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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갈명 병서墓碣銘 幷序
우리나라 도학(道學)의 전함은 도산(陶山)에게서 집대성되었는데, 도산의 문하에 서애(西厓) 유 문충공(柳文忠公 유성룡(柳成龍))이 있고, 서애의 문하에 우복(愚伏) 정 문장공(鄭文莊公 정경세(鄭經世))이 있으니, 이것이 도산 문하의 적전(嫡傳)이다. 문장공의 후손은 대대로 이름난 사람이 있으니, 그 아들 정심(鄭杺)은 한림(翰林)을 지냈고, 손자 정도응(鄭道應)은 자의(諮議)를 지냈고, 증손 정석교(鄭錫僑)는 현감(縣監)을 지냈고, 현손(玄孫) 정주원(鄭胄源)은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는데, 모두 문학(文學)과 행의(行誼)로 조정에 천거되어 발탁되었다. 이 때문에 영남의 사대부 가학(家學)의 바름은 먼저 진양 정씨(晉陽鄭氏)를 일컫는다. 입재(立齋) 선생에 이르러서 도(道)가 더욱 높고 학문이 더욱 깊어져서 성대하게 일대(一代)의 종사(宗師)가 되었다.
선생은 휘 종로(宗魯), 자 사앙(士仰)으로 곧 참봉공 주원(胄源)의 손자이다. 고(考)는 휘가 인모(仁模)이다. 비(妣)는 부림 홍씨(缶林洪氏)이니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의 후손으로, 원릉(元陵) 무오년(영조14, 1738)에 선생을 낳았다. 해산할 때 어머니가 문장공이 성대한 위의(威儀)로 문에 왕림한 꿈을 꾸고 나서, 깨어나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생후 5세에 증씨사(曾氏史 《십팔사략十八史略》)를 읽어 날마다 5, 6판을 외웠다. 6세에 소미사(少微史) 양절론(陽節論)1)을 수업함에 세 번 눈으로 보고는 외워 버렸다. 겨우 성동(成童 15세)의 나이에 학문에 뜻을 두고서 과거 시험에 관한 공부를 버리고 달가워하지 않았다. 손수 《소학(小學)》을 베껴 소매에 넣고 다니며 보았다. 간혹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국어(國語)》와 반고(班固), 사마천(司馬遷)과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 등 여러 글을 두루 보았으니 읽기를 거의 모두 천 편(遍)이나 하였고, 문장을 지음에는 간결하고 심오하여 법도가 있었다. 홀연히 탄식하며 말하기를, “문장을 짓는 것은 작은 기예일 뿐이니, 도(道)에서 멀다.” 하고는 마침내 입재(立齋)로 자호(自號)하고 거경궁리(居敬竆理)의 학문에 오로지 마음을 썼다. 한결같이 회암(晦庵 주희(朱熹))과 퇴도(退陶 퇴계(退溪) 이황(李滉))를 모범으로 삼았고, 사서(四書)와 정자(程子)ㆍ주자(朱子), 《근사록(近思錄)》, 《심경(心經)》 등의 글을 가져다가 깊이 잠기고 푹 빠져 연구해서 날로 쌓고 달로 쌓음이 대개 또한 여러 해였다.
일찍이 위연(喟然)히 탄식하며 말하기를, “학문이 비록 스스로 터득함을 귀하게 여긴다고 하지마는 ‘스승을 따르고 벗에게서 취한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라고 하였다. 당시에 대산(大山) 이 선생(李先生 이상정(李象靖)), 백불암(百弗庵) 최공(崔公 최흥원(崔興遠)), 남야(南野) 박공(朴公 박손경(朴孫慶))이 모두 도의(道義)와 문학(文學)으로써 영중 삼로(嶺中三老)라고 일컬어졌다. 선생은 이분들을 모두 따르며 도(道)를 물었으며, 그중에 이 선생에게 터득한 것이 더욱 많았다. 물러나서는 김천사(金川沙)2)ㆍ김구재(金苟齋)3) 형제, 심기당(審幾堂) 황공(黃公)4), 손재(損齋) 남공(南公)5) 및 조만곡(趙晩谷)6), 최칠실(崔㯃室)7) 등 여러 현인과 서로 벗 삼아 잘 지내면서 강론ㆍ토론하여 더욱 도움을 받았다. 학업이 날로 넓어지고 덕이 날로 높아짐에 산림(山林)에서 고요히 수양하며 마치 장차 종신토록 하려 하였다. 세상이 바야흐로 질박함을 버리고 화려한 데로 나아가서 날로 들떠 경박한 데로 달려가 무릇 도학(道學)하는 선비들에게 드러내 놓고 조소와 비방을 더함에 거의 완전한 사람이 없는 지경이 되었지만, 선생에 이르러서는 원근의 인사(人士)들이 알든 알지 못하든 간에 모두 선생으로 일컫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정묘(正廟) 기유년(1789, 정조13)에 천거되어 광릉 참봉(光陵參奉 세조(世祖)와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능 참봉)에 제수되었는데, 선생은 이것이 선조의 음덕(蔭德)이라 여기고, 이에 나아가 사은숙배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서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초수(超授 등급을 뛰어넘어 제수)되었는데, 임금께서 인대(引對)하여 문벌 가문의 선대 의열(義烈)을 하문하심에 그 언어가 매우 온화하셨다. 선생은 임금의 특별한 은전을 감당하지 못하여 마침내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병진년(1796, 정조20)에 주상께서 전교하시기를, “문장공(文莊公)이 경연(經筵)에 출입하여 계옥(啓沃)8)을 자임(自任)하고 문형(文衡)을 맡아 관리 임용을 주관하였으며, 학식(學識)과 사업(事業)이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귀와 눈에 가득하다. 그 집안에 자신의 몸을 단속하는 선비가 있으니 어찌 기특하고 귀하지 않겠는가.”라고 하고, 이에 선생에게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를 제수하였다. 얼마 있다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하고 서둘러 올라오라고 특별히 유지를 내렸다. 선생은 상소(上疏)하여 어버이는 늙고 자신은 병들었다는 이유로 사직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정사년(1797) 여름에 임금이 특명을 내려 외직으로 나가 강령 현감(康翎縣監)에 보임하라 하였다. 당시 계비(繼妣)의 연세가 높아 선생이 옛 법전에 의거하여 해당 부서에 정고(呈告)하였다. 그러자 대신(大臣)이 연석(筵席)에서 아룀으로 인하여 함창 현감(咸昌縣監)으로 바꾸어 제수하여 편히 어머니를 봉양하도록 해 주었다. 선생은 대부인을 받들어 축수를 올리고, 고을의 노인들을 모아 술자리를 마련하고 경사 잔치를 열었다. 또 임호서원(臨湖書院)에서 향음주례(鄕飮酒禮)를 베풀었다.
당시에 영외(嶺外) 지역에 가뭄이 들었는데, 선생이 몸소 재해로 손상된 상태를 살펴 감영(監營)에 보고하였다. 관찰사가 다른 군에 비해 표(俵 구호 물품을 나누어 줌)해 줌이 비록 넉넉하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기준에 못 미치자 선생이 말하기를, “나는 사실대로 보고를 하였는데 감영에서 그 수를 줄이니, 이는 나의 정성과 신의가 미덥지 못해서이다.” 하고는 거취(去就)의 의리를 진술하자, 곧 보고에 준하여 시행해 주었다. 적곡(糴糓)에 있어 백성에게는 정밀하게 하고 아전들에게는 적게 매기는 것을 보고는 각각 저축하여 각각 조곡(糶穀)해서 서로 섞이지 않도록 하였다. 군곡(軍穀)을 점검하여 각각 1일분을 제공하고, 특별히 소를 잡아 병사들에게 먹이도록 하였다. 백성들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살아 있는 부처가 왔다.”라고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두창(痘瘡)을 꺼리어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대개 관직에 오래 있는 것이 본래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경신년(1800)에 정조께서 승하하셨다. 금상 무진년(1808, 순조8)에 이르러 장령(掌令)으로 승진하였는데 곧바로 체직되었다. 당시에 선생은 이미 일흔이 넘은 나이였다. 명망과 실상이 점점 높아지자, 옷자락을 거머쥐고 배우기를 청하러 오는 자가 날로 문에 이었고, 문자(文字)를 구하러 오는 자가 사방에서 이르러 문에 항상 신발이 가득하였다. 가르치고 훈도함에 게으르지 않았고 응대함에 막힘이 없었다. 임하(林下) 이경유(李敬儒)9)가 당시 도남서원(道南書院) 10) 동주(洞主)를 맡고 있었는데, 병자년(1816) 봄에 유사(儒士)들을 크게 모아 선생에게 강수(講授)를 청하였다. 낙동강의 남북에서 모인 사람이 수백 명으로, 일관당(一貫堂)에서 인사를 드리고 모시고서 《중용장구》를 가지고 번갈아 묻고 논란하였는데, 선생은 분석하고 변론하여 가르침에 읊고 낭독하는 소리가 청량(淸亮)하였고, 하루 종일 권태로운 기색이 없었으니, 수업을 들은 자들은 물러날 적에 충만하게 각각 얻은 것이 있었고, 둘러서 보던 자들은 마치 신선(神仙)인 양 우러렀다.
이해 5월 밤에 홀연 미미하게 앓았는데, 마침 선공(先公)의 기일(忌日)을 만났다. 자제들이 제사에 참석하지 말고 더 조섭하고 보위하기를 청하자, 선생이 “내년 일을 알 수가 없다.”라고 말하고, 마침내 몸소 관헌(灌獻)11)을 행하였으니 좌우의 사람들을 감동시킬 만큼 애통해하였다. 이때부터 점점 위독해졌다. 돌아가시기12) 이틀 전에 장손(長孫)에게 유문(遺文)을 수습하라고 명하고, 안석에 기대어 눈을 감으며 작은 소리로 “어머님 얼굴을 알지 못함이 지극히 애통하다.”라고 말하였다. 다음 날 문인(門人)에게 말하기를, “강절(康節)이 ‘정숙은 생강이 나무 위에서 산다고 하지만, 필시 생강은 나무 위에 두면 죽을 것이다.[正叔生薑樹頭生, 必從生薑樹頭死.]’라고 하였으니13), 이 뜻을 그대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손을 들어 펼치며 말하기를, “강절이 이와 같이 이천(伊川)에게 보였으니, 그 뜻은 대개 ‘면전(面前)의 길이 모름지기 활짝 열리게 해야 한다14).’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해학(諧謔)함은15)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갑인일에 정신과 기운이 좀 안정되자, 시자(侍者)를 향해 각각 힘쓰고 경계하는 뜻을 알려 주고 이윽고 편안한 듯이 세상을 떠났으니, 이해 6월 6일이고, 향년 79세였다. 이해 가을에 사림(士林)이 예(禮)를 갖추어 함창현(咸昌縣) 황령산(黃嶺山) 신좌(辛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선생은 타고난 자품이 이미 남다른 데다가 내면을 기름에 도(道)가 있었다. 평생 인간 세상의 명예와 이익을 마다하였고 사물(事物)에 마음이 얽매이지 않았다. 가학(家學)의 가르침을 잘 전수받았고, 성현(聖賢)의 글에 침잠해 연구하였다. 그 순정하고 도타움은 윤화정(尹和靖)16)과 비슷하였고, 맑고 통달함은 이연평(李延平)17)과 비슷하였다. 정(定)하기를 중정(中正)ㆍ인의(仁義)로써 하되 정(靜)을 주로 함은18) 선생이 그 성(性)으로 삼은 것이고, 전현의 말과 행실을 많이 알아서 그 덕을 축적함은 선생이 그 도타이 행한 것이며, 그 지극함을 요체로 말함은 선생이 학문을 대하는 태도이니, 진실로 이른바 ‘안정되면서도 이루었다.19)’라는 것이다.
부인 이씨(李氏)는 무산군(茂山君) 이종(李悰)의 후손 학생(學生) 이민현(李民顯)의 따님으로, 3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상진(象晉), 후사로 나간 상승(象升), 역시 후사로 나간 상관(象觀)이고, 딸은 최식(崔湜), 황석로(黃錫老)에게 시집갔다. 상진은 4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민수(民秀), 민충(民衷), 후사로 나간 민병(民秉), 민채(民采)이고, 딸은 강주영(姜胄永), 김재흠(金在欽), 유기목(柳祈睦)에게 시집갔다. 상승은 3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민목(民穆), 민직(民稷), 민직(民稙)이고, 딸은 신학휴(申鶴休), 이돈구(李敦九)에게 시집갔고 하나는 어리다. 상관은 민병(民秉)을 사자(嗣子)로 삼았고, 딸은 김중수(金重銖), 김약수(金若洙)에게 각각 시집갔다.
예전 정사년(1797, 정조21)에 내가 비로소 함녕(咸寧)의 관아에서 선생을 뵈었다. 이듬해 여름과 겨울에 거듭 대산루(對山樓)에서 뵈었는데, 매양 바라보면 옥 같은 모습, 별 같은 눈동자에 풍채는 밝고 빛나며 가르치는 말씀은 알뜰하고 정성스러워 표리가 환히 통하였으니, 빙호추월(冰壺秋月)20)이 참으로 선생을 두고 말한 것이리라. 지금 이미 30년 남짓 지났지만 그사이에 다시 남쪽으로 가지 못하였고, 세속 일에 몸이 얽매여 학문이 더 진보할 길이 없었는데, 스승의 자리가 갑자기 텅 비고 내 나이도 예순에 이르렀으니 마치 남처럼 되었는지라, 매양 생각하고 참회(懺悔)하면서 마음속으로 매우 슬퍼하노라.
하루는 선생의 장자(長子) 상진이 선릉(宣陵 성종의 능) 참봉 임명에 대해 사은숙배하고 곧 돌아가는 길에 종남(終南)에 우거하는 나를 방문하여 묘갈문(墓碣文)을 부탁하였다. 얼마 뒤에 그 종자(從子)가 행장(行狀), 연보(年譜), 유사(遺事)를 받들고 와서 나에게 보여 주었다. 예의로는 비록 감당하지 못하겠지마는 정(情)으로는 또한 감히 사양하지 못하겠기에, 마침내 받아 읽어 보고 짓기를 마쳤다. 황홀하게 마치 스승의 곁에서 다시 화기롭게 모시는 것 같은지라, 남쪽을 바라보며 흐르는 눈물을 금하지 못하겠다. 오호라, 차마 명을 짓겠는가. 명은 다음과 같다.
도가 사람에게 있어서 道之在人
물이 이에 모이는 듯하나니 如水斯鍾
문장공의 집안에 文莊之宅
빼어난 유종이 있도다 有挺儒宗
겸손한 군자21)는 謙謙君子
아름다운 공열을 이었으니 襲于休烈
금구22)와 옥 비파가 金甌玉瑟
파괴되지도 깨지지도 않았네 無壞無缺
그 높이 나는 단봉23)이 丹鳳其翔
나가 의식에 맞춰 춤추고24) 出而儀之
떨쳐 날아오르는 황곡25)이 黃鵠其擧
나래 고이 거두어 품었네 卷而懷之
훌쩍 속세 티끌을 떠났으니 翛然離垢
누가 그에게 칼날을 갈랴26) 孰刃靡之
깊숙이 그 고요히 지내니 淵然其靜
해치거나 건드리지 않았네 不汩磯之
대인의 덕을 이루어 成大人德
적자의 마음을 보존했으니27) 保赤子心
행실은 가방에 가득하고 行滿家邦
식견은 고금을 꿰뚫었네 識貫古今
편안히 살다가 순리를 따랐으니28) 安時處順
오고 감에 알맞았네 來去其適
황령산에 세운 비석은 黃嶺片石
백세토록 법식이 되리라 百世攸式
문인(門人) 팔계(八溪) 정원선(鄭元善)29)이 찬술하다.
墓碣銘[鄭元善] 幷序
東方道學之傳。集成於陶山。陶山之門。有西厓柳文忠公。西厓之門。有愚伏鄭文莊公。寔陶門嫡傳。文莊公之後。世有聞人。子杺翰林。孫道應諮議。曾孫錫僑縣監。玄孫胄源除參奉不仕。俱以文學行誼。爲朝家所擧擢。以是山南士大夫家學之正。首稱晉陽之鄭。至立齋先生。道益尊學益邃。蔚然爲一代宗師。先生諱宗魯字士仰。卽參奉公孫。考諱仁模。妣缶林洪氏。木齋汝河后。以元陵戊午生先生。臨娩母夢文莊公盛威儀臨門。覺而生。生五歲讀曾氏史。日誦五六板。六歲授少微史陽節論。三過眼成誦。甫成童志于學。棄擧業不屑也。手寫小學。袖而覽焉。間或汎濫於左國班馬韓柳諸書。讀幾皆千遍。爲文章簡奧有軌則。忽歎曰文章小技耳。去道也遠。遂以立齋自號。專用心於居敬竆理之學。一以晦庵退陶爲模楷。取四子程朱近思錄心經等書。涵淹浸漬。日積月累。盖亦有年。嘗喟然歎曰學雖貴自得。不曰從師取友云乎。時大山李先生百弗庵崔公南野朴公。俱以道義文學。稱嶺中三老。先生皆從而問道。其得於李先生者尤多。退而與金川沙苟齋兄弟。審幾堂黃公損齋南公及趙晩谷崔㯃室諸賢相友善。以講討資益焉。
業日廣德日崇。靜養山林。若將終身。世方且去實就華。日趨浮薄。凡於道學之士。顯加嘲訕。幾無完人。至於先生。遠近人士。知與不知。皆稱先生而不名。正廟己酉薦授光陵參奉。先生以爲是先蔭也。乃出肅。未幾超授義禁府都事。賜對問世閥先烈。天語甚溫。先生以恩出格外。不敢當。遂謝病歸。丙辰上敎曰文莊公出入經筵。自任啓沃。典文衡主銓柄。學識事業。至今塗人耳目。其家有飭躬之士。豈不奇且貴乎。仍除司圃署別提。尋拜司憲府持平。下別諭促令上來。先生上疏以親老身病辭不允。丁巳夏特命外補康翎縣監。時繼妣年高。先生據舊典呈該曹。旋因大臣筵禀。換授咸昌。許其便養。先生奉大夫人上壽。會邑之耆老。置酒餙慶。又設鄕飮酒於臨湖書院。時嶺外旱。躬檢災以報營。方伯視他郡俵之雖優。猶未準。先生曰我以實報。營汰其數。是我誠信未孚也。申去就之義。卽準施焉。見糴糓民精而吏劣。使各貯各糶。毋相混焉。點軍使各持一日供。特令殺牛犒焉。民皆喜曰活佛來矣。未幾諱痘奉板輿還山。盖久於官非志也。庚申正廟昇遐。至當宁戊辰陞掌令旋遞。時先生已大耋矣。望實漸隆。摳衣請業者日踵門。求文字者四方而至。戶屨常滿。敎誨不倦。酬應無滯。李林下敬儒時爲道南洞主。丙子春大會儒士。請先生講授。江南北會者數百人。拱侍一貫堂。持中庸更迭問難。先生剖析辨誨。音吐淸亮。終日無倦色。聽者退而充然各有得。環而觀者仰之若神仙中人。是年五月夜忽微呻。値先公忌。子弟請勿將事加調衛焉。先生曰明年未可知。遂躬親灌獻。哀動左右。自是漸篤。屬纊前二日。命長孫收拾遺文。倚几瞑目。微語道不識慈顔爲至痛。翌語門人曰康節語正叔生薑樹頭生。必從生薑樹頭死。此意君輩知之乎。因擧手張之曰康節如是示伊川。其意盖曰面前路徑須敎濶。又曰諧謔亦非自然。甲寅神定氣閒。向侍者各付勉戒之意。已而恬然而逝。是六月六日也。享年七十九。是秋士林以禮葬于咸昌黃嶺辛坐原。先生姿禀旣異。而充養有道。平生遺外聲利。不以事物攖心。薰襲家庭之訓。沉潛聖賢之書。其醇篤似尹和靖。淸通似李延平。定之而中正仁義而主靜。先生其性之也。多識前言往行。以蓄其德。先生其篤之也。要其至而言。先生之於學。誠所謂安且成者也。配李氏茂山君悰之后。學生民顯之女。生三男二女。男象晉,象升出后,象觀亦出后。女崔湜,黃錫老。象晉四男三女。男民秀,民衷,民秉出后,民采。女姜胄永,金在欽,柳祈睦。象升三男三女。男民穆,民稷,民稙。女申鶴休,李敦九,一幼。象觀嗣子民秉。女金重銖,金若洙。昔在丁巳。元善始拜先生于咸寧之衙。翌年夏及冬。再謁于對山樓。每瞻玉貌星眸。符彩彪映。誨語諄懇。表裏泂澈。秋月冰壺。眞先生之謂矣。今已三十年餘。中間不復得南轅。俗累纏身。學無由加進。而丈席遽虛。年及耋矣。猶夫人焉。每念懺悔。中心是悼。日先生長胤以宣寢郞。肅命卽歸。歷惠于終南之寓。以墓文托焉。旣而使其從子奉行狀年譜遺事以寄示焉。禮雖不敢當。情亦不敢辭。遂受而卒業焉。怳然如復誾侍於杖几之側。於是不禁南望隕涕。嗚呼。其忍銘。銘曰。道之在人。如水斯鍾。文莊之宅。有挺儒宗。謙謙君子。襲于休烈。金甌玉瑟。無壞無缺。丹鳳其翔。出而儀之。黃鵠其擧。卷而懷之。翛然離垢。孰刃靡之。淵然其靜。不汩磯之。成大人德。保赤子心。行滿家邦。識貫古今。安時處順。來去其適。黃嶺片石。百世攸式。門人八溪鄭元善撰
[주1] 소미사(少微史) 양절론(陽節論) : 소미사는 《소미통감(少微通鑑)》 곧 《통감절요(通鑑節要)》를 말한다. 송(宋)나라 때 소미 선생(少微先生) 강지(江贄)가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自治通鑑)》을 요약해서 만든 것이다. 양절은 반양절(潘陽節)로, 원(元)나라 때의 학자 반영(潘榮, 1419~1496)이다. 반양절이 《통감절요》의 통감총론(通鑑總論)에서 평한 것을 가리켜 양절론이라 한다.
[주2] 김천사(金川沙) : 김종덕(金宗德, 1724~1797)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도언(道彦), 호는 천사이다. 대산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천사집(川沙集)》이 있다.
[주3] 김구재(金苟齋) : 김종경(金宗敬, 1732~1785)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직보(直甫), 호는 구재이다. 1774년(영조50) 문과에 급제했다. 이상정의 문인으로, 대산과 함께 《심경강록간보(心經講錄刊補)》를 편찬했다.
[주4] 심기당(審幾堂) 황공(黃公) : 황계희(黃啓熙, 1727~1785)로,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경초(景初), 호는 심기당이다. 상주에 거주했으며, 이상정의 문인이다.
[주5] 손재(損齋) 남공(南公) : 남한조(南漢朝, 1744~1810)로,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종백(宗伯), 호는 손재이다. 이상정의 문인이다.
[주6] 조만곡(趙晩谷) : 조술도(趙述道, 1729~1803)로,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소(聖紹), 호는 만곡이다. 이상정, 김낙행(金樂行) 등에게 배웠다.
[주7] 최칠실(崔㯃室) : 최화진(崔華鎭, 1752~1813)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구(士久), 호는 칠실이다. 저서로는 《칠실집(㯃室集)》이 있다.
[주8] 계옥(啓沃) : 사심(私心) 없이 충성스런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를 임금에게 아뢰어 성심껏 인도하는 것을 말한다. 《書經 商書 說命上》
[주9] 이경유(李敬儒) : 1750~1821.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덕무(德懋), 호는 임하(林下)이다. 상주(尙州) 승곡에 거주하였다.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의 증손이고, 음보(蔭補)로 참봉이 되었다. 저서로는 《임하집(林下集)》이 있다.
[주10] 도남서원(道南書院) : 경북 상주 도남동에 있던 서원으로, 1606년(선조39) 지방 유림의 공의로 정몽주(鄭夢周),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1616년(광해군8)에 노수신(盧守愼)과 유성룡(柳成龍)을, 1635년(인조13)에 정경세(鄭經世)를 추가 배향하였다. 1677년(숙종3)에 ‘도남(道南)’이라고 사액되었다.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복원되지 못하고, 일관당만 남아 있다.
[주11] 관헌(灌獻) : 제사를 지낼 때, 술을 땅에 부어서 신령이 강림(降臨)하도록 비는 의식이다.
[주12] 돌아가시기 : 원문은 ‘속광(屬纊)’으로, 《예기》 〈상대기(喪大記)〉에 “솜을 입과 코 근처에 갖다 대고 숨이 끊어지기를 기다린다.[屬纊, 以俟絶氣.]”라는 말에서 가져왔다.
[주13] 강절(康節)이 …… 하였으니 : 소강절이 병이 심해져 이천(伊川)이 병문안 갔을 적에 강절이 한 말이다. 그러자 이천이 “이제부터 선생과 영결하리니, 다시 볼 수가 있겠습니까.[從此與先生永訣矣, 更有可以見告者乎.]”라고 하였다. 다음 날 가서 보니 강절은 음성이 가늘었지만 큰 소리로 “그대는 생강이 나무 위에서 산다고 말하고 있는데, 나도 그대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다.[你道生薑樹上生, 我亦只得依你說.]”라고 하였다. 강절은 송나라 소옹(邵雍)의 시호이고 정숙(正叔)은 정이천(程伊川)의 자이다. 《二程全書 卷19, 卷67》 이는 평소 의견이 합치하지 않은 점이 있더라도 상대의 의견을 존중함을 의미한다.
[주14] 면전(面前)의 …… 한다 : 이천이 강절을 병문안하였을 때 강절이 양손을 들어 펼쳐 보이니, 이천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何謂也]”라고 하였다. 이에 강절이 “면전의 길이 모름지기 항상 확 트이도록 해야 합니다. 길이 좁으면 절로 몸을 붙일 데가 없거늘, 하물며 사람이 다니게 할 수 있겠습니까.[面前路徑須常令寬, 路徑窄則自無著身處, 況能使人行也.]”라고 하였다. 《二程全書 卷19》
[주15] 해학(諧謔)함 : 이천이 “소요부가 임종할 때 다만 해학하다가 잠깐 만에 떠났다. 성인의 관점에서 보면 또한 옳지 않으나 대개 오히려 의미는 있다.[邵堯夫臨終時, 只是諧謔, 須臾而去. 以聖人觀之則亦未是, 蓋猶有意也.]”라고 하였다. 《二程全書 卷19》
[주16] 윤화정(尹和靖) : 윤돈(尹焞, 1071~1142)으로, 자는 언명(彦明), 호는 화정이며, 낙양(洛陽) 사람이다. 정이(程頤)에게 수학하였다. 정이의 학설을 전적으로 계승하여 선학(禪學)에 빠지지 않고 순정함을 지킨 것이 특징이다. 저서로는 《화정집(和靖集)》이 있다. 《宋史 尹焞列傳》
[주17] 이연평(李延平) : 이동(李侗, 1093~1163)으로, 자는 원중(願中), 호는 연평, 시호는 문정(文靖)이며, 검남(劍南) 사람이다. 이정(二程)의 학문이 주희에게 이어지는 교량 역할을 하였다. 이동을 빙호추월(氷壺秋月)에 비유한 말이 있다. 저술로는 주희가 편찬한 《이연평집(李延平集)》이 있다.
[주18] 정(定)하기를 …… 함 : 주염계(周濂溪)의 〈태극도설(太極圖說)〉에, “성인(聖人)이 정(定)하기를 중정(中正)ㆍ인의(仁義)로써 하되 정(靜)을 주로 하여 인(人)의 극(極)을 세운다.”라고 하였다.
[주19] 안정되면서도 이루었다 : 원문은 ‘안차성(安且成)’이다. 《이정전서》 권38에, 소옹이 죽자 그의 집안에서 정호에게 소옹의 묘지명을 써 달라고 부탁하였는데, 오랫동안 쓰지 못하다가 지었으니 “소요부의 학문은 안정되면서도 이루었다[安且成]고 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주20] 빙호추월(冰壺秋月) : 소식(蘇軾)의 〈증반곡(贈潘谷)〉 시에 “베옷은 때 묻어 검고 손은 갈라지고 터졌어도, 얼음 호로에 가을 달을 담는 건 문제가 안 되네.[布衫漆黑手如龜, 未害氷壺貯秋月.]”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등적(鄧迪)이 주희(朱熹)의 스승 연평(延平) 이동(李侗)의 인품을 말하면서 “마치 빙호추월(冰壺秋月)과 같아 티 없이 맑고 깨끗하니 우리가 미칠 수 없다.”라고 하였다. 《宋史 李侗列傳》
[주21] 겸손한 군자 : 《주역》 〈겸괘(謙卦) 초육(初六) 상(象)〉에 “겸손한 군자는 몸을 낮추어 자신의 덕을 기른다.[謙謙君子, 卑以自牧也.]”라는 말에서 가져왔다.
[주22] 금구(金甌) : 영원히 전해질 견고한 물건을 뜻하는 말이다. 남조(南朝) 양 무제(梁武帝)가 “우리나라는 마치 황금 단지와 같아서 하나도 상하거나 부서진 곳이 없다.[我家國猶若金甌, 無一傷缺.]”라고 한 말에서 가져왔다. 《梁書 侯景列傳》
[주23] 단봉(丹鳳) : 단혈(丹穴)의 봉황이라는 말로 봉황을 의미한다. 《산해경(山海經)》 〈남산경(南山經)〉에 “단혈의 산에……새가 사는데, 그 모양은 닭과 같고 오색 무늬가 있으니, 이름을 봉황이라고 한다.[丹穴之山……有鳥焉, 其狀如雞, 五采而文, 名曰鳳皇.]”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봉황은 훌륭한 인물을 비유한다.
[주24] 나가 …… 춤추고 : 《서경》 〈익직(益稷)〉에 “소소(簫韶)를 아홉 번 연주하니, 봉황새도 날아와서 의식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簫韶九成, 鳳凰來儀.]”라고 하였다. 옛사람들은 음악으로 백성들을 교화하였으므로, 출사하여 정사를 잘했음을 의미한다.
[주25] 황곡(黃鵠) : 한 번에 천 리를 날아가는 고니를 가리키니, 득의한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한서(漢書)》 〈장량전(張良傳)〉에 “홍곡(鴻鵠)이 높이 날아 한 번에 천 리를 간다.[鴻鵠高飛, 一擧千里.]”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주26] 칼날을 갈랴 : 원문은 ‘인미(刃靡)’로, 미(靡)는 마(摩)와 같은 의미로 쓰였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한번 몸을 받으면 곧장 죽지는 않더라도 소진되기를 기다리는 것이거늘, 사물과 더불어 서로 다투어서 소진시키는 것이 말달리는 것과 같아서 멈추게 하지 못하니, 또한 슬프지 아니한가.[一受其成形, 不忘以待盡, 與物相刃相摩, 其行盡如馳而莫之能止, 不亦悲乎.]”라고 한 데서 가져왔다.
[주27] 적자의 마음을 보존했으니 : 《대학장구》 전9장에 “강고에 이르기를, ‘어린아이를 보호하듯이 한다.’ 하였으니, 마음에 진실로 구하면 비록 딱 맞지는 않으나 멀지 않을 것이다. 자식 기르는 것을 배운 뒤에 시집가는 자는 있지 않다.[康誥曰如保赤子, 心誠求之, 雖不中, 不遠矣, 未有學養子而后嫁者也.]”라고 한 데서 가져왔다.
[주28] 편안히 …… 따랐으니 : 《장자》 〈대종사(大宗師)〉에 “생명을 얻는 것도 때를 따름이며, 생명을 잃는 것도 때를 따름이니, 태어나는 때를 편안히 맞이하고 죽는 때를 순하게 따르면 슬픔이나 즐거움 따위의 감정이 나의 마음에 들어올 수 없다.[夫得者時也, 失者順也, 安時而處順, 哀樂不能入也.]”라고 한 데서 가져왔다.
[주29] 정원선(鄭元善) : 1766~? 본관은 팔계(八溪), 자는 정언(貞彦), 호는 희인(希仁)이다. 1794년(정조18) 문과에 급제하여 운산 군수(雲山郡守)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