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TV무상사
초청법회…
‘삶의 자세에
대해’
삶은 팍팍해져만 가고 낙(樂)은 어느덧
멀어져버렸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이
낭만을 느끼고 자유를 누리기에는 얽매인 것이 너무나 많다. 앞으로 어떻게 사는 게 맞는
건지 또 무엇을 해야 행복할 수 있을지 도통 답을 찾기 어렵다. 우리는 어떤 삶의 자세를
취해야 할까. 해남 미황사 주지 금강
스님은 3월 10일 방영된
불교TV무상사 일요초청법회서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봄을
맞이하듯 주저앉지 말고 흐르는 물처럼, 피는 꽃처럼
생동하라”고
조언했다. 정리=윤호섭
기자 |
본래 마음 고요하기
그지없어 그 마음 잘 쓰는 게 곧
수행 역경 피하지 않고 버텨낼
때 내가 서원한 꽃이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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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 스님은… 1985년 해인사에서
지운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1988년 범어사에서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1993년 중앙승가대학총학생회장, 1994년
범종단개혁추진회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현재 조계종 교육아사리, 달라이라마방한준비위원장, 템플스테이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그냥 만들어진 건
없다 지금으로부터
900년 전쯤에
산곡거사(송나라
황정견)라는 유명한 시인이
있었습니다. 그 시인께서 지금 봄에 딱
맞는 시를 한 편 쓰셨는데 그 시는 선(禪)에 있어 깊이가
있습니다.
만리청천
운기우래(萬里靑天
雲起雨來) 공산무인
수류화개(空山無人
水流花開) 끝이 없는 푸른 하늘에
구름이 일고 비가 온다네. 빈산에 사람은 없는데 물
흐르고 꽃이 피네.
저는 이 시가 굉장히 멋지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 봄에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육조 혜능대사는
〈육조단경〉에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정과 혜가
하나다.’ 우리는 선정과 지혜가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선정을 수행하고 난
뒤에 지혜가 증득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데 혜능대사는 선정과 지혜가 둘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선정이라는 것은 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고요함이 아니라 우리가 본래 갖고 있는 정(淨)한 마음을
말합니다.
바로 그 정한 마음이 일어나서 수많은 경계를
만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아침에 눈을 뜨면
세수하면서 물과 만나죠. 또 아침밥과 만나게
되고요. 문을 열고 집밖으로 나가면
수많은 차들과 만나고 일과 만납니다. 그리고 정한
마음, 즉 고요한 마음이 수없는
경계를 만났을 때 지혜가 작용합니다. 통찰이 일어나고 직관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 고요한 마음을 늘
내 마음의 주인으로 삼아야 합니다. 산곡거사의 시처럼 우리 본래
마음은 만리청천 하거든요.
저는 어제 해남과 지리산 악양을
다녀왔는데요. 지리산자락에 봄비가 엄청
많이 내렸습니다. 계곡물이 불어서 마치
6월 장마 때처럼
흐르더군요. 어느 때는 아주 맑은 푸른
하늘이지만 어느 땐가는 구름이 일기도 하고, 그 안에서 비가 내리기도
하는 거죠. 그 구름과 비는 어디에서
만들어진 걸까요.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다 인연화합입니다. 모든 것들이 서로 인연에
의지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죠.
물 흐르고 꽃이 핀다는 것 또한
마찬가집니다. 물은 어디에서 만들어져
흐르는 걸까요. 한 방울 한 방울 빗방울들이
모이고 모여서 실개천에서 점점 커진 강물까지, 바다에까지
흐릅니다. 역시 인연화합에 따라 모인
것들이죠. 그래서 우리의 수행은 정과
혜가 하나인 겁니다.
변화는 나의
몫 앞서 산곡거사를
말씀드렸죠. 이 분이 참 멋진 시를
썼지만 본래는 술도 좋아하고, 고기도
좋아하고, 시를 써도 맨날 연애시만
썼어요. 근데 이런 그를 안타깝게
여긴 스님이 있었습니다. 정말 좋은 재주를 갖고
있음에도 너무나 탁하게 산다고 말이죠. 그래서 그 스님은
산곡거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장부가 그 좋은 글 솜씨를 이렇게밖에
못쓴단 말인가. 달콤한 말로 온 세상
사람에게 음탕한 마음을 부추기는구나. 내생에 말 뱃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그치겠지만 더 심하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산곡거사는 그 자리에서 개심
합니다. 스님의 말 한마디에
‘아, 내가 지금 잘못 살고
있구나’ 반성한
것이죠. 그래서 바로 그 순간부터
술과 고기를 끊고, 붓을
꺾어버렸습니다. 다시는 음탕한 시를 쓰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이렇게
발원했습니다.
오늘부터 미래세가 다하도록 음욕과
술ㆍ고기를 먹지 않겠습니다. 만약 음욕을 부린다면 마땅히
지옥에 떨어져 불구덩이 속에서 한량없는 세월을 보낼 것이며, 일체중생이 음란한 짓을 한
과보로 받아야할 고통까지 제가 다 받겠습니다. 만약 다시 술을 마신다면
마땅히 지옥에 떨어져 철철 넘치는 구리쇠 물을 마시며 한량없는 세월을 보낼 것이며, 일체중생이 술 마신 과보로
받아야할 고통까지 제가 다 받겠습니다. 만약 다시 고기를 먹는다면
마땅히 지옥에 떨어져 뜨거운 쇳덩이를 삼키며 한량없는 세월을 보낼 것이며, 일체중생이 고기 먹은 과보로
받아야할 고통까지 제가 다 받겠습니다. 불보살님이시여, 만약 다음 생에 태어나 이
사실을 제가 잊어버리게 된다면 부디 가피를 드리워 미혹의 구름을 걷어주소서.
이번 생뿐 아니라 다음 생까지도 나쁜 짓을 하지
않겠다고 발원한 겁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평생토록
술과 고기, 음탕한 시 멀리하고 선시를
쓰기 시작합니다. 물론 스님의 충고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지만 사실 일반인들이 누군가에게 충고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말하면 저 사람이
받아들일까’ 고민하는데 실제 상대방은 잘
고쳐지지 않습니다. 내가 낳은 자식도
마찬가지고요. 말을 하는 사람과 받아들이는
사람이 한 마음이 됐을 때 비로소 변화가 이뤄지죠.
지금 이 자리에서 법문을 듣는다고
해서, 또는 책을 본다고 해서
변하는 건 아닙니다. 정말 변하려 한다면
화학반응이 일어나야 해요. 법문 한 자락 글 한 줄에서
큰 통곡을 하든지 마음속에서 불덩이가 일어나든지 하는 화학반응이 일어나야 내가 변화됩니다.
그래서 저는 7박8일 수행프로그램 만들어서
사람들과 한 달에 한 번씩 수행을 합니다. 직접 그리고 함께 수행하는
것이죠. 저는 중간 중간에 도움만 줄
뿐이고, 변화는 자기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산곡거사 시가 나오게 된
것도 바로 이런 배경이 아닐까 싶습니다.
요즘에 철학자들이 인문학 강의를 많이 한다고
합니다. 방송이라든지 일반신문이라든지
곳곳에서 인문학 강의를 많이 하는데요. 인문학 강의의 핵심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옛날 임제선사가 말한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입니다. 가는 곳마다 내가
주인이고, 하는 일마다
참되다. 다른 사람이 날 어떻게
생각할지 고민하거나 또는 과거의 기준을 갖고 현재를 사는 게 아니라 바로 지금 자유자재하고 당당하게 내가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까 말씀
드린 정한 마음만 쫓아가서는 안 됩니다. 그 고요한 마음을 일으켜서
일상사에 모든 행위를 해야 합니다.
혜능대사는 이를 ‘좌선(坐禪)’에
비유했습니다. ‘좌’는 밖의 어지러운 마음을 쉬는
것입니다. 즉 몸은 앉아있으면서 마음이
과거 현재 미래로 떠돌아다니면 진짜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선은 본래 갖고 있는
고요한 마음을 일으켜서 잘 쓰는 것이고요. 혜능대사의 정과
혜, 임제선사의 수처작주
입처개진, 철학자들의 인문학 모두
결국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의 마음을 현실화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추위 이겨야 봄
맞는다 법정 스님은 산곡거사가
쓴 ‘수류화개’라는 표현을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머무는
거처를 ‘수류화개실’이라고 하실 정도로
말이죠. 스님께서 쓰신 책에 등장하는
일화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언젠가 한 젊은 청년이 찾아와 뜰에 선 채
불쑥 수류화개실이 어디냐고 물었다. 아마 내 글을 읽고 궁금했던
모양이다. 나도 불쑥 네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라고 일러 주었다.
이 청년은 아마 법정 스님 글을 읽고 그 집이
어딘지 궁금해 물었을 겁니다. 근데 스님은 네가 선 자리가
물 흐르고 꽃 핀 자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법정 스님은 꽃을 참
좋아하셨는데요. 강원도 산골짜기에 계실
때에도 봄만 되면 남도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래서 스님께서 병실에 누워
계실 때 죄송스럽지만 동백꽃과 매화가지를 꺾어 찾아뵙기도 했죠. 그런 법정 스님 글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사람은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살든 그
속에서 물이 흐르고 꽃이 피어날 수 있어야 한다.
물이 저 산속에만 흐르는 게 아니고 꽃은 봄 되면
남쪽에서만 피는 게 아닙니다.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물
흐르고 꽃 피울 줄 알아야 합니다. 저
꽃도, 나무도, 강도, 봄 또한 그러할진대
사람이라면 응당 그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이 흐르고 꽃 피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생생해야 합니다.
꽃나무가 봄에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추운 겨울을
이겨내야 합니다. 사람은 조금 추우면 방에
온기를 불어넣기도 하고 옷을 두껍게 입기도 하죠. 그러나 나무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바로 그 자리에서 추위를 온전히 버텨내야 합니다. 겨울에 살아남기 위해 봄부터
만들었던 소중한 이파리들을 과감히 떨어뜨려야 하고요. 뿌리는 더
깊게, 껍질은 더 두껍게 만들어
겨울을 보내야 봄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나무가 추운 겨울을 당당히 맨몸으로 피하지 않고
버텨내야 봄을 만나듯이 우리도 그렇습니다. 조금 어려움이 닥쳤다고 주저
앉아버리거나 피하면 다시 봄을 만날 수 없습니다. 어려움을 이겨냈을 때 더 큰
힘이 만들어집니다. 물이 웅덩이에 갇힌다고 해서
영원히 갇히는 게 아니라 물이 계속 모여 결국에는 넘쳐흐르게 되는 것처럼 말이죠.
참선할 때도 마찬가집니다. 어느 날은 아예 공부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화두가
하나도 안 잡힐 때가 있어요. 그럴 때일수록 나를 더
튼튼하게 하는 힘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무언가 한 가지 꽃을
피우려고 한다면 나에게 닥친 어려움 극복하고, 당당히 맞서 뛰어넘어야
합니다.
산곡거사의 다른 글로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정좌처다반향초
(靜坐處茶半香初) 모용시수류화개 (妙用時水流花開) 고요히 앉은 자리에 차
반잔의 향기는 처음과 같고, 오묘한 그때 물 흐르고 꽃이
피도다.
이 글은 추사 김정희 선생이 써서 초의선사에게
전해준 것으로도 유명한데요. 고요히 앉아서 차를 마시고
향기를 느끼는 게 마치 수행하는 삶처럼 정적인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그때 물이 흐르고
꽃이 핀답니다. 여러분도 늘 물처럼 흐르고
꽃처럼 피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