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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물질
몸에 대한 설명부터 한다. 몸을 재료적인 측면으로 보는 방법이며 인위적 설정이지 이것이 맞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의 관점, 관법으로 봤으면 한다.
우선 물질과 비물질로 나뉜다고 보면 비물질에도 비비물질, 비비비물질……. 아니면 비물질보다 더 비물질, 더더 비물질처럼 더 세분하거나 정도의 차이가 다른 많은 차원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물질, 기물질, 광물질, 공물질, 영물질…… 이렇게 단계적으로 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계제로 나눈 것이다. 즉 물질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는 것이고, 대개는 그냥 물질의 차원에서만 논의하고 그것이 일반적 인식의 한계이지만, 나에게는 이러한 것들이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구분이라서 적어도 나에게만은 실재이다.
다른 분들은 이러한 것이 무의미하고 별로 필요성을 못 느낄지 모르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는 일반적 지식에 매몰되어 자기만의 지식을 확충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자천한 고단자들의 경우가 그렇다.
이러한 비물질들을 총체적으로 ‘엄물질’이라고 하고 싶다. 그래서 물질과 엄물질로 나뉜다고 하는데 여기서 엄은 엄마의 엄이다. 그리고 굳이 물질을 엄물질과 구분해서 따로 규정하는 것은, 물질이라는 것이 상식적인 관념인데 그 상식적인 관념을 이용해 설명하기 위해서다. 제대로 말한다면 다 물질이거나 다 엄물질이라고 하나로 말해야 한다. 두 개로 나누어서 하는 것은 설명의 편의 이외에는 별의미가 없다. 다 물질이지만 또 각각이 구분되기도 하는 것으로, 이 설명은 구분하는 측면을 강조해서 과장한 것이지 너무 이것이 사실이라고 확정해서 보지는 말길 바란다.
물질의 경우는 그냥 육체라고 하고 다 아는 것이니 넘어 가는데, 사실은 엄밀히 말하면 육체와 물질은 다른 범주다.
육체는 나를 이루는 구성법에서 재료적인 측면이고 물질은 그 재료에 대한 설명이다.
그 다음인 기물질부터 논해 보면 물질은 눈으로 확인되니 그 크기를 다 알 수 있다. 그런데 기물질은 크기가 좀 다르다. 육체보다 더 넓은 범위인데 대개는 내 육체 외부로 1미터 내외에서 대강 어림잡는다. 이것을 딱 어느 정도의 거리라고 선을 긋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평균적인 거리라고 해야겠다.
내 심리적인 것과 활동적 상태에 따라 그 변화가 다양해서 그렇고, 또 한두 개의 기물질이 아니라 여러 가지의 기물질이 있어서 어떤 것을 말하느냐에 따라 또 다르기도 하다.
즉 기물질부터는 하나의 기물질이 아니라 기물질에도 여러 개라는 것이 된다. 물론 물질도 고체와 기체의 범위는 다르니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고체성질 같은 기물질이 있고 기체성질 같은 기물질도 있겠다. 좀 더 움직임이 둔한 것이나 더 활동적인 기물질이 있을 것이니 말이다.
육체는 하나이기 때문에 쉬운데, 기물질부터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기물질을 다시 스펙트럼화해서 볼 수 있다. 어떤 수준으로 어떤 것이 얼마나 있을지는 알아내는 만큼이라고 하고 싶다. 없는 것도 만들 수 있고, 나에게는 없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있을 수 있으며, 비슷하지만 모두가 다른 의미와 형태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또 육체 내부와 육체 외부로 나누어서 보기도 한다. 한의학이나 일반적인 수련 단체는 몸의 내부만 관심 갖는데, 역시나 아는 만큼이고 관심 갖는 것만 보이는 것이다. 그래도 평균적인 기물질이라는 것도 있을 것이니 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의 광물질은 어디까지 일까? 10미터? 100미터?
이렇게 생각한다면 일반적 물리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고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기물질도 그렇지만 이 광물질부터는 확연하게 다른 것이 있는데, 상식적인 공간적 방법으로 해서는 안 되고 다른 이해법이 있어야 한다.
이때의 공간을 ‘존’이라고 한다. 이 존은 공간 같은 개념이 아니라 다른 개념을 말한다.
예를 들어, 부모가 부산에 산다고 하면 나에게는 일상생활하면서도 마음 저 밑바닥 어딘가에는 항상 부산이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부산이라는 말을 듣거나 글로 보거나 텔레비전에서 나오거나 부산과 관련된 물건을 보거나 경험하는 모든 것에 다른 사람과는 다른 의미로 부산이 다가온다. 나에게 부산의 의미는 남과 다르고 그 가까움과 먼 거리도 다르다. 의미와 실제의 거리가 상호 섞이게 되어 전혀 다른 것이 된다. 즉 물리적인 거리보다 의미나 심리적 호감이나 하는 것으로 공간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공간이 아니라 존이라고 한다. 이것을 쉽게 시공을 초월해서 작용한다고 말한다.
이것을 거꾸로 해서 나에게 서울에 있는 자식이 있다고 할 때 이 자식이 항상 내가 있는 부산이나 나를 내면 깊이 두면서 생활하게 된다. 이때 내가 그 존을 감지할 수 있는 자천이 되어 있을 경우, 나는 자식의 마음을 느끼게 된다.
이 존은 시공을 초월하기 때문에, 아무리 먼 거리도 상관없고 어제·오늘·내일 하는 시간과도 상관없이 느낀다. 존이라는 것에서 시공이 융합해서 있게 된다.
내 몸의 기물질이나 광물질의 존에서는 그 범위가 이렇게 상식을 넘어서 있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움이 있다. 이러한 존은 사람들과 사물들과 천지와 서로 뒤섞여지기 때문에 상호 전이와 교류와 침입과 영향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이것이 빙의나 접신이나 강신이나 합일이나 신비 체험이나 텔레파시나 예언, 예시, 예지몽 등의 모든 초월적인 능력이라며 호들갑을 떠는 것의 이면이다.
또 예를 들면, 내가 다른 존재의 존에 있을 경우에 그 존재가 사람이나 신관이나 어떤 존재이든 간에 그 존재의 생각이나 마음이 전해져서 꿈을 꾸거나 투시가 일어나거나 하게 된다. 그 존재가 미리 앞으로 할 일이나 계획을 짜면서 무엇인가를 하게 될 때 그것을 내가 전해 받은 것인데, 서로 같은 존에 있어서이다. 그러면 후에 그 존재의 계획이 이루어지면 내가 이미 이루어질 것을 미리 보았다고 말하게 된다. 이러한 것은 계획을 본 것이니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러면 구차한 변명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게 된다. 대개는 이러한 것으로 자신의 예지 능력을 자랑하는데, 어떤 면에서는 바보가 되는 것이다.
원리를 모르니 잘난 척하는 교만에 빠지게 되고, 이 존재가 신관이라면 대체로 잘 맞아서 내가 미래를 안다고 떠들면서 살게 될 것이다. 예지몽이나 다른 것도 이런 것이 많다. 하지만 이것 하나로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사례마다 그 정확한 원인을 분석해야 하기 때문에 존에 의해서 나타나는 현상만을 한정해서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운명으로의 영향을 대입해서도 생각할 수 있는데, 누군가의 존 내에서 운명이 바뀌거나 교란되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존을 무조건 공간을 넘어서 있다고 하지 못하고 공간으로 환산해서 말하거나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공간적 환산과 비공간적 이해를 같이해야 한다.
그리고 존에도 광물질과 공물질은 다르다. 얼마나 다를지 그것은 설명이 어려운데 그 당사자의 존재 의미와도 연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공간이 물리적인 영역이 아니라 심리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과도 구분이 안 되는 수준이기 때문에 심히 어려운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얼마나 주체적으로 살아가는가에 따라서도 존의 크기는 달라진다. 이런 것이 설명하기 곤란한 부분이다.
간단히 공단의 어떤 분이 가진 세계관이 기독교적인 유일신 사상이 있다고 치자. 그렇게 편협한 세계관으로 공단까지 오기는 좀 힘들 것이지만, 아무튼 이렇게 어떤 분이 그럴 경우 그 세계관이 통용되는 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고받게 되며, 그 영향을 미치는 존에 내 몸이 융합되어 암암리에 또는 직접적인 상호 교류가 있게 된다.
어떤 교류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을지는 그 공단자의 욕망에 달려 있어서, 자천자가 어떤 관점과 의미 체계를 가졌느냐가 중요하게 된다. 그러한 관념이 주관적인 관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으로 변형된 전혀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주객일치를 넘어 몸이며 활성적 영역이고, 이것이 공물질이고 영물질이 된다. 주관과 객관의 합일은 광단에서 일어나고, 그 후에 주객합일을 넘어 주가 객이 되고 객이 주가 되어 몸이 되면서 관념이 현실이 되어가고 현실이 내 관념과 몸이 되는, 전혀 다른 의미의 세계와 몸의 구성으로 살아간다.
아인슈타인이 에너지는 질량에 광속의 제곱을 곱한 것( E=mc²)이라고 했다. 이 질량이 물질인데 그렇다면 기물질은 어떻게 측정할까? 에너지가 이런 질량을 근거로 하는 수량이라면 기물질은 포함되지 않은 것이 된다. 그렇다면 에너지 너머의 에너지도 있을 것 같은데 이것은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요즘 공간 에너지나 암흑 에너지나 별말이 많은데 양자역학이 물질의 한계를 넘어 기물질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말은 많은데 확정은 못하는 것이 아닐지…….
누가 내 에너지의 크기가 내 질량에 광속을 제곱한 만큼이라고 한다면, 질량이 많은 자를 넘을 방법이 질량을 키우는 것밖에 없나?
사물을 이렇게 말한다면 조금은 수긍하지만,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면 나는 그 에너지의 한계와 정의부터 하고 그것의 의미를 설명한 다음에 에너지가 그 만큼 있다고 수량화하라고 하고 싶다.
혹시 기물질에서 나오는 에너지도 있고 광물질에서 나오는 에너지도 있어 이런 식으로 올라간다면 어떻게 될까? 하지만 이것은 현실적으로 측정이 어려울 것 같다.
여기서 수량화의 한계부터 알아야 하는데, 그 에너지가 지금은 있다가 내일 없을 수도 있고 지금은 없다가 내일은 있을 수도 있고 이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있다는 개념 자체나 수량화의 개념 자체가 존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누적되어 쌓이지 않으며 모이지도 않기 때문에 수량화가 안 되는 것이다.
기를 쌓고 모은다고 하는 것을 왜 내가 나무라는지 여기에 있다. 기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물질을 이용해서 만들어진 개념으로 설명하면 곤란하다. 그 언어개념의 한계부터 정해야 한다.
그런데도 이런 물질적 개념을 맞는 것처럼 사용해도 되는 것은 왜일까? 어쨌든 그런 식으로 자천하기도 해서 일까? 그렇게 사용해도 되는 것은 느끼고 경험하는 방법이 물질이기 때문이라고 하고 싶다. 내 육체의 감각을 이용해서 기물질을 측정하니 육체에 맞게 어느 정도는 환산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다만 그러기 위해 사상死狀되고 버리며 무시되는 것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며 대단히 거친 어림짐작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엄물질을 모두 물질이라고 하는지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겠다. 역시나 다른 곳에 썼던 것인데 나는 내가 감각하고 경험하고 영향을 받으며 내 생활 체계에 들어온 것을 모두 물질이라고 생각한다.
즉 유有의 세계라는 말로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無도 있는 것이고 진이라고 했다. 무도 있게 되니 없을 것이 없이 다 있는 것이다.
뉴튼식 고전 물리학적인 물질만을 물질이라고 해야 할 이유가 나에게는 없고, 양자 물리학적인 물질을 물질이라고 할 이유도 없다. 고전 물리학적 물질은 쉽게 감각적인 것을 말하는 것 같은데, 나는 분명 감각하고 삶에 현실적인 체험이 있으니 당연히 물질이고 양자물리학적 물질은 나하고 관계없다. 나는 그것을 이해 못한다.
오히려 양자가 나에게는 물질이 아니다. 내가 양자를 이해하게 된다면 그때부터 나에게 물질이 될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인가? 내가 감각할 수 있는가?
내 삶에 중요한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