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표음기(墓表陰記)
민진후(閔鎭厚)
선생의 휘는 준길이다. 자는 명보(明甫)이며, 본관(本貫)은 은진(恩津)이다. 고려(高麗) 때 판원사(判院事) 휘 대원(大原)의 후손에 휘 명의(明誼) 사헌 집단(司憲執端)이 계셨는데, 그 손자가 휘 유(愉) 호 쌍청당(雙淸堂)이시고, 쌍청당의 증손 휘 여집(汝楫)이 선생의 고조이다. 증조는 휘가 세영(世英)이고, 조(祖)는 휘가 응서(應瑞)로 군수(郡守)를 지냈고, 고(考)는 휘가 이창(爾昌)으로 역시 군수를 지냈다. 비(妣)는 광산 김씨(光山金氏)로 행 첨지중추부사(行僉知中樞府事) 은휘(殷輝)의 따님이니, 사계(沙溪) 문원공(文元公)이 종형(從兄)이다. 선생은 만력(萬曆) 병오년(1606, 선조39) 12월 28일에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신유년(1621)에 김 부인이 서거하였고, 상(喪)을 마친 뒤에 문원공께 가서 수학하였다. 또 우복(愚伏) 정 문장공(鄭文壯公) 가문으로 장가들고는 우복을 스승으로 섬기었다.
천계(天啓) 갑자년(1624, 인조2)에 사마시(司馬試)의 양시(兩試)에 합격하였다. 정묘년(1627)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한결같이 예문(禮文)에 따라 집상(執喪)하여 조금이라도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두 선생께 여쭈니, 문원공이 장차 예가(禮家)의 종장(宗匠)이 될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숭정(崇禎) 경오년에 세마(洗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임신년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사임하고 돌아왔다. 병자년(1636)에 조정 신하들의 천거로 예산 현감(禮山縣監)에 특제(特除)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계미년(1643)에 지평에 제수되었는데 사직소를 올려 체직되었다. 이때부터 소명(召命)이 빈번히 내렸다. 을유년(1645)에 상소하여 원손(元孫)의 위호(位號)를 일찍 정하고서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을 초치하여 보도의 책임을 맡기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축년(1649)에 효종(孝宗)이 즉위하여 맨 먼저 별유(別諭)를 내려 부르니, 드디어 왕명을 받아들여 진선(進善), 장령(掌令), 집의(執義)에 제수되었다. 김자점(金自點)을 유배하기를 청하고, 아울러 그에 빌붙은 무리까지 논핵하였다. 경연관(經筵官)을 겸직하고서 경연에 출입하며 강론하였다. 경인년(1650, 효종1)에 휴가를 청해 돌아오니, 을미년(1655)에 상이 사도시 정(司䆃寺正)에 제수하였다가 승지(承旨), 이조참의 겸 찬선(吏曹參議兼贊善)으로 올려 제수하고서,안거(安車)를 타고 올라오라고 재촉해 불렀다. 서울로 들어가니, 상이 인견하고 선온하였다. 상이 일찍이 말씀하기를, “세자의 학문이 진보된 것은 찬선의 공이다.” 하였다. 밀차(密箚비밀 차자(箚子))를 올려 공북(拱北)의 의리를 펴기를 청하였다. 무술년(1658)에 휴가를 청해 돌아왔다. 특명으로 호조 참판에 승차(陞差)되었다. 상이 편찮다는 말을 듣고 대궐로 가서 문병하였다. 대사헌과 이조참판 겸 좨주에 제수되었다. 기해년(1659)에 특명으로 병조 판서에 승차되었다. 교체되어 대사헌, 참찬에 제수되었다.
현종(顯宗) 초년에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수차(袖箚)를 올려 가까운 종친(宗親)을 궁중에 머물게 하며 기르는 것을 억제하기를 청하였다. 경자년(1660)에 교체되어 참찬이 되었다. 차자를 올려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服制)를 논하였다가 윤선도(尹善道)의 무함을 받고 드디어 돌아오니, 상이 사관(史官)을 보내 만류하고, 또 도승지로 하여금 뒤쫓아 가서 만류하게 하였으나, 끝내 머물지 않고 돌아왔다. 신축년(1661, 현종2)에 소명을 받고 갔다가 효종의 대상(大祥)을 지내고는 곧 돌아왔다. 을사년(1665)에 상이 온천에 거둥하니, 온양(溫陽) 행궁(行宮)으로 가서 입대하고서, 어가를 따라 환도하여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이 되었다. 몇 달 있다가 퇴직하고서 돌아왔다. 병오년(1666)에 또 온양 행궁으로 가서 입대하고서 어가를 호종해 오다가 중도에서 뒤에 떨어졌고, 무신년에도 또 그렇게 하였다가, 세자의 병환이 위중하다는 것을 듣고는 드디어 서울로 들어갔다. 기유년에 상이 온천으로 거둥하며 선생에게 서울에 머물러 있으라고 명하였다. 어가가 환도하자, 휴가를 빌어 돌아왔다.
경술년(1670)에 세자의 관례(冠禮)에 들어가 참석하고는 즉시 귀로에 올라 이미 한강을 건넜으나, 대조(大朝임금)와 세자가 모두 별유(別諭)를 내려 만류하니, 잠시 서울로 들어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임자년(1672)에 병이 나자 고치기 어렵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상소하여 허적(許積)의 간사한 정상을 자세히 말하니, 상이 좋아하지 않았다. 병이 위독해지자 또 유소(遺疏)를 써서 성학(聖學)을 권면하고, 이어 군자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해야 하는 도리를 언급하였다. 상이 의관을 보내어 진찰하게 하였으나, 공은 이미 알아보지 못하였다. 끝내 12월 2일에 서거하였다. 부음(訃音)을 아뢰자 상이 특명으로 영의정을 추증하고, 또 장례에 필요한 물자를 지급하였다. 연기(燕岐) 죽안리(竹岸里)에 장사 지냈다. 그러나 묘지가 좋지 못하므로 모두 세 차례 이장하여, 경진년(1700, 숙종26) 10월에 비로소 진잠(鎭岑) 사기막골〔沙店洞〕 유향(酉向)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이에 앞서 많은 간신들이 어리신 성상을 속여예송(禮訟)을 함정으로 삼아 추적(追謫)이 황천에까지 미쳤는데, 경신년(1680)에 정부(政府)를 개혁하고서 특명을 내려 선생의 관작을 회복하고,또 선생이 일찍이 적신(賊臣허적(許積))을 논한 말이 실증되었다 하여, 장 곡강(張曲江장구령(張九齡))의 고사에 따라 선생의 무덤에 사제(賜祭)하고, 또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않고 문정(文正)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그리고 또 그 자손을 녹용(錄用)하고, 유고를 수집해 간행하게 하셨다. 이때에 미쳐 연신(筵臣)이 선생의 이장(移葬)을 아뢰자, 상이 그 고을에 명하여 장례에 필요한 기구를 갖추어 주게 하고, 내전(內殿)은 중사(中使)를 보내어 호상(護喪)하게 하였으니, 죽은 이를 존숭하는 예의에 더욱 부족함이 없었다. 평소 발걸음이 이르신 많은 곳에 후학들이 사우(祠宇)를 세워 제사를 받들고 있다.
정 부인(鄭夫人)은 자질이 정숙하며 덕성이 인후하였고, 서사(書史)를 대략 통하여 식견이 밝았다. 어버이에 효도하고 가장에게 순종하며, 자녀를 가르치는 데 법도가 있고 친척을 대하는 데 성심을 다하니, 세상 사람들은 “선생께서 수신제가(修身齊家)하신 공과 부인께서 내치(內治)를 이루신 일이 참으로 아름다운 짝이 될 만하다.”라고 하였다. 갑진년(1604, 선조37) 8월 27일에 출생하시어 을미년(1655, 효종6) 7월 20일에 별세하였다. 당초에는 공주(公州) 땅에 장사 지냈는데, 선생을 이장할 때 옮겨다가 합부(合祔)하였다.
아들 광식(光栻)은 정랑(正郞)을 지냈고, 두 딸은 사인(士人) 나명좌(羅明佐)와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에게 출가하였다. 정랑의 아들 병문(炳文)은 현감, 병하(炳夏)는 정(正), 병원(炳遠)은 도사(都事), 병익(炳翼)은 현감을 지냈고, 딸은 현감 원몽익(元夢翼)의 아내가 되었다. 여양의 장남은 바로 불초(不肖) 민진후(閔鎭厚)이고, 차남은 민진원(閔鎭遠)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府使)가 되었으며, 세 딸 중에 두 딸은 진사 이만창(李晩昌)ㆍ신석화(申錫華)의 아내가 되었고, 인현왕후(仁顯王后)는 둘째 따님이셨다. 병문의 계후자(繼後子) 요경(堯卿)도 녹용(錄用)되어 현감이 되었다. 내외의 증현손(曾玄孫)이 모두 30여 명이다. 측실의 아들은 찰방(察訪) 광림(光林)과 광연(光梴)ㆍ광영(光榮)인데, 광림과 광연도 아들딸을 두었다.
아, 선생의 성대한 덕행과 사업을 불초가 감히 만분의 일도 엿보아 헤아릴 수 없으나, 선생의 언행과 사적은 사람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바이고 또 사책에 실려 있는 바여서 천지와 함께 영원할 것이니 진실로 금석에 새길 필요가 없는데, 하물며 비명(碑銘)ㆍ지명(誌銘)ㆍ행장(行狀)ㆍ뇌문(誄文)을 구하지 말고 작은 표석(表石)에 성명만을 새기라는 것이 선생의 치명(治命정신이 맑을 때 내린 유명(遺命))임에랴. 이에 우암(尤菴) 송 선생(宋先生)이 지으신 묘지(墓誌)에서 그 중요한 것만을 뽑고, 세계(世系), 관작(官爵), 생몰(生沒), 자손을 대략 서술하여 삼가 작은 표석 뒤에 이상과 같이 썼다.
숭정기원(崇禎紀元) 75년 임오년(1702, 숙종41) 6월 일에 외손 자헌대부(資憲大夫) 형조판서 겸 지춘추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刑曹判書兼知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 민진후(閔鎭厚)는 삼가 서술하다.
- 우복 선생의 처음 시호는 문숙(文肅)이었는데, 뒤에 지금의 시호로 고쳤다. -
[주1] 안거(安車) : 편안한 수레인데, 우리나라에는 수레가 없었으니, 곧 가마를 이른다.
[주2] 예송(禮訟)을 …… 회복하고:1675년(숙종1)에 남인(南人)이 정권을 잡아, 효종의 국상 때 자의 대비(慈懿大妃)의 복제(服制)를 기년(期年)으로 정한 것을 죄목으로 삼아 송시열을 덕원(德源)으로 유배하고, 동춘의 관작을 추탈(追奪)하였는데, 경신년(1680)에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西人)이 재집권하여 동춘의 관작을 회복시켰다.
墓表陰記[閔鎭厚]
先生諱浚吉。字明甫。系出恩津。高麗判院事諱大原之後。有諱明誼。司憲執端。其孫諱愉。號雙淸堂。雙淸之曾孫諱汝楫。寔先生之高祖。曾祖諱世英。祖諱應瑞。郡守。考諱爾昌。亦郡守。妣光山金氏。行僉樞殷輝之女。沙溪文元公其從兄也。先生以萬曆丙午十
二月廿八日。生于漢師。辛酉。金夫人沒。沒喪。就學文元公。又委禽於愚伏鄭文莊公之門。仍師事之。天啓甲子。中司馬兩試。丁卯。丁外憂。執喪一如儀文。少有疑晦。必稟兩師門。文元公稱以將作禮家宗匠。崇禎庚午。除洗馬不就。壬申。差童蒙敎官。未幾謝歸。丙子。廷臣交薦。特除禮山縣監。不赴。癸未。除持平辭遞。自是召旨頻仍。乙酉。上疏請早正元孫位號。召致金文正公尙憲委以輔導。不報。己丑。孝廟卽位。首先別諭召之。遂拜命。除進善,掌令,執義。請竄金自點。幷論附麗之徒。兼經筵官。出入講論。庚
寅。乞暇歸。乙未。除司䆃寺正。陞承旨,吏曹參議兼贊善。安車促召。旣至。引見宣醞。上嘗敎曰。世子進學。贊善之功也。上密箚請伸拱北之義。戊戌。乞暇歸。特陞戶曹參判。聞上違豫。赴闕起居。除大司憲,吏曹參判兼祭酒。己亥特陞兵曹判書。遞拜大憲,參贊。顯廟初。拜吏曹判書。袖箚請抑損近宗之留養宮中者。庚子。遞爲參贊。箚論慈懿大妃服制。被尹善道搆誣。遂歸。遣史官勉留。又特令都承旨追往挽止而終不留。辛丑。赴召。過孝廟祥日。乃歸。乙巳。上幸溫泉。入對行宮。隨駕還都。爲
元子輔養官。居數月退歸。丙午。又詣溫宮。扈駕行。中路落後。戊申。又如之。及聞世子疾劇。遂入京。己酉。幸溫命留都。駕還乞暇歸。庚戌。入參世子冠禮。卽歸。已渡江。大朝及東宮皆別諭勉留。暫入旋還。壬子。感疾。自知難醫。上疏極言許積奸狀。上不悅。疾革。又草遺疏。勸勉聖學。仍及親君子遠小人之道。及上遣醫診視。則已不能知矣。竟以十二月二日易簀。訃聞。特贈領議政。且給葬需。葬于燕岐竹岸里。後以宅兆不利。凡三啓舊封。而始克永窆於鎭岑沙店洞酉向之原。卽庚辰十月也。先是。群姦
欺上幼沖。以禮訟爲穽追謫。至及泉壤。庚申更化。特命復爵。且以嘗論賊臣有驗。依張曲江故事。賜祭于墓。又不待狀。而贈諡曰文正。錄用嗣孫。蒐刊遺稿。及是。筵臣白其移葬。命官庀窆具。內殿遣中使護喪。崇終之儀。益無憾矣。平日杖屨所及之地。後學多爲之俎豆虔奉焉。夫人稟質淸淑。德性仁厚。略通書史。識見明悟。孝於親。順於家長。敎子女有法。待親戚以誠。世謂先生修齊之功。夫人內治之成。允爲媲美而匹休云。生於甲辰八月廿七日。終於乙未七月廿日。初葬公州地。及先生遷奉而合祔焉。
男光栻正郞。二女。適士人羅明佐,驪陽府院君閔維重。正郞男炳文縣監。炳夏正。炳遠都事。炳翼縣監。女爲縣監元夢翼妻。驪陽男長卽不肖鎭厚。次鎭遠。文科府使。女爲進士李晩昌,申錫華妻。而仁顯王后。於序居二。炳文繼后子堯卿。亦錄用爲縣監。內外曾玄摠三十餘。側室男光林察訪。光梴,光榮。林與梴亦有男女。嗚呼。先生之盛德大業。不肖旣不敢窺測萬一。而其言行事蹟。昭人耳目。又書在史官。可與天壤俱弊。則固無事乎金石之刻。況勿求銘狀誄文。只以小表揭姓名者。是先生之治命也。茲就尤菴宋先生
所撰墓誌。撮其梗槩。略敍世系官歷生卒子姓。敬書于小表之陰如右。崇禎紀元之七十五年壬午六月日外孫資憲大夫刑曹判書兼知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閔鎭厚。謹述。愚伏先生初諡文肅。後改今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