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 시인 박복조 씨가 한·영 시선집 ‘산이 피고 있다’(Mountain is Blooming)를 펴냈다. 지금까지 펴낸 4편의 시집 ‘차라리 사람을 버리리라’ ‘세상으로 트인 문’ ‘빛을 그리다’ ‘말의 알’에 발표한 작품 중에서 지금 다시 곱씹어 보고 싶은 작품들을 선정하고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한 권의 책을 ‘푸른색 표지’와 ‘분홍색 표지’ 2권으로 펴냈다.
4편의 시집 중 마지막으로 펴냈던 ‘말의 알’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가져왔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시인은 변했고, 가장 최근에 펴낸 시집에서 ‘스스로 발견하고 싶은 모습을 자주 발견’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시집 ‘차라리 사람을 버리리라’는 시를 쓴다는 것과 나를 안다는 것이 동의어라고 생각하던 시절 쓴 작품들을 묶은 것이다. 시 그림자만 봐도 좇아가고, 어디서 시향만 나도 혀를 내밀던 때였다. 사람을 버릴지언정 시를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시만 그 자리에 있으면 모든 것이 완전하다고 믿었던 시절이다.” 당시 작품은 박 시인의 말대로 “가슴이 뱉어낸 방언”이었다.
그랬는데, 그 시집에서 많은 작품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시를 쓴다는 것과 나를 안다는 것이 같은 말이라고 믿었는데, 이제는 모를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세월이 지나고 보니, 오히려 내가 나를 모르겠다.”
두 번째 시집 ‘세상으로 트인 문’을 쓸 때는 야생화에 푹 빠져 지내던 시절이었다. 꽃 속에서 신을 만났고, 우주를 보았다. 하루라도 들꽃을 보지 못하면 못 살 것 같았다. 꽃은 자유였고, 꿈이었고,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누가 보아 주든 안 보아 주든 제 목숨, 제 빛깔로 살아가는 그들이 경이로웠다. 꽃에서 보았던 것을 시로 그려내느라, 그 시절 박 시인은 세상을 잊었다.
세 번 째 시집 ‘빛을 그리다’는 시인이 생활인으로서 가장 힘든 시기를 지나던 시절 쓴 작품이다. 밤늦도록 약국 문을 열고, 칭얼대는 어린아이를 업고, 엄마로 주부로 약사로 일하는 자신을 보고, 약국을 찾는 손님들을 보았다.
무거운 짐을 지고 휘청거리는 사람들, 삶의 무게에 눈물 흘리는 사람들…. 사람들은 각자의 사연으로 슬퍼했고, 피로해했고, 외로워했다. 그 속에서 박 시인은 사람을 보았고, 세상을 보았다. 각막에 또렷하게 각인된 그네들의 삶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고 종내에는 시상(詩想)이 되어 돌아왔다. 그래서 그 시절 쓴 시는 대부분 ‘이야기 시(詩)’라고 할 수 있다.
네 번 째 시집 ‘말의 알’ 은 세 번 째 시집 뒤 오랜 공백, 약국 은퇴와 늦깎이 공부를 하면서 6년 동안 쓴 62편의 작품을 묶은 것이다. 세 번째 시집과 마찬가지로 역시 사람살이의 애환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전과는 시풍이 많이 다르다.
“네번 째 시집 ‘말의 알’에서는 말을 비틀거나 꼬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낯설지 않고 진실한 시를 쓰고 싶었습니다. 말 그 자체에 이미 사람살이와 우주가 온전히 들어가 있는데, 그것을 다시 비틀거나 꼬아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꽃치고는 별로 화려할 것 없는 목련을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목련 꽃이 툭 터지는 소리를 들려주고 싶었어요. 꽃에 치장을 가하느라 정작 그 꽃송이 터질 때 나는 ‘툭’ 소리를 가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박 시인이 이번 시선집에서 유난히 네 번 째 시집 ‘말의 알’에서 많은 작품을 가져온 이유였다.
“여태 제가 날려 보낸 방언들 중에서 가슴을 먹먹하게 울리는 시, 삶을 더욱 단단히 껴안고 있다고 생각되는 시들을 골랐습니다.”
한글로 쓴 시와 함께 굳이 영어로 옮긴 시를 붙인 것은 한 사람의 평범한 시인인 동시에 국제펜 한국본부 대구지역위원장 회장이라는 직함에 조금이라도 충실해 보겠다는 마음이 담겨 있다. 물론 혹여 영어만 아는 이웃나라 사람이 있어, 시를 읽어준다면 더 좋겠다는 바람도 있다.
이번 시집에는 모두 82편의 작품이 영어로 번역한 시와 함께 실려 있다. 김광수 전 동화통신 외신기자가 번역을 해주었다.
유성호 한양대 국문과 교수(문학 평론가)는 시집 해설에서 “박복조 시인의 작품 바닥(bottom/basis)에는 사물과 현상을 잡아채는 첨예한 사유와 감각의 흐름이 있다. 사물과 현상의 고유한 이미지들을 섬세하게 포착해 그것을 선명한 물질적 언어로 바꾸어 간다. 그 안에는 아득한 심연에서 전해져오는 어떤 미적 파동이 담겨 있는데, 시인은 그것을 아름답게 채록해 간다. 박 시인의 시는 삶의 심층에 자리한 심미적 서정에 근접하는 작업인 동시에 근원으로 귀환하려는 탐색이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