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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槪觀)
2장 3절-25절.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아브라함이 아내를 팔아먹을 때 사라를 자기의 누이라고 했는데, 이미 벧엘에서 회개를 한 후에 이런 일을 했으니까 아브라함이 벧엘에서 한 회개를 바른 회개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우리도 현실을 살면서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렇겠습니다’ 라고 하고서는 다시 또 그 죄를 짓는 일이 있다. 이런 일이 한두 번만 있는 게 아니라 계속 반복이 되고 있고, 나의 이런 현실을 보면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 같다. 이러다 보니 이제는 죄를 짓고서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하는 말이 잘 안 나온다. 더더군다나 알면서도 실수를 해서 죄를 짓게 되면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라는 말을 더 못하겠다. 왜냐? 또 다시 고의적으로 짓겠다는 마음은 아니지만 얼마 안 있다가 내가 또 다시 그런 짓을 할 것을 내 스스로가 잘 아니까. 그리고 계속 이런 식으로 나가면 계속 거짓말을 하는 자가 되니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알아서 하십시오’ 이럴 수도 없는 거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약함을 실토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알아서 해 주시길 바라야 한다.
아내를 팔아먹은 아브라함의 실수를 보면서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이 믿음이 처음부터 끝까지 가는 게 아니라 인간은 실수가 있는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래, 인간은 다 실수가 있는 것이니 나도 그래야 되겠다’ 라고 해서는 안 된다. 자기가 아무리 실수를 할 수 있는 존재이지만 죄를 사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죄에 대한 느낌이 약하면 안 된다. ‘다른 사람은 그렇더라도, 아브라함은 그렇더라도 나는 아브라함처럼 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나가야 한다. 어쨌든 인간 나의 약함을 하나님께서 잡아주시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죄를 짓지 말아야 하겠고, 다른 사람이 죄를 지은 것을 볼 때 그 사람을 불쌍하게 보고 측은하게 봐야지 ‘에이, 그거 뭐 하나 못 이기느냐?’ 라고 하면 안 된다. 이렇게 말하는 자기는 더 약한 것에도 넘어질 수 있다.
아브라함이 아내를 판 것은 실수는 실수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오셔서 이 아브라함을 보호하시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끝까지 보호하시는구나’ 하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걸 보고 ‘내가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겠지’ 라고 한다면 그 믿음은 좋으나 어딘지 모르게 뭔가 찜찜하다. ‘안 건져주시겠지’ 하는 것보다 듣기는 좋은데 어딘지 모르게 찜찜하다.
우리는 죄를 지었을 때 빨리 회개하고 올라와야 한다. 회개하고 올라온다는 것은 말로만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라고 하는 게 아니라 먼저는 하나님을 찾아야 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약속하신 천국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면 내려가게 되고, 천국을 바라보면 올라가지는 거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생명줄을 던지시면 그 줄을 잡는 것은 내가 붙잡아야 한다.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잡아야지 잡지 않으면 떠내려가는 거다.
여러분들이 기도를 하면 응답이 있느냐? 어느 교회에서는 “가난할 때,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살려주시오. 건져주시오’ 라고 하며 금식기도를 하니까 하나님이 도와주시더라” 하고 간증을 하는 사람이 많은데, 우리는 물질적 개념으로 도와달라는 기도는 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만 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응답이 없는 거냐? 응답이 있는데 못 느끼는 거냐, 없어서 못 느끼는 거냐?
‘하나님께서 진리로 나를 낳으셨으니 하나님이 내 형편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나를 책임지십시오’ 이런 기도 안 해 봤느냐? 나의 이룰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나의 뒤에서 다 해 주시는 게 좋겠느냐, 나에게 지혜를 주셔서 유혹과 미혹을 다 이기고 나가게 해 주시는 게 좋겠느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놓고 기도를 하셨는데, 겉으로 보면 응답을 받지 못한 것 같지만 실은 응답이 없는 응답이다. 이게 좋은 거다.
우리가 어떤 큰 것을 응답받으려고 하기 보다는 평소에 잘잘한 일들에서 믿음을 가지고 써먹고 이겨나가면 이게 더 큰 것을 이길 수 있는 숙달이 되는 거다. 1학년에서 2학년,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실력이 자꾸 올라간다. 자기 스스로 자기가 걸어갈 줄을 모르면 나중에는 걷지를 못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성을 돌고서 잤다고 했는데, 왜 잔 거냐? 잠을 자는 것은 쉬는 것, 편한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순종하고 맡김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성을 도느라고 힘이 들었으니 좀 자자’ 이것보다 하나님 앞에 순종한 마음에서 나오는 편안함을 말한다.
신앙의 세계는 언제나 영을 기준으로 영적 사상과 정신을 말한다. 따라서 성경을 육적으로 해석을 하게 되면 인간의 사고방식이 앞서게 된다. 이건 안 믿는 사람의 사고방식과 똑같은 거다. 하나님께서는 사사건건 모든 것을 나의 영을 위해서, 영 구원을 위해서 돌리시는 건데 여리고성을 돈 후에 잠을 잔 것을 육신이 피곤해서 잔 것이라고 하게 되면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계시의 교훈은 없는 거다. 성경을 이런 사고방식으로 풀면 하나님의 뜻과는 멀어진다.
삼손은 이룰구원 면에서 구원이 없는데, 블레셋 딸과 결혼을 하려고 한 것부터 육적으로 나간 거다. 그런데 또 보면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 크게 감동이 되었다고도 했는데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뭔가 깨닫게 해 주고자 하는 뜻이 있어서 그 때마다 힘을 주신 건데, 삼손은 이것은 모른 채 자기가 큰일을 한 것을 여자에게 자꾸 자랑을 했다. 하나님께서 자기로 통해 역사를 하실 때 여자에게 자랑을 할 게 아니라 그럴 적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를 깨달아 거기에 순종했어야 했다.
하나님께서 자기로 통해 역사를 하신 것이 여자에게서 떠나라고 하는 신호인데 삼손은 이걸 깨닫지 못하고 자기가 잘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도와주는 것으로 착각을 한 거다. 예를 들면 예수 믿는 우리가 어쩌다 일이 펴졌을 때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라는 신호인 줄을 모르고 삼손이 이방 땅에 가서 활동을 하고 거기서 자기의 힘을 자랑했듯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세상으로 나가버리는 것과 같다.
삼손은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못한다. 마지막에 삼손이 우상의 전당을 무너뜨린 것도 하나님이 힘을 주신 거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해서라도 후손들에게 힘 센 삼손의 이름을 알게 해 주시려는 배려였다. 만일 삼손이 블레셋 사람을 한 명도 죽이지 못하고 무너진 건물에 깔려죽었다면 꼴이 뭐가 되느냐? 그나마 하나님께서 힘을 주신 것이 있어서 블레셋 백성 3천 명과 함께 죽었으니 사사로서 이름이 있는 거다.
그러면 삼손이 그렇게 한 것이 삼손은 아무 감정도 없고 자유의지도 없고 자기는 하기 싫은데 하나님의 손에 불들려서 한 거냐? 그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기가 좋아서 한 거다. 그런데 이 일이 여호와께로서 나온 것이라고 했는데 이게 무슨 뜻이냐? 삼손은 하기 싫은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밀어 넣었다는 것은 아니다. 삼손이 원하는 대로, 좋아하는 대로 내버려 두면서 그 와중에 한 번씩 힘을 줘서 나귀턱뼈로 천 명을 죽이게도 한 거다. 그래서 삼손이 그런 일을 한 것이 잘 한 것 같은데 어딘지 모르게 씁쓸한 느낌이 든다.
어떤 사람이 뭔가 하나를 잘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좋게만 봐서는 안 된다. 인간은 굴곡이 있어서 잘 할 때도 있고 잘못할 때도 있는 거다. 우리가 이걸 알고 잘못된 일이 있을 때는 철저히 회개를 하고 앞으로 나가야 발전이 있다. 우리는 처음부터 예수님처럼 되는 게 아니다.
성경에 보면 모세도 넘어진 일이 있고, 다윗도 넘어진 일이 있고, 솔로몬도 넘어진 일이 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것을 보면서 ‘믿음이 있는 저 분들도 죄를 지었으니 나는 그 분들보다 훨씬 믿음이 없고 못하니 얼마나 죄를 더 짓겠느냐?’ 라고 해야 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 믿음이 있던 없던 모든 사람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존재이니 믿음이 없는 나는 더 경계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삼손은 자기 딴에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한다고 했으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은 아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위한 삼손의 그 열심을 보시고 한 번씩 능력을 주셨다. 이럴 때 인간으로서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주님께 전폭적으로 맡겨야 하는데 삼손은 자기의 머리카락 긴 것만 믿었다.
삼손이 이렇게 한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고 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다 하셨다는 뜻이라고만 한다. 이렇게만 보게 되면 하나님의 공의성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터치해서 철사를 꼬부려 놓듯이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 만일 이렇게 하신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무너져 버린다.
하나님께서 삼손의 자유의지를 마른나무를 꺾듯이 꺾어버리고 하나님 당신의 뜻대로 삼손에게 하셨다면 하나님께서는 삼손이 잘못을 해도 심판을 하면 안 된다. 왜냐? 삼손은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께서 강제로 삼손을 통해 하신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공의는 공의대로 나타나고, 심판은 심판대로 나타나게 된다. 공의가 없으면 심판도 없는 거다. 그래서 삼손의 경우에도 삼손은 삼손대로 자기가 하고자 하는 대로 하는 거고, 하나님께서는 삼손의 그것을 꺾지 않고 당신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하시는 거다. 그래서 우리는 매사에 하나님을 위해 뭘 한다고 할 때 과연 이것이 나의 뜻을 위해 하는 건지, 아니면 내 뜻을 따라 하는 거지만 이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지를 잘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삼손처럼 비참한 죽음을 당하지 않는다.
신의 감동이란 내 속에 하나님이 들어와도 신의 감동이요, 내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도 신의 감동이다. 예수를 믿어야 되겠다는 소원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도 신의 감동이요, 그 다음에 자기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는 싶은데 앞으로 가고자 하는 힘이 없을 때 밀고 나갈 수 있게 하는 것도 신의 감동이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예수 믿는 효력을 봐야 한다. 예수를 믿는데도 구원을 이뤄가지 못한다면 주님께서 기본구원을 준 효력을 못 보는 거다. 기본구원은 얻었지만 믿음의 집을 찬란하게 지어나가지 못하는 게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면서 애굽으로 내려간 것과 같은 거다. 우리도 이런 신앙이 많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그런 사람을 보면서 ‘그 분들의 신앙이 이랬네. 저랬네’ 라고 말을 할 수 없는 거다. 주위에 믿음으로 살지 않는 사람을 볼 때 비난하고 정죄하기보다는 불쌍하게 보고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해야 한다. 안 그러면 바리새인의 기도가 돼버린다.
본문.
2장.
3절: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 말씀은 성도를 염두에 둔 말씀이다. ‘언제가 안식일이냐?’ 하는 걸로 입씨름을 하는 일이 있는데, 주일을 지키던 안식일을 지키던 날짜가 중요한 게 아니라 주님을 만나야 그 날이 안식일이다. 주님이 주일날 부활하셨기 때문에 주일이 안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주일날 예배를 통해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한다.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을 알수록, 교훈을 받을수록 사람이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세상과 구별이 되어야 한다. 믿는 사람이 장소적으로 구별된 생활을 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소원 목적이 땅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 영원한 것을 가져야 만이 온전한 구별이 되는 거다.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안식’이란 일을 안 하고 잠을 자는 거냐? 사람은 마음이 기뻐야 안식이 된다. 염려 걱정 근심이 있으면 잠을 못 잔다. 마음이 편해야 잠을 잘 잘 수 있다. 이건 하나의 비유적 표현이고, 성경에서의 안식이란 기쁘고 즐거운 것을 말한다. 우리 성도들의 안식은 주님과 함께 기뻐하는 것. 이게 하늘의 평안이고, 하늘의 기쁨이고, 하늘의 행복이다.
믿는 우리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우리 주님이 밤잠도 주무시지 않고 우리를 위해 항상 기도를 하신다. 이 일이 언제 마치느냐? 우리가 다 천국에 올라가면 마친다. 이때 우리에게 있어서 참 안식이 된다. 그러니까 주님이 세상을 다 만드신 후에 안식하셨다고 하는 것은 천국에서의 우리의 안식을 염두에 둔 말씀이다. 성경 66권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천국이 없는, 천국을 생각지 않는 말씀은 한 마디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고 깨달을 때는 문자 속에 들어있는 천국의 성질, 구원의 성질을 깨달아야 한다.
4절: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길을 가다가 만난 사람에게 내가 어떤 것에 대해 말을 해 줄 때 상대도 목적이 같은 사람이라면 목적을 말하면 금방 알아듣고 서로 뜻이 통한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목적에 대해 설명하려면 중간 중간의 것부터 다 말을 해야 상대가 목적에 대해 알 수 있는데, 그러나 이렇게 하다보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정작 중요한 목적은 말해주기도 전에 서로 헤어질 수 있다. 이럴 때는 목적을 말하기 위해 중간을 축소시켜서 말을 할 수밖에 없다. 4절의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라고 하는 것도 이런 경우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에게 가르쳐 줄 것이 급했던 모양이다.
5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사람이 없어서 경작할 사람도 없는데 비를 내려주겠느냐?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이 5절을 1장과 대비해서 보면 뭔가 안 맞는다.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고 한 다음에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면 뭔가 소설처럼 줄거리가 엮어지겠는데 지금 그렇지를 않다.
6절: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비는 아니지만 안개가 촉촉하게 올라와서 지면을 적셨다. 어딘지 모르게 땅이 기름진 느낌이 든다. 그런데 이때는 아직 나무가 없었다. 왜 나무를 안 만들었을까?
7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안개를 촉촉히 받은 기름진 땅으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하니까 어떻게 보면 사람을 만들기에 땅이 아주 적당하게 잘 뭉쳐졌을 것 같다.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사람은 영육 결합체다.
8절: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에덴동산이 아주 잘 꾸며놓은 부잣집 정원 같다. 이곳에 사람을 두었다.
9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아무 곳에서나 잘 보이게 동산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서 있었다.
10절: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원줄기의 강이 동산을 적시며 흐르면서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다. 네 강이 마치 나무둥치에서 가지로 뻗어나가는 것과 같다. 에덴동산을 적시고 나온 강물이 네 개로 갈라졌다.
11절-14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네 강 모두 에덴의 복을 이어받은 복된 강들이다.
15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아담이 이걸 다 관리하며 지키려면 힘이 안 들었을까?
16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에덴동산 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서 있고, 동산 사방의 가장자리로는 각종 나무가 있다.
17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을 선악과 앞으로 데리고 가서 선악과나무를 직접 보고 알게 한 것인지, 아니면 직접 보여주지 않고 선악과나무의 색깔을 말해줘서 알게 한 것인지, 아니면 ‘생명나무는 크고 선악과나무는 작다’고 하며 알려준 것인지? 어쨌든 무슨 방법으로건 분명히 알도록 했을 거다.
18절: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아담만 만들었을 때 아담에게만 생명과와 선악과나무에 대해 말을 해 줬지 이 후에 지음 받은 하와는 생명과와 선악과에 대해 모른다. 따라서 아담은 하와에게 생명과와 선악과에 대해 어떤 것은 먹고 어떤 것은 먹지 말라고 분명히 가르쳐 줘야 했고, 이게 하나님 앞에서 옳은 거고, 이게 공의고, 선이고, 이렇게 해야 행복이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만드신 후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라고 하셨는데, 선악과가 아닌 생명과를 먹어야 이게 되어 나오는 거다. 그리고 돕는 배필로 지음 받은 하와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으려고 하면 절대로 따먹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그래서 돕는 배필이 있는 게 참 좋은 거다.
19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각종 짐승과 새들의 모양에 알맞게 이름을 짓는 것도 대단한 거지만 그 많은 이름을 다 짓고 난 후에 다시 그것들을 볼 때 자기가 지은 이름을 그대로 기억하는 것은 더 대단한 거다. 이게 인간이 죄를 짓기 전의 상태다.
아담이 며칠 동안인지는 모르겠지만 각종 짐승과 새의 이름을 다 지은 후에 느림보 거북이나 나무늘보가 나타나서 자기들 이름도 지어달라고 했다면 아담이 얼마나 피곤할까? 그리고 아담은 아침에 일어나서 낮에 활동을 하고, 동물이나 새는 밤에 활동을 하는 게 많은데, 밤에 활동을 하는 것들의 이름을 아담이 언제 어떻게 지었을까?
20절-21절: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아담의 갈빗대 하나로 하와를 지었다면 아담은 하와에 비해 갈비뼈의 갯수 하나가 작을까? 그리고 갈비뼈 하나를 떼어낸 그곳이 살로 채워졌을까?
그리고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해서 그의 갈비뼈 하나를 취해서 여자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게 무슨 뜻일까? 아담이 잠이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자기의 갈비뼈 하나를 떼어낸 것을 아담이 알까? 깊이 잠이 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르는 사람도 있듯이 이런 식으로 된 건가? 하나님께서 여자를 아담의 갈비뼈로 지었다고 하니까 ‘그런가보다’ 하겠는데,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떼어낼 때 사람의 생각으로는 굉장히 아플 텐데 어떻게 깊이 잠든 상태로 있었을까? 마취를 하고 떼어낸 건가?
아담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잠을 잘 때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비뼈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것인데, 이걸 문자적으로만 보면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이걸 글자 그대로 보면 하와가 어디서 낫느냐? 사람이니까 사람에게서 나오지. 그런데 직접적으로 말은 안 했지만 가만히 보면 이 일 밑에 예수님을 깔고 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죄를 짓고 죽고,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을 인해서 많은 사람이 살았다. 아담은 인간의 대표자요,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대표자다. 이런 게 깔려있다. 이렇게 해서 아담으로 인해 모든 인류가 낫듯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진리로 나으셨다.
22절-23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최고의 아름다운 여자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낫으니 교회는 여자라. 여기에 이런 이치가 들어있는 거다.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여자는 보배로운 그릇인데 이것을 모르니 사랑스런 자기 아내를 놔두고 죄를 짓고 다니는 거다.
이게 다 비유적 표현인데 이것을 예수님을 생각을 안 하고 글자만 읽어서는 그 뜻을 모른다. 예수님을 놓고 보면 ‘이 비유적 표현 속에 예수님이 들어있구나’ 하고 느낌적 깨달음의 감화로 알게 된다.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예수님이 내 속에, 내가 예수님 마음 속에. 결혼한 자식 부부를 부모가 붙잡고 있으면 자식이 발전이 없다. 펴지지를 못한다. 부모는 부모대로 살면서 깨달을 게 따로 있고, 자녀부부는 그들대로 살면서 깨달을 게 따로 있는 거다. 시집장가 간 자녀들을 품고 있지 말아라. 못 쓴다. 잘못될 수도 있다.
25절: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사람이 아무리 옷을 잘 입었어도 죄를 지으면 부끄럽다. 죄를 지으면 아무리 감싸도 부끄럽다. 반대로 죄가 없으면 실오라기 하나 안 걸쳐도 부끄럽지 않다. 부끄럽다고 하는 것은 양심의 작용이다. 양심이 부끄러우면 감추려고 하게 되고, 경계선이 생기고, 자유롭지 못한 일들이 막 벌어진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