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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은 장헌대왕(세종)이 묻힌 곳인데, 용이 몸을 돌려 자룡으로 입수하고, 신방에서 물을 얻어
진방으로 빠지니 모든 능 중에서 으뜸이다.”-이중환의≪택리지≫에서
"영릉은 조선 왕릉 가운데 최고의 명당으로서 바로 그 자리 때문에 조선 왕조가 100년은 더 연장되었다."
(英陵加百年) -조선의 풍수사들
"세종대왕릉은 조선 왕릉 중에서도 상감청자다." -풍수학자 장영훈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에 있는 세종대왕의 영릉(英陵, 사적 195호)을 두고 격찬하는 말들이다.
세종대왕 영릉 좌우 경사면을 비롯한 후면의 소나무를 살펴보면 정사를 보는 대전에서 신하가 왕에게 공손히
예를 하는 모습과 같이 소나무가 좌우에서 능 쪽으로 기우러져 자라고 있다.이는 성군에 대한 예를 갖추고
있는 듯 한 모습으로 볼 수 있다.
풍수지리적 입지는 남쪽에 있는 북성산(해발 250m)에서 북으로 낮게 용맥은 이어지고 42번 국도를 지나면서
서서히 기룡하여 서북으로 지맥을 내어주고 본룡은 동으로 방향을 틀어 넓고 풍만하게 용체를 만들면서 용맥이
출발한 북성산 즉, 조산(祖山)을 바라보는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을 하고 있다.
북으로는 남한강이 등지고 동에서 서로 흐르고 있으며 왕릉의 내수는 남으로 흘러 다시 동으로 물길을 잡아
최종적으로는 북으로 흘러 남한강에 합류하고 있어서 완전히 환포하고 있다.
따라서 이곳은 산의 흐름과 물길이 산수태극으로 음양이 상배하여 좋은 기운을 갈무리하는 곳이서 풍수지리적으로
천하의 최고 명당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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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거든 내가 잡아놓은 자리에 반드시 묘를 쓸 것이며
후일 너희들이나 너의 자손들이 아무리 잘되고 가문이 번창해도
묘앞 냇가에 다리를 놓지 말고 제실(祭室)이나 사당(祠堂)을
짖지 말도록 하라."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李仁孫 1395~1463)이 이렇게 유언을
남기고 저 세상으로 떠났다. 이인손이 세상을 떠나자 명지사를
초빙해 하늘의 신선이 하강하는 천선강탄형(天仙降誕形),
신선이 앉아있는 선인단좌형(仙人單坐形)의 명당 터에
예장하였다.
그 명당에서는 과연 최고의 명당답게 엄청난 복(福)이 밀려들었다.
광주 이씨 문중은 이인손의 유언을 그대로 지켰다. 그러자 이인손의 친자 5형제와 종형제 3인을 합해 '팔극조정(八極朝廷)'
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정승, 판서가 가문에서 쏟아져 나온 것이다.
자식들은 고관대작이 되다보니 아버지의 묘소에 갈 때마다 양반 체면에 다리도 없는 냇물을 신발 벗고 건너야 하는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또 성묘할 때 눈비라도 내리면 피할 곳이 없었다. 멀리서 온 자손이 잠잘 곳도 없이
모이자마자 헤어져야 하는 등 제사를 지낼 때마다 고역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유언을 묵살하고 형제들이 의논하여
앞 냇가에 다리를 놓았고 제실(祭室)도 큼지막하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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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인릉에 있던 세종의 영릉을 천장하기 위해 지관들이 한양에서 백리 안의 능 자리를 찾아 나섰다.
마땅한 묘 자리를 찾지 못했다.여주 이천 쪽으로 새로운 능 자리를 찾으러 나온 안효례 지관 일행이
며칠을 돌아다니다가 현재 영릉 부근을 지나던 중 갑자기 소낙비를 만났다. 그곳은 집한 채 없는 온통
논과 밭뿐인 인적이 드문 호젓한 산골길이었다. 일행은 황급한 나머지 비를 피할 곳을 두리번 거리며
찾던 중 저 멀리 다리 건너에 제실(祭室)이 눈에 들어왔다.
우선 소낙비를 피할 요량으로 다리를 건너 제실에서 비를 피하게 되었다.
소낙비가 그치자 주위를 돌아본 안효례는 깜짝 놀랐다. 그곳이 바로 자신이 찾아다니던 천하의
명당이었기 때문이다. 소낙비를 피하게 만들어준 고마운 묘택의 묘비를 보니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의 것이었다.
정승을 지낸 분의 묘택으로서 훌륭한 대명당(大明堂)임에는 분명하였으나 그 자리는 군왕(君王)이 들어설 자리이지
정승(政丞)이 들어 갈 자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연신 탄성을 내지르면서 생각에 잠겼다.
“이런 명당 터는 조선에 다시 없다. 성스러운 세종대왕(世宗大王)의 묘택(墓宅)으로서는 여기가 최적지다.
그러나 이미 이인손(李仁孫)이 묘를 썻으니 어찌할꼬!”
산도(山圖)를 열심히 그려 궁궐로 돌아와 예종(睿宗)께 복명하기에 이르렀다.
왕은 지관들을 불러다 놓고 묻는다.
"경 등이 답사한 결과 명당이라 할 만한 곳이 과연 있었던고?"
안효례가 답한다.
"예, 두루 살펴본 결과 몇 군데 능산(陵山) 자리가 될 만한 터는 있었으나 천하 대명당 자리로
손꼽을 만한 곳은 딱 한자리가 있사옵니다. 여흥(驪興) 북쪽에 큰 골짜기가 하나 있는데 산의 형세가
떡 벌어져서 주산(主山)과 무덤자리가 분명한 곳으로, 풍수법(風水法)에 이르기를 산이 멈추고
물이 구부러진 곳은 자손이 크게 번성하고 천만세 동안 승업(承業)을 이어간다고 하였는데,
즉 이곳이 그곳으로 사려 되오며, 신이 본 바로는 능을 모실 터가 이보다 나을 곳이 없을 듯합니다.
(驪興之北. 有一大洞. 岡巒列勢. 主對燦然. 法曰山頓水曲子孫千億. 此臣等所相. 陵寢所安, 無右於此)."
예종은 그 후로 여러 날을 고심한 끝에 묘책을 생각해내고 당시 평안도 관찰사로 있던 이인손의 큰아들
이극배(李克培 領議政. 廣陵府院君)를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아무리 지존무상의 대왕이지만 사대부의
묘택을 함부로 어찌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예종은 인간적인 호소를 하였다. 말하자면 그 명당 터를 양도해달라는 은근한 압력을 우회적으로
구사하였던 것이다. 원래 왕은 용상(龍床)에 앉아서 말하는 것이 상례이거늘, 그 옆에 돗자리를 깔아
이극배를 앉게 하고 왕도 용상에서 내려와서 친히 그 옆으로 바싹 다가앉아 극배공(克培公)의 손목을 잡으며,
"경은 얼마나 복이 많아서 선친의 산소를 그렇게 좋은 대명당에 모시었소? 짐은 삼천리 강산을 갖고 있으되
조부 세종대왕을 편히 쉬게 할 곳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으니, 나라에 극심한 한발과 폭풍우로 곤란을 겪는 일이
발생하고 있으니 그저 경들이 한량없이 부럽기만 할 따름이오."
하면서 수차에 걸쳐 애원하다시피 이를 되풀이하니 바로 명당 터를 양보해달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이인손의 묘를 파서 유해를 들어내니 그 밑에서 비기(秘記)를 새겨 넣은 글귀가 나왔다.
이를 본 모든 사람들이 대경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자리에서 연(鳶)을 날리어 하늘 높이 떠오르거든 연줄을 끊어라. 그리고 연이 떨어지는 곳에
이 묘를 옮겨 모셔라.' 장례를 할 때 벌써 이장의 운명을 알았던 것이다.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 그렇게 하니 과연 연은 바람에 날리어 서쪽으로 약 10리쯤 밖에 떨어졌다.
그곳에 가보니 대명당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아늑한 터로써 자손이 번창할만한 곳이었다.
이리하여 이인손의 묘는 현재의 영릉자리에서 서쪽으로 10리쯤 되는 곳으로 옮겨졌으니,
그곳을 이름 하여 연이 떨어졌다 해서 연주리(延主里: 지금의 新池里)로 불렀다.
그 자리에 이장을 한 후에도 대명당(大明堂)은 못되더라도 아늑한 자리로서 자손이 번창하여
수백년이 지난 오늘까지 후손들의 제향(祭享)을 받는다.
이인손의 슬하에는 이른바 오극자손(五克子孫)이라고 불리는 극배(克培), 극감(克堪), 극증(克增), 극돈(克墩),
극균(克均)의 다섯 아들이 있었다. 큰아들 이극배가 영의정, 둘째 극감이 형조판서, 셋째 극증이 좌참찬,
넷째 극돈은 좌찬성 다섯째 극균은 좌의정이 되어 세칭 오군(五君)집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그 후로도 정승, 판서, 고관대작들이 줄줄이 나오는데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영릉의 명당 묘 자리를 빼앗긴 광주 이씨 이인손의 후손들은 새로운 묘 자리가 발복하기 까지 수많은 화를 당했다.
이인손의 막내아들 이극균은 좌의정에 오른 뒤 연산군의 폭정을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나중에는 부관참시까지 당하였다. 이극균의 아들인 남양 부사 이세준과 이극감의 아들 이세좌는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가지고 갔다는 죄명으로 처형당했다. 이세좌의 아들 수원, 수형, 수의, 수정 등
4형제는 참수 당했고 세좌의 동생 이세걸도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른바 갑자사화(甲子士禍)로 광주이씨 이인손의
후손들은 30여명이 화를 당했다.광주 이씨 집안은 쑥대밭이 되다시피 했지만 얼마 후 다시 번창한다.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준경(李浚慶)을 비롯하여 선조 때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으로 유명한
이덕형(李德馨) 역시 광주 이씨이며 영의정을 지냈다. 예조참판 이극기, 이조참판 이중경 병조판서 이윤우,
판서 이원정, 대사성 이정립 등이 후날 가문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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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 곡장 뒷쪽에 불록하게 나온 잉(孕)이 참으로 실하다.
북쪽에서 내달려온 생기는 이곳 잉(孕)에서 재충전된다.그리고는 사초지 위에 있는 봉분 속의
하현궁으로 들어가 무한한 복(福)을 분출하고 있다. 동기감응(同氣感應)이라고 했다.
세종대왕 영릉은 본래 서울 강남구 내곡동 대모산 아래 아버지 태종이 묻힌 헌릉(獻陵) 서쪽에 있었다.
세종은 소헌왕후가 죽은 후 부모가 묻힌 서울 내곡동 헌릉 서쪽에 쌍실 무덤으로 영릉을 만들었다.
그가 죽은 후 묻힐 수강릉(壽康陵)으로 조성되었다. 그곳은 풍수지리학 적으로 좋지 않았다.
풍수가 최양선이 ‘후손이 끊기고 장자를 잃는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영릉의 광중에서는 물이 고였다.
“하늘아래 지존이신 대왕이 묻힐 곳이 못된다.”
지관들과 신하들의 진언과 상소가 이어졌다. 최고의 성군이자
효자인 세종은 이렇게 답한다.
"나는 왕의 자리까지 올랐다. 여기서 또 조상으로부터 발복을 기대하겠는가?
부모님 묘 근처보다 더 좋은 명당이 어디 있겠느냐!"
세종은 물이 찬 그 자리에 소헌왕후를 모시고 자신도 헌릉 서쪽 왕비 소헌왕후
곁에 잠든다. 세종대왕을 그곳 헌릉에 모시고 난 뒤 문제가 많이 발생 했다.
세종의 큰아들 문종은 병으로 즉위 2년 만에 승하하였다. 문종의 큰아들 단종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으나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고 비명에 죽었다. 세종의 둘째 아들 세조(수양대군)는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되었으나 얼굴과 몸에 부스럼이 나는 병에 걸려 살이 문드러지는 고통에 시달렸다.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는 20세에 요절하였다. 예종의 장자인 인성대군도 일찍 죽었다.
세종대왕이 여주 영릉으로 옮기기까지 19년 동안 왕이 4명 바뀌었고 왕실에서는 흉사(凶事)가
끝일 날이 없었다. 예종은 세종의 영릉 지하에 찬물이 든 냉혈(冷穴)로 시신이 썩지 않고
생시(生屍)로 있기 때문에 흉사가 일어나므로 이장하자는 주장을 받아들인다.
마침내 예종은 신하들의 상소에 못 이겨 천장을 결심하고 전국에서 뛰어난
지사(지관)를 선발하여 세종대왕을 모실 명당을 찾으라고 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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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세종대왕릉은 누가 보아도 "명당은 저런 것이구나"라고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빼어난 조선왕릉이기도 하다.
뒤쪽에서 들어오는 생기 지맥과 앞쪽에서춤추듯 다가오는 주작상무(朱雀翔舞)에 탄성마저 나온다.앞쪽의 북성산 지맥이 이곳으로
뻗어와서 다시금 영릉이 정남향으로 이를 처다봄에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이라고 했고 정작 영릉 자리의 강이 아주 단정하고
품위 있게 앉아 있어 모란반개형이라고 한다.
또한 주위의 산자락들이 봉황의 날개처럼 펼치고서 영릉을 품어준다고 하여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이며 북성산이 봉황현상을
이루었기에 양봉상락형(兩鳳相樂形)이다.또한 앞쪽 안대에 해당하는 산세들이 순하게 복종하며 이곳을 항하여 읍하기에 이를
군신조회격(君臣朝會格)이라 하며 더 들추면 봉황포란형에 기치창검형(旗幟槍劒形)까지 튀어나온다."
-장영훈의 책 <왕릉풍수와 조선의 역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