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수정(退修亭)은 1870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공조참판을 지낸 매천(梅天) 박치기(朴致箕)가 그의 장구지소(산책과 풍류를 즐기던 곳)로 세운 누각이다. 그가 벼슬에서 물러나 심신을 단련하기 위해 이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정자 이름을 퇴수정(退修亭)이라고 하였다. 지리산 계곡에 자리하여, 정자 앞으로는 시냇물이 흐르고 뒤에는 암석이 높게 솟아 있다.
받침부에 사각형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원형 기둥을 세워 이층 건물을 지었다. 건물 안에는 방 한 칸을 들였는데 누각을 비추는 달과 맑은 바람에 서늘한 툇마루가 주위의 시냇물과 암석에 어우러진 풍광이 아름답다.
누각 왼쪽에 있는 관선재(觀仙齋)라는 재실은 후손들이 세웠다.
퇴수정 앞을 흐르는 시냇가에는 소년대, 노인암, 세진대가 퇴수정과 어우러져 있다. 소년대에는 철종때 안용이라는 사람이 빼어난 경치를 사랑하여 집을 짓고 살았으며 전라감사 윤봉구가 「소년대(少年臺)」라 새겼다 한다. 이러한 구성물이 자연과 잘 어우러져 여름이면 시냇물과 암석이 어우러진 풍경에, 더위를 씻어주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시름을 덜게 한다.
塵外孤臺晩托踪(진외고대만탁종) 어지러운 세상 떠나 늦게사 누대를 지어 의탁하니,
淸流九曲嶽千里(청유구곡악천리) 맑은 물은 굽이쳐 흐르고 산은 첩첩이라.
蒼松隔水冷冷韻(창송격수냉냉운) 푸른 솔 물에 드리워져 그 운치 은은하고,
白石和雲淡談容(백석화운담담용) 하얀 바위 돌과 어우러진 구름은 맑은 모습이네.
忘世許同群鶴鹿(망세허동군학녹) 세상사 잊으려 학과 사슴 벗하니,
存身傀比蟄珪龍(존신괴비칩규룡) 이 몸 숨김이 칩거한 규룡에 부끄러워라.
靜觀認是仙人過(정관인시선인과) 고요히 돌아보니 이곳은 시선이 지난 곳인지라,
林壑依然道氣濃(임학의연도기농) 산림과 구렁은 변함이 없어 의연한 기상이 짙구나.
옻칠장 김을생(金乙生)
- 지정 :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 13호
- 생년월일 : 1935년 12월 20일 생
- 소재지 : 남원시 산내면 백일윗길 36-5
옻칠은 무공해 자연칠로 2∼3년이 지나면 색이 더욱 살아나고 방수·살균효과도 크다. 1935년 이곳에서 태어난 김을생씨는 할아버지 때부터 전해오던 옻칠가업을 전수하여 실상사 맞은편에 금호공예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다양한 수목이 풍부한 지리산에는 실상사가 자리하여 스님이 사용하는 그릇의 수요가 많았기에, 목기 제작과 옻칠이 크게 발전하였다.
일제시대에 <전북목기기술학교 칠공과>가 생기면서 옻칠에 대한 연구와 기술개발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옻칠은 무공해 자연칠로 2∼3년이 지나면 색이 더욱 살아나고 방수·살균효과도 크다. 1935년 이곳에서 태어난 김을생씨는 할아버지 때부터 전해오던 옻칠가업을 전수하여 실상사 맞은편에 <금호공예>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그는 1980년 전북산업디자인 은상을 비롯하여 1984년 전북공예품경진대회 입선 등 다양한 수상경력을 갖고 있다
백장암(百丈庵) 보살좌상(菩薩坐像)
- 소재 : 남원시 산내면 천왕봉로 447-76
- 지정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166호
이 보살상은 복장유물은 결실되었고, 개금(改金)이 두터워 원래의 형상을 다소 잃고 있으나 상태는 양호한 편이며, 신고(身高) 50㎝, 두고(頭高) 22㎝, 관고(冠高) 9.6㎝, 좌폭(坐幅) 36㎝ 정도의 이 보살좌상은 머리는 높게 틀어 올려 상투모양으로 묶은 후 보관(寶冠)을 썼다. 이마 부분에는 머리카락이 굴곡지게 표현되어 양쪽 귀를 돌아 어깨 아래까지 길게 늘어져 있는데, 이는 고려말 조선초의 보살상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얼굴은 사각형에 가까운 편이며, 신체는 어깨가 둥글고 무릎 너비가 좁아 단아한 느낌을 준다. 옷은 양어깨를 감싸고 있는데, 탁 트여진 가슴에는 화려한 목걸이가 표현되었다.
백장암 보살좌상은 고려말(14C)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나 이미 오래 전에 복장 유물이 결실되어 정확한 조성연대와 조성장소, 출토지 등은 알 수 없다. 이 보살좌상은 1997년 5월에 도난 되었다가 같은 해 9월에 되찾았다. 현재 금산사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실상사 동종(銅鐘)
- 소재 : 남원시 산내면 입석길 94-129
- 지정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137호
실상사 경내에 있는 높이 123㎝, 입 지름 83㎝의 종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는 여의주가 없는 용이 종머리를 딛고 있는 형상이며,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용통은 간략화 된 용이 꼬리를 휘감은 모양을 하고있다. 몸통 위쪽은 원안에 범자를 양각한 문양을 12곳에 배치하였다. 그 아래 사각형을 이룬 유곽이 4면에 있으며, 사이사이에 두 손으로 꽃가지를 잡고 보관을 쓴 보살상이 1구씩 배치되었다. 유곽의 테두리는 덩굴무늬로 장식되었고, 안쪽으로는 꽃 모양의 유두 9개가 있다. 종에 새긴 글을 통해 조선 숙종 20년(1694)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실상사(實相寺)
- 소재 : 남원시 산내면 입석길 94-129
- 지정 : 사적 제 309호
- 시대 : 통일신라시대실상사(實相寺)
지리산 자락인 남원시 산내면에 둥지를 튼 실상사(實相寺)는 신라 구산선문 중 처음으로 문을 연 사찰이다. 암자인 약수암과 백장암의 문화재를 포함하여 국보 1점과 보물 11점 등 넓은 경내가 비좁으리만큼 단일 사찰로는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 증각대사(洪陟 證覺大師)가 창건하였는데, 홍척은 도의(道義)와 함께 당나라에 유학한 뒤 남원으로 들어와 이 절을 세우고 실상산문(實相山門)을 개산(開山)한 분이다. 이후 2대조 수철(秀徹, 817∼893)을 거쳐 3대조 편운(片雲)에 이르러 절이 중창되었으며, 선풍도 떨쳤다.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실상사도 불타버린 뒤 폐사되다 시피 하여 근 100년을 지내오다 숙종 16년(1690) 36동의 건물을 다시 세우는 등 크게 중창되었다. 이후 순조 21년(1821)에도 중건되었으나 고종 20년(1883) 함양 출신 양재묵,민동혁 등이 불을 질러 아까운 사찰 건물들이 불타버리는 수난을 겪은 뒤 이듬해에 여러 승려들의 힘으로 10여 채의 건물이 중건되어 오늘에 이른다.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며 지리산 여러 봉우리를 꽃잎으로 삼은 꽃밥에 해당하는 자리에 앉은 실상사는 여느 지리산 자락의 산사와는 달리 평지에 들어서 있어 분위기가 색다르다. 사찰의 구역을 따라 담장을 낮게 두르고 담 안쪽으로 키 큰 나무들을 둘러 세운 풍광이 푸근하고 고즈넉하다. 반야봉·노고단·고리봉 등지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인 만수천이 큰 냇물울 이루어 실상사 앞을 흐른다. 해탈교를 건너 논길을 200m 정도 걸어가면 산문인 천왕문(과거에는 만세루가 있었다고 한다)이 나온다. 해탈교가 들어서기 전에는 징검다리가 아기자기하게 놓여 있었는데 이 때에는 개울을 건너는 운치가 그윽했다고 한다.
해탈교를 전후하여 서 있는 세 기의 돌장승은 그 표정이 무섭고 당당하여 절집을 노리는 잡귀들을 가히 물리칠 만하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절 마당에 삼층석탑 두 기가 동서로 나란히 서 있고, 뒤쪽 중앙에 석등과 보광전이 차례로 서 있으며, 보광전 양 옆으로 약사전과 칠성각이 있다. 석등 양 옆으로는 명부전과 요사채들이 들어서 있는데 전체적으로 평지에 들어선 전형적인 1금당 쌍탑의 가람배치를 보여 주고 있다. 천왕문과 삼층석탑 중간에 종루가 있으며, 종루 뒤쪽에서 발굴된 건물터는 원래의 가람과는 별도로 후대에 만들어진 오층목탑이 있었던 장육전으로 추정하던 터에 1999년 11월 24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팀에 의해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큰 목탑지로 확인되었다.
대웅전인 보광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본래의 넓은 금당터 기단 위에 또 하나의 작은 기단을 만들어 세운 작은 건물이다. 본래 금당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큰 건물로 추정된다. 안에는 홍척·수철 두 스님의 영정과 범종이 있다. 1995년 8월에 실상사에 대한 대대적인 복원이 발표되었는데, 보광전의 확장 복원도 이 계획에 포함되어 있다. 보광전 안에 있는 범종은 종에 새긴 글을 통해 조선 숙종 20년(1694)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으며, 종을 치는 자리에 일본의 지도 비슷한 무늬가 그려져 있는데, 이 종을 치면 일본이 망한다는 소문이 있어서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주지가 일본 경찰에게 문초를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실상사에는 일본과 관련된 또 하나의 이야기가 전한다. 당시는 왜구가 남해안과 전라도 일대에 나타나 노략질을 일삼던 때이다. 홍척은 도선에게 부탁하여 절터를 알아보고 있었는데, 현재의 실상사 약사전 자리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는 말을 듣고 절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우연의 일치일까? 약사전의 창호가 우리나라의 꽃인 무궁화이고, 약사전 앞에 무궁화나무가 있었으나 지금은 베어지고 없다.
한편 경내에서 발견된 실상사 동종은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발견 당시 이미 상반부가 없었는데,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이 비록 유곽·비천상·당좌뿐이지만, 그 조각솜씨가 우수하여 성덕대왕신종과 상원사 동종을 연상하게 한다. 남아 있는 부분의 입지름으로 보아 높이 1.67m, 입지름 91cm인 상원사 동종보다 약간 큰 규모였으리라 추정되며, 실상사 창건 당시 주조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보광전의 옆에 있는 칠성각은 팔작지붕 형태로 아담하며, 요사채 옆으로 난 길가 한쪽에 있는 화장실은 입구에서부터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빼어난 목조건물로, 많은 사람들이 눈여겨보곤 한다. 현존하는 경내의 건물 중에서는 약사전만이 조선 중기의 양식을 갖춘 단정한 건물이다. 약사전에 모신 철불은 천왕봉을 바라보고 있는데 나라에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영험한 불상으로 인근 불자들에게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요사채 쪽 사잇길로 들어서면 극락전 주변에 홍척스님의 부도와 부도비 그리고 실상사의 제2대 조사인 수철스님의 부도와 부도비가 있다.
5교(五敎)와 구산선문(九山禪門)
불교에는 교(敎)와 선(禪)의 양대 파가 있다. 교는 경전에 의해 점차 도를 닦음이요, 선은 문자를 통함이 없이 좌선(坐禪)을 하여 도를 깨닫는 것이다. 신라 교종(敎宗)에는 5종(宗)이 있었는데, 열반종(涅槃宗)·화엄종(華嚴宗)·계율종(戒律宗)·법성종(法性宗)·법상종(法相宗)이 그것이다. 선종(禪宗)에는 남원(南原)의 실상사(實相寺)·장흥(長興) 가지산(伽智山)의 보림사(寶林寺)·곡성(谷城) 동리산(棟裡山)의 태안사(太安寺)·삼가리(三嘉里)의 굴산사(屈山寺)·영월(寧月) 사자산(獅子山)의 흥녕사(興寧寺)·문경(聞慶) 희양산(曦陽山)의 봉암사(鳳岩寺)·보령(保寧) 성주산(聖住山)의 성주사(聖住寺)·해주(海州) 수미산(須彌山)의 황희사(黃熙寺) 등 구산(九山) 선종(禪宗) 또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이 있었다. 이와 같이 교(敎)와 선(禪)을 합하여 오교 구산이라 한다. 선종(禪宗)은 달리 달마종(達磨宗) 또는 조계종(曹溪宗)이라고 한다.
실상사(實相寺)돌장승
- 지정 : 중요민속자료 제 15호
- 소재 : 남원시 산내면 입석길 94-129
해탈교를 건너기 직전에 돌장승 하나가 의연히 서 있다. 원래 마주보고 있는 돌장승이 하나 더 있었는데, 1963년 홍수 때 떠내려갔다고 한다. 높이 약 3m로 보기 드물게 큰 장승이며, 몸통에 '옹호금사축귀장군'(擁護金沙逐鬼將軍)이라는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수염을 땋아서 왼쪽으로 구부렸고 벙거지 같은 모자를 썼다. 찌푸린 이맛살과 콧등, 물안경을 쓴 듯 튀어나온 두 눈, 주먹 같은 코는 벌름거리는 것 같고, 입술 밖으로 드러난 이빨은 굵고 송곳니는 길게 八자형으로 튀어나왔다. 목에 힘을 준 듯 힘줄이 솟아 있다.
해탈교를 건너면 돌장승 두 기가 서 있는데, 왼쪽 나무 밑에 있는 장승이 대장군(大將軍), 마주보고 있는 장승이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이다. 대장군의 받침돌에는 '옹정삼년을사삼월입동변'(雍正三年乙巳三月立東邊)이라는 각자가 있는데, 옹정 3년은 1725년이다. 높이 2.5m이며, 숱이 많아 보이는 수염은 왼쪽으로 구부러져 있다. 애꾸눈이 안대를 한 듯 검은 줄이 바위 위로 눈과 코, 입을 가르며 그어져 있어 꽤 무서워 보인다. 미간 위쪽에는 불상의 백호와 같이 동글게 도드라진 점이 하나 있는데 매우 독특하다. 눈썹을 치켜올려 한껏 사납게 보이며, 비뚤어진 입은 비죽거리며 조소하는 듯하다. 상원주장군은 눈알이 동그랗게 튀어나왔고 역시 미간 사이에 대장군처럼 백호로 보이는 동그란 점이 조각되어 있다. 두 장승 모두 사찰장승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주는 점이다. 턱수염이 세 갈래로 나뉘어 있는데 점잖으면서도 무서운 인상을 준다. 그 몸통에는 '신해년오월'(辛亥年五月)이라고 각자되어 마주보고 있는 대장군보다 6년 뒤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높이 2.5m이다. 세 장승 모두 거대하고 정교한 작품이며, 옹호금사축귀장군과 상원주장군은 서로 모습이 비슷하고, 대장군이 약간 다른 모습이다. 상원주장군 뒤쪽의 논 가운데에는 입석이 하나 서 있다.
지리산 천년송(千年松)
- 지정 : 천연기념물 제 424호
- 소재 : 남원시 산내면 와운길 249
- 규모 : 수고 20m, 흉고둘레 6m, 수관폭 12m
지리산의 천년송은 수령이 500여년으로 추정되는 소나무로 지리산의 구름도 누워간다고 이름 붙여진 와운마을의 주민 15인이 이 나무를 보호 관리하고 있어 상태가 좋고 수형 또한 매우 아름답다. 와운마을 뒷산에서 임진왜란 전부터 자생해 왔다고 알려져 있으며 20m의 간격을 두고 한아시(할아버지)송과 할매(할머니)송이 자생하고 있는데, 이중 더 크고 오래된 할매송을 마을주민들은「천년송」이라 불러오며 당산제를 지내왔다 한다. 매년 설에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며 지내는 당산제의 제관으로 선발된 사람은 섣달 그믐날부터 외부 출입을 삼가고 뒷산 너머의 계곡(일명 산지쏘)에서 목욕재계 하고 옷 3벌을 마련, 각별히 근신을 한다고 한다.
또한, 현재 거문도에 거주하는 김항신(70세)은 그의 부모가 이 나무에 치성을 드려 본인이 출생했다고 하며 지금도 매년 이 천년송에 제사를 드린다고 한다. 우산을 펼쳐 놓은 듯한 반송으로 수형이 아름다우며 애틋한 전설을 가진 유서 깊은 노거목으로 희귀성과 민속적 가치가 크다.
개령암지 마애불상군(開嶺岩址 磨崖佛像群)
- 지정 : 보물 제 1123호
- 소재 : 남원시 산내면 정령치로 1523
- 시대 : 고려시대
지리산 정령치에 연이은 고리봉 아래 개령암터 뒤 절벽에 새긴 이 마애불은 크고 작은 12구의 불상으로 이루어진 규모가 큰 불상군이다. 울퉁불퉁한 자연암벽이어서 조각 자체의 양각도 고르지 못하고 훼손도 심한 편이나 3구는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이 가운데 가장 거대한 불상은 4m나 되는데 조각솜씨도 제일 뛰어나 본존불로 여겨진다. 얼굴은 돋을새김이지만 신체의 옷주름은 선으로 처리를 하고 있어 일반적인 고려 마애불의 수법을 따르고 있다. 또한 큼직한 얼굴과 형식화된 이목구비, 장대해진 체구와 간략해진 옷주름 등에서도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거불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1∼2m의 작은 불상들 역시 조각수법이 모두 같으며, 각 부분의 양식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서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규모가 큰 불상군은 희귀한 예로서 그 가치가 인정되며,'세전(世田)','명월지불(明月智佛)'등의 글이 새겨 있어 그 중요성을 더해주고 있다.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은 1992년 1월 15일 지정 당시 9구가 지정되었으며 그 후 주불 위의 동쪽 모퉁이 암벽에 불상높이 45㎝, 무릎 폭 25㎝내외의 불상 2구와 우측 편에 선각으로 표현된 불상 1구가 더 발견되어 2000년 9월 22일 추가로 3구를 지정하여 총 12구로 관리하고 있다.
실상사 약수암 목조탱화
- 소재 : 남원시 산내면 입석길 62-249
- 지정 : 보물 제 421호
이것은 화면(畵面)을 불화(佛畵)의 배치구도와 동일하게 배치했지만 나무에 부조로 새겨 후불탱화(後佛幀畵)의 기능을 하도록 한 목조후불탱화이다. 이러한 탱화가 언제부터 조성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현재 조선 후기의 작품들이 10여점이나 남아 있어서 적어도 이 시대부터는 유행했다고 생각 된다.
이 약수암의 목조후불탱화는 이러한 여러 예 가운데 연대(정조 6년, 1782)가 확실하고 작품이 우수하여 당대의 대표작으로 손꼽을만한 것이다. 화면을 상·하단(上·下段)으로 나누었는데 하단에는 중앙에 아미타본존불과 좌우로 관음, 대세지보살 등 4보살을 배치하고, 상단에는 2대제자(二大 弟子)와 지장보살등 4보살을 배치하여 아미타와 협시제자(脇侍弟子) 그리고 8대보살(八大菩薩)을 나타낸 것이다. 하단 본존불의 연꽃대좌에서 뻗어나온 연꽃들이 2제자와 8보살의 대좌를 이루고 이들 협시상 사이로 올라가면서 연꽃봉오리를 만들어 화불(化佛)을 표현하였다.
불상의 형태는 얼굴과 신체 모두 사각형이며 근엄하면서도 친근감이 넘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옷은 두껍고 옷주름은 간략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사각형의 형태와 아울러 둔중한 느낌을 나타내어 조선 후기 불상양식을 썩 잘 나타내고 있다.
백장암 청동은입사 향로(百丈庵 靑銅銀入絲)
- 소재 : 남원시 산내면 천왕봉로 447-76
- 지정 : 보물 제 420호
향로란 절에서 마음의 때를 씻어주는 의미를 지닌 향을 피우는데 사용하는 기구로 화완·향완이라고도 한다. 향로는 모양에 관계없이 향을 피우는 도구를 총칭하는 말이고 화완, 향완은 밥 그릇모양의 몸체에 나팔모양의 높은 받침대를 갖춘 향로만을 말한다. 높이 30㎝, 입지름 30㎝인 이 향로는 몸체와 받침대를 따로 만들어 연결하였고, 전체에 은실을 이용한 장식(은입사)이 훌륭한 작품이다. 입 주위 넓은 테인 전에는 가는 선으로 된 원이 9개가 있고, 그 안에 범자를 새겼고 그 사이에 덩굴무늬를 가득차게 새겼다. 몸통 표면에 이중의 가는 선으로 된 원을 은실로 새기고, 그 안에 5개의 작은 원을 만들고 그 안에 범자를 각각 새겨 넣었다. 원과 원 사이에는 덩굴무늬가 가득 차 있고, 몸통 아래쪽에 두 줄로 18개의 연꽃잎이 있다. 받침대는 2단으로 되어 있으며 ,위에 길쭉한 연꽃잎 6장이 있고 그 아래로 덩굴무늬가 있다. 이 화로에 사용된 은실로 만든 가는 선 모양은 매우 아름다워 놀라울 정도이며, 무늬도 화려하고 우아하다. 입 주위 전 아랫부분에는 글씨가 있어 조선 선조 17년(1584)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실상사 철제여래좌상(鐵製如來坐像)
- 소재 : 남원시 산내면 입석길 94-129
- 지정 : 보물 제 41호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실상사 창건 당시부터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있는 유명한 철불이다. 통일신라 후기에는 지방의 선종사원을 중심으로 철로 만든 불상이 활발하게 만들어졌는데, 이 불상 역시 한 예로서 당시의 불상 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 머리에는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기교있게 붙여 놓았고, 정수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아담한 크기로 자리 잡고 있다. 귀는 그런대로 긴 편이고, 목에 있는 3줄의 주름인 삼도(三道)는 겨우 표현되고 있다.
좁아진 이마, 초생달 모양의 바로 뜬 눈, 다문 입 등의 근엄한 묘사는 이전의 활기차고 부드러운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어깨선이 부드럽고 가슴도 볼륨있게 처리되었지만 전반적으로 다소 둔중한 느낌을 주며, 양어깨에 모두 걸쳐 입은 옷 역시 아래로 내려올수록 무거운 느낌을 준다. 옷주름은 U자형으로 짧게 표현되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에 유행하던 옷주름 표현기법으로 비교적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오른손을 들고 왼손을 내린 9품인 두 손은 새로 찾아낸 원래 철제 손 그대로 1986년도에 복원한 것이다. 이러한 수인은 아미타불의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으로 아미타불일 가능성이 있는데, 흔히 약사불이라고 한다.
무릎 아래 부분 역시 원래 모습대로 복원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특징을 지닌 실상사 철제여래좌상은 긴장감과 활력이 넘치던 8세기의 불상이 다소 느슨해지고 탄력이 줄어드는 9세기 불상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적인 작품이라는 점에 그 의의를 둘 수 있다.
백장암 석등(百丈庵 石燈)
- 소재 : 남원시 산내면 입석길 94-129
- 지정 : 보물 제 41호
석등은 일반적으로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밑에 3단의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는데, 이 석등은 받침의 밑부분이 땅속에 묻혀있는 상태이다. 받침은 가운데에 8각의 기둥을 두고, 아래와 윗받침돌에는 한 겹으로 된 8장의 연꽃잎을 대칭적으로 새겼다. 화사석 역시 8각형으로 네 면에 창을 뚫어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하였다. 지붕돌은 간결하게 처리하였고, 그 위의 머리장식으로는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큼지막하게 올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인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석등의 기본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 하대석(下臺石)과 간주석(竿柱石), 그리고 상대석(上臺石)과 화사석(火舍石), 옥개석(屋蓋石) 등을 갖춘 석등이다. 하대석은 단엽8판(單葉八瓣)에 복련(覆蓮)을 새겼고 각 연판(蓮瓣)안에는 4엽이 있는 화문(花紋)을 장식하였다. 또한 간주를 받는 받침 측면에는 입상형(入狀形) 연화문(蓮華紋)을 새겨 화려한 장식법을 썼다. 8각의 간주는 일반적인 것이다. 간주 위에 놓여 있는 상대석은 단엽 8판의 앙련(仰蓮)을 새겼으나 각 연판안에는 하대석의 연판과 같이 4엽 화문을 장식하였다. 그리고 앙련이 연판 끝 부분에서부터 위쪽은 8각을 이루었고 그 연판에 높은 난대(欄帶)를 새겼는데 여기에 보이는 동자주(童子柱)와 선문(線文)의 형식은 주목된다. 이 상대석 위로 8각의 화사석을 얹고 있으며 화사석에는 장방형의 화창(火窓)이 4편에 뚫려 있고 장식은 전혀 하지 않았다. 석등의 옥개석은 간결하며 평평하고 얇은 낙수면을 갖추고 있다. 옥개석 상단에는 보주(寶珠)를 갖추고 있는데 보주는 단엽앙련으로 연봉형이었으나 몇 해전 누군가가 가져가 지금은 그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는 통일신라시대의 기본 형태를 갖춘 석등으로 같은 경내에 있는 석탑과 같이 나말(羅末)인 9세기경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다.
백장암(百丈庵) 삼층석탑(三層石塔)
- 지정 : 국보 제 10호
- 소재 : 남원시 산내면 입석길 94-129
- 시대 :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석탑양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조성된 이형석탑이다. 네모난 지대석 위에 기단 없이 몸돌받침에서 시작하여 3층 지붕돌까지 3층의 탑신부가 올려져 있으며, 각 부재마다 화려하고 섬세한 조각이 빈틈없이 장식되어 있어 눈부시다. 지대석 위에 놓인 별석인 굄대 위에 1층 몸돌이 올려져 있으며, 굄대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으나 아래쪽 사방에 난간을 양각한 것이 눈에 띈다.
1층 몸돌은 폭에 비해 높이가 높으며 2·3층 몸돌의 체감률은 크지 않다. 층층마다 몸돌 하단에는 목조건물의 난간을 조각하였고, 상단에는 목조건물의 각종 구조를 새겨놓았다. 몸돌에 우주는 없으며, 초층의 한 면에는 문비형 좌우에는 보살상과 사천왕상이 1구씩, 나머지 세 면에는 갖가지 불구(佛具)를 든 보살상·사천왕상·동자상이 장식돼 있다. 2층 몸돌 각 면에는 주악천인상 2구씩, 3층 몸돌에는 천인좌상 1인씩을 조각했다. 지붕돌은 각 층 모두 처마가 직선이고 추녀의 반전이 경쾌하다. 낙수면은 얇고 평평하며, 지붕돌받침을 두지 않은 것이 특이하다. 1·2층 지붕돌에는 층단식 지붕돌받침 대신에 앙련이 조각된 네모난 돌을 끼웠으며, 3층 지붕돌 밑에는 삼존상을 조각하였다. 상륜부는 노반·복발 · 앙화 · 보개 · 보륜 · 수연 등이 찰주에 차례로 꽂혀 있는 온전한 모습이다. 기단(基壇) 구조(構造)와 각부(各部) 장식 조각에서 특이한 양식을 보여 주는 전고(全高)의 이형석탑(異形石塔) 이다.
기단부(基壇部)는 방형(方形)대석(臺石)을 놓아서 기단을 삼았으며 그 위로 방형(方形) 3층 탑신부를 놓고 있다. 탑신부(塔身部)에 있어서 아래층 탑신은 폭(幅)에 비해 높이가 높으며 2층, 3층의 탑신은 일반 석탑에서와 같이 축도가 심하지 않다. 옥개석(屋蓋石)의 옥개받침에 층단을 두지 않은 것도 특이하다.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 복발(覆鉢), 보개(寶蓋), 수연(水煙)이 완전한 찰주(擦柱)에 겹쳐 있는 것도 희귀한 예이다.
탑 전체의 구조가 특이할 뿐만 아니라 각층 탑신 상부에는 목조건축(木造建築) 의 두공형을 모각(模刻)하였다. 1층 탑신 4면에는 보살상과 신장상 2구씩을 배치하고 2층 탑신에는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 2구씩을, 3층 탑신 4면에는 천인좌상(天人坐像) 1구 씩을 각각 새기고 있어 탑신 전체가 천인(天人), 보살(菩薩), 천왕상(天王像) 등으로 가득 찬 화려한 탑이다. 이상으로 볼 때 탑의 구조가 전형적인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로운 설계에 의해 구성된 참신한 통일신라(統一新羅) 하대(下代)의 아름답고 대표적인 석탑의 하나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