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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현령 허후(許厚) 묘지명
선생의 휘는 후(厚)이고, 자는 중경(重卿)이며, 성은 허씨이다.
선조는 본관이 공암현(孔巖縣)이다. 증조 휘 자(磁)는 중종, 인종, 명종을 섬겨 관직이 좌찬성에 이르렀고, 조부 휘 강(橿)은 선행(善行)이 알려짐으로 인하여 전함사 별제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아버지 휘 량(亮)은 만력 16년(1588)에 진사가 되었으나 요절하였다. 어머니는 영가 권씨(永嘉權氏)이다.
선생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소년 시절에 학문을 알았다. 처음에 시정(寺正 사복시 정) 권용중(權用中)에게 학문을 배웠다. 시정은 선생의 어머니인 권 부인의 제부(諸父)이며, 이소(履素)의 문인이니, 이소는 인종과 명종 연간에 이름난 사람이다. 선생은 힘써 배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학문이 통달하게 되어서는 덕신공자(德信公子)에게 종유하여 《역(易)》을 배우고, 《대학(大學)》을 강독하여 《대학구결(大學口訣)》과 《경전요해(經傳要解)》를 완성하였다.
광해 시대를 당해 세상을 피하여 원주(原州)로 갔다. 남쪽 지방을 유람할 때 한강(寒岡 정구(鄭逑)), 우곡(愚谷 정경세(鄭經世)) 두 현자를 만나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삼대의 기상이 이 몇 분에게 있구나. 나의 학문은 고인에게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형편없는 옷을 입고 형편없는 음식을 먹으며 사람들과 지내면서도 이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고, 거처를 반드시 공경하게 하며 말하기를,
“움직이고 말하고 행동하는 법칙에서 천지가 자리 잡고 만물이 길러지는 극치를 알 수 있다.”하였다.
인조 1년(1623)에 이 문충공(李文忠公 이원익)이 선생을 행의(行誼)로 천거하여, 부름을 받아 내시학 교관에 제수되었다. 정묘년(1627, 인조5)의 난리에 상이 강도(江都)로 파천하여 전국의 군사를 소집해 근왕(勤王)하게 할 때, 선생이 의병장 김공 창일(金公昌一)과 일을 의논하였는데, 김공이 일어나 경탄하여 말하기를 “훌륭하다. 일세의 현재(賢才)라 이를 만하다.” 하였다. 적이 물러나고, 여러 의병들에게 포상이 내려 선생이 제용감 직장(濟用監直長)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이인거(李仁居)라는 자가 큰소리치기를 좋아하고, 지취를 고상하게 하며 직접 농사
지어 먹었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풍속을 해치고 의리를 무너뜨릴 자는 반드시 이 사람이다.”
하였다. 후에 그 사람이 대역(大逆)으로 처형될 때, 죄인이 선생의 이름을 지목한 것 때문에 선생도 체포되자 어머니 권 부인이 운명하였는데, 상이 느낀 바 있어 아무 일도 없었음을 알고 석방하였다.
처음에 권 부인을 광주(廣州)의 대강(大江) 가에 장례하였는데, 선생은 여막에서 거처하며 거친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시면서 3년 동안 매일 아침저녁으로 무덤을 바라보며 슬프게 울부짖으니, 강가의 나무들이 마를 정도였다.
대상(大祥)을 지내고 난 뒤 반혼(返魂)할 때 이영언(李英彦) 선생과 함께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의 변례(變禮)를 강하였다.계유년(1633, 인조11)에 사도시 주부(司䆃寺主簿)를 거쳐 지평 현감(砥平縣監)이 되었다. 지평에 세력을 부리는 궁노비가 있어 백성의 해악이 된 지 10년이 되었으나, 군현에서도 그를 제지하지 못하였다.
선생이 그가 금법을 범한 10여 가지 일을 들추어 헤아려서 법으로 단죄하니, 민심이 대단히 기뻐하였다. 그러나 함부로 사람을 죽였다는 것으로 논죄를 받아 옥에 갇혀서 겨울과 여름을 지냈다. 고을 사람들이 궐문을 지키며 억울함을 하소연하였고, 때마침 가뭄이 들어 억울한 옥사라 해서 석방될 수 있었다. 작은 집을 지어 소암(素庵)이라고 하였으며, 일찍이 성재(惺齋), 돈계(遯溪)라는 호가 있었으니, 돈계는 치악(雉岳) 아래에 있다.정축년(1637)에 태묘 영(太廟令)이 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얼마 후에 의성 현령(義城縣令)에 제수되었다. 의성은 큰 고을이어서 다스리기 어렵다고 일컬어졌다. 고사를 묻고 폐지된 정사를 닦으며, 조약(條約)을 엄중하게 하고 호강(豪强)을 금하여 세력이 강해 영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법으로 다스리니, 명문거족들이 대부분 좋아하지 않았다. 4년 만에 파직되고, 창락(昌樂)에 우거하였다.
계미년(1643)에 동궁 익위(東宮翊衛)로서 북경으로 떠나는 세자를 전송하였고, 세자가 돌아온 뒤에 위솔(衛率)이 되었다. 후에 형조와 호조의 좌랑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무자년(1648)에 호조 정랑에서 외직으로 은산 현감(恩山縣監)에 제수되었다. 은산은 권세가의 고향으로 여러 고을들이 다투어 자신을 낮추고 그 권세가를 섬겼다. 이에 예절 차리는 것이 거만하다고 선생을 꾸짖는 자가 있었는데, 선생이 웃으며 말하기를,
“공손하기만 하고 예가 없는 것을 옛사람이 수치스럽게 여겼다. 내가 예를 행하고자 하는데 도리어 거만하다고 하니, 또한 이상하지 않은가.”
하였다.
1년 만에 파직되었다.신묘년(1651, 효종2)에 형조 정랑에 제수되었다. 인조의 담사(禫事)를 맞아 입궐하여 사은숙배하고 즉시 돌아왔다. 겨울에 원주의 관설(觀雪)로 돌아와 그대로 호를 삼았다. 후에 여러 차례 종묘 영(宗廟令), 태복시 소정(太僕寺少正)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갑오년(1654)에 공작 소정(工作少正)이 되었고, 얼마 후에 특명으로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하고 모나며 바르고 곧다는 말을 들은 지 오래다. 조정에서는 등용하지 않았으나 내가 특별히 등용한 것이다.”
하였다. 가을에 장령으로 승진하였으나 사직하고 떠났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언책(言責)을 담당하여 말할 수 있는데 말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니, 선생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억지로 말하여 이름을 구하는 일을 나는 하지 않는다.”하였다.
무술년(1658)에 상례(相禮)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회양 도호부사(淮陽都護府使)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여름에 다시 장령이 되었는데, 권세가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겨울에 안동 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에 제수되었으나 또 부임하지 않았고, 이듬해에 상방 정(尙方正)이 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겨울에 효종의 장례를 당하여 태악 정에 제수되었다. 즉시 나가 사은숙배하고, 얼마 후에 병으로 사직하였다.
경자년(1660, 현종1) 12월에 선생이 병이 들었고, 다음 달에 종제(從弟)가 죽었다. 곡위(哭位)에 거하여 매우 슬프게 곡하고 나서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다. 2월 10일에 선생이 운명하니, 향년은 74세이다. 전날 저녁에 시중드는 사람으로 하여금 머리를 다듬고 옷을 갈아입히도록 하더니, 아침에 이르러 운명하였다.
문인(門人) 이명시(李命蓍)가 상례(喪禮)를 맡았고, 수업을 받은 문인들이 모두 선생을 위해 수질(首絰)을 두르고 곡하였다. 그해 10월 모일에 마전군 치소에서 북쪽으로 20리 지점에 장례를 치르니, 조 숙인(趙淑人)의 묘와 동원(同原)이다. 그 후 10년이 지나 경술년(1670)에 같은 고을의 분석산 동쪽 기슭으로 이장하였는데, 숙인도 함께 천장하였다.선생은 이미 나아가는 바가 크고 지키는 바가 요약되었던 만큼 그 학문은 자연 처음을 공경히 하지 않음이 없어 법도가 엄절하였다.
알면 반드시 행하고, 행하는 것은 반드시 과단성 있게 하였으니, 날마다 생활하면서 실천하는 도리의 작은 것에서부터 백성을 사랑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는 큰 것에 이르기까지 미루어 나갔으며, 또 전부(田賦), 사율(師律), 형서(刑書), 천문(天文), 지리(地理), 음양(陰陽)의 운행과 변화 같은 것도 박학하지 않음이 없었다.
능히 동요되지 않고 의혹되지 않았으며 일에 앞서 기미를 살피니, 난세에 처해서도 환란과 해악이 미치지 않았다. 항상 말하기를,
“정치는 반드시 명한 것이 행해지고 금한 것이 그쳐진 뒤에야 다스림의 본체를 볼 수 있다.”하였다.
아랫사람을 부릴 때에는 세밀하게 살피고 따지는 것으로 명철함을 삼지 않았고,
일에 임해서는 작은 이익으로 큰 의리를 손상시키지 않았으며, 사람을 취할 때에는 그 사람의 단점으로 장점을 가리지 않았다. 관직 생활을 하면서는 한결같이 《대전(大典)》을 따랐으니, 말하기를, “한 세상의 다스림에는 각각 한 세상의 제도가 있다. 하물며 시왕(時王)의 제도는 폐할 수 없다.”하였다.
선생은 재주가 갖추어지고 학문이 넓어 예사로운 의칙(儀則)이나 품절(品節)의 상세한 데까지 미루어 나갔으니, 도가 완성되고 덕이 완전하여 한 세상의 이름난 큰 선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선생의 깊은 뜻이 담긴 말이나 뛰어난 행실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드물다. 붕당이 시작된 때부터 세도가 크게 무너지니, 매번 학문하는 자들을 대할 때면 세상의 학문하는 폐단을 극단적으로 말하곤 하였는데, 그 큰 요체는 몸가짐, 말, 행동의 사사로운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름을 구하고 칭송을 바라는 것에서는 일체 벗어났다.
대공지정(大公至正)의 도에 들어가지는 못하였으나 늘 인심을 맑게 하고 세교(世敎)를 부지하는 것을 마음에 두었다. 낮은 벼슬에 있을 때에 재상 중에 선생을 천거하여 이끌어 주는 사람이 있었으나 수치스럽게 여겨 끝내 나가 벼슬하지 않았다.저술로는 성명(性命)과 천인(天人)의 근본에 대한 것,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의 법칙에 대한 것, 인물과 고금의 치란(治亂)과 흥망(興亡)에 대한 것, 사방의 토산물과 온갖 생산물에 대한 것, 요얼(妖孼)과 상서(祥瑞), 재앙과 기괴 및 백가(百家)의 수많은 기예에 대한 것, 여항(閭巷)에 떠도는 풍요(風謠)와 숭상하는 풍속에 대한 것 등 모두 수만 마디를 남겼으나 지난해에 집에 화재가 나 서적이 모두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선생의 초취 이씨(李氏)는 딸 하나를 낳았는데 요절하였다. 후취 조씨(趙氏)는 2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황()과 시(翨)이다. 황과 막내딸은 요절하였다. 두 사위는 신환(申㬊)과 송유징(宋孺徵)이다. 측실(側室)에서 낳은 아들은 승()이고, 사위는 홍상형(洪尙亨)이며, 또 한 딸은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곧으면서도 엄격하고 / 直而嚴
태연하면서도 겸손하셨네 / 泰而謙
삼백 가지 위의(威儀)와 / 威儀之則
삼천 가지 예의(禮儀) 갖추시고 / 三百三千
명철한 지조로 / 明哲之操
흔들리지 않고 말하지 않으셨으니 / 不動不言
의혹을 제거할 만하였고 / 可以去惑
풍속을 교화할 만하였네 / 可以化俗
先生諱厚。字重卿。姓許氏。其先孔巖縣人。曾祖諱磁。事中宗,仁宗,明宗。官至左贊成。祖諱橿。以善行發聞。拜典艦別提。不出。父諱亮。萬曆十六年。進士。早殀。母永嘉權氏。先生幼孤。少而知學。初授學於權寺正用中。寺正。先生母權夫人之諸父。而履素門人。有名仁明間。先生力學不倦。學旣通。從德信公子受易。講大學傳。大學口訣,經傳要解成。當光海時。避世原州。南遊見寒岡,愚谷兩賢者。歎曰。三代氣像。在此數子。吾學不逮古人。以惡衣惡食。與人居而不恥。居處必敬曰。動作云爲之則。天地萬物位育之極。可見。仁祖元年。李文忠公薦其行誼。召拜內侍學敎官。丁卯之亂。上出幸江都。召四方兵勤王。先生與義兵將金公昌一議事。金公起敬歎曰。賢乎。可謂一世之賢才也。賊退。賞諸義兵。先生爲濟用直長。不就。有李仁居者好大言。抗跡躬耕而食。先生曰。傷風敗義者。必此人也。後其人以大逆誅。而先生爲罪人所指名。亦被逮。母權夫人歿。上感之。知無事釋之。初。權夫人葬廣州大江之上。先生居廬。食疏食飮水。三年每朝夕望塚悲號。江樹爲枯。旣祥而返。與李英彥先生。講喪祭變禮。癸酉。由司䆃主簿。爲砥平縣監。砥平有內奴作氣勢。爲民害者積十年。郡縣亦莫之呵也。先生數其犯禁者十餘事。以法斷之。民心大悅。而論以濫殺繫。經冬夏。邑人守闕訟冤。適天旱。以冤獄得釋。築小齋曰素庵。嘗有惺齋,遯溪之號。遯溪在雉岳下。丁丑。爲太廟令。不就。尋拜義城縣令。義城大縣。號爲難治。問古事。修廢政。嚴條約。禁豪強。以率其違勁不從令者。右族多不說。四年罷。寓居昌樂。癸未。印宮翊衛。送世子北行。及世子還。爲衛率。後爲刑曹,戶曹佐郞。不就。戊子。以戶曹正郞。出爲恩山。恩山爲用事者之鄕。列邑爭卑事之。於是有以禮節倨傲。誚先生者。先生笑曰。恭而無禮。古人恥之。我欲行禮。反以爲傲。不亦異乎。一年。罷。辛卯。爲刑曹正郞。當仁祖禫事。入謝卽歸。冬。返原州之觀雪。因以爲號。後累拜廟令,太僕少正。皆不就。甲午。爲工作少正。尋特拜司憲持平。上疏辭之。上曰。剛方正直。聞之久矣。朝廷不用。而予特用云云。秋。陞掌令。辭去。或曰。當言責。可以言而不言。何也。先生笑曰。強言要名。吾不爲也。戊戌。拜相禮。不就。拜淮陽都護府使。不就。夏。復爲掌令。爲用事者所忌。罷。冬。拜安東大都護府使。又不赴。明年。爲尙方正。不就。冬。當孝宗葬禮。拜太樂正。卽出謝。尋謝病。庚子十二月。先生寢疾。後月。有從弟死。居位哭極哀。疾愈劇。二月十日。先生歿。年七十四。前夕。令侍者。理髮更衣。至朝而歿。門人李命蓍掌喪禮。諸門人受業者。皆爲之加麻而哭之。其十月某日。葬麻田郡治北二十里趙淑人墓同原。後十年庚戌。改葬同郡分石山東麓。淑人之葬幷遷。先生旣所就者大。所守者約。其學。自無不敬始。而繩墨嚴切。知則必行。行則必果。自彝倫日用之微。推至於仁民利物之大。而又如田賦,師律,刑書,天文,地理,陰陽之運化。無所不博。能不動不惑。先事見幾。處亂世而患害不及焉。常曰。爲政。必令行禁止。然後治體可見。禦下。不以察察爲明。臨事。不以小利害大義。取人。不以其所短掩其所長。爲官。一從大典曰。一世之治。各有一世之制。況時王之制。不可廢也。先生才備學博。推其尋常儀則品節之詳。可見其道成德全。爲命世之弘儒。其微言絶行。知者蓋鮮矣。自朋儻來。世道大壞。每對學者。極言世之爲學之弊。其大約。不越乎貌言動作之私。而一出於要名干譽。不入大公至正之道。眷眷以淑人心扶世敎爲心。官在下僚。時宰有薦引者而恥之。終不出而仕也。有所著述。性命天人之本。禮樂文物之則。人物古今世之治亂興壞。四方土物百產。妖祥災異與夫百家衆技。閭巷風謠俗尙。凡累數萬言。頃年。家失火。書皆不出。先生初娶李氏。生一女。殀。後娶趙氏。生二男三女。男,翅。及最少女。殀。二壻。申㬊,宋孺徵。側室男。曰。女壻洪尙亨。又一女。未嫁。其銘曰。直而嚴。泰而謙。威儀之則。三百三千。明哲之操。不動不言。可以去惑。可以化俗。 <기언 : 한국고잔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