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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협총설 104조항 〔陶峽叢說 一百四則〕
1. 을사년(1725, 영조1)에 내가 적소(謫所)에 있다가 조정으로 돌아와서 지경연사(知經筵事)로 입시(入侍)하였는데, 이때 성상께서는 경연에서 막 《논어》를 강론하였다.
장저(長沮)와 걸닉(桀溺)의 일에 이르자, 내가 아뢰기를,
“장저와 걸닉은 진실로 고사(高士)들이나, 은둔하고 돌아오지 않아서 군신간의 인륜을 폐하고 끊었으니 끝내 이단(異端)으로 귀결됨을 면치 못합니다. 오직 공자(孔子)만이 때가 도(道)를 행할 만하면 행하고 그칠 만하면 그치시어 더없이 합당하고 지극히 공정하셔서 만세의 법이 되십니다.”
라고 하니, 성상이 말씀하기를,
“장저와 걸닉은 현인인데, 어찌 이단이라고 배척한단 말인가. 연신(筵臣)의 말이 잘못되었다.”
라고 하셨다. 내가 아뢰기를,
“이른바 이단이란 것은 흉악하고 간사한 소인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비록 그 인품이 유속(流俗)에서 우뚝이 빼어나다 하더라도 만약 그의 행한 바가 성인의 도에 위배되면 자연히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맹자(孟子)가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배척하여 이단이라 하셨는데, 양주와 묵적은 바로 인(仁)과 의(義)를 배우다가 잘못된 자들이니, 이들의 인품이 어찌 보통 사람보다 크게 뛰어나지 않겠습니까. 다만 이들이 배운 바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배척하셨으니, 이단이라는 칭호가 원래 나쁜 칭호가 아닙니다.”
라고 하였으나, 성상은 여전히 내 말을 옳게 여기지 않으셨다.
이때 한 옥당관(玉堂官)이 나아가 아뢰기를,
“공자와 장저ㆍ걸닉은 모두 착(鑿)한 사람입니다. 결코 우열과 시비를 말할 수가 없으니, 성상의 분부가 지당하십니다.”
라고 하였다. - 착(鑿)하다는 말은 어질다는 뜻의 방언이다. -
성상이 마침내 기뻐하며 말씀하기를,
“옥당관의 말이 매우 옳다.”라고 하셨다.
다른 날에 또 들어가서 모셨는데, 성상께서 주자(朱子)의 《집주(集註)》의 잘못을 많이 지적하시므로, 내가 강력히 그렇지 않음을 분별하고 또 아뢰기를,
“주자가 《집주》를 지으실 적에 일생(一生)의 마음과 힘을 다 쓰셔서 재량(裁量)과 취사(取捨)에 있어 물을 부어도 새지 않을 정도로 치밀하게 하였습니다. 한 글자, 한 구(句)가 모두 의의(意義)가 있으니, 옮기거나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성상께서 《논어혹문(論語或問)》을 보신다면 주자의 주설(註說)이 십분 적당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때 한 옥당관이 나아가 아뢰기를,
“이것은 잘못 아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자가 일찍이 《대학혹문(大學或問)》은 지었어도 《논어혹문》은 지은 적이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아뢰기를,
“옥당관은 필시 아직 《논어혹문》을 보지 못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는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사람이 갑자기 다른 말을 하였기 때문에 내 말을 마치지 못하였다.
내가 조정에서 물러 나와서 아무개에게 이것을 이야기해 주고 웃으면서 또 말하기를,
“이 사람이 《논어》에 혹문(或問)이 있는 것은 전혀 모르면서 유독 《대학》에 혹문이 있음을 아니,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라고 하니, 아무개가 말하기를,
“공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하십니까? 근래에 감시(監試)의 종장(終塲) 공부를 준비하는 유생(儒生)들이 문자를 수집하기 위하여 《대학혹문》을 많이 보고, 《논어혹문》은 과거 공부에 긴요하지 않다 하여 버리고 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논어혹문》은 모르고 《대학혹문》이 있는 것만 아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 어찌 괴이하게 여길 것이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배를 움켜쥐고 웃으며 말하기를,
“참으로 옳다. 참으로 옳다.”
라고 하였다.
두 옥당관의 말이 참으로 서로 딱 들어맞는 대구(對句)이니, 한가로운 가운데 심심파적의 자료가 되기에 충분하므로 이것을 기록한다.
2. 《맹자》의 ‘문문왕작흥(聞文王作興)’을 언해(諺解)에서는 ‘작흥(作興)’에서 구를 떼었으나, 이는 옳지 않은 듯하다. 《집주》를 상고해보면 “‘작(作)’과 ‘흥(興)’은 모두 ‘기(起)’이다.”라고 하였으니, 만약 ‘작흥(作興)’을 한 구로 삼았다면 의당 “‘작흥’은 ‘기(起)’이다.”라고만 해야 하고 ‘개(皆)’ 자를 놓아서는 안 되는데 지금 ‘개기(皆起)’라고 말하였으니, 이는 ‘작(作)’에 구를 떼어서 이를 ‘문왕(文王)’에 붙이고 ‘흥(興)’을 구로 삼아서 백이(伯夷)에 속하게 한 것이 매우 분명하다. 언해를 정할 때에 어찌하여 이와 같이 만들었는지 알지 못하겠다.
중국본 《맹자》는 모두 ‘작(作)’ 자 아래에 작은 권점을 찍었으니, 마땅히 ‘작(作)’에서 구를 떼어야 함을 더욱 알 수 있다.
《시경》 〈생민(生民)〉의 ‘이제무민흠유개유지(履帝武敏歆攸介攸止)’를 언해에서는 ‘민(敏)’에서 구를 떼고 ‘흠(歆)’을 아래의 구에 붙였으나, 중국본에는 ‘흠(歆)’ 자 아래에 권점을 붙였으니, 이것 또한 마땅히 중국본을 따라야 할 듯하다.
3. 요(堯)ㆍ순(舜), 우(禹)ㆍ탕(湯)과 문(文)ㆍ무(武)ㆍ주공(周公)은 지위를 얻으셨고 공자와 맹자는 지위를 얻지 못하셨으니, 당(唐 요(堯))ㆍ우(虞 순(舜))와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 시대)의 정사는 《서경》의 여러 편에서 상고할 수 있고, 공자와 맹자의 큰 경륜(經綸)은 〈애공문정장(哀公問政章)〉, 〈경계장(經界章)〉과 〈반록장(班祿章)〉 등에서 모두 상상해 볼 수 있다.
4. 주자께서 《대학》의 〈보망(補亡)〉 장을 지었는데, 이 장의 문장은 순전히 송(宋)나라 당시의 문체여서 상고 시대의 문장과는 똑같지 않으니, 이는 문장이 후대로 내려옴에 비록 주자 같은 아성(亞聖)도 억지로 노력하여 이루기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억지로 고문(古文)을 모방하여 쓰고자 한다면 이 또한 진실한 도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여기에 근거해보면, 후인(後人)들이 억지로 곁가지의 말을 긁어모아서 고문을 모방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병이 없으면서 얼굴을 찌푸리고 신음하는 결과가 되니, 식자(識者)들이 취할 바가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5. 《시경》 삼백 편은 모두 사람의 성정(性情)을 모사한 것이다. 이 가운데 정(正)은 온화하고 느슨하며 변(變)은 격렬하고 강개하여 마음이 북받치는 감발(感發)의 단서가 있지 않음이 없는데, 변 중에도 〈절남산(節南山)〉ㆍ〈정월(正月)〉ㆍ〈시월지교(十月之交)〉 등의 편에 이르러는 나라를 걱정하고 세상에 분개하는 마음이 반복되고 가슴에 이리저리 맺혀 있어 글 뜻의 비통함이 다른 편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내가 이 시들을 읽을 적마다 일찍이 한 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으니, 《시경》이 사람을 감동시킴이 이와 같다.
6. 상고 시대에는 형벌과 옥사를 가장 신중하게 처리하였으니, 예컨대 《서경》 〈순전(舜典)〉의 ‘형벌을 신중히 하셨다.〔惟刑之恤〕’라는 것과 〈강고(康誥)〉의 ‘능히 덕(德)을 밝히고 형벌을 삼가셨다.〔克明德愼罰〕’라는 것과 ‘너의 형벌을 공경히 밝혀라.〔敬明乃罰〕’라는 것과 〈주고(酒誥)〉의 ‘죽이지 말고 너는 우선 가르쳐라.〔勿用殺, 姑惟敎之.〕’라는 것과 〈소고(召誥)〉의 ‘법이 아닌 것을 지나치게 쓴다고 하여, 또한 진륙(殄戮)을 과감하게 결단해서 다스리지 마소서.〔勿以淫用非彝, 亦敢殄戮用乂.〕’라는 것과 〈다방(多方)〉의 ‘죄가 없는 자를 열어 석방함도 또한 능히 권면하는 것이다.〔開釋無辜, 亦克用勸.〕’라는 것과 〈입정(立政)〉의 ‘여러 옥사와 여러 신중히 할 형벌을 그르치지 마십시오.〔勿誤于庶獄庶愼〕’라는 것과 〈군진(君陳)〉의 ‘형벌하여 형벌을 그칠 수 있어야 이에 형벌하라.〔辟以止辟, 乃辟.〕’라는 것과, 그리고 〈여형(呂刑)〉 한 편은 모두 간곡하게 형벌을 조심하고 법을 삼가는 것을 가지고 훈계를 남긴 것이다.
형정(刑政)은 나라를 소유한 자가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것이니, 한번 이것을 잘못하면 혼란과 멸망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후세에는 그렇지 않아서 대부분 군주가 한때의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감정으로 형정을 사용하여 사람의 목숨을 마치 풀과 골풀을 베듯 가볍게 여기니, 옛날의 ‘떳떳한 형벌로 보여준다.〔象以典刑〕’라는 뜻에 비하면 어떠한가. 참으로 서글프다.
7. 《주역(周易)》이란 책은 오로지 양(陽)을 추켜세우고 음(陰)을 억누르는 것을 강령(綱領)으로 삼았다. 용(龍)은 지극한 양의 정기가 되니, 건괘(乾卦)에 맨 먼저 용을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 뒤의 여러 괘는 비록 모두 용을 말하지는 않았으나 큰 뜻은 똑같으니, 어느 괘도 건괘 범위의 밖을 벗어나지 않는다.
8. 《예기(禮記)》의 문장은 매우 빈틈이 없고 명백하지만 간혹 알기 어려운 구법(句法)이 있는데, 진호(陳澔)의 주(註)가 소략한 흠이 많으니, 탄식할 만하다. 내가 젊었을 적에 이 책을 읽지 못했었는데 계묘년(1723, 경종3)과 갑진년(1724) 사이에 적소에 있으면서 처음 읽어보고 몹시 기뻐하였으며 일찍 공부하지 않은 것을 깊이 한하였다.
9. 《춘추(春秋)》는 성인(聖人)이 혼란을 다스려서 바름으로 돌아오게 한 책이다. 은공(隱公)에서 시작하였으니, 은공 원년은 바로 주(周)나라 평왕(平王) 49년(B.C.722)이다. 평왕이 동쪽으로 천도하여 정권을 잃은 뒤에 혼란이 여기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시작을 삼았으니, 성인의 뜻이 깊다.
그 뒤에 주자가 《통감강목(通鑑綱目)》을 편수할 때에도 주(周)나라 위열왕(威烈王) 23년(B.C.403)에서 시작하였으니, 이는 삼진(三晉)이 강성해져서 이 일이 곧 왕실(王室)이 점점 미약해지는 단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평왕(平王)이 중자(仲子)에게 봉(賵)을 보낸 것과, 위열왕이 조씨(趙氏)ㆍ위씨(魏氏)ㆍ한씨(韓氏)를 명하여 제후로 삼은 것은, 그 정사를 잘못한 것이 흡사하다. 그러므로 모두 이것을 가지고 시작하였으니, 성인의 필법(筆法)이 전후가 똑같은 것이다.
10. 공자께서 《춘추》를 다 지으시자, 공양고(公羊高)와 곡량숙(穀梁俶)이 그 의미를 해석하고 좌구명(左丘明)이 그 일을 기재하였다. 《공양전》과 《곡량전》은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에 가장 앞서서 나와 제일 먼저 《춘추》를 드러내었는데 반해, 《좌씨전》은 뒤에 나와서 학관(學官)에 나열되지 못하다가, 위(魏)나라와 진(晉)나라 이후로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좌씨전》을 숭상하는 바람에 《공양전》과 《곡량전》은 미약해지고 드러나지 못하더니 지금은 더욱 《공양전》과 《곡량전》을 전공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공양전》과 《곡량전》이 비록 혹 성인의 본래 뜻에 위배되는 것이 있기는 하나 대체로 문자가 간략하고 심오하며 의리가 순정(純正)하여 《좌씨전》의 허탄하고 과장됨에 결코 견줄 바가 아닌데도, 온 세상이 《좌씨전》을 높이고 《공양전》과 《곡양전》을 버리니, 이 또한 후세의 화려함을 숭상하고 실제를 힘쓰지 않는 병통일 것이다.
11. 영봉인(穎封人)이 고기를 먹지 않고 대답한 것은 짧은 말에 불과하지만 완곡하면서도 재미가 있어서 충분히 군주를 감동시켜 깨닫게 하였고, 후대의 위징(魏徵)의 헌릉(獻陵)의 대답은 이것을 모방하였으나 말이 자못 모가 드러나 있으니, 시대에 따른 인품을 분명히 볼 수 있다.
12. 춘추 시대에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고 간언(諫言)하고 진언(進言)한 말들은, 그 말의 옳고 그름을 막론하고 대체로 도리에 근거하고 실제가 없는 빈말이 아니며 분명하게 조리가 있어서 읽어보면 기뻐할 만하니, 성주(成周)의 문(文)을 숭상했던 정치를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전국 시대(戰國時代)에 이르면 그 말들이 괴이하고 허탄하고 교묘히 속이며, 남을 기만함으로써 이기기를 힘썼다. 전국 시대가 춘추 시대와 시기적으로 그리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닌데도 습속(習俗)의 변천이 마침내 여기에 이른 것은, 주(周)나라 왕실이 장차 멸망하려 함에 문(文)이 도리어 폐해를 낳아서 형세가 자연 이와 같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니, 개탄스러울 만하다.
13. 《주례(周禮)》에 〈동관(冬官)〉이 빠져 있었는데, 한(漢)나라가 건국되자 천금(千金)의 현상금을 내걸고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
지금 보충된 〈고공기(考工記)〉는 한나라 유자(儒者)들이 지은 것인데, 그 문장은 사람을 고무(鼓舞)시켜서 글을 읽다보면 정신이 왕성해짐을 느끼게 된다. 대저 고문(古文)은 법도(法度)가 없는 듯하면서도 절로 법도에 맞아서 도끼질과 저울질한 흔적이 없으니, 후세에서 따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유(韓愈)와 구양수(歐陽脩)의 문장이 훌륭하긴 하지만 문장을 얽어내고 안배(安排)한 흔적을 많이 볼 수 있으니, 이는 시대의 차이로 인한 것이다.
14. 십삼경(十三經)은 첫 번째가 《주례(周禮)》이니 한(漢)나라 정현(鄭玄)이 주(註)하였고, 두 번째가 《주역(周易)》이니 위(魏)나라 왕필(王弼)이 주하였고, 세 번째가 《모시(毛詩)》이니 정현이 주하였고, 네 번째가 《상서(尙書)》이니 한나라 공안국(孔安國)이 주하였고, 다섯 번째가 《논어》이니 위나라 하안(何晏)이 주하였고, 여섯 번째가 《맹자》이니 한나라 조기(趙岐)가 주하였고, 일곱 번째가 《춘추좌전(春秋左傳)》이니 진(晉)나라 두예(杜預)가 주하였고, 여덟 번째가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이니 한나라 하휴(何休)가 주하였고, 아홉 번째가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이니 진(晉)나라 범녕(范寗)이 주하였고, 열 번째가 《예기(禮記)》이니 정현이 주하였고, 열한 번째가 《의례(儀禮)》이니 정현이 주하였고, 열두 번째가 《이아(爾雅)》이니 진나라 곽박(郭璞)이 주하였고, 열세 번째가 《효경(孝經)》이니 당(唐)나라 현종(玄宗)이 주하였다.
주자(朱子)가 전주(傳註)를 지은 뒤로 여러 학설이 모두 폐기되었는데,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옛 주석들이 비록 엉성하고 잘못되고 뒤섞인 것들이 많지만 고대(古代)와 시간적으로 가깝고 해석한 바가 또한 자못 경전에 근거하였으니, 요컨대 전부 폐기해서는 안 된다.
내가 경서(經書)를 읽을 때에 집에 보관하고 있는 이러한 책들을 간혹 취하여 참고하여 증험해보니, 주자의 주설(註說)이 완벽하여 깨뜨릴 수 없는 것임을 더욱 믿게 되었고, 이들 주석서들 또한 다문(多聞)에 도움이 되어 이것들을 가지고 견해를 넓힐 수가 있었다.
15. 주자의 저술(著述)은 경서의 전주(箋註)를 제외하고는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이 가장 위대한 책이다. 《소학》은 명칭만 남고 책이 없어진 지 오래였는데, 주자가 고금의 여러 책들에서 채록하고 편마다 보충하여 절목(節目)이 모두 구비되고 규모가 광대하니, 비단 초학자들이 행하고 익힐 뿐 아니라 배우는 자들이 종신토록 체행하더라도 다할 수 없다.
《근사록》은 주자(周子 주돈이(周敦頤)), 정자(程子 정호(程顥)ㆍ정이(程頤)), 장자(張子 장재(張載))의 아름다운 말씀과 격언을 모아 분류하고 번갈아 기재하여 체(體)와 용(用)이 서로 포함되고 조리(條理)가 관통하니, 실로 사자(四子 사서(四書))의 우익(羽翼)이요 도학(道學)의 중요한 열쇠이다. 아! 주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위대한 편찬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내가 젊었을 적에 일찍이 《소학》을 배우고 익혔으나 힘써 익히지 못하였고, 적소(謫所)에 있으면서 또 읽어보았으나, 일이 촛불을 밝히는 것〔炳燭〕과 같아서 더더욱 말할 것이 없다.
《근사록》은 말년에 두세 번 읽어보았고 평상시에도 늘 보고 생각하였으나, 또한 입두처(入頭處)가 있지 않아 끝내 곤궁한 집에서 슬퍼하고 탄식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부끄러울 따름이다.
16. 《심경(心經)》은 진서산(眞西山)이 편집한 것인데, 이는 진서산이 조정에서 벼슬하고 있을 적에 옛 성현들의 심학(心學)에 관한 문자를 모아 한 책을 만들어 스스로 살피면서 힘쓸 자료로 삼은 것이다. 진서산은 또 고인(古人)들이 백성을 기르고 정사를 베풀었던 일을 모아서 《정경(政經)》을 만들었다.
이 두 책은 당시에 처음부터 세상에 함께 전해졌는데, 《심경》은 이미 명(明)나라 정민정(程敏政)의 주석을 거친데 반해, 《정경》은 후세의 수령(守令)들이 고을을 다스린 행적을 넘지 못하여 그리 볼만한 것이 없었으므로 결국 전해지지 못하고 《심경》만 전해졌으나, 또한 크게 유행되지는 못하였다.
퇴계(退溪) 선생께서 우연히 역려(逆旅 여관)에서 《심경》을 보고는, 기뻐하여 맨 먼저 이 책을 들어 표장(表章)하여 “사서(四書)와 《근사록》보다 못하지 않다.”라고 하셨다. 이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근사록》과 함께 나란히 일컬어졌으니, 이것이 전후로 이 책이 유행하고 침체하였던 대략의 내용이다.
이 책이 비록 늦게 나왔으나 심학공부(心學工夫)에 있어서 매우 요긴하니, 배우는 자가 어찌 여기에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7.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은 바로 인(仁)과 의(義)를 배우다가 잘못된 자들이니 반드시 자신이 이단(異端)을 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 로 인한 유폐가 무부무군(無父無君)에 이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맹자(孟子)께서 발본색원(拔本塞源)하는 계책을 세워서 온힘을 다하여 이들을 공격한 것이다.
정자(程子)가 “양주와 묵적은 본래 인의(仁義)를 배웠는데 후세 사람들은 인의를 배우지 않으니, 후세에 배우는 자들은 또 양주와 묵적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양주와 묵적의 잘못은 맹자의 지적을 받았으나, 후세 사람들은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 잘못을 알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참으로 옳다.
후세에 학문을 하면서 문로(門路)가 잘못되고 편벽된 자를 또한 어찌 다 셀 수 있겠는가.
18. 사마공(司馬公)의 기국과 도량은 범 문정(范文正)과 한위공(韓魏公)에게 미치지 못했으나, 남의 말을 수용하는 도량은 또한 이들만큼 컸다.
정자(程子)가 범요부(范堯夫)와 말씀하게 되면 열 건 중에 다만 서너 건만을 의논할 수 있을 뿐이었는데, 사마공과 말씀하게 되면 번번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시고는, “군실(君實 사마광의 자)은 남의 말을 잘 받아들일 줄 알아 귀에 거슬려하지 않으니, 이것이 가장 좋은 부분이다.”라고 하였다.
온공(溫公)은 성실하여 자신과 남과의 간격이 없었으므로 능히 이와 같았으니, 요부는 참으로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규모는 비록 좁았으나 요부 또한 자신의 허물을 듣기 좋아하였다.
옛 장수가 막 별세하였는데, 요부가 새로 부임하여 풍악을 울리고 장교들에게 크게 연향을 베풀었다는 말을 듣고, 정자가 이 일의 불가함을 지적하여 말씀하자, 요부는 곧바로 감탄하며 말하기를,
“선생이 아니면, 제가 어떻게 이러한 말씀을 듣겠습니까?”
하였다. 이 일이 《이정전서(二程全書)》에 실려 있으니, 요부와 같은 사람을 얻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19. “지금의 감사(監司)들은 대부분 주(州)ㆍ현(縣)과 일체가 되지 않고 오로지 수령들의 잘못을 사찰(伺察)하려고만 하는데, 이는 자신의 성심(誠心)을 다 바쳐서 수령들과 함께 백성들을 잘 다스리는 것만 못하다. 수령들에게 부족한 점이 있으면 가르칠 만한 것은 가르치고 독려할 만한 것은 독려하되, 명령을 듣지 않을 경우에는 이 가운데 심한 자 한두 명을 가려 제거함으로써 여러 사람들을 경계하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는 정자의 말씀이다. 나는 항상 이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여 전후로 관찰사가 되었을 적에 한결같이 이 방법을 사용하였다.
지금의 감사가 된 자들은 오로지 수령을 사찰하는 것을 능사로 여겨 돌아가며 서로 본받아서 곧바로 한 시대의 습속을 이루었으니, 저들은 아마도 정자의 말씀을 따를 수 없다고 여겨서 그런가보다.
20. 이천(伊川)이 인종(仁宗)에게 올린 글의 한 단락에 과거(科擧)의 일을 논하면서 말씀하기를,
“국가에서 선비를 선발함에 비록 여러 과(科)가 있으나, 현량방정과(賢良方正科)에서는 1년에 한 두 사람을 뽑을 뿐이고, 또 여기에서 얻은 사람들은 문견이 넓고 기억을 잘하는 선비에 불과합니다. 명경과(明經科)와 같은 등속은 오로지 읽고 암송만 하여 의리(義理)는 깨닫지 못하니, 더더욱 쓸 만한 자가 없습니다. 가장 많이 선발하는 과목은 진사과(進士科)인데 사부(詞賦)와 성률(聲律)을 제일로 삼고 있으나, 사부 가운데에는 천하를 다스릴 만한 방도가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사부를 배워서 과거에 급제하고 세월이 지나면 경상(卿相)의 지위에 이르니, 제왕의 도리와 교화의 근본을 저들이 일찍이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러한 지위에 있으면서 그러한 사업을 책임지게 한다면, 저들은 일찍이 그러한 것을 배운 적이 없어, 마치 북쪽 오랑캐 사람이 배를 조종하고 남쪽 월나라 나그네가 말을 모는 것과 같으니, 이들이 잘하기를 바라나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논한 과거의 병폐가 우리 과거의 병폐와 서로 흡사하다.
우리나라는 옛날에는 별과(別科)가 없고 다만 대비 식년과(大比式年科)만 있었을 뿐이었는데, 세월이 오래된 뒤에는 또한 폐단이 생기게 되었다.
식년과(式年科)는 으레 경서를 강하게 하고 제술을 겸하였으니 그 뜻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나, 말류(末流)에는 오로지 암송을 위주로 하였으므로 선비들이 대부분 글 뜻을 연구하지 않고 다만 입으로 읽는 것만 일삼고, 제술은 다른 사람에게 대신 시키면서도 이것을 숨기지 않으며 사람들 또한 일상적인 일로 보아 넘겼다.
이 때문에 명경과에 급제한 자들은 으레 대부분 문자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고 근래에 들어서는 더욱 심하다.
간혹 제술과의 별과를 치렀는데, 예전에는 글을 잘하는 자가 많이 급제하였으나, 근래에는 과거를 빈번하게 시행해서 선비들이 제술을 많이 하고 독서는 적게 하여 마침내 책을 열어보지 않고 오로지 선배들의 과작(科作)을 표절하여 과명(科名)을 얻고자 힘쓴다. 그러므로 식견이 어둡고 비루하며 원래 논할 만한 학술이 없다.
현량방정과(賢良方正科)는 조정암(趙靜菴)이 조정에 있을 당시에 한 번 시행했었는데, 기묘사화 뒤에 폐지되고 결국 다시는 시행되지 않았다. 오늘날에 이르러는 다만 식년과와 별과만 행해지고 있는데, 두 과거의 병폐가 자못 송(宋)나라 조정보다 더 심하니, 정자가 이것을 보신다면 마땅히 어떻게 생각하시겠는가. 개탄할 만하다.
21. 주 부자(朱夫子)께서 진준경(陳俊卿), 왕응신(汪應辰), 유정(留正), 조여우(趙汝愚) 등 여러 정승〔相〕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간절하게 시대를 근심하고 나라를 걱정하여 잊지 못하신 뜻이 말씀 밖에 넘쳐난다.
비록 자신이 낮은 관직과 말단 관료로 있을지라도 때에 따라 정승들을 타이른 것이 반복하고 격절(激切)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게 감탄하게 하니, 우리 유가(儒家)의 법문(法門)은 본래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낮은 지위에 처하고 아랫자리에 있다고 하여 국가의 존망을 월(越)나라 사람이 진(秦)나라의 존망을 보듯이 무심하게 여겨 침묵을 지키고 한마디 말도 없다면, 이는 곧 과감히 세상을 잊은 자이니 유자(儒者)가 아닌 것이다.
22. 정강(靖康) 이후로 송나라가 오랑캐인 금(金)나라에게 신(臣)이라 칭하였으나, 주자는 문자를 쓸 적마다 번번이 ‘이로(夷虜)와 융적(戎狄)’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신하를 칭한 것은 본래의 마음이 아니고 또한 저들이 오랑캐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지금 사람들은 문자에서 저들을 칭할 때마다 반드시 ‘적(敵)’이라 하고 ‘청(淸)’이라 하여 융로(戎虜)의 본래 칭호를 숨기고 쓰지 않는가? 아마도 이는 정축년(1637, 인조15)의 하성(下城)을 당연한 일로 여기고 기꺼이 신하로 복종하려해서 그런가 보다.
근래 모모 사람들의 문집을 보면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으니, 마음속으로 적이 놀랍고 비통하다. 주자의 책을 보다가 부질없이 이 글을 쓴다.
23. “자제(子弟)는 차라리 1년 내내 책을 읽지 않을지언정 하루라도 소인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子弟寧可終歲不讀書, 而不可一日近小人.〕”라는 것은 유 원성(劉元城)의 말이고, “장부(丈夫) 나이 50세이면 모름지기 행장(行藏)을 알아야 한다.〔丈夫五十年, 要須識行藏.〕”라는 것은 최덕부(崔德符)의 시이고, “사람을 쏘려거든 먼저 말을 쏘아야 하고 적을 잡으려면 먼저 왕을 잡아야 한다.〔射人先射馬, 擒賊先擒王.〕”라는 구절과 “사방의 이웃이 쟁기와 보습을 들고 나가니 구태여 우리 집까지 쟁기와 보습을 잡을 필요가 있으랴.〔四隣耒耜出, 何必吾家操?〕”라는 구절은 모두 두보(杜甫)의 시이고, “이 몸과 마음을 가지고 진찰(塵刹)을 받드는 것, 이를 일러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라 하네.〔將此身心奉塵刹, 是則名爲報佛恩.〕”라는 구절은 불경(佛經)의 말이고, “밝은 하늘이 회복되지 않으니 근심이 끝이 없네. 천추(千秋)에 반드시 돌아오는 것은 예로부터 떳떳한 도이니, 제자가 배움을 힘쓰면 하늘은 잊지 않으리라.〔皓天不復, 憂無疆也, 千秋必反, 古之常也, 弟子勉學, 天不忘也.〕”라는 것은 순자(荀子)의 말이고, “돌아가 편히 쉬시게나, 서강(西江)의 파랑(波浪)은 어느 때나 평탄해질까?〔歸來兮逍遙, 西江波浪何時平?〕”는 황산곡(黃山谷)의 사(詞)이고, “들불로 태워도 다 타지 않아 봄바람 불면 또다시 생기네.〔野火燒不盡, 春風吹又生.〕”는 백낙천(白樂天)의 시이다.
혹 이는 외가(外家)의 말이고 혹 이는 한만한 시구(詩句)이지만, 주자가 인용하여 비유할 적에 각각 그 사리에 합당하였다. 간혹 지은 사람의 말뜻과 전혀 상반된 것이 있는데, 이는 그 뜻이 단장취의(斷章取義)에 있는 것이다.
24. 《주자대전(朱子大全)》 한 책은 실로 의리(義理)의 창고인데, 이 가운데에 편지글 한 종류에는 심술(心術)의 은미한 사이로부터 사물을 응접하는 절도에 이르기까지 갖춰지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 글을 보면 주자의 가르침을 직접 받는 듯해서 더더욱 사람으로 하여금 분발하여 흥기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퇴계 선생께서 이 중에서 긴요하고 간절한 말씀을 뽑아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10책을 만들었으며, 또 서(序)ㆍ기(記)ㆍ봉사(封事) 등 여러 편도 큰 의리에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는데, 우복(愚伏) 정공(鄭公)이 이 중에서 선별하고 또 편지글을 보태어 《주문작해(朱文酌海)》 8책을 만들었고, 우암(尤菴) 선생이 이 두 책을 보유(補遺)하여 4책을 만들었으니, 배우는 자들이 만약 《주자대전》 전부를 독파하기 어렵다면, 우선 이 두 책에 나아가서 연구한다면 또한 종신토록 수용하여도 다하지 못할 것이다.
유사(儒士)들이 힘을 써야 할 것은 사서(四書) 이외에는 이 《주자대전》이 마땅히 급선무가 되어야 할 것이니, 만약 이것을 읽지 않는다면 비록 구류(九流)와 백가(百家)를 널리 섭렵하더라도 끝내 마음이 막히고 식견이 고루해짐을 면치 못할 것이니,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나도 평소 이 책을 존중하고 받들어서 서(書)와 봉사(封事)를 여러 차례 읽고 암송하였으나 독실하게 공부하지는 못하였는데, 지금 이미 늙은 나이가 되었으니 그저 망양(望洋)의 탄식이 절절할 뿐이다.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부끄러워 땀이 등을 적시곤 한다.
25. 내가 젊었을 때 최창대(崔昌大)와 한원(翰苑)의 동료가 되었는데, 창대가 주자(朱子)의 학문이 취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함부로 말하였다. 내가 매우 놀라 꾸짖으며 말하기를,
“자네가 감히 이런 악담을 하니, 어찌 하늘이 두렵지도 않은가.”
하였다. 창대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대 또한 세속의 논의에 빠져 있네. 자네는 한번 주자의 태극(太極)에 관한 문답(問答)을 보게나. 이는 다만 장사꾼의 말버릇이지, 어찌 조금이라도 함양(涵養) 공부가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하였다. 나는 더욱 놀라서 그와 다시는 말하지 않았다.
그 뒤에 《사변록(思辨錄)》과 《예기유편(禮記類編)》의 일이 계속하여 나왔는데, 이는 평소 주자를 경시하였으므로 주자의 주해(註解)를 보고 망녕되이 하자를 지적할 생각을 내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한편으로는 애처롭다.
또 우옹(尤翁 우암)이 매양 주자를 존숭(尊崇)함을 위주로 하였으므로, 우옹을 미워하는 자들이 주자에게 분노를 옮겨서 모든 주자의 말씀과 관계되는 것이면 반드시 배척할 것을 생각하였다. 수백 년 전 중국 사람인 주자가 오늘의 시비에 무슨 상관이 있기에 이처럼 저들에게 분노와 시기를 당한단 말인가. 또한 가소롭다.
우옹은 일찍이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와 《주문작해(朱文酌海)》 두 책을 합하여 한 책을 만들었는데, 숙종(肅宗) 말년에 이 책을 진강(進講)할 적에 정승 이자빈(李子賓)이 임수간(任守幹)과 함께 옥당관(玉堂官)이 되어 입시(入侍)하였고, 판서(判書) 이인엽(李寅燁)이 경연관(經筵官)으로 들어갔다.
임수간은 주자의 한만(閒漫)한 서찰(書札)들을 굳이 법연(法筵)에서 진강할 필요가 없다고 극언하였는데, 이 정승이 그렇지 않다고 말하자 임수간이 또 등등한 기세로 변론하여 배척하였다.
이 판서가 임수간의 말을 지지하여 두 사람이 교대로 발언해서 모두 이 정승을 배척하니, 이 정승은 평소 담론을 잘하지 못하였으므로 이들을 당해내지 못하고 이를 마음속에 품은 채 물러나면서 스스로 탄식하기를 ‘주자는 바로 천하의 주자이시니, 내가 사사로이 할 수 있는 분이 아닌데, 두 사람이 눈을 부릅뜨고 나를 배척하니, 내가 어찌 피곤하지 않겠는가.’ 하였으니, 여기에서 또한 시배(時輩 소론)들이 주자를 높이지 않는 일단(一端)을 볼 수 있다.
26. 학문을 하는 요체는 독서를 지극히 정밀하게 하는데 있으니, 만약 깊이 연구하지 않고 대충 읽고 지나가면 비록 천 번을 읽더라도 무슨 효험과 이익이 있겠는가. 《주자어류》에 독서법(讀書法)을 매우 자세히 논하였으니 상고하여 볼 수 있다.
내가 젊었을 적에 농암(農巖)이 독서하시는 것을 보니 소리를 길게 빼어 여운을 남겨 두면서 반복하여 영탄(詠歎)하였다. 이로써 한 편을 읽는데 매우 오래 걸리셨으니, 책을 읽는 정밀함을 볼 수 있었다. 이와 같이 한 뒤에야 학문의 득력(得力)을 바랄 수 있는 것이다.
27. 《주자어류》에 이르기를 “선비는 먼저 과거(科擧)와 독서(讀書)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이 가볍고 어느 것이 중요한 지를 분별하여야 하니, 만약 독서에 7푼의 힘을 기울이고 과거에 3푼의 힘을 기울이면 그래도 괜찮지만, 만약 과거에 7푼의 힘을 기울이고 독서에 3푼의 힘을 기울이면 장래에 반드시 과거 공부만 성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생각은 과거에만 전념하게 되기 때문에 늙도록 전혀 힘을 다할 수 없게 된다.”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지극한 말이다.
이른바 ‘독서’라는 것은 쓸데없는 책을 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성현(聖賢)의 책을 읽어서 마음을 다하여 묻고 배움을 말한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한가로운 책마저도 읽지 않고 다만 앞 사람들의 과문(科文)만 모아 기록하고 표절하고 모방하여 과거에 응시하는 자료로 삼으며, 심한 경우에는 혹은 과장(科場)에서 대신 짓게 하고 혹은 시험관과 서로 은밀히 통하여 농간을 부리니, 말할 만한 것이 없다.
28. 《주자어류》에 이르기를, “명분과 의리가 바르지 않으면 큰일을 행할 수 없고 할 만한 일이 없으니 떠나감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명분과 의리가 바르지 않는데 큰일을 한 자가 있지 않으니, 강제로 큰일을 하고자 하면 비단 큰일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에도 구차히 영합한다는 비판이 있을 것이니, 어찌 옳겠는가.
난세에 조정에서 벼슬하는 자들은 주자의 이 말씀을 항상 가슴속에 간직하여 언제 어디서나 기억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29. 정자(程子)의 여러 문인들 중에 훗날 선학(禪學)에 물든 사람이 많았다. 《주자어류》에서 이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이천(伊川)의 문하 중에 상채(上蔡)는 선문(禪門)으로부터 와서 그의 말에도 또한 잘못됨이 있다.”라고 하였다. 또 “사상채(謝上蔡), 유정부(游定夫), 양구산(楊龜山)의 무리들은 마지막에 모두 선학(禪學)으로 들어갔으니, 필시 이것은 정 선생(程先生)이 당초에 고원(高遠)한 경지를 말씀해주자, 저들이 그 일단(一段)만을 보고 하면(下面)의 착실(着實)한 공부는 부족하게 생각하여 폐단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유정부, 양구산, 사상채 등 세 군자는 처음에 모두 선(禪)을 배웠는데, 뒤에도 이러한 습속이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배운 분들이 대부분 선(禪)에 빠졌으니, 유 선생(游先生)의 학문은 대부분 선학이었다.”라고 하였다.
또 “구산(龜山)이 아직 이천(伊川)을 만나보지 않았던 소년 시절에 먼저 《장자(莊子)》와 《열자(列子)》 등의 문자를 보았으므로 훗날 비록 이천을 만났으나 이 생각에 익숙해져서 자신도 모르게 노장(老莊)의 사상이 때로 표출되었는데, 이것이 유정부는 더욱 심하였으며, 나중소(羅仲素)는 때로 뜻이 또한 여기에 있었다. 화정(和靖)은 호구산(虎丘山)에 있을 적에 매양 아침에 일어나서 부처님께 정례(頂禮)하였으며, 장사숙(張思叔)의 시(詩)는 모두 선(禪)과 같으니 그가 애초에 행자(行者) 출신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 “여여숙(呂與叔)은 후일에 또한 불서(佛書)를 보았다.”라고 하였다.
또 주자의 《잡학변(雜學辨)》에 〈여씨대학해(呂氏大學解)〉를 논변하여 이르기를, “여씨(呂氏)의 학문이 가장 바름에 가까웠지만 부도(浮屠)와 노자의 말에 미혹되었기 때문에 종국에는 출입(出入)의 폐단이 없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또 주자의 〈기의(記疑)〉에 이르기를, “우연히 잡서(雜書) 한 편을 얻었는데, 누가 기록한 것인지 알지 못하나 의심이 없지 않기에 인하여 변론한다.”라고 하고, 또 이르기를, “이는 모두 근세 선학(禪學)의 학풍을 익히 듣고서 사모하여 배우는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서로 이끌어 속이는 지경에 빠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살펴보건대 이 잡서는 왕신백(王信伯)의 글이다.
주자는 또 〈장무구중용해(張無垢中庸解)〉에서 장무구의 《중용설(中庸說)》을 변석(辯析)하였는데, 장무구의 설은 더욱 괴이하여 전체가 선가(禪家)의 화두(話頭)이다. 이러한 것들을 모두 주자가 철저히 해부하고 변석하여 미진함이 없으니, 진실로 하나의 통쾌한 일이다.
장무구는 비록 정자의 문인은 아니었으나 양구산(楊龜山)에게서 배워 스스로 얻은 것이 있다고 여긴 자였다. 구산의 무리에 또 소자장(蕭子莊), 이서산(李西山), 진묵당(陳默堂)이 있으니, 이들은 모두 선(禪)을 말하였고, 구산이 죽자 이서산은 뒤에 불경의 소(疏)를 추천한 일이 있었다.
호 문정(胡文定)은 또 참선을 하였는데, 호 문정 또한 구산을 종유(從游)한 자로, 모두 《주자어류》에 보인다.
정자의 문인 가운데 구산이 가장 장수하였다. 그러므로 유파(流波)가 더욱 멀리 퍼져 우리 유학(儒學)에 폐해가 됨이 더욱 심하였다.
30. 구산이 70이 넘은 나이로 채경(蔡京)에게 더럽힘을 당했으니, 그의 출처에 대해 어쩔 수 없이 뒷말이 있게 되었다. 채경은 만년에 점점 사세(事勢)가 낭패에 빠짐을 깨닫고는 깊이 근심하였다. 그의 종자(從子)인 응지(應之)가 찾아와 뵙자, 채경이 쓸 만한 인재가 있는 지를 물었다. 응지가 놀라며 말하기를,
“지금 천하의 인재는 모두 태사(太師 채경)의 손에서 양성되고 있는데, 제가 어떤 사람이라고 감히 이 질문을 감당하겠습니까.”
라고 하니, 채경이 말하기를,
“아니다. 내 생각해보니, 눈앞에 있는 자들은 다 면전에서 아첨하여 관직을 얻는 사람들이다. 산림 사이에 인재가 있는 듯하니, 이 사람들에 대해 알고 싶다.”
라고 하였다. 응지가 마침내 말하기를,
“복주(福州)에 자가 유직(柔直)인 장학(張觷)이라는 자가 있어 포부가 구차하지 않은데, 불러올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채경은 이에 장학을 불러 숙객(塾客 글방의 스승)으로 삼았는데, 장학은 사도(師道)로써 스스로 높이고 제생(諸生)들을 엄격히 대하니, 제생들이 견디기 어려워하였다.
하루는 장학이 제생들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고 말하기를,
“너희들은 일찍이 달리기를 배웠느냐?”
하고 물었다. 제생들이 말하기를,
“저희는 평소 선배들과 장자(長者)들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다만 천천히 걸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라고 하였다. 장학이 말하기를,
“천하가 너의 아버지에 의해 파괴되었다. 조만간 도적 떼가 일어나서 맨 먼저 너의 집에 이를 것이니, 너희들이 만약 달리기를 배운다면 위급한 상황에서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제생들이 크게 놀라 자기 아버지에게 달려가 아뢰기를,
“선생님이 갑자기 정신이 이처럼 이상해지셨습니다.”
라고 하였다. 채경이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알 바가 아니다.”
라고 하고 곧바로 서원(書院 글방)으로 들어가서 장학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 인하여 대책을 묻자, 장학이 마침내 구산을 천거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구산이 황제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이 내용이 《주자어류》에 자세히 보이는데, 장학의 사적(事迹) 또한 기이하다.
31. 주자와 동시대 사람인 육자정(陸子靜) 형제는 선학을 주로 하였고, 여동래(呂東萊) 형제는 사학(史學)을 주로 하였고, 진동보(陳同父)는 공리(功利)의 설을 주로 하였는데, 주자가 이미 통렬하게 이들을 공격하였으니, 서찰 가운데 육자정, 진동보, 여동래, 유청지(劉淸之)와 문답한 내용에서 볼 수 있고, 《주자어류》에 보이는 것 또한 많다. 배우는 자가 이것을 자세히 살핀다면 또한 식견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32. 주자는 여조겸과 진량을 육구연보다 더욱 우려하여 말씀하기를
“백공(伯恭 여조겸)의 문인 중에 동보(同父 진량)의 학설을 말하는 자가 있으니, 두 학파가 이질적인 것을 넘어 하나로 합쳐진 것은 괴이할 만하다.”
라고 하였고, 또
“강서(江西 육구연)의 학문은 오직 선학(禪學)이고, 절강(浙江 여조겸과 진량)의 학문은 오로지 공리(功利)이다. 선학은 후대의 배우는 자들이 모색하여 한 층을 올라가면 더 이상 모색할 것이 없어서 스스로 돌아가지만, 공리 같은 경우는 배우는 자가 익혀서 곧 효과를 볼 수 있으니, 이는 매우 근심스러울 만하다.”
라고 하였으니, 주자가 세도(世道)에 대해 우려한 것이 지극하고 간절하다고 할 만하다.
33. 진동보가 사마온공(司馬溫公 사마광)을 비난하고 배척하면서 말하기를,
“낙양(洛陽)에 살면서 《통감(通鑑)》만 이해(理解)하였을 뿐 원우(元祐) 연간에 나가서 한 일은 미진하였으니, 이 때문에 후래의 화(禍)를 당한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주자는 반박하여 말씀하기를,
“온공(溫公)이 한 일은, 지금 다만 옳은가 옳지 않은가와 또 마땅히 해야 할 일인가 마땅히 해서는 안 되는 일인가를 논할 수 있을 뿐이니, 어떻게 온공이 뒷날의 화를 불러들였다고 말하는가. 이는 순전히 이해(利害)만 따지는 논리이다. 온공이 진실로 처음부터 대책을 강구(講究)함에는 미진한 점이 있었으나, 그 시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만약 온공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온공은 바로 천지를 돌려놓아 국세를 일신한〔旋乾轉坤〕 공(功)이 있으니, 온공의 이 마음은 천지에 질정할 수 있고 유명(幽明)을 통하게 할 수 있다. 어찌 용이하게 미칠 수 있겠는가.
후대의 여미중(呂微仲), 범요부(范堯夫)가 조정(調停)의 설(說)을 주장하여 소인(小人)을 겸해 등용하였으니, 이 때문에 뒷날의 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잘못을 조정의 설에 돌리지 않고 도리어 원우(元祐)의 정치에 돌린다. 만약 진실로 군자와 소인이 함께 자리할 수 없음을 안다면 어떻게 감싸고 보호함을 바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으니, 주자의 이 말씀은 명확하다고 할 만하다. 용천(龍川 진량)의 언론이 매양 이해(利害)에 나아가 말하였으므로 그의 말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34. 《주자어류》에 이르기를,
“민(閩) 땅의 수재(守宰 지방 수령)인 방숙규(方叔珪)가 편지를 보내와서 말하기를, ‘본조(本朝)의 인물이 매우 많으면서도 공업(功業)이 한(漢)나라와 당(唐)나라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다만 소인을 제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라고 하자, 선생께서 말씀하기를, ‘이 무슨 의논인가. 소인을 어찌 제거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본래 이는 합할 수 없는 물건이다. 향기 나는 풀〔薰〕과 악취 나는 풀〔蕕〕을 한 그릇에 담아두면 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악취가 나는 법이니, 만약 소인을 제거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순(舜) 임금이 당시에 사흉(四兇)을 제거한 것이 잘못이 된다.’ 하셨다”
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유정(留正)에게 준 편지와도 같은 뜻이다.
지금 사람들의 소견은 대체로 방숙규 무리의 뜻일 뿐이니, 세도(世道)가 어찌 여기에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35. 《주자어류》에,
“선배들이 잡다한 것을 기록한 책자에 기록되어 있기를 ‘이중화(李仲和)의 할아버지가 포 효숙(包孝肅)과 함께 절에서 독서하고 있을 적에 어떤 부자가 초대를 하자, 두 분은 핑계를 대고 가지 않았다. 후일에 그 부자가 다시 같이 식사하자고 매우 간곡하게 청하니, 이공(李公)은 가려고 하였으나 포공(包公)은 정색하면서 말하기를, 「저들은 부자이니, 우리가 망녕되이 저들과 교유하면 어찌 뒷날의 누가 되지 않겠는가.」 하고 끝내 가지 않았다.’ 하였으니, 선배들이 마음을 확고히 하고 남을 대하는 엄격함이 이와 같았다.”
라고 하였다.
내가 이를 통해 생각해보니, 지금의 재상이나 유명한 관리와 여항(閭巷) 사이에서 부자라고 이름난 자들은 모두 거의 친척보다 더 서로 긴밀하게 결탁하였으니, 포공의 행동과 비교해 본다면 어떠한가. 선비는 마땅히 포공처럼 힘써서 절대로 이런 등속의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옳다.
36. 사서(史書)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편년체(編年體)이니, 좌씨(左氏 좌구명(左丘明))의 《춘추좌전(春秋左傳)》과 사마온공(司馬溫公)의 《자치통감(資治通鑑)》 - 주(周)나라 위열왕(威烈王)으로부터 오대(五代)에 이른다. - 과 송(宋)나라 강지(江贄)가 또 《자치통감》을 요약하여 지은 《통감절요(通鑑節要)》와 명(明)나라 장광계(張光啓)가 지은 《절요속편(節要續編)》 - 송(宋)나라와 원(元)나라 역사이니, 세속에서는 《송감(宋鑑)》이라고 한다. - 과 진건(陳建)의 《황명통기(皇明通紀)》 - 천계(天啓) 정묘년까지이다. - 와 왕여남(王汝南)의 《명기편년(明紀編年)》 - 《통기(通紀)》에 비하여 대체로 간략하나, 홍광(弘光) 을유년에 이르니, 수말(首末)이 자못 완비된 듯하다. - 과 서거정(徐居正)의 《동국통감(東國通鑑)》 - 신라(新羅),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고려(高麗)의 4대를 기록하였다. - 이 있다.
주 부자(朱夫子)께서 공자(孔子)의 춘추필법(春秋筆法)을 따라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지었는데, 편년체 가운데 강(綱)을 세우고 목(目)을 나누었으니, 이는 또 하나의 예(例)이다.
송(宋)나라와 원(元)나라의 경우는, 우리나라 김우옹(金宇顒)의 《송원강목(宋元綱目)》이 있고, 명(明)나라는 이현석(李玄錫)의 《명강목(明綱目)》이 있고, 고려는 시남(市南) 유계(兪棨)의 《여사제강(麗史提綱)》이 있으나, 신라ㆍ고구려ㆍ백제 등 삼국(三國)이 빠졌었는데, 근래에 임상덕(林象德)이 지은 《동사회강(東史會綱)》에 모두 실려 있으니, 이들은 모두 《통감강목》의 의례(義例)를 따른 것이다. 이현석과 임상덕이 편수한 것은 간행이 되지 않아 내가 아직 눈으로 보지 못하였다.
두 번째는 기전체(紀傳體)이니,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와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와 진수(陳壽)의《삼국지(三國志)》, 당태종(唐太宗)의 《진서(晉書)》와 심약(沈約)의 《송서(宋書)》, 소자현(蕭子顯)의 《남제서(南齊書)》와 요사렴(姚思廉)의 《양서(梁書)》ㆍ《진서(陳書)》, 위수(魏收)의 《위서(魏書)》와 이백약(李百藥)의 《북제서(北齊書)》, 영호덕분(令狐德棻)의 《후주서(後周書)》와 이연수(李延壽)의 《남사(南史)》ㆍ《북사(北史)》, 위징(魏徵)의 《수서(隋書)》와 송기(宋祁)의 《당서(唐書)》와 구양수(歐陽脩)의 《오대사(五代史)》이니, 이것이 십칠사(十七史)가 된다.
또 태태(脫脫)의 《송사(宋史)》와 송렴(宋濂)의 《원사(元史)》가 있는데, 모두 우리 집에 보관되어 있으나, 게혜사(揭徯斯)의 《요사(遼史)》ㆍ《금사(金史)》만은 보관되어 있지 않다.
《명사(明史)》는 듣자하니, 저 청나라 사람들이 한창 찬수하고 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하교원(何喬遠)의 《명산장(名山藏)》과 추의(鄒漪)의 《계정야승(啓禎野乘)》을 통해 대략 고증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사(高麗史)》가 있다.
세 번째는 기사체(紀事體)이니, 기사라는 것은 한 가지 일의 시작과 끝을 기록한 것이다. 송(宋)나라 원추(袁樞)가 처음으로 《통감기사본말(通鑑紀事本末)》을 저작하였는데 주(周) 위열왕(威烈王)으로부터 기록하여 오대(五代)에 이르렀고, 명(明)나라 심조양(沈朝陽)이 《기사본말전편(紀事本末前編)》을 지었으니 반고씨(盤古氏)로부터 기록하여 위열왕 앞까지 이르렀고, 명(明)나라 진방첨(陳邦瞻)이 지은 《송원기사본말(宋元紀事本末)》과 청(淸)나라 곡응태(谷應泰)가 지은 《명기사본말(明紀事本末)》이 있고, 근래에 정승 서문중(徐文重)이 《조야기문(朝野記聞)》을 지어서 국조(國朝)의 일을 기록하였으니, 또한 기사본말(紀事本末)의 예를 따른 것이다.
37. 선진(先秦) 이전의 제자(諸子)를 개괄하여 들어보면 총 25가(家)이다. 노자(老子), 장자(莊子), 열자(列子), 순자(荀子), 관자(管子), 안자(晏子), 묵자(墨子), 등자(鄧子), 문자(文子), 윤문자(尹文子), 관윤자(關尹子), 육자(鬻子), 갈관자(鶡冠子), 자화자(子華子), 항창자(亢倉子), 귀곡자(鬼谷子), 공손자(公孫子), 상자(商子), 사마자(司馬子), 손자(孫子), 오자(吳子), 울료자(尉繚子), 한자(韓子), 여자(呂子), 굴자(屈子)이다.
이 밖에 책을 저술하였으나 후세에 전해지지 못한 자 또한 반드시 많을 것이다.
38. 노자(老子)의 글은 깊고 은미하고 심오하여 제자(諸子)들이 미칠 바가 아니다. 내가 어렸을 적에 《노자》를 몹시 좋아하여 자못 힘들여 연구하였으나, 뜻이 황홀하여 끝내 알 수 없었다. 이에 읽기를 중지하고 《장자》를 읽었는데, 장자의 글은 《노자》의 주각(註脚)이었다. 《고사(古史)》에 이르기를 “노자는 용(龍)과 같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사람을 가지고 말한 것인데, 나는 ‘비단 노자는 사람이 용과 같을 뿐만 아니라 그 글 또한 용과 같아서 거의 《능엄경(楞嚴經)》과 서로 비슷하니, 이 모두 천하의 지극한 글들이다.’라고 생각한다.
39. 노자의 학문은 무(無)를 종(宗)으로 삼는다. 그러나 무(無)로는 천하와 국가와 집안을 다스릴 수 없으니, 이는 장차 한 세상을 들어서 공환(空幻)의 세계로 만들 뿐이다. 그러나 그 은미한 뜻은 바로 여기에 이르지 않는다. 노자는 주(周)나라 때 문(文)이 지나쳐 질(質)이 사라져 권모술수가 갖가지로 많이 나오는 것을 싫어하였기 때문에 이 글을 써서 이를 바로잡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노자의 학문을 하는 자의 사업 또한 볼 만한 것이 많이 있으니, 지금 모두 열거할 수는 없으나 한(漢)나라의 조참(曹參)과 송(宋)나라의 이항(李沆)과 같은 분들은 재상이 되자 이 방도를 써서 또한 충분히 정무를 다스리고 나라를 보존할 수 있었으니, 가볍게 여길 수 없다.
우리 조선조의 신현옹(申玄翁), 장계곡(張谿谷) 역시 이 학문을 공부한 분들이다.
40. 《열자(列子)》 8편은 그 정밀한 말과 오묘한 뜻이 《남화경(南華經)》과 백중(伯仲)이 된다. 《남화경》에 실려 있는 것이 간간이 이 속에 끼여 있는데 〈황제(黃帝)〉 한 편에 더욱 많으니, 아마도 후인들이 견강부회하여 이 책을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남화경》의 〈설검(說劍)〉ㆍ〈도척(盜跖)〉 등의 편은 이미 후세 사람들로부터 위작이라는 의심을 많이 받고 있으니, 《열자》에 기재된 내용들을 후인들이 추후에 편찬하여 《남화경》의 〈설검〉ㆍ〈도척〉 등의 편 가운데에 집어넣어 기재한 것인지 알 수 없다.
41. 《순자(荀子)》 한 책은 〈성악(性惡)〉 등의 편을 제외하면 의논(議論)이 순정(純正)해서 격언(格言)과 명리(名理)가 많으니, 제자백가 가운데 가장 도에 가깝다. 또 문사(文辭)가 풍성하고 화창하며 넉넉하고 중후하니, 많이 읽어 득력(得力)한다면 마땅히 세상의 뛰어난 문장가가 될 것이다. 창려(昌黎)의 문장이 모두 여기에서 나왔다.
42. 관자(管子)의 책은 세상을 경륜하는 위대한 문자로, 문장이 마치 구슬이 흩어지며 길게 쏟아지는 것과 같아서 기교를 견줄 데가 없고 붓 끝이 묘하게 고무(鼓舞)함을 또 말로 형용할 수 없으니, 이것을 읽을 때마다 항상 쉽게 다 읽어버릴까 두려워하게 된다.
이오(夷吾)는 바로 패자(霸者)의 보좌로 진실로 한 시대의 인걸이며, 글 또한 남보다 걸출하다.
안자(晏子)의 책은 《안자춘추(晏子春秋)》라고 부르는데, 대부분 군주를 풍간(諷諫)한 말로 의논이 순수하고 간곡하며 문장이 전아하니, 또한 그의 사람됨을 상상할 수 있다.
43. 묵자(墨子)의 글은 물 흐르듯 유창하고, 등자(鄧子)의 글은 간략하고 질박하며, 문자(文子)의 글은 간절하면서 깊고, 윤문자(尹文子)의 글은 학식이 넓고, 관윤자(關尹子)의 글은 기이하고 예스러우며, 육자(鬻子)의 글은 특별히 새로운 말이 없고 문장 또한 그다지 통창하고 왕성한 면이 없는 듯하다. 갈관자(鶡冠子)의 책은 비록 후세 사람의 위작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중간 중간에 기이한 말이 많다.
자화자(子華子)의 책에는 안자(晏子)라고 칭한 것이 많으니, 아마도 안자와 같은 시대의 사람인가 보다. 그 책 서문에 “조간자(趙簡子)의 가신(家臣)이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안자와 동시대의 사람이 아닌 듯한데, 글이 자못 훌륭하다.
항창자(亢倉子)는 바로 장주(莊周)가 말한 노담(老聃)의 제자인 경상초(庚桑楚)란 자이니, 그 글이 또한 기이하다.
귀곡자(鬼谷子)는 바로 전국 시대 임기응변의 선구(先驅)이고 노자의 유파이다. 그 글이 빼어나고 아름다우며 종횡무진하여 예측할 수 없다. 소진(蘇秦)과 장의(張儀)가 그의 글을 얻어 유세(游說)로 발신(發身)하여 높은 지위를 얻었다.
공손자(公孫子)는 귀곡의 한 유파에서 다소 변하여 견백 동이설(堅白同異說)에 의탁하여 이름을 떨치니, 혜시(惠施)의 무리이다. 그 말이 막히고 통하지 않으니, 《장자》의 이른바 ‘남에게 이기는 데만 정신을 써서 도리의 학술이 없다.〔存雄無術〕’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니, 이는 진실로 말할 것이 못된다.
상자(商子)는 비록 성품이 가혹하고 엄격했으나 부국강병의 술수에 있어서 또한 얻은 바가 있으니, 그 글이 그의 성품과 똑같다.
이상을 총괄해 보면 귀곡자가 가장 뛰어나고, 상군(商君 상자)이 다음이며, 공손자가 가장 뒤떨어진다.
44. 《사마자(司馬子)》, 《손자(孫子)》, 《오자(吳子)》, 《울료자(尉繚子)》는 병가(兵家)의 책이다. 이들의 글은 손무(孫武)가 가장 뛰어나고 오기(吳起)와 울료(尉繚)가 다음이다. 《사마법(司馬法)》 또한 간략하고 간절하여 즐겨 읽을 만하다.
45. 《한비자(韓非子)》의 〈세난(說難)〉과 〈고분(孤憤)〉 등의 편은 《귀곡자》에서 조금 변한 것인데, 인정에 간절하고 일의 중요한 기틀에 깊은 식견이 있으며, 문장 또한 다채롭고 변화가 많아서 다독(多讀)할 만하다.
46. 《여람(呂覽 여씨춘추)》의 글은 침중하고 깊이가 있으며 정밀하고 오묘하다. 이 책은 여불위(呂不韋) 자신이 지은 것이 아니라 천금(千金)의 현상(懸賞)을 내걸고 사방의 인사(人士)를 구하여, 이들로 하여금 저마다 자신의 소견을 가지고 글을 짓게 하고서 이 중에 기이한 글과 빼어난 말을 모아 합하여 한 책으로 만든 것이니, 이 때문에 본래 볼 만하다.
47. 굴원(屈原)과 송옥(宋玉)의 사부(詞賦)는, 여항(閭巷)의 가요를 모은 《시경》으로부터 한 번 변하여 천고(千古) 사가(詞家)의 종조(宗祖)가 되었다.
정의(情意)나 흥(興)을 의탁하는 경우에는 비록 황당하고 올바르지 못한 말이 적지 않으나, 충의(忠義)에서 나오는 분노와 비분강개함이 있어 저절로 성정(性情)의 바름을 볼 수 있고, 사구(詞句)는 굳세고 빛나서 또 시가(詩歌)의 적통이 될 만하다.
내가 젊은 날에 이를 매우 좋아하여 자못 힘써 읽고 외웠는데, 재주가 둔하여 끝내 얻은 바가 없다.
48. 제자(諸子) 이외 선진(先秦) 이전의 책으로는 《가어(家語)》, 《국어(國語)》, 《전국책(戰國策)》, 《황제소문(黃帝素問)》, 《음부경(陰符經)》, 황석공(黃石公)의 《소서(素書)》ㆍ《삼략(三略)》, 강태공(姜太公)의 《육도(六鞱)》, 《삼분서(三墳書)》, 《월절서(越絶書)》, 《급총주서(汲冢周書)》, 《죽서기년(竹書紀年)》, 《목천자전(穆天子傳)》이고, 한(漢)ㆍ위(魏) 시대에는 경방(京房)의 《경방역전(京房易傳)》, 초공(焦贛)의 《역림(易林)》, 육가(陸賈)의 《신어(新語)》, 가의(賈誼)의 《신서(新書)》, 유향(劉向)의 《신서(新序)》ㆍ《설원(說苑)》,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의 《홍열해(鴻烈解)》, 동방삭(東方朔)의 《신이경(神異經)》ㆍ《십주기(十洲記)》, 공부(孔鮒)의 《공총자(孔叢子)》ㆍ《소이아(小爾雅)》, 환관(桓寬)의 《염철론(鹽鐵論)》, 신배(申培)의 《시설(詩說)》, 한영(韓嬰)의 《한시외전(韓詩外傳)》, 대덕(戴德)의 《대대례기(大戴禮記)》, 동중서(董仲舒)의 《춘추번로(春秋繁露)》, 조엽(趙曄)의 《오월춘추(吳越春秋)》, 양웅(揚雄)의 《태현경(太玄經)》ㆍ《법언(法言)》ㆍ《방언(方言)》, 유흠(劉歆)의 《서경잡기(西京雜記)》, 반고(班固)의 《백호통(白虎通)》ㆍ《한무내전(漢武內傳)》, 영현(伶玄)의 《비연외전(飛燕外傳)》, 위백양(魏伯陽)의 《참동계(參同契)》,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 황헌(黃憲)의 《외사(外史)》, 순열(荀悅)의 《신감(申鑒)》, 곽헌(郭憲)의 《동명기(洞冥記)》, 응소(應劭)의 《풍속통(風俗通)》, 상흠(桑欽)의 《수경(水經)》, 석신(石申)의 《성경(星經)》, 왕충(王充)의 《논형(論衡)》, 유희(劉煕)의 《석명(釋名)》, 마융(馬融)의 《충경(忠經)》, 채옹(蔡邕)의 《독단(獨斷)》, 제갈량(諸葛亮)의 《제갈량심서(諸葛亮心書)》, 무명씨(亡名氏)의 《잡사비신(雜事秘辛)》ㆍ《삼보황도(三輔黃圖)》, 왕찬(王粲)의 《영웅기(英雄記)》, 서간(徐幹)의 《중론(中論)》으로 모두 50여종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반고(班固)의 《한서(漢書)》는 별도로 사실(事實)을 기록한 책이므로 여기에서 나열하지 않는다.
여러 책들이 각각 순수한 것과 잡박한 것, 진짜와 가짜의 차이가 있으나, 요컨대 옛일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추구하려는 자가 채집할 만하고 나 역시 대강 한 두 차례 모두 열람해 보았다.
대략 가감하고 취사하여 한 책을 만들어서, 아가위〔楂〕와 배〔梨〕 등 각각 다른 맛을 나열함에 보탬이 되고자 하였으나 미처 책을 완성하지 못하였는데, 지금은 늙고 게을러서 할 수가 없다.
49. 누동(婁東) 사람 장부(張溥)는 명(明)나라 사람인 듯한데, 한(漢)ㆍ위(魏)와 육조(六朝) 사람들의 문집을 모아서 한 편의 거질(巨帙)을 만들었다.
서한(西漢)은 9명의 문집이니 가의(賈誼)ㆍ사마상여(司馬相如)ㆍ동중서(董仲舒)ㆍ동방삭(東方朔)ㆍ저소손(褚少孫)ㆍ왕포(王褒)ㆍ유향(劉向)ㆍ양웅(揚雄)ㆍ유흠(劉歆)이고, 동한(東漢)은 11명의 문집이니 풍연(馮衍)ㆍ반고(班固)ㆍ최인(崔駰)ㆍ장형(張衡)ㆍ이우(李尤)ㆍ마융(馬融)ㆍ순욱(荀彧)ㆍ채옹(蔡邕)ㆍ왕일(王逸)ㆍ공융(孔融)ㆍ제갈량(諸葛亮)이고, 위(魏)나라는 12명의 문집이니 조조(曹操)ㆍ조비(曹丕)ㆍ조식(曹植)ㆍ진림(陳琳)ㆍ왕찬(王粲)ㆍ완우(阮瑀)ㆍ유정(劉楨)ㆍ응창(應瑒)ㆍ응거(應璩)ㆍ완적(阮籍)ㆍ혜강(嵇康)ㆍ종회(鍾會)이고, 진(晉)나라는 22명의 문집이니 두예(杜預)ㆍ순욱(荀勗)ㆍ부현(傅玄)ㆍ장화(張華)ㆍ손초(孫楚)ㆍ지우(摯虞)ㆍ속석(束晳)ㆍ하후담(夏侯湛)ㆍ반악(潘岳)ㆍ부함(傅咸)ㆍ반니(潘尼)ㆍ육기(陸機)ㆍ육운(陸雲)ㆍ성공수(成公綏)ㆍ장재(張載)ㆍ장협(張協)ㆍ유곤(劉琨)ㆍ곽박(郭璞)ㆍ왕희지(王羲之)ㆍ왕헌지(王獻之)ㆍ손작(孫綽)ㆍ도잠(陶潛)이고, 송(宋)나라는 8명이니 하승천(何承天)ㆍ부량(傅亮)ㆍ사영운(謝靈運)ㆍ안연지(顔延之)ㆍ포조(鮑照)ㆍ원숙(袁淑)ㆍ사혜련(謝惠連)ㆍ사장(謝莊)이고, 제(齊)나라는 6명이니 소자량(蕭子良)ㆍ왕검(王儉)ㆍ왕융(王融)ㆍ사조(謝朓)ㆍ장융(張融)ㆍ공치규(孔稚圭)이고, 양(梁)나라는 19명이니 소연(蕭衍)ㆍ소통(蕭統)ㆍ소강(蕭綱)ㆍ소역(蕭繹)ㆍ강엄(江淹)ㆍ심약(沈約)ㆍ도홍경(陶弘景)ㆍ구지(丘遲)ㆍ임방(任昉)ㆍ왕승유(王僧孺)ㆍ육수(陸倕)ㆍ유효표(劉孝標)ㆍ왕균(王筠)ㆍ유효작(劉孝綽)ㆍ유잠(劉潛)ㆍ유효위(劉孝威)ㆍ유견오(庾肩吾)ㆍ하손(何遜)ㆍ오균(吳均)이고, 진(陳)나라는 5명이니 진숙보(陳叔寶)ㆍ서릉(徐陵)ㆍ심형(沈炯)ㆍ강총(江總)ㆍ장정견(張正見)이고, 북위(北魏)는 2명이니 고윤(高允)ㆍ온자승(溫子昇)이고, 북제(北齊)는 2명이니 형소(邢卲)ㆍ위수(魏收)이고, 북주(北周)는 2명이니 유신(庾信)ㆍ왕포(王褒)이고, 수(隋)는 5명이니 양광(楊廣)ㆍ노사도(盧思道)ㆍ이덕림(李德林)ㆍ우홍(牛弘)ㆍ설도형(薛道衡)으로, 모두 합하여 103명이 된다.
기이한 문장과 뛰어난 문채가 나올수록 더욱 새로우며 눈길 가는 곳마다 모두 주옥처럼 아름다워 응접할 겨를이 없으니, 정신과 기운을 소생시키고 시름과 적막함을 깨뜨릴 수 있는 것으로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내가 적소에 있을 적에 매양 경서(經書)를 송독하는 여가에 이 책을 유식(游息)의 자료로 삼아서, 나그네의 회포를 떨쳐 버리는데 힘입은 것이 진실로 많았다.
양(梁)나라 소명(昭明)이 별도로 《문선(文選)》을 만들었는데, 이는 이 책의 대전(大全)이 된다. 이 책에서는 다만 팔조(八朝)의 문인(文人)과 재자(才子)들 중에 지은 바가 드물고 적어서 한 문집을 이룰 수 없는 것은 모두 기록하지 않았는데, 이는 흠이 될 만하니 빠진 부분은 《문선》에서 따로 볼 수 있다.
50. 진(晉)나라 사람들은 호방하고 광달(曠達)함을 즐기고 청담(淸談)을 좋아하여 그 폐단이 국가(國家)에까지 미쳤다. 오호(五胡)가 중화(中華)를 어지럽혀 벼슬아치들이 도망가 흩어지니, 도홍경(陶弘景)의 시에 이른바 “이보(夷甫)는 허황하기만 하고 평숙(平叔)은 앉아서 공리를 논하니, 소양전(昭陽殿)이 마침내 선우(單于)의 궁궐이 될 줄을 어찌 알았으랴.〔夷甫任散誕, 平叔坐論空, 豈悟昭陽殿, 遂作單于宮?〕”라는 것이 이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담론과 풍격(風格)을 문자로 쓰면 담아(澹雅)하여 기뻐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는 유의경(劉義慶)의 《세설신어(世說新語)》를 시인과 묵객(墨客)들이 매우 좋아하게 된 이유이다. 이것을 가지고 당시를 생각해 보면, 저들을 직접 보고 저들의 말을 듣는 자들이 어찌 경도(傾倒)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명나라 사람이 그 번잡한 것을 산삭하고 기이한 것을 보충하여 한 책을 만들었으니, 진실로 예림(藝林)의 진귀한 볼거리이다. 명나라 사신인 주지번(朱之蕃)이 가지고 와서 유서경(柳西坰)에게 주어 마침내 우리나라 문장가들이 기뻐하면서 보게 되었다.
51. 명나라 사람 북해(北海) 풍유눌(馮惟訥)이 고시(古詩)를 모았는데, 공자께서 시를 산삭(刪削)한 뒤로부터 진(秦)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10권이고, 한나라가 10권, 위나라가 9권, 오(吳)나라가 1권, 진(晉)나라가 24권, 송(宋)나라가 11권, 제(齊)나라가 8권, 양(梁)나라가 34권, 진(陳)나라가 10권, 북위(北魏)가 2권, 북제(北齊)가 2권, 북주(北周)가 8권, 수(隋)나라가 10권이며, 외집(外集) 4권은 신선과 진인(眞人)과 귀신의 작품들을 모았다.
또 통론(統論)과 품조(品藻), 잡해(雜解)와 변증(辨證) 등을 채록한 12권을 합하여 156권을 만들고 이름을 《고시기(古詩紀)》라 하였는데, 당나라 이전의 시(詩)ㆍ가요(歌謠)ㆍ언(諺)이 모두 이 안에 실렸으니, 실로 고시의 부고(府庫)이다.
또 오기(吳琦)란 자가 편집한 《전당시기(全唐詩紀)》가 있는데, 여기에 실린 시가 모두 수천, 수만 수이다. 선(仙)ㆍ불(佛)ㆍ신귀시(神鬼詩)로 외집(外集)을 만들었는데, 이보다 먼저 초당(初唐)ㆍ성당(盛唐)의 시 170권을 판각하였으니, 모두 나의 서고(書庫)에 있다.
다만 호원서(胡元瑞)의 《시수(詩藪)》에 “풍여언(馮汝言)의 《고시기》는 양경(兩京)으로부터 육대(六代)에 이르기까지 구비하여 기록하지 않음이 없고, 계민부(計敏夫)의 《당시기(唐詩紀)》는 수나라 말기로부터 양나라 초기에 이르기까지 겸하여 수록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른바 풍여언은 바로 유눌(惟訥)이다.
계민부의 《당시기》를 오기의 《시기(詩紀)》와 비교하면 어느 것이 선후(先後)가 되는지 알지 못하겠으나, 대저 오기와 계민부 두 사람은 모두 집록(輯錄)한 저술이 있는데, 계민부가 집록한 것을 나는 아직 보지 못하였고, 오기가 집록하여 편각한 것은 성당(盛唐)에 그쳤으니 흠이 될 만하다.
뒤에 《전당시》 한 질을 샀는데, 바로 청(淸)나라 강희(康煕) 44년(1705)에 한림시독(翰林侍讀) 반종률(潘從律)과 팽정구(彭定求) 등이 대교(對校)하고 찬집(纂輯)한 것이다. 오랑캐 황제가 서문을 지어 판각을 하였다. 여기에 실린 시는 모두 4만 8천 9백여 수로 정리하여 9백 권을 만들었는데, 당나라 초기로부터 오대에 이르기까지 짧은 구(句)와 작은 운(韻)도 채록하지 않음이 없으니, 진실로 당시(唐詩)의 대전(大全)이다.
52. 당나라 문장은 한유(韓愈)ㆍ유종원(柳宗元) 이외에 이고(李翺)ㆍ손초(孫樵)ㆍ이한(李翰)ㆍ이관(李觀)ㆍ황보식(皇甫湜)ㆍ원결(元結)ㆍ두목(杜牧)ㆍ원진(元稹)ㆍ백거이(白居易) 등이 뛰어나다.
또 당나라 초기에는 왕발(王勃)ㆍ낙빈왕(駱賓王)ㆍ양형(楊炯)ㆍ위징(魏徵)ㆍ진자앙(陳子昂)ㆍ소정(蘇頲)ㆍ장열(張說)ㆍ장구령(張九齡)ㆍ적인걸(狄仁傑)ㆍ요숭(姚崇)ㆍ최융(崔融)ㆍ서언백(徐彦伯)ㆍ유지기(劉知幾)ㆍ여재(呂才)ㆍ공장(孔璋)ㆍ위관(韋瓘)ㆍ임지송(林之松)이 있다.
성당(盛唐) 이후는 왕적(王績)ㆍ왕진(王縉)ㆍ왕유(王維)ㆍ이옹(李邕)ㆍ이백(李白)ㆍ두보(杜甫)ㆍ고적(高適)ㆍ장위(張謂)ㆍ이화(李華)ㆍ장순(張巡)ㆍ안진경(顔眞卿)ㆍ유태(劉蛻)ㆍ소정(蕭定)ㆍ양숙(梁肅)ㆍ독고급(獨孤及)ㆍ독고욱(獨孤郁)ㆍ독고림(獨孤霖)ㆍ왕사원(王士源)ㆍ상곤(常衮)ㆍ양염(楊炎)ㆍ권덕여(權德輿)ㆍ최우보(崔祐甫)ㆍ육지(陸贄)ㆍ유식(柳識)ㆍ배도(裵度)ㆍ우승유(牛僧孺)ㆍ이덕유(李德裕)ㆍ이신(李紳)ㆍ유우석(劉禹錫)ㆍ단문창(段文昌)ㆍ왕애(王藹)ㆍ오무릉(吳武陵)ㆍ양식(楊植)ㆍ정안(程晏)ㆍ주열(朱閱)ㆍ성균(盛均)ㆍ고참(高參)ㆍ이발(李渤)ㆍ이감(李甘)ㆍ교담(喬潭)ㆍ서원여(舒元輿)ㆍ가속(賈餗)ㆍ유가(劉軻)ㆍ범전정(范傳正)ㆍ심택(沈宅)ㆍ진암(陳黯)ㆍ손합(孫郃)ㆍ진월석(陳越石)ㆍ장욱(張彧)ㆍ이강(李綱)ㆍ노원보(盧元輔)ㆍ위응부(韋應符)ㆍ육희성(陸希聲)ㆍ풍용지(馮用之)ㆍ구양첨(歐陽詹)ㆍ구양거(歐陽秬)ㆍ유암부(劉巖夫)ㆍ유항(柳伉)ㆍ이상은(李商隱)ㆍ피일휴(皮日休)ㆍ육귀몽(陸龜蒙)ㆍ단성식(段成式)ㆍ배휴(裵休)ㆍ배연한(裵延翰)ㆍ나은(羅隱)ㆍ사공도(司空圖)가 있으며, 제왕(帝王)으로는 태종(太宗)ㆍ덕종(德宗)이 모두 문장으로 뛰어났다.
이들은 모두 볼만한 편장(篇章)이 있는데 왕발(王勃)ㆍ낙빈왕(駱賓王)의 변려문(騈儷文)과 소정(蘇頲)ㆍ장열(張說)의 제책문(制冊文)과 선공(宣公)의 주의(奏議)는 또 이 무리 가운데 특출난 것이다.
53. 명나라 사람들은 송나라 시를 업신여기고 배척하여 전혀 송나라 시를 모아서 기록하지 않았는데, 근래에 들어 점점 명나라 사람들이 한나라와 당나라를 헛되이 사모하는 풍습을 싫어하여 마침내 송시(宋詩)를 표창(表彰)하게 되었으니, 이는 진실로 성쇠(盛衰)와 승제(乘除)의 이치이다.
문(文)에 있어서도 그러하여, 이들은 글을 지을 적에 오로지 평이함을 숭상해서 이반룡(李攀龍)ㆍ왕세정(王世貞)의 유파가 지금 한 사람도 남아있는 자가 없으니, 구부러진 것을 바로잡으려 함이 너무 심하여 시문이 모두 밋밋하고 골격이 약해서 사람의 뜻을 고무시키고 감동시키는 부분이 거의 없다.
강희(康煕) 신해년(1671) 연간에 오지진(吳之振)이란 자가 송나라 사람의 시집을 두루 취하여 전집(全集)을 거의 기록하였으니, 권질(卷帙)이 매우 많다. 이 가운데에서 작가의 지은 시가 대부분 실전되고 다만 5, 6수만 전하여 문집이 만들어지지 못한 것들을 모아 별도로 한 편을 만들어 전집(全集)의 뒤에 붙였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 이것을 보지 못하였다.
책을 완성하고 난 뒤에 또 스스로 서문을 지었는데, 이 서문에 이르기를,
“가정(嘉靖)과 융경(隆慶) 이후로 시가(詩家)를 말할 적에 당나라를 높이고 송나라를 배척하여 송나라 사람의 문집을 가지고 장독 뚜껑으로 쓰고 벽을 발라서, 버리기를 마치 힘을 다하지 못할 것처럼 하였다.
송나라 사람의 시는 당나라에서 변화되어 자신의 생각으로 지어졌는데, 가죽과 털이 다 떨어져 나가고 정신만 홀로 보존되니, 알지 못하는 자는 진부하다고 여긴다. 후인들이 무식해서 강구(講求)하는데 게으르고, 공부를 하지 않으면서도 지위가 높아지는 것을 좋아하여, 여러 사람들이 부(腐)라는 한 글자를 받들어 전체의 송나라 시를 폐기하였다.
그러므로 지금 송나라를 배척하는 자는 모두 송시를 보지 못한 자들이고, 비록 보았다 하더라도 그 원류를 분명히 알지 못하는 자들이니, 이러한 병통은 송나라를 배척하려는 것보다는 당나라를 높이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높인 것은 가정ㆍ융경 이후에 사람들이 말하는 당나라이고, 본래 있었던 당ㆍ송 사람들의 당나라가 아니다. 당나라가 본래의 당나라가 아니라면 송나라도 본래의 송나라가 아니니, 진부하다고 하는 것이 진실로 당연하다.
송나라는 당나라와 시대가 가까워서 송나라 사람이 당나라에 힘을 쓰는 것이 더욱 정밀하고 전일하였다. 지금 졸렬하고 거칠며 표절한 말로써 옛사람을 능멸하고 자신을 추켜올리고자 하는데, 이는 아버지를 쫓아내고 할아버지를 아버지 사당에 모시는 것과 같으니, 진실로 다만 송나라 사람들의 박장대소의 대상이 될 뿐만이 아니요, 당나라 사람들에게도 ‘다른 종류의 제사에 흠향하지 아니하여 제수를 토해낸다.’는 것이다.
지금 당나라를 높이는 자들은 눈으로 미처 당시의 전체를 보지 못하고 가정과 융경 사이의 고루한 근본에 집착하니, 이는 모두 송나라 사람들이 이미 진설했던 추구(芻狗)로 그 머리와 허리를 밟아서 땔감으로 삼아 불을 땐 지 오래되었는데, 이를 다시 취하여 대광주리에 넣어서 화려하게 수를 놓아 장식해서, 옛말을 그대로 답습하여 천 명의 입이 일제히 부르짖고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부(腐)라는 것이다.”
하였다. 부패한 자는 부패하지 않은 것을 부패했다고 하니, 이는 미친 나라 사람이 미치지 않은 것을 미쳤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또 양대학(楊大鶴)이란 자 역시 강희(康煕) 때의 사람으로 육방옹(陸放翁)의 시초(詩抄)에 서문을 썼는데, 여기에 이르기를,
“시(詩)라는 것은 성정(性情)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사물의 시초와 근원이 되어 신명(神明)처럼 변화하니, 시대를 가지고 구할 수가 없고 다른 사람을 통해 대신 빌릴 수도 없는 것이다. 반드시 구구하게 시의 규모와 체재와 격식에 구애되어 분촌(分寸)을 비교하고 헤아려서, 이로써 한 세대에 높이 추앙하고 일가(一家)로 명성을 날리는 도구로 삼는다면, 어찌 한계지어 스스로 작게 여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창명(李滄溟 이반룡)이 당나라 이후의 시를 읽지 않았고, 왕엄주(王弇州 왕세정)가 그 말에 동의한 뒤에 마침내 감히 송시(宋詩)를 말하는 자가 없었으니, 송나라가 남쪽으로 천도(遷都)한 이후는 또 논할 것도 없다.”
라고 하였다.
오지진의 서문은 왕세정과 이반룡의 주장을 노골적으로 배척하기에 온 힘을 다하였고, 양대학의 서문은 말은 비록 완곡하나 왕세정과 이반룡을 배척한 것이니, 그 논한 바가 진실로 식견이 있다 하겠다.
54. 송대(宋代)의 산문(散文)의 경우, 구양수(歐陽脩)ㆍ소순(蘇洵)ㆍ소식(蘇軾)ㆍ소철(蘇轍)ㆍ증공(曾鞏)ㆍ왕안석(王安石) 등 6대가의 산문이 모곤(茅坤)의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鈔)》에 수록된 이외에는 기록을 남겨 책으로 만든 것을 보지 못하였다. 여동래(呂東萊)의 《송문감(宋文鑑)》에 선별된 것이 매우 적은데, 송나라가 남쪽으로 천도한 이후는 또 넣지 않았다.
송나라 사람의 유집(遺集)으로 내 집에 소장하고 있는 것 중에 《이정전서(二程全書)》ㆍ《주자대전(朱子大全)》ㆍ《주자어류(朱子語類)》ㆍ《이정유서(二程遺書)》ㆍ《주염계집(周濂溪集)》ㆍ《양구산집(楊龜山集)》ㆍ《장남헌집(張南軒集)》ㆍ《황면재집(黃勉齋集)》ㆍ《진서산집(眞西山集)》ㆍ《육상산집(陸象山集)》은 모두 성리학에 관한 책들이고, 《범문정집(范文正集)》ㆍ《범충선집(范忠宣集)》ㆍ《사마온공집(司馬溫公集)》ㆍ《이충정주의(李忠定奏議)》는 경륜(經綸)에 관한 책들이고, 《종충간집(宗忠簡集)》ㆍ《악무목집(岳武穆集)》ㆍ《문문산집(文文山集)》은 절의(節義)에 관한 책들이고, 《황산곡집(黃山谷集)》ㆍ《진회해집(秦淮海集)》ㆍ《육방옹집(陸放翁集)》은 문장가들의 책이다.
또 위재(韋齋) 주송(朱松)의 문집 세 권과 옥란(玉瀾) 주고(朱橰)의 문집 1권이 있으며, 장횡거(張橫渠)의 문집, 윤화정(尹和靖)의 문집, 나예장(羅豫章)의 문집, 이연평(李延平)의 문집, 여동래(呂東萊)의 문집, 진극재(陳克齋)의 문집, 한위공(韓魏公)의 문집, 석조래(石徂徠)의 문집, 사첩산(謝疊山)의 문집은 장백행(張伯行)이 편집한 《이학전서(理學全書)》 가운데 들어있다. 장백행은 강희(康煕) 때 중승(中丞)의 벼슬을 하였는데, 한(漢)ㆍ당(唐) 이후로부터 근래의 청나라에 이르기까지에 지어진 책 중에 다소 도학에 가까운 것들을 모아서 한 책을 만들어 무려 1백 3, 40권에 이르니, 가장 보기 좋다.
55. 원호문(元好問) 유지(裕之)는 금(金)나라 말기 사람인데, 사학(詞學)이 가장 풍부하고 아름다워서 마땅히 금원(金源)의 거벽(巨擘)이 된다. 금나라가 망하자 원(元)나라에 벼슬하지 않으면서 많은 논저(論著)를 지었다.
원호문이 편집한 《중주집(中州集)》 10권은 모두 금나라 시를 채록한 것으로, 시인이 총 2백 55명인데 매 시인마다 반드시 소전(小傳)을 지어 시의 머리에 두었으며, 시는 모두 1천 9백 2십 수이다. 또 사(詞)를 편집하여 1권을 만들고는 이름을 《중주악부(中州樂府)》라고 하였는데, 작자가 36명이고 사(詞)는 1백 8십 수가 된다. 금나라 한 왕조의 시편 가운데 그래도 작자(作者)라는 말에 부합될 만한 것은 모두 이 편에 수록되어 있다.
대체로 금나라의 시는 문학적 자질이 송나라에는 미치지 못하나, 사장(詞場)의 문채(文彩)는 원나라의 선구가 될 만하다.
56. 강희제(康熙帝) 때 사람인 고사립(顧嗣立)이 원나라 백가(百家)의 시를 엮어 10권을 만들었는데, 끝 편에 속집이 뒤이어 나올 것이라고 주를 달았으나 간행되지 못하였고, 그 나머지는 모두 문집 전체를 수록하였으니, 산삭한 것이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원유산(元遺山 원호문)의 《중주집》의 예를 따라, 시인마다 각각 소전을 만들어 시의 머리에 두었으나, 시편이 적어서 문집을 만들 수 없는 것은 기록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끝 편에 이어 문집을 만들지 못한 자들을 실으려 하였는데 미처 간행되지 못한 것일 것이다.
원나라의 시는 대체로 풍부하고 화려하고 농염하며 재사(才思)가 난만하고 꾸밈이 눈에 가득하여, 송나라 사람의 노련하고 꿋꿋하고 우뚝하고 돌올(突兀)한 자태가 전혀 없으니, 시대마다 숭상(崇尙)함이 변천되는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으며, 흥망성쇠의 이치가 또한 그러한 것이다.
57. 원나라는 산문(散文)이 시보다 뛰어나다. 원나라 사람 소천작(蘇天爵)이 《원문류(元文類)》를 편집하여 시와 산문의 모든 체가 각각 구비되었다. 다만 이 책은 바로 원나라 사람이 직접 선별한 것으로, 소천작 이후로부터 원나라가 망하기 전까지 지어진 여러 작품들은 빠지고 기록되지 못할 수밖에 없었으니, 이는 흠이 될 만하다.
원나라 사람의 문집은 세상에 전해진 것이 많지 않아서, 내 집에 소장하고 있는 것은 다만 《오초려전집(吳草廬全集)》이 있을 뿐이고, 《허노재집(許魯齋集)》ㆍ《웅물헌집(熊勿軒集)》은 《이학전서》 가운데에 들어있는데, 허형(許衡)ㆍ오징(吳澄)ㆍ웅화(熊禾)는 모두 학문에 종사한 자들이다. 원나라는 호로(胡虜)들이 중국에 들어와 주인 노릇을 한 나라이지만, 성리학과 문사(文詞)로 세상에 이름을 떨친 자가 우뚝하고 당당하게 이어졌으니, 이로써 송나라의 뒤를 잇고 명나라의 문운(文運)을 연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성리학과 문사가 조화를 이루어 찬란할 수 있었던 것이다.
58. 명시(明詩)를 선별한 자 또한 많은데, 이 중에 전목재(錢牧齋)의 《열조시집(列朝詩集)》이 마땅히 하나의 큰 책이 된다. 원말(元末)과 명초(明初)로부터 명나라 말엽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시편들을 수집하여 다 기록하지 않음이 없으며, 승려와 도사와 향렴(香奩)과 외복(外服)의 작품들까지 사방으로 모아서 또한 빠뜨린 것이 없으니, 진실로 명시(明詩)의 부고(府庫)이다.
다만 목재(牧齋)가 평소에 왕세정과 이반룡의 시학(詩學)을 좋아하지 않아서 공격함이 지나치게 혹독하였다. 그러므로 북지(北地)와 창명(滄溟 이반룡) 및 엄원(弇園 왕세정)의 여러 작품들의 경우, 수록된 것이 매우 적다. 이분들의 시편이 매우 풍부하니, 그 가운데 나아가 필요한 것만 뽑더라도 어찌 그리 유명하지 않는 자의 작품 한두 편에 미치지 못했겠는가. 그러나 그리 유명하지 않은 자의 작품은 지나치게 많이 수록하면서 이분들의 작품은 가혹하게 도태시켰으니, 또한 치우쳐서 공평하지 못한 듯하다.
강희 때 사람인 주이준(朱彝尊)이란 자 또한 명나라 시를 수집하여 하나의 큰 편을 만들고서 이름을 《명시종(明詩綜)》이라 하였는데, 이 책 또한 널리 찾아 모두 채록하였으니 완비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다만 무명 시인들의 작품은 비록 한 두 편이라도 모두 수록하였으나, 대가(大家)의 이름난 문집에 있는 많은 시편은 수록한 것이 매우 적으니, 이것은 미진한 점이다.
또 진자룡(陳子龍)이 편집한 《명시선(明詩選)》과 종백경(鍾伯敬)이 편집한 《명시귀(明詩歸)》는 혹 정밀함에 힘써 시를 널리 채집하는 일은 부족하였고, 혹은 간략함에 힘써 편협한 데에서 잘못되었으니, 모두 완벽하다고 할 수 없다.
59. 원씨(元氏 원호문)의 《중주집》은 시인마다 소전(小傳)을 만들었으니, 이는 이전에 시를 선별하는 자들이 하지 않았던 일로 당시에 역사를 시에 붙였다고 일컬었는데, 인물의 출처를 상고할 수 있으니 참으로 좋은 예이다. 전목재(錢牧齋)의 《열조시집(列朝詩集)》과 근래의 《원시선(元詩選)》 또한 이 예를 따랐다.
《열조시집》의 소전은 더욱 명나라 3백 년간의 인물들의 사적에 관계되어, 이들이 즐거워하고 웃고 성내고 욕하는 자태를 완연히 보는 듯하게 형용하고, 또한 이것에 근거하여 사전(史傳)의 옳고 그름을 고증할 수 있으니, 이는 실로 명나라 유사(遺事)를 찾고자 하는 자라면 보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내가 일찍이 소전만을 초록(抄錄)하여 별도로 한 책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베껴 내는 것도 힘이 들어 오래도록 결행하지 못하였고, 식암(息菴)이 초록하여 책을 만들었다고 들었으나 보지는 못했다.
뒤에 연경에 갔다가 우연히 이 소전을 별도로 초록하여 간행한 책을 보고 서둘러 구매하여 왔으니, 지금부터는 별도로 등사하는 수고로움이 없게 되었다.
60. 명나라 글을 등사하여 한 책을 만든 것으로 진인석(陳仁錫)의 《명문기상(明文奇賞)》이 있는데, 이것이 가장 규모가 큰 책이다. 또 《십대가문선(十大家文選)》과 《명문영화(明文英華)》가 있으니, 이 두 책은 간략하여 한 시대의 제작(制作)을 상고하여 살펴보기에는 부족하다.
《명문기상》에 우리나라 사신이 명나라 종백(宗伯 예부 상서)에게 올린 두 편의 글이 실려 있는데, 모두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에 관한 것이다. 이때 상사(上使 정사(正使))인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의 이름으로 이 글들을 올렸기 때문에 글의 저자가 황강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위의 한 수는 질정관(質正官) 최간이(崔簡易)의 작품이고, 아래 한 수는 서장관(書狀官) 고제봉(高霽峰)의 작품이다. 두 작품에 모두 관주(貫珠)와 비점(批點)을 가하였는데, 위의 작품을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설명하는 자가 이르기를 ‘조선 사람들은 일찍이 송나라 사람들의 글을 읽지 않았으므로 그 글이 고아(古雅)하다.’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간이가 본래 후세의 글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그 글이 고아할 뿐이요, 조선 사람이 다 그러한 것은 아니다. 조선 사람은 송나라 글에 익숙하고 고문에 익숙하지 못한 것이 병통이었는데 중국 사람은 도리어 이와 같이 알고 있으니, 이는 지나치게 인정했다고 이를 만하다. 한 번 웃는다.
61. 명(明)나라 문집으로 세상에 간행된 것들이 수레에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리고 방에 쌓으면 들보에 닿을 정도로〔汗牛充棟〕 너무 많아서 다 논할 수가 없으나 대략 네 파(派)가 있으니, 우선 나의 집에 보관된 것을 가지고 말해보겠다.
방손지(方遜志)와 유 성의(劉誠意), 송잠계(宋潛溪)는 의리(義理)와 학술(學術)로 문장을 표현한 자들이니 이들이 한 파가 된다. 이 중에 방손지의 문장이 더욱 거침없고 성대하여 명나라 3백 년의 문장가 중에 여기에 미칠 만한 자가 전혀 없고 잠계(潛溪)는 그 아류이고 성의는 또 잠계의 짝이 될 만하다.
양명(陽明)과 백사(白沙)는 이단의 학문으로 문장을 지었는데, 이 중 양명의 글이 더욱 맑고 시원하니, 신학(新學)은 마땅히 배척해야 하나 문장에 있어서는 취할 만하다. 이탁오(李卓吾)의 기궤(奇詭)함에 이르러서는 양명에서 말미암아 위로 올라가 더욱 제멋대로 자신의 뜻을 펼친 자이니, 이 세 대가의 문집이 마땅히 한 파가 되어야 한다.
공동(空同)ㆍ대복(大復)ㆍ엄주(弇州)ㆍ창명(滄溟)은 선진(先秦)의 제자(諸子)들을 배워 새로운 격식을 만든 자들이니, 마땅히 한 파가 되어야 한다.
녹문(鹿門)ㆍ형천(荊川)ㆍ승암(升菴)ㆍ진천(震川)ㆍ목재(牧齋)는 옛것을 배워 말이 몹시 순해서 너무 심한 짓을 하지 않았다. 이 가운데에 승암의 화려하고 다채로운 문장과 목재의 호탕함은 점차 본색과 달라졌으나 진실로 마땅히 이 파에 속해야 하고, 왕세정ㆍ이반룡의 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서문장(徐文長)과 원중랑(袁中郞)은 또 방계(傍系)로 나와서 지혜와 이익을 으뜸으로 삼았는데, 이 두 사람 또한 왕세정ㆍ이반룡의 파가 될 수 없으니, 마땅히 이 파에 소속되어야 한다.
이서애(李西涯)ㆍ장태악(張太岳)ㆍ섭 창하(葉蒼霞)는 조정에서 세상을 경륜하는 글을 지었으니 또 마땅히 한 파가 되어야 한다. 이 중에 서애의 풍부하고 해박함은 또한 문장가의 종장(宗匠)이 될 만하다.
기타 문목 허국(文穆許國)ㆍ양성 근학안(兩城靳學顔)ㆍ구산 왕형(緱山王衡)은 자질구레하여 말할 만한 것이 없다. 고황제(高皇帝)의 문집에 실린 글은 대부분 조령(詔令) 등의 글이고 여기에 또 시율(詩律) 약간 수가 있는데, 대체적으로 기력이 혼후하여 진실로 창업(創業)한 영명한 군주의 글이다.
또 방손지(方遜志)ㆍ우 충숙(于忠肅)ㆍ양초산(楊椒山)의 글을 합하여 한 책(筴)을 만들고 《삼이인집(三異人集)》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오로지 절의(節義)가 뛰어난 인물들의 문집만을 모은 것이다.
《이학전서(理學全書)》에 들어있는 것은 조월천(曹月川)ㆍ설경헌(薛敬軒)ㆍ호경재(胡敬齋)ㆍ나정암(羅整菴)과 해강봉(海剛峰)의 문집들인데 조월천ㆍ설경헌ㆍ호경재ㆍ나정암은 모두 성리학자이고 해공(海公)은 비록 강직함으로 이름난 자이나 또한 도학(道學)을 숭상하였다.
62. 청나라 사람 고시정(顧施禎)이 자기 나라의 시를 선별하고 《성조시선(盛朝詩選)》이라 이름하였고, 또 위헌(魏憲)이 청나라 시를 선별하면서 끝 편에 대부분 자기의 시를 수록하고 《백명가시(百名家詩)》라고 이름하였다.
《백명가시》의 첫머리에 〈승평가연시(昇平嘉宴詩)〉를 수록하였는데, 이는 바로 강희(康煕) 임술년(1682) 정월에 청나라 황제와 여러 신하들이 백량대(柏梁臺)의 고사를 따라 칠언시를 연구(聯句)로 지은 것이다. 청나라 황제가 지은 시의 서문이 맨 앞에 수록되어 있다.
63. 청나라 문인들의 글을 많이 보지는 못했으나, 대체로 시문의 문세가 유약한데, 이는 이미 내가 앞에서 논하였다. 청나라 문집으로 내 서고에 있는 것은 우통(尤侗)의 《서당집(西堂集)》, 송락(宋犖)의 《서피집(西陂集)》, 왕사진(王士禛)의 《잠미집(蠶尾集)》, 서가염(徐嘉炎)의 《포경재집(抱經齋集)》이고, 또 《우재집(愚齋集)》,《가서집(稼書集)》은 《이학전서》 가운데에 들어 있다.
우통은 재주가 풍부하고 능력이 넉넉하여 저술(著述)이 매우 많고, 송락이 그 다음인데 송락은 갑술생이니 식암(息菴)과 동갑이다. 부친 송권(宋權)이 명나라 조정의 도어사(都御史)로 있다가 청나라에 항복하여 죽은 다음에 문강(文康)이란 시호를 받았고, 송락 또한 청나라 조정에 벼슬하여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다가 나이 들어 치사(致仕)하였는데, 그가 스스로 쓴 연보(年譜)는 78세에서 그쳤으나 어느 해에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송락의 경우 아들 5~6명이 모두 높은 벼슬에 올랐고 손자 또한 매우 많았으며 나이와 관작이 모두 높았으니, 진실로 세상에 드문 좋은 운명이었다. 그가 저술한 제술문(製述文) 또한 많은데, 내가 일찍이 우통과 견주어 논해보니, 문채는 미치지 못하나 문법은 그보다 낫다.
《잠미집》과 《포경재집》 두 문집도 볼만하다. 우재(愚齋)는 바로 웅사리(熊賜履)이고 가서(稼書)는 바로 육농기(陸隴其)이니, 모두 학문으로 이름난 자들이다. 지은 글 또한 독실한 듯하고 또 육상산과 왕양명의 학문을 힘써 배척하였으니, 숭상할 만하다.
64. 《잠미집》에 〈왕세덕지(王世德誌)〉가 실려 있는데, 세덕은 호가 상고(霜臯)이다. 명나라 말년에 금의위(錦衣衛)로 금중(禁中 궁중)을 숙위하다가 경사(京師 연경)가 함락되자 자결하려고 하였는데, 노복이 껴안고 저지하여 살아남았으나 그의 아내는 이미 부녀자들을 거느리고 우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이에 왕세덕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회남(淮南)에 은둔하였다. 이 〈왕세덕지〉에 대략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내(왕사진(王士禛))가 젊어서 《송유민록(宋遺民錄)》에 기술되어 있는 당(唐)ㆍ임(林) 두 의사(義士)와 사고우(謝皐羽)ㆍ공성여(龔聖予) 등 여러 사람의 사적을 읽어보니, 대부분 인물들이 비범하고 호탕하며 뜻은 고결하고 행실은 아름다웠다.
간혹 때때로 문장에 의탁해서 자신의 뜻을 드러내 보였는데, 대체로 시대에 대해 비분강개하고 번민하며 불평한 것으로, 능히 풍운(風雲)의 색깔을 변하게 하고 강해(江海)를 기립(起立)시킬 만하다. 내 번번이 책을 덮고 크게 탄식하였으니, 생각하건대 송나라 3백 년간에 충후(忠厚)하게 선비를 양성한 보답이 이와 같아서 충신과 의사의 마음 씀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지극하다고 이를 만하다.
순치(順治) 말엽에 객지인 회남(淮南)에 우거하면서 우연히 《숭정유록(崇禎遺錄)》 한 책을 얻어 읽어보고는 내심 송나라 유민의 부류라고 의심하였는데, 오랜 뒤에야 마침내 이것이 상고(霜皐) 선생의 작품인 것을 알게 되었다.
선생은 일찍이 야사(野史)가 거짓과 기만으로 점철되어 후세에 진실을 전할 수 없음을 개탄하고 팔뚝을 걷어 부치고 붓을 휘갈겨 《숭정유록》 한 권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제(先帝)인 의종(毅宗)께서는 인자하고 검소하며 영민한 군주였는데,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신 지 17년 만에 국가의 불행을 만나 끝내 나라를 잃었으니, 아! 하늘의 탓인가? 사람의 탓인가? 신은 낮은 직위의 신하로 날마다 좌우에서 모셨으니, 화를 초래한 것이 이유가 없지 않음을 알고 있다.
성상께서 즉위하시자, 역신인 환관 위충현(魏忠賢)을 주륙하고 환관을 배척하고는 마음을 비워 유신(儒臣)들에게 임무를 맡겼으나, 이른바 유신이라는 자들은 대부분 용렬하고 교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여 국가의 일을 도외시하고 자신의 당(黨)을 위해 목숨을 바칠 줄만 알았으니, 강토는 날로 위축되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 중외(中外)를 둘러봄에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게 되었다.
이에 파격적으로 인재를 등용해서 걸출한 인재를 구하여 국가를 구제하려고 하니, 비록 한두 명의 쓸 만한 인재가 있었으나 당파의 고착이 견고하여 깨뜨릴 수 없었다. 만일 자기와 같은 당파이면 강력하게 비호하여 붙들어 주었고 자기의 당파가 아니면 설령 쓸 만한 재주가 있더라도 반드시 여러 방법으로 배척하여 사지(死地)로 몰아넣으면서 국가의 안위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하여 천자가 중론을 따라 인재를 등용하여도 효험을 보지 못하였고, 중론을 배척하여 인재를 등용하더라도 효험이 없어서, 아침에 한 사람을 등용했다가 저녁에 무너뜨리고 저녁에 한 사람을 등용했다가 다음 날 아침에 주륙하였다.
이렇게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서로 인순(因循)하다가 적의 형세가 이미 치성해지니, 천자께서는 외롭게 고립되어 방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종묘사직이 뒤따라 망하였으니, 아 국가의 멸망이 누구의 죄인가.
매번 대신을 소대(召對)할 때마다, 성상께서 천하의 큰 계책을 하문하셨는데, 내가 가만히 들어보면, 여러 신하들은 땀을 흘리며 부끄러워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바로 자질구레하게 늙은 유생이 하는 상투적인 말로 책임을 면하는 것이었다. 간간이 한두 사람의 충직하고 과감한 주장이 있었으나 또 오활하여 시무(時務)를 알지 못해서 쓸 수가 없었으니, 내가 속으로 한스럽게 여겼다.
또 저 환관 위충현이란 자가 정권을 도둑질하여 위엄이 천하에 진동하였는데도, 선제께서는 방년 17세의 나이로 성음(聲音)과 안색(顔色)을 크게 드러내지 않으시며 손수 그를 제거하셨으니, 이는 진실로 보통의 군주가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하늘의 재앙을 두려워하고 선조의 가르침을 따르며 경연을 부지런히 열고 관리의 치적을 살피며 백성의 폐해를 구제해서 일찍이 단 하루도 스스로 한가하게 보내지 않았으니, 만일 군신간이 덕을 하나로 합치고 장수와 재상이 공경하며 합심하였더라면 태평성대를 이룩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었는데, 불행히 훌륭한 군주는 있었으나 뛰어난 신하가 없어, 끝내 몸은 사직을 따라 죽고 중궁(中宮)은 목을 매어 죽었으며 공주는 손수 칼로 찔러 죽였으니, 예로부터 나라를 위해 죽은 충렬(忠烈)이 선제보다 더한 분이 없고, 망국의 통한이 선제보다 통렬했던 적이 없었다.
마침내 지조를 버린 불초한 무리들이 스스로 청의(淸議)의 성토를 면치 못할 것을 알고는 제멋대로 비방하여, 혹은 선제께서 전비(田妃)를 총애하고 환관을 신임하여 나라가 멸망에 이르렀다 하고, 혹은 이익을 탐하고 재물을 아끼다가 멸망에 이르렀다 하고, 혹은 자신의 계책을 쓰기를 좋아하여 멸망에 이르렀다 하여, 망국의 허물을 군부(君父)에게 전가시켜서 자신들이 나라를 망친 죄를 경감시키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전전(展轉)하며 서로에게 이것을 말하였고 또 책에 써서 천하 후세의 이목을 속이려고 하였다.
나는 이 때문에 절치부심하면서, 사실에 입각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아 선제께서 후세에 장차 덕을 잃은 군주와 같이 치부되어 함께 비난을 받을까 매우 두려웠다. 이에 보고 들은 바를 기록해서 모든 야사의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빠진 부분을 보충하여 그런대로 사실에 입각한 기록의 일부를 갖추었으니, 부디 이로써 유언비어가 멋대로 유포되어 선제의 명예를 더럽히지 못하기를 바라고, 또 훗날 사필(史筆)이 혹 이 기록을 취하기를 바란다.’
이는 평소 선생의 뜻이 모두 이 책에 의탁되어 있는 것이다.
강희 18년(1679)에 《명사(明史)》를 찬수하라는 조칙이 있자, 유서(遺書)를 사방에서 구하였는데, 유사(有司)가 부본(副本)을 기록하여 사관(史館)에 올렸고, 선생이 별세함에 차자(次子) 원(源)이 장례할 적에 초고를 함께 묻었으니, 아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다.”
왕세덕의 저서가 명나라가 망한 뒤에 나왔기 때문에 이 내용이 《명사》에 보이는 바가 없다. 이 기록은 명나라 말기 사실을 고찰함에 크게 관계되는데, 이현석(李玄錫)이 과연 이 기록을 얻어 보아 채록했는지의 여부는 알지 못하겠다.
왕사진(王士禛)은 청나라 사람으로 왕세덕을 이처럼 세상에 널리 알렸으니, 또한 숭상할 만하다. 나는 이현석이 이 기록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함부로 혹자들의 날조한 말만 믿고 이를 잘못 기재할까 염려되므로 자세히 기재하는 것이다.
65. 시(詩)는 성정(性情)을 표현하고 문(文)은 도학(道學)을 밝히고 사변(事變)을 기록해서 모두 세교(世敎)에 보탬이 되는 바가 있으니, 부질없이 지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시는 간간이 경물(景物)을 읊은 것이 많아서 혹 한만(閒漫)한 작품이 있을 수 있으나, 문이 어찌 이와 같아서야 되겠는가.
이 때문에 당ㆍ송 이전의 문인들의 경우, 비록 성취한 바에 각각 고하와 우열의 차이가 있으나 이들의 유집(遺集)을 상고해 보면, 겉만 화려하고 잡되어 긴요하지 않은 글이 드물다. 그러나 명나라에 이르러서는 습속이 실속 없이 겉만 화려한 것을 숭상하고, 질박하고 실제적인 것이 매우 부족하여 문집 안에 한만한 작품이 매우 많다.
나이 60세에 이르면 대개 모두 수서(壽序)를 지어서 그 사람의 평생을 칭찬하고 현양(顯揚)하는데, 말마다 중복되어 이것을 읽어 보면 염증을 느낄 만하고, 심지어 50세가 된 자에게도 또한 장수(長壽)를 칭송하면서 서문을 쓰기도 하며, 혹은 죽은 사람을 위하여 추후에 장수를 칭송하는 글을 짓는 자까지 있다. 장수라는 것은 오래 산 것을 이르는 것이고 삶의 반대가 죽음이 되는 것인데, 죽었는데도 축수(祝壽)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더더욱 가소롭다.
또 지방관이 되어 다른 부임지로 영전(榮轉)하는 자에게는, 정치를 잘하고 못하고를 막론하고 한결같이 아름다운 말로 기려서 글을 지어 전송하였다. 명나라 사람의 문집을 열람해 보면 노인을 축수하고 관직을 옮겨가는 것에 대한 서문이 거의 절반을 넘으니, 이런 등속의 문장들이 어찌 세교(世敎)에 한 치의 보탬이 되겠는가. 진실로 문장의 폐단이라고 이를 만하다.
66. 글은 평이하고 창달함을 뛰어나다고 여기는 자도 있고 또한 간략하고 심오한 것을 주장하는 자도 있다. 요컨대 맥락이 어지럽지 않고 서술에 법칙이 있어서 모두 문장의 법도에 부합하면 그만이니, 딱히 하나의 격식을 지나치게 주장할 필요는 없다.
근래에 문장을 말하는 자들은 번번이 ‘간(簡)’ 한 글자를 말하면서 구(句)와 글자를 되도록 짧고 난삽하게 만드니, ‘간(簡)’이라는 말이 어찌 다만 구와 글자를 가지고만 따지겠는가. 편법(篇法)과 장법(章法)이 모두 그렇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만약 그 구를 간략히 하면서 그 말을 쓸데없이 길게 한다면 어찌 간략함을 귀하게 여길 것이 있겠는가. 맥락이 서로 어긋나고 서술이 정돈되어 있지 않으면 어찌 간략함을 귀하게 여길 것이 있겠는가.
우선 명나라 사람을 가지고 증명해 보겠다. 명나라 사람들은 걸핏하면 선진(先秦) 시대의 글을 인용하면서 되도록 그 구법(句法)을 간략하고 심오하게 하고자 하였으나 서사(叙事)는 지극히 번잡하였다. 저들이 진실로 구양수(歐陽脩)와 증공(曾鞏)을 얕잡아 보았지만, 실은 구양수와 증공의 서사는 매우 간략하여 명나라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다. 명나라 사람들은 재주와 능력의 뛰어남이 진실로 후인들이 견줄 바가 아닌데도 이와 같았으니, 하물며 다른 사람에 있어서이겠는가.
67. 세속에서는 ‘이(而)’ 자와 ‘지(之)’ 자를 적게 쓰는 문장을 가지고 간략〔簡〕하고 예스럽다〔古〕고 하는데, 이는 협소하고 답답하고 고루한 견해이다. 고문은 선진(先秦)의 육경(六經)과 서경(西京 서한(西漢))의 문장만한 것이 없는데, 《장자(莊子)》ㆍ《열자(列子)》ㆍ《좌씨전(左氏傳)》ㆍ《국어(國語)》ㆍ《전국책(戰國策)》ㆍ《사기(史記)》 등의 책에 허자(虗字)가 가장 많고 《논어》ㆍ《맹자》ㆍ《예기(禮記)》 또한 그러하니, 어찌 ‘이(而)’ 자와 ‘지(之)’ 자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글의 예스럽고 예스럽지 않음을 정하겠는가.
후대에 창려(昌黎)의 문장에 진실로 허자를 전혀 쓰지 않은 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허자를 쓴 글 또한 많으니, 이는 다만 허자를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있을 뿐이다.
비유하자면 집을 짓는 자가 재목을 쓸 적에 길고 짧은 것을 각각 그 마땅함에 따른 뒤에야 비로소 방과 집의 체재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니, 만약 천편일률적으로 짧은 것만 쓴다면 어찌 집의 체재를 이룰 수 있겠는가.
요사이 보건대 글을 짓는 자들이 여기에 구애되어 되도록 자구를 끊어 짧게 해서, 글이 유려하지 못하고 껄끄럽고 생기가 없으며 말이 대부분 통창하지 못하여 생동하는 기풍이 전혀 없어서 볼만한 것이 없으니, 옛것을 잘못 배웠다고 이를 만하다.
68. 우리나라 사람들은 외진 변방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받은 기운이 진실로 국한되어 좁으며, 일상생활에 있어 보는 것도 모두 비속한 문자여서 비록 높은 재주와 뛰어난 기예가 있더라도 문장을 지음에 자연히 예스럽지 못하니, 이는 형세가 그러한 것이다.
옛날에 견준다면 문장은 선진(先秦)보다 더 훌륭한 것이 없으니, 서경(西京)의 문장은 선진에 미치지 못하고 동경(東京)의 문장은 또 서경에 미치지 못한다. 창려(昌黎 한유)의 문장은 팔대(八代)의 쇠미함을 일으켜 세웠으나 양한(兩漢)에 비교하면 오히려 미치지 못하니, 이것을 가지고 말하면 구양수와 증공이 또 한유에 미치지 못하는 것도 그 형세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외진 변방인 우리나라가 중국에 있어서이겠는가.
그러나 옛사람들은 식견이 높았기 때문에 한나라 사람은 일찍이 육경(六經)의 문장을 모방하지 않았고 창려 또한 일찍이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의 문장을 모방하지 않았으며, 구양수ㆍ증공도 일찍이 창려의 글을 모방하지 않았으니, 다만 그 의경(意境)과 격조(格調)를 사용했을 뿐, 한나라 사람과 한유ㆍ구양수ㆍ증공으로서의 본래의 면목은 그대로 있는 것이다.
만약 다만 고문의 자구(字句)에 나아가서 구구절절 모방하고 자신의 흉중에 있는 말을 한마디도 뱉어내지 못한다면, 도리어 협소하고 유려하지 못하며 가볍고 박한 글이 되어 광대의 가면을 쓴 것과 유사해서 진면목이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니, 어찌 높일 만한 글이 되겠는가.
작문은 마땅히 옛사람의 체재로 자신의 글을 지어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글이 작문하는 사람의 글임을 알게 해야 하고, 비속하고 용렬한 습성은 통렬히 제거하면 충분하니, 어찌 굳이 하나하나 모방할 필요가 있겠는가.
근래 상용하는 공문서의 문자도 피하여 사용하지 않을 필요는 없다. 진ㆍ한으로부터 한유와 구양수에 이르기까지 시속에서 으레 사용하는 문자를 다 피하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 검증해 볼 수 있다.
내가 일찍이 남의 묘문(墓文)을 지을 적에 ‘일등(一等)’이란 말을 썼는데, 일등이란 우리나라 과거 시험장의 등수의 차례를 일컫는 말이다. 근래에 고문을 숭상하는 자가 내 글을 보고 크게 놀라면서 흠이라고 지적하기에, 내가 창려의 〈정군지(鄭群誌)〉를 펴서 여기에 있는 ‘상등(上等)’ 두 글자를 보여주자, 그가 말하기를, “상등(上等)이란 말은 이미 창려의 문장에 있으니 쓸 수 있지만, 이 일등이라는 단어는 써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으니, 꽉 막혀 융통성 없음이 이처럼 가소롭다.
문자의 전아(典雅)함과 속됨은 애당초 고금(古今)에 달려 있지 않으니, 비록 육경(六經)의 문자라도 이것을 써서 속된 것이 있고 시속(時俗)의 문자라도 이것을 써서 전아한 것이 있다. 전아함과 속됨이 모두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으니, 어찌 고금의 구별에 국한되겠는가.
69. 구양공(歐陽公 구양수)이 말하기를 “많이 보고 많이 짓고 많이 생각한다.〔看多, 作多, 商量多.〕”라고 하였으니, 옛사람은 읽는 것을 통틀어 ‘본다〔看〕’라고 하였으며, ‘짓는다〔作〕’는 것은 제술(製述)을 이르고, ‘생각한다〔商量〕’는 것은 남들과 문자를 의논하여 확고하게 하는 것을 이른다.
읽기만 하고 글을 짓지 않으면 저술하는 재주를 개발할 수 없고, 읽고 난 뒤에 짓기를 병행하더라도 자뢰함 없이 홀로 배우면 문식(文識)이 끝내 고루함을 면치 못하게 되니, 문식이 고루하면 비록 많이 읽고 많이 짓더라도 지은 글이 작가(作家)의 규모와 부합하지 못하여 쓸데없는 데로 귀결될 뿐이다.
근래 시골사람 중에 독서를 많이 하기로 으뜸이라고 일컬어지는 자도, 그의 글을 보면 대부분 비루하고 속되어 거의 불학무식(不學無識)한 사람과 다름이 없으니, 이는 생각하는 공부가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70. 우리나라 사람들은 과거 공부를 가장 중시하여 비록 문장이 동료들보다 뛰어난 자라도 과거 공부에 몸을 굽혀 뜻을 두지 않음이 없어서 오직 표문(表文)과 대책문(對策文)을 지을 뿐이요, 일찍이 고문(古文)에는 힘을 쏟지 않고, 다만 한유(韓愈)와 소식(蘇軾)을 법도로 삼아서 과거 시험장이나 관각(館閣)에서 수창(酬唱)하는 자료로 삼는데 불과하였다.
그러다가 선조(宣祖) 때에 이르러 최간이(崔簡易)ㆍ윤월정(尹月汀) 등 여러 분들이 비로소 고문을 숭상하고 높여서 한때 습속(習俗)이 크게 변하니, 그 공이 크다고 이를 만하다.
우리나라에 문형(文衡 대제학(大提學))을 맡은 분이 거의 백 명에 가까운데, 고문이 있음을 안 사람은 윤월정(尹月汀)ㆍ이백사(李白沙 이항복(李恒福))ㆍ신상촌(申象村)ㆍ장계곡(張谿谷)ㆍ김청음(金淸陰 김상헌(金尙憲))ㆍ이택당(李澤堂)ㆍ김식암(金息菴)ㆍ이서하(李西河)ㆍ김농암(金農巖 김창협(金昌協)) 등 몇 분일 뿐이다. 이 외의 나머지 분들은 모두 재주가 미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과거(科擧)에 얽매어 그러한 것이다.
대체로 우리나라는 원래 동이(東夷)의 고루함을 면치 못하여 고문을 짓는 방법을 전혀 알지 못하였는데, 목로(牧老)가 중원(中原)에 유학하여 인정을 받고서 여러 사람들을 가르쳐 주니, 이 뒤에 자못 좋아지게 되었다. 선조 이후에 글들이 더욱 좋아졌지만 재주에 있어서는 고려 때의 인물들보다 몇 등급 내려갔으니, 내가 생각하건대 근래에 제공(諸公)들의 식견에다가 고려 때 인물들의 기력(氣力)을 겸한다면 거의 고문에 가까워질 것이다.
71. 상촌(象村 신흠(申欽))은 문장을 짓는 재주가 뛰어나 10세가 되기 전에 이미 대성하였다. 일찍 고아가 되어 외갓집에서 길러졌는데, 외가는 바로 송기수(宋麒壽)의 집이다.
송씨 집안은 오로지 과거 공부만 숭상하여, 항상 표문(表文)과 대책문(對策文)만 익히고 다른 글은 짓지 못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상촌이 약관(弱冠)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그동안 지은 표문과 대책문이 이미 수백 수에 이르러 장옥(塲屋 과거 시험장)의 노련한 선비가 되었다.
상촌은 중년 이후로 고문에 뜻을 두었으나 문기(文氣)가 훼손되어 문장을 지으면 자기도 모르게 과문(科文)의 단어가 뒤섞여 들어가니, 매번 붓을 던지고 스스로 탄식하였다.
상촌은 아들 낙전공(樂全公)이 부마(駙馬)가 되자, 그에게 말하기를,
“너의 뛰어난 재주로 문과(文科)로 현달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한스러울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에 힘입어 구속받지 않으면서 마음 내키는 대로 문장을 지을 수 있으니, 이는 기뻐할 만한 일이다.”
라고 하였다. 낙전의 문장은 진실로 빼어나고 상쾌하나, 부자(父子)가 성취한 바를 비교한다면 상촌이 진실로 낙전보다 낫다.
72. 월사(月沙) 이공(李公)은 나라를 빛낸 문장이 있었으니, 비록 고문을 배우는 데 마음을 다하지는 않았으나 넉넉하고 풍부함에 그를 상대할 만한 적수가 없어서 예원(藝苑)에서 신상촌(申象村)과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문집이 세상에 크게 유행되었는데, 문집 가운데 시와 문이 매우 많지만 마땅히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를 제일로 삼아야 할 것이다.
73. 장계곡(張谿谷)의 문장은 비록 사람을 놀라게 하는 기염(氣焰)은 없으나 온당하고 딱 들어맞아서 한 자 한 구도 편벽되거나 생경하거나 비뚤어진 것이 없다.
무릇 문장을 지을 적에 흥취가 나는 곳에 이르면 으레 파란이 일고 가득 차 일렁이는 듯한 구절이 많게 되는데, 장계곡은 이러한 것에 도리어 담담하여 평평한 쟁반에 물을 담아놓은 것과 같으며, 글을 써내려 간 것이 또 매우 전아하고 깨끗하였으니, 택당(澤堂 이식)의 이른바 ‘생각은 격식을 넘지 않고 기운은 격조에 누가 되지 않는다.〔思不踰格, 氣不累調.〕’라는 것이 적절한 표현이다.
우리나라는 문장에 뛰어난 선비가 많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하나하나 고문의 법도에 부합해서 조금도 어긋남이 없기로는 이분이 마땅히 으뜸이 될 것이다.
74. 명나라 사람들은 우리 해동(海東)의 시를 매우 좋아하였는데, 이 가운데서도 더욱 허경번(許景樊)의 시를 칭송하여, 시를 선별하는 자들이 허경번의 시를 기재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청나라 사람인 송락(宋犖)은 허경번이 지었다고 들은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樑文)〉을 얻어 보지 못함을 한스러워하고, 이 글을 모의하여 지은 것이 그의 문집 가운데 있으니, 그의 사모하고 숭상함을 알 수 있다.
명나라 만력(萬曆) 연간에 남방위(藍芳威)란 자가 대사마(大司馬)를 따라 동쪽으로 왔다가 우리 해동의 시를 채집하여 모아 6편을 만들고 이름을 《조선시선전집(朝鮮詩選全集)》이라고 하였는데, 기자(箕子)의 〈맥수가(麥秀歌)〉로부터 시작하여 허경번의 시까지 모두 6백 수를 실었다.
《열조시집(列朝詩集)》에서는 1백 7십 수를 뽑아 수록하고, 《명시종(明詩綜)》에서는 1백 3십 6수를 뽑아 수록하고, 《명시선(明詩選)》에서는 3수를 수록하고, 《시귀(詩歸)》에는 2수를 수록하였는데, 경번의 시가 이 가운데에 모두 들어 있다.
송락의 문집에 월사(月沙)가 지은 〈양호거사비(楊鎬去思碑)〉와 이이첨(李爾瞻)이 양호의 공덕을 찬양한 시가 기재되어 있는데, 월사의 글은 준걸스럽고 굳세니 진실로 법도에 부합하고, 이이첨의 시는 바로 장편의 시인데 험운(險韻)을 사용하였으나 운자를 바꾸지 않으면서도 군색한 모양이 없으니, 쉽게 얻을 수 없는 작품이다.
나는 이이첨의 시문을 많이 보지 못하였으나, 일찍이 그의 〈의당곽자의사봉분양왕표(擬唐郭子儀謝封汾陽王表)〉를 보았는데, 이는 바로 중시(重試)에 장원한 글이었다.
또 《충열록(忠烈錄)》에서 그의 시문 여러 작품을 보아서 대략 그 문장의 체재를 알았으며, 광해(光海) 경신년(1620, 광해군12) 연간에 친경례(親耕禮)와 친잠례(親蠶禮)를 행할 적에 조정에 가득한 경재(卿宰)와 유명한 관원들이 모두 시를 지어 칭송하고 이것을 모아 책 한 질을 만들어서 간행하였는데, 이 가운데에 이이첨의 시문과 변려문 10여 편이 기재되어 있는 바, 시재가 풍부하고 필력이 매우 화려하였다.
비록 그가 한유(韓愈)ㆍ구양수(歐陽脩)의 문풍을 버리고 육조(六朝)를 배워 격식과 법도가 자못 섬약하였으나 또한 마땅히 한 시대의 능수(能手)가 될 수 있었다.
계해년 이이첨을 사형에 처하라는 교서〔正刑敎書〕에 이르기를 “전혀 문장의 뜻을 모르고 표절을 능사로 삼았다.”라고 하였으니, 몸이 하류에 처함에 지나친 악〔溢惡〕이 모두 돌아옴을 면치 못하여 이렇게 된 것인데, 실상은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니다.
75. 홍공 성민(洪公聖民)은 사림(士林)의 중망(重望)을 받고 있어서 선조(宣祖) 때에 일찍이 문형(文衡)을 맡았으나 문장으로 이름을 크게 드러내지는 못하였다.
내가 우연히 그의 문집 중에 〈당성군유적발(唐城君遺蹟跋)〉을 보았는데, 문장이 성대하고 기복과 변화가 많았으며 옛날의 법도가 있어서 요즘 문인(文人)들이 미칠 바가 아니었으니, 참으로 옛사람은 본래 가볍게 볼 수 없는 것이다.
76. 청음(淸陰) 선생이 물러나 양주(楊州)의 석실촌(石室村)에 거처하실 적에 이(李)씨 성을 가진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살면서 때때로 왕래하였으니, 바로 선생의 친구였다. 일찍이 선생에게 지어준 시에 이르기를,
일생동안 항상 청빈에 맡기니 / 一生長是任淸貧
이부의 직함으로 처사의 몸이었네 / 吏部官衘處士身
머리가 눈처럼 흰 친구가 있어서 / 惟有故人頭似雪
벽오동나무 아래를 자주 왕래한다오 / 碧梧桐下往來頻
라고 하였으니, 선생이 거주하시던 집의 뜰에 벽오동나무가 심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또 일찍이 서울에 들어갔다가 조정의 관리가 소리쳐 벽제하는 것을 만나 피하여 숨고는 장난삼아 시 한수를 지었는데 여기에 이르기를,
오색구름의 궁궐에 아침 햇살이 빛나는데 / 五雲宮闕耀朝暉
길을 깨끗이 하는 위엄 소리 포의를 놀래키네 / 淸道威聲怯布衣
좁은 땅에 몸을 숨기고 은밀히 주시하니 / 隙地藏身潛送目
현달한 관원의 거마가 나는 듯 빠르게 지나가네 / 達官車馬去如飛
라고 하였는데,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 두 편의 시를 여러 번 칭찬하였다. 다만 이 사람의 이름이 전하지 않고 다른 작품들 또한 모두 없어졌으니, 탄식할 만하다.
77. 어떤 사람이 손님과 함께 모여 앉아 막 모려(牡蠣)를 먹고 있었는데, 모려는 바로 세상 사람들의 이른바 굴이라는 것이다. 한 승려가 무례하게 지나가자, 그 사람이 화를 내면서 잡아들이게 하여 귀를 잡아당기면서 승려의 무례함을 꾸짖고 볼기를 치려고 하였다. 그러자 승려는 사죄하여 마지않고 또 말하기를,
“다소나마 문자를 지을 줄 아니, 만일 시로써 속죄하기를 허락하신다면 삼가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내가 막 굴을 먹고 있으니, 이것을 읊어 대답한다면 마땅히 너의 죄를 용서해주겠다.”
라고 하고는, 평(平)ㆍ성(成)ㆍ명(名) 세 글자를 운으로 불러주었다. 승려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대답하기를,
전생의 몸이 바로 대부 평(平)이니 / 前身曾是大夫平
못 가를 배회하던 충혼이 굴로 변하였네 / 澤畔忠魂變化成
쇠한 세속에서도 또한 존경할 줄 알아서 / 衰俗亦知尊敬意
다만 성만 칭하고 이름은 칭하지 않는다오 / 只稱其姓不稱名
라고 하니, 그 사람이 경탄(驚歎)하고 즉시 놓아주었다.
78. 예로부터 문인들이 남의 요구에 부응(副應)하여 지은 문자 중에는 간혹 형편상 어쩔 수 없어서 짓지 않아야 하는데 지은 것이 있으니, 예컨대 육방옹(陸放翁)이 한탁주(韓侂胄)를 위해 〈열고천기(閱古泉記)〉와 〈남원기(南園記)〉 두 기문을 지었고, 당형천(唐荊川)이 엄숭(嚴嵩)을 위해 〈검산당시집서(鈐山堂詩集序)〉를 지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장옥(張玉)이 심정(沈貞)을 위해 〈소요당서(逍遙堂序)〉를 지은 것이 이것이다.
장옥은 기묘(己卯) 연간의 사류(士類)로, 이름이 김사재(金思齋)가 기록한 《기묘당적(己卯黨藉)》에 기재되어 있었으나, 뒤에 김잠곡(金潛谷)이 《기묘록(己卯錄)》을 만들 적에 장씨의 이름이 삭제되었으니, 이는 장옥이 심정의 당(堂) 서문을 지어주었기 때문이다.
장옥은 바로 계곡(谿谷 장유(張維))의 고조(高祖)인데, 계곡 또한 금(金)나라 한(汗)의 공덕비문(功德碑文)을 지은 일로 사론의 배척을 받아 그가 지은 우계(牛溪 성혼)의 신도비문(神道碑文)이 쓰이지 못하였는 바, 이 일이 자신의 할아버지와 비슷하니, 기이한 일이다.
계곡이 이미 금나라 한의 공덕비문을 지었으나, 조정에서는 이상 경석(李相景奭)의 글이 더욱 지극히 찬양했다 하여 이 글을 쓰기로 하고, 계곡의 글은 버렸다.
79. 강지(江贄)의 《통감(通鑑)》과 증선지(曾先之)의 《십구사략(十九史略)》과 진력(陳櫟)의 《고문진보(古文眞寶)》는 중원(中原)에서는 매우 드물게 있는 책인데, 우리나라는 거의 집집마다 외우고 읽는다.
또 조맹부(趙孟頫)는 진실로 글씨에 뛰어났으나, 원나라 때의 문사(文士)들은 글씨를 잘 쓰지 못하는 이가 없어서 조맹부와 견줄 만한 자가 동시대에 또한 많이 있었다. 그러므로 중원에서는 특별히 조맹부의 글씨를 칭찬하는 자가 별로 없었는데, 우리나라는 고려의 충선왕(忠宣王)이 원나라에 들어가서 조맹부와 서로 친하여 그의 필적을 많이 받아와서 우리나라에 크게 전파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조맹부의 글씨를 익히지 않은 이가 없게 되었으며, 심지어 왕희지(王羲之)와 병칭하여 ‘왕조(王趙)’라고 칭하는데, 중원의 경우는 이와 같지 않다.
80. 유신(庾信)의 문장은 기운과 격식이 높지 못하니, 그가 지은 〈애강남부(哀江南賦)〉는 육조의 여러 부(賦) 가운데 소명(昭明)의 《문선(文選)》에 기재된 것과 비교하면 크게 미치지 못하는데, 우리 해동에서는 이것을 매우 숭상해서 사람들이 익숙히 외우지 않은 이가 없으니, 무릇 이런 것들은 모두 외진 변방에 살아 견문이 협소하고 비루하기 때문에 이러한 것이다.
81. 경서(經書)는 선비가 되는 근본이니, 만약 많이 읽어서 공력을 얻으면 위로는 학문을 할 수 있고 중간으로는 문장을 할 수 있고 아래로는 또한 장옥(塲屋)의 고수(高手)가 되는 기회를 잃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젊었을 적에 생각을 잘못해서 경서를 읽는 데 힘쓰지 않고, 도리어 《남화경(南華經)》 전질(全帙)을 탐독하여 5, 6십 번씩에 걸쳐 읽었고, 이 중에서 마음에 드는 곳은 거의 4, 5백 번씩 읽었으며, 특히 〈제물론(齊物論)〉과 같은 경우는 매우 좋아하여 나도 모르게 손으로 춤을 추고 발로 뛰는 지경에 이르렀다.
《남화경》을 다 읽고 나니, 글쓰기가 쉬워져서 삽시간에 열 장의 종이를 다 써내려갔으나, 교룡과 지렁이가 서로 뒤섞여 있어서 볼 만하지는 못하였다.
이것을 가지고 한 번 농암 선생(農巖先生)에게 보여드렸는데, 농암이 자못 칭찬하였으나 그 거칠고 다듬어지지 못한 것을 흠으로 여기시고 반고(班固)의 《한서(漢書)》를 읽기를 권하면서 손수 열 두 열전(列傳)을 선별해 주셨다.
이에 3백 번을 정독하고 난 후에 글을 지어 농암에게 보여드렸더니, 말씀하기를,
“문리가 넉넉하고 결구(結搆)가 엉성하지 않아서 전보다 크게 나아졌다.”
라고 하시고, 나에게 안주하지 말고 힘써 공부하라고 하고, 이어서 문장을 엮는 법도를 가르쳐주셨다.
나는 항상 이것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으나 벼슬길에 부침하다가 마침내 잃어버렸고 글을 읽고 외우는 공부는 거의 전폐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임인년(1722, 경종2), 적소에 있을 적에야 비로소 사서(四書)와 삼경(三經), 《예기》와 《소학(小學)》과 주자의 편지글을 읽었다. 그러나 늙은 나이에 책을 읽었으니 어찌 얻은 바가 있었겠는가. 지금 몽매하게 문장이 없는 한 용렬한 지아비가 되고 말았으니, 부끄러울 뿐이다.
82. 내가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오른 것은 애당초 본래의 마음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관직에 제수되는 것을 한결같이 우연히 오는 것〔倘來〕으로 내버려 두어 평소에 벼슬을 바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젊어서 예문관에 있을 적에 궁중(宮中)에 숙직하는 여러 사람들과 한담을 나눴는데, 앞날의 벼슬길과 지위에 대해 언급하게 되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미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만약 목마(木馬)를 타지 못한다면 문과에 오른 효험이 무엇이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목마라는 것은 초헌(軺軒)을 이르는데, 국법(國法)에 재신(宰臣)이 되어야 비로소 초헌을 탈 수 있으니, 이는 재신의 반열에 오를 것을 스스로 기약한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만약 귀밑머리에 둥근 옥관자를 붙이고 허리에 서대(犀帶)를 두르지 못한다면 끝내 공명(功名)이 하찮음을 면하지 못한다.”
라고 하였다.
나만 홀로 묵묵히 듣고 말하지 않으니, 여러 사람들이 다그쳤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나는 그대들이 간직한 생각과는 다르다. 나는 본래 문(文)과 질(質)이 하나도 이루어진 것이 없어서 온갖 일이 남에게 미치지 못하니, 비록 귀함이 극품(極品 일품)에 이르더라도 수레를 탄 학〔乘軒之鶴〕과 날개 젖은 사다새〔濡翼之鵜〕가 됨에 불과하여 다만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쌓일 뿐이니,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내가 생각하건대 관직은 지금의 지위에 그치더라도 또한 무방하고, 일찍 요절하지 않아서 계속해서 조정의 관직에 있게 되면 그 형세가 자연 여기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니, 만약 벼슬이 삼품에 이르고 중간에 바깥 고을을 맡아 좋은 산천을 다스려서 한가로이 놀며 해를 마친다면 분수에 만족하다.”
라고 하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나의 졸렬함을 비웃었다.
그런데 그 뒤에 여러 사람들은 대부분 바라던 관직을 성취하지 못하였고 또한 혹 단명하였는데, 나는 도리어 재주 없는 주제에 인재가 없음을 틈타 외람되이 승진해서 태부(台府 의정부)에 올랐으니, 영고성쇠(榮枯盛衰)를 기약할 수 없음이 이와 같은 것이다.
아니면 말세여서 하늘의 뜻과 사람의 일이 대부분 전도되고 어긋나서, 재주가 뛰어난 자는 침체하여 굽히고 용렬한 자는 올라가고 현달해서 저절로 이와 같지 않을 수 없는 것인가.
83. 세상에는 탐욕스럽고 비루하면서도 청렴하고 소탈하다고 스스로 칭하고, 무능하면서도 재주가 있다고 스스로 자랑하여 세상을 기만하고 남을 속이는 자들이 진실로 많이 있지만, 문장은 속일 수가 없으니 이는 문장은 밖으로 드러나서 사람들이 모두 보기 때문이다.
나는 본래 문장을 잘하지 못해서 과거 공부에 힘을 쏟지 못하였으니, 비록 이른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였지만 요행에 불과한 것이었고, 성품이 또 졸렬하고 활달하지 못해 일찍이 내가 지은 한 글자 한 구도 남들에게 전하여 말하지 않았고, 또한 일찍이 남과 상대하여 문장에 대해 논하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문장에 대해 논하는 것을 보면 그들의 말을 듣기만 할 뿐 묵묵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과거에 급제한 지 수십 년이 되도록 사람들이 모두 나를 글을 못하는 조정의 선비로 보았고, 나 또한 속으로 이런 이름을 얻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생각지도 않게 벼슬이 높아진 뒤에 갑자기 예문관 제학(提學)에 제수되니, 이 일이 이미 뜻밖이었는데 또 외람되이 제학을 역임했다는 이유로 문형(文衡)을 주관하게 되었다. 이는 실로 평소 꿈속에서도 생각하지 않은 것이었다.
우리나라에 문형이 거의 백 명이 되는데, 그 사이에 비록 우열과 고하를 말할 만한 것이 없지 않지만 대부분 모두 문장을 잘한다는 명성이 있어서, 나처럼 전혀 문명(文名)이 없으면서 갑자기 분에 넘치게 제수된 사람은 있지 않았다. 세상일은 보통의 계산으로는 헤아릴 수 없음이 이와 같으니, 한편으로는 부끄럽고 한편으로는 우습다.
84. 앉아서 도(道)를 논하고 자질구레한 일을 몸소 하지 않음은 삼공(三公 삼정승)의 직분이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께서는 유사(有司)에게 먼저 일을 시키라고 중궁(仲弓)에게 가르치셨던 것이다.
후세에 와서 진평(陳平)과 병길(丙吉) 같은 무리는 본래 칭찬할 만한 학술이 없었으나 혹은 옥송(獄訟)과 전곡(錢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고, 혹은 아전을 조사하여 다스리지 않았고 여러 사람들이 싸우는 것을 묻지 않았으니, 이는 타고난 자품이 밝고 통달하여 다스리는 체통을 깊이 알았기 때문이다.
설선(薛宣) 같은 자는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곳마다 선정을 베푼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재상이 되자 번잡하고 자질구레하여 대체(大體)가 없다는 비판을 받았으니, 이는 이 방법과 반대로 하였기 때문이다.
당(唐)나라 한홍(韓弘)은 일개 발호하는 신하에 불과하였으나, 한문공(韓文公)이 임금을 도와 국가를 다스림에 자질구레한 일을 다스리지 않았다고 찬미하였으니, 한퇴지(韓退之) 또한 정승의 도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함을 알았던 것이다.
한위공(韓魏公)의 재주는 크고 작은 것을 모두 구비하였는데, 그가 정승이 되자 정령(政令)은 집현전(集賢殿)에 묻고, 전고(典故 역사와 고사)는 동청(東廳)에 묻고, 문학(文學)은 서청(西廳)에 묻고 오직 큰일만 스스로 결정하니, 사람들이 정승의 체통을 얻었다고 말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본래 재주가 열등하고 국량이 좁은데, 근년에 이르러는 어리석고 능력이 없는 자는 물론이고, 유능한 자라 하더라도 재상이 되어서는 아래로 육경(六卿 육조의 판서)의 일을 행하고 감사(監司)가 되어서는 아래로 수령의 일을 행하여, 한갓 번잡하고 까다롭다는 비난을 취하고 도리어 체통을 잃는다. 유사에게 먼저 일을 시키라는 공자의 가르침을 변모(弁髦)처럼 버릴 뿐만이 아니니, 참으로 탄식할 만하다.
85. 예로부터 권력을 탐하고 세력을 좋아하여 사소한 원한에도 반드시 보복하는 자가 있고, 진취(進取)하는데 급급해서 점진적으로 나아가지 않고 건너뛰는 자가 있고, 남의 뇌물을 받고 사사로이 경영하여 부를 누리고 사치한 자가 있고, 으스대고 스스로 훌륭한 체하면서 교만하고 방종하여 남을 업신여기는 자가 있었으니, 이 네 가지 부류의 사람들은 종말(終末)에 실패를 당하지 않음이 없다. 이것은 진실로 착한 자에게 복을 주고 악한 자에게 화를 내리는〔福善禍淫〕 떳떳한 이치이다.
오늘날 눈썹을 치켜 올리고 기운을 토하면서 득의양양한 자들은 대체로 이 네 부류에 속하는데, 이들은 비단 자기 몸에 재앙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 성대한 복을 뒤따라 받고 있다. 그러나 혹 물러나서 고요함을 지키면서 스스로 몸가짐을 겸손하게 하는 자는 전복되고 낭패를 당하여 구덩이에 넘어지고 함정에 떨어져, 근심과 재앙이 서로 발생하고 번갈아 침범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 어찌 천도(天道)의 어그러짐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충분히 선한 자로 하여금 태만하게 만든다.
86.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소인(小人)들은 권력에 붙고 이익을 따르면서 못하는 짓이 없으면서도, 자못 공론을 두려워하고 꺼린 나머지 겉으로는 정반대의 태도를 취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곤 한다.
예컨대 한나라의 순욱(荀彧)은 조조(曹操)를 위하여 찬역(簒逆)하는 계책을 도와서 제일의 책사(策士)가 되었는데, 마지막에 구석(九錫)을 하사하는 논의에 있어서는 대략 이견을 보였다. 그러나 이는 그의 본심이 아니라 이것을 이용하여 스스로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조조의 의심과 노여움을 받아서 짐독(鴆毒)을 마시고 죽었다.
당나라의 배추(裴樞)가 주전충(朱全忠)에게 붙은 것은 순욱이 조조에게 한 것보다 더 심하였는데, 태상경(太常卿)을 아끼고 주지 않은 이유로 주전충에게 살해를 당하였으니, 그가 태상경을 아낀 것은 주전충의 뜻을 어기고자 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공정하여 사사로움이 없음을 은근히 보이고자 한 것에 불과하여, 순욱이 구석을 받는 것을 저지한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런데 모두 이 때문에 죽임을 당해서 예전에 이룩한 공(功)까지 모두 사라져버렸다. 이는 거짓되고 부정한 그들의 마음 씀씀이를 천지신명도 깊이 미워한 것이니, 어찌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그중에도 가장 드러난 경우이니, 대체로 소인의 정상에는 이와 같은 경우가 많다.
87. 아경(亞卿) 이상은 자급(資級 품계)이 매우 중하여, 조종조(祖宗朝)의 고사(故事)에 인망과 공적이 있지 않으면 함부로 제수하지 않았으니, 덕이 있는 사람에게 관직을 명하는 제도를 구차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근래에 연경에 가는 상개(上价 정사)와 빈사(儐使)에 으레 정2품의 관원을 보내는데, 정2품 가운데 적당한 사람이 없으면 그때마다 자품을 올려 제수하니, 나 역시 연경에 사신 갈 적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하였다.
오랑캐 조정에 사신 가거나 오랑캐 사신을 접대하는 것은, 이 일을 담당한 관리에게는 본래 겸연쩍은 일인데, 이로 인하여 팔좌(八座)의 지위를 뛰어넘어 취한다면 어찌 더더욱 부끄러울 만한 일이 되지 않겠는가. 참으로 의의가 없는 일이다.
내 생각으로는 이런 종류의 제수(除授)는 가함(假衘 임시 직함)을 써도 무방할 듯하다. 부사가 가함의 품계와 직책을 띠고 간다면 상사(上使)만 어찌 그래서 안 될 것이 있겠는가.
또 시종신(侍從臣)의 아버지가 나이 70이 되면 가자(加資)하는 것은 전례가 없었는데 현종(顯宗) 때에 처음 생겼으니, 이는 다만 벼슬이 낮은 아버지에게 은혜를 미루어서 품계를 올려주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자헌대부 이상에게도 모두 은혜를 미루니, 이는 은전(恩典)을 남발하는 것일 뿐만이 아니다. 본래의 의도를 근원해본다면 자식의 귀한 신분을 영달하지 못한 어버이에게까지 미치게 하려고 한 것인데, 지금은 도리어 낮은 품계의 자식이 겨우 시종관의 반열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벼슬이 높은 아버지까지 높은 품계를 더하고 있으니, 결코 의의가 있는 일이 아니다.
88. 정한강(鄭寒岡)은 광해군이 정사년(1617, 광해군9)에 폐모론(廢母論)을 펼칠 때를 당하여 상소하기를,
“조정에 현재 큰 의논이 있다는 말을 들었사온데, 신(臣)이 들은 바에 따르면 실로 예전에 일찍이 없었던 일이 오늘날 갑자기 부득이하게 발생했다고 하니, 놀랍고 애통하고 절박함을 어떻게 우러러 말씀드리겠습니까. 안으로는 저주(咀呪)를 주재하고 밖으로는 역모에 응하였으니, 모자(母子)의 은혜가 이미 끊어졌습니다. 종묘사직의 원통함이 무엇이 이보다 심하겠습니까. 이 때문에 오늘날 다른 것은 전혀 돌아보지 않고서 다투어 앞장서서 폐모하자는 조치를 주장해 마지않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또 무조(武瞾)의 일을 인용하여 이르기를,
“지금의 상황을 옛날과 비교해 본다면, 모자간의 은혜는 진실로 이미 끊어졌고 종묘사직의 치욕은 진실로 이미 심합니다. 그러나 ‘폐(廢)’라는 한 글자는 추호도 마음에 싹터서는 안 되니, 이 의논이 있는 것은 비록 부득이해서이나 절충(折衷)하는 분별은 마땅히 성상의 충심(衷心)으로 결단해야 합니다.
정론(正論)을 부식(扶植)하고 성상의 효도를 크게 창달하는 것이 어찌 오늘날에 달려 있지 않겠습니까. 묘당(廟堂)에서 계책을 내는 대신과 큰 덕을 갖춘 대유(大儒)들이 어찌 이러한 의논을 일찍 내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얼버무리고 책임을 미루면서 4, 5년의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한마디 말도 꺼내지 않고, 초야(草野)의 유생(儒生)들이 다투어 분노하며 상소하기를 기다린 것은, 어찌 유생의 소견이 반드시 조정의 신하보다 뛰어나고 조정의 신하가 군주를 사랑함이 반드시 소원한 유생들보다 못해서이겠습니까. 이는 반드시 깊이 생각하여 말하기 어려워서였고, 또 한편으로는 혹 울분을 타고 갑자기 터져 나온 것일 것이니, 성명(聖明)하신 군주께서 더욱 유념하여 깊이 살피시고 신중히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될 듯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 상소문은 간행된 《한강집(寒岡集)》 가운데에 수록되어 있는데, 그 주된 뜻을 보면 폐모론에 이견을 세우고자 한 것이나, 모후(母后)에 대한 죄상을 나타냄에 조금도 돌아보지 않고, 도리어 군흉들이 폐모를 청하는 말을 정론(正論)이라 하였고 심지어 그러한 정론을 부식(扶植)해 주기를 청하였으니, 이견을 세우는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가.
당시에 비록 윤리와 의리를 들어서 직언으로 간하여 만류하지는 못할지언정 어떻게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진실로 개탄할 만하다. - 근년에 개간된 《한강집》에는 이 상소문을 삭제하였기 때문에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
89. 우계(牛溪)가 편차(編次)한 《율곡집(栗谷集)》 가운데 〈여이경함서(與李景涵書)〉가 있는데, 여기서 말한 경함(景涵)은 바로 이발(李潑)이다. 우계가 ‘경함(景涵)’ 두 글자를 삭제하고 바로 〈여이발서(與李潑書)〉라고 써서 별집(別集)을 간행하였다.
이는 아마도 이발이 처음에는 율곡과 친하였는데 율곡이 별세한 뒤에 온 힘을 다해서 율곡을 무함하고 헐뜯었으니, 이미 친구의 준례를 따라 자(字)를 쓸 수가 없었고, 또 역적 정여립(鄭汝立)과 친밀하게 사귀다가 연좌되어 붙잡혀 곤장을 맞아 죽었으니, 더더욱 자를 써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계속집(牛溪續集)》 〈여박여룡서(與朴汝龍書)〉 가운데에 이 내용이 대략 보이는데, 범엽(范曄)의 역사책이 사부(四部)에 나열된 것을 가지고 비교하여 논하기까지 하였으니, 그 뜻이 엄격하다고 이를 만하다.
근래 새롭게 간행된 《우계속집》에 다시 제목을 〈여이경함서〔與李景涵書〕〉라고 썼으니, 고쳐 쓴 것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나 지식이 얕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90. 정축년(1637, 인조15) 난리가 안정된 뒤에, 오랑캐 군주가 우리나라에 명하여 자신의 송덕비(頌德碑)를 세우게 하자, 이상 경석(李相景奭)이 글을 짓고 오 판서 준(吳判書竣)이 글씨를 쓰고 여 참판 이징(呂參判爾徵)이 두전(頭篆)을 써서 삼전도(三田渡) 가에 세웠다.
조 판서 경(趙判書絅)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세상 사람들이 문장을 중요시하여 / 世人重文章
자식을 낳으면 반드시 태학사가 되기를 축원하고 / 生兒必祝太學士
세상 사람들이 서법을 중요시하여 / 世人重書法
자식에게 반드시 난정첩(蘭亭帖)을 잡게 하네 / 敎兒必操蘭亭紙
봉각에 출입하여 사륜을 짓고 / 出入蓬閣演絲綸
이두에 붓을 휘갈겨 바른 빗돌과 짝한다오 / 揮灑螭頭配貞珉
하루아침에 명성이 사방에 진동하니 / 一日聲價動四方
사람들이 천상의 사람이라 칭찬하네 / 衆人謂之天上郞
누가 알았으랴 인사는 번복을 좋아하여 / 誰知人事喜反覆
문장과 서법이 도리어 천한 사역(使役)이 될 줄을 / 文章書法還爲役
그대는 삼전도의 일곱 자 비를 보지 못했는가 / 君不見三田七尺碑
문장은 호탕하고 서체는 전갈 꼬리처럼 기이하다네 / 波瀾浩蕩蠆尾奇
다시 전액을 쓴 사람이 있어 모두 세 사람인데 / 復有篆額幷三人
성명이 오랑캐 아이들에게 자자하다오 / 姓名籍籍於胡兒
누추하다 한퇴지의 평회서비(平淮西碑)여 / 陋矣淮西韓退之
뛰어난 문장을 중국 사람만 알게 하였네 / 高詞但使中夏知
라고 하였으니, 그 기롱하고 조소함에 여력(餘力)을 남기지 않았다고 이를 만하다.
91. 오상렴(吳尙濂)이란 자는 오시수(吳始壽)의 조카이다. 내가 일찍이 시원(試院 과거 시험장)에 들어가서 그가 올린 시(詩)를 보니, 내용이 자못 아름다웠으므로 진실로 재주가 있는 자라고 여겼었는데, 그 뒤에 문명이 자자해져서 자기들 가운데 교초(翹楚)가 되었다. 그가 읊은 〈삼전도비(三田渡碑)〉 시에 이르기를,
마포의 오랑캐 글씨로 쓰인 비갈에 / 麻浦胡書碣
외로운 성 포위가 풀리던 날 생각하네 / 孤城憶解圍
천승의 나라라는 말만 들었을 뿐 / 徒聞千乘國
제대로 된 장수 한 명도 보지 못했노라 / 未見一戎衣
장수는 훌륭한 계책이 없고 / 將帥無籌策
문장은 시비가 있구나 / 文章有是非
조종하던 옛길 혼미하니 / 朝宗迷舊道
강한은 어디로 돌아가려는가 / 江漢欲何歸
라고 하였으니, 글귀마다 의미가 있어 참으로 아름다운 작품이다. 그의 훌륭한 재주를 폈더라면 충분히 한 세상에 뛰어날 수 있었을 것인데 요절했다고 하니, 애석하다.
여기의 이른바 ‘문장은 시비가 있구나〔文章有是非〕’라는 구절은 비문을 지은 사람을 기롱한 것인데, 이것을 쓴 사람은 바로 자기의 종증조(從曾祖)이다. 그 또한 마땅히 이러한 기롱을 똑같이 받아야 하니, 홀로 혐의가 없겠는가. 한 번 웃는다.
92. 장암 정공(丈巖鄭公)이 숙묘(肅廟) 말년에 나에게 말씀하기를,
“요사이 매우 마음을 놀라게 할 만한 말을 들었으니, 우리나라가 장차 이적(夷狄)과 금수(禽獸)가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내가 무슨 말씀인가를 여쭙자, 정공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당시 재상 집안의 자제로서 집을 나와 공부하는 자가 있었는데, 담화를 나누는 사이에 말하기를, ‘송(宋) 아무개는 진실로 대역부도(大逆不道)하다.’라고 하였다. 좌중에 우리 무리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힐난하면서 묻기를, ‘소론들이 비록 우암(尤菴)을 미워하기는 하나 감히 역적이라고 지목하지는 못했는데, 그대가 마침내 이런 말을 하는구나. 어찌 남인(南人)에게 부회하여 우암을 효종에게 두 마음을 품은 죄인으로 몰려고 하는가?’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아니다. 남인들이 우암이 효종을 폄하했다고 죄를 얽는 것은 실로 근거가 없으니, 내가 어찌 이런 말을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그렇다면 아마도 바다를 건너 적을 불러들여 날짜를 정해서 대궐을 침범하자는 말로 그의 죄를 이루려는 것인가?’라고 하자, 그 사람이 또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 말은 더욱 황당하여 삼척동자도 믿지 않을 것이니, 내 어찌 이것을 말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다시 묻기를, ‘그렇다면 아마도 마지막까지 기다렸다가 국본(國本)을 정하자는 상소문을 가지고 죄를 삼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이것을 가리킨 것도 아니다. 내가 송 아무개를 역신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따로 있으니, 내 장차 이것을 말해보겠다. 우리나라가 청나라에 복종하여 섬긴 것은 진실로 본심이 아니다. 그러나 이미 표문(表文)을 올려 신하를 칭하였으니, 군신(君臣)의 분별이 이미 정해진 것이다. 그런데 송 아무개가 하찮은 배신(陪臣)으로 천자를 해칠 계책을 도모하여 말마다 복수와 설욕을 칭하면서 비단 이것을 집에서 언급할 뿐만 아니라 감히 군부(君父)에게까지 말하니, 천하에 어찌 이와 같은 패역한 배신이 있단 말인가. 이것이 내가 평소 분노하고 한탄하는 것들이다. 남인들이 얽어 놓은 서너 가지 죄목은 당신 또한 변론하여 밝힐 말이 있겠지만, 내 말과 같은 것은 대의가 찬란하니, 그대가 비록 말을 잘한다고 해도 어찌 감히 한마디 말로써 항변하겠는가. 송 아무개가 이미 스스로 역신이 됨을 꺼리지 않고 또 글을 지어서 지천(遲川)ㆍ노서(魯西) 두 현자를 흠집내고 헐뜯었다. 두 현자의 일은 바로 신하의 절개에 합하는 것인데 자기와 뜻이 다르다고 하여 멋대로 모함하니, 더욱 통탄할 만하다.’ 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옛날에 송(宋)나라 고종(高宗)이 금(金)나라에게 신하를 칭하였는데도, 주자(朱子)는 매번 복수하는 의리를 말씀하였으니, 그렇다면 주자도 역신(逆臣)인가?’라고 하니, 그 사람이 분연히 말하기를, ‘주자라고 하여 어찌 반드시 옳겠는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주자 또한 역신이 됨을 면치 못하는가?’라고 하니, 그 사람이 ‘그렇다.’라고 대답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가 우암을 역신이라 하여 필경 주자와 똑같은 사람으로 부르고 있으니, 진실로 나쁘지 않으나, 그대는 바로 주자가 말씀한 「참으로 오랑캐 종자」라는 것이니, 내 그대와 한 자리에 앉고 싶지 않다.’ 하고 즉시 일어나 나왔다.”
근래 인심이 최씨와 윤씨 집안의 의논에 빠져서 이러한 지극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장차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개탄하여 마지않는다.
93. 요사이 시배(時輩 소론)들은 몽와(夢窩)를 역신이라 주장한다. 당시 한 재신(宰臣)의 아들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속담에 이르기를 ‘위에서 부은 물이 흘러 내려서 발꿈치에 이른다.〔上灌之水流而至趾〕’라고 하였다. 김(金) 아무개 - 청음(淸陰)이다. - 는 배신(陪臣)으로서 숭덕황제(崇德皇帝 태종)의 앞에서 버젓이 누워서 절하는 예를 행하지 않았으니, 이는 바로 역심이 마음속에 쌓여서 그러한 것이다. 지천(遲川)은 청나라 황제가 하사한 초구(貂裘)를 입고 삼가 사배(四拜)하는 예를 행하였으니, 인신(人臣)의 의리는 본디 이와 같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저것과 비교한다면 충신과 역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할아버지가 역신의 짓을 하였으니, 그 손자가 어찌 역신의 짓을 하지 않겠는가. 이상할 것이 없다.”
라고 하였다. 이른바 당시 재신이라는 자가 이때 그 옆에 드러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서 넓적다리를 치며 말하기를,
“너의 말이 참으로 옳고, 참으로 옳다.”
라고 하였다. 이 말은 내력이 매우 분명하여 헛되이 전해진 것이 아니다. 위의 장암이 전한 말씀과 동일한 맥락이니, 더욱 헛되지 않은 말임을 믿을 수 있다.
94. 백사 이공(白沙李公 이항복)이 만년에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여 물러나 노원(蘆原)의 촌사(村舍)에 머물 적에 지은 시에 이르기를,
문득 귀먹은 봉사가 되어서 / 便爲耳食瞽
저물녘 산촌에 들어와 거처하네 / 入處暮山村
듣는 것 없으니 어찌 보는 것 있으랴 / 無聞寧有見
입은 살아 있으나 말하지 못하노라 / 口活未能言
라고 하였으니, 지금 이 시를 읊어보면 그 당시 시세(時勢)의 위태로움을 상상할 수 있다.
내가 향리에 산 몇 년 동안에 세상과 단절되어 서울에서 방문하러 온 자가 없었고 있더라도 입을 닫고 시사(時事)를 말하지 않았는데, 어떤 자가 터무니없는 말을 지어 내어
“이 아무개가 이런 말을 했다.”
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람 마음의 험악함이 백사(白沙) 때보다 더하다고 이를 만하다. 나보다 먼저도 아니고 나보다 뒤도 아니어서〔不自我先 不自我後〕 마침 이 세상을 만난 것은 나쁜 때를 만나 태어났다고 이를 만하니, 고통스럽고 고통스럽다.
95. 나는 사람됨이 무능하고 용렬하여 군자(君子)의 대열에 낄 수 없다. 그러나 타고난 성품이 우직하고 선량하여 남을 해치거나 경계함이 없고 또 남을 시기하고 이기고 상해하려는 마음이 없으니, 비록 내가 중고 시대(中古時代)에 태어났더라도 무능함으로 배척을 받을지언정 악한 사람으로 지목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 말세에 태어나서 세상 사람들을 보니, 기교(機巧)하고 음험하며 경박하고 허탄하며 교만하고 망녕되어서 종종 나의 성미와 부합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와 같은 때에 외람되이 현달한 반열에 올라 저들과 함께 조정에서 같이 일하게 되었으니, 어찌 둥근 구멍과 모난 자루와 같아서 서로 어긋나는 단서가 없겠는가. 이 때문에 종적이 더욱 외로워지고 마음이 더욱 위축되었다.
십여 년 전 욕되게 전조(銓曹)의 장관이 되었을 적에, 갑자기 어떤 사람이 가명(假名)으로 투서(投書)하여 있는 말 없는 말을 다하여 내게 치욕을 주고, 심지어 내가 평소에 간사하고 부정하다고 단정하기까지 하였으니,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이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른단 말인가. 나도 모르게 개연(慨然)히 길게 탄식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나에게 악행이 있는데도 스스로 알지 못하고 남에게 간파당하여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오직 반성하고 스스로 부끄러워하여 더욱 삼가고 수양할 것을 생각할 뿐이다.
96. 나는 운명이 기구하여 작은 일로 갈등을 낳은 적이 종종 있었다. 영남의 감사가 되었을 적에 대구(大丘) 사람 박경여(朴慶餘)가 글을 올려 이르기를,
“막 성주(星州)의 선산(先山)에 비석을 세우려 했는데, 이 지방 사람인 박수하(朴壽河)가 수많은 장정을 동원하여 쫓아내고 저지하니, 금해주기를 청합니다.”
라고 하였다.
박경여가 4, 5년 전에 자기 아버지를 박수하의 선산 근처에 이장하였는데, 박수하가 그에게 소송을 걸었다. 홍 판서 만조(洪判書萬朝)가 그 당시 방백(方伯 관찰사)으로 박경여에게 승소 판결을 내리고 판결문을 써주기를,
“비록 박수하의 산이라고 하더라도, 박경여가 이미 산소를 얻었으니, 박수하는 다시 송사해서 승리한 뒤에 저들의 입석을 금해야 한다. 그러기 전에는 막아서는 안 된다.”
라고 하였다.
이때 나는 체직(遞職)하여 곧 돌아오게 되어 이 일을 담당하고 싶지 않아서 다만 준례에 따라 ‘사처(査處 조사하여 처리하라)’ 두 글자를 써서 성주의 본관(本官) 사또에게 주었다.
성주 목사가 박수하를 체포하여 공초를 받을 적에, 박수하가 공초가 끝날 무렵에 갑자기 쓸데없는 말을 하기를,
“방백(方伯 이의현)은 바로 박경여의 가까운 친척이므로 박경여를 편들어서 타인의 산을 빼앗아 주고자 한다.”
라고 하니, 그 말이 몹시 도리에 어긋나서 도민(道民)이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박경여는 바로 족숙(族叔)인 세최(世最)의 자형(姊兄)이므로 내 진실로 몇 번 만나 본 적이 있으나, 그는 남당(南黨) 사람으로 역적 민암(閔黯)과 이의징(李義徵)과 혼인을 하였고, 그 아들이 또 신사년의 국옥(鞫獄)에 연루되어서, 우리 집안과는 그 심정과 행적이 마치 연(燕)나라와 월(越)나라처럼 다른 것을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는 사실인데, 지금 억지로 가까운 친척이라고 하면서 멋대로 능욕하니, 영남의 풍속이 아무리 사납고 험악하다고 하지만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사체(事體)가 있는 터라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기에 마침내 한차례 형벌을 시행하였는데, 갑자기 박수하가 병으로 죽었다.
이에 박수하의 여러 친족들이 분연히 모두 일어나서 박경여의 아버지 묘를 파서 시신을 태우니, 박경여가 이 기별을 듣고 온 집안이 달려가서 서로 접전을 벌이게 되었다. 산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하는 자들이 부녀자들을 내보내서 남자들을 방어하는 것은 무식한 무리들이 항상 하는 일인데, 박수하의 집에서는 아직 시집가지 않은 딸을 내보내어 막게 하였다. 서로 싸우는 사이에, 박경여의 서족(庶族)인 박취휘(朴就徽)가 박수하의 집안사람에게 살해되었다. 박수하의 집안에서는 이 시신을 감추었는데, 박수하의 딸이 또 칼에 찔려 죽었다.
이에 박경여의 집안은 박수하 집안이 자기 친족을 죽였다고 하고, 박수하의 집안은 또 박경여가 자기 딸을 죽였다고 하여, 피차가 서로 글을 올려 고발하였다. 무덤을 파헤친 일은 전적으로 박수하의 서숙(庶叔)인 박주(朴籒)와 박협(朴筴) 등이 한 짓으로, 남의 무덤을 판 것은 사형죄에 해당되었다. 이에 박수하의 집안에서는 이것을 이미 죽은 한 어린 딸에게 전가하고, 자신들은 그 죄를 벗어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소문내기를,
“박수하의 딸이 효행이 돈독하고 지극해서 자기 아버지가 죽은 것을 애통해 하여 박경여의 아버지 무덤을 손수 파서 열 손가락에서 피가 흐르기까지 하였다.”
라고 하였다.
박경여는 부자로 장례를 매우 후(厚)하게 하였고 또 근 십 년의 오랜 세월이 지나서 회(灰)를 다진 것이 모두 이미 돌이 되었으니, 비록 항우(項羽)와 같은 힘이 있더라도 결코 손가락 끝으로 파서 관(棺)을 드러나게 할 수는 없는데, 이와 같이 말을 하고 또 둘째 딸로 하여금 서울에 가서 등문고(登聞鼓)를 치게 하였다.
이에 서울 사람들이 위로는 경재(卿宰)로부터 아래로는 서리(胥吏)와 하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 입으로 말하기를,
“박씨 집안에 돌연 두 효녀가 나왔다. 손가락 끝으로 회가 다져진 돌을 열었으니, 참으로 이른바 ‘지성(至誠)이면 금석도 꿰뚫는다.〔至誠貫金石〕’라는 것이다.”
라고 하여 다투어 서로 이 말을 전하여 칭찬하고, 끝내 사리에 맞지 않은 것을 알아 배척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으니, 어찌 심히 괴이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박취휘의 아들이 산발한 채 울부짖고 돌아다니면서 아버지의 시신을 찾느라 여러 차례 관부(官府)에 소장(訴狀)을 올리자, 박수하의 집안에서는 또 이르기를,
“그 아비가 실로 죽지 않았는데, 거짓으로 상복을 입고 사람을 속이니, 참으로 패역한 자식이다.”
라고 하니, 사람들이 또 그 말을 믿었다.
이때 내가 대사간이 되어 조정으로 돌아와서 이돈(李墪)이 과거 시험장에서 부정 행위를 저지른 일을 논하였는데, 성주 목사가 마침 체직되고 이돈의 아우가 그 임무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돈의 아우는 성주 고을에 사는 문관인데, 나에게 배척을 받아 파직된 자와 서로 모의하여 노래를 지어서 터무니없는 말로 나를 모함하고 욕하는 소리가 낭자하였고, 이것을 언문(諺文)으로 번역하여 등사(謄寫)하여 경외(京外)에 전파해서 부녀자와 상놈들도 모두 보게 하였다.
또 성주 사람들을 충동질해서 여러 도에 통문(通文)을 내어 연명으로 상소해서 나의 죄를 얽기를 지극히 혹독하게 하였는데, 그 말들은 전혀 허황된 것이었다.
성상께서는 평소 나의 사람됨을 아시고는 저들의 비방을 의심하여 믿지 않으시고 의례적인 비답만을 내리셨고, 나는 현달한 관직에 의망(擬望)될 때마다 비점(批點)을 받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때 조정에서 나와 의견이 다른 자들은 모두 이 일로 나를 배척해서 모함하고자 하였고, 우리 동류 중에서도 안정되지 못한 자들은 중앙에서 협조하였다. 게다가 박씨의 딸은 또 날마다 돌아다니면서 조정의 존귀한 집에 찾아가 울면서 하소연하였다.
이 때문에 비록 평소 마음에 이렇다 할 주장이 없는 자들도 대부분 나의 처사가 잘못되었다고 의심하여, 심지어는
“영공(令公)이 소송 상대를 때려서 죽인 것은 잘못이다.”
라고 하는 자도 있었다. 그래서 4, 5년 전 이미 판결난 송사를 가지고 막 송사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는데, 이는 저들의 말에 현혹되어 그런 것이니,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이 옥사가 오래도록 결정이 나지 않자, 조정에서는 특별히 어사 정찬(鄭纘)을 보내 먼저 조사하여 다스리게 하였는데, 정찬은 사람이 매우 우둔해서 제대로 조사하지 못하고 곧바로 돌아왔다. 또다시 어사 홍치중(洪致中)을 차임해서 보내니, 홍치중은 평소 사람이 세심하고 명민하다고 알려졌는데, 이 사건을 조사함에 매우 요령이 있었다.
홍치중이 계책을 쓰고 기지(機智)를 발휘하여 사정을 은밀히 탐지해서 박주(朴籒) 등이 박경여 아버지의 무덤을 판 내용을 모두 알아내었고, 또 박취휘가 타살로 죽은 정황을 정탐하여 시신을 숨긴 장소를 분명히 알아냈으며, 죽은 박씨 딸의 시신을 꺼내서 《무원록(無寃錄)》을 가지고 반복하여 검사한 끝에, 그녀가 스스로 칼로 찔러 죽은 내용을 매우 분명하게 알아내었다. 이는 박씨 딸이 두 집안이 어지러이 교전하는 가운데 있다가 창졸간에 궁지에 몰려 스스로 자결한 것이었다. 또 사람을 시켜서 박취휘의 시신이 있는 곳에 가서 시신을 발굴하게 하였는데, 허리를 꺾어 뒤집어서 두 조각으로 만들고는 엎어서 묻었다고 하니, 더욱 흉악하고 참혹한 일이었다.
이후로는 여러 말에 현혹되었던 영남 사람들이 비로소 진실을 깨닫게 되어 감히 다시는 이 일을 말하지 못하였고, 박수하의 집에서도 기가 꺾였다.
박수하의 딸은 결국 낙향하였는데, 효녀라는 칭호가 이미 사람들의 이목을 뒤덮고 있었으므로 칭송이 여전히 그치지 않아서, 심지어 동해(東海)의 용맹한 부인과 진여휴(秦女休)에게 견주기까지 하여 시를 짓고 전(傳)을 지어 찬미한 자도 있었다.
내가 사람들의 비방하는 말에 곤욕을 당하고 상소하여 사실을 아뢰자, 성상은 비답에,
“원래 사체(事體)상 형벌을 시행한 것이요 본래 산송(山訟)과는 무관하니, 유생들이 상소문에 모함하여 죄를 엮은 것을 어찌 혐의할 것이 있겠는가. 더구나 뒤에 내가 예전과 같이 관직을 제수하였으니, 그렇다면 나의 뜻을 또한 알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성상은 처음부터 저들의 말을 믿지 않으셨기 때문에 나를 이처럼 해명해 주신 것이었다. 대간(臺諫)들이 상소하여 나를 모함한 자를 귀양 보낼 것을 청하자, 대신(大臣)들이 떼를 지어 일어나 나를 모함한 자들을 구원하고 나를 매우 심하게 비방하여 배척하였는데, 성상께서 대간들의 계사(啓辭)를 윤허하지 않았으니, 나의 고립무원(孤立無援)함을 또한 여기서 알 수 있다.
박수하의 딸이 서울에 머물고 있었던 3년 동안 스스로 말하기를, “아버지의 원통함을 씻지 못하였으니, 스스로 보통 사람과 같이 할 수 없다.”
라고 하여, 나이가 20이 넘은 다 큰 처녀가 대낮에 얼굴을 드러내 놓고 질이 나쁜 완악한 소년들과 손을 잡고 어깨를 나란히 하여 서로 뒤섞인 채 시가(市街) 사이를 다니면서도 편안히 여기고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것을 해괴하게 여기지 않고 말하기를,
“스스로 자기 몸을 아끼지 않으니, 더욱 그 효행(孝行)과 열행(烈行)을 볼 수 있다.”
라고 하였으니, 또한 미혹됨이 심하다고 이를 만하다.
뒤에 영남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이 여자가 시골로 돌아간 뒤에 사람들이 모두 의심하여 청혼(請婚)에 응하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김덕보 무(金德甫楙)가 금산(金山)의 임소에서 휴가를 받아 상경하여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영남에 내려가서 비로소 사정을 자세히 들었는데, 성주 박씨의 일은 하나하나가 실상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서울 안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말은 하나같이 모두 허황된 것이었으니, 세간의 일이 가짜를 가지고 진짜를 이루는 것이 이와 같단 말입니까?”
라고 하고는 탄식하여 마지않았고, 윤길보 헌주(尹吉甫憲柱)도 성주에서 체직하고 돌아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나도 처음에는 자못 그대가 잘못했다고 여겼었는데, 영남에 가서 그 실상을 자세히 안 뒤에야 비로소 그대의 잘못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서울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연무(煙霧) 가운데에 떨어져서 확연히 깨닫지 못하는 자가 아직까지 없지 않았다.
한번 잘못된 말이 선창됨에 여러 의혹들을 풀기 어려움이 마침내 이와 같았으니, 참으로 통탄할 만한 일이다.
이 사건은 본래 자세히 논할 것이 못되나, 당초에 내가 백성들의 풍속을 바로잡고자 했다가 뜻밖에 별건의 사단이 야기되고, 이어 와전된 말이 계속 이어져 진상이 숨겨졌으니, 혹 오래되면 더욱 사람들이 의혹할까 염려되므로 부질없이 기록하는 바이다.
97. 택당 이공(澤堂李公)이 말씀하기를,
“충현(忠賢)을 보고자 하거든 오늘날 재상의 작태가 없는 가운데에서 취하고, 호걸(豪傑)을 보고자 하거든 오늘날 명사(名士)의 작태가 없는 가운데에서 취하고, 훌륭한 문장을 보고자 하거든 오늘날 과문(科文)의 투식이 없는 가운데에서 취하라.”
라고 하였으니, 이 세 말씀은 세상에 드문 명언이라고 이를 만하다.
나는 비록 용렬하고 누추하나 명사와 재상의 작태를 꾸미는 자를 보면 속으로 나쁘게 여겼고, 문장을 지을 적에도 과장의 상투적인 말을 쓰는 것을 싫어하였다. 그러나 이른바 ‘충현ㆍ호걸ㆍ문장’ 세 가지에 있어서 하나도 근사한 바가 없으니, 가소롭다.
98. 국조(國朝) 이래 문형(文衡)을 맡은 자는 권근(權近), 변계량(卞季良), 윤회(尹淮), 권제(權踶), 안지(安止), 정인지(鄭麟趾), 신숙주(申叔舟), 최항(崔恒), 서거정(徐居正), 어세겸(魚世謙), 노공필(盧公弼), 홍귀달(洪貴達), 성현(成俔), 김감(金勘), 강혼(姜渾), 신용개(申用漑), 남곤(南衮), 이행(李荇), 김안로(金安老), 소세양(蘇世讓), 김안국(金安國), 성세창(成世昌), 신광한(申光漢), 정사룡(鄭士龍), 홍섬(洪暹), 정유길(鄭惟吉), 이황(李滉), 박충원(朴忠元), 박순(朴淳), 노수신(盧守愼), 김귀영(金貴榮), 이이(李珥), 이산해(李山海), 유성룡(柳成龍), 이양원(李陽元), 황정욱(黃廷彧), 이덕형(李德馨), 홍성민(洪聖民), 윤근수(尹根壽), 이항복(李恒福), 심희수(沈喜壽), 이정귀(李廷龜), 이호민(李好閔), 유근(柳根), 이이첨(李爾瞻), 신흠(申欽), 김류(金瑬), 장유(張維), 정경세(鄭經世), 최명길(崔鳴吉), 홍서봉(洪瑞鳳), 김상헌(金尙憲), 이식(李植), 이경석(李景奭), 이명한(李明漢), 정홍명(鄭弘溟), 조경(趙絅), 조석윤(趙錫胤), 윤순지(尹順之), 채유후(蔡裕後), 김익희(金益煕), 이일상(李一相), 김수항(金壽恒), 조복양(趙復陽), 김만기(金萬基), 이단하(李端夏), 김석주(金錫胄), 민점(閔點), 남구만(南九萬), 이민서(李敏叙), 김만중(金萬重), 남용익(南龍翼), 민암(閔黯), 권유(權愈), 박태상(朴泰尙), 최석정(崔錫鼎), 오도일(吳道一), 이여(李畬), 서종태(徐宗泰), 최규서(崔奎瑞), 송상기(宋相琦), 김창협(金昌協), 이인엽(李寅燁), 강현(姜鋧), 김진규(金鎭圭), 김유(金楺), 이관명(李觀命), 이광좌(李光佐), 조태억(趙泰億), 이재(李縡), 이병상(李秉常), 불초인 나, 윤순(尹淳), 조문명(趙文命), 이진망(李眞望), 이덕수(李德壽)로 모두 96명인데, 안지, 노공필, 강혼, 이황, 홍성민, 이항복, 정홍명, 김만중, 최규서, 김창협, 이인엽, 이재, 이병상, 이진망은 모두 제수되기만 하였을 뿐 자리에 나와 직무를 행하지는 않았다. - 뒤에 이병상은 동궁(東宮)의 입학에 참례(參禮)하기 위하여 잠시 나왔었다. -
99. 성종(成宗) 임자년(1492, 성종23)에 대제학 어세겸(魚世謙)이 상중에 있어서, 노공필(盧公弼)을 대제학으로 삼으니, 지평 유경(劉璟)은 노공필이 인망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논박하고 체직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는데, 뒤이어 대사헌 김여석(金礪石) 등이 차자를 올려
“노공필은 문명은 있지만 사조(詞藻)는 그의 장기가 아니니, 서둘러 그의 직책을 환수할 것을 청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널리 의논하도록 명하니, 문신 윤필상(尹弼商) 이하 95명이 헌의(獻議)를 하였는데, 혹자는 말하기를,
“허종(許琮), 이봉(李封), 홍귀달(洪貴達), 유순(柳洵), 성현(成俔), 권건(權健), 신종호(申從濩), 노공필이 문형에 적합합니다.”
라고 하였고, 혹자는 말하기를,
“우선 대신할 사람을 내지 말고 어세겸이 상복을 벗기를 기다리되, 그 사이에 외교문서를 지을 일이 생기면 제학(提學)으로 하여금 어세겸의 집에 찾아가서 의논하게 하십시오.”
라고 하였으며, 혹자는 말하기를,
“옛날 대신(大臣)이 겸직한 예가 있으니, 우의정 노사신(盧思愼)이 맡을 만합니다.”
라고 하였다.
나의 9대조이신 복정공(僕正公)은 김일손(金馹孫), 유호인(兪好仁) 등 여러 분과 함께 홍귀달이 적합하다고 건의하셨다. 중론이 통일되지 않았지만 홍귀달을 천거하는 사람이 가장 많아서 마침내 홍공을 대제학으로 삼았다.
문장을 주관하는 임무가 비록 소중하지만, 당하관(堂下官)까지 폭넓게 의논에 참여하여 거의 백여 명의 많은 수에 이르렀으니 이미 상례(常例)와 다르고, 또 노사신은 바로 노공필의 아버지인데 부자간에 문재(文才)의 우열을 논하여 자식을 체직하고 아버지로 대신할 것을 논한 것은 더더욱 처음 보는 일이다. 조종조의 훌륭한 시대에 있었던 순수하고 예스러운 풍모를 여기에서 또한 볼 수 있다.
100. 국조(國朝)의 상신(相臣)은 태조(太祖) 조에는 배극렴(裴克廉), 조준(趙浚), 김사형(金士衡), 심덕부(沈德符)이다.
정종조(定宗朝)에는 이서(李舒), 민제(閔霽), 성석린(成石璘), 하륜(河崙), 이거이(李居易)이다.
태종조(太宗朝)에는 이무(李茂), 권중화(權仲和), 이직(李稷), 조영무(趙英茂), 남재(南在), 유량(柳亮), 유정현(柳廷顯), 박은(朴訔), 한상경(韓尙敬), 심온(沈溫), 강서(姜筮)이다.
세종조(世宗朝)에는 이원(李原), 정탁(鄭擢), 유관(柳寬), 조연(趙涓), 황희(黃喜), 맹사성(孟思誠), 권진(權軫), 최윤덕(崔潤德), 노한(盧閈), 허조(許稠), 신개(申槩), 이귀령(李貴齡), 하연(河演), 황보인(皇甫仁), 남지(南智)이다.
문종조(文宗朝)에는 김종서(金宗瑞), 정분(鄭苯)이다.
단종조(端宗朝)에는 세조대왕(世祖大王), 정인지(鄭麟趾), 한확(韓確)이다.
세조조(世祖朝)에는 이사철(李思哲), 정창손(鄭昌孫), 강맹경(姜孟卿), 신숙주(申叔舟),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 구치관(具致寬), 이인손(李仁孫), 황수신(黃守身), 심회(沈澮), 박원형(朴元亨), 조석문(曺錫文), 홍달손(洪達孫), 최항(崔恒), 구성군 준(龜城君浚), 강순(康純), 김질(金礩)이다.
예종조(睿宗朝)에는 홍윤성(洪允成), 윤자운(尹子雲), 김국광(金國光)이다.
성종조(成宗朝)에는 윤사분(尹士昐), 한백륜(韓伯倫), 성봉조(成奉祖), 윤사흔(尹士昕), 윤필상(尹弼商), 홍응(洪應), 이극배(李克培), 노사신(盧思愼), 허종(許琮), 윤호(尹壕), 신승선(愼承善)이다.
연산조(燕山朝)에는 정괄(鄭佸), 어세겸(魚世謙), 한치형(韓致亨), 성준(成俊), 이극균(李克均), 유순(柳洵), 허침(許琛), 박숭질(朴崇質), 강귀손(姜龜孫), 신수근(愼守勤), 김수동(金壽童)이다.
중종조(中宗朝)에는 박원종(朴元宗), 유순정(柳順汀), 성희안(成希顔), 송질(宋軼), 정광필(鄭光弼), 김응기(金應箕), 신용개(申用漑), 안당(安瑭), 김전(金詮), 남곤(南衮), 이유청(李惟淸), 권균(權匀), 심정(沈貞), 이행(李荇), 장순손(張順孫), 한효원(韓效元), 김근사(金謹思), 김안로(金安老), 윤은보(尹殷輔), 유보(柳溥), 홍언필(洪彦弼), 김극성(金克成), 윤인경(尹仁鏡)이다.
인종조(仁宗朝)에는 유관(柳灌), 성세창(成世昌)이다.
명종조(明宗朝)에는 이기(李芑), 정순붕(鄭順朋), 황헌(黃憲), 심연원(沈連源), 상진(尙震), 윤개(尹漑), 윤원형(尹元衡), 안현(安玹), 이준경(李浚慶), 심통원(沈通源), 이명(李蓂), 권철(權轍)이다.
선조조(宣祖朝)에는 민기(閔箕), 홍섬(洪暹), 이탁(李鐸), 박순(朴淳), 노수신(盧守愼), 강사상(姜士尙), 김귀영(金貴榮), 정지연(鄭芝衍), 정유길(鄭惟吉), 유전(柳㙉), 이산해(李山海), 정언신(鄭彦信), 정철(鄭澈), 심수경(沈守慶), 유성룡(柳成龍), 이양원(李陽元), 최흥원(崔興源), 윤두수(尹斗壽), 유홍(兪泓), 김응남(金應南), 정탁(鄭琢), 이원익(李元翼), 이덕형(李德馨), 이항복(李恒福), 이헌국(李憲國), 김명원(金命元), 윤승훈(尹承勳), 유영경(柳永慶), 기자헌(奇自獻), 심희수(沈喜壽), 허욱(許頊), 한응인(韓應寅)이다.
광해조(光海朝)에는 정인홍(鄭仁弘), 정창연(鄭昌衍), 한효순(韓孝純), 민몽룡(閔夢龍), 박승종(朴承宗), 박홍구(朴弘耈)와 조정(趙挺)이다.
인조조(仁祖朝)에는 윤방(尹昉), 신흠(申欽), 오윤겸(吳允謙), 김류(金瑬), 이정귀(李廷龜), 김상용(金尙容), 홍서봉(洪瑞鳳), 이홍주(李弘胄), 이성구(李聖求), 최명길(崔鳴吉), 장유(張維), 신경진(申景禛), 심열(沈悅), 강석기(姜碩期), 심기원(沈器遠), 김자점(金自點), 이경여(李敬輿), 서경우(徐景雨), 이경석(李景奭), 김상헌(金尙憲), 남이웅(南以雄), 이행원(李行遠), 정태화(鄭太和)이다.
효종조(孝宗朝)에는 조익(趙翼), 김육(金堉), 이시백(李時白), 한흥일(韓興一), 구인후(具仁垕), 심지원(沈之源), 원두표(元斗杓), 이후원(李厚源)이다.
현종조(顯宗朝)에는 나의 외증조부이신 정 충정공(鄭忠貞公 정유성(鄭維城)), 홍명하(洪命夏), 허적(許積), 정치화(鄭致和), 송시열(宋時烈), 홍중보(洪重普), 김수항(金壽恒), 이경억(李慶億), 김수흥(金壽興), 정지화(鄭知和), 이완(李浣)이다.
숙종조(肅宗朝)에는 권대운(權大運), 허목(許穆), 민희(閔煕), 오시수(吳始壽), 민정중(閔鼎重), 이상진(李尙眞), 김석주(金錫胄), 남구만(南九萬), 정재숭(鄭載嵩), 이단하(李端夏), 조사석(趙師錫), 이숙(李䎘), 여성제(呂聖齊), 목내선(睦來善), 김덕원(金德遠), 민암(閔黯), 박세채(朴世采), 윤지완(尹趾完), 유상운(柳尙運), 신익상(申翼相), 윤지선(尹趾善), 서문중(徐文重), 최석정(崔錫鼎), 나의 선부군(先府君)이신 충정공(忠正公 이세백(李世白)), 민진장(閔鎭長), 신완(申琓), 이여(李畬), 김구(金構), 이유(李濡), 서종태(徐宗泰),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頤命), 윤증(尹拯), 조상우(趙相愚), 김우항(金宇杭), 권상하(權尙夏), 조태채(趙泰采), 이건명(李健命)이다.
경종조(景宗朝)에는 조태구(趙泰耈), 최규서(崔奎瑞), 최석항(崔錫恒), 이광좌(李光佐)이다.
금상(今上 영조)의 조정에는 유봉휘(柳鳳輝), 조태억(趙泰億), 정호(鄭澔), 민진원(閔鎭遠), 이관명(李觀命), 홍치중(洪致中), 조도빈(趙道彬), 불녕(不佞 불초)인 나, 심수현(沈壽賢), 오명항(吳命恒), 이태좌(李台佐), 이집(李㙫), 조문명(趙文命), 서명균(徐命均), 김흥경(金興慶), 김재로(金在魯), 송인명(宋寅明)이니 모두 259명이다. - 세조는 감히 함께 넣지 않았다. -
장유, 송시열, 민진장, 윤증, 권상하, 최규서는 모두 제수하는 명에 숙배(肅拜)하지 않았고, 연산조의 정문형(鄭文炯)과 중종조의 이항(李沆), 선조조의 오겸(吳謙)ㆍ정대년(鄭大年)은 제배(除拜)되었다가 취소당하였다. - 의정부의 《상신제명록(相臣題名錄)》이 임진왜란에 소실되었다. 허균이 과방(科榜)을 상고하여 추후에 기록하였는데, 이 가운데 정도전(鄭道傳)과 유만수(柳曼殊), 박가흥(朴可興) 세 사람의 이름이 있으나, 정도전은 판삼군사(判三軍事)로 도평의사(都評議司)를 겸하여 관장하였고 실제로 정승 직책에 제수된 것이 아니며, 유만수는 찬성으로 죽임을 당한 것이 다른 기록에 보이고, 박가흥은 후손들의 묘도문을 근거해보면 정승의 직책은 은혜를 미루어 추증한 것이므로 모두 삭제하였다. 이거이(李居易)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실록에 보이므로 기록하였다. -
101. 우리나라에 과갑(科甲 문과 급제)의 성대함은 순흥 안씨(順興安氏) 집안에 안향(安向), 안우기(安于器), 안목(安牧), 안원숭(安元崇), 안원(安瑗), 안종약(安從約), 안구(安玖), 안지귀(安知歸), 안호(安瑚), 안처선(安處善), 안정(安珽)의 11대가 문과에 올랐다.
광주 이씨(廣州李氏)는 이집(李集), 이지직(李之直), 이인손(李仁孫), 이극감(李克堪), 이세우(李世佑), 이자(李滋), 이약빙(李若氷), 이홍남(李洪男), 이민각(李民覺), 이정면(李廷冕)의 10대가 문과에 올랐다.
나주 정씨(羅州丁氏)는 정자급(丁子伋), 정수강(丁壽崗), 정옥형(丁玉亨), 정응두(丁應斗), 정윤복(丁胤福), 정호선(丁好善), 정언벽(丁彦璧), 정시윤(丁時潤), 정도복(丁道復)의 9대가 문과에 올랐다.
남양 홍씨(南陽洪氏)의 홍경손(洪敬孫), 홍윤덕(洪潤德), 홍계정(洪係貞), 홍춘경(洪春卿), 홍성민(洪聖民), 홍서익(洪瑞翼), 홍명구(洪命耈), 홍중보(洪重普)와 풍천 임씨(豐川任氏)의 임열(任說), 임영로(任榮老), 임장(任章), 임선백(任善伯), 임중(任重), 임상원(任相元), 임수간(任守幹), 임광(任珖)은 8대가 모두 문과에 올랐다.
원주 원씨(原州元氏)는 원즙(元檝), 원식(元植), 원격(元格), 원적(元樀), 원철(元㯙), 원절(元梲)의 6형제가 문과에 올랐다.
단양 우씨(丹陽禹氏)의 우홍수(禹洪壽), 우홍부(禹洪富), 우홍강(禹洪康), 우홍득(禹洪得), 우홍명(禹洪命)과 전의 이씨(全義李氏)의 이예장(李禮長), 이지장(李智長), 이함장(李諴長), 이효장(李孝長), 이서장(李恕長)과 광주 이씨의 이극배(李克培), 이극감(李克堪), 이극증(李克增), 이극돈(李克墩), 이극균(李克均)과 함양 박씨(咸陽朴氏)의 박거인(朴巨鱗), 박형인(朴亨鱗), 박홍인(朴洪鱗), 박붕인(朴鵬鱗), 박종인(朴從鱗)과 남원 윤씨(南原尹氏)의 윤구(尹昫), 윤서(尹曙), 윤길(尹▼(日+吉)), 윤철(尹㬚), 윤탁(尹晫)과 풍산 김씨(豐山金氏)의 김봉조(金奉祖), 김영조(金榮祖), 김연조(金延祖), 김응조(金應祖), 김숭조(金崇祖)와 해주 정씨(海州鄭氏)의 정식(鄭植), 정익(鄭榏), 정석(鄭晳), 정박(鄭樸), 정적(鄭樍)과 청송 심씨(靑松沈氏)의 심백(沈栢), 심상(沈相), 심벌(沈橃), 심방(沈枋), 심탱(沈樘) 등은 5형제가 모두 문과에 올랐다. 이보다 수가 적은 자는 너무 많아서 다 기록하지 않는다.
102. 조선조에서는 양남(兩南) 지방의 인물이 가장 현달하였으니, 경주(慶州)에는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고, 안동(安東)에는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과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과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과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고, 상주(尙州)에는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과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와 창석(蒼石) 이준(李埈)이고, 성주(星州)에는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동강(東崗) 김우옹(金宇顒)이고, 진주(晉州)에는 남명(南冥) 조식(曺植), 보덕(輔德) 조지서(趙之瑞)이고, 대구(大丘)에는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이고, 밀양(密陽)에는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고, 선산(善山)에는 하위지(河緯地) 선생과 경은(耕隱) 이맹전(李孟專)과 신당(新堂) 정붕(鄭鵬)과 송당(松堂) 박영(朴英)이고, 인동(仁同)에는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고, 함양(咸陽)에는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과 옥계(玉溪) 노진(盧禛)이고, 청도(淸道)에는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과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이고, 합천(陜川)에는 야천(冶川) 박소(朴紹)이고, 영천(永川)에는 사간(司諫) 곽순(郭珣)이고, 함안(咸安)에는 의정(議政) 어세겸(魚世謙)이고, 금산(金山)에는 매계(梅溪) 조위(曺偉)이고, 영천(榮川)에는 화포(花浦) 홍 선생(洪先生 홍익한(洪翼漢))이고, 예천(醴泉)에는 수헌(睡軒) 권오복(權五福)과 의정(議政) 정탁(鄭琢)이고, 용궁(龍宮)에는 참판 문근(文瑾)이고, 함창(咸昌)에는 문광공(文匡公) 홍귀달(洪貴達)과 양정공(襄靖公) 채수(蔡壽)와 교리 권달수(權達手)이고, 고령(高靈)에는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이고, 현풍(玄風)에는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장군 곽재우(郭再祐)이고, 예안(禮安)에는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와 월천(月川) 조목(趙穆)이고, 안음(安陰)에는 갈천(葛川) 임훈(林薰)과 동계(桐溪) 정온(鄭蘊)이고, 칠원(漆原)에는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고, 산음(山陰)에는 덕계(德溪) 오건(吳健)이고, 사천(泗川)에는 구암(龜巖) 이정(李楨)이 있다.
전라도 나주(羅州)에는 금남(錦南) 최부(崔溥)와 눌재(訥齋) 박상(朴祥), 사암(思菴) 박순(朴淳)과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와 백호(白湖) 임제(林悌)이고, 광주(光州)에는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과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 장군 김덕령(金德齡)과 금남(錦南) 정충신(鄭忠信)이고, 남원(南原)에는 사인(舍人) 정황(丁熿)과 병사 황진(黃進)이고, 장성(長城)에는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이고, 익산(益山)에는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이고, 김제(金堤)에는 찬성 이계맹(李繼孟)이고, 영암(靈巖)에는 소은(素隱) 신천익(愼天翊)이고, 영광(靈光)에는 수은(睡隱) 강항(姜沆)이고, 보성(寶城)에는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이고, 창평(昌平)에는 송강(松江) 정철(鄭澈)과 기옹(畸翁) 정홍명(鄭弘溟)이고, 태인(泰仁)에는 일재(一齋) 이항(李恒)이고, 강진(康津)에는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이고, 해남(海南)에는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과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과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이니, 이상의 분들은 유현(儒賢)과 절개를 지킨 선비, 문인과 명신, 양장(良將) 아닌 이가 없다.
기타 경재(卿宰)와 시종관과 훌륭한 행실을 닦으면서 스스로 삼간 선비가 매우 성대하게 함께 배출되어 조정에 나열된 자 중에 양남 지방 사람이 거의 절반을 넘었으니, 이 때문에 양남 지방을 칭하여 인재의 창고라고 하였다. 그런데 인조조 이후로는 점차 예전에 미치지 못하더니, 지금에는 더욱 쇠하여 말할 만한 것이 못 된다.
103. 고조가 같은 사람이 팔촌이 되니, 팔촌은 바로 삼종형제이다. 조금 먼 친척이기는 해도 이들은 똑같이 친족과 외척인데, 세상 사람들은 족보의 계보(系譜)에 밝지 못하여 대부분 이들을 길을 오가는 사람처럼 무관심하게 보고 있다.
선친께서 일찍이 이것을 좋지 않게 여기셔서 〈팔고조자손보(八高祖子孫譜)〉를 만드시다가 책을 완성하지 못하셨으므로 불초가 뒤이어 착수하였으나 또한 완성하지 못하니, 이에 우선 내외 팔고조를 삼가 취하여 아래에 기록한다.
조부의 조부는 대사간 휘 사경(士慶)이고 조부의 외조부는 좌찬성 여주 이공(驪州李公) 휘 상의(尙毅)이며, 조모의 조부는 좌의정 청음(淸陰) 선생 안동 김공(安東金公) 휘 상헌(尙憲)이고 - 생조부(生祖父)는 장단 부사(長湍府使) 휘 상관(尙寬)이다. - 조모의 외조부는 청주 목사(淸州牧使) 연안 김공(延安金公) 휘 래(琜) -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휘 제남(悌男)의 아드님이다. - 이다.
외조부의 조부는 승문원 박사 영일 정공(迎日鄭公) 휘 근(謹) - 우의정 휘 유성(維城)의 선고이다. - 이고 외조부의 외조부는 감역(監役)을 지낸 전주 이공(全州李公) 휘 구함(久涵) - 평사(評事) 휘 목(穆)의 증손이고 부제학 휘 세장(世璋)의 손자이고 승지 휘 철(鐵)의 아드님이다. - 이며, 외조모의 조부는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낸 남양 홍공(南陽洪公) 휘 대성(大成) - 화포 선생 휘 익한(翼漢)의 선고이다. 화포 선생의 생부는 생원 휘 이성(以成)이다. - 이고 외조모의 외조부는 호조 정랑을 지낸 능성 구공(綾城具公) 휘 곤원(坤源) - 이조 좌랑 휘 수복(壽福)의 손자이고 홍문관 교리 휘 변(忭)의 아드님이다. - 이다.
104. 우리나라의 유명한 성씨는 이(李), 김(金), 박(朴), 정(鄭), 윤(尹), 최(崔), 유(柳), 홍(洪), 신(申), 권(權), 조(趙), 한(韓)이고, 오(吳), 강(姜), 심(沈), 안(安), 허(許), 장(張), 민(閔), 임(任), 남(南), 서(徐), 구(具), 성(成), 송(宋), 유(兪), 원(元), 황(黃)이 그 다음이며, 조(曹), 임(林), 여(呂), 양(梁), 우(禹), 나(羅), 손(孫), 노(盧), 어(魚), 목(睦), 채(蔡), 신(辛), 정(丁), 배(裵), 맹(孟), 곽(郭), 변(邊), 변(卞), 신(愼), 경(慶), 백(白), 전(全), 강(康), 엄(嚴), 고(高)가 또 그 다음이다.
희성(稀姓)은 전(田), 현(玄), 문(文), 상(尙), 하(河), 소(蘇), 지(池), 기(奇), 진(陳), 유(庾), 금(琴), 길(吉), 연(延), 주(朱), 주(周), 염(廉), 반(潘), 방(房), 방(方), 공(孔), 왕(王), 설(偰), 유(劉), 태(泰), 탁(卓), 함(咸), 양(楊), 설(薛), 봉(奉), 대(大), 마(馬), 표(表), 은(殷), 여(余), 복(卜), 예(芮), 모(牟), 노(魯), 옥(玉), 구(丘), 선(宣)이고, 도(都), 장(蔣), 육(陸), 위(魏), 차(車), 형(邢), 위(韋), 당(唐), 구(仇), 옹(邕), 명(明), 장(莊), 섭(葉), 피(皮), 감(甘), 국(鞠), 승(承), 공(公), 석(石)이 그 다음이다.
벽성(僻姓)은 인(印), 석(昔), 공(龔), 두(杜), 지(知), 견(甄), 어(於), 진(晉), 오(伍), 척(拓), 야(夜), 빈(賓), 문(門), 우(于), 추(秋), 환(桓), 호(胡), 쌍(雙), 이(伊), 영(榮), 사(思), 소(邵), 공(貢), 사(史), 이(異), 도(陶), 방(龐), 온(溫), 음(陰), 용(龍), 제(諸), 부(夫), 경(景), 강(强), 호(扈), 전(錢), 계(桂), 간(簡)이고, 단(段), 팽(彭), 범(范), 천(千), 편(片), 갈(葛), 돈(頓), 내(乃), 간(間), 노(路), 평(平), 풍(馮), 옹(翁), 동(童), 종(鍾), 풍(酆), 종(宗), 강(江), 몽(蒙), 동(董), 양(陽), 양(揚), 장(章), 상(桑), 장(萇), 정(程), 형(荊), 경(耿), 경(敬), 영(寗), 경(京), 순(荀), 정(井), 원(原), 원(袁), 만(萬), 반(班), 원(員), 견(堅), 건(騫), 연(燕), 시(時), 부(傅), 구(瞿), 혜(嵇), 미(米), 애(艾), 매(梅), 뇌(雷), 시(柴), 섭(聶), 포(包), 하(何), 화(和), 하(賀), 화(花), 화(華), 가(賈), 하(夏), 마(麻), 우(牛), 승(僧), 후(侯), 곡(曲), 백(栢), 적(翟), 필(畢), 곡(谷), 궁(弓), 종(種), 방(邦), 양(凉), 양(良), 방(芳), 경(卿), 형(刑), 영(永), 승(乘), 등(登), 승(昇), 승(勝), 신(信), 순(順), 준(俊), 번(藩), 단(端), 선(鮮), 천(芊), 아(牙), 수(水), 미(彌), 오(吾), 주(珠), 부(斧), 보(甫), 부(部), 소(素), 부(附), 범(凡), 고(固), 태(台), 재(才), 대(對), 표(標), 초(肖), 나(那), 과(瓜), 화(化), 수(壽), 우(祐), 가(價), 심(尋), 삼(森), 점(占), 범(汎), 극(克), 욱(郁), 익(翌), 택(宅), 직(直), 칙(則), 택(澤), 녹(綠), 혁(赫), 책(冊), 탁(濯), 골(骨), 촉(燭), 율(律), 물(物), 별(別), 실(實), 필(弼), 합(合), 먀(乜), 궉(鴌)이 그 다음이다.
복성(複姓)은 남궁(南宮), 황보(皇甫), 선우(鮮于), 석말(石抹), 부여(扶餘), 독고(獨孤), 영호(令狐), 동방(東方), 서문(西門), 사마(司馬), 사공(司空)이니, 총 298성씨인데 상놈의 벽성은 반드시 누락된 것이 있을 듯하다.
을사년(1725, 영조1) 봄에 내가 적소로부터 돌아와서 정자(程子)의 서감(西監)의 예를 따라 한번 사은하고 곧 물러가려고 하였는데, 마침 세자의 책봉을 만났고 또 사국(史局)에 제수하는 명령이 있었다.
지난 신축년(1721, 경종1)에 내가 편수하던 역사책이 아직 끝나지 않아서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었으며, 또한 이 기회에 숙종(肅宗)의 우악(優渥)하신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여, 《숙종실록》이 완성하는 날을 치사(致仕)하는 날로 기약하여 수고로움을 피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일을 감당해 내었다.
그러나 실록의 일이 거의 끝나갈 무렵, 별안간 조정에 큰 변고의 조처가 있어서 죄를 얻고 낙향하여 치사하려던 초심을 끝내 드러내지 못했으니, 가소롭다.
도산(陶山)의 선영 아래에 숨어 지내면서 세상일을 사절하여 일삼을 만한 것이 없으므로, 귀로 듣고 눈으로 보며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번번이 기록하였으니, 진실로 자질구레하여 말할 것이 못되나 또한 취할 만한 한두 가지가 없지 않을 것이다. 우선 이것을 예전에 지은 《운양만록(雲陽漫錄)》의 뒤에 붙인다.
병진년(1736, 영조12) 중춘(中春)에 도산의 늙은이는 기록하다.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