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자신이 빌미가 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많은 학자들이 당한 고통에 책임감을 느껴 조선어학회를 재건, 우리말 큰사전 편찬을 다시 시작하였으며 각 대학과 국어교사 양성소에서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한자 안 쓰기 문제’, 김원표와 함께 ‘중등 국어 독본’, 시가집으로 ‘아름다운 강산’, ‘고어독본’ 등의 책도 저술하였다.
1949년 9월 25일 조선어학회를 한글학회로 개편할 때, 학회 이사로 선출되어 활동하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고향인 파주로 피신, 1951년 1,4후퇴 때에는 부산으로 피난하였다. 피난생활 속에서도 우리말 큰사전 편찬사업을 멈출 수 없다는 일념에 상경하였다가 식량을 구하러 파주로 오던 중 타고 있던 군용트럭이 전복돼 1952년 11월 2일 50세를 일기로 안타까운 생을 마감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1997년 11월에는 국가보훈처에서 선정한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1998년 문화관광부가 선정한 ‘이 달의 문화인물’에 선정 되었다. 2000년 파주시에서는 선생의 생가 터에 기념관을 건립하고 2001년 12월 21일 광탄면 영장리로 이장한 선생의 묘소를 파주시향토유적 제15호로 지정하였다. 한글학자이니만큼 비석 글씨가 한글로 되어있어 특히 인상적이다. 관람시간은 매주 화요일부터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이다.
취재 : 김순자 시민기자
출처 : 파주시 싱싱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