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흠 『원효와 데리다의 비교연구』중에서
하버마스가 목적적 합리성은 비판하되 이성의 계몽적 힘은 중시하여 소통적 합리성으로 대안을 삼는 것과 달리, 탈현대 철학을 대표하는 데리다는 이성중심주의를 철저히 해체하고자 한다. "差延(diff rance)이 군림하는 왕국은 없지만 차연은 모든 왕국을 전복시키기 위하여 선동한다."라는 말처럼 데리다는 차연을 통하여 그리스 철학에서 현상학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모든 형이상학을 해체하려 든다. 그가 차연을 통하여 해체하려 한 것은 음성중심주의(phono-centrism)와 이성중심주의(logo-centrism)로 쓰여진 모든 텍스트이다.
차연이란 무엇인가? 불어에서 `diff rer`라는 동사는 `차이가 나다`와 `연기가 되다`라는 두 가지 뜻을 가진다. 하지만 이의 명사형인 `diff rence`는 `차이`라는 뜻만 가진다. 이에 데리다는 `en`과 `an`이 모두 [ :]으로 발음된다는 것에 착안하여 `e`를 `a``로 대체하여 `diff rance`란 단어를 스스로 만들고 이 낱말은 `차이`와 `연기` 두 가지 의미를 다 함유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서양은 오랜 동안 실체론적 사고를 하였다. `나무`는 광합성 작용을 한다든가 탄소동화작용을 하기에 나무인 것이고, 나무는 그 스스로 실체, 본질, 이데아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무`라는 기호는 `나무`의 관념 내지 이미지를 지시할 뿐 현실의 나무는 現前하지 않는다. 즉 기호는 부재한 현전을 지시할 뿐이며 의미는 항상 연기되거나 달라져 있다. 세계는 언어기호를 통하여 표상할 수밖에 없는데 언어기호 자체가 본질이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무`는 스스로 아무런 의미도, 본질도 갖지 못한다. 나무는 `풀`과의 차이를 통하여 `목질의 줄기를 가진 다년생의 식물`이란 의미를 드러낸다. 풀이 없었다면 나무 또한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불, 뿔, 풀`이 음운의 차이로 의미가 갈리고 다른 낱말이 되듯, "언어에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러한 차이들은 이 자체가 실체가 아니라 구조 자체가 만들어내는 효과다."
`나무`의 의미는 풀과 차이를 통하여 `목질의 줄기를 가진 다년생의 식물`이라고 규정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자유연상에 의하여 `푸르른 이상, 하늘과 땅의 중개자, 자연, 부드러움` 등으로 의미망을 넓히고 나무를 정의한 글 속의 `목질, 줄기, 가지다, 다년생, 식물`의 기표(signifiant) 또한 맥락에 따라 기의(signifi )의 사슬 속으로 끊임없이 미끄러지며 의미를 延期한다. `나무`가 `풀`과 대비시키면 `목질의 줄기를 가진 다년생의 식물`이라는 의미를 갖지만 `쇠`와 대비하면 `자연, 목질의 부드러움` 등의 의미를 갖는 것처럼, 각각의 기호에는 그 기호가 그것이 되기 위하여 배척하였던 다른 낱말의 흔적이 스미어 있다. 의미는 기호에서 직접적으로 현전되지 않는다. 기호의 의미는 어떤 의미에서는 기호에 없다고 할 수 있다.
의미는 모든 기표의 연쇄를 따라서 散種(dissemination)되어 있다. "나는 김구선생을 좋아한다."라는 문장에서 김구 선생의 가치는 `김좌진, 여운형, 이승만, 박정희` 등 부재한 것에 의해서 드러나며 부재한 것을 무엇으로 잡느냐에 따라 김구 선생의 가치와 의미는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이렇듯 의미는 어떤 하나의 기호에 의하여 완전히 현전되는 것이라기보다는 현전과 부재간의 일종의 끊임없는 교차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언어기호는 공간화에 따라 차이가 나고 시간에 따라 지연되어 무의미를 생성하기에 差延은 공간에 따라 차이가 나고 시간에 따라 현존을 연기함을 의미한다. 세계는 差延이 드러난 것, 차연의 체계 속에 쓰여져 드러난 것, 현존과 부재가 끊임없이 교차하여 일어나는 유희에 불과하다. 세계가 차연이고 언어기호의 진정한 속성 또한 이럴진대 사람들은 언어기호에 고정성과 동일성을 부여하려고 한다. 고정되고 동일하지 않은 세계를 고정되고 동일한 언어기호로 표현하려 하니 그것 자체가 왜곡이 될 수밖에 없다.
텍스트의 의미는 끝없이 산종된다. 한 텍스트는 또 다른 텍스트의 변형 속에서만 산출되고 다른 텍스트와 차이를 통하여 의미를 드러내며 이 의미는 다시 지연된다. 해체철학은 텍스트 속에 숨어있는 이항대립구조, 현전의 형이상학과 음성중심주의, 이성중심주의를 철저히 안으로부터 파괴한다. 이를 위하여 글에 일단 교차선을 써서 지우고 삭제의 표시와 함께 남긴다. 이런 원형기술(arche-writing)을 하는 것은, 차연에 따라 의미의 현전이 끝없이 지연되고 산종됨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해체비평은 절대성, 절대적 권위를 부정하고 현존의 형이상학, 전체주의적 사유체계와 구조를 해체하였다. 해체는 직접적이고 고유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실은 차이이고 관계로서 매개된 것이고 파생된 것임을 보여주었다.
데리다의 차연의 사유는 말중심주의와 이성중심주의를 해체한다. 서구의 형이상학은 말을 우월한 것으로 여기고 글을 열등한 것으로 보았다. 말은 발화자가 수신자를 놓고 `현재에 직접` 머리 속에 있는 것을 목소리로 내는 것이기에 그것은 현존의 표상이며 내면의 진실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았다. 말하자마자 의미가 드러나고 청자는 의미를 확정하고 이를 통하여 현존을 포착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반면에 글은 이차적이며 나라는 주체의 내면의 진실을 벗어나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판단에는 인간이 주체로서 언제나 맥락에 상관없이 동일성을 가지며 자신을 전적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자신의 내면의 의식을 그대로 표명할 수 있음을, 현재는 미래와 과거의 흔적이 전혀 없는 절대 순수한 현존임을 전제한다. 그러나 주체에 이미 타자가 들어와 있으며 인간 주체는 동일성을 갖지 못하며 "차이들로 이루어진 체계 속으로 스스로를 종속시킴으로써만 의미하는 주체가 된다." 우리가 동일하다고 믿은 것은 차연 속의 타자이며, 타자 속의 차연에 불과하다." 말 역시 글의 이차적 형식이다. 의미를 만들어낸 것은 말이나 소리가 아니라 문자가 지닌 차연이다. 현재에도 과거의 기억과 반성이 포개지며 미래의 기대와 전망이 뒤섞이기에 현존은 더 이상 특권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기에 내면의 목소리가 의미를 직접적으로 현전시킨다는 주장은 환상이며 음성중심주의는 서구 형이상학이 범한 편견이다.
내면의 의식에서 나오는 음성은 본질직관이 청각기관을 통한 것이며, 세계의 본질을 인식하는 것은 이성을 바탕으로 한다. 때문에 말중심주의의 바탕에는 이성중심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서양의 철학은 로고스를 바탕으로 신, 본질, 현존, 진리, 실체, 절대정신 등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중심을 탐구해왔다. 서양의 형이상학은 이런 것들을 신성불가침, 절대개념으로 간주하여 다른 모든 기호나 개념, 의미가 이들을 중심으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해체될 수 있는 것들이다. 때문에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중심은 절대도 신성불가침도 아니다. 이들을 모든 기호에 선행하는 기호, 절대 근원이라 한다면 이것보다 더 앞서고 더 근원적인 것을 생각할 수 있기에 절대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것을 정립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하다. 또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궁극적 진리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라마톨로지는 진리라든가 개념들, 과학적인 규범들을 존재신학, 이성중심주의, 음성중심주의에 연결시키는 모든 것을 해체한다.
差延(la différance)과 진리의 결정불가능성(l'indécidabilité=undecidability) - 「데리다의 철학사상」 김형효
차연의 의미는 일차적으로 反개념이다. 반개념이란 것은 일의적으로 의미가 통일되지 않고 적어도 이중적인 것이 하나의 단어에 필연적으로 게재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차연은 사실상 이 세상의 모든 사실이 일의적인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반된 두가지가 공존하는 것과 같은 <차이 속의 동거>의 관계임을 지시한다. 그래서 세상사는 단순하지 않고 아무리 단순하게 읽어도 모든 것이 적어도 이중적이라는 것이다. 그 이중적인 <사이>가 가장 선험적인 요소를 띠고 있으므로 原흔적(l'archi-trace)과 原표지-문자(l'archi-écriture)로서의 차연이 가장 오래된 古語라고 데리다가 설파한다. 차연의 관계는 두 가지의 이항적 대립보다 더 나이가 먹었고 오래되었다는 것이 데리다의 지론이다. 그러므로 산은 계곡과의 차연 관계인데, 산과 계곡이 생기기 전에 인간은 이미 표지-문자학적인 사유의 선험성에 의거해서 산과 계곡을 하나의 이항적 관계로 묶을 수 있는 그런 원흔적의 선험성을 사유의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가지로 쪼개는 이분법을 수용하지 않는다. 차연은 이분법이되 이원적인 이분법이 아니고 이중적인 이분법으로 세상사를 인식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여 不一而不二의 그런 이매모호성으로서 세상을 읽는다. 공간과 시간도 그런 불일이불이의 관계로서 이해한다. 延期(le délai=delay)의 개념이 시간적 대기(temporisation=temporizing)의 의미로서 사용되기도 하고, 또 공간적 간격(espacement=spacing)의 뜻으로 인식되어도 무방하다. 그래서 데리다는 <시간의 공간되기>(le devenir-espace du temps=becoming-space of time)와 <공간의 시간되기>(le devenir-temps de l'espace=becoming-time of space)로서 시간과 공간을 차연의 관계로 다발처럼 묶는다. 전후의 관계는 시간적 대기의 차원으로 /
자기 것이 고집되지 않으므로 의미상의 散種(la dissémination=dissemination))에 비유되기도 한다. 산종은 자기의 의미를 개념적 씨(la semence=seed)로서 여기지 않고 의미의 씨를 뿌리되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고 다른 것에 분봉하여 흩어버리기 때문에 주된 것과 종속된 것의 경계가 사라지기에 생긴 용어다. 자가애정의 소유의식이 없으므로 산종은 자아의 자가성과 실체의식의 소멸과 상응한다. 無我의 철학이 결국 散種의 철학이고 差延의 철학이다. 본디 어원적으로 <씨>와 <의미>가 희랍어에서 상응하기 때문에 영어로 의미론을 씨앗론과 유사한 <semantics>라 부르고, 불어에서 씨를 <semence>라 하는데, 그 낱말은 희랍어로 인식의 표식을 뜻하는 기호(sēma)에서 발단되었다고 한다. 산종은 일체의 모든 주체의 철학의 해체를 뜻한다. 그러므로 산종의 철학은 일체의 모든 내면성의 고유한 성역을 인정하지 않고 해체시킨다. 내면성은 주체의 철학이 의지하는 신성불가침의 성역으로 간주된다. 散種과 差延의 철학은 의식의 주체가 신비스런 내면성의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 것인 양 여기는 자아의 우상을 파괴하려 한다. 데리다가 그의 얇은 저서인 ꡔ위상ꡕ(Positions)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내면성은 자기 바깥에 의하여 이미 가공되어 있고 내면성은 언제나 이미 자기 바깥에로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내면성은 모든 표현의 행위 이전에 자기로부터 차이를 만들거나 지연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