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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언어구조
2017년 3월 27일 1:44
언어를 사용해서 말하고 의사소통하고 명령하고 요구하고 주장하고 욕망하고 성취하고 살아가는 것이어서 우리 삶에 중요한 위치를 가지는 기능인데 언어에 내 생활체계가 반영된 것입니다.
언어가 곧 나라는 것이 될 정도로 특별한 것이기도 합니다.
학력이나 직업이나 사회동료, 친구, 가족들 취미생활이나 종교나 문화생활, 내가 하는 생활의 모든 것들 또 이런 것을 행하는 방법이나 이런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것이 언어가 되고 언어로 이러한 것을 영위합니다.
즉 언어 구성은 내가 평소에 살아가는 것이 말이 된다는 뜻이 됩니다. 이런 흔한 일상에서 쓰는 말이 아닌 것은 쓰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단어를 모르는 것은 아니겠죠. 그런데 내 언어가 되지 못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평소에 사용하지 않는 거죠. 남이 사용하면 그런가 하지만 내가 사용하지 않을 경우 남이 사용한 언어를 다 이해하기는 힘듭니다. 단어 뜻이야 알 수 있어도 상대가 쓰는 의미를 전부 아는 것은 아니게 됩니다.
이러면서 서로 간에 오해가 생기게 되죠.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니까요.
그래도 대강 살게 됩니다. 그렇게 엄밀히 따져가면서 대화하는 것을 싫어하는데 아마 이런 따지는 것도 언어라서 이런 따지는 것을 하는 언어가 없으면 못하기 때문일 겁니다. 즉 따지는 것을 싫어하면서 살아간 인생이고 그것이 그 사람의 언어생활이고 이 언어생활이 그 자신자체입니다. 외국어가 아닌데도 서로 언어사용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이고 이건 다른 구조이고 다른 용법이고 의미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체에서, 쓰던 근육만 쓰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 일상이 활동하는 게 대개 비슷한 행동반경에서 동선을 가집니다. 그러다보니 습관적 몸놀림도 있고 일의 성격이 비슷한 동작들만 반복해서도 그렇고 일부러 익숙하고 행동하기 편한 동작만을 하려고 하며 그래서 쓰는 근육만 쓰고 안 쓰는 것은 안 써서 근육발달이 치우치게 되고 유연성도 그렇게 됩니다.
몸의 근육 활성화와 유연성이 언어의 활성화와 유연성이 될지도 모릅니다. 서로 간에 비슷합니다. 이렇게 언어도 쓰던 단어만 쓰고 쓰던 표현만 하고 쓰던 요구를 또 하게 되고 쓰던 직장에서의 용어나 쓰던 친구끼리의 대화나 쓰던 종교에서의 논의나 쓰던 가족이나 대인관계에서의 언어 들입니다. 그래서 쓰던 것이 아닌 관념은 표현을 어려워합니다.
말하기도 힘들게 되니 말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다른 분야의 말은 다른 언어가 되어서 그러한 방법으로 생각하기도 힘들고 말로 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평소에 철학적이거나 좀 생각을 비판하고 따지는 것을 해보지 않은 경우에 그런 식으로 사고하는 것을 평생 한 번도 안하고 살기도 하는 거라서 전혀 할 줄을 모르게도 되는 것입니다. 문학이나 전문적인 다른 분야도 그렇게 되죠.
자기가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해선 다들 그렇게 됩니다. 신문이나 잡지나 책이나 요즘은 거의 인터넷으로 정보를 접하는데 뭐든 자기가 쓰던 것만 보고 익숙한 언어에 대한 것만 검색해서 보는 거지 다른 것은 할 수가 없고 하려고도 안하며 해도 읽는다고 이해할 것은 아닌 게 됩니다. 언어를 언어로 번역해줘야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대강이라도요.
우리말인데도 우리말로 다시 번역하는 것인데 해석이나 해설이라고 하겠죠. 언어가 다른 것이어서 이런 식의 해석도 번역이라고 해도 될 거 같습니다. 자기가 익숙한 언어체계로 설명해주지 않으면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쓰지 않은 것은 쓰려고 안하고 힘들어 하고 나중에 무시하게 되며 결국 나쁘게 인식하게도 됩니다. 고양이와 개가 다른 언어체계이듯이 같은 한국인이라도 서로 언어가 달라서 배타적이 되고 등지며 싸우게도 됩니다. 가족구성원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 사회는 더 심하겠죠.
흔히 보수와 진보는 다른 언어구조입니다. 그래서 나라를 위한다고 하면서도 서로 갈등을 가집니다. 나라를 위한다고 하는 것이 솔직히 명목상 이상은 아닌 게 지금껏 우리나라의 정치였는데 보수는 욕심꾸러기들이고 진보는 별 생각 없는 것인데 이런 욕망의 다름이 다른 언어를 만들고 서로 이해를 못하게 되며 갈등이 있게 됩니다. (사실 말만 다르지 정치의 방법적인 면에선 같습니다. 권력을 가지기 위해 하는 짓은 같으니 권력을 가지기 위한 방법이 다른 것이 없으니 그들이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정말 진보이거나 보수인지는 애매합니다. 지역구분일 뿐이기도 해서 기반이 전혀 다른 사고를 하는 것은 아닌 듯이 보입니다.)
이것이 단순히 언어사용의 편중이나 불균등이 아니라 언어가 머리나 감정까지 고착화하고 성격을 만드는 것이 되어서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쓰던 언어 이외의 것이란, 쓰던 감정 이외의 것이라는 의미가 되고, 쓰던 개념 이외의 것이라는 의미가 되고, 쓰던 지식 이외의 것이라는 의미가 되고, 쓰던 성격 이외의 것이라는 의미가 되고, 쓰던 업 이외의 것이라는 의미가 되고, 쓰던 운명 이외의 것이라는 의미가 되고, 쓰던 몸 이외의 것이라는 의미가 되고, 이런 식입니다.
언어가 그 사람의 지적 수준을 만들고, 개념과 관념을 만들고, 사고하는 방법을 만들고, 감정의 길을 만들고, 이것이 감정의 종류와 감정을 느끼게도 못 느끼게도 하고 있게도 없게도 하고, 강도를 만들게 됩니다.
나이 들면서 신체의 근육발달과 유연성이 획일화, 둔화 되듯이 우리의 지식, 감정도 그렇게 딱딱해지고 고착화되고 획일화 되는데 그걸 언어 사용하는 것을 보면서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나이 들수록 지식이 느는 것이 아니라 협소해지고 감정도 집요하고 단순해지며 좁아지게 됩니다.
안 쓰던 감정은 쓰고 싶지 않고 쓰지 못하게 퇴화되며, 안 쓰던 머리도 쓰고 싶지 않고 쓰지 못하게 둔해지며, 이런 것이 언어사용에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언어사용하는 것도 다른 언어를 배우기는커녕 더 이상 다른 언어에 대한 관심이 꺼지게 되고 다른 언어를 받아들이는 유연성도 사라지게 됩니다.
다른 언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마음이 작아지게 되고 둔해지게 된 것입니다. 언어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남의 말을 귀담아 듣는다는 것이 되어 남의 말을 듣는 것은 나와는 다른 사람의 관념, 감정, 삶을 이해하려는 것이 되어 마음을 연 것이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알려고 하는 것도 역시 언어를 배우고 알아가는 것인데 이것이 감정과 지식의 변화를 유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언어를 다 사용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건 불가능 합니다. 다만 자기 분야나 관심 갖는 그것에서도 시간에 따라 변해가며 같은 분야에서도 사람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있고 수시로 갱신되어 가고 있으며 시대에 따라 다른 접근과 적용법이 나오고 다른 해석을 하기도 하는 등 그에 따라 언어도 변하고 있어서 그런 언어가 변하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자기언어인데 그 언어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도, 그리고 자기가 언어를 사용할 대상들도 변합니다. 그래서 사장된 언어가 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아무도 내 언어를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채지도 못하고 고립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 됩니다. 이런 세상과 동떨어진 업과 성격과 운명을 가지는 건 곤란하니까요.
이러면서 내가 힘들어하는 언어를 보고 나와 맞는 것이나 안 맞는 것을 알게 되고 맞고 안 맞고로 성격을 알아가는 것이며 성격으로 해야 할 일이 뭔지 알아 가게 되며 할일을 안다는 것은 운명을 아는 것이니 당연히 이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려면 다른 언어와 내 언어를 자꾸 비교하고 분석해야 하며 내 언어도 분석해야 하지만 남의 언어도 다 알지는 못해도 알려고 노력해가야 합니다. 완전히 다른 언어는 아니고 대개가 통합되어 있는 것이어서 나름의 방법으로 다양한 언어를 통합하는 것을 하는 것이 또 있습니다.
요즘 전문 학문 분야들도 이러한 노력을 하는데 아직은 자기 언어로 다른 언어를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이어서 설익은 담화가 되는데, 그런 전문화된 것이 아니라도 우리 개개인은 이렇게라도 자꾸 언어에 대한 연구를 해야 합니다. 언어적인 노력이 없으면 살아가는 것이 끝나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죽을 때까지 사고하고 고민하는 것인데 이게 결국 언어연구입니다. 언어학이 아니라 개념, 관념의 연구라는 것이니까요.
그렇다고 무한하게 새로워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새로움도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있고 토대가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토대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서 시대에 따른 용법을 이해하는 것이 되어 시대의 흐름을 알려는 것이고 토대가 바뀌는 것은 내가 잘 못 알고 있거나 더 나은 토대에 해당하는 지식이 나오는 경우입니다.
이런 것을 구분하면서 변화를 살피면 변화가 아닌 것도 있고 상대적인 변화도 있으며 앞으로 변화할 것이나 변화하지 못할 것이나 시간이 걸리는 것이나 이런 것을 대강을 알게 됩니다.
잘하는 언어도 있고 쉽게 따라하는 언어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게 다 자기의 성격, 마음구조, 사고체계인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나 관심 가지면서 때에 따라 쓰고 싶은 말이나 관심 가지게 된 말이나 자꾸 쓰게 되는 것을 살피면서 내가 지금 빠져있거나 영향 받고 있는 것을 알고 의도적으로 바꾸거나 다른 언어를 배우려고도 하면서 수시로 언어를 성찰해야 합니다. 단어만이 아니라 구조도 보아야 합니다. 어디서 사용하는 말이고 어떤 전제로서 쓰는 말이고 어디서 오는 말이고 어디를 보는 말인가를 보고, 살필게 많습니다.
“어디를 보는 말이냐”는, 말이 지향하는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출처도 있고 출처의 의도도 있는데 내가 그걸 쓰면서 어디까지 의도하는지 보는 것입니다. 이러면 심층을 해석해가는 것인데 그래서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쓰는 언어를 보고 심층을 이해하죠.
내가 어떤 언어를 쓰는지 안다는 건,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있고,
내가 어떤 사회계층에서 살고 있고,
내가 어떤 역할로 살고 있고,
내가 어떤 지식으로 살고 있고,
내가 어떤 마음이나 감정으로 살고 있고,
내가 지금 어떤 것에 관심가지며 살고 있고,
내가 무엇이 영향을 주고 있어서 살고 있고,
등등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언어와 내가 구분됩니다.
내가 언어를 쓰는 것이지 언어가 나는 아닙니다. 이걸 구분하면서 관찰하는 것인데 이렇지 않으면 언어가 내가 돼버립니다.
언어 쓰는 그 정도가 내 전부가 돼버립니다.
언어 쓰는 그 정도가 내 업이 돼버립니다.
언어 쓰는 그 정도가 내 삶이 돼버립니다.
언어 쓰는 그 정도가 내 성격이 돼버립니다.
역시 등등이 돼버립니다.
언어가 살아가는 거고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닌 것이기도 하는 거라서 이걸 무조건 아니라고 하지는 않는데, 그것을 자유롭게 내가 되고 언어가 되고를 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해서 이걸 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존재하느냐를 탓 하냐가 아니라 어떤 존재로도 되는 자유가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어떤 지식을 새로 알았다면 그 지식이 내 것이 된다는 것이어서, 내가 그 지식을 쓰는 것이기도 하며, 그 지식을 쓰면서 사는 것이기도 하고, 그 지식의 영향에 있는 것이기도 하고, 그 지식이 성격을 만들어 가는 것이기도 하고, 그 지식이 감정이 되어 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면서 언어에 녹아들게 되어 그런 언어를 사용하게 됩니다. 지식을 외운 게 아니라 언어체계에 융합시키는 것이어서 이것이 위와 같은 의미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지식으로 언어로 사고하고 감정 일으키고 대화하며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다는 건 그것으로 사물이나 외부가 또 사건이, 대상들과 사람들을 해석하는 것이고 그렇게만 보는 것입니다. 일종의 직업병처럼 그런 것만 보이고 어디가면 그것부터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 심층 구석까지 하나의 지식으로 변형이 일어나게 되며 그래야 지식을 알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어체계로 변했다면,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로 수시로 쓴다는 것이며 의식이 모르게 대화에 쓰고 말로 하게 되고 사람들에게 주장하고 소통하게 됩니다. 이런 어떤 지식을 언어에 담지 않은 사람은 그 지식을 담은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를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대충 이해하고 분위기상 이해하고 눈치껏 넘어가고 아니면 되묻게 됩니다. 이렇듯 뭔가를 배우는 건 그것으로 생각하고 감정 일으키는 것이 되며 언어로 사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체득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심층의 언어체계로 되면 그만큼 성격까지 변형이 되어 간다는 것이 되니까요.
이런 건 우리가 말을 의식이 아니라 저절로 하는 것이라서 심층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럴 만큼 나에게 깊숙이 들어온 것이니까요. 반대로 언어가 된 건 우리 일상이 된 것이고 수시로 쓰는 것이 되어 심층이 된다는 것이 또 쉽게 드러나고 알고도 모르게도 쓰는 흔한 것이 된다는 것도 됩니다.
혼자서 생각을 할 때 언어로 합니다. 이 경우에도 당연히 언어체계가 되는데 자기의 언어의 한계 내에서 사고하게 됩니다. 혼잣말을 하든, 혼잣말처럼 생각을 이어가든 결국은 늘상 쓰는 언어로 해야 합니다.
생각을 누구에게 말하듯이 하면 항상 누구에게 말하는 것을 준비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것을 즐기는 것이기도 할지 모르고, 이런 말할 대상이 마땅치 않은 사람은 평소에도 그다지 생각을 안 할지 모르고 막상 하려고 해도 어떻게 생각을 이어갈지 모르기도 합니다.
언어를 써야 하는데 언어를 어떻게 써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언어를 쓸려면 비슷한 언어를 쓰는 대상이거나 이 언어를 이해할 대상이거나 사용해야 할 대상이거나 이런 대상을 염두에 두고 하는 것인데, 이러면 결국 혼자서 생각을 할 때도 우린 언어를 쓰는 방법이 사람마다 다르게 됩니다. 친구에게 대화하는 것을 전제로 생각을 이어가나요? 학생들에게? 윗사람에게? 논문 쓰듯이? 아니면 글 쓰듯이? 설명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명령하는 것인가요? 자기주장? 응석? 논증? 해석? 변명을 위해서요? 아니면 논리 정합성? 아니면 어떤 지적인 성찰을 위해서요?
대상도 다양하고 그 대화 자세도 다양하며 자기의 지위나 위치도 다양하며 염두에 둔 대상의 수준이나 범위나 시간적인 안배나 생각보다 복잡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자기의 마음이기도 하며 감정이기도 하고 삶이기도 하고 운명이기도 합니다.
내가 어떤 자세, 지향성, 목적, 의미, 위치, 대상을 염두에 두고 생각을 하는지 그 나를 다시 보면서 나를 이해하게 되죠. 이건 어떤 언어를 쓰느냐도 됩니다. 친구언어, 교수언어, 명령언어, 변명언어, 직업언어, 전문분야언어, 주장언어, 응석언어, 애교언어 .......
어떤 직업이냐가 어떤 직업언어가 되고, 어떤 가족구성원이냐가 가족언어가 되고, 어떤 친구냐가 친구 언어가 되고, 기타 등등인데, 그런 직업이 없으면 직업 언어가 없고 친구가 없으면 친구 언어가 없겠죠. 내가 이렇습니다. 직업도 친구도 없으니 이 언어가 익숙하지 않습니다.
자식이나 아이들과도 만날 기회가 없어서 아이언어라고 할까요? 그런 것도 없었는데, 요즘은 생기네요. 아이들을 볼 기회가 생겨서 조금씩 아이를 대하기가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기는 거 같습니다. 잘하는 것과는 다르고 그래도 없는 거에서 약간의 생겨나는 정도입니다.
언어에 대한 자세가 있다고 했는데 설명을 더 하지 않으면 또 그냥 읽어갈 거 같아서 덧붙입니다. 언어에 자세가 있다는 것은 예를 들어, 권력이라는 것을 말할 경우 어떤 입장에서 말하는지가 있습니다. 권력자의 입장, 아니면 권력에 당한 입장,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 권력을 가졌으면 하는 입장, 내가 아니라도 자식이라도, 연구하는 입장도 있을 것이고, 기억하는 향수에 의한 것이나, 욕망에 의한 것이나 어떤 권력이어서 정치나 지식이나 사업에서나 문화에서나 여러 분야에서의 권력입니다.
이렇듯 다양한 위치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건 권력을 체험한 방법에 따라 권력의 구조나 분야나 그 시대에 권력을 생각하는 방법에 따라 할 수 있는 종류에 따라 등 여러 조건에 따라서 조금 씩 다른 입장을 취할 거 같습니다.
권력에 안 좋게 당했다고 권력을 미워하지 않고 더 원하는 것도 있으니까요. 경험에 그 당사자의 성향도 중요합니다. 어떤 자세를 가지느냐로 어떤 말을 하게 되냐가 되고, 말은 같아서 비슷한 의미 같지만 자세가 다름으로 해서 전혀 다른 의미가 됩니다.
도에선 어떤 자세를 알아야 하는 이유가 다양한 자세에서 다양한 입장에서 다양한 위치에서 권력을 비롯해 사물과 관념들을 보는 것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제나 말이지만 자유는 그런 것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이어서 그렇습니다.
오로지 하지 않으면서 넓은 유연성을 가지기 위해선 어떤 자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세도 가질 수 있는 것이 되며 그것을 청정하다고 합니다. 그래도 이런 청정도 권력입니다. 다만 그 말을 사용안하고 다른 이름으로 하지만 권력의 한 종류는 맞습니다.
절대자이든 신이든 고결함이나 열반이나 신선이나 훌륭함이나 다 권력이죠. 어떤 권력이냐로 다른 말을 하겠지만 권력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권력은 우주만상의 존재 그 자체의 의미이니까요.
존재가 곧 권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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