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을 원님이 머물던 집이 있었다는 뜻에서 원당(員堂)리
의성읍의 서편에 위치하고 있는 원당리(元堂里)는 조선 시대 역촌(驛村)으로 가는 길목으로 고을 원님이 이 마을을 지나다가 산수가 좋아 자주 쉬어 갔는데 고을 원님이 머물던 집이 있었다는 뜻에서 원당(員堂)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합니다.
<경북마을지>에서는 현재 표기하는 원(元)자는 와전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원당리는 5번 국도를 사이에 두고 국도의 동편이 원당 1리이고, 서편이 원당 2리이며, 신의성교가 놓인 곳이 원당 3리입니다.
각 마을마다 이름을 갖고 있는데, 원당1리는 앞산이 가려져서 일조시간이 짧다고 해서 음지(陰地) 또는 음원(陰元)이라고 부릅니다.
700여 년 전 성주배씨 두형제가 개척하였다고 하니, 원당리 가운데 역사가 가장 깊은 곳 입니다.
원당 2리는 600여 년 전 의성 김씨두형제가 개척한 곳인데, 양지 바른 곳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양지(陽地) 또는 양원(陽元)이라고 부릅니다.
원당1, 2리에 비해 역사가 정확하지 않은 3리는 마을 앞 도로를 따라 다리[橋]가 있는 마을[洞]이라고 하여 교동[橋洞]이라고 부릅니다.
한편, 마을 뒷산이 풍수지리적설에 의하면 금차형(金釵形)에 옥소안(玉梳案)인데, 금비녀와 옥빗을 뜻하는데, 금비녀에 옥달빗이라고 하여 달빗골이라고 하였고, 오랜 세월 동안 음이 바뀌어서 다릿골, 교동(橋洞)으로 바뀌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또 다른 설로는, 옛날 이 마을에 살던 어떤 불효자가 늙은 아비를 지게에 지고 깊은 골짜기에 버리고 왔는데, 어린 아들이 지게를 받아서 감나무에 동여매는 것을 보고 이유를 물어보니, “이 지게는 잘 보관해 두었다가 아버지가 늙으시면 제가 아버지를 지고 가서 버려야 될게 아닙니까?”라고 하여, 이 말에 감동한 아버지가 다시 늙은 아버지를 되 지고 왔다고 하여, 되짓골 또는 뒤지골이라 불렀다고도 합니다.
이곳에 고려시대부터 문인과 학자, 관료들에게 칭송을 받았던 문소루가 1983년 중건되었고, 문소루의 동남쪽 언덕에 13명의 의성현령에 대한 공덕비들을 모아 건립해 둔 곳입니다. (자료 : 디지털으성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