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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절. 구세계 탐험
1. 서(序)
역사시대(歷史時代. Historic Age)부터 15세기초까지 서양인들은 산맥이나 사막으로 둘러싸인 계곡(바빌로니아와 이집트의 관점)에서 지중해 세계로, 그 다음에는 사하라 사막(Sahara Desert)에서 고비 사막(Gobi Desert)까지, 그리고 대서양(the Atlantic Ocean)에서 인도양(the Indian Ocean)까지 펼쳐져 있는 넓은 배후지역(그리스와 로마의 관점. hinterland)으로 세계에 대한 지식을 꾸준히 넓히다가 그 후 발트해(the Baltic Sea) 너머에 있는 북쪽 땅과 극동지방(極東地方. the Far East)에 있는 또 하나의 눈부신 문화를 포함하게 되었다(중세의 관점).
2. 15세기 이전의 아시아 바다
가. 11세기 항해술의 발달로 원거리 항해 가능
인도양의 다우(dhow. dow), 동남 아시아의 종(jong), 중국의 정크(junk) 선 등
나. 해상 교역로의 발달은 육상 교역로와 연관성
Persian Gulf(페르시아만)~지중해에 이르는 향신료 길(spice road)과 Silk Road 통합되어 Eureasia 대륙에 국제[적인 순환 상업만 형성
몽골제국 분열후 원거리 교역(육로)은 해상항로로 이동
다. 15세기까지 아시아 해상교역
⑴ 긴 해상로 형성(서쪽의 홍해~동쪽의 일본)
⑵ Somalia~Nova Sofala(이전의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지금의 모잠비크) 해안의 소팔라강 하구에 있던 옛 해항) 동해안 지역 : Arabs과 Persians 40여개 상업 도시국가
⑶ the Araian Sea(아라비아해) : 인도의 구자라트(Gujarat) 상인들의 대단한 기세
구자라트의 역사는 BC 25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AD 4~5세기에는 굽타 제국 영토였으며 구자라트라는 이름은 8세기와 9세기에 이 지역을 다스렸던 구르자라 왕조의 이름에서 따왔다. 구르자라 왕조의 통치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솔랑키 왕조가 들어섰다. 솔랑키 시대에 이 지역의 경계는 가장 넓어졌고 경제·문화면에서도 커다란 부흥이 이루어졌다(→ 솔랑키 왕조). 그뒤 구자라트는 계속해서 아랍 이슬람교도들과 무굴 왕조, 마라타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1818년 구자라트 지역의 상당부분이 영국 동인도회사의 관할 아래 놓이게 되었고, 1857년 이후에는 영국령 인도의 한 주가 되었다. 1947년 인도가 독립한 뒤 구자라트 지역 대부분은 봄베이 주에 속하게 되었다. 봄베이 주는 1960년 지역주민이 쓰는 언어에 따라 구자라트 주와 마하라슈트라 주로 나누어졌다.
인도아리아어족에 들어가는 구자라트어는 산스크리트에 속하는 프라크리트어와 그 한 줄기인 아파브랑샤어에서 나온 말이다. 이 말은 모한다스 간디가 모국어로 쓴 언어이기도 했다.
⑷ Kling(클링)과 Chetti(체티) 두 종족(인도 내부 상인들) : 남인도의 교역을 주관
⑸ 동남 아시아 Srivijaya(650~1377), Majapahit(1293~1527) : 차례로 쇠퇴한 후 소규모의 회교도 상업국가들 성장
Srivijaya was a Buddhist thalassocratic empire based on the island of Sumatra (in modern-day Indonesia), which influenced much of Southeast Asia. Srivijaya was an important center for the expansion of Buddhism from the 7th to the 12th century AD. Srivijaya was the first unified kingdom to dominate much of theMalay Archipelago. The rise of the Srivijayan Empire was parallel to the end of the Malay sea-faring period. Due to its location, the Srivijaya developed complex technology utilizing maritime resources. In addition, its economy became progressively reliant on the booming trade in the region, thus transforming it into a prestige goods-based economy.
thalasocracy 제해권(制海權)
thalasoctatic 제해권을 가진
⑹ 중국 송(宋) 원(元) 명(明)초기 : 활발한 해상교역
수입품 : 남방의 향료, 상아, 진주, 목면(목화), 금. 북방의 주옥, 모피, 말, 양, 약재
무역항 : 광주(廣州), 천주(泉州), 명주(明州), 항주(杭州), 온주(溫州)
celadon=Nankin porcelain 청자(靑瓷. 靑磁)
china₁자기(porcelain). 도자기. <미. 속>이빨. <미. 속>돈. <미. 속>홍차 한자, 도자기의
chile =chili, chilli 칠레 고추, chili con carne(멕시코 요리. 칠레 고추를 넣은 저민 고기와 강앙콩 스튜).
philippine=philippina 필리핀.필리피나(필리핀 놀이). 나누어 가진 열매.
외몽골 카라코움(和林)~오고타이 수도 에밀 ~카스피해의 북쪽~캅착크한국 수도 사라이
② 제2로(중앙로) : 천반북로(天山北路. 당 나리 이루 개척)
외몽골 카라코움(和林)~차가타이 수도 알말리크 ~서투르기스탄 또는 아랄해와 카스피해의 북쪽~캅착크한국 수도 사라이
③ 제3로(남방로. silk road. 한 장건이 개척))
몽골 대도(大都. 北京)~동투르기스탄의 oasis ~일한국 수도 타브리즈와 Bagdad
카라코움(和林)~상도(上都)~대도(大都. 北京)/~운하(運河)~항주(杭州)~천주(泉州)
⑷ 세관 : 시박사(市舶使)(광주(廣州), 항주(杭州))
마. 근대초까기 아시아의 바다 : 만국 보편의 세계(ecumenical world)
헤라클레스의 기둥(the Pillars of Herules. 지브롤터 해협의 동쪽 끝에 솟아 있는 2개의 바위. the Rock of Gibraltar) 양쪽 연안을 장악하고 있던 카르타고인들(Carthaginians. 옛날 페니키아인이 지금의 튀니지에 세운 고대도시 카르타고의 주민들)은 일찍부터 지브롤터 해협(the Strait of Gibraltar)을 지나 대서양으로 나가는 모험을 감행했다.
헤라클레스의 기둥(the Pillars of Herules)
북대서양을 더 멀리까지 탐험한 것은 지중해 사람이 아니라 스칸디나비아반도 출신의 고대 스칸디나비아인들(Scandinians)이었다. 8~11세기에 러시아 평원을 가로질러 남동쪽과 교역하던 스칸디나비아인(주로 스웨덴인)들은 흑해 연안의 항구에서 바랑인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같은 무렵 북해 연안에 정착하여 교역에 종사하거나 약탈을 일삼던 다른 집단(주로 덴마크인)도 노르만인으로 가장하여 지중해에 도착했다. 890년경에 노르웨이의 오테레는 배를 타고 노르카프 곶(Nordkapp. Norway의 핀마르크주에 위치한 노르웨이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노르카프는 노르웨이어로 "북쪽의 곶")을 돈 다음 라플란드 해안을 따라 백해(러시아의 북서쪽 해안에 있는 바렌츠 해의 만으로 육지에 대부분이 둘러싸인 북극해의 연장부. White Sea. Beloye. Beloje)까지 항해했다.
그러나 북극과 가까운 곳을 항해한 대다수의 고대 스칸디나비아인들은 동쪽이 아닌 서쪽을 탐험했다. 이들은 브리튼 섬 해안을 따라 내려와 오크니 제도와 셰틀랜드 제도, 헤브리디스 제도 및 아일랜드 등지에 정착한 뒤 아이슬란드로 계속 항해했다. 870년에 아이슬란드에 도착한 이들은 그보다 2세기 먼저 아이슬란드에 식민지를 개척한 아일랜드 이주민들 틈에 정착했다.
Great Britain
3. 인도양과 중국해 해안선 탐험
지중해와 아라비아 해 사이에 놓여 있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및 유럽 지역에서는 세 대륙을 잇는 육지나 만을 이용하여 일찍부터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다.
BC 510년경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King Darius.558~486 BC)은 카리아 출신의 스킬락스를 보내 인더스강을 탐험하게 했다. 스킬락스는 육로로 카불강까지 간 다음 카불강을 따라 인더스강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인더스 강을 따라 바다에 닿아 서쪽으로 항해하여 페르시아만 곁을 지나 홍해를 탐험하고 마침내 지금의 수에즈 근처에 있는 아르시노에에 도착했다.
인더스강
유명한 정복자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er the Great, 356~323 BC)의 원정은 대부분 군사적 탐험이었다. 원정 초기에 통과한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는 그리스인들에게 이미 잘 알려진 지역이었지만 후기에는 카스피해 남쪽에서 힌두쿠시산맥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통과했고 이 원정으로 그리스인들은 지리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로마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동양의 사치품에 대한 수요도 점점 늘어났다. 그 결과 동쪽 바다에서는 상업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게 되었다. 로마제국(大秦國)의 14대 하드리아누스(Publius Aelius Trajanus Hadrianus, 재위 117~138) 황제 시대인 BC 1세기에 서양 상인들은 이미 Siam(지금의 태국)과 캄보디아, 수마트라 및 자바 섬에 도착했다. 일부는 북쪽의 중국 해안까지 올라갔던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 기록에 따르면 161년에 로마제국의 16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재위 161~180)가 후한 11대 환제(桓帝. 146~167)에게 보낸 사절'이 서양 물품들을 가져왔고 환제는 무척 기뻐하며 이 물건들을 공물로 받았다고 한다.
2세기가 지나고 로마 세력이 쇠퇴하자 동쪽 바다와 로마의 교역은 완전히 중단되지는 않았지만 에티오피아인·파르티아인·아랍인들에게 차츰 동양 무역의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이들 중 가장 성공을 거둔 아랍인들은 3~15세기에 동양으로 가는 바닷길을 장악했다.
4. 중앙 아시아의 육로
1216년 몽골의 테무친(鐵木眞)이 칭기즈 칸(Jinghis Khan. Genghis Khan)이라는 칭호를 채택하면서 중국을 정복한 뒤, 그 정복의 화살을 서쪽으로 돌렸다.
그와 그의 후계자들은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고, 13세기말 칭기즈 칸의 후계자인 쿠빌라이 칸은 흑해에서 황해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다스리기에 이르렀다.
4한국(汗國)과 원
몽골(1206~1271)
한국 | 설립자 | 위치 | 별망 | |||
킵차크한국(金帳汗國, 1243∼1502) | 바투((拔都) 주치[求赤:拙赤]아들) | 남러시아 | 크림한국(1441년 ~ 1783년) | 1783년 4월 8일에 예카테리나 2세에게 별망 | ||
카잔한국(1448~1552) | 1552년 10월 2일에 이반 4세에게 멸망 | |||||
아스트라한 한국(1466년 ~ 1556년) | 1556년 이반 4세에게 멸망 | |||||
시비르한국(1490년 ~ 1598년) | 1598년 러시아에 멸망 | |||||
오고타이한국(1218~1310) | 오고타이 | 외몽골・내몽골,북중국 | 1310년 차가타이에 병합됨 | 동차가타이한국(( 모굴리스탄 한국 )에선 부카1360~1706) | ~1706 준가르에 멸망 | |
차가타이한국(1227∼1360) | 차가타이 | 중앙아시아 | 서차가타이한국(1360~1369) | Timur제국(1369) | ||
일한국(1256∼1411) | 훌라구 | 페르시아 | 1411년 티무르(帖木兒)에게 멸망 | |||
원(1271~1368) | 쿠빌리아 | 남중국 | 1368년(북원 1696년 청나라 강희제 중국 복속) |
Blood is thicker than water.
Power knows no blood.
4한국과 원
1234년, 우구데이 카안은 바투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제2차 서방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이 원정군은 킵차크 초원과 동유럽, 러시아 등을 정복하였다. 그 결과 서유럽은 ‘지옥에서 보낸 타르타르의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고, 교황인노켄티우스 4세는 다시 있을지 모르는 몽골의 공격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카르피니( John of Plano de Carpini)는 교황이 몽골의 군주에게 보내는 두 통의 편지를 들고, 1245년 4월 6일 리옹을 출발하였다. 험난한 여정에도 불구하고 1246년 7월 22일 카라코룸 근처에 도착해 새로운 대칸으로 선출되는 구육의 즉위식에 참석하는 행운을 누렸다. 그런 다음 같은 해 11월 13일 카라코룸을 출발해 1247년 가을 리옹에 도착했다. 그는 귀환 도중 루시에서, 그 동안 보고 들었던 것을 토대로 『몽골인의 역사』(Historia Mongalorum)라는 보고서를 작성하여 교황에게 바쳤다. 보고서의 내용을 보면, 먼저 몽골의 자연과 기후, 종교, 관습 등에 대해 간명하게 서술하였다. 이어서 칭기스가 몽골고원의 유목민을 통합하는 과정, 몽골 군대의 편제와 구성 원리, 몽골 대칸의 위엄과 몽골군대의 엄격한 군율에 대해서 기술하였다. 그리고 몽골인의 전투방법, 정복지역에 대한 관리에 대해서 기술하였다. 카르피니는 대몽골국의 내부 문제에 대해서도 관찰하고 기록하였다. 제국의 행정을 책임지고 있던 친카이, 카닥, 발라 등 고위관리들을 만나기도 하였다. 카르피니는 구육 칸을 직접 만났으며,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해 그가 기독교도라고 적고 있다. 물론 구육이 기독교에 우호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종교에 비해서 특별대우를 해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유라시아를 아우르는 세계 제국으로 웅비하고 있던 대몽골국의 수도인 카라코룸에는 다양한 이방인들이 존재하였다. 카르피니는 몽골에 체류하는 동안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오거나 끌려 온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로부터 몽골의 내부사정에 대한 정보를 얻어들었다. 특별히 언급해야할 것은 ‘솔랑기(Solangi)’에서 보낸 사신에 대해 여섯 차례나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몽골 사람들은 지금도 한국을 ‘솔롱고스(Solonγos)’라고 부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것도 사전정보조차 불충분한 상황에서 몽골에 다녀온 카르피니의 여행기록은 비록 4개월 정도의 짧은 체류기간이었지만, 예리한 눈으로 관찰하고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어떤 부분에서는 카르피니의 몽골어와 몽골 역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면이 보이지만, 비교적 객관적으로 기록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 ‘타르타르(몽골)’의 야만성과 폭력성, 파괴와 살육 등을 과장하여 기술한 측면도 부인할 수 없다. 게다가 카르피니의 사행 목적은 몽골 정탐과 몽골의 서방세계 위협론을 과장할 필요가 있었으며, 몽골에 대항할 연합세력은 로마 교황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윌리암 드 루브르크(William de Rubruch)
조반니 다몬테코르비노(Giovanni da Monte Corvino, 1247-1328): 원 세조때 1292년 ㅍ로마 교황의 명(Papa Nicholaus Quartus)을 받고 와서 연경에 교회를 세우고 30년 그리스도교 포교
유럽인들은 몽골족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고, 비단길을 통해서 중국의 전설적인 보물을 찾아가는 그리스도교 상인들에게 정치적 보호막을 제공해주기 위해 몽골족과의 우호관계를 맺으려 했다. 1260년 니콜로 폴로와 마페오 폴로 형제는 크림 반도로 교역을 위한 여행을 떠났다.
1267년 그들은 중국 여행길에 올랐는데, 그때 당시 17세 소년이었던 니콜로의 아들 마르코 폴로도 동행했다. 폴로 일가는 페르시아를 가로질러 파미르 고원에 이른 다음, 거기서 타림(塔里木) 분지와 고비 사막의 남쪽 기슭을 따라 뻗어 있는 대상로를 지나 캄발루크에 이르렀다. 마르코 폴로는 동양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서양의 지리 지식에 크게 기여했으며, 몇 세기 동안 극동지방에 대한 유럽의 지도는 마르코 폴로가 제공한 정보에 바탕을 두었다.
17년 뒤 그들은 중국을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바닷길을 따라 유럽으로 향했다. 먼저 자바 섬을 방문한 뒤 말라카 해협을 빠져나갔고, 호르무즈에 상륙한 다음 육로로 아르메니아를 거쳐 1295년 베네치아에 도착했다.
그 후 몇몇 여행가들이 폴로 일가의 뒤를 이었다. 이탈리아 출신의 조반니 다 몬테코르비노는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사로서 베이징 주교가 되어 1294~1328년에 중국에서 살았다. 이탈리아 포르데노네 출신의 수사 오도릭은 인도와 말레이 반도를 거쳐 베이징에 도착한 다음, 바닷길을 이용하여 광둥(廣東)으로 갔다.
1325년에 티베트를 방문하고, 중앙 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 길을 택한 최초의 유럽인이었다. 1325년 탕헤르 출신의 아랍인 이븐 바투타는 메카로 전통적인 순례길을 떠나, 그후 30년 동안 구세계의 대부분을 방문했다. 그가 여행한 거리는 12만km가 넘었다고 한다. 그는 아라비아 반도의 대부분을 탐험한 최초의 인물이었고, 인도를 두루 여행했으며, 자바 섬과 동남아시아까지 발길을 뻗쳤다.
말년에 그는 서양으로 돌아와 스페인을 방문한 뒤, 수단 서부지역을 탐험했다. 그는 나이저 강에 도착하여 그것을 나일 강(the Nile)이라고 불렀으며 모로코의 페스로 돌아와 생생한 여행기를 썼다. 그러나 그의 책은 그리스도교 세계인 유럽에는 몇 세기 뒤에야 알려지게 되었다.
이븐 바투타(Ibn Battutta. 1308~1364)
모로코 출생의 이슬람 대여행가로 상세한 여행기(Riḥlah)를 남겨 "동방견문록" 을 지은 마르코 폴로와 비교되고 있다. 1325년 6월, 메카 순례를 목적으로 단신으로 고향을 떠나 북아프리카 · 아라비아 · 동아프리카 · 중동 · 발칸 · 중앙아시아 · 인도 · 동남아시아 · 중국을 여행하고 1350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이듬해에 에스파냐 그라나다에 갔다가 1352년부터 1353년에 걸쳐 사하라 사막을 지나 니제르 강 중류 지역의 흑인 왕국을 방문하였다. 그가 구술한 "도시들의 진기함과 여로의 견문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주는 선물" 이라는 여행기는 당시의 이슬람 세계를 아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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