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사공이 적소에서 돌아가시다白沙卒於謫所
백사공(白沙公)과 기상(奇相)이 동시에 처벌을 받았는데, 기상은 문을 닫은 채 아무도 만나지 않으니 친척이라 할지라도 만나볼 수 없었다. 그런데 백사 상공은 손님과 마주 앉아 즐겁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았으니, 백사공을 찾아와 문안하려는 벗들이 마을의 길을 가득 메울 정도였지만 공은 귀찮아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 점에 대해 이야기하면 공은 곧 말하기를 “사람들이 모두 만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멀리서 찾아왔는데 어찌 차마 만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나도 역시 그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 어찌 내 마음을 억누를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만나서는 농담을 주고받은 뒤 헤어졌고 미련이 남은 듯한 한마디 말도 없었으니, 두 공의 기상(氣像)이 이처럼 서로 달랐다.
백사 상공은 처음에 흥해(興海)로 유배 가게 되었는데 대간(臺諫)들이 유배지가 가깝다고 하여 다시 용강(龍岡)으로 유배 가게 되었다. 대간들이 다시 가까운 곳이라고 하며 금오 당상(金吾堂上)을 논핵하여 삭직시키기에 이르자 경원(慶源)으로 이배(移配)되었다. 또다시 오랑캐와 가까운 곳이므로 오랑캐와 내통할 우려가 있다고 하며 남쪽에 있는 도(道)로 이배를 요청하여, 마침내 삼수(三水)로 유배 가게 되었다. 그런데 상이 특명을 내려 북청(北靑)으로 유배하도록 하였으니, 허균이 기필코 공을 사지(死地)로 보내려 했기 때문이다.
1월 9일에 청파촌(靑坡村)을 출발하였다. 오봉(五峯) 이효언(李孝彦 이호민(李好閔))이 산단(山壇)의 길가에서 공과 이별하며 지은 시에 “산단에서 술잔 잡고 강리로 제사 지내네.〔山壇把酒祭江蘺〕”라는 구절이 있고, 백사 상공이 화답한 시에 “다만 정영위가 가서 돌아오지 않을까 염려된다네.〔只恐令威去不歸〕”라는 구절이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을 전송하면서 어찌 “제사 지내네.〔祭〕”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떠나는 사람 또한 “돌아오지 않는다.〔不歸〕”라고 하였으니, 아마도 이것이 모두 시참(詩讖)이 된 것이리라.
유배 가는 도중에 세 통의 편지를 보내 주었는데 그 말과 뜻이 모두 편안하고 활달하였으며 “몸이 건강하여 식욕이 당긴다.”라는 과장까지 있었다. 배소(配所)에 도착한 뒤에 또 세 통의 편지를 보내 주었는데, ‘괴롭다〔苦〕’라는 말이 많았고 “그저 선영(先塋)으로 돌아가 죽고 싶을 뿐이다.〔只願歸死松楸〕”라는 말이 있었다. 유배된 석 달 동안 시냇가에 오래 앉아 있다가 다시 풍기(風氣 중풍(中風))에 걸렸고, 즉시 조금 차도가 있기는 했지만 이 병에 자못 마음이 흔들려 걱정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부쳐 온 시에 이르기를,
한밤중에 잠 못 들고 돌아갈 길 헤아리는데 中宵不寐算歸程
이지러진 달빛 사람 엿보며 문에 들어 밝구나 缺月窺人入戶明
갑자기 외기러기 하늘가를 지나가니 忽有孤鴻天際去
이곳에 올 때 분명히 한양성 지나 왔겠지 來時應自漢陽城
하였으니, 시의 뜻이 이처럼 처량하였다. 그리고 한 달도 못 되어 적소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안 것이 아니겠는가.
白沙卒於謫所
白沙公與奇相。一時被罪。奇相則杜門謝絶。雖親戚亦不得見。沙相則對客歡謔。無異平時。知舊之往問者。塡塞村巷。而不以爲煩。人或有言則曰。人旣以情遠來。何忍不見。我亦有欲見之情。何必抑情乎。旣見。便調諧以別。無一語留戀之態。二公氣像之不同如此。沙相始配興海。臺諫以爲近。又配龍岡。又以爲近。論金吾堂上。至於削職。移配慶源。又以爲近胡。懼與胡通。請移南道。乃配三水。自上特命配北靑。蓋許筠必欲置死地也。正月初九日。發自靑坡村。五峯李孝彥。別於山壇之路左。有山壇把酒祭江蘺之句。沙相和詩。有只恐令威去不歸之句。送生何以云祭。行者乃云不歸。豈皆詩讖耶。途中三見寄書。語旨皆坦豁。至有身健食進之誇。及到配所。又三寄。多有苦語。有曰只願歸死松楸。蓋於三月間。因久坐溪邊。再中風氣。雖卽差減。而以此頗動心慮故然也。寄詩曰。中宵不寐算歸程。缺月窺人入戶明。忽有孤鴻天際去。來時應自漢陽城。其辭意悽惋如此。未一月而卒於謫所。豈自前知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