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재(艮齋) 이공(李公)의 행장
공의 휘는 덕홍(德弘)이고, 자는 굉중(宏仲)이며, 호는 간재이니, 모두 퇴계 이 선생이 친히 지어 주신 것이며,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7대조 헌(軒)이 처음으로 예안(禮安)의 분천리(汾川里)에 우거(寓居)하여 자손들이 그곳에 터를 잡은 것이다. 종백조(從伯祖) 현보(賢輔)가 풍절(風節)과 행의(行誼)로 중묘(中廟), 인묘(仁廟), 명묘(明廟) 때에 저명하여 벼슬이 찬성(贊成)에 이르렀고, 시호는 효절(孝節)이다. 효절공의 아우가 현우(賢佑)인데, 훈련원 습독(訓鍊院習讀)을 지냈다. 습독의 아들이 충량(忠樑)인데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참판공이 박씨(朴氏)에게 장가들어 가정 신축년(1541, 중종36) 10월 14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단정하고 순수하며 온아(溫雅)하였고, 다른 아이들과 장난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약관의 나이에 퇴도(退陶) 선생의 문하에서 배워 훈도(薰陶)받았고, 또 독실히 외고 익히며 글 뜻을 깊이 생각하였다. 선생께서 그가 어린나이에 뜻이 독실한 것을 아껴서 처음에 뜻을 세우고 추향(趨向)을 바르게 하는 것을 가르치셨다. 학문의 방향을 알게 되자 또 이기(理氣)와 성명(性命)의 깊은 뜻과 수신(修身)하고 처신(處身)하는 요령을 가르쳐서 기대하고 장려하는 뜻이 매우 지성스러웠고, 공 또한 독실히 믿고 앙모하여 받들고 주선하는 데 감히 조금도 나태하지 않았다.
일찍이 선생의 일상생활하는 언행을 익숙히 살피고 자세히 기록하여 《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이라고 이름을 붙여 본받을 표준으로 삼고, 허송세월하며 놀아서 스승의 가르침을 실추시킬까 심히 두려워하였다. 일찍이 자경시(自警詩)를 지었는데, “요(堯) 임금과 우(禹) 임금의 짧은 시간을 내가 아까워한다.〔陶分禹寸吾須惜〕”라는 구절이 있다. 선생께서 돌아가시기 하루 전에 공에게 명하여 서책을 맡게 하셨다. 선생이 돌아가신 뒤에 공은 스승을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3년간 심상(心喪)을 하였다. 만력 무인년(1578, 선조11)에 조정에서 명유(名儒)를 불러 등용하였는데, 공이 한강(寒岡 정구(鄭逑)) 정 선생(鄭先生)과 함께 추천되어 집경전 참봉(集慶殿參奉)에 제수되었고, 풍저창 봉사(豐儲倉奉事)와 종묘서 직장(宗廟署直長)을 거쳐 익위사 부솔(翊衛司副率)이 되었다가, 얼마 뒤에 위솔(衛率)로 옮겼다. 그때 임진란을 만나 세자를 모시고 성천(成川)으로 행차(行次)하였는데, 밤낮으로 공직(供職)하며 나태하지 않고 더욱 공경히 하였다.
계사년(1593) 봄에 영춘 현감(永春縣監)에 제수되었는데, 이때는 병란이 일어난 때이고 기근까지 들어 공사 간에 남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백성들이 굶어서 죽어 가고 있었다. 공이 힘을 다해 구제하니, 온 경내에 백성들이 굶어 죽는 근심이 없게 되었다. 갑오년(1594) 겨울에 내간(內艱)을 당하여 사직하였는데, 상을 치르면서 지나치게 슬퍼한 나머지 쇠약해져서 병에 걸려 병신년(1596, 선조29) 2월 19일에 여차(廬次)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56세였다. 그해 5월 모일에 현의 북쪽에 있는 우계(愚溪) 곤향(坤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장사 때에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유 선생(柳先生)이 시를 지어 보냈는데, “비파 소리 잦아들자 함장의 감탄하는 소리 누차 들었네.〔希瑟屢聞函丈喟〕”라는 구절이 있었다. 뒤에 호종(扈從)한 공으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부인은 남씨(南氏)인데 모관 모의 손녀이고, 모관 모의 따님이다. 아들이 여섯인데, 장남은 이름이 시(蒔)이고, 다음은 모모(某某)이다. 내외의 손, 증손은 남녀 모두 몇 명이다. 공은 효성스럽고 우애로우며 자상하고 정직하였고, 독실하고 근면하였다. 어버이를 섬길 때에는 아침저녁으로 문안하기를 예법대로 하였고, 철에 따라 음식과 의복을 공양하고 갖추면서 힘을 다하고 마음을 다해 봉양하였으며, 형을 섬기는 데에는 공경하고 친척에게는 돈독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에는 아랫사람을 부리는 데에는 관대하게 하고 선비를 대하는 데에는 예로써 하며, 백성의 고충을 애써 구휼하는 것이 정성에서 우러나왔고 학문을 하는 데에는 근본에 힘썼으니, 군자가 도(道)를 배워서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붕우에 대해서는 선으로써 인도하고 정성으로써 대하였다. 어떤 선비가 서울에서 책을 싸 들고 도산(陶山)에 와서 공과 한방에서 공부하였는데, 한번은 갑자기 병에 걸려 위독하자 공이 정성을 쏟아 간호하여 마침내 완전히 나았으니, 다른 사람을 충(忠)으로 대하고 남의 곤궁함을 급히 구휼해 주는 의리가 또 이와 같았다. 강학(講學)할 때에는 먼저 글의 뜻에서부터 철저히 분석하여 그 뜻을 알기 전에는 놓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의심스럽고 막힌 것이 있으면 반드시 강석(講席)에서 질정(質正)하여 기록해 두었다가 늘 생각해서 마음속으로 자득(自得)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렇게 하였기 때문에 선생이 구두로 말씀하신 것과 편지로 왕복하며 질문한 것들이 매우 많았다.
선생이 일찍이 혼천의(渾天儀)를 만들라고 명하자 공이 채침(蔡沈)의 소의(疏義)를 상고하고 연구하여 안배해서 만들었는데, 크기가 한 자쯤 되고 그 체제가 매우 자세하였다. 특히 역학(易學)에 더욱 정밀하여 방횡양도질변서(方橫兩圖質辨書)를 만드니 선생이 매우 칭찬하였다. 비지(賁趾) 선생 남치리(南致利) 의중(義仲)이 일찍이 공과 《역(易)》 〈복괘(復卦)〉를 논하고서 말하기를, “오늘 그대에게 무릎을 꿇었다.” 하였다. 송소(松巢) 권공 우(權公宇)와 겸암(謙巖) 유공 운룡(柳公雲龍)이 또 군에게 의심난 것을 물어서 의혹을 제거했다는 말이 있으니, 선배들에게 추중(推重)을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역학질의(易學質義)》, 《사서석의(四書釋義)》, 《심경질의(心經質疑)》, 《고문전후집질의(古文前後集質疑)》, 《자의(自疑)》 등의 책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공이 세상을 떠난 지 96년이 지났는데, 어느 날 공의 손자 영준(榮儁)이 수백 리를 멀다 않고 와서 공의 행사(行事)를 나에게 주고 행장을 써 달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왕대부께서 어릴 적부터 퇴계 선생께 인정을 받아 인도하고 권면하신 은혜를 입은 덕에 마침내 수립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 선한 덕과 행의를 민멸시켜서는 안 되는데, 이럭저럭 시일을 끌다가 당세의 문필을 잡은 군자에게 행장을 청하지 못하여 선조의 아름다운 덕행을 가려서 드러나지 않게 하였으니, 어찌 우리 자손들의 죄가 아니겠습니까. 지금 불초(不肖) 손자 영준이 늙고 병들어 장차 죽을 날이 머지않았으니, 마침내 민멸되어 무궁한 한을 남기게 될까 두려워 감히 두 번 절하고 청합니다. 그대는 불쌍히 여기시어 행장을 써 주십시오.” 하였다. 내가 사양하였으나 거듭 청하여 마지않기에 삼가 위와 같이 기록한다. 그러나 내가 후대에 태어나 공의 행적에 대해 갖추 알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빠뜨리고 잘못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할까 크게 두렵다. 입언(立言)할 군자는 헤아려 주기 바란다. 삼가 쓴다.
금상 17년 신미년(1691, 숙종17) 2월 하순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이현일은 쓴다.
艮齋李公行狀
公諱德弘。字宏仲。號艮齋。皆退溪李先生所親命也。其先永川人。七世祖軒。始寓居于禮安汾川里。子孫因家焉。從伯祖賢輔以風節行誼。著中,仁,明廟時。位至贊成。諡孝節。孝節公有弟曰賢佑。爲訓鍊院習讀。習讀有子曰忠樑。贈兵曹參判。參判娶朴氏女。以嘉靖辛丑十月十四日生公。幼端粹溫雅。不喜與群兒戲嬉。弱冠遊退陶先生之門。有薰陶擩染之益。旣又篤專誦習。尋思文義。先生愛其年少篤志。始敎之以立志正趨向。學旣知方。又告之以理氣性命之奧。修身行己之要。其期待奬與之意甚勤。公亦篤信而景仰之。奉持周旋。不敢少懈。嘗熟察先生日用言行而詳記之。名曰溪山記善錄。以爲則效矜式之地。深以玩愒遊汎。墜失師訓爲懼。嘗作詩自警。有陶分禹寸吾須惜之句。先生易簀前一日。命公爲司書。及先生旣沒。公不勝山頹樑壞之痛。爲之心喪三年。萬曆戊寅。朝廷徵用名儒。公與寒岡鄭先生共登薦書。除集慶殿參奉。由豐儲倉奉事,宗廟直長。爲翊衛司副率。俄遷衛率。會値壬辰之亂。奉世子行次成川。夙夜供職。不懈益處。癸巳春。除永春縣監。時兵燹之餘。仍之以饑饉。公私赤立。餓莩顚連。公極力賑濟。一境之內。民無捐瘠之患。甲午冬。以內艱去官。執喪過苦。柴毀成疾。以丙申二月十九日。卒于廬次。享年五十六。以是年五月某日。葬于縣北愚溪坤向之原。其葬也。西厓柳先生以詩送之。有希瑟屢聞函丈喟之句。後以有扈從功。贈吏曹參判。夫人南氏。某官某之孫。某官某之女。有子六人。長蒔。次某某。內外孫曾男女幷若干人。公孝友慈良。篤實勤敏。其事親也。晨昏定省如禮。在飮食寒溫衣服薄厚之節。竭其力而忠養之。敬於事兄而篤於親姻。其居官也。御下以寬而待士以禮。勤恤民隱而出於悃愊。爲學務本。學道愛人之意。可見於此矣。於朋友。導之以善而接之以誠款。有一士人。自洛下負笈至陶山。與公同齋講業。嘗猝病危篤。公調治勤劇。乃得痊安。其與人忠急人困之義又如此。其講學也。先從文義上。毫分縷析。不得不措。少有疑滯。必就正於皐比之下。箚記而時繹之。以心會自得爲究竟地。是故其承口講指畫及書疏往復質疑請問者甚多。先生嘗令作渾天儀樣。公考究蔡氏疏義。鋪排結搆。盈尺而曲盡其制。尤精於易學。有方橫兩圖質辨書。先生深加歎賞。賁趾先生南致利義仲嘗與公論易復卦。乃曰。今日爲君屈膝。松巢權公宇,謙巖柳公雲龍。又有從君質疑祛惑之語。其爲先輩所推重如是。有易學質義,四書釋義,心經質疑,古文前後集質疑,自疑等書藏于家。距公捐館今九十有六年。一日公之孫榮儁不遠數百里而來。以公行事授玄逸。使狀次之曰。王大父自早歲受知於退溪先生。承誘掖奬勵之勤。卒有所立。其德善行誼。有不可泯沒者。而因循遷就。未及請狀於當世秉筆之君子。使先祖德行之美。幽翳而不章。豈非吾子孫之罪。今者不肖孫榮儁老病且死矣。恐遂沈泯。遺恨無窮。敢再拜以請。惟吾子幸哀而文之也。玄逸辭不獲。謹第錄如右。惟是不佞生也後。於公之行蹟。有不能備知。大懼闕漏放失。將無以爲採擇之地。伏惟立言之君子有以財之。謹狀。上之十七年重光協洽二月下澣。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李玄逸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