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매(探梅)의 시공(時空) 속에서
석호 서기식
길고 너무나도 추웠던 지난겨울을 매화향기처럼 이겨낸 행복한 십오탐매인(十五探梅人)들은 지리산자락 ‘남사예담촌’에 담기어 긴 시간동안 온 세상을 사진에 담고 가슴 가슴마다에 매화향기를 담기에 바빴다.
조선(朝鮮)의 성삼문(成三問)은 다른 꽃들과 다투지 않고 제일 늦은 계절에 피는 국화를 좋아하였고, 진나라 도연명도 국화를 사랑했다.
동진(東晋) 때, 왕희지(王羲之)의 아들 휘지(徽之)는 대나무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고 했고, 초(楚)나라 굴원(屈原)은 난초를, 원나라 정사초(鄭思肖)는 나라 잃은 설움을 노근난을 통해 정신적 벗으로 삼았다고 한다.
남송(南宋)의 양무구(楊无咎)는 일생동안 목매화만 그렸고 특히 퇴계 이황 선생은 매화를 너무나 사랑하여 “얘들아 매화에 물을 주어라.”는 유언까지 하셨다고 한다. 이처럼 문인 관료, 선비들은 사군자처럼 맑음을 가슴에 담고 살아갔다.
우리에게도 새롭게 매화를 탐색하여 꽃피울 수 있는 문인의 향기가 살아 있었기에 붓 한 자루 쥐고서 길을 나설 수 있었던 게 아닌가! ‘동정수묵회’ 회원님들과 한분의 초대한 묵객이 봄소식을 전해 들으려고 탐매에 나섰다. 일기도 화창한 삼월하순! 잘 계획된 일정에 따라 먼저 도착한 곳이 산청삼매의 고장이다. 고려 말에 원정공(元正公) 하즙(河楫)선생이 심은 원정매와 동시대에 강회백(姜淮伯)선생의 정당매(政堂梅), 그리고 선조대왕이 영전에 사제문(師弟文)까지 내리셨던 남명 조식선생의 남명매(南冥梅)를 찾았다. 깨끗하고 향기로운 선비, 옥을 가슴에 품은 채 은거한 선비의 고귀한 정신과 삶의 향기를 마음가득 담았기에 모두가 참 행복해보였다. 지인식객의 소개로 고향맛보다 더 향기 나는 맛있는 점심을 먹고는 순천 선암사에 들렸다.
찬바람에 육백년을 넘게 살아온 선암매는 추위와 다투느라 작고 붉은 꽃망울들이 조금씩 입을 벌리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잔돌들이 깔려있는 울퉁불퉁한 앞마당에서 불변함도 아랑곳 않고 깔판위에 화선지를 펴서 휘호했다. 쌀쌀한 날씨에 그 광경을 지켜보는 나는 그저 넋을 잃고 감동을 가슴에 담고 있었다. 동정 김인종 선생을 사사한 여류 문인화가(文人畵家)들은 순식간에 줄기를 그어대며 힘차고 간결하며 욕심 없이 소박한 마음에 향기를 담아 두 세 송이의 홍매화가 피어나니 행복은 소리 없이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휘호를 마치고는 경내에 있는 여러 그루의 매화를 다 만나보는 사이에 날이 저물러 가기에 숙소로 발길을 돌렸다. 상사호가 내려다보이는 호수에 총총히 박힌 별은 어느새 곤히 잠든 창가에 찾아들었다. 아침을 먹고서 십오탐매인(十五探梅人)은 지난밤 적막 속에 잠들었던 금둔사(金屯寺) 홍매를 만나러 길을 나섰다.
햇빛에 더욱 붉어진 매화는 다소간 수줍은 듯 경내에 피어있는 꽃향기를 모아 낙안읍성으로 날려 보내고 있었다. 여기서 수도하는 사문(沙門)들은 홍매(紅梅)의 유혹을 이겨내고 자유로이 “인생경계(人生境界)를 넘나 들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너무나 탐스럽게 피어있는 붉은 꽃잎을 보고 ‘또 만나자!’는 안부를 전하고는 집으로 왔다.
공리와 행복, 그리고 서로의 가치가 경쟁하는 사회를 정의라고 본 마이클 샌델(Michael J.Sanedl)의 이야기를 닮은 매화들! 금둔사 홍매(金芚寺 紅梅)는 떠나는 묵객의 마음을 기쁘게 했고 아직도 잠에서 덜 깬 선암사선암매(仙巖寺仙巖梅)는 4월이 오기 전에 일어날 테니 며칠만 기다려 달라하고. 산청삼매(山淸三梅)들은 충신과 선비의 절개를 닮아 서로 다른 모습으로 의연히 서 잇는게 아닌가! 감동을 담아온 가방을 열어보니 한 권의 책속에 아직도 매화향기가 남이 있어 이를 안주삼아 일배주(一杯酒)를 하고 잠이 들었다.
1박 2일을 탐매하신 회원님 모두가 행복하셨기에 이번여행은 유익하고 정의로운 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딱 하룻밤을 보내고 이틀을 걷고 타고 다니시며 행복을 체험하시고 맑음을 모으시느라 수고들 많았습니다.
행각해보니, 탐매한 시간들이 너무나 좋았기에 벌써부터 새벽 연꽃이 벌어지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삶도 행복하고 아름다운 날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는 하얀 민들레처럼 떠나겠지만 함께 있을 때 서로가 상대방의 가치를 받아들이고 작은 고마움에도 행복해하는 아름다운 사람이길 바랍니다. 매화 찾는 문인묵객이 어찌 우리뿐 이겠습니까마는 그래도 탐매시간동안만은 우리를 만난 사람들은 우리뿐 이었으니까요.
자기 인생의 주인은 자신이고 자기는 가정의 주인이고 나라의 주인이며 행복한 삶의 주인입니다, 주인이 행복해야 온 세상 사람들이 행복할 것입니다.
끝으로, 동정선생님을 비롯한 회장님, 총무님! 그리고 행복한 웃음 머금고 태워주시고 태워 오신 세 분 선생님의 노고와 회원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자연과 우리들이 함께 만든 보석 같은 추억들이 세월이 많이 흐른 훗날에는 우리가 먹고살아 갈 에너지가 될 것입니다. 기분이 좋은 것이 자신의 행복이니 절대로 화는 내지 마시고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늘 가까이에 붓이 있고 점 하나에도 향기가 있으니까요. 추워도 향기를 잃지 말고 심기(心氣)를 평온히 하고 매화 같은 삶이 되어 오래토록 행복하시기를 빌어봅니다.
2011년 3월 28일
우청재(雨晴齋)에서 서기식(徐基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