926년 8월 5·6·10·14·16·18·30, 1927년 2월 28일, 5월 27일, 6월 15일, 7월 6일자 ; 『조선일보』 1927년 3월 14일, 5월 29일자 ; 『중외일보』 1927년 5월 21일자 ; 朝鮮總督府 警務局, 『治安狀況』(昭和 5年 10月), 16쪽 ; 『治安狀況-8年』, 28쪽 ; 慶尙北道 警察部, 『高等警察要史』, 55·240~241쪽 ; 方漢相 증언 자료(박찬숙, 「일제하 무정부주의 단체 진우연맹 연구」, 15쪽에서 재인용) ; 송상도, 『기려수필』, 353쪽 ; 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아나키즘운동사』, 223~224쪽.☞
[註 72]朴烈의 「豫審請求書」(布施辰治, 『運命の勝利者朴烈』, 12∼17쪽) ; 朴烈의 豫審 「第6會 訊問調書」(『被告人 朴準植·金子文子 特別事件主要調書』(『アナキズム』, 216쪽)) ; 金子文子의 「調書」(『被告人 朴準植·金子文子 特別事件主要調書』(『アナキズム』, 191쪽) ; 內務省警保局保安課, 「大正14年中ニ於ケル在留朝鮮人ノ狀況」(1925年 12月)(『資料集成』 1, 162쪽) 등을 종합.☞
[註 76]『조선일보』 1929년 7월 26일자 ; 『동아일보』 1929년 7월 16·18·22·26·28일, 8월 1일, 1930년 11월 9·15일자 ; 『중외일보』 1930년 8월 2일자 ; 『自由聯合新聞』 1929년 9월 1일자, 1930년 7월 1일자 ; 「이지활의 회고문」 ; 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아나키즘운동사』, 250쪽.☞
[註 78]『독립신문』 1925년 5월 5일자 ; 在上海總領事館, 「不逞鮮人ノ宣言書ニ關スル件」, 『朝鮮民族運動(未定稿)』 3(1923.3~1926.12)(『外務特殊文書』 25, 571쪽) ; 이정규, 『우관문존』, 50쪽 ;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174~177쪽.☞
[註 82]『自由聯合新聞』 1934년 2월 10일자 ; 「신현상의 공적조서」(공기택, 「남화한인청년연맹의 무정부주의운동」, 국민대석사학위논문, 1990, 32쪽에서 재인용) ; 『조선일보』 1930년 9월 23일자.☞
[註 83]「吳冕稙 외 4인의 판결문」(1936年 刑控 第119號)(『독립운동사자료집』 11, 825쪽) ; 司法省刑事局, 「上海及南京地方に於ける朝鮮人の一般狀況と最近の不逞鮮人の思想運動」(三木今二의 1937년 보고)(『思想報告集』 其の三, 27쪽) ; 이규창, 『운명의 여신』, 185~186쪽 ; 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아나키즘운동사』, 364쪽.☞
[註 84]「在上海總領事館ニ於ケル特高警察事務狀況」(1937年 12月末 調査)(『外務特殊文書』 27, 784·792쪽) ; 「吳冕稙 외 4인의 판결문」(1936년 刑控 제119호)(『독립운동사자료집』 11, 826쪽) ; 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아나키즘운동사』, 343·364쪽.☞
[註 85]在上海總領事館 編, 「在滬有力鮮人玉觀彬暗殺事件」, 『朝鮮民族運動(未定稿)』 5-1(1933.1~1937.12)(『外務特殊文書』 26, 681쪽) ; 『동아일보』 1933년 8월 3·15일자 ; 林友,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운동 개황」 ; 司法省刑事局, 「上海及南京地方に於ける朝鮮人の一般狀況と最近の不逞鮮人の思想運動」(三木今二의 1937년 보고)(『思想報告集』 其の三, 28쪽) ; 「吳冕稙 외 4인의 판결문」(1936년 刑控 제119호)(『독립운동사자료집』 11, 826쪽) ; 「在上海總領事館ニ於ケル特高警察事務狀況」(1937年 12月末 調査)(『外務特殊文書』 27, 792쪽) ; 이규창, 『운명의 여신』, 193쪽.☞
[註 86]內務省警保局, 「在上海留朝鮮人の不穩狀況」, 『社會運動の狀況』(1933年)(『資料集成』 2, 842쪽) ; 內務省警保局 編, 「1935年の上海を中心とする朝鮮人の不穩策動狀況」, 『社會運動ノ狀況』(1935年)(金正明, 『朝鮮獨立運動』 2, 552쪽).☞
[註 87]「無政府主義運動事件」, 『思想彙報』 6, 1936, 225~226쪽 ; 「嚴亨淳·李圭虎의 판결문」(1936年 刑控 第95號)(『독립운동사자료집』 11, 839~840쪽) ; 『동아일보』 1936년 1월 15일, 2월 5일, 4월 9·18일자 ; 島津岬·古屋孫次郞, 『上海に於ける朝鮮人の實情』, 中央朝鮮協會, 1935, 14쪽 ; 「在上海總領事館ニ於ケル特高警察事務狀況」(1937年 12月末 調査)(『外務特殊文書』 27, 793쪽) ; 村田生, 「上海及南京方面ニ於ケル朝鮮人ノ思想狀況」, 『思想彙報』 7, 1936년 6월, 178쪽.☞
[註 88]內務省警保局 編, 「1935年の上海を中心とする朝鮮人の不穩策動狀況」, 『社會運動ノ狀況』(1935年)(金正明 編, 『朝鮮獨立運動』 2, 552쪽) ; 在上海總領事館, 「韓國猛血團員ノ檢擧」, 『朝鮮民族運動(未定稿)』 5-2(1933.1~1937.12)(『外務特殊文書』 27, 281쪽).☞
[註 89]內務省警保局, 「1937年の在支不逞鮮人の不穩策動狀況」, 『社會運動ノ狀況』(1937年)(金正明, 『朝鮮獨立運動』 2, 608쪽) ; 司法省刑事局, 「支那事變勃發以後南京陷落直後迄の中南支在住不逞鮮人の動靜」(古橋浦四郞의 1938년 보고)(『思想報告集』 其の三, 79쪽) ; 司法省刑事局, 「昭和13年1月乃至10月中支在住不逞鮮人の動靜」(長部謹吾의 보고)(『思想報告集』 其の七, 159쪽) ; 『조선일보』 1938년 4월 9일자.☞
[註 90]「上海 六三亭사건의 판결문」(원주원씨중앙종친회, 『의사 원심창』, 1979, 78~79쪽) ; 梁一東, 「元心昌傳」, 『自由聯合新聞』 1934년 8월 5일 ; 村田生, 「上海及南京方面ニ於ケル朝鮮人ノ思想狀況」, 『思想彙報』 7, 1936, 177쪽 ; 林友,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운동 개황」 ; 在上海總領事館, 「有吉公使暗殺陰謀無政府主義者檢擧ノ件」, 『外務省警察史-支那ノ部(未定稿)』(『外務特殊文書』 28, 845~857쪽) ; 內務省警保局, 「在上海留朝鮮人の不穩狀況」, 『社會運動の狀況』(1933年)(『資料集成』 2, 847쪽) ; 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아나키즘운동사』, 341쪽 ; 司法省刑事局 編, 「上海及南京地方に於ける朝鮮人の一般狀況と最近の不逞鮮人の思想運動」(三木今二의 1937년 보고)(『思想報告集』 其の三, 26쪽) ; 「在支不逞團加入活動事件」, 『思想彙報』 25, 1940년 12월, 214쪽 ; 「오남기 아나운동 약력」.☞
[註 93]「在支不逞團加入活動事件」, 『思想彙報』 25, 1940년 12월, 213~214쪽 ; 「李容俊의 판결문」(『독립운동사자료집』 11, 847쪽) ; 內務省警保局, 「在上海留朝鮮人の不穩狀況」, 『社會運動の狀況』(1933年)(『資料集成』 2, 841~842쪽).☞
[註 96]「嚴亨淳·李圭虎의 판결문」(1936年 刑控 第95號)(『독립운동사자료집』 11, 839쪽) ; 「無政府主義運動事件」, 『思想彙報』 6, 1936, 225쪽 ; 「在上海總領事館ニ於ケル特高警察事務狀況」(1937年 12月末 調査)(『外務特殊文書』 27, 784쪽).☞
[註 97]「在支無政府主義者의 外患事件」, 『思想彙報』 21, 1939년 12월, 272쪽 ; 「朴濟彩의 판결문」(1939년 刑控 제1015호)(『독립운동사자료집』 11, 844~845쪽).☞
[註 98]『동아일보』 1936년 3월 8일자 ; 司法省刑事局, 「上海及南京地方に於ける朝鮮人の一般狀況と最近の不逞鮮人の思想運動」(三木今二의 1937년 보고)(『思想報告集』 其の三, 24·26~27쪽) ; 內務省警保局, 「1936年の在支不逞鮮人の不穩策動狀況」, 『社會運動ノ狀況』(1936年)(金正明, 『朝鮮獨立運動』 2, 569쪽) ; 村田生, 「上海及南京方面ニ於ケル朝鮮人ノ思想狀況」, 『思想彙報』 7, 1936년 6월, 191쪽 ; 「在上海總領事館ニ於ケル特高警察事務狀況」(1937年 12月末 調査)(『外務特殊文書』 27, 786·793쪽) ; 「吳冕稙 외 4인의 판결문」 (1936년 刑控 제119호)(『독립운동사자료집』 11, 829쪽) ; 內務省警保局, 「1937年の在支不逞鮮人の不穩策動狀況」, 『社會運動ノ狀況』(1937年)(金正明, 『朝鮮獨立運動』 2, 607~608쪽) ; 在上海總領事館, 『朝鮮民族運動(未定稿)』 5-2(1933.1~1937.12)(『外務特殊文書』 27, 282쪽).☞
[註 104]『조선일보』 1928년 12월 28일자 ; 『自由聯合新聞』 1929년 2월 1일자 ; 『동아일보』 1928년 5월 10일, 1929년 2월 12일, 3월 13일, 10월 7일자.☞
[註 105]「在上海總領事館ニ於ケル特高警察事務狀況」(1937年 12月末 調査)(『外務特殊文書』 27, 789쪽) ; 村田生, 「上海及南京方面ニ於ケル朝鮮人ノ思想狀況」, 『思想彙報』 7, 1936, 177쪽.☞
[註 106]『흑색신문』 1933년 12월 31일자 ; 林友,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운동 개황」 ; 『동아일보』 1933년 11월 1일자 ; 村田生, 「上海及南京方面ニ於ケル朝鮮人ノ思想狀況」, 『思想彙報』 7, 1936, 177~178쪽 ; 「上海六三亭事件 판결문」(『義士 元心昌』, 82~83쪽) ; 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아나키즘운동사』, 340·344~345쪽 ; 이정규, 『우관문존』, 62쪽 ; 김학준 편집해설·이정식 면담,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319~320쪽 ; 在上海總領事館, 「有吉公使暗殺陰謀無政府主義者檢擧ノ件」, 『外務省警察史-支那ノ部(未定稿)』(『外務特殊文書』 28, 837~839·852~853쪽) ; 「在上海總領事館ニ於ケル特高警察事務狀況」(1937年 12月末 調査)(『外務特殊文書』 27, 789~790쪽) ; 內務省警保局, 「在上海留朝鮮人の不穩狀況」, 『社會運動の狀況』(1933年)(『資料集成』 2, 847~848쪽) ; 內務省警保局, 「1937年の在支不逞鮮人の不穩策動狀況」, 『社會運動ノ狀況』(1937年)(金正明 編, 『朝鮮獨立運動』 2, 607~608쪽) ; 金正柱, 『朝鮮統治史料』 10, 871~872쪽 ; 정화암,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 134쪽 ; 司法省刑事局, 「中華民國南京及上海地方に於ける不逞朝鮮人團體の文書活動」(三木今二의 1937년 보고)(『思想報告集』 其の三, 37쪽).☞
[註 107]정화암,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 134쪽 ; 外務省 警察局, 『朝鮮民族運動史(未定稿)』 6, 高麗書林, 1989, 856~857朝鮮民族運動史(未定稿) ; 이정규, 『우관문존』, 62쪽.☞
[註 109]「在上海總領事館ニ於ケル特高警察事務狀況」(1937年 12月末 調査)(『外務特殊文書』 27, 790쪽 ; 이정규, 『우관문존』, 63쪽 ; 在上海總領事館, 「有吉公使暗殺陰謀無政府主義者檢擧ノ件」, 『外務省警察史-支那ノ部(未定稿)』(『外務特殊文書』 28, 853~854쪽.☞
[註 110]『흑색신문』 1933년 12월 31일자 ; 林友,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운동 개황」 ; 「上海 六三亭사건의 판결문」(『의사 원심창』, 79~87쪽) ; 「吳冕稙 외 4인의 판결문」(1936년 刑控 제119호)(『독립운동사자료집』 11, 825~826쪽) ; 「嚴亨淳·李圭虎의 판결문」(1936년 刑控 제95호)(『독립운동사자료집』 11, 838쪽) ; 「李容俊의 판결문」(『독립운동사자료집』 11, 848~849쪽) ; 在上海總領事館, 「有吉公使暗殺陰謀無政府主義者檢擧ノ件」, 『外務省警察史-支那ノ部(未定稿)』(『外務特殊文書』 28, 828~871朝鮮民族運動史(未定稿)) ; 在上海總領事館 編, 「有吉公使暗殺陰謀事件公判狀況」, 『外務省警察史-支那ノ部(未定稿)』(『外務特殊文書』 28, 873~880쪽) ; 「在上海總領事館ニ於ケル特高警察事務狀況」(1937年 12月末 調査)(『外務特殊文書』 27, 791~792쪽) ; 『매일신보』 1937년 4월 16일자 ; 坪江汕二, 『朝鮮民族獨立運動秘史』, 120쪽 ; 梁一東, 「元心昌傳」, 『自由聯合新聞』 1934년 8월 5일 ; 「無政府主義運動事件」, 『思想彙報』 6, 1936, 224쪽 ; 『思想彙報』 25, 1940, 214~215쪽 ; 「在上海アナ系鮮人の有吉公使暗殺計劃檢擧」, 『特高月報』, 1933, 787쪽(『資料集成』 2, 860~861쪽) ; 內務省警保局, 「在上海留朝鮮人の不穩狀況」, 『社會運動の狀況』(1933年)(『資料集成』 2, 847~848쪽) ; 內務省警保局, 「在留朝鮮人運動」, 『社會運動の狀況』(1933年)(『資料集成』 2, 787쪽) ; 정화암,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 151~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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