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서원文獻書院 기문記文
옛날 무왕武王이 주紂를 정벌할 적에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은 왕업을 협찬하였는데, 백이伯夷는 서산西山에서 고사리를 캐어 먹었고, 광무제光武帝가 천명을 받을 적에 경감耿弇과 가복賈復)1)은 공훈을 세웠는데, 자릉子陵2)은 창파滄波에서 낚시질만 하였다. 왕후王侯를 섬기지 않고 자신의 뜻만 지키거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거나 하여, 선비가 각각 뜻이 다른 것이니, 어찌 한 가지 관례로만 보아서야 되겠는가.
그러나 고죽孤竹3)의 청풍淸風은 십란十亂4)을 능가하기에 손색이 없고, 동강桐江5)의 기절奇節은 운대雲臺의 공신功臣을 능가하여 광채가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혹 은자隱者가 도리어 드러나고, 달자達者가 도리어 궁하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은현隱顯과 궁달窮達은 몸에만 관계될 뿐, 이름에는 관계되지 않는 것인가? 혹은 그 모두가 하늘에 관계될 뿐이요 몸과 이름에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인가?
그러나 하늘의 뜻은 마치 주周 나라 조정에 풍절風節을 수립한 이는 반드시 상商 나라의 유로遺老이고, 지존至尊을 오시傲視하여 두려움이 없는 이는 반드시 미천하던 때의 친구인지라, 그러므로 주周 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고6), 누워서 성상星象을 움직이어7), 그 의리를 수립하고 그 고상한 뜻을 성취함으로써 비록 전조前朝에 절의節義를 바쳤다고는 하나, 실상은 또한 신국新國에 교훈을 내린 것이라고 한 듯하다. 그리하여 후세에 그들의 풍도를 들은 이로서 마치 유장劉萇8) 이로二老의 의리나 당고黨錮 제현諸賢9)의 절의와 같은 경우는 모두 소종래所從來가 있어, 주周 나라와 한漢 나라의 빼칠 수 없는 공고한 기반이 되었으니, 그렇다면 혹 은隱하거나 현顯하여 자취는 비록 서로 다르더라도, 덕德을 수립하여 후세에 전해서 똑같이 국가를 유익하게 한 것은 한가지인 것이다.
이런 경우야말로 의당 십륜十倫10)의 서열에서 두번째에 위치하고, 오사五祀11)에 짝하여 아름다움을 나란히 해야 할 터인데, 서학西學12)에 자리하여 영화를 누리고 보답을 받는 데에 대하여 그 누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는가.
우리 성조聖祖께서 천명에 응하여 도록圖籙을 장악함으로써 요堯임금은 선위禪位하고 순舜임금은 전해받았는데, 그 때에 목은牧隱 이색李穡 이공李公이 있었으니, 그가 천승千乘의 군주에게 길이 읍揖하고 영원히 떠나 버린 것은 옛 친구가 왕의 배 위에 발을 얹은 것과 같은 고상함이요, 한 번 죽는 것을 마치 헌신짝 벗어 버리듯이 한 것은 상商 나라의 유로遺老가 굶어 죽은 것과 같은 의리인 것이다.
조선朝鮮은 열사烈士가 많다고 호칭하는바, 무릇 큰 위난危難이 있을 적에는 선비로서는 대부분 웅어熊魚13)를 취사取舍하는 분별을 알아서 매양 의리를 지키어 만사를 불고不顧했던 것이 바로 누구로부터 시작된 것이던가. 그렇다면 의당 그 덕을 수립하고 교훈을 내린 공으로 말할 때 고인古人에 견주어 누가 더 중重하고 경輕하겠는가?
지금 보록譜錄을 상고하건대, 가정稼亭 이곡李穀 문효공文孝公이 목은牧隱 문정공文靖公을 낳았고, 목은 문정공이 인재공麟齋公 이종학李種學을 낳았으며, 또 오대五代에 이르러 음애공陰崖公 이자李耔가 탄생하여, 대가 장덕大家長德이 보록에 끊이지 않았으니, 세상에서 한산韓山에는 군자가 많다고 하는 말이 사실이로다.
목은의 묘墓가 한산군韓山郡 서쪽 기린산麒麟山 아래에 있는데, 상서尙書 이성중李誠中이 한산 군수韓山郡守로 있을 때에 그 묘 밑에 사당을 세우고 편액扁額을 문헌文獻이라 하였다. 그런데 임진년 난리통에 모두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그러자 현재 사대부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후손들 가운데 각각 그 선덕先德을 잇고 가업家業을 계승할 만한 이로서 즉 좌의정공左議政公 덕형德馨과 이부 우시랑공吏部右侍郞公 덕형德泂이 서로 이 폐해진 사당을 일으켜 중신重新시키기를 꾀하여 군의 서쪽에 있는 구택舊宅의 터에다 옮겨 세웠다. 그리고 이에 가정공은 서열이 높고 목은공은 덕이 높은 관계로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하게 하여 각각 그 높은 것을 오로지 하였고, 인재공과 음애공은 또한 그 서업緖業을 계승한 관계로 동쪽과 서쪽에 나누어 배향하였는데, 부자父子와 후손이 서로 계승하면서 더욱 드러나 덕행과 문장이 이에 절로 가전지물家傳之物이 되어서 열매를 이루고 꽃을 피웠으니, 누가 그 집안과 높낮이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서원이 이미 건립되자, 이 시랑李侍郞이 나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옛날에 범 무자范武子는 세록世祿을 썩지 않는 업적이라고 말했다가 목숙穆叔에게 기롱을 받았으나14), 지금 이와 같은 유는 참으로 썩지 않는 것이라 하겠네. 내가 또한 자네들에게 부탁할 것이 있네. 지금 자네 두 사람은 능히 조묘祖廟를 일신시켰으니, 존조 경종尊祖敬宗의 의리를 잘 알았다고 하겠네. 비록 그러하나 전대前代에 광영을 입혀서 조선祖先을 드러내는 일이 이것만으로 다 될 수 있겠는가. 후손으로서 도道에 뜻을 둔 사람이 죽어서 이 당堂에 오르지 못한다면 그를 명하여 조선을 욕되게 했다고 할 것이니, 나는 그것을 취하지 않노라.”
하니, 시랑이 일어나서 말하기를,
“감히 해내지는 못할지라도 감히 힘쓰지 않겠습니까.”
하므로, 마침내 이것을 기문으로 삼는 바이다.
文獻書院記
維昔武王伐紂。周召贊業。而伯夷採薇於西山。光武受命。耿賈收功。而子陵垂釣於滄波。不事匪躬。士各有志。何可以一例觀也。然而孤竹淸風。軼十亂而無讓。桐江奇節。駕雲臺而有光。何哉。抑隱者反顯而達者反窮歟。將隱顯窮達。只係於身。不係於名歟。或総之關天。而都不在於身與名歟。天意若曰樹風節於周朝者。須商家之遺老。傲至尊而無懼者。必微時之故人。故不食周粟。卧動星象。以立其義。以成其高。雖云效節於前朝。實亦垂敎於新國。則後之聞風者。如劉萇二老之義。黨錮諸賢之節。咸有所自而爲周漢不拔之鞏基。若是則或隱或顯。迹雖不同。而立德詔後。均之爲益國則一也。是宜序十倫而居貳。配五祀而並美。位在西學。享榮食報者。其誰曰不然也。洪惟我聖祖應天握圖。堯傳舜受。時則有若牧隱李公。揖千乘而長往者。故人加足之高也。視一死猶脫屣者。遺老餓死之義也。朝鮮號多烈士。凡有大危難。爲士者擧皆知熊魚取舍之分。輒守義而不顧者。是誰之所自。而當立德垂敎之功。視古人孰爲重輕哉。今按譜籙。稼亭文孝公生牧隱文靖公。牧隱文靖公生麟齋公。又五世而有陰崖公。大家長德。譜不絶書。世言韓山多君子。信哉。牧隱葬在韓山郡西麒麟山下。李尙書誠中爲郡時。立廟於墓下。扁曰文獻。壬辰之亂。擧爲灰燼。在今薦紳之間柯葉所布。有可以紹德承家者。曰左議政公德馨。吏部右侍郞公德泂。相與圖所以起廢重新。移建於郡西舊宅之基。於是稼亭公以序。牧隱公以德。背北面南。各專其尊。麟齋,陰崖。亦紹厥緖。分配東西。父子曁孫。承繼益顯。德行文章。粤自家傳。以實以華。孰與高下。院旣立。李侍郞托記於余。余曰。昔范武子以世祿不朽。取譏於穆叔。若此者流。眞不朽矣。抑余亦有托於吾子矣。今二君者。能新祖廟。儘知尊祖敬宗之義。雖然。光前而顯祖者。盡於此而已乎。爲後孫而志于道者。死而不登于斯堂。命之曰忝祖。吾不取也。侍郞作而曰。不敢。敢不勉。遂爲記。
[주1] 경감(耿弇)과 가복(賈復) : 경감은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를 따라서 여러 적들을 격파하고, 광무제가 즉위한 후에는 건위대장(建威大將)이 되고 호치후(好畤侯)에 봉해졌다. 가복은 역시 광무제를 따라서 여러 적들을 격파하여 도호장군(都護將軍)이 되고 교동후(膠東侯)에 봉해졌다. 《後漢書 卷18, 卷19》
[주2] 자릉(子陵) : 후한 광무제와 젊었을 때의 친구인 엄광(嚴光)의 자인데, 광무제가 등극(登極)한 뒤에는 엄광이 간의대부(諫議大夫)의 제수를 극력 사양하고 부춘산(富春山)에 은거하면서 평생 동안 낚시질을 하며 지냈다고 한다.
[주3] 고죽(孤竹) : 여기서는 은(殷)나라 말기에 고죽군(孤竹君)의 아들이었던 백이(伯夷)를 가리킨다.
[주4] 십란(十亂) : 주 무왕(周武王)을 보필하던 10인의 훌륭한 신하, 즉 주공 단(周公旦)ㆍ소공 석(召公奭)ㆍ태공망(太公望)ㆍ필공(畢公)ㆍ영공(榮公)ㆍ태전(太顚)ㆍ굉요(閎夭)ㆍ산의생(散宜生)ㆍ남궁괄(南宮适)ㆍ문모(文母)를 말하는데, 문모는 읍강(邑姜 무왕의 후비임)의 잘못이라고 한다. 《書經 泰誓中》
[주5] 동강(桐江) : 여기서는 후한 때 동강에서 낚시질하며 은거하였던 엄광(嚴光)을 가리킨다.
[주6] 주(周)나라의 …… 않고 : 상(商)나라가 멸망하고 주 무왕(周武王)이 천자가 되었을 때, 백이(伯夷)가 의리상 주나라의 곡식을 먹을 수 없다 하고,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마침내 굶어 죽었던 데서 온 말이다.
[주7] 누워서 …… 움직이어 : 후한 광무제가 등극한 후에 젊었을 때의 학우(學友)인 엄광(嚴光)을 가까스로 찾아서 맞이해다가 관사(館舍)를 정하여 접대할 적에, 하루는 광무제가 친히 그 관사로 엄광을 만나러 갔는데, 엄광은 누운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으므로, 광무제가 그의 뜻을 꺾지 못하여 그대로 돌아왔었다. 그 후에는 또 광무제가 엄광을 궁중(宮中)으로 불러들여서 수일 동안 옛 이야기를 나누었던바, 이 때 함께 누웠던 엄광이 광무제의 배[腹] 위에 발을 올려놓은 일이 있었다. 그 다음 날 태사(太史)가 객성(客星)이 어좌(御座)를 매우 급박하게 범했다고 아뢰자, 광무제가 웃으면서 이르기를 “짐(朕)의 친구 엄자릉(嚴子陵)과 함께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83》
[주8] 유장(劉萇) …… 의리 : 주(周)나라를 높인 의리를 이른다. 유장은 주나라의 경사(卿士)인 유 문공(劉文公)과 주나라의 대부(大夫)로서 유 문공을 섬겼던 장홍(萇弘)을 합칭한 말이다. 유 문공은 진(晉)나라의 범씨(范氏)와 친하여 대대로 혼인(婚姻)을 하였고, 장홍은 유 문공을 섬기었으므로 주(周)나라에서 범씨와 가까이 지냈는데, 진(晉)나라의 조앙(趙鞅)이 주나라와 범씨가 친하게 지낸 것을 책망하자, 이를 두려워한 주나라 사람이 마침내 장홍을 죽였었다. 《左傳 哀公 3年》
[주9] 당고(黨錮) 제현(諸賢) : 당고는 곧 당인(黨人)으로 지목되어 금고(禁錮)를 당한 것을 이른다. 제현은 곧 후한(後漢)의 환제(桓帝)ㆍ영제(靈帝) 연간에 환관(宦官)들의 발호를 태학생(太學生)들을 거느리고 환관들을 공격했던 이응(李膺)ㆍ진번(陳蕃)ㆍ두무(竇武) 등 우국지사들을 가리키는데, 이 때에 이들은 환관들로부터 도리어 당인으로 지목되어 수많은 사람이 피살되었다.
[주10] 십륜(十倫) : 제사를 지내어 나타내는 열 가지의 윤리를 말한 것으로, 즉 첫째는 귀신(鬼神) 섬기는 도리를 나타내는 것, 둘째는 군신(君臣)의 의리를 나타내는 것, 셋째는 부자(父子)의 윤리를 나타내는 것, 넷재는 귀천(貴賤)의 등급을 나타내는 것, 다섯재는 친소(親疎)의 등급을 나타내는 것, 여섯째는 작상(爵賞)의 시행을 나타내는 것, 일곱째는 부부(夫婦)의 분별을 나타내는 것, 여덟째는 정사(政事)의 균평함을 나타내는 것, 아홉째는 장유(長幼)의 차서를 나타내는 것, 열째는 상하(上下)의 교제를 나타내는 것 등이다. 《禮記 祭統》
[주11] 오사(五祀) : 옛날에 성왕(聖王)이 다섯 가지 훌륭한 신령(神靈)에게 제사 지냈던 것을 이른다. 즉 생전에 선정 양법(善政良法)을 인민(人民)에게 베푼 사람을 제사 지내고,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 일에 힘쓴 사람을 제사 지내며, 노고로써 국가를 안정시킨 사람을 제사 지내고, 큰 재해(災害)를 예방하고 구출해 낸 사람을 제사 지내며, 큰 환난(患難)을 막아낸 사람을 제사 지낸다는 다섯 가지이다. 《禮記 祭法》
[주12] 서학(西學) : 주(周)나라 시대의 소학(小學)을 이르는데, 《禮記》 제의(祭義)에 “서학에서 선현을 제사 지낸다[祀先賢於西].” 하였다. 여기서는 바로 서원을 비유한 것이다.
[주13] 웅어(熊漁) : 웅은 진미로 유명한 웅장(熊掌)을 이른다. 맹자가 이르기를 “물고기는 내가 좋아하는 바이고, 웅장도 내가 좋아하는 바이나, 두 가지를 겸할 수 없을 경우에는 물고기를 버리고 웅장을 취하겠다. 사는 것[生]은 내가 좋아하는 바이고, 의리[義]도 내가 좋아하는 바이나, 두 가지를 겸할 수 없을 경우에는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겠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古子上》
[주14] 범 무자(范武子)는 …… 받았으나 : 목숙(穆叔)은 춘추 시대 노(魯)나라 대부(大夫) 숙손표(叔孫豹)의 시호이다. 일찍이 진(晉)나라 범 선자(范宣子)가 숙손표를 맞이하여 대화(對話)하는 가운데 자기 조상들의 세록(世祿)은 썩지 않는 귀중한 업적이라고 자랑했으나, 숙손표가 이를 그렇지 않다고 부정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한 범 무자는 바로 범 선자의 할아버지가 되는 사람이다. 《左傳 襄公 24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