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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홍길동은 조선 연산군 때 충청도 일대를 중심으로 활약한 도적떼의 우두머리다. 선조 때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의 모델이 되었는데 임꺽정, 장길산과 더불어 ‘조선 시대의 3대 도적’으로 손꼽힌다.
우리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부조리한 제도와 권력에 대한 민중의 저항은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임진왜란의 참화가 전 국토를 휩쓸고 지나간 조선 광해군대에 지배계층이었던 양반사대부들은 도탄에 빠진 민생을 살피기는커녕 치열한 권력다툼 속에서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영속시키는 데 전념했다. 이와 같은 현실을 직시한 허균은 불합리한 서얼 차별과 백성에 대한 가혹한 수취, 국방에 대한 부실 등의 개혁을 주장하면서, 국왕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로지 백성뿐이라고 역설했다.
허균은 〈호민론〉에서 백성을 현실에 순응하는 항민(恒民), 불만이 쌓인 원민(怨民), 사회를 바꾸기 위해 직접 나서는 호민(豪民)의 세 부류로 구분한 다음, 호민이 반기를 들고 일어나면 원민들이 소리만 듣고도 저절로 모여들고 항민들도 살기를 구해 따라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지은 소설 《홍길동전》을 통해 호민의 대표로 홍길동이란 인물을 형상화했다.
그런데 홍길동은 가공의 인물이 아니라 연산군대에 얼자의 신분으로 도적떼의 두령이 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실존인물이었다. 인조대의 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그를 장길산, 임꺽정과 함께 조선 시대의 3대 도적으로 꼽기도 했다.
말년에 서얼들과 함께 혁명을 꿈꾸다 비참하게 죽음을 당한 허균이 자신이 쓴 소설의 주인공으로 그의 이름을 차용했다는 것은 여러 모로 의미심장해 보인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홍길동에 대하여 탐관오리를 징치하고 핍박받는 서민들을 위해 싸운 의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실제로는 그가 의적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민중들은 부정한 체제, 무자비한 권력에 대한 저항의 원동력으로서 치열한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성종에서 연산군으로 이어지던 시기에 조선은 《경국대전》으로 법률체계를 완비하고 국가의 기틀을 바로잡았다. 그 무렵 조정에서는 세조대부터 권력을 틀어쥐고 있던 훈구파와 성리학을 바탕으로 새로운 정치체계를 꿈꾸며 출사한 사림파가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와 같은 고관대작들의 정쟁에 편승한 지방의 수령과 이속들이 한통속이 되어 가렴주구를 일삼자 수많은 양민들이 터전을 잃고 고향을 떠났다. 그들 가운데 일부가 도적떼로 변신하여 자신들을 핍박했던 양반가나 관청을 습격하여 재물을 빼앗았다. 그때 가장 강성했던 도적떼의 두령이 바로 충청도를 거점으로 활동했던 홍길동이었다.
1986년에 발표된 박종현의 논문 〈실존 홍길동 연구〉에 따르면 홍길동은 본관이 남양으로 경성절제사를 지낸 홍상직의 아들이었다. 홍상직은 정처인 남평 문씨로부터 귀동(貴童)과 일동(逸童) 두 아들을 얻은 뒤 관기 출신의 비첩 옥영향으로부터 셋째아들 길동(吉童)을 얻었다. 그런데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도적 홍길동의 한자명은 길동(吉同)이라 양자가 실제로 동일인인지는 분명치 않다.
홍상직은 《홍길동전》에 나오는 홍판서보다는 낮은 벼슬을 지냈지만 고위 관료 출신임에는 분명하다. 실록에는 그의 내력이 소략하나마 전해지고 있다. 그는 1420년(세종 2년) 10월 24일 경성절제사에 제수되었는데, 2년 뒤인 1422년(세종 4년) 12월 1일 직분을 게을리 하고 백성들을 핍박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당시 그는 야인이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백성들에게 목책을 보호하라고 명했지만 듣지 않자 부하를 시켜 그들의 집을 불태웠고, 어떤 사람이 남도의 병선이 습격할 것이라는 거짓으로 고하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거리자 백성과 서리들이 소란을 피웠다. 이에 따라 의금부에 끌려온 그는 제조 유정현이 자신에게 뇌물을 요구했는데 거절하여 옥에 갇힌 것이라고 항변했다. 의금부에서는 그의 죄상이 참형에 해당되었지만 무고죄만 적용시켜 경상도 동래로 귀양을 보냈다.
1년 뒤인 1423년(세종 5년) 12월 9일,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홍상직은 향리인 경기도 파주군 적성에서 요양했다. 그러나 국청에서의 가혹한 추국과 유배지에서 얻은 장독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이듬해인 1424년(세종 6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홍길동은 이듬해인 1425년(세종 7년)에 파주가 아니라 전라도 장성현 아곡리 아치실 마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조선 후기의 학자 황윤석의 《증보해동이적 해중서생》에 실린 기사를 근거로 하고 있다.
‘옛적에 듣자니 국조 중종 이전에 홍길동이란 자가 있었는데 이는 상신 일동의 얼제로 장성 아차곡에서 살았다. 재기를 믿고 스스로 뽐내고 있었는데 국법이 벼슬이나 청현직에 나아갈 수 없도록 함에 얽매어 하루아침에 갑자기 도망쳤다.’《증보해동이적 해중서생》, 황윤석
그렇다면 홍상직이 유배지에서 풀려난 뒤 한동안 장성에 머물며 관기 옥영향을 취하여 길동을 얻었고, 실록에 있는 그의 거주지나 사망 기록이 잘못된 것이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겠다.
1428년(세종 10년) 10월 28일 예조에서 전국의 효자(孝子)·순손(順孫)·절부(節婦)를 보고하는 그의 정처인 남평 문씨가 남편의 무덤 곁에 여막을 세우고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올리면서 삼년상을 치렀고, 이후에도 삭망과 속절에 제사지냈다고 보고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1444년(세종 26년) 7월 22일에는 홍길동의 생모인 기녀 옥영향의 진술을 토대로 함길도 도관찰사에게 재직시 비행에 대해 추문하여 핵실하도록 명했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서거정의 《필원잡기》에는 그의 이복형 홍일동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는 조카 단종을 몰아낸 조의 쿠데타에 참여하여 원종공신 2등훈에 책록되었고 벼슬이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성품이 천진하여 겉치레를 하지 않았고 사부(詞賦)에 능했는데 거문고를 잘 탔고 취하면 풀잎으로 피리소리를 냈다. 거구에다 대주가에 대식가였던 그는 언젠가 진관사에서 놀 때 떡 한 그릇, 국수 세 주발, 밥 세 바릿대, 두부국 아홉 주발을 먹었다. 그런데, 산 밑에 이르러 대접하는 자가 있자 또 찐 닭 두 마리, 물고기국 세 주발, 생선회 한 쟁반, 술 마흔 잔을 마셨다. 세조가 그 일을 듣고 감탄하면서 장사(壯士)라고 탄복했다. 하지만 그는 평소 미숫가루와 술을 마셨을 뿐 밥은 먹지 않았는데 훗날 홍주에서 폭음한 다음 갑자기 죽었다.
이런 홍일동의 성정으로 미루어 이복동생 홍길동 역시 호탕하고 대범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정통 관료 가문의 후예였지만 조선의 강력한 신분제도에 따라 비천한 얼자로써 앞날에 희망이 보이지 않자 조정에 불만을 품고 있던 무리와 유랑민들을 끌어모아 부조리한 사회에 저항했던 것으로 보인다.
홍길동의 주요 근거지는 충청도 충주 일대였는데, 일반 도적들처럼 산 속에 근거지를 두지 않고 마음껏 여항을 활보하면서 위세를 떨쳤다. 당시 그는 사욕을 품은 관리와 이속을 포섭하여 각종 정보를 취합한 다음 조직적으로 강도짓을 일삼았다. 그가 정3품 당상관인 첨지중추부사 차림으로 무기를 소지한 채 무리를 이끌고 관가를 들락거렸지만 지방의 권농이나 이정, 유향소의 좌수, 별감 등이 감히 제어하지 못했다. 하지만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는 법, 1500년(연산군 6년) 10월 22일, 영의정 한치형, 좌의정 성준, 우의정 이극균이 도적 홍길동의 체포 사실을 임금에게 고했다.
‘듣건대, 강도 홍길동을 잡았다 하니 기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백성을 위하여 해독을 제거하는 일이 이보다 큰 것이 없으니, 청컨대 이 시기에 그 무리들을 다 잡도록 하소서.’
그달 28일에는 의금부에서는 홍길동을 도와주었던 전 평안도 우후 엄귀손을 추포한 다음 곤장 1백대에 3천리 밖으로 유배하고 고신(告身)을 회수하겠다고 상주했다. 그러나 윤필상, 어세겸, 한치형 등은 홍길동의 문초가 끝나지 않았으므로 그의 처결이 끝난 뒤에 엄귀손에 대한 처분을 결정하자고 건의했다.
그때 당상관이었던 엄귀손은 홍길동으로부터 음식물을 받았고, 가옥을 구입해 주었으며, 산업까지 경영해주었음이 밝혀졌다. 홍길동의 무리가 도적질하여 얻은 재물로 상계에도 진출했음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엄귀손은 본래 가난하여 노복과 재산이 없었는데, 체포 당시 서울과 지방에 집을 사두고 곡식을 3,4천 석이나 가지고 있었다. 그 후 홍길동에 대한 처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그의 행위를 방조한 권농과 이정, 유향소의 품관들이 모조리 변방으로 쫓겨났다는 기록에 비추어 사형을 당했으리라 짐작된다.
홍길동의 전례는 그 후 조정의 조세 정책까지 영향을 끼쳤다. 1513년(중종 8년) 8월 29일 호조에서는 경기도와 충청도의 양전(量田)을 건의하면서 ‘충청도는 홍길동이 도둑질한 뒤로 유망이 또한 회복되지 못하여 양전을 오래도록 하지 않았으므로 세를 거두기가 실로 어렵다.’고 보고했다. 그때까지 충청도에 홍길동과 같은 도적떼들이 남아있어 유민들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이 기사는 그때까지 현지의 수령들이 민생치안에 전념하고 있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도적 홍길동이 관군에게 체포되어 비참한 최후를 마친 반면 소설 속의 의적 홍길동은 신분의 벽을 무너뜨리고 병조판서가 된 다음 율도국이라는 이상향으로 건너가 부귀영화를 누린다. 허균의 신념과 상상력으로 재탄생한 가상인물 홍길동의 생애는 다음과 같다.
홍길동은 세종 때 서울에 살고 있던 홍판서의 시비 춘섬의 몸에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길동은 천민의 신분인 얼자(孽子)였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그는 병법과 도술을 익혀 큰 인물이 되고자 했지만 천한 신분 때문에 과거를 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집안에서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등 온갖 설움을 감내해야 했다. 더군다나 그의 비범한 재주를 시기하던 소실 곡산댁이 자객을 시켜 죽여 없애려 한다.
가까스로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 길동은 부모님께 하직하고 방랑길에 나섰다가 도적떼의 두목이 된다. 그때부터 길동은 기이한 도술과 계책으로 해인사의 보물을 탈취하는 등 본격적인 도적활동에 나선다. 그는 자신의 무리를 활빈당이라 이름 짓고 팔도 수령들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들에 나누어준다. 그로 인해 홍길동은 의적으로 추앙받기 시작했다.
얼마 후 그에게 감영의 재물을 빼앗긴 함경감사가 조정에 장계를 올려 그를 고발한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좌·우포청에 명하여 그의 체포하게 했다. 하지만 신출귀몰한 길동의 활약에 관군은 매번 헛수고만 되풀이한다. 우포장 이흡은 그를 잡으려다 신기막측한 도술에 휘말려 우롱당하기까지 한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아버지 홍판서와 형 인형을 시켜 그를 회유했다.
결국 길동은 서울에 올라와 병조판서가 됨으로써 한을 풀어낸 다음 무리를 이끌고 중국의 남경으로 가던 도중 경치가 수려한 율도국에서 요괴를 퇴치하고 두 미녀를 아내로 맞이한다. 얼마 후 홍판서의 부음을 듣고 조선으로 돌아와 삼년상을 마친 그는 다시 율도국으로 돌아가 국왕이 되어 평생 부귀영화를 누린다.
《홍길동전》은 16세기 이후 빈번했던 농민봉기와 함께 그들을 이끌던 주요 인물들의 다양한 설화를 바탕으로 탐관오리들의 수탈, 적서차별의 문제점 등 당대의 부조리한 세태를 솔직하게 묘사하면서 이를 개혁하고자 하는 진보적인 역사의식을 담고 있다. 현실적으로 그와 같은 민중들의 시도는 좌절되기 일쑤였지만 사람들은 소설 속에 나오는 홍길동의 성공신화를 통해 대리만족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소설의 저자인 허균은 당대는 물론 후세에 이르기까지 유학자들로부터 짐승보다 못한 패륜아요 괴물로 묘사되었던 인물이다. 광해군은 그를 역모 혐의로 죽인 다음에는 아래와 같은 반교문을 내리기도 했다.
‘허균은 성품이 사납고 행실이 개, 돼지와 같았다. 윤리를 어지럽히고 음란을 자행하여 인간의 도리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죄인을 잡아서 동쪽의 저잣거리에서 베어죽이고 다시 기쁨을 누리고자 대사령을 베푸노라.’
군왕에게조차 이처럼 참혹한 평가를 받았던 그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썼다는 것은 뭔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는 조선의 고답적인 분위기를 조소하면서 금기에 끊임없이 도전했던 이단아이자 혁명가 허균의 강렬한 의지가 숨어있다.
허균은 유서 깊은 양반가의 후예로서 뛰어난 학문을 지녔지만 고답적인 유교적 사고방식에 매몰되지 않았던 자유인이었다. 그는 당대에 수많은 승려들과 교유하며 불교에 심취했고, 중인과 무사들과 어울렸으며 이매창 등 천한 기생들과도 허물없이 지냈다. 그는 또 양반의 비첩 소생인 서얼들을 가까이하면서 그들의 불운한 처지를 동정했고, 사신으로 북경에 갔을 때는 천주교 서적을 들여와 연구하기도 했다.
평소 조선의 공고한 신분제도를 조소하던 그는 〈유재론〉에서 신분제도 철폐를 주장했다. 서자라고 등용하지 않고, 어미가 개가했다고 해서 그 자식의 재능을 쓰지 않는 것은 실로 부당하다. 하늘이 재주를 낼 때 누구에게나 고르게 냈는데 남녀와 신분을 차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급기야 그는 〈호민론〉에서 천하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오직 백성뿐이라며 정치의 목적은 백성을 위한 것이므로 만일 임금과 지배계층이 백성을 업신여기고 착취하면 궁예나 견훤 같은 호민이 나와 선동함으로써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야기될 것이라고 경고하기에 이른다.
허균은 이처럼 당대에는 꿈도 꿀 수 없는 수준의 개혁 사상을 《홍길동전》을 통해 세상에 드러냈던 것이다. 본래 《홍길동전》의 저자는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았는데 조선 인조 때의 학자 택당 이식이 《택당선생 별집》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면서 허균의 저작으로 굳어졌다.
‘허균은 《수호전》을 본떠 《홍길동전》을 지었는데, 그의 무리인 서양갑과 심우영 등이 소설 속의 행동을 직접 행동으로 옮기다가 한 마을이 쑥밭으로 변했고, 허균 자신도 반란을 도모하다가 형벌을 받아 죽었으니 이것은 귀머거리보다 더 심한 응보를 받은 것이라고 하겠다.’《택당선생 별집》, 이식
이와 같은 기록처럼 허균은 말년에 역모 혐의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고, 조선의 권력자들은 그를 왕조가 끝날 때까지 극악한 불온분자로 규정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홍길동전》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지금까지도 민중들에게 부당한 권력과 부조리한 제도에 감연히 맞서라고 소리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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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충남 태안 출신. 시인, 작가. 대한민국항공회 자문위원, 복잡하고 난해한 고전과 역사기록을 알기 쉽게 해석함으로써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역사 교양서를 쓰고 있다. 아울러 조선시대 역관이나 화원 등의 전문가 집단과, 백정이나 광대, 노비 등 핍박받던 천민들의 삶을 적극적으로 조명한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의 민항공사를 정리한 항공역사서를 집필했다. 저서로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이도 세종대왕》, 《이경 고종황제》, 《효명세자》, 《한글만세,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 《꼬레아러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조선팔천》, 《조선역관열전》, 《조선노비열전》, 《조선정벌》, 《조선몽》 등이 있다. 1963년 충남 태안 출신. 시인, 작가. 대한민국항공회 자문위원, 복잡하고 난해한 고전과 역사기록을 알기 쉽게 해석함으로써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역사 교양서를 쓰고 있다. 아울러 조선시대 역..인물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재미있는 한국사 이야기. 이순신, 장영실, 사도세자 등 널리 알려진 역사인물부터 새로운 조명이 필요한 인물들까지 그들의 업적과 역사적 가치를..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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