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평문씨족보 서
어떤 한 사람을 우연히 만난 처음에 자신의 성(姓)이 문씨(文氏)라고 말을 하면, 그 출신을 물을 겨를도 없이 바로 우선 문 강성(文江城)의 후예라고 생각한다. 또한 문씨 성을 가졌으면서 멸하여 평민이 된 사람이 있어 그의 성기(性氣)가 순량(循良)하고 집안이 따뜻하면서 자녀가 번성한 경우를 보면, 사람들은 반드시 이를 두고 문 강성의 후예가 되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무릇 문 강성 이전에 어찌 잠조(簪組 벼슬)ㆍ훈업(勳業 공훈)ㆍ명절(名節)ㆍ이행(彝行 선행)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감동시킨 분이 없었을까. 문 강성의 후예 중에 우선 호남을 가지고 말해본다면, 풍암(楓庵)ㆍ경암(敬庵) 같은 제공(諸公)들이 모두 남쪽 지방의 위인이라고 일컬어졌다. 그러나 문씨 성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그 스스로 말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반드시 문 강성을 말하는 것은 아낙이나 어린이들조차 다 문 강성에게 반드시 후손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어찌 인력(人力)이 미칠 수 있는 바이겠는가. 인심이 똑같이 그러한 곳에 천조(天祚)도 반드시 모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생각으로는, 문씨 성은 반드시 오래가면 더욱 커질 것이요, 문씨가 된 사람들은 이미 하늘이 돕는 것을 안다면, 마땅히 갑절로 스스로를 사랑하여 한 마음으로 계승해서 많은 복을 받도록 해야 한다. 문씨는 힘쓸지어다.
문씨가 족보를 가진 것이 오래되었다. 숭정(崇禎) 두 번째 신해년(1731, 영조7)에 만든 호남보(湖南譜)가 첫 번째이고, 네 번째 무진년(1808, 순조8)에 만든 대동보(大同譜)가 두 번째이며, 그 뒤에 각자 집집마다 가승(家乘)을 만든 것이 세 번째이다. 또한 신해년(1851, 철종2)에 만든 관서보(關西譜)가 네 번째이고, 갑인년(1854, 철종5)에 만든 영남보(嶺南譜)가 다섯 번째이며, 올해 경신년(1860, 철종11)에 만드는 호남 대동보(湖南大同譜)가 여섯 번째이다. 비록 그 발의(發議)한 것이 넓거나 좁은 것이 있고, 씨족을 모으는 것이 자상하거나 소략하기는 하나 선덕(先德)을 수집하는 것은 대저 뒤에 나온 것이 자상하니 규모와 구성이 뒤에 나온 것이 정밀해서이다. 이 족보가 문씨에게는 선조를 잇고 후세에게 드리우는 마음이니, 대체로 유감이 없겠는가.
인쇄가 장차 끝나려고 하자 문기덕(文基德)과 문병환(文秉煥) 두 선비가 나에게 그 서문을 써달라고 하였다. 씨족은 크나 필력이 약하여 첫째 감당하지 못하였고, 근세의 두 족보에 유림(儒林)의 두 장덕(長德)이 이미 서문을 써서 천박한 지식으로 그 뒤를 이으니 두 번째 감당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굳이 사양했으나 받아주지 않아 곧 평소 마음속에 간직한 것으로 그 송도(頌禱)의 뜻을 이와 같이 하였다. 병환씨는 내 선조의 외손이니, 이것도 끝내 사양하지 못한 한 가지 이유이다.
南平文氏族譜序
一箇人邂逅初。自言文爲姓。未暇詳其所出。卽先意其文江城裔孫。又姓文而夷爲平民者有之。見其性氣循良。家溫而生育蕃者。人必以爲此爲江城裔無疑。夫江城之前。豈無簪組勳業名節彝行。可以動人耳目。江城之後。姑以湖南言之。則如楓庵,敬庵諸公。皆稱南服偉人。然而遇文姓人。不待其自言而必江城云者。婦孺皆知江城之必有後故也。此豈人力所及哉。人心之所同然。天祚之所必集。是以吾意文姓必久而益大。爲文氏者旣知爲天之所佑。則宜倍自愛。一念似述。以爲膺受多祐之地。文氏勉乎哉。文氏有譜舊矣。崇禎再辛亥湖南譜一。四戊辰大譜再。其後各家家乘三。又辛亥關西譜四。甲寅嶺南譜五。今秊庚申湖南大譜六。雖其發議有廣狹。收族有詳畧。而裒聚先德。大抵後出者詳。規模間架。大抵後出者精。此譜之於文氏承先垂後之心。蓋無遺憾矣乎。剞劂將畢。文氏基德,秉煥二彥。俾不佞塵涴其卷端。族大筆力弱。一不敢當。近歲二譜。儒林二長德旣序之。膚末續其後。二不敢當。以此固辭而不獲。乃以平日所藏於中者。致其頌禱之意如右云。秉煥於吾先祖爲彌甥。此亦不得終辭之一端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