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賀天安節表] 表箋(주, 동문선 제31권, 대제학 서거정과 노사신·강희맹·양성지 등 찬집관 23인이 참여하여 발행한 문집)
<원문>
鳳簫鸞笙。協寒若之休徵。龍渥彪祥。屬誕彌之慶節。愷懌之甚。遐邇不殊。中賀。伏惟皇帝。端穆凝尊。溫文啓哲。垂衣裳而理天下。大致混同。象日月以授人時。永無差忒。逮復舜生之旦。盛陳塗會之儀。川岳効珍。蠻夷納欵。臣逖居桑野。叨襲茅封。周室侯班。展覲未肩於八百。羲皇曆數。馳誠但祝於萬年。
<해설>
봉소(鳳簫,관악기의 일종)가 음률을 조절하니 추위가 순조로움이[寒若] 아름다운 징조에 맞고, 용악(龍渥,聖恩)의 상서를 빛내는 성체(聖體)를 탄생한 경절을 맞이함에 즐겁고 기쁨이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나 다름이 없나이다.
엎드려 생각건대, 황제께서 단정 목목(穆穆)하게 존엄하고 온화하며 문아(文雅)하고 밝으셔, 의상을 드리운 채 천하를 다스려 크게 통일을 이루고, 일월을 관상(觀象)하여 역서(曆書)를 반포하니 어긋남이 없나이다.
이제 순(舜)임금이 탄생하신 날에 즈음하여 도산(塗山)의 모임이나 우(禹)가 만국의 제후를 도산에서 모이게 해서 같은 성전(盛典)을 거행하오니, 산천이 진기(珍奇)한 것을 바치고 만이(蠻夷)가 정성을 바치나이다.
신이 멀리 상야(桑野, 전설상 해뜨는 곳에 있다는 신성한 나무)에 살며 외람되게 모봉(茅封,제후봉할 시 주는 흙)을 세습하므로 주실(周室) 제후들의 입근(入覲)하는 반열에 어깨를 나란히 못하나, 희황(羲皇) 역수(曆數)에 만년수(萬年壽)를 봉축(奉祝)하여 정성을 전하나이다.
이상은 모두 115자에 불과한 문장이다. 이 글자로 황제의 비위를 맞춰 조공국의 예의를 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의 글솜씨는 이 짧은 문장을 통해서 이른바 천자의 마음을 사기에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필자주>
□ 圓鑑國師(元凱) 遺稿
원감국사는 장흥이 낳은 고려시대 명승이다. 그는 장흥군 장흥읍 동동리 지금 법원과 검찰청 자리에 있던 집에서 1226년 11월 17일 아버지 첨의정승(僉議政丞․ 족보에는 戶部員外郞) 諱 위소(魏紹) 어머니 원방대부인(原邦大夫人) 송씨(宋氏)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기록돼 있다. 속명(俗名)은 원개(元凱)이며 법휘(法諱)는 충지(冲止), 자호는 복암(宓庵), 시호(諡號)는 원감국사, 송광사에 세워진 탑호(塔號)는 보명(寶明)이다.
17세 때 사원시(司院試), 19세 때 춘위(春闈)에 장원, 영가서기(永嘉書記)로 관직에 봉직하면서 일본에 봉사(奉使)의 직함으로 다녀왔다. 관직 생활 10년 만에 출가해서 강화도 선원사(禪源社) 법주(法主) 원오국사(圓悟國師)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1266년 경남 김해 감로사(甘露社) 지주, 1269년 삼중대사에 오르고 1272년 정혜사(定慧社)로 옮겼다. 1275년 원도(元都)에 가서 세조(世祖)를 만나고, 원오국사를 이어 1286년(忠烈王 12년) 송광사 6세주가 된 후 7년만인 1293년에 1월 10일 입적했다.
현존하는 어론(語錄)은 동문선(東文選) 권84에 서(序)만 있다. 따라서 국사의 가송(歌頌)과 잡저(雜著)만 남아 있는 셈이다. 가송은 정통(正統) 12년(1447년 丁卯) 나주목(羅州牧)에서 간행한 중간본과 필사본으로 동국대에 소장돼 있었다. 그 가송은 1680년(延寶 8년)에 복간된 것으로 1916년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사료(史料)를 수집하러 일본에 갔다가 지인인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峯)에게 책을 빌려와 매일신보에 게재했다. 소호는 한․일 합방 이후 조선의 진귀한 고문서를 전문적으로 챙겨간 인물이다.
2년 뒤인 1918년에 송광사의 김해은(金海隱) 승려가 육당에게 책을 빌려서 1부를 등사하는 한편 1920년 주지 설월선사(雪月禪師)가 국사의 유작을 모으는 한편 동문선 등에 수록된 소(疏)․표(表)․시(詩)․문(文) 등의 잡문을 촬록(撮錄)하여 원감록(圓鑑錄)을 간행한 것이다. 이 송광사본(松廣寺本)은 한국불교전서(pp.370~411)에 수록돼 있다. 지금까지 있는 '해동조계복암화상잡저(海東曹溪宓庵和尙雜著)' 1권은 간행년도를 알 수 없는 판본이다. 이 책에는 표(表)와 소(疏)가 52편, 서답(書答)이 12편이 들어있다.
1) 圓鑑國師의 行狀
국사에 관해서는 후손인 위씨의 족보나 기타 기록보다 송광사 등 불교계가 몇 갑절 소상하다. 다음 국사의 행장은 송광사가 2002년 9월 29일 경내 사자루(獅子樓)에서 '원감국사 충지의 생애와 사상' 을 주제로 가을 학술대회를 개최할 때 고경(高鏡)스님(성보박물관장)이 정리한 행장을 간추린다.
1226년(丙戌․高宗 13) 11월 17일 장흥군(遂寧縣) 출생
1234년(甲午․高宗 21) 취학(경서와 사서를 읽고 속문에 출중)
1242년(壬寅․高宗 29) 사마시 합격
1244년(甲辰․高宗 31) 춘위(春闈)에서 장원급제, 영가서기로 출사, 봉사(奉使)로 일본에 다녀오는 등 10년간 봉직.
1254년(甲寅․高宗 41) 출가하여 강화 선원사(禪源寺) 법주 원오국사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승려의 길 봉행.
1266년(丙寅․元宗 7) 원오국사의 교유(敎諭)와 조지(朝旨)를 받아 김해 신어산 (神魚山) 감로사(甘露社) 주지로 부임.
1269년(己巳․元宗 10) 삼중대사(三重大師).
1272년(壬申․元宗 13) 순천(順天) 서면(西面) 定慧社로 이주.
1273년(癸酉․元宗 14) 원제(元帝)에게 청전표(請田表)를 올림
1275년(乙亥․忠烈王 1) 원조(元朝)로부터 징조(徵詔)를 받음.
1276년(丙子․忠烈王 2) 대선사(大禪師) 제가(制可)를 받음.
1277년(丁丑․忠烈王 3) 청주 진각사(眞覺寺)를 순유(巡遊).
1278년(戊寅․忠烈王 4) 수선한 丹本藏經을 수선사로 移運.
1284년(甲申․忠烈王 10)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 선정(禪定).
1286년(丙戌․忠烈王 12) 수선사 제6세가 됨.
1291년(辛卯․忠烈王 17) 고흥 불대사(佛臺寺)로 이주.
1292년(壬辰․忠烈王 18) 수선사(修禪社)에서 미질(微疾)로 앓음.
1293년(癸巳․忠烈王 19) 입적(入寂).
1314년(甲寅․忠肅王 1) 감로암에 입비(立碑).
1701년(辛巳․朝鮮肅宗 27) 파괴된 비를 중건.
2) 出家動機와 僧侶生活
원개는 10년간 부모를 조르고 설득해서 29세 때 허락을 받고 출가했다고 한다. 불교계와 학계에서는 그가 강화도 선원사(禪源社) 법주 대원부(大原浮․圓悟國師)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출가의 동기를 밝힌「甘露入院祝法壽疏」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전략) '마침 우리 송령화상(松嶺和尙)은 화산도장(花山道場)에 계셨는데 평소의 뜻을 펴고자 무릎걸음(膝行)으로 달려가 고하니 지난날의 인연이 맞았는지 턱을 끄덕여 허락 하였습니다' 라며 탈속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松嶺和尙은 누구이며 花山道場은 어디를 일컫는지가 관건이다. 원감집의 역자(譯者)인 진성규(秦星圭)교수는 송령화상을 원오국사로 본다. 그리고 화산도장은 신동국여지승람(新東國與地勝覽)에는 23곳,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20곳이 나온다. 전국적으로 화산이라는 지명이 너무 많아 어딘지 특정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느 곳인지 알 수 없으나 호남지방 사찰일 것으로 여겨 여산(廬山)․옥구(沃溝)․함열(咸悅)․무장(茂長)지역의 어느 사찰로 추정하고 있다. (원감국사집 p.205)
그러나 김영태(金煐泰) 동국대 명예교수는 花山道場을 강화도 선원사(禪源社)로 본다. 즉 '圓悟國師가 花山 곧 禪源社의 法主…' 로 단정한다.(세미나자료p.38) 승려의 첫 관문인 삭발식과 구족계를 받은 곳이 달라지면 국사에 대한 기존의 인식에 혼란이 생긴다. 기왕에 알려진 대로 선원사라면 왜 거주지 주변의 대찰이 있는데 그곳까지 갔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아마 19세 때 과거보러 갔다가 그곳 사찰을 들러보다 원오국사를 만나서 그에게 출가하고 싶다는 말을 했기에 이루어진 인연이 아닌가 싶다.
이를 뒷받침할 대목은 앞의 감로축수소(甘露祝壽疏)에 부모의 허락이다. 그는 강화도로 과거를 보러 갔을 때부터 출가를 하고 싶었으나 부모의 반대로 별로 내키지 않은 공직에 머물러 있었다는 얘기이다. 간신히 허락을 받은 연후에 화산도장의 원오국사 천영(天英)을 찾아간 것이다. 이 말은 원개를 제자로 받아들였다는 말이다. 불가에의 귀의(歸依)는 그렇게 해서 이루어 진 것이다. 따라서 원개는 세속의 인연을 끊고 본격적으로 구도의 여정에 들어가 39년 동안 도를 닦다 1293년 1월 타계하게 된다.
원개는 1254년(고종41) 선원사 법주로부터 수계한 이후 12년 만인 1266년(원종7) 41세 때 경상도 김해현 신어산 감로사(甘露寺) 주지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는 몽고의 7차 침략전쟁이 끝난 후 9년째가 되는 해였다. 전쟁이 끝났다 해서 주권국가가 된 것이 아니라 몽고의 철저한 간접지배를 받았다. 출가해서 줄곧 선원사에서 지냈는지 아니면 다른 사찰에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속세의 떼를 벗기는 듯 법휘(法諱)는 법환(法桓)이었으나 뒤에 충지(冲止)로 개명했으며 호는 복암(宓庵)이다.
그때는 승려의 인사권도 왕에게 있었다. 원개의 감로사 주지 발령도 역시 원종(元宗)의 조지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강화도에 임시수도가 있었고 선원사 또한 섬 안에 함께 있었기에 원개의 인물됨을 알고서 하는 인사로 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원개는 12년 전 춘위예부시(春闈禮部試)에 장원급제한 비상한 인물임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당대 승려사회의 지도자인 천영(天英)의 제자이니 조정과 승려사회에 그에 대한 관심은 예나 지금이나 속세의 풍습처럼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원개는 감로사에 부임했다. 아마 부임하기 전부터 주지되는 사람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을 것이다. 과거에 장원급제했고, 영가서기 때 사신으로 日本을 다녀왔으며, 관료생활을 하다 출가해 승려가 된 사람이라는 얘기들이 부임 전에 파다하게 퍼져있었을 게 분명하다. 그때는 지방관도 부임하면 토박이 선비들과 시를 지으며 상대의 지적(知的) 능력을 시험해 보는 일이 있었고, 그런 풍속은 후대에도 전해졌다. 그가 도착하자 어느 선덕(禪德)이 감로사에 부임한 소회를 물음에 다음과 같이 응수(應酬)했다.
春日花開桂苑中 봄날의 꽃은 계수나무정원에 피었는데
暗香不動小林風 그윽한 향기는 작은 숲 바람에도 움직이지 않네
今朝果熟沾甘露 오늘 아침 익은 과일 감로에 젖었고
無限人天一味同 한없는 인천은 한 가지 맛이구나
(0003일차 연재에서 계속)
첫댓글 대부분의 장흥위씨 종친들은(전부) 위씨가 장흥에서 최초로 자리 잡은 곳은 장원봉 아래 승방동이며 현재는 법원 검찰청 자리다...라고...알고 있습니다...그럼에도 실제 법원 검찰청이 있는 장원봉 아래는 정확하게 '장흥읍 남동리'입니다... '동동리'라고 계속 써야할지 의문입니다... 동동리는 남동리와 붙어있는 옆마을입니다...'장원봉유래비'도 남동리에 있습니다.../
재치
위의 충렬공 위계정님의 '하천안절표전(賀天安節表箋)'의 첫째 문장에 나오는
봉소(鳳簫)는 아악에서 쓰는 관악기의 일종입니다
궁중제례악 같은 곳에서 사용하는 관악기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 무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