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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예결해(射藝訣解)」의 작성 배경 - 문무의 합작품
2018. 11. 3.
화랑정 김기훈
목 차 -
서 론
서영보: 조선 후기의 대표적 명문 가문 출신
2. 이춘기 : 활쏘기로 입신 양명한 조선 후기의 무인
3. ‘사예결해’의 작성 시점: 정조 원년 (1777)
결 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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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전통 시대의 사법에 관한 글은 그리 많지 않다. 오랫동안 국궁계에서는 1929년에 발간된 조선의 궁술이 거의 유일한 사법 교범이었다. 그러다가 최근들어 조선시대 평양감영에서 복각한 사법비전공하(射法祕傳攻瑕)를 필두로 장언식의 정사론(正射論), 서유구의 「사결(射訣)」 등이 발굴되고 번역 소개 되면서 우리나라 전통 사법의 다양한 모습과 아울러 중국 사법과의 교류 흔적 또한 조금씩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오늘 소개하려는 서영보의 「사예결해(射藝訣解)」는 그간 국궁계에는 전혀 알려진 바 없었던 내용이다. 앞으로 이 작품도 우리나라의 척박한 고전 사법 세계에 새롭게 뿌려진 씨알 하나가 될 것이다.
이 「사예결해」는 서영보가 “세상에 그를 대적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사예가 출중한 웅천 현감 이춘기에게 활쏘기의 비법을 묻고 이를 요결 15조와 해설 5조로 정리해 놓은 것이다. 원문은 한국고전종합 DB에서 찾아 볼 수 있고, 「죽석관유집3」(허벽 번역, 한국고전번역원, 2017)에 번역문이 실려 있어 그 내용을 일별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국역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런 세미나를 하게 된 것은 한문 전문가의 번역문만으로는 오늘날 우리가 실제로 참고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하지 못하다는 한계를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활을 실제로 오랫동안 쏘아 오신 분들의 참여 속에 전문적이고 실용적인 관점에서 재검토되고 해석될 필요가 대두되었다. 일종의 협업에 대한 필요성과 그 협업의 결과가 오늘 이런 자리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 작품은 다른 사법서에 비하면 훨씬 분량이 적다. 원문은 총 940자로서 A4 용지 두 쪽 정도의 분량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는 체계를 갖춘 본격적인 사법 교범은 아니다. 그러나 영조 말 최고의 명궁이었던 이춘기(李春琦)가 전수한 활쏘기의 비결을 미래 최고의 정치가요 문장가로 커 나갈 젊은 서영보(徐榮輔)의 글을 통하여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사법 고전들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위상을 지니고 있다. 전통 활쏘기에 대한 당대 최고 무인의 노하우를 당대 최고의 문신이 글로 정리하여 남겨 놓았다는 점에서 이 「사예결해」는 당대 최고 ‘문무의 합작품’이었다. 무관이 구어로 설명한 사법을 문신이 한문으로 바꾸어 전달하는 합동 작업의 결과물인 것이다.
본고는 앞으로 있을 「사예결해」의 내용 검토에 앞서, 이 작품의 작성 배경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작품 배경을 세가지 문제 즉 「사예결해」의 작성자인 서영보는 누구인가, 그에게 사법을 설명해 준 이춘기가 누구인가, 그리고 언제 이 문장이 작성되었을까 라는 세가지 문제를 통해서 살펴보려 한다. 그 과정에서 문신 서영보의 활쏘기 대한 깊은 관심과 아울러 무인 이춘기의 출중한 활쏘기 기량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서영보: 조선 후기의 대표적 명문 가문 출신
서영보 (徐榮輔, 1759 ~ 1816)의 본관은 대구(달성), 자는 경세(慶世), 호는 죽석(竹石)이며, 시호는 문헌 (文憲)이다. 그의 집안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명문가였다. 고조부인 서종태가 영의정, 증조부인 서명균이 좌의정, 조부인 서지수가 영의정을 지낸 “삼대 정승집”이었다. 이 집안은 이어서 “삼대 대제학“을 배출하였다. 그의 아버지 서유신 (徐有臣, 1735-1800)은 대제학을 지냈고, 서영보 자신도 대제학을 지냈으며, 그의 둘째 아들 서기순 또한 대제학에 올랐던 것이다.
순조 때 대제학을 지낸 서영보 자신은 정조 –순조 시대를 풍미하였던 학자-정치가요, 문장가요, 서예가였다. 1788년 (정조 12) 殿講에서 수석을 하여 직부전시로 1789년 (정조 13) 식년 문과를 치루어 장원을 하였다. 이어서 규장각 직각(정조 14년), 성균관 대사성(정조 17년), 영변부사(정조 19년), 창원 부사 (정조 21년), 양주목사(정조 21년), 황해도 관찰사 (정조 24년, 1800)를 거쳤다. 순조 연간에 경기 관찰사(순조 3년, 1803), 예조참판(선조 4년), 형조판서 (순조 5년), 호조판서(순조 5년), 평안도 관찰사 (순조 8년)를 거쳐 예문관, 홍문과 대제학 (순조 9년), 수원부 부사(순조 15년)를 거쳐 보국숭록대부로 승품되던 순조 16년 (1816)해에 생을 마감하였다. [조사를 하던 중 현역 국회의원인 서청원 씨가 서영보의 6대 봉사손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예결해」의 저자가 현재 우리가 알 수 있는 누군가와 연결된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大邱 徐氏 竹石 徐榮輔-삼대 정숭 삼대 대제학 배출 명문가“, 주간한국 <종가기행 26>, 2006.11.27. ]
이처럼 그는 중앙 관직만이 아니라 지방관으로도 많이 다니면서 재정과 군정 등 국가 통치의 실무적인 문제에 많은 경험을 쌓았다. 그의 학식과 이런 경험이 토대가 되어 순조 8년(1808)에 또 다른 명신인 심상규(沈象奎, 1766-1838)와 더불어 만기요람 (萬機要覽) 11권 (재용편 6권, 군정편 5권)을 지었다. 이 책은 당시의 국왕과 최고 정책 결정자들이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최고의 정책 참고서였다. 지금도 조선 후기를 간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필수적인 사료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서영보의 명문장은 죽석관 유집 속에 들어 있는 많은 시문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그 작품 중의 하나인 금강산 유람기 「풍악기」는 당대에도 뛰어난 명문장으로 장안에 회자 되었던 작품이다. 그는 서법에도 뛰어났는데, 창덕궁의 법전(法殿)인 인정전(仁政殿)의 현판은 바로 그의 글씨다. 1807년(순조 7) 춘당대에서 순조가 각신 및 승지 들과 활쏘기를 행한 것을 기록한 죽석봉교서첩(竹石奉敎書帖)에도 그의 유려한 필체가 남아 있다. [서영보 書, 죽석봉교서첩(竹石奉敎書帖), 규장각 (奎10210), 1807. ]
서영보의 문집인 죽석관유집 (竹石館遺集)은 그의 사후에 후손들이 그의 글을 모아 편찬한 것으로서 필사본 8책 (고려대 도서관 소장) 이다. 1책, 2책, 3책은 시문으로 구성되어 있고, 4책과 5책은 상소문 등을 포함하고 있다. 6책은 군정국방 등을 논하는 상주문 등을 싣고 있으며, 8책은 예기 각편에 대한 짧은 주석인 禮記箚錄 편이다. 「사예결해」가 들어 있는 것은 7책인데, 雜著와 外篇으로 나누어져 있고, 外篇에 이 「사예결해」가 들어있다. [한민섭, 「죽석관 유집 해제」, 한국고전번역원, 2013]
서영보가 언제부터 활쏘기에 관심을 가졌는가를 명확히 밝히기는 힘들다. 그의 가문 혹은 지인들이 활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말미암아 일찍부터 관심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18-19세기 활쏘기 교범인 「사결」을 지은 유명한 서유구(1764-1845)는 그의 집안이었다. 저술을 할 정도로 활쏘기에 대해 관심을 자졌던 서씨 집안의 분위기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서영보의 활에 대한 관심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자료에서 그 증거를 찾기는 아직 힘들다. [사예결해의 작성 시기는 이런 점에서 중요하다. 서영보의 활에 대한 관심이 시작된 시기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
현재까지의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서영보가 가장 직접적으로 활쏘기에 많이 노출되고 영향을 받았던 시기는 문과 급제 후에 규장각 각신으로 들어 간 시절부터라는 것이다. 정조가 문무겸전을 선비들의 이상으로 주장하면서 특히 규장각 문신들에게 활쏘기를 익힐 것을 강조한 사실은 너무나 유명하다. 정조가 자신의 핵심 브레인들을 모아 놓고 정책을 연구하고 개발시키던 기관인 규장각은 활쏘기라는 관점에서 보면 규장각 문신들의 활쏘기 교습장이었다. 각신들을 데리고 수시로 활 대회를 열었던 국왕의 성화 때문에 채제공, 정약용 등 당시의 대표적 문신들이 훈련도감에서 특수 훈련을 받아가며 활을 익힌 사정은 그들의 글을 통하여 우리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서영보는 문과 장원으로 관직에 발을 들인 후 바로 다음 해인 정조 14년(1790) 9월 규장각 직각이 된다. 이로부터 정조 19년 (1795) 6월 영변부사가 되기까지 서영보는 규장각 각신으로서 혹은 승지, 대사헌 등의 직책을 지닌 근신으로서 정조가 개최하는 각종 활쏘기 행사에 참여하게 된다. 한 두가지의 예를 들어보려 한다.
정조 16년 (1792) 10월 30일에 정조가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유엽전(柳葉箭)으로 10순(巡)을 쏘아 49발을 맞혀 72분(分)을 얻었다. 정조는 자신의 활쏘기에 만족하여 대동한 각신과 신하들에게 고풍 (古風: 친사(親射)할 때 시신(侍臣)들에게 상을 내리던 일)을 내렸다. 당시 직각(直閣)인 서영보가 국왕이 은혜에 감사한 글을 지어 각판에 새겼는데, 그 탁본이 현재 규장각에 어사고풍첩 (御射古風帖)으로 전해지고 있다. [奎 10252]
그가 직접 활쏘기를 하고 상을 받은 일도 있다. 정조 17년(1793) 9월 9일 정조의 지시에 의하여 대규모의 춘당대 시사 (試射)가 열렸다. 이 때 서영보는 각신(檢校直閣)으로서 변에 1발을 맞혀 후전(帿箭) 시사에 입격하고 상으로 궁전(弓箭) 1부를 사급 받았다. [같은 날 병조에서 실시한 유엽전 시사에서 이춘기는 관에 1발 변에 1발을 맞혀 아마첩 1척을 받았다.]
정조의 근신으로 재직하면서 활쏘기에 대해 한껏 노출되었던 서용보는 정조 19년(1795) 영변부사로 나가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이를 보급하는데도 앞장섰다. 영변부사로 취임한 서용보는 ‘백성들이 따라야 할 다섯가지 덕목’ 이라는 「교민오칙(敎民五則)」을 지어서 반포하였다. 부모 섬김 (事親), 어른 공경(敬長), 업을 닦음(修業), 바른 몸가짐(持身), 집안 다스림(治家)의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백상들이 마땅히 따라야 할 바를 적시하고 있다. 그 중 선비들이 닦아야 할 업 중에 하나로 활쏘기를 들고 있다. “활쏘기 역시 선비의 일이며, 성인이 덕을 관찰하였던 방법이다. 더구나 무사는 활쏘기로 업을 삼으니, 더욱 태만해서는 안된다.” (䠶者亦士之事也。聖人所觀德也。况武士以射爲業。尤不可怠忽) [「敎民五則」, 竹石館遺集 7冊 外篇]
서영보는 영변부사 이후에도 관서 지방의 관리로 자주 나갔다. [황해도 관찰사 (1800), 평안도 관찰사 (1808)] 부임할 때마다 그는 국방을 위해서 그 지역 백성들에게 활쏘기를 장려하고 익히게 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의 유고 속에 들어 있는 「관서응지계」(關西應旨啓: 관서에서 전지에 응하여 올린 계), 「관서전수도설」 (關西戰守圖設) 속에는 그의 이러한 주장이 잘 반영되어 있다. 순조 연간에 작성된 계라고 생각되는 「관서응지계」 속에는 임지에 부임하여 그가 얼마나 활쏘기를 장려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는가를 회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신이 성상[순조]께 하직 인사를 하던 날 삼가 연석(宴席)의 하교를 받들었는데, 말씀하시기를 “서북(西北: 평안도)은 변방의 땅임으로 마땅히 궁마(弓馬)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 문무(文武)의 도는 어느 한쪽이라도 폐해서는 안 된다. 서북 또한 어찌 문(文)을 숭상하지 않겠는가마는, 무(武)를 숭상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여야 한다.” 하시고, 이어서 신에게 무를 숭상하는 정사에 유의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신은 이 말씀을 듣고 황공하여 마음에 깊이 새겼고, 임지에 부임한 후 먼저 영하(營下)의 군교(軍校)에 대해 시사(試射)하고 도내의 무사를 시취(試取)하였습니다. 관내를 순시할 때 장관(長官)이 다스리는 네 곳의 도회(都會: 의주,영변, 안주, 정주) 및 산성이나 관방(關防)의 고을은 가는 곳마다 시사하는 등 응당 행하여야 하는 일에 감히 정성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를 만나러 오는 열읍의 수령들에게 성교(聖敎)의 내용을 외워서 전해주어, 그들로 하여금 각자 무(武)를권장하는 정사에 마음을 다하도록 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關西應旨啓」 죽석관유집 3 (허벽 번역, 2017) 53-54]
이상 살펴본 몇가지 사례들을 통하여 우리는 서영보가 규장각 각신으로서 그 자신이 활쏘기를 익혔을뿐만 아니라, 서북 지방 등 외지로 부임하는 곳마다 활쏘기를 적극 장려하고 보급하였던 문신 관료였음을 알 수 있다. 정조가 그렇게 근신들에게 역점을 두고 강조하였던 문무겸전의 이상적인 관료상을 서영보에게서 찾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2. 이춘기 : 활쏘기로 입신 양명한 조선 후기의 무인
서영보가 사법을 물어본 이춘기 (李春琦, 1737 ~ [1799] ~?)는 연배만으로 치면 서영보 보다 22살이 더 많은 아버지 뻘이다. 본관은 함평(咸平)이고, 자(字)는 성장(聖章)이었으며, 거주지는 한성[京]이었다. 그의 출생 연대는 영조 13년 (1737)으로 명확한데, 사망 연대는 확실한 기록이 없다. 다만 정조 23년 (1799)에 기추와 편추에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여 상을 받은 기록이 있어, 그의 사망은 순조 년간인 1800년대 전반기로 추정된다.
이춘기는 그의 출중한 활쏘기 실력만으로 당상관 종1품 숭록대부까지 올라 간 무인이었다. 우리에게는 매우 생소한 인물이지만, 뜻밖에도 그의 초상화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왕조 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조선 왕조의 역사 기록에 적지 않은 흔적도 남기고 있다. [중복된 기사도 있지만, 승정원 일기에 32건, 일성록에 14건, 왕조실록에 1건이 검색된다.]
그가 조선 왕조 기록물에 몇몇 흔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 그의 뛰어난 활쏘기 실력과 연관된다. 그는 영조 32년 (175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무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갑과(甲科) 1[壯元]위(1/85) ; 甲3‧乙7‧丙75)] 무과 응시할 때 그의 전력은 무관직인 부사과(副司果) (종6품) 였다. 부친은 嘉善大夫 行所斤鎭水軍僉節制使 李鳳徵이다. [부친의 성명과 경력은 영조 50년(1774) 登俊試榜에 의함. 수군첨절제사는 종3품 외관직. 소근진은 태안군 소근포진으로 첨절제사영이 설치되어 있었다. ] 무과 장원 급제자는 동반(문관) 6품직을 제수받게 되었음으로, 그는 慕華館의 內資主簿 [왕실 소용 물품을 관장하던 내자시의 주부. 종6품 동반 정직]가 되었다. [승정원일기, 영조 32년 (1756) 윤9월 12일]
이춘기의 경력에서 가장 중요시 되어야 하는 사건은 영조 50년(1774) 등준시 (登俊試)이다. 등준시를 살피기에 앞서 우선 그 이전의 그에 관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 영조38년 (1762) 2월 23일: 영조가 모화관에 거둥하여 시행한 무신 당상 시사에서 이춘기는 10分을 획득한 상으로 兒馬帖을 하사받았다.
○ 영조 41년 (1765) 9월 19일: 가선대부 이춘기가 35시내 16중 19분을 획득하고, 4중도 많았다고 하여 특별히 반숙마를 하사 하였다. (嘉善李春琦, 三十五矢內十六中, 十九分四中者多, 親臨 試射, 事體異焉, 特賜半熟馬)
○ 영조 47년 (1771) 4월 11일: 가선 이춘기가 폭력 혐의로 형조에 고소되었으나 이춘기가 일찍이 동반 정직을 지냈음으로, 조관으로 간주되어 의금부로 이첩되다. 의금부에서 나인(拿囚)하다.
○ 영조 47년 (1771) 5월 3일: 의금부에서 이춘기를 충청도 태안군 하천 역으로 3년 귀양을 건의하여 국왕의 재가를 받다.
○ 영조 47년(1771) 7월 29일: 의금부가 많은 죄인들의 특사를 요청하여 왕의 허락을 받았는데, 태안으로 유배 중이었던 이춘기도 이 과정에서 석방되었다.
이상의 기록으로 볼 때, 이춘기는 영조 41년 (1765)에는 이미 가선대부의 품계에 올라 있었다. 이 시기 그의 직책은 주부(主簿) 이상의 기록은 없다. 실직의 승진은 없고 품계의 상승만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이춘기가 종6품에서 종2품 가선대부까지 품계가 상승한 것은 다양한 시사(試射)에서 좋은 성적을 내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폭력 행위로 인하여 일시 유배 되기는 하였지만, 명궁으로서의 이춘기의 위상은 일찍부터 세워지고 있었다.
명궁 이춘기의 명성이 전국적으로 더욱 확실하게 알려지게 된 것은 영조 50년(1774)부터이다. 영조는 등극 50주년을 기념하여 1774년 1월 15일에 종친과 문무관들을 대상으로 특별 과거인 문무과 등준시 (登俊試)를 실시하였다. 여기에서 이춘기는 무과 장원(1/18)을 차지하였다. 이 때 실시된 무과의 규정은 후전(帿箭)으로 과녁을 1번 이상 명중시켜야 합격하였고, 거리는 130보였다. 갑과 1명, 을과 3명, 병과 14명을 선발하였는데, 이들 18명은 모두 무과급제자로서 현임 훈련대장, 금위영 대장, 부총관이, 전임 수사와 병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날 이춘기는 3중을 맞혀 장원을 하였다. 영조는 “무과 장원 李春琦에게 가자(加資)하고 가설 동지중추부사(加設 同知中樞府事)로서 군직(軍職)에 차정하였다.” 즉, 이춘기는 정2품 “자헌대부 행동지중추부사 (資憲大夫 行同知中樞府事)”가 되고, 동시에 국왕의 최근접호위무사단인 별군직으로 특별 채용된 것이다. 파격적인 대우를 받게 된 것이다.
뿐만아니라, 영조는 이 때 뽑힌 문과 15인, 무과 18인의 화상을 그려 도첩으로 만들도록 지시하였다. 이 때 그려진 이춘기의 초상화가 국립중앙박물관이 2011년에 발간한 서화유물도록 제 17집 조선시대 초상화 III 에 수록되어 있다. 이 도록 덕택에 우리는 당시 38세인 이춘기의 초상화를 볼 수 있는 뜻밖의 행운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丙戌後三百九年甲午再登俊試榜 (병술후삼백구년갑오재등준시방), 규장각(奎. 485). 등준시에 대한 연구로는 장진아의 「<<登俊試武科圖像帖>>의 功臣圖像적 성격」 ( 미술자료 78, 2009)이 참고할 만하다.]
이춘기의 활쏘기 실력은 등준시를 기점으로 절정 단계에 도달하였다. 다음과 같이 연속적으로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
○ 영조 50년(1774) 4월 10일: 오늘의 군직 (軍職) 춘등시사(春等試射)에서 정월 등준 시사에서 장원을 한 이춘기가 30순 내에서 두 번의 10순에서는 모두 51분을 받았고, 편전은 2중을 맞혔다. 이충방(李忠邦)의 전례에 따라 처음 51분은 자급을 올려주고, 두 번째 51분은 숙마 한필을 지급하다. {정2품 상계인 正憲大夫로 올라 간 것이다}
○ 영조 50년 (1774) 9월 4일: 금일 군직 시사시 (軍職試射時)에 군직 (軍職) 이춘기(李春琦)가 유엽전 10순 56분을 획득하여 가자(加資)하였다.
○ 영조 50년 (1774) 9월 9일: 지난 번의 가자(加資) 명령에 따라 이조에서 “별군직 이춘기에게 (종1품 하계인) 숭정대부 품계를 부여”(別軍職李春琦今加崇政) 하였다.
○ 영조 51년 (1775) 4월 2일: 군직 춘등시사시 (軍職春等試射時), 숭정대부 이춘기(崇政李春琦) 가 첫 십순 50분을 획득하였는데, 예에 따라 가자 (加資)하고 나머지 십순 (10순 50분)은 고례에 따라 숙마 한 필을 지급하였다. [따라서 이춘기는 이 때 종1품 상계인 숭록대부에 오른다. ]
○ 영조 51년 (1775) 6월 11일: 금일 내승군직선전관 시사시(內乘軍職宣傳官試射時) 군직 이춘기(軍職李春琦)가 편전 관1중 변1중하였으나, 자궁(資窮)임으로 숙마 한 필을 지급하였다.
○ 영조 51년(1775) 9월 5일: 금일 군직 중일시(今日軍職中日時), 이춘기가 10순에 51분을 획득하여 숙마 1필을 지급하였다.
준등시가 있었던 영조 50년부터 그 다음 해인 영조 51년에 이르기 까지 이춘기는 각 종 試射에서 우수한 성적을 얻어 품계가 오르거나 혹은 숙마를 상으로 받고 있다. 두 해 동안 정2품 상하 품계와 종1품 상하 품계를 다 휩쓸어 버렸다. 종1품 숭록대부가 이춘기가 올라갈 수 있는 마지막 품계로서 이 단계를 자궁(資窮)이라고 하는데, 영조 51년 4월 초 이 품계에 도달하였다. 그후로는 활을 잘 쏘아도 품계는 더 이상 오르지 않고, 숙마 등 물품만을 상으로 받았다. 이 시절 이춘기의 사예 실력은 그야말로 최절정기였다고 보여진다.
이춘기의 활쏘기에 대한 명성은 영조를 이어 등극한 정조에 의해 재확인 된다. 정조 원년 (1777) 7월 2일 이춘기는 웅천 현감으로 임명되었다. 다음 날 새로 부임하는 수령들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정조는 이춘기가 앞으로 나오자 “그대는 별군직(別軍職)으로 평소 활을 잘 쏜다는 말을 듣고 있으니, 활 잘 쏘는 방법을 다스리는 방법에 그대로 적용하라.”하였다. (熊川縣監 李春琦進前。予曰。汝以別軍職。素稱善射者。以善射之法。推於善治之道也.) 영조 후반기에 정조는 세손의 자격으로 항상 영조를 수반하였다. 그러므로 이춘기가 영조 50년 준등시에서 장원을 하던 때부터, 각종 시사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내면서 상을 휩쓸어 가던 지난 2년 간을 잘 지켜 보아왔던 정조였다. 정조의 ’선사자(善射者)‘라는 인정은 명궁 서영보에 대한 최고의 칭찬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정조의 격려를 받으며 떠난 웅천현감 부임은 안타갑게도 실현되지 못하였다.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별군직 조직 정비 여파가 이춘기의 현감 직위를 박탈한 것 같다. 7월 16일 다른 사람 (李邦祚)이 현감으로 임명된다. [승정원일기 정조 1년 (1777) 7월 16일 吏批 ... 李邦祚 爲熊川縣監;
정조 1년 (1777) 8월 1일 熊川縣監 李邦祚 임금에게 부임 인사를 하고 있다. (以次進伏訖) ] 이춘기는 딱 2 주만 현감의 직위를 갖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별군직에서도 태거(汰去)되고, 현감 부임도 못해보고 바로 파직당한 이춘기가 기록에 다시 등장하는 것은 정조 3년 부터이다.
○ 정조 3년 (1779) 8월 10일: 신유 1779년 이춘기 외에 11명이 병조의 당상군관에 임명된다. [승정원일기 정조 3년 8월 10일 조 : 堂上軍官 李春琦·王道平·金相取·朴泰俊·金喆勳·李洸·金鴻齡·申碩徵·韓弘道·方處寬·金鎰煥·朴萬齡,]
○ 정조 5년 (1781) 4월 26일: 청룡도를 완전히 들어 휘두를 수 있는 당상군관 이춘기 등에게 목면 두 필씩을 시상하겠다고 병조가 보고하였다. [승정원 일기 정조 5년 4월 26일 조 以兵曹言啓曰, 依傳敎, 靑龍刀能擧堂上軍官李春琦·林春興, 木綿各二匹,]
○ 정조 6년 (1782) 12월 22일: 昨日 內試射時에 本曹堂上軍官 崇祿 李春琦가 柳葉箭貫二中邊一中으로 加資토록 하였는데, 李春琦가 이미 資窮이 되었으니, 어떻게 할지 병조에서 국왕에게 묻고, 국왕은 내외직을 막론하고 자원하는 자리를 적절하게 제수하도록 지시하였다. [승정원 일기 정조 6년 (1782) 12월 22일 조: 李在學, 以兵曹言啓曰, 昨日內試射時, 本曹堂上軍官崇祿李春琦, 以柳葉箭貫二中邊一中加資事, 判下矣。所當送吏曹擧行, 而李春琦, 旣已資窮, 何以爲之? 敢稟。傳曰, 無論內外窠, 從自願相當職除授]
○ 정조 8년(1784) 윤3월 1일: 병조에서 이춘기를 우현첨사(牛峴僉使)로 임명하였다. [승정원일기 정조 8년(1784) 윤3월 1일 조]
○ 정조 12년(1788) 9월 30일: 중순 상시재(中旬賞試才)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당상군관 이춘기 등에게 목(木)과 포(布)를 등급을 나누어 시상하였다는 병조의 보고가 있었다.
○ 정조 13년 1789년 2월 19일: 정조가 친림한 춘당대 별시사에서 유엽전 쏘기로 시상을 받는다. 유엽전 입격 별단에 보면 ‘병조의 당상 군관(堂上軍官)인 교련관(敎鍊官) 숭록대부(崇錄大夫) 이춘기(李春琦) 변에 1발을 맞혀서 부장궁(不粧弓) 1장을 받았다.’ 고 기록되어 있다.
○ 정조 13년 (1789) 10월 10일: 이춘기 등 24명을 시상하였는데, 자궁자는 숙마첩(熟馬帖) 한 부씩을 사급하였다. 자궁에 속한 이춘기도 숙마첩을 받았을 것이다.
○ 정조 17년(1793) 9월 9일: 병조의 ‘당상군관 숭록대부 이춘기가 ‘관에 1발 변에 1발을 맞혀 아마첩 1척을 받았다’. [ 이 날 시행된 활쏘기에는 규장각 검교직각인 서영보도 참석하고 있다. 변에 1발을 맞혀 궁전 1부를 상으로 받는다.]
○ 정조 19년(1795) 3월 10일: 병조에서 시행한 중순 시사에서 월도(월도) 상상(上上)의 기록을 수립하여 목 3필을 사급받았다.
○ 정조 20년(1796) 12월 20일: 평안도 황룡별장(黃龍別將)직을 제수받았다.
○ 정조 23년(1799) 9월 18일: 병조의 중순시(中旬試)에서 기추에서 2개를 맞히고 편추에서 6개를 맞혀 목 4필을 사급받았다. 당시 이춘기는 나이가 62세인 노장이었다. 말을 타고 풀로 만든 인형 과녁을 맞히는 기추와 편곤으로 목표물을 타격하는 편추에서 상을 받을 만큼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쟁쟁한 실력을 과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이춘기는 영조 대 말기에 최고의 명성을 떨쳤으며, 왕의 최측근호위 무사인 별군직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정조 원년에 웅천현감 제수를 받았으나 별군직 숙정 작업의 여파로 곧 해임되었다. 그 후 정조 3년부터 정조 23년(1799)까지 계속 정1품 숭록대부로서 주로 병조의 당상군관으로 재직하였다. 이 기간에 우현 현감, 황룡별장의 외직으로 나가기도 하였지만, 보직이 끝나면 다시 병조의 당상군관으로 복귀하였다. 병조에서 시행한 각종 시사에서 우수한 성적을 발휘하여 수상자 명단에 자주 이름을 올렸다. 다만 이 때는 활쏘기 만이 아니라, 청룡도나 월도 들어 휘두르기, 기추 등 다양한 무예 종목에 통달한 원로 무관으로서의 기량을 발휘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3. ‘사예결해’의 작성 시점: 정조 원년 (1777)
그러면 서영보가 ‘사예결해’를 작성한 시점은 언제 였을까. 작성연대를 적어 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 시기를 확정하기는 곤란하다. 현재 발견되는 기록에 토대를 두고 추정해 볼 수 밖에 없다.
서영보가 ‘사예결해’를 작성한 시기를 짐작해 볼 수 있는 단서는 그의 서문이다.
웅천현감 이춘기는 활쏘기에 정통하여 세상에 그와 대적할 사람이 없다. 내가 일찍이 활쏘는 법에 대하여 물으니...... 나는 그의 말이 도에 합치하는 것에 탄복하여 마침내 들은 바를 기록하여 五解十五訣을 지었다. (李熊川春琦。精於射藝。世無其對。余甞叩之以㳒。...... 余歎其言之合於道也。遂書其所聞。作五解十五訣。)
작성 시기를 추정하기 위하여 이 문장에서 이용할 수 있는 실마리는 두가지다. 첫째는 서영보가 이춘기를 당시 조선 최고의 사예 실력자로 간주할 만큼 이춘기의 활쏘기 실력이 절정에 달하였을 때, 그에게 활쏘기의 비결을 물어 보았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서영보가 이 문장을 작성할 때 서영보의 직위가 웅천 현감이었다는 점이다. 이 두 번째 실마리가 사실은 보다 더 결정적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춘기는 정조 1년 7월 2일 웅천현감을 제수받고, 다음 날 정조에게 하직 인사까지 하였다. 그리고 정조 3년 병조 당상관을 제수 받는다. 필자는 이러한 실록, 일성록, 승정원 일기의 기록에 따라 처음에는 이춘기가 2년정도 웅천현감을 지냈을 것이고, 따라서 서영보가 대략 정조 1년 (1777)부터 정조 3년(1779) 사이에 이 글을 작성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그리고 이춘기의 웅천현감 재직 사실을 재확인하려고 웅천읍지를 찾아보았다. 마침 진해문화원에서 몇 종류의 읍지를 수집하고, 일부는 국역도 하여 웅천현 읍지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자료가 있었다. 현감 자리는 무관 6품자리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 의외의 사실을 발견하였다. 부록으로 수집된 5종의 읍지를 다 뒤져 보았으나, 현감에 이춘기의 이름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한 읍지에 보니, 정조연간의 웅천현감은 李邦祚, 丁志悅, 李汝翼 순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 熊川郡 誌 官案(李朝) 「嶠南誌券之七十三」(국역) 웅천현읍지, 109) ]
왜 이런 착오가 있었을까 이상하게 생각하며, 이번에는 역으로 승정원 일기를 뒤져 이들 현감들의 보직 관계를 살펴보았다. 마침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승정원 일기의 기록에 의하면,
정조 1년 (1777) 7월 16일: 이방조 (李邦祚)가 웅천현감 제수를 받는다.
정조 1년 (1777) 8월 1일: 웅천현감 이방조가 정조에게 부임 인사를 하고 있다.
정조 2년 (1778) 7월 1일: 이방조가 공산영장(公山營將)으로 발령을 받고,
정조 2년 (1778) 7월 1일: 후임으로 정지열(丁志悅)이 웅천현감 제수를 받게 된다.
정조 4년 (1780) 8월 27일: 정지열이 뇌물혐의로 파면되고 그의 후임으로 이여익 (李汝翼)이 임명되었다.
앞서 인용한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이춘기는 7월 2일 임명되고, 7월 15일 해임되었던 것이다. 딱 2주만 웅천현감의 직위를 갖고 있었다. 이렇듯 현지에 부임해보지도 못하고 바로 파직되었기에 그의 이름이 웅천 읍지 현감 조에 나오지 않은 것이다.
이춘기가 갑자기 해임된 사연은 기록에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정조의 별군직 숙정 작업과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등극과 동시에 별군직의 문제점에 주목하였다. 이들이 임금의 최측근 경호요원이라는 직위를 이용한 권력 남용, 질서 문란 등. 즉위년(1776)부터 태거(汰去) 시키는 자들이 많았다. 그러다가 대대적인 숙정 작업을 실시하였다.[장필기, 「朝鮮後期 別軍職의 조직과 그 활동」, (사학연구 40집, 1989), .286-288] 숙정을 결심한 정조는 7월 15일 별군직(別軍職) 가운데 분수에 맞지 않게 별군직 자리를 차지한 자는 모두 태거(汰去) 즉 파면하도록 명하였다.
별군직 가운데 사족이나 내력이 있는 자를 제외한 이른바 백도(白徒), 잡류(雜流)와 액정서(掖庭署)의 천례(賤隷)로서 분수에 맞지 않게 차지한 자들은 모두 태거하고, 잡류로서 본청에서 구근(久勤)하여 현재 수령이나 변장으로 있는 자들도 모두 태거하라. [일성록 정조 1년(1777) 7월 15일]
이춘기가 파면된 사유가 적시된 기록은 없다. 다만 다음 자료에서 알 수 있듯이 정조는 이춘기의 업무능력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었다는 점은 알 수 있다. 그 결과 파직되었던 별군직의 일부 인원은 복직되었지만, 이춘기는 끝내 복직되지 못하였다.
“전 별군직 임세재는 연루된 정도가 그리 대단치 않은데다 여력(膂力)도 충분하니 별군직에 다시 소속시키라. 왕한정이 처음 수임(首任)을 맡아서 덮어둔 일을 적발해 낸 것은 실로 이춘기(李春琦)보다 훨씬 나을뿐더러 더구나 사무 처리에도 재능이 충분함에랴. 그의 순박한 사람 됨됨이에 대해서는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니 원래의 전지(傳旨)는 논하지 말라.” (일성록 정조 1년 (1777) 7월 16일)
이런 자료들을 토대로 추정해 본다면, 아마도 이춘기는 7월 15일 정조가 지시한 ‘본청에서 오랫동안 근무하여 현재 수령이나 변장으로 있는 자들’ 속에 포함되어 파직되었고, 그 직후에 재고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이춘기의 파직 사실은 별군직 선생안에 이춘기가 “정유(1777) 태거 (丁酉 汰去)”로 [「感戴廳先生案」, 奎9793] 기록된 것에서도 재확인된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춘기가 2주만에 웅천현감직에서 파직되고 말았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은 그 자체의 의미보다도, 「사예결해」의 작성 시기를 추정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서영보가 이춘기를 웅천현감으로 알고 있을 때 「사예결해」를 작성하였다면, 그 시기는 정조 원년 (1777) 7월 초, 7월 2일부터 15일 사이로 좁혀진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춘기가 활로 최고의 명성을 떨칠 때는 영조 50년(1774) 1월 준등시에서 무과 장원을 한 이후 영조 52년까지이다. 각종 시사에서 우수한 성적을 발휘하여 무관으로서 최고로 올라갈 수 있었던 종1품 숭록대부까지 품계가 올라갔고, 자궁(資窮)하여 더 이상 올라갈 수 없게 되자 숙마첩을 상으로 받던 시절이었다. 서영보가 이 시기의 이춘기를 “사예에 정통하여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라고 말할 만하다. 그러므로 ’일찍이’ 사법을 물어 보았다면, 이 시기 즉 영조 50년 (1774)부터 52년 (1776), 그리고 정조 원년(1777) 초 사이의 어느 시기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서영보가 들었던 내용을 15결 5해로 구성된 「사예결해」의 형태로 작성한 것은 정조 원년 (1777) 7월 초로 짐작된다.
이 시기는 묘하게도 서영보의 아버지 서유신이 벽파로 몰려 향리로 축출되던 시기와 일치한다. 정조 원년(1777) 7월 1일 서유신은 노성중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향리 방축 처벌을 받았다. [정조 실록 원년 (1777) 7월 1일] 그 전 해인 1776년 18세의 나이로 초시에 합격하였던 서영보는 복시 응시를 포기하고 1777년 19세 때 방축된 아버지를 따라 부평 오곡(梧谷)에 가서 빈궁한 생활을 하면서 과거공부에 몰두하였다. 아버지는 정조 8년 (1784)에 방축에서 풀려났지만, 서영보는 좀 더 머물러 공부를 하다가 29세가 되던 해인 정조 11년 (1787) 성남 고택으로 돌아온다. 그 다음해인 정조 12년 성군관 유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강(殿講)에서 장원을 하여 직부전시 자격을 얻었고, 정조 13년(1789)년에 문과 장원으로 과거에 합격하였다.
이런 서영보의 이력에 비추어 보면, 서영보가 1777년 7월 향리 방축된 아버지를 따라 성남에서 부천으로 거처를 옮기기 직전이거나 혹은 옮긴 후에 「사예결해」를 작성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옮긴 후라면 이춘기의 웅천현감 파직에 대한 소식을 당장은 못 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작성 시기를 7월 초로 못 박는것보다는 1777년으로 조금 두루뭉술하게 작성 연도를 잡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상의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서영보는 이춘기가 한창 전성기였던 영조 말 정조 초에 그에게 사법을 물었고, 이춘기가 잠시 웅천현감으로 제수를 받았던 정조 원년 1777년에 그 내용을 정리하여 「사예결해」를 작성하였다. 그는 그 때 일년 전에 초시에 합격한 19세의 젊은 선비였다. 이 사실은 장래 조선의 대제학으로 명성을 떨치게 될 서영보가 일찍부터 활쏘기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 론
「사예결해」의 작성 배경을 검토하기 위해서 세가지의 질문을 하고 그 답변을 찾아 가는 방식을 취했다. 그 답변을 요약하고, 미진한 과제를 제시하면서 마무리하려고 한다.
1) 서영보 (徐榮輔 : 1759-1816)는 누구인가: 조선 후기 (18세기-19세기) 영조, 정조, 순조 시대를 거치면서 “삼 정승, 삼 대제학”을 배출한 대표적인 명문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정조 13년 (1789) 문과 장원을 하면서 관직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가문의 후관을 일정하게 받으면서 정조 시대에는 규장각 각신, 영변 부사 등을 거치고 순조 시대에 들어 황해도, 평안도, 경기도 관찰사 등 외직과 호조판서 성균관 대제학 등 내직을 두루 거치면서 재정 국방 등에 관한 실무를 익혔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심상규와 더불어 편찬한 「만기요람」은 국왕과 고위 관리들의 정책 참고서로 당대만이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유용한 저술로 평가된다.
서용보가 활쏘기에 대하여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때는 규장각 각신과 승지 등의 직책을 갖고 정조 대왕의 근신으로 활동하던 시절로 보인다. 이 시기에 정조가 주최하는 시사(試射)에 참여하였을뿐만 아니라, 정조의 친사에 동반하여 「어사고풍첩(御射古風帖)」을 짓기도 하였다. 정조의 영향 속에 체득한 활쏘기의 중요성은 서용보가 훗날 영변부사, 평안도 관찰사 등 외지에 부임하였을 때 국방의 수단으로 활쏘기를 적극 장려하는 정책을 펴 나가는데 발휘되고 있었다.
2) 이춘기 (李春琦: 1737 - [1799] - ?)는 누구인가: 출중한 활쏘기 실력으로 당상관 종1품 숭록대부까지 오른 영조-정조대의 무신이다. 영조 32년(1756) 식년시 무과에서 장원을 한 그는 특별한 가문의 후광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개인의 무예실력으로 꾸준히 승품을 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각종 시사에서 무관들이 일등 혹은 높은 성적을 얻게 되면 품계를 올려주거나 말이나 궁전 등을 부상으로 지급해 주었다. 이춘기는 이 제도의 효과를 최대로 누린 무인이었다. 그가 조정은 물론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영조가 50년 재임을 기념하며 1774년 1월에 개최한 등준시(登俊試)에서 무과 장원을 하면서 부터였다. 영조는 이춘기를 품계를 올려주었을뿐만 아니라 국왕의 최측근 호위 조직인 별군직에 특채하여 주었다. 그가 38세의 한창 나이일 때 였다. 영조 51년 52년은 별군직 이춘기가 각종 시사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포상을 독점해 가던 시기였다.
정조대에 들면 이춘기의 활약은 그 양상이 조금 바뀌었다. 정조 원년에 웅천현감 제수를 받았으나 별군직 숙청의 여파로 2주만에 파직되고 말았다. 정조 3년부터 이춘기는 숭록대부의 품계를 유지한채 일정한 직책이 없는 병조의 당상관으로 재직한다. 중간에 우현첨사나 황룔별장등 외직에 나가기도 하였지만, 대부분 병조의 당상관으로 재직한다. 정기적으로 시사에 참석하지만, 활쏘기 성적은 이전만 하지 못하고, 청룡도 들기, 기추 등 다른 무예를 익혀 수상하는 기록이 자주 나타난다. 사망 연대는 불명이지만,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 선조 초기 즉 1800년대 전반기가 아닐까 추정된다. 전반적으로 볼 때, 이춘기는 등락은 있었지만, 영조 말기에 최전성기를 맞이 하였던 조선 후기 최고의 명궁 중의 한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3) 언제 「사예결해」가 작성되었을까: 죽석관유집에 들어 있는 작품들은 그 작성 연대가 기록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예결해」도 그 중 하나이다. 다행히 이 작품의 서두에 실마리가 될 만한 요소가 최소한 두 개가 들어 있다. 하나는 이춘기를 ‘웅천현감’으로 지칭하고 있다는 점과 두 번째는 이춘기를 ‘대적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사예가 출중하였다는 점이다. 본고는 이 두가지 실마리를 근거로 작성시기를 검토하였다. ‘일찍이’ 물어보았다는 시기는 영조 말 이춘기가 한창 전성기에 있을 때 (1744-76)나 웅천현감으로 지명되기 직전 즉 정조 원년 (1777) 초로 보았고, 이것을 정리하여 「사예결해」를 실제로 작성한 시기는 이춘기가 웅천현감으로 지명된 직후에 작성했을 것으로 본 것이다. 그 결과 작성시기를 정조 원년 (1777) 7월 초 이거나 좀 더 두리뭉실하게 1777년으로 추정하였다.
영정조 시대는 대사례, 연사레 등 왕권강화와 관련된 활쏘기 의례가 중앙 정부 차원에서 몇 번 시행되었고, 특히 정조에 의해 활쏘기가 문신들에게까지 강력하게 장려되던 시대였다. 전통 활쏘기가 가장 왕성하게 시행되었을 때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바로 그 시대 최고 명궁의 사법이 당대 대표적인 명문가 출신의 젊은 선비에 의하여 정리된 것이 「사예결해」이다. 그러므로 「사예결해」는 전통 사법의 정수를 담고 있는 우리나라 최고 사법 고전의 하나로 자리매김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4) 과제
본고는 작품의 배경을 다루면서 작성 인물과 작성 시기는 대략 살펴 볼 수 있었지만, 또 하나 중요한 요소인 작성 동기는 다루지 못하였다. 서영보가 왜 이춘기에게 사예의 비법을 물었을까? 정조 13년 (1789) 이후 그가 활쏘기에 한 껏 노출되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만약 이 작품이 그 때 만들어 졌더라면, 작성 동기가 비교적 용이하게 추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본고는 이 작품이 그보다 10여년 전인 정조 원년 (1877)에 작성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럼으로 앞으로 남은 과제는 작품이 작성될 전후에 그가 활쏘기에 관심을 가질만한 다른 어떤 사연이 있었다던가, 혹은 향리 방축된 아버지를 따라 부천 오곡으로 내려 갔을 때 활쏘기 연습을 하였다던가 하는 흔적을 찾는 것이다. 그래야 작성 동기를 제대로 알 수 있고, 그래야 비로소 제대로 된 작품 배경이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강호제현의 협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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