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목리 소설가’, ‘분토리 시인’, 그리고 고향의 앵커
- 이청준 문학관을 위하여(15)
1, 벌써 20년이 넘었다. - 2003년 8월3일부터 2박 3일의 일정이었다. ‘유치 보림사’와 ‘관산 평촌 유천재’도 찾아보고, ‘대덕 분토리’, 강진의 ‘대구면 정수사’와 ‘마량항, 회진항’에도 갔다. 이청준 선생님, 김영남 시인, 김선두 화가, 필자 그리고 순천대 강사분이 참여하였다. 여행담은 <옥색바다 이불삼아 진달래꽃 베고 누워, 2004.>에 실려 있다. 선생님은 그 서문에서 “고향 속살 함께 읽기”라고 답사성격을 요약하셨다. 필자는 끝머리에 발문(跋文) <장흥을 아십니까?>를 덧붙였다. 그해 4월의 1차 탐방을 놓치고, 척척한 8월 여름의 2차 답사에 동참했다,
2, 진목리 소설가와 분토리 시인 – 같은 장흥 출신이어도 매사에 같을 수는 없을 터. 예술관과 가치관, 고향사랑의 방법과 정도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을 일. 장흥 소설가들(이청준, 한승원, 송기숙, 이승우’)은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위선환, 김영남, 이대흠’ 등 장흥 시인들도 개성적 성채를 쌓았다. 오늘은 같은 대흥방 출신으로 ‘진목리 소설가’와 ‘분토리 시인’을 대비하여 본다. 서로 20여년 세대 차이가 있다. 하늘에서 한쪽은 ‘종이연‘을 보았고, 한쪽은 ’비행운‘을 보았다. 그들이 같은 천관산 아래편 지역에 태어났다 해도 그 땅과 바다의 의미는 달랐다. 이청준에게 ‘논’ 농사는 없었고, 김영남에겐 ‘갯벌’이 없었다. 동쪽 진목리 출신은 나중에 회진초등학교가 된 ‘대덕동(東)초’를, 서남쪽 분토리 출신은 ‘대덕남(南)초’를 졸업하였다. 두 곳 모두 그 시절 오지라 할 것인데, 진목리는 ‘회진항’에, 분토리는 ‘마량항’에 가까이 있다.
3, 분토리 시인, 김영남의 시 – 혼자 집을 지키시던 시인의 어머니가 반갑게 맞아 주셨다. 바다가 가까운 곳이라지만, 대나무를 양쪽으로 걸칠 만한 좁은 산곡이었다. (가정방문을 온 담임선생도 그랬지만, 찾아오는 외부인이면 늘 ‘간짓대 타령’이었다한다) 시인은 ‘무슨 일이 생겨도 이를 데가 없는, 외진 곳’이라고 말했던가? 해풍도 없었다. 그래서 시인은 바깥세상이 늘 궁금했던 것일까? 진목리 소설가의 시공간이 서울 ‘잔인한 도시’와 남쪽 고향을 잇는 ‘남북 종축’에 집중된 반면에, 막힌 곳 분토리 시인의 오지랖은 사방팔방에 이른다. 훨씬 분방하다. 어느 쪽으로 내몰려도 감내하는, 조랑말의 몸짓이다. 그의 출세 등단작도 고향에서 한참 떨어진 곳을 읊은 <정동진역,1997,세계일보>이었고. 그 후 시집 <모슬포 사랑, 가을 파로호>도 있다. 그래도 시인은 제 고향땅 모습을 꽤 남기고 있다. ‘허름한 하늘의 회진항 / 가을 천관산의 조랑말과 억새꽃 / 증발되고 없는 고향 옛길/ 고향에도 뜨는 무지개/ 분토리 옛 돌담/ 그리운 옛집’ 등이다. 시 ‘보림사 참빗’의 서정은 옛 보림사의 방문객, 호해비가(湖海悲歌)의 시인, ‘옥봉 백광훈(1537~1582)‘의 간결한 오언절구를 연상케 한다. “먼 보림사 범종 소리 속에/ 가지산 계곡 예쁜 솔새가 살고/그 계곡 대숲의 적막함이 있다./ 9월 저녁 햇살도 비스듬하게 세운. // 난 이 범종소리를 만날 때마다/ 이곳에서 참빗을 꺼내/ 엉클어진 내 생각을 빗곤 한다.” 시인은 ’삭발‘ 대신에 ’참빗질‘을 말하였다. 다시 ’분토리‘를 떠나 ’양하‘ 길을 지나, ‘정수사’에 들렸으며, ‘마량항’에서 1박을 하였다. 가는 도중에도 이청준 선생님은 그 외갓집의 참담한 비극에 대하여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다.
4, ‘고향 속살’을 보았던가? - 시인에게 물었다. “분토리에서 바깥 세상으로 오가던 통로는 ‘관산 솔치, 장흥읍’ 쪽의 북행길이 아니라, ‘마량항, 강진만’을 지나는 우회로가 아닌지?”라고 확인해 보았다. 서남쪽 오지의 분토리 시인은 “그래서 ‘푸른 밤 여로’라는 귀향가(歸鄕歌)가 태어났다”고 대답했다. ( 시 ‘강진만’도 있다) 그러나 동쪽 진목리 소설가 처지는 달랐다. ‘천관산’ 어두운 그늘을 잠행하였던 그는 그런 ‘푸른 밤 여로’의 여유와 기백을 갖지 못했다. 그는 달도 별도 무서웠던 유년기의 공포감을 토로했다. 초교를 마치고 고향을 떠나기 전에도 “물속의 달, 뒷산에 우뚝한 밤그림자의 무서움에 떨었다”고 했다, “여름밤의 서늘한 바람기, 하늘에 가득 찬 밤별들 별똥별, 시골 야밤의 광대무변한 정적과 침묵에 섬짓한 공포감을 느꼈다”고 했다. 광명의 달과 익명의 뭇별에도 무서움과 부끄러움을 느끼던 진목리 선배는 그 빛의 세계를 겨우 극복했을 뿐인데도, 분토리 후배는 달랐다. 시인은 6,25 백정시대의 전짓불 체험이 없다. 젊은 청춘의 검정 고무줄 패기로 마주치는 밤길 야행에 온달이든 반달이든, ‘푸른 밤을 푸르게 가야한다’면서 ‘푸른 밤 여로’를 노래하였다. 그 1연과 3연 부분이다. “(1연) 둥글다는 것은 슬픈 거야/ 슬퍼서 둥글어지기도 하지만 저 보름달을 한번 품어보아라/ 품고서 가을 한 가운데에 서 봐라” , “(3연) 구두가 미리 알고 걸음을 멈추는 곳./여긴 푸른 밤의 끝인 마량이야, /이곳에 이르니 그리움이 죽고 달도 반쪽으로 죽는구나, /포구는 역시 슬픈 반달이야. /그러나 정말 둥근 것은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거고 / 내 고향도 바로 여기 부근이야.” 시인이 돌아온 ‘마량’ 포구 가까이에 고향 ‘분토리’는 그 자리에 어김없이 있고, 시인의 소망대로 고향의 큰산 ‘천관산’에서 보르도 산 포도주를 마시며, 은경이랑 함께 조랑말과 억새꽃밭을 탈 수 있을 일이다.
짐작컨대, 분토리 시인은 진목리 소설가의 진화형 변형일 수 있다. 귀향을 노래하는 ‘푸른 밤 여로’의 ‘둥근 가락’ 또는 ‘둥글어질 수밖에 없는 가락’에는 ‘가을 천관산 억새밭으로 조랑말을 몰고 가자’는 패기가 있되, 그 궁극에는 진목리 소설가의 ‘남도소리, 서편제’의 해원(解寃) 목청과 상통한다. 남도의 햇덩이와 달덩이 속살에 든 육자배기 늘어진 가락은 고흥, 보성, 장흥, 강진, 영암, 해남, 진도, 완도에 두루 걸쳐있다. 진목리 소설가의 <눈길, 늪길>은 물론이고, 분토리 시인의 ‘보림사 참빗, 회진항의 하늘, 마량항의 푸른 밤. 천관산의 조랑말 억새꽃’에도 씻김굿 남도소리의 절절함이 배어있다. 마침내 진목리 소설가가 ‘집으로의 긴 여로’를 마치고, 먼 길을 돌아와 매듭을 풀듯 여한(餘恨)을 풀고 그 고단한 육신을 고향땅에 눕혔을 때, 이제 우리는 그 자리터를 ‘고향의 앵커(anchor)’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앵커 잎에서, ‘떠나가던, 새벽 눈길 늪길’과 더불어 ‘돌아오던, 푸른 달밤의 여로’ ‘천관산의 조랑말과 억새꽃길’을 늘 그리워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말> – 1) 진목리 소설가가 말한 ‘백정시대를 겪은 외종형이 천관산으로 데리고 들어간 염소’가 이제 분토리 후배 시인에게는 ‘천관산 억새밭 조랑말’로 진화하였을 수 있다.
2) <푸른 밤의 여로>는 ‘김선두’ 화가의 그림으로 다시 태어났는데, 아마 화가 일생에 청색 물감을 가장 많이 사용했을지도 모르겠다.
3) 서울의 재경장흥초교61회 동창회는 ‘김영남’ 시인을 초청하여 그 시집 독회를 한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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