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성호학파(星湖學派)의 학자이다. 세례명은 암브로시오이며 초기 천주교 신자이다. 본관은 안동, 호는 녹암(鹿菴)이며 당호는 감호(鑒湖)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의 형이다. 권상문 세바스티아노의 백부이며 양부이다. 부친 권암(權巗)과 남양 홍 씨 사이에 경기도 양근의 감호(현 경기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죽을 때까지 고향을 지켰다.
여말 선초의 학자 권근의 후손인 집안은 기호 남인(畿湖南人)에 속하였고 증조부인 권흠 때까지는 사환이 끊이지 않었다. 1693년(숙종 19) 권흠이 대사성에 오른 후 이듬해 일어난 갑술옥사(甲戌獄事)로 관직에서 물러난 후 양근 땅으로 낙향 관직에서 멀어진다. 그런 중에도 꾸준히 가학을 이어갔고 남인들 가문과 혼사를 이어갔다. 부친 권암은 경향에 이름이 있었는데 그가 교류한 인물들은 윤동규, 이병휴, 안정복, 홍유한 등이다. 훗날 동생 권일신이 안정복의 딸과 혼사를 맺은 배경이 여기에 있다. 권철신은 부친에게 학문을 배웠고 24세 되던 1759년(영조 35)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의 문하에 들어 가 가르침을 받는다. 그 결과 퇴계 이황과 백호 윤휴,를 사숙하며 남인계의 학자들과 폭넓게 교류하며 점차 성호학파의 거유로 지목받는다. 당시 그에게 영향을 준 인물은 이병휴, 안정복, 윤동규, 신후담과 홍유한, 이기양, 한정운 등이다. 특히 이병휴는 1776년 사망할 때까지 많은 영향을 준다. 이후에는 권철신을 중심으로 녹암계가 형성되기 시작하는데 그에 문하에 들어온 인물은 김원성, 이총억, 이존창, 유항검,홍낙민, 이승훈, 정약전, 약용, 이윤하 이벽, 윤유일 등이다.
그의 학문의 성격은 스스로 지식을 궁구하고 허물을 찾는데 있었다. 이러한 것은 스스로 학문을 체득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현실 사회, 경제의 개혁을 포방한 윤휴나 경전을 해석함에 있어 주자의 학설을 그대로 추종하지 않은 이익의 태도에 많은 영향을 받은 사람이 바로 권철신이었다. 그러므로 이병휴는 성호학파 소장들 가운데 경전에 대한 자주적인 해석을 추구하는 권철신 학문을 높이 평가하게 된다. 제자 정약용은 훗날 권철신이 윤휴 설이 현실에 맞지 않음을 지적하면서도 현실 개혁의 실학적의 지를 담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와 같이 권철신의 성향은 학문 내용에서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는 시경 구절을 해석함에도 국풍에 대한 의문을 가리켜 청풍, 위풍은 음란한 것을 꾸짖는 시라하여 주자의 설과 달리 자주적인 견해를 나타낸다. 상서에 대해서도 일단 위 공본 25편은 위서라 단정하고 상서 주서의 홍범구주에 대해 서도 의문을 나타낸다. 이를 안정복은 이와 같은 권철신의 의견이 구양수의 설과 마찬가지로 참란 한 것이라 질책하며 정주의 뜻에 따를 것을 권고한다. 다음으로 주자가 맹자의 4단을 논하면서 단서설을 제시한 데 반해 권철신은 단수설을 제시했다. 이는 맹자 자신이 제시한 단시설에 근거한 것으로 정약용이 훗날 이를 해석하면서 단시설을 제시한 것은 권철신에게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주자가 인의예지를 주로 이(理)나 덕(德)으로 해석한 데 반해 권철신은 인의예지(仁義禮知)란 일을 행함에 있어 이루어진 말 이라 하여 이를 성리학적 측면 해석하지 않고 실행의 바탕으로 삼고자 했다. 권철신은 또 중용의 처음과 끝을 군자와 천명의 관계로 연결 지으면서 군자가 계신공구(戒慎恐懼)하는 것은 곧 하늘의 속성과 은밀함을 염두에 둔 때문이라 설명했다. 경전 해석에서 나타나는 그의 학문적 특징은 예론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그의 예론은 주로 가례에 대한 것이지만 복제예송(服制禮訟)에 대해서는 기해방례(己亥邦禮)는 끝내 참죄가 옳다고 하여 윤휴의 참최 3년 설을 따르고 있다. 가례를 설명함에 있어 권철신은 우선 주자가례 대신 고례에서 근거를 찾으면서 주례 가례 와는 달리 혁신적인 내용을 달게 되었으며 현실 개혁의 의지를 표명하게 되었다
또한 권철신은 1766년 무렵 양명학을 접하고 있었다. 이 사실은 대학에 대한 이해에서 잘 나타나는데 세부적으로는 주자의 해석과 달리 대학 고본을 개정할 필요가 없다고 한 점, 격물치지장(格物致知章)은 보망할 점이 필요 없다고 한점. 치지(致知)를 양명학 입장에서 설명 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물사(物事)에 대한 이해 이병휴의 설을 따라 명덕(明德)을 효제자(孝第慈)로 해석한 점 성의(誠意)를 격물과 치지의 요체로 삼은 점 등은 윤휴,이병휴,정약용과 유사한 해석으로 이들 사이의 학문적 영향 관계를 잘 나타 내주고 있다. 그 결과 권철신은 1769년에 이르러 주자학의 핵심적인 문제에서 양명학을 따르게 되었다. 그렇지만 윤후니 정약용에서 보는 것처럼 그 또한 양명학을 수용한 바 있으나 선봉에 까지 이른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가 이해한 대학의 내용은 신후담이나 이맹휴의 견해를 따라 주자의 의견에 반대하면서 지주적인 해석을 폈던 것으로 파악된다.
권철신과 천주교의 관계는 그의 생애에 있어 두번째 시기, 즉 이병휴의 사후 녹암계를 형성하는 후반기에 나타난다. 일단 권철신은 이병휴와 대학에 대해 문답하는 1773년까지는 양명학에서 벗어나 천주교를 접하면서 우선 학문적인 서학으로 이해 하였고 더 나가서 이를 신앙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1779년 기해년 겨울에 개최된 주어사 강학은 바로 권철신 주도의 녹암계 인물들이 종래의 유교적 강학 형태를 빌려 서학이나 양명학에 대해 처음 토론한 자리였다. 그러니 이전부터 이미 그들은 여러 형태로 천주교 신앙을 담은 한역 서학서에 접해 오고 있었다. 권철신은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된 1784년 9월경 천주교 서적을 들고 집으로 찾아 온 이벽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때부터 얼마 동안 그는 천주교를 신앙으로 신봉하였으나 드러나게 활동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황사영 알렉시오의 백서에서는 권철신이 천주교 신앙에 접촉한 뒤 일단 온 가족이 이를 믿어 따라고 그중에서도 특히 긍의 아우인 권철신이 산앙 생활에 열중하였지만 아우 일신이 1791년의 탄압으로 사망하자 감히 드러내 놓고 수계하지는 못하였다. 또 안정복이 1784년 권철신에게 보낸 서한에서 근래 받은 그대의 서한이 전에 것과 크게 다르다 고 하면서 권철신이 천주교를 가까이함을 탓하였다. 안정복이 이렇게 권철신을 탓한 이유는 첫째 그가 종래에 궁구해 오던 학문을 모두 버리고 오직 마음을 딱는 일에만 힘쓰겠다고 한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는 권철신이 세상을 마치는 법을 궁구하겠다고 한 것을 불가의 방법, 즉 천주교의 방법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안정복은 다른 서한에서 정약전, 이승훈, 이벽, 이총억,은 몰론 이가환, 이방억 뿐 만 아니라 권철신도 천주교에 빠져음을 질책하였다.
이후 권철신은 천주교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권철신은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었다. 특히 정미년1787년의 반회사건 이후 같은 기호남인 안에서 공서파, 신서파의 대립이 노골화되고 신서파의 이승훈, 정약용, 이가환이 사학의 3원흉으로 거론되면서 권철신도 자주 그들을 인도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우 권일신은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유배형을 받고 길을 가던 도중에 사망하였으며 양자 권상문도 1800년 6월에 체포되었다. 그러므로 1801년(순조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그에 대한 비판이 비등하게 되었고 마침내 3월24일 양근에서 체포되어 이가환, 정약용,이승훈,홍낙민, 정약종 등과 함께 문초를 받게 되었다. 이때 그는 국청의 추국에서 배교로 일관하였으며 그가 남긴 저서로서는 시칭,2권,대학설 1권 등 여러 저서가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