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전 : 인과는 결코 사람을 속이지 않습니다
해현스님의 속성은 문씨이고 이름은 천현(川賢)이며 자(字)는 청선(淸選)입니다. 고향은 예남 당하현 소배사진으로 청나라 말기인 1900년 8월 19일에 태어나셨습니다. 부모님과 조부 모두 신심이 돈독한 불자로 농사를 지으며 남에게 베풀기 좋아하셨습니다.
세간에 흔히 하는 말로 ‘태평시대의 개로 태어날지언정 난세에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해현스님에게는 형제자매가 5명이 있었는데 부모님께서는 힘들게 자식을 기르셨는데 그 어려움은 차마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스님이 10살이 되었을 때 고향에 가뭄이 들어 생활이 어려워서 아버지는 식량을 구하고자 집을 떠났습니다. 호북성 수주지역에서 마을이 도덕 떼에 의해서 불타는 것을 보고 물을 길어 불을 끄다가 살피러 되돌아온 도적들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해현스님: ‘부친은 식량을 구하러 가셨다가 도적한테 맞아서 돌아가셨어’
나중에 마을로 돌아온 촌민이 동네를 도우려던 은인의 시신을 굶주린 개들이 지키고 있던 것을 보고서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개조차도 은인의 고마움을 알고서 보답하는데 하물며 인간으로서..! 촌민들은 뜨거운 눈물을 머금고서 스님의 모친이 시신을 고향으로 모시고 가도록 하였고 마을 어르신의 예로써 안장했다고 합니다.
스님은 어린 시절 자신 주변에서 벌어진 가슴 떨리는 몇 가지 사건으로 놀라 정신이 번쩍 들었고, 염불하여 극락왕생하고자 하는 굳은 마음을 갖도록 하는데 있어서 큰 작용을 하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그 당시 고향 친척 가운데 가족이나 이웃들과 수시로 욕하고 싸우는 성격이 아주 못된 아줌마가 있었습니다. 어느 한번은 친척과 싸우고 욕하면서 옷까지도 찢어버리기까지 했습니다. 나중에 그 당시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인과응보의 결과가 연달아서 발생하였는데 아줌마가 낳은 아들 4명이 전후로 해서 다 요절하게 되었습니다. 아줌마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혀를 자주 깨물어 피가 나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결국 혀가 끊어져서 밥을 먹기 힘들어지고 결국 32살에 딸을 낳고 몸조리를 하다가 고통스럽게 죽고 말았습니다. 당시에 ‘사람이 착하고 아량이 있어야지 절대 나쁜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시던 모친의 말씀이 어린 스님의 머릿속에 깊게 각인되었다고 합니다.
마당에 심은 동과(冬瓜)를 사촌동생이 훔쳐갔는데, 어린 마음에 내 동과를 누가 훔쳤는지 종기가 나고 아프라고 입으로 계속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생각지도 않게 3일후, 사촌동생이 정말 병이 나서 자리에 드러눕게 되었고, 숙모가 찾아와서 사촌동생이 동과를 땄다고 네가 그렇게 저주를 해대니까 온몸에 종기가 나서 아파죽겠다고 난리라면서 제발 그만 하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얼른 났게 해주세요. 얼른 났게 해주세요라고 염송하였고 사촌동생이 정말 곧바로 나았다고 합니다.
"아~ 사람의 생각이 이렇게도 큰 위력이 있고 이렇게 크게 작용을 하는 것이구나" 하고 깨닫고 나서 다시는 남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인생에 대해 깊은 생각을 갖고 있던 스님은 이 일로 인해서 훗날 염불수행법문에 대한 신념에 흔들림이 없었고 결국에는 극락왕생의 정과(正果)를 성취하시는데 있어서 견실한 기초를 쌓게 되신 것입니다.
스님이 18살 때, 다리에 악성종기가 나서 짓무르고 헐게 되자 모친은 사방으로 약을 구하고 의사를 찾아다녔지만 전혀 났지 않았습니다. 스님은 인과에 의한 것임을 아시고 ‘원한으로 찾아온 병은 신통한 약으로도 치료하기 어렵다.’라고 탄식하시고 치료를 멈추시고는 조석으로 관세음보살 명호를 염불하였습니다. 한 달여 지나자 전혀 차도가 없던 질환이 저절로 나았다고 합니다. 스님은 이로 인해서 더욱 굳은 신심으로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하시고 허투로 하는 말씀이 전혀 없으셨습니다.
불보살께서 ‘세간의 괴로움을 다 제도하였다(度一切苦厄)’고 말씀하셨듯이 인과는 결코 사람을 속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생사의 큰 재난을 겪으시면서 해현스님은 윤회의 길이 험난하고 생사를 가늠하는 일이 중대함을 깊게 깨달으시고서 세속을 떠나려는 마음을 내게 되셨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賢公和尚 佛門榜樣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