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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오순절과 성령세례(신명16,9-12; 탈출34,22-24)
<위로부터 오는 능력의 성령>
오순절은 칠칠절, 맥추감사절이라고도 부른다. 오순절은 그리스어로는 50이라는 서수로 표현하고 있다. 본래 농업과 관련된 축제로서, 이날 이스라엘 백성은 그해 새로 거두어들인 곡식을 제단에 바치는 맥추감사절이다. 축복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희생 제사를 바쳤다. 노동을 하지 않고 거룩한 모임을 가졌던 이날의 축제는 종이든 떠돌이든 관계없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즐기는 기쁨과 감사의 축제였다.
초실절, 곧 수확할 곡식에 첫 낫을 댄 날부터 50일이 지난 다음에 오순절을 지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오순절과 초실절은 곡식 추수의 끝과 첫 수확을 바칠 수 있는 시기의 시작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이 축제일은 유월절(파스카) 축제와 무교절과 그리고 초실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기도 하다. 이 축제를 유대교에서는 하느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을 기념하는 날로 바뀌었다.
신약에서 오순절은 성령강림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리스도교적인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초대 교회 신자들은 성령강림을 체험했으며, 이로써 성령을 보내겠다고 하신 예수님의 약속이 실현되었다. 이는 성령과 구원의 미래 시대에 관한 구약의 예언이 실현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순절은 초대 교회가 본격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한 날이었다. 또한 복음이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가고 첫 번째 메시아적인 공동체가 모든 사람에게로 확장되리라는 것을 보여 주는 예표가 되었다.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탄생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예수의 부활로부터 50일째 되는 날 그의 제자들이 모인 곳에 성령(聖靈)이 강림하자(사도행전 제2장), 이들이 성령에 충만하게 되어 전도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으므로 이 날을 성령강림절이나 성령강림주일이라고도 한다. 사실상 기독교 초대교회의 성립일로 여겨지고 있다. 초실절(=부활절)날 첫 열매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부활 후 40일째에 승천하시면서 오순절까지 예루살렘에서 약속한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다.
오순절에 약속된 성령을 주셔서 하루에 3천, 5천 명씩 많은 영혼들이 구원 받게 되어 교회에 큰 부흥이 일어나고, 방언의 능력으로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이 전파 되었다.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이 요엘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설교하였다. 요엘2,28절은 “내가 내 신(성령)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라고 말한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에서 오순절을 성령 받는 날로 인식하고 있다. 또한 바벨탑 사건으로 사람들의 언어가 갈라지게 되었는데, 오순절 성령으로 인하여 다시 소통할 수 있는 계기가 된 사건으로 인식하고 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교인들은 대부분 유대인이었는데, 이는 전 세계로 복음을 전파하는데 언어적인 어려움이 존재했다.
그러므로 오순절 이전에는 이방인(유대인 이외의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고,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였고, 오순절 이후부터 이방인들에게도 전하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핍박을 당하시고 승천하신 이후에도 제자들에게도 핍박이 존재했으나,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스데반 등 성령의 능력으로 이겨내는 모습들이 성경에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이스라엘백성은 일 년에 두 번 추수를 한다. 봄 수확기에는 밀, 보리와 같은 곡식을 거두고, 가을에는 포도, 무화과, 감람나무의 열매를 거두어 하느님 앞에 감사의 제사를 드렸다(신명16,9-12). 따라서 큰 틀에서 보면 근본적인 취지는 초실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감사 절기의 가장 기본적인 정신은 내 노력이 아닌 하느님이 주신 은혜임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칠칠절, 곧 날수로는 49일이 되지만, 안식일을 염두에 두고서 계산을 하면, 안식일이 지난 날 부터는 50일이 되는 날이기에 오순절이라고 하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성경시대에 맥추절은 원칙적으로 하루 동안 행해졌지만, 디아스포라 때는 그 기간을 연장해서 지켰다. 이 절기가 되면 뿔뿔이 흩어져 멀리 떨어진 지역에 있는 유대인도 모두 예루살렘 성전에 나와서 절기를 지켜야 했다.
그래서 이 기간 동안에는 노동을 하지 않았다.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며, 감사의 찬양을 불렀다. 민수28,26절은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 드리는 날에 너희가 여호와께 새 소제를 드릴 때에도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라고 말한다.
탈출34,23절은 “너희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느님 앞에 보일지라”라고 말한다.
사도2,5절은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라고 말한다.
사도행전에서 오순절 날 왜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예루살렘에 우거(장기간 체류)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오순절이 되면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먼 곳에 흩어져 살고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모두 모였다. 사도2,5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유월절이 되면 모두 모여야 하는데, 당시에는 교통수단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월절에 맞춰 예루살렘을 찾았던 사람들이 오순절에 모두 모이라고 하는 율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 오순절까지 예루살렘에 머물기도 했다. 예루살렘에 머물었던 120명의 사람들이 성령이 임하여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던 때가 바로 이 때였다(사도2,1-5).
그래서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올라와서 이들의 복음 선포를 다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오순절에 하늘로부터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사람들을 보게 된다. 이는 바로 이전에 설명했던 절기들과 맞물려 우리로 하여금 구약의 절기와 신약의 복음에 대하여 참으로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왜냐하면 유월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상징했으며, 무교절은 무덤(자아파쇄)을, 초실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리고 오순절은 성령의 임하심의 사건이라고 하는 사실 때문이다. 오순절은 양력으로는 5-6월초에 해당하는 절기이다. 그리고 오순절 이후 나팔절(재림), 속죄절(그리스도의 나라), 장막절(천년왕국)이 복음에 대한 일곱 가지 예표이기 때문이다.
신명16,9-10절은 “칠 주를 계속할지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칠 주를 계수하여 네 하느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느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라고 말한다.
사도행전에서 각국에서 올라온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키고 예루살렘에 계속 우거함으로써 칠칠절을 칠 주를 계속하라고 하는 말씀을 온전히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볼 때 오순절은 각 사람이 여호와 하느님의 복을 따라 그 힘대로 예물을 드리는 날이었는데, 우리는 예물을 드리는 칠칠절의 관례에서 다음과 같은 보배와 같은 놀라운 진리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연약한 이들을 섬기십시오.>
믿는 이들도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하느님께 드린다.” 혹은 “하느님께 바친다.”의 의미가 도대체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매일의 삶에서 참으로 감사하여서건 혹은 습관적이건 간에 하느님께 바치고 드리는 행위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 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교훈해 주시고자 하는 바를 먼저 올바로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 드리는 행위를 통해서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표현 이외에도 드리는 행위를 통하여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문은 칠칠절 에 관한 성경본문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곧 절기를 지키라는 하는 말씀, 곧 이어 이 절기를 이웃과 함께 나누라고 말씀하고 있다.
신명16,10-11절은 “네 하느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하느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느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느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 이웃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자녀와 노비, 레위인, 그리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말한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남편없이 사는 과부는 모든 것을 박탈당한 사람들이었는데, 남편이 있을 때의 사회적인 신분이나 혹은 경제적인 해결을 더 이상 영위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객과 고아와 과부는 이스라엘의 3대 약자라고 알려져 왔다.
이 말씀을 통해 하느님께 감사하되,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과 함께 하라고 하는 하느님의 긍휼을 엿볼 수 있다. 곧 이 절기는 하느님께 감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을 돌아보는 절기였다. 또한 하느님과의 관계도 감사함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이를 통해서 어려운 이들과의 관계도 돌아보는 것이 또 하나의 목적이었다.
히브13,1-2절은 “계속하여 서로 사랑하십시오. 나그네 대접하기를 게을리 하지 말라 어떤 이들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원문 참조)고 말한다. 이 말씀은 창세기18,2-10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사자들을 부지중에 대접했던 사건을 가리킨다.
이러한 대접을 하고 나서 아브라함은 그 사자들에게 사라가 아이를 가질 것이라는 놀라운 소식을 듣는다. 만일 아브라함이 그 사자들을 거부했다면 사라가 아이를 갖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러한 이야기를 그의 기록에 반영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마태복음 25,35-46절의 “나그네를 대접한 자”와 “홀대한 자”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기억했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 형제들을 돕는 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메시지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도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마태25,40)”이라고 하면서 우리에게 섬김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극히 작은 자에게 하는 것을 주께 하듯이 하라고 말씀하셨다. 칠칠절을 지키는 의미 가운데 하나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아울러 주위에 있는 연약한 이들을 섬기라고 하는 교훈이기도하다.
<하느님께 초점을 맞추십시오>
그러나 이웃 섬김의 도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면 짐짓 매우 중요한 사실을 놓칠 수 있다. 이웃 섬김의 도를 가르치기 전에 “하느님께 바치라”라는 말씀은 우선 우리의 눈을 하느님께 맞춰야 함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감사해야할 우선순위가 우선적으로 하느님이라고 하는 말씀이다.
이는 이웃 섬김과 긍휼의 마음을 우선적으로 하느님께 돌리지 않은 이상 진정한 이웃 섬김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선은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모습과 더불어 이어지는 이웃 섬김과 긍휼히 여김에 대한 교훈이 칠칠절 절기에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성경에서 감사의 우선순위가 이웃 그리고 하느님으로 되어 있지 않다. 하느님과 이웃이라고 하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초실절과 오순절>
요한20,21-22절은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아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우리 주님은 두려워하여 모인 다락방으로 오셔서 그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그들에게 성령을 부으신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믿는 이들일 뿐만 아니라 거듭난 사람들이고 성령이 그들에게 부은 바 된(breathed)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아직 그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는 못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한다.
사도행전 1,4-8절에 보면 이 사실이 더욱 분명해진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말한다. 이미 믿는 이들이고 거듭난 사람들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
성령세례가 바로 주 예수님을 믿는 참된 믿는 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며, 또한 이미 하느님의 자녀이지만 동시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이에 대하여 사도행전 8장에 이르면 더욱 확실한 증거가 있다. 결론적으로 믿는 이들은 오순절 성령세례를 체험해야만 한다. 방언의 체험도 참으로 귀하고 중요한 것이다.
오순절 성령체험이 있어야 앞의 세 명절, 곧 고난의 유월절, 무교절의 무덤체험, 초실절의 부활을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순절 성령이 임해야만 그 뒤의 세 명절(나팔절, 속죄절, 장막절)을 깨달을 수 있다. 성경에 눈이 열리고, 변함없는 믿음의 조건이 바로 오순절, 곧 성령세례의 체험이다.
초실절 이후 50일째 되는 날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사도2,1-4절은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더니,”라고 말한다.
이어서 사도2,38-39절로 이어진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느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라고 말한다. 이 약속은 성령세례를 말한다.
성령세례는 반드시 받아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모하고 부르짖어야만 한다. 성령세례를 받아야만 사역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을 영으로 읽어보라. 오늘날도 도도히 성령세례가 살아 역사하며, 온전한 믿음을 위하여 받드시 받아야만하는 영적세례이다. 성령세례는 거듭남과 다르다. 당신에게 성령세례의 은총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
알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