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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 어제 사실 괴산에 무슨 약속이 있어서 가기로 했는데, 사흘 전까지만 해도 말이 안 되는데, 가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래도 기다려보자. 그런데, 한 이틀 전부터 음성이 돌아왔어요. 어제부터는 요 정도로 얘기를 할지 알게 됐습니다. 잘 들리시죠? (네.) 제 귀는 전에도 어두웠지만, 이번 감기에 효과가 있어서 (웃음) 그래서, 저는 이만큼 들었으면, 그만큼 그래서 싱잉볼 소리도 못 듣고, 다나가 뭐 얘기하는 것 같은데, 한마디도 못 들었어요. 안 들려요. 소리가. 요새 저는 요즘 아주 적막강산으로서 살고 있습니다. 그냥 옆에서, 바로 옆에서, 이 귀에 대고 얘기를 해야 내가 알아들을 정도예요. 그러니까, 전엔 이렇게 심하지 않았는데 옆에서 얘기하면 다 알아 그랬어요. 어떨 때는 참 귀머거리가 이런 세상 살고 있구나. 그런 거 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제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고 계시니까 정말 들리죠? (네.)
참 신기하다. 정말 신기해요. 그래도 얼마나 고맙습니까? 여러분 오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저 요즘 어제 괴산 가서도 그런 얘기 했는데요. 요즘 그렇습니다. 요즘은 제가 일부러 그렇게 생각하려고 하는 건 아닌데, 저절로 생각이 돼요. 오늘 저녁에 내가 이 세상을 떠날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이 자꾸 들어요. 일부러 하려고 하는 건 아닌데, 어쩌면 오늘도 여기 이 방에서 장자 읽기 모임, 내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하고 가는 것일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일부러 아는 건 아니에요. 근데 그런 생각이 자꾸 들어요. 사실은 그게 맞는 말이거든요. 정말 내일 장담할 수 없잖아요. 내일 내가 여기 있을 거라고 하는 건 그냥 사실을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매 순간순간이 참 아주 뭐라 할까요? 소위 속된 말로 허투로 보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마지막에 내가 저 사람 마지막 보는 건데, 그냥 겉으로만 슬쩍 이렇게 만나기가 좀 어려워요. 그래, 지금도 그런 심정으로 자리에 앉았습니다. 기분 나쁘지 않죠? (웃음)
아메리카 원주민 가운데 어느 부족이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그렇게 가르친대요. 너희들이 살 때에 오른쪽 어깨에서 한 손 하나 떨어질 만큼, 거기다가 내 송장을 놓고 다녀라. 그런 얘기했대요. 자기 죽은 자기 송장, 있을 거 아니에요? 언젠가는 그렇죠? 그거를 요즘 여기다 놓고 다니라는 거죠. 뭔 말이겠어요? 항상 죽음을 의식하면서 살아라. 그런 얘기 말하자면, 금방 내가 될 수 있어요. 그렇다면, 나는 여기서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자기 죽음을 놓고 결단할 때, 그 결단이 잘못될 리가 없다고 봐요. 그렇지 않겠어요? 내가 마지막 먹는 음식인데, 어떻게 그걸 아무렇게나 먹어요. 내가 마지막 보는 사람인데, 어떻게 저 사람을 건성으로 대할 수가 없겠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게 참 고맙게 생각합니다. 제가 일부러 그렇게 생각하려고 한 게 아니고, 자꾸 그런 생각이 드니까, 실제로 이제 갈 날이 얼마 남았다. 그런 생각도 들면서 언제 가도 좋다. 언제 가도 괜찮다. 하는 그런 마음은 있어요. 왜냐하면, 이 세상에 내가 더 하고 싶은 일이 별로 없고, 해야 하겠다는 사명 같은 것도 별로 없고, 이제 그래요. 왜 사냐? 그러니까, 아직 안 죽었으니까, 그렇게 얘기할 수 있어요. 하나님이 아직 안 데려가셨으니까, 살지. 뭐 살아 있으니까, 살지.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읽으려고 하는 게 이제 하는 이야기는, 물론 하는 소리,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조금 서울서 열차 타고 들리지? 진짜? (웃음) 내 귀 안 들리니까, 이게 자꾸 의식이래. 정말 들리나 하고. 근데, 오늘 열차 타고 내려오다 보니까, 좀 몸이 고단하더라고요. 어제 괴산에서 한 2시간 넘게 얘기를 했어요. 얘기 하다 보니까, 이렇게 문답 주고받고 하다 보니까, 그러니까, 이제 저녁에 좀 자긴 했습니다마는 오늘 고단하더라고요. 그래서, 열차 타고 내려오면서 그래서 아주 꾸벅꾸벅 졸다 왔습니다. 와서 이제 제가 1시 반에 도착해서 자허가 차에 태워서 여기 왔는데, 이제 제가 1시간이라도 좀 누워 있어야 되겠다. 그런 생각하고 다 가라 그러고, 제가 여기 좀 누워 있었어요. 이렇게 있는데, 누가 뭐라고 그래요? 나한테 뭐라 하냐면, “야, 그렇게 꾀병 부리지 말고 일어나!” (웃음) 맞아요. 내가 괜히 고단하다고 생각해서 누워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던 거지. 정말 누워 있어야 할 건 아니거든요. 이유가 없어요. 그게 소위 내 생각에 내가놀아나는 거야. 꾀병이죠. 꾀병. 멀쩡한데, 일어나서 오늘 우리 함께 이 대목을 읽어봤습니다. 읽어보면서 하늘소리 얘기 2편, 굉장히 길어요. 이걸 제가 쭉 읽으면서, 참 제가 쓴 책인데도, 50대 때 썼을 거라고 보는데, 이렇게 말이 많았구나. 그런 생각하면서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무슨 얘기를 하나. 하다가, 일단 한번 본문을 읽어보는 게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요. 어떻게 하냐면, 55페이지부터 63페이지까지 거기를 한번 읽어볼까 하고 있습니다. 그 뒤에도 길게 이어지는데요. 사실은 앞에 얘기를 부연 설명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가셔서 각자 자기 책을 읽어보시면 될 것 같고요. 오늘은 고기만 읽어볼까 생각합니다. 읽어보기 전에 나한테 한번 부탁해 볼까요?
그 아까 그 싱잉볼 한번 울려봐 주세요. 됐어요. 다들 들으셨죠? 이게 소리입니다. 그렇죠? 소리, 사운드 라고 말할 수 있겠죠 사운드, 저게 어디서 났을까요? 저 소리가 어디서 났죠? 그것도 몰라요? (웃음) 싱잉볼에서 났잖아요. 싱잉볼이 없었으면, 여러분 저 소리 못 들어요. 그렇죠? 싱잉볼에서 나와서 그러나, 싱잉볼이 냈습니까? 사람이 냈어요. 그냥 싱잉볼이 자기가 내놓은 건 아니란 말이지. 라떼가 없었으면 싱잉볼 소리를 못 내죠. 백날 기다려봐도 소리 안 납니다. 라떼가 땅을 치니까 소리가 났어요. 그럼, 라떼가 낸 겁니까? (아니요.) 그 소리를 라떼가, 저 여자가 냈어요? (웃음) 저 여자가 아무리 재주가 많아도, 저 싱잉볼이 없으면, 소리를 못 냅니다. 그렇죠? 묘한 겁니다. 소리뿐이 아니에요. 지금 제가 말하죠. 말, 누가 아는 거지요? 누가 지금 이 말을 하고 있어요? 뭐라니? (선생님이 하시는 거래요.) 할 테니까 들어봐. (웃음) (안 들려.) 여러분이 여기 앉아 있지 않는데, 내가 아까부터 중얼중얼 뭐라고 말했다면, 난 정신이 이상자예요. 그렇죠? 말은 말하는 사람 혼자서는 할 수가 없어요. 안 그래요? 듣는 귀가 있어야 말하는 입이 있단 말이지. 독백 있죠? 독백? 지가 하고 자기가 듣는 거야. 그건 자기가 말하고 자기가 들어요. 그건 가능해. 그러나, 말은 말하는 사람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거야. 듣는 사람이 있을 때 말해라. 그 듣는 사람이 있어 봐야 말을 하는 사람이 입을 다물고 있으면 안 나오죠. 그래, 그런 겁니다. 근데, 우리는 보통 이거 누가 했다. 이거 누가 낳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지 않아요? 안 그렇습니까? 훈민정음 누가 만들었어요? 선생님이잖아. 뭐라고 가르쳤어요? 훈민정음을 누가 창조했어요? (세종대왕이요.) 다 그렇게 써야 시험 점수 맞는 거 아니예요? (웃음) 그럼, 정말 세종대왕이 했어요? 세종대왕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나라 말씀이 글과 참 맞지 아니하야. 백성이 매우 불쌍하여 내가 이 말과 글을 일치시키는 그런 정음을 반포한다. 머리말을 썼잖아요. 말과 문자, 글, 이게 안 맞아. 한문이고, 말로 한국말이고, 글은 한문이고, 이게 서로 안 맞아. 그러니까, 이게 한문을 못 배운 사람들은 글을 못 쓴단 말이야. 이거 문제를 해결해야 되겠다. 싶어서 이 글을 만들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니까, 어리석은 백성이 없으면 훈민정음 안 나와요. 그렇죠? 근데, 우리는 훈민정음은 세종이 창조하셨습니다. 하고 넘어간단 말이지. 그렇다고. 아니잖아요. 그렇죠? 그럼, 어리석은 백성들만 있어가지고 훈민정음 안 나오죠. 묘한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일거수 일투족 이게 도대체 뭐냐. 하는 얘기를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어디다가 놓고, 이거 내가 했다고 하는 그런 헛소리를 하고 있냐, 이놈들아. 그 얘기를 지금 하고 있는 거야. 그렇죠?
아주 옛날 얘기인데요.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얼마 안 돼서, 제가 택시를 타고 저 김포 쪽에 무슨 아유 다리 이름이 잊어 버렸어, 그 한강 다리를 건너가는데, 기사가 그래요. 박대통령이 이 다리 놓고 죽었어요. (웃음) 그러니까 아마 그 다리, 이렇게 개통식 하고 얼마 안 있어서 사망하셨는가 봐요. 그러니까, 박대통령이 이 다리 놓고 죽었대. 내가 박대통령이 누군데요?
되게 힘 세네. 이 무거운 다리를 어떻게 혼자 놔, (웃음) 그렇게 사실은 말이 안 되는 말을 하면서 우리가 살고 있어요. 뭘 해놓고, 이거 내가 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또, 어떤 사람은 이거 니가 했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잘못했으니까, 너 벌 받아야 한다. 우리가 지금 그런 세상 살고 있죠? 그렇죠? 뭐가 잘했으면 이건 내 공이다. 내가 잘한 것이다 그러고, 이게 다 터무니 없는 소리다. 라고 하는 얘기를 지금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정도 얘기하고요.
학생 : 선생님 한번 읽어볼까요? 그럼 우선 본문만 본문 읽어주실 분 안 계시죠? 제가 읽겠습니다. 남광 자기가 책상에 기대 앉아 하늘을 우러러 길게 숨을 내쉬니 그 멍한 모습이 마치 짝을 잃은 것과 같았다. 안성자유가 앞에 모시고 서 있다가 말하기를 어찌 되신 겁니까? 몸이 참으로 마른 나무 같고 마음이 참으로 식은 제처럼 될 수 있는 걸까요? 지금 책상에 기대신 분은 앞서 책상에 기대셨던 분이 아닙니다. 자기가 이르기를 어나 훌륭하구나 그런 질문을 하다니. 방금 내가 나를 여의었는데 니가 알겠느냐? 너는 사람 소리를 들었지만 땅 소리는 아직 못 들었을 것이다. 땅 소리는 듣는다 해도 하늘소리는 듣지 못할 것이다. 자유가 말하기를 삶과 그 위치를 묻습니다. 자기 대답하되 큰 덩어리가 하품을 하면 그것을 일컬어 바람이라고 한다. 스스로 일어남이 없지만 잃었다 하면 온갖 구멍이 성내에 울부짖는데, 자네 홀로 그 윙윙거리는 소리를 못 들었을 리 없다. 산과 숲의 높은 봉우리와 배가 아름 되는 큰 나무 구멍들이 콧구멍 같고 입구멍 같고 귓구멍 같고 가름보 같고, 술장 갖고 절구 같고 깊은 웅덩이 같고 얕은 웅덩이 같은지라 물이 돌에 부딪히는 듯 화살이 날아가는 듯, 나무라는 듯 들여마시는 듯 부르짖는 듯, 큰 소리로 우는 듯, 큰 구멍에서 궁굴려 나오는 듯 지적이는 듯한 소리를 내는데, 앞에 소리가 우하고 부르면 뒤에 소리가 워하고 대답하고, 산들 바람이 불면 가볍게 화답하고 거센 바람이 불면 거칠게 대답하다가 사나운 바람이 그치면 온갖 구멍이 고요해진다. 자네 홀로 바람이 자고 나뭇가지들이 흔들흔들한들한들하는 것을 못 보았을 리 없네. 자유가 말하기를 땅 소리는 온갖 구멍에서 나는 것이오. 사람 소리는 피리에서 나는 것이려니와 삼과 하늘소리가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자기가 대답하되 무릎 소리를 내는 것은 망가지가 서로 다르니 모두 조로 말미암아 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스스로 소리를 낸다고 하지만 소리를 나게 하는 것은 누구겠느냐?
선생님 : 예 예 그렇습니다. 본문 다 읽었죠. 지금 저기 두 사람이 딴 짓하고 있어서 쟤들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요. (웃음) 괜찮아, 괜찮아. 이 남광자기라고 하는 사람이 책상 위에 기대 앉아 하늘을 우러러 길게 숨을 내쉬니 그 멍한 모습이 마치 짝을 잃은 것과 같았다. 저 장자가 갈 때까지 간 사람의 모습. 얘기할 때 쓰는 단어가 소위 좌망에 들었다. 그런 말을 합니다. 좌망에 들었다. 그러니까 좌라고는 앉아 있다는 뜻이고요. 망이라는 건 잊을 망자 잊어버린다. 망각한다 할 때 망자. 그러니까 앉은 자리에서 뭘 잊어버렸다 뭘 잊어버렸을까요? (자기를) 여기서 말하면, 상하라 말하여 나를 잃어버렸다 그런 겁니다. 나, 그거를 장자는 갈 때까지 한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나라는 게 없는 사람이다. 내가, 나를, 나의 것이 나라고 하는 말이 그 사람한테서 없었을 거예요. 그 사람을 장자는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다. 그 얘기를 합니다. 그거를 이제 비유를 들어서 얘기하면서 소리를 세 가지를 내요. 소리, 소리는 아까 말한 것처럼 우리 행동이라는 말과 붙여서 대화와 같은 얘기예요. 이거 어디서 났어? 그러면 이 종에서 났지? 그 종이 냈어? 아니지? 이런 겁니다. 이거 누가 했어? 아무개가 했지? 진짜 그 사람이 했어? 아니지? 그런 겁니다. 이거 훈민정음 세종대왕이 했어? 진짜야? 아니네? 이런 거. 그래서, 이제 여기서 장자가 이야기하는 건 사람 소리, 땅 소리, 하늘 소리, 세 가지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죠? 땅 소리, 사람 소리에요. 우리가 주고받는 말 소리, 사람들이 얘기하는 소리죠. 그거는 누구나 다 귀머거리 아니면 다 듣잖아요. 듣는 거, 이거에 대해서 의심할 거 없어요. 그렇죠? 분명하니까. 그다음에 이제 땅 소리, 여기 남광자기가 안성자에게 묻는 거요. 내가 사람 소리는 들었겠지만, 땅 소리 들어봤냐? 땅 소리라고 하는 건, 땅이 내는 소리라고 얘기할 수 있는데, 그건 자연의 소리라고. 소리, 자연의 소리, 사람의 의도가 들어있지 않은 바람 소리라든가 개울물이 흘러가는 소리라든가 벼락 치는 소리라든가 이런 거 있죠. 자연을 내는 소리예요. 여기에는 어떤 의도가 없어요. 사람이 하는 말에는 의도가 있죠. 뜻이 있어요. 뭐를 내가 전해야 되겠다는 그게 있으니까 말하는 거예요. 인간의 말에는 의도가 있어요. 뜻이 있다고. 자연에 말하는 소리에는 없단 말이죠. 그냥 나는 거예요. 바람이 부니까 굵은 구멍에서 굵은 소리가 나고 좁은 구멍에서 좁은 소리가 나는 거죠. 그래서, 사람 소리하고 땅 소리를 구분하려면 사람 소리에는 그 소리가 그 사람한테 나온다면, 그 사람의 의도가 섞여 있는 거야. 어떤 행동을 할 때, 뜻이 있어서 행동한단 말이죠. 그렇죠? 훈민정음을 세종대왕이 만들었을 때, 계획한 뜻이 있는 거예요. 백성들로 하여금 좀 편하게 살게 해야 되겠다. 하는 그런 뜻을 펼치기 위해서 혼민정음을 만들었단 말이죠. 우리 사람이 하는 행동을 잘 보면 다 괜히 하는 건 별로 없어요. 있긴 있어요. 괜히 한 것이 있습니다. 뭐가 있을까요? 그건 안 배워도 돼요. 안 배워도 할 줄 알아요. 뭐가 있어요? (숨쉬는 거)
그거 안 배워요. 숨 쉬는 법 가르치는 학교 없어요. 그래도 해요. 그렇죠? 숨쉬기. 그걸 그냥 하는 거야. 숨 쉬려고 쉬는 게 아니에요. 그렇죠? 그러니까, 숨 쉬는 거 숨 잘못 쉬었다고 감옥 가는 사람 없어요. (웃음) 거기는 죄가 없어요. 잘못이 없어. 사람도 그냥 하는 게 있긴 있어요. 대체적으로 몸이 하는 걸 보면 다 그냥 해요. 눈 보려고 보는 게 아니라 그냥 보이니까. 귀도 듣고 싶어서 듣는 게 아니라 들리니까. 듣는 거예요. 그렇죠? 우리 몸이 움직이는 거 보면 피가 도는 것도, 야 우리가 열심히 돌자. 그래야 사람 살지는 그런 거 없잖아. 그 심장이 펄럭펄럭 펌프질하는 것도 마찬가지야. 거기는 어떤 의도가 없어요. 그럼, 그건 자연의 소리라고 할 수 있죠. 사람도 자연이니까. 자연 아니에요? 몸뚱아리, 그 자연이라고 나무하고 똑같아요. 개하고 똑같아요. 몸은 그 몸은 죄 안 지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몸은 죄 안 지어요. 안 지어요. 못 지어요. 자연이기 때문에. 사람이 자기 몸을 써서 못된 짓을 할 수가 있죠. 그렇죠? 깡패가 옆에 친구 때려가서 코뼈가 부러졌다. 그러니 주먹만 떼다가 벌줍니까? (웃음) 주먹이 때린 거예요? 아니예요. 몸은 잘못이 없다. 사람이, 사람이 그런 짓을 한다. 그러니까, 그리고 인위야, 인위라는 것은 욕심이야. 내가 뭘 하겠다는 욕심. 선한 욕심도 있고, 악한 욕심도 있죠. 그러나, 욕심은 욕심이야. 자연의 소리는 아니야. 그래서, 우리가 보통 나쁜 뜻을 뽑자고 선한 뜻을 품어라. 그런 얘기를 하는데 윤리 교과서에서 맞는 얘기야. 그러나, 장자쯤 되는 사람한테는 선한 의도? 그거 집어치워라. 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요. 그래서 몸은 마른 나무 같고 마음은 식은 재처럼 그렇게 됐다는 겁니다. 사람이 과연 그렇게 될 수가 있는 겁니까? 하고 하니까, 자기가 말하기를 내가 방금 나를 여의였는데, 이 말은 조금 전만 해도 내가 있었다. 방금 전에 나를 여의었다는 얘기는 내가 죽었단 말이에요그렇죠? 사람이 우리가 뭐 죽었을 때, 그걸 여의였다고 그러잖아. 내가 방금 내가 죽었다. 나라고 하는 것이 없어졌다. 그런 얘기야. 그렇게 자기가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 남광자기라는 인물은 장자에서 볼 때는 인간으로서는 마지막 단계에 가 있는 사람이다. 하는 거야. 도무지 의도가 없어. 뭘 하겠다는 마음이 없어 안 하겠다는 마음도 없어요. 하겠다는 마음도 없지만, 안 하겠다는 마음도 역시 마음이야. 그것도 없어. 그런 상태로 앉아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 뒤에는 이제 사람 소리와 땅 소리를 잘 설명하는 긴 문장이 나오죠. 그 얘기는 아까 얘기한 것처럼, 사람 소리에는 자기 욕심이 들어 있지만, 자연의 소리에는 아무런 욕심이 없다. 그냥 나는 소리다. 근데 자연의 소리에는 한계가 있어요. 왜냐하면, 자연은 거기에서 소리가 나지만, 누가 내는지를 몰라요. 내는 주체가 없어져요. 그렇죠? 우리 사람은 내가 소리를 낸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렇죠? 내가 말하고 싶지 않으면 나 말 안 해. 말하다가도 더 하고 싶지 않아. 그러면, 입 다물어. 그거 할 수 있어요. 사람이. 사람 소리는 그래요. 주체가 있어. 사람은 말하는 놈이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 사람의 뜻이 따라서 말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어요. 바람 소리는 이 나무가 막 흔들려. 흔들리면서 내는 대숲에서 나는 소리 있잖아요. 그건 대숲에서 내는 소리라고 말할 수 있죠. 대숲에서 나는 소리야. 그래 그 소리는 자기가 하기 싫다고 안 낼 수가 없어. 또 자기가 내고 싶지 않은데 나는 거예요. 다시 말해, 자연의 소리에는 소리는 있는데, 소리 내는 주체가 없어요.
그래, 하늘 소리는 뭐냐? 이제 하늘소리, 이게 이제 요 둘 인간의 소리에는 주체가 있고, 저 자연의 소리에는 뜻이 없고, 뜻 욕심이 없고, 하늘의 소리는 주체가 있고, 욕심도 없다. 이 둘 다를 아울러서 여기서부터가 주체, 주체가 없는 거, 이거는 자연의 소리 내는 놈이 없어. 하늘 소리 내는 놈이 있다는 거야. 그리고, 이 하늘 소리에는 인간의 의도라는 게 섞여 있지 않다는 게, 인간의 의도가 없다. 욕심이 없다. 그것은 자연 소리하고 같고, 하늘 소리가. 그다음에 의도가 있다. 주체가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소리하고 하늘 소리가 같다. 이렇게 이쪽에서는 이걸 빼고, 이쪽에서 이걸 보태고, 그럼 하늘 소리가 된다. 그런 얘기 같아요. 제가 볼 때. 그래서 누가 이를테면, 하늘 소리를 누가 사람이 듣고 낼 수 있느냐. 그런 얘기 아니겠어요. 그래서, 그런 사람의 모습을 보니까, 좌망에 들었다. 상하, 그런데 이 사람은 하는 소리를 듣는다는 거지. 그리고, 어쩌면 자기도 모르게 자기를 통해서 하늘 소리를 내는 거예요. 들을 사람은 듣고, 못 듣는 사람은 못 듣는 거겠죠. 아이고, (웃음) 설명된 부분을 좀 더 같이 읽어보도록 합시다.
제가 읽을게요. 잘 들리시죠. 제가 읽으면서 말하겠습니다. 이 대목의 열쇠 말은 상하다. 나를 열린 상태에서 어멍하니 앉아 있는 것을 좌망에 들었다고 한다. 막고야 신인을 만나고 돌아온 요가 그 상태에 들었다고 했다. 지난번 장에서 막고야 신을 만나서 좌망에 들었다는 얘기 했었죠? 이 요라고 하는 사람이 누굽니까? 왕 중에 최고의 왕이잖아요. 요신임금 말할 때, 가장 훌륭한 왕이에요. 나를 잘 다스리는 그런 사람인데, 마침 막고야가 신인을 만나고 오니까 이제는 정치고 뭐고, 나를 다스린다는 걸 다 놔버리고 멍하니 앉아 있다. 그런 얘기입니다.
전쟁을 일으키기 위하여 이 나라 저 나라로 유세하며 돌아다니는 자 그런 사람 있죠? 지금도 있죠. 또 전쟁을 막기 위하여, 다시 이 나라 저 나라를 유세하며 돌아다니는 자, 시끄럽죠? 어떤 놈은 전쟁을 일으키려고 돌아다니고, 어떤 놈은 전쟁을 막자고 돌아다니면서 말이 많아. 성선설, 성악설이냐 하면서 인간의 성품을 설명코자 복잡한 이론을 펴는 자. 이런 논객들로 말미암아 갈수록 더욱 복잡해지고 시끄러워지는 세상에서 장자는 시방 좌망에 든 남광자기로 하여금 천하를 다시 고요함으로 돌아가게 하는 소리를 절명토록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하늘 소리는 소리를 내는 나가 따로 없다. 하늘 소리는 소리 내는 나가 따로 없다. 그 소리를 듣고 그 소리를 낼 수 있으려면 먼저 상하의 경지에 들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나라고 하는 것이 분명히 아직도 있고, 내가 뭘 한다 내가 뭘 안 한다. 뭐 이런 생각에 아직 남아있는 사람은 아직 하늘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그런 얘기입니다. 자신의 정체를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예언자도 아니요, 그리스도도 아니요. 이것도 아니요. 저것도 아니라는 부정으로만 답을 하던 요한, 요한이라는 사람이 그랬잖아요. 세례자 요한, 성경에 보면 그래요. 요한이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단 말이죠. 그러니까, 사람들 너 누구냐? 물어요. 내가 누구냐? 네가 오겠다고 약속된 그리스도냐? 메시아냐? 이렇게 물어요. 그러니까, 아니래.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아니래. 난 아니라는 게, 넌 누구냐? 나보고 누가 당신 목사요? 나 아니요. 당신 남자야? 아니야. 뭐 이런 얘기죠. 너 사람이야? 아니야. 그 정체를 묻는 질문에 아무 말도 내가 누구라는 얘기를 안 했단 얘기야. 법륜스님이 이거 잘해요. (웃음) 아주 계속 물어요. 내가 누구냐고. 뭐라고 대답해도 그건 나 아니야. 내가 아이들한테 학교 가서 나 너 누구야? 인마 그러면 나 누구예요? 자기 이름 얘기해요. 네 이름이지 이 자식아. 네 이름이 너냐? 인마 너 누구야? 그냥 이렇게 질문하면 내가 누구라고 자기 정체를 밝히는 사람은 아직 아니야. 나는 내가 뭐라고 굳이 말할 수가 없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계속 부정하니까, 사람들이 당신이 누군지를 얘기 해야 우리가 상관에 가서 보고를 할 테니까, 당신 말로 당신을 설명해 보시오. 이런 얘기예요. 그러니까, 굳이 하는 말이 나는 옛날 예언자가 말하기를 누가 광야에 나타나서 외칠 거라고 그랬는데, 예언자가. 외치는 그분의 소리다. 이렇게. 그게 자기 정체를 밝힌 것. 내가 사람들이 볼 때는 요한이 외치는 거예요. 그렇죠? 자기가 외치잖아. 광야에서. 그러나, 자기는 내가 외치는 거 아니야. 외치는 분이 있어. 그분이 내는 소리가 나요. 라고 얘기합니다. 이게 요한이 이제 말해서 정말로 이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예수가 요한을 보고 내가 세상에서 이 사람만큼 큰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런 얘기를 하란 말이지. 여러 사람 봤지만, 내가 세상에서 본 사람 가운데 제일 큰 사람이 바로 요한이다. 나라고 하는 게 너 누구야? 굳이 모르니까 누군가가 외치는데, 그 외치는 소리가 바로 나다.
자기를 부정한 마땅한 골목에서 문득 소리로 되어 있는 자기를 본 것이다. 그는 하는 소리가 들었고, 하는 소리가 들었고, 하는 소리를 외쳤다. 나를 건강하니 앉아 있으면 돌멩이로 되는 것을 뜻하는가. 아니다. 그건 아니죠. 그는 귀를 활짝 열어 모든 소리를 빠짐없이 듣는다. 눈을 활짝 열어 모든 사물을 놓치지 않고 본다. 살갗을 활짝 열어 아주 가느다란 감촉도 빠뜨리지 않는다. 완벽하게 깨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느낄 뿐, 그 느낌에 동요하지 않는다. 들을 뿐, 들리는 소리에 휘말려 들지 않는다. 볼 뿐, 보이는 바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이것이 좌망이다. 이제 제 설명입니다. 좌망에 든 사람을 겉에서 보면, 몸은 마른 나무 같고, 마음은 식은 자 같다. 고목사회, 도화에서 정적 무심한 상태를 가리킬 때 잘 쓰는 말이다. 나무에서는 마른 나무에서는 생명 기운을 찾아볼 수 없다. 움직일 낌새조차 없다. 시간제에서는 불꽃이 튈 수 없다. 역시 움직일 수 없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하지 않고, 이렇게 저렇게 할 마음도 없다.
완벽한 모습의 격지. 그런데, 살아있단 말이야. 깨어있단 말이죠. 그런데, 죽은 게 아니란 말이죠. 죽을 것 같아. 굳이 말하면, 죽은 것 같이, 죽은 것 같다. 죽은 것처럼 산다. 그런 말이야. 노자가 말한 무의라고 하는 거, 행위는 있어요. 그 행위하는 나라고 하는 게 없어. 행위만 있어. 그걸 무의라고 해요.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모심 또한 돌멩이의 무심은 아니다. 나를 여읜 상태에서 마음을 쓰는 것을 말한다. 어디에도 느낀 바 없이 마음을 자유자재로 대는 것.
금강계의 유명한 말이죠. 모든 일을 하되,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따로 하는 바가 없는 것이다. 바람 소리와 같다. 분명히 소리가 나는데, 어디에도 소리의 주인은 없다. 바람이 저 혼자서 낼 수 있는 소리는 없다. 그렇죠? 바람소리라고 얘기하지만, 바람이 자기 혼자서는 소리를 못 냅니다. 뭐가 있어야 소리가 나죠. 그렇죠? 구멍이 저 혼자서 소리를 낼 수가 없다. 바람과 구멍이 있어서 소리가 난다 해도 그것을 듣는 귀가 없으면 소리 또한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죠. 여러분이 아까 나하고 얘기했지만, 저한테는 아무 소리가 없는 거예요. 귀가 없으니까 그런 거예요. 누가 동원된 소리를 내는데, 소리 임자는 어디에도 없다. 사람 소리, 땅 소리 하늘 소리로 구분해 말하지만, 소리는 모두 같은 소리다. 뒤에 나오는 진재는 하나다. 진재, 참 주인 진재, 진짜 주인 하나다. 여기서 장자는 사람 소리에서 하늘 소리로 옮겨가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 소리에 대하여 죽고, 하늘 소리에 대하여 살지요.
사도 바울로가 말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다. 그런 얘기를 합니다. 예수님도 그런 얘기하죠. 죽으면 산다. 살려고 하면 죽는다. 그런 얘기를 합니다. 이 말씀에 아주 심오한 그 가르침을 깨닫고, 정말 내가 죽어야 되겠다. 내가 죽고 죽기를 원하는 그런 마음을 가질 때, 그때 진정한 삶의 길이 열린다.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그는 우리 몸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고 했다. 자기를 장사 지내는 것이다. 상아 나를 완전히 여인 상태를 독일 신비주의 사상가 마시토 에코 하르트는 무신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어디에도 연루되어 있지 않음을 뜻하는 이 말은 좋다는 뜻도 포함된다. 우리가 물신이란 말은 마음이 없다. 그런 얘기입니다. 그 어떤 덧없는 애착이나 슬픔이나 명예나 비방이나 악의에도 움직여주지 않는 마음이야말로 진정으로 목숨에 이른 것입니다. 이는 미풍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 장대한 산과도 같습니다. 아무것에도 영향받지 않은 무심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닮게 합니다. 에코 하르트는 무심 또는 나를 포함한 모든 피조물로부터의 초탈, 벗어나는 거죠. 이야말로 사랑, 겸손, 자비보다 고귀한 선, 최상의 덕이라고 말합니다. 아니 그것은 차라리 모든 덕을 가능케 하는 바탕이다. 그것은 사람이 세상에 대하여 죽을 때 그 어떤 욕망도 동기도 지니지 않게 될 때 이룰 수 있는 경지다. 세상의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진 경지,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기 이전에 본래 면목이기도 하다.
다음에 네가 좀 읽어. 만일 내가 세상에 그 어떤 것들에 대해서도 소유권을 지니지 않음으로써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또는 무슨 일을 하지 않든지 앞도 뒤도 쳐다보지 않으면서 세상의 것들 가운데 그 어느 것도 붙잡지 않고 하느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느님 귀한 뜻을 향하여 오로지 현재 속에만 방해받지 않고 자유로이 서 있는다면 정말이지 이때 나는 세상의 모든 것들에게 것들에서 벗어난 처녀, 내가 존재하기 전의 상태로 될 것입니다. 에크하르트의 말입니다. 계속 읽어요. 인간이 무식의 경지에서 살아갈 때 쇠로 된 나무에 꽃이 핀다고 참 수정은 노래합니다. 흐르는 물이 산 아래로 내려감은 무슨 뜻이 있어서가 아니오. 한 조각 구름이 마을에 드리움은 본 뒤 무슨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어라. 사람 살아가는 일이 구름과 물 같기만 하다면, 새나무에 꽃이 피어 온누리 가득 봄이어라.
저 스님으로 알고 있는데요. 중국 사람 봐봐요. 시가 유수화산 비용이라. 물이 있어 물이 산에서 아래로 흘러내려가잖아요. 뜻이 따로 있는 게 아니야. 뜻을 따로 품고 내려가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렇죠? 물이니까 어느 스님이 제자들한테 물었대요. 야 물이 왜 흘러가느냐? 제자들이 대답을 못하는 거야. 물이 왜 흘러가나? 그 대답을 잘 못하고 가만히 있어. 야 이놈들은 그것도 몰라? 빙충이들아, (웃음) 땅이 삐뚤어졌는데 그럼 안 흘러가고 어떻게 하냐? 그랬더니 땅이 평평하면 안 흐르겠죠? 그죠? 땅이 기울어졌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물이 흘러가는 거예요. 왜 물이 흘러가는 거 보면, 야 우리가 열심히 흘러가야 짐승도 먹고 살고 사람도 먹고 살고 온천 사방, 천지사방이 다 우리를 통해서 살지 않겠냐? 열심히 흘러가자. 그거 아니란 말이지. 물이니까 흘러가는 거예요. 흘러가게 돼 있으니까, 사람도 그렇게 살 수 있단 얘기야. 뭘 착한 일을 하겠다는 게 아니라, 사람인데 그럼. 그렇게 하는 거지.
어제 젊은이들이 위험에 무릎쓰고, 어디 노인들을 구조해야겠다. 이럴 때, 내가 인터뷰하고 내가 어떻게 했어요? 그럼요. 그 사람인데, 그냥 내가 할 도리를 다 했을 뿐입니다.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죽어가는 사람 놓고 어떻게 그냥 봅니까? 그냥 가서 한 거죠. 내가 이거 해서 메스컴에 좀 나와야 되겠다. 이런 의도가 없었다. 너 글을 왜 쓰냐? 써지니까 쓰지요. 제가 한번 단소를 한 오래 불었어요. 단소를. 그래서 소리가 참 좋더라고요. 한 몇 년 불다 보니까, 이제 제법 풀게 됐다. 내가 듣기에. 갖고 다니는데, 한번은 어느 천주교 성당에 가서 얘기를 하는데, 누가 단소 불어 보래요. 내가 갖고 있으니까. 그냥 안 불었죠. 내가 사람들 많은 데서는 절대 안 불었어요. 안 불었어. 한 번도 안 불었어요. 집에서는 맨날 불면서. (웃음) 밖에 사람들 있는 데서 안 불었죠. 집에서는 이제 자기 혼자 사는 집도 아닌데, 시끄럽게 그랬는데, 밖에 나가서 안 불었어요. 그날도 안 불고 갔는데. 그런데, 단소가 나한테 질문하는 거예요. 야, 아까 거기서 성당에서 단소 불어보라고 그러던데, 왜 안 불었냐? 자기 혼자 있을 때는 맨날 불면서. 왜 안 불었냐? 하고 나한테 묻는 거예요. 내가 대답했어요. 내가 말이야,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내가 창피한 건 안다. (웃음) 내가 창피한 거 안다. 왜 뭐가 창피한데? 나 단소 못 불잖아. 그랬어요. 이 생각지 부는 거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단소 선생한테 3개월을 공부하면서 배운 게 유일한 게 뭐냐 하면, 나는 음악에 소질이 없구나. (웃음) 배웠어요. 정말이에요. 그걸 내가 알았어. 타고난 끼가 없어 있는 줄 알았어. 없어. 타고 난 끼가 없어. 그걸 내 선생님이 가르쳐줬어. (웃음) 아주 훌륭한 선생님이예요. 당신은 야 내가 대금 불고 싶다 그랬더니 단소나 갖고 놀아. (웃음) 그냥 너는 단소는 그냥 장난감처럼 하지만 대금은 이 사람아. 이거 악기야, 이런 식이야. 아주 한마디로 쫙 잘라버려. 나 사실 대금 배우려고 갔는데, 대금 하려면 다음 주부터 하라고. 그래서 단 3개월 동안 내가 얼마나 비싼 그 뭐야 레슨비를 주고 배웠는데, 이제 단소 그만하자. 그래서, 그럼 다음 주부터 대금 할까요? (웃음) 넌 단소나 배워. 내 말을 한마디로 잘라버리고 참 섭섭했지만, 조금 지나니까 고맙더라고. 그게 진짜 선생이야. 넌 안돼. 그냥 심심풀이로 할 수 있지만. 그래서, 하여튼 제가 아는 게 난 단소 못 부른다는 생각이 드는데, 진짜 난 못 불어요. 우리 집사람 만나가지고 내가 단소를 부니까, 참...참 저 사람 못한다. (웃음) 한마디로, 그러니까, 프로 음악가가 들으니까 이건 아니야. 그렇죠? 근데, 단소를 모르는 사람, 못 부는 사람이 내가 부는 거 보고, 목사님 그쪽으로 그 방면으로 나왔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웃음) 이건 단소가 뭔지 모르니까. 그걸 아는 사람은 아이고, 그거 안 하기 잘 했다. 그래, 내가 단소 못 불잖아. 얘기했어요. 근데, 단소가 하는 말이 왜 네가 단소를 잘 불어야 되는데? 그래요. 왜 네가 단소를 잘 불어야 돼? 내가 대답할 말이 없더라고요. 내가 단소를 잘 불어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렇죠? 왜 내가 단소를 잘 불어야 돼? 내가 아무 말도 못했어요. 그랬더니 단소가 한 말, 그 잘 분다는 게 과연 세상에 존재하는 거냐? 그건 없어요. 똑같은 소리를 듣고 듣는 사람에 따라서 잘 분다, 못 분다. 얘기를 할 수 있지만, 이게 잘 부는 거다. 라고 하는 것은 없어요. 그렇죠? (네.)
그러니까, 난 있지도 않은 잘 불어야 한다는 생각, 또 내가 잘 못 분다는 생각, 거기에 내가 막혀서 사람들 앞에서 내가 단소를 못 불렀던 거야. 그런 마음이 다 없어지면, 그래? 그 다음부터는 단소가 가는 데마다 불라 그러면 불어요. (웃음) 방송국에 가 갔더니, 생방송인데, 기독교 방송인데, PD가 불어보라 그래서 불다 말았어요. 소리가 안 났어요. (웃음) 광주 터미널 갔더니, 광주 버스 터미널 넓잖아. 지나가는데, 왜 늙은이가 여보, 그거 뭐여? 단소 소리 한번 들어 봅시다. (웃음) 그래서, 내가 급한 것도 없고, 시간 넉넉하고, 그냥 불었지. (웃음) 앞에 놓고, 이렇게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서. 벌써. 그러거나 말거나 서서 불었어요. 품이 안 드는 거죠. 뭐 그렇죠? 마음.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이건 이렇다. 저렇다. 내가 뭐 이런 게 다 없었으니까. 그게 나를 아주 자유롭게 해줬어. 그다음부터는 일도 나랑 자유로워졌어요. 글 같은 거 쓰는 거, 처음부터 보는 거, 아무롷지도 않아. 내가 쓸 수 있으면 쓰겠다고 그러고, 어떤 건 책을 번역해달라고 했는데, 읽어보면 뭔 말인지 모르겠어. 내 영어 실력으로는 이게 이해가 안 읽을 수가 없어. 한국 사람도 자기 말 한국 어렵게 쓰는 놈 있지만, 미국 놈도 있어. (웃음) 괜히 말을 어렵게 쓰는 놈. 그럼 골치 아프고 뭔 말인지 모르니까 나 못해요. 나한테 오는 일, 봐. 할 말 하면 하는 거고, 못해. 그러면 안 하면 되지. 인생을 그렇게 살 수 있는 거야. 뭐든지. 아주 자유로워졌어요. 왜? 나를 누구하고 비교하고 내가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 하는 그런 게 소위 나라고 하는 게 최미한 이런 것이 다 없어지면, 아무 데서나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하는 걸 저는 한번 그 단소를 통해서 배운 게 있었습니다.
그래요. 흰 조각구름이 마을에 들어오면 편기둥 벚무입니다. 똑같은 얘기예요. 무심이야. 구름이 떠 있는 거야. 구름이 이렇게 떠 있는 거야. 인생 약세의 원수이야. 사람이 만일 저 물과 물과 구름 같기만 하다면 철수계와 편계춘, 쇠나무에 꽃이 피어 온 천지가 봄일 것이다. 쇠나무에 어떻게 꽃이 피어요? (웃음) 야 중국 사람 아는데, 새로된 몸에 꽃이 핀다 말이야. 사람이 그래 봤지 한다는 무심으로 산 사람, 무심, 하겠다는 마음도 없고, 하지 않겠다는 마음, 상황이 하게 되면 하는 거고, 누가 불려고 그러면 부는 거고, 불고 싶은 마음이 들면 부는 거고, 하고 싶은데 여건이 허락을 하지 않으면 안 하는 거고, 그게 무심으로 사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요. 갑자기 외국 여행을 가고 싶어. 스위스이나 어딜 가고 싶어. 내가 마음에 들어. 스위스 갈 수 있는 여건을 봐. 마침 돈도 있네. 그럼, 뭐 비자 꺼내서 가야지. 그래, 가는 거야. 아무리 가고 싶어도 돈이 없어. 그러면 안 가면 돼. (웃음) 그 돈을 만들어 가지고 갈래? 이것만 하지 않으면 된다. 그렇죠? 그게 자기 욕심에 걸린 거란 말이야. 욕심이 없으라는 얘기는 아니에요. 욕심에 사로잡히지 말아라. 내 욕심에 끌려다니지 말아라. 그런 얘기예요. 사람이 살아 있으면 뭘 하겠다는 마음이 어떻게 없어요? 그죠? 그 진짜 그건 재나 쇳덩어리가 되고 돌멩이가 되면 몰라도, 사람인데. 자기 마음을 쓰되, 어디에도 묶이지 않고 마음을 써라. 그게 금강에서 말하는 어디에도 묶이지 말고, 내 마음을 써라.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을 가리켜. 에크하르트는 예수가 말한. 사람 가난하다는 게 뭡니까? 아무것도 없다는 얘기죠? 없어요. 가난한 게 없다. 그런 얘기입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이야말로 가난한 사람입니다. 의지의 가난, 지성의 가난, 존재의 가난을 통해서 마침내 사람은 하느님을 모신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그분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예. 이거요. 좀 설명 드릴게요. 많은 기독교인들이 내 뜻이냐, 하나님 뜻이냐, 여기서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있다고요. 근데, 이때 소위 인간들, 인간들이 저 아담이라고 하는 사람으로부터 내려왔다고 한다면 아담이라고 하는 말은 인간이란 말이에요. 사람이란 말이요. 그러니까 내가 아담이라고요. 이 아담이 뭐냐 하면 하늘의 뜻이냐, 내 뜻이냐 이것이 서로 합해질 때는 문제가 안 돼요. 일치가 될 때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하늘의 뜻과 내 뜻이 상치될 때가 있어요. 안 맞아. 이럴 때 선택을 해야 한단 말이죠.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 이때 하늘의 뜻이 뭔지를 알지만, 내 뜻이 뭔지 알아. 근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는 거예요. 이게 아담이예요. 그래서, 선악과를 먹지 말아라. 그런데, 먹고 싶어. 먹은 거예요. 이걸 사람이라고 얘기해요. 우리한테 그런 게 있단 말이죠. 태어나서 갓 태어난 젖먹이는 아직 나라고 하는 게 형성돼 있지 않기 때문에, 없어요. 그게. 그게 없어요. 자연 상태로 살아요. 근데 이렇게 자라면서 우리나라 사회에서 나라는 걸 배워요. 너, 나, 구분되고 내 것, 내 것, 이렇게 배우는 거예요. 그래서 나라고 하는 것을 만들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가지고 살지요. 그래서 이 내 뜻과 하늘의 뜻이 상치될 때 하늘의 뜻을 무시하고, 내 뜻을 잡는단 말이야. 이건 아담의 길이에요. 그런데, 똑같은 상황에서 내 뜻과 하늘의 뜻이 일치하지 않을 때, 그때, 내 뜻을 비우고 하늘의 뜻에 합치시킨 거, 이걸 우리는 예수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 같은 사람은 예수를 세컨드 아담, 제2의 아담이다. 그렇게 말해요. 그 아담이 걸어간 길을 예수가 돌이키는 거예요. 그래서, 렘브란트의 그림 가운데, 돌아온 탕자 그림 있죠? 그거 보면, 탕자가 아버지에게 나가 살다가 자기가 자기 뜻대로 살고 싶어. 밖으로 나가는 거예요. 아버지하고 함께 살면 아버지 눈치 봐야 되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 마음대로 안 돼. 그러니까, 난 나가겠다. 아버지, 나 나가겠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가라. 그러니 차비까지 주잖아요. 가라고. 그래. 나가 자기 마음대로 살아요.
근데, 살다 보면 고해. 자기 마음대로 살면 다 될 줄 알았는데 결과적으로는 고통이 온단 말이지. 그 인간을 고해라 얘기하는 거야. 집착이라고 하는 것이 고해의 근본이다. 나를 움켜 잡는 거예요. 그러니까, 놔버리는 거야. 나를 버리고 하늘에서 보자. 이게 돌아온 아들, 이제 나를 관두고 아버지 밑에 가서 아버지의 아들로서 살아야 되겠다. 하는 마음 돌아가고, 또 이 두 인간을 놓고 얘기해요. 그래서, 하나는 사람의 길을 택했어. 그래서 하늘의 길을 거역한 사람, 보통 우리들, 사람이죠. 그러다가, 그 나라고 하는 걸 잃어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는 거죠.
그는 행동하되 이유 없이 행동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행동에는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모든 것에 초탈하여 모든 것을 이루신다. 그래서 마하트마 간디는 말한다. 그분을 아는 길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초연한 정신으로 일을 하는 것이다. 삶의 현장에 대하여 눈을 감는 것이 아니라 초연하게 참여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가만히 앉아. 그게 아니고 일하는 거예요. 일하는데, 거기에 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없는 거예요. 내 욕심이 그 마음을 아는 게 아니에요. 어떤 분이 나를 통해서 그 일을 한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내가 하나님 뜻을 이루어 드리겠다. 이렇게 생각해요. 그렇죠? 하나님 뜻을 이루어 드리겠다. 지난번 이 자리에서 제가 말씀드린 것 같기도 한데, 다시 얘기하면 사도바울이라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해요. 나는 이제, 나는 이 세상에서 내가 못할 일이 없다. 나는 부자로 살 줄 알고 가난뱅이로도 살 줄도 안다. 어떤 처지에 있어도 나는 그 처지에서 내가 능히 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이런 아주 대단한 선언을 합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나는 무릎 꿇지 않는다. 어떤 일도 난 할 수 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왜 내가 그런 비결를 배웠다는 거예요. 어떤 처지에서도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비결을 내가 배웠다.
그러니까 뭐냐 그러니까, 나에게 힘 주시는 분 안에서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다. 내 힘으로 하는 게 아니라,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 있다. 그 힘으로 내가 일한다. 그런 얘기. 그래서 자기는 어떤 처지도 겁 안 난다는 거야. 그래서 그런 얘기 있었어요. 내가 나에게 힘 주시는 분 안에서 내가 능치 못한 일이 없다. 그래서, 제가 사도 바울 선생을 한번 불렀어요. 얘기 좀 합시다. 가서 산책하다가, 아까 보니까, 성경에 그렇게 써 있던데, 그래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나를 책임져 줄 수 있는 자 안에서 내가 능치 못할 일이 없다. 라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내가 물었어요. 그랬더니 벌써 내가 기대했던 대로 아니래요. 아니래요. (웃음) 그거 왜 그렇게 썼어요? 그거 쓸 때만 해도 내가 그렇게 생각했대요. (웃음) 그거 쓰고 난 다음에 자기 생각이 달라졌다는 거야. 그러면서 자기가 달라진 심정을 다른 데다가 표현했는데, 내 생각이 달라졌어. 나에 힘 주신 자 안에서 내가 능치 못할 일이 없다. 라고 하는 말을 전에는 했는데,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어. 어떻게 달라지냐. 내가 이 몸으로 사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가 이 몸으로 사시는구나. 이렇게 생각이 달라지더라는 거예요. 그분이 나에게 힘을 줘서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이 몸으로 그분이 일하시는구나. 라고 하는 걸 깨달으니까, 주체가 없어진 거야. 사실 우리가 밥 먹고 똥 싸고 다 하는 거 누가 하는 겁니까? 누가 하는 거야? (그리스도) 내가 한다? 안 보인 거 봐요? 내가 본다 말이 됩니까? 내가 본다. 안 보이는 건 못 봐요. 보이고 안 보이고 하는 거는 내 권한이 아닙니다. 그렇죠? 안 그래요? 내가 빵을 먹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 하나님, 그분이 내 몸을, 내 몸을 가지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하시는구나. 라고 깨달았다는 거야. 그게 바울이, 지금은 그게 비결이다. 그래서, 내가 어디 가서 내가 이런 얘기해도 되겠어? 그랬더니, 제발 좀 해달라는 그래요. 착각이에요. 많은 목사님들이 자기가 하나님 일을 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한다고. 아니에요. 나는 그분의 도구야.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어. 안경이 있어서 내가 잘 봐. 안경이 그렇게 하는 겁니까? 그렇죠? 나 없으면, 하나님이 아무 일도 못하셔. 그렇게 내가 소중해. 그래서, 내가 하는 걸 하니? 그게 바로 마더테레사에 나는 하나님 손에 잡힌 연필이다. 연필이 없으면, 하나님 아니라 세상 없는 누구도 못 써. 그림 못 그려. 그 연필이 그리는 건 아니지. 그런 거예요. 이걸 아는 사람이야. 무심이라고 하는 건, 내 마음이 없다는 얘기죠.
가난에 대한 설교를 에크하르트는 뚫고 나아감이라는 한마디로 결론 짓는다. 피조물은 가난을 통해 신성과 하나가 된다. 가난이라고 아까 얘기한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이게요. 내가 가진 걸 버려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내 소유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게 되는 거야. 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게, 이 세상에 없다는 겁니다. 몸뚱아리? 내 거 아니에요. 지난번 말씀드렸죠? 이현주, 네 몸이 네 거냐? 그 말씀. 20살 젊은 나이 때 들은 거예요. 잊혀지지가 않아요. 내 몸은 임마, 임자가 따로 있어. 니 몸 니꺼라고 착각하지 마. 임자가 있어. 누군지 몰라. 사실. 있어요. 그분이 내 몸을 쓰고 싶은데, 쓰고 싶어도 내가 싱싱하게 살아 있으면, 요 나 때문에 자기가 쓰고 싶은 대로 못 쓰는 거야. 내가 안경을 쓰고 싶은데, 안경이 막 들고 돌아다니고 그러면 못 쓰잖아. 그렇죠? 하나님이 날 통해서 뭘 하고 싶은데, 내가 내 욕심이 많아, 하고 싶은 일이 많아. 그거 하고 다녀. 그럴 힘이 있어. 나한테는. 하늘의 명을 거역할 힘이 인간에게 있단 말이에요. 감히. 저 짐승들은 그 힘이 없어요. 그래서 걔들은 죄를 못 지어. 인간은 하늘의 명을 거역할 수 있다고. 그리고 지 멋대로 만든 하늘의 명을 가지고 행세할 수가 있어요.
여기 말끔하게 비워주는 거, 이거는 사실은 이게 나를 말끔하게 배우는 건데, 이것조차도 나는 못해요. 내가 나를 비울 수는 없어요. 저는 그걸 알았어요. 내가 저 죽변교회 처음 목사가 돼 갔을 때, 목사도 많잖아요. 세상에. 이런 목사, 저런 목사 많잖아요. 내가 나한테 물어. 넌 어떤 목사가 되고 싶어? 그때, 그 생각이 왜 들어왔는지 몰라. 바로 들어와요. 나, 안경 같은 목사가 되고 싶어. 안경 같은 목사, 안경 쓰면 글씨가 잘 보이잖아. 난 그런 목사가 되고 싶다. 안경을 쓰는데 안경이 보이면 안 돼. 그렇죠? 목사가 있는데, 목사가 교인들에게 보이면 안 돼. 목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잘 보이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내 감히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 나 안경 같은 목사가 되고 싶어. 나라고 하는 건 안 보이고, 그러나 내가 없으면 사람들이 예수를 잘 못 보고. 그런 목사가 되면 좋겠다. 그런 갸륵한 생각을 했어요. (웃음) 그래서, 내가 그걸 붙잡았죠. 그다음부터 내 할 일은 나를 맑게 닦는 거예요. 나를 맑게 닦아야겠다. 그래서 이제 그때부터 사실 영성, 명상, 이런 데 관심을 갖게 했던 것 같아. 참선도 하고 별도 다 했죠. 이런 저런 경험했는데, 한 그렇게 수년 흘러가는데, 40살쯤 됐을 때예요.
내가 결론은 뭐냐 하면, 아니 아무리 이런 방법, 저런 방법 다 써봐도 내가 맑아지지가 않았어. 여전히 나한테는 내 에고와 내 마음, 내 욕심 버리고 싶어도 이게 있어.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그냥 우쭐거리기도 하고. 이런 내가 있어. 이걸 내가 못 비우겠더라고. 비울 수가 없어. 그래서, 이거 어떻게 하면 좋은가.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고. 어쩜 하면 좋아. 그러다가, 제가 열차에서 안경을 내가 닦았어요. 안경을 닦는데, 봐라 봐라, 안경이 안경 닦냐? 안경을 누가 닦아요? 안경 주인이 닦지. 내가 나를 맑게 하겠다면 지가, 안경이 저를 깨끗하게 닦으려고 하는 것과 같아. 그래, 알았습니다. 나를 맑고, 깨끗하게 하는 건, 제 소관이 아닙니다. 주인이 알아서 맑게 닦아서 쓰실라면 쓰시고, 말라면 마시고, 그렇게 하십시오. 그런 기억이 나네요. 그런데도 거기 닦으려고 그러면 내가 도망치고, 뭐라고 하라고 하면 또 내가 도망치고. 아닌 것 같은데요. 그래서 내 생각을 맣하고 이게 인간의 습이예요. 에고라는 게 쇠덩어리, 돌덩어리, 이게 다 없어지려면, 세월이 많이 흘러가야 돼요. 이 마음의 첫 마음을 포기하지 않고, 있으니까 지금은 어느 정도 내가 봐도 무슨 그런 욕심이라든가 그런 게 좀 없는 것 같아요. 누가 볼 때 쉽게 판단이 되지 않아요.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이야? 그게 안 돼요. 신비하다. 신기한 사람, 재미있는 사람이다. 이런 눈으로만 보여요. 근데, 어떤 사람이다. 저 사람은 누구다. 이런 게 안 나와요. 그래서, 아마 저 분이 그러신 게 아닌가. 그리고 70대 때, 내가 날 좀 죽여주시오. 기도했던 거, 그런 것들이 영향을 미치죠. 지금은 제가 봐도, 제가 봐도, 좀 이렇게 불끈하다가도 그냥 푹 죽고 그런 것 같아요.
가난한 사람은 모든 존재 너머에 있는 신적 존재를 향하여 자신의 피조물성을 뚫고 나아가는 것이다. 이 뚫고 나아감을 통해 피조물은 하느님과 하나가 되며, 피조물의 신성화는 완성되는 것이다. 장자의 말투를 빌리면 사람 소리에 대하여 죽고 땅 소리를 뚫고 올라가 마침내 하늘 소리로 거듭나는 것이다. 땅 소리는 사람 소리와 하늘 소리를 이어주는 다리 몫을 한다.
바람이 불면 땅에 있는 온갖 구멍이 소리를 낸다. 땅 소리다.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낸다는 점에서는 시비가 죽 끓듯하는 사람 소리에 닿아 있고, 한 치의 인위적인 조작도 허용하지 않고, 순수 자연의 소리를 낸다는 점에서는 하늘 소리에 닿아 있다. 그 모든 소리의 근원이 하나라는 점에서는 사람 소리, 땅 소리, 하늘소리가 일치한다. 인간의 말로 무엇이라 설명할 수 없는 하늘 소리를 얘기하기 위하여 자기는 땅 소리를 장황하게 묘사한다.
장주의 문장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땅 소리에 대한 설명이 자세한 데 견주어 사람 소리에 대한 설명은 생략되어 있다. 자유가 그것은 피리 소리라고 한마디로 정의 내리는 것으로 그친다.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모든 사람이 잘 알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일까.
피리는 사람이 대나무를 잘라서 만든 것이다. 여기서 장자가 말하는 사람 소리는 의의로 내는 소리를 가리킨다.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온갖 소리가 바로 이 사람 소리다. 욕심이 앞장을 서고 다툼이 뒤를 따르는 소리들이다. 내가 옳고 니가 그르다는 시비가 그치지 않는다.
그렇죠? 그렇죠 지금? 더 오늘 선거가 내일 모레 더 시끄럽고, (웃음)
이에 견주어 땅 소리는 저마다 크기, 모양, 색깔이 달라 번잡하기는 사람 소리와 마찬가지지만, 그러나 거기에 인위가 섞여 있지는 않다.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욕심도 없고, 남보다 우쭐하려는 마음도 없다.
이 저는 봄에 우는 새 있어요. 어치라고 아세요? 어치라는 새 있어요? 봄에 올 때, 걔 우는 소리 들어보면 참 재밌어요. 어치 소리 들어 봤어요? 저것도 새 소리인가? 아주 허스키한 목소리로 그렇게 하는데, 꾀꼬리 소리에 비하면, 사람 같으면 꾀꼬리 소리를 한 번 들으면, 어치 소리를 못 듣대요 그런데, 어치는 마음 놓고 내요. 왜냐면, 꾀꼬리 소리하고 지 소리를 비교하지 않아요. 그게 자연의 소리예요. 사람도 자연을 닮은 사람이면, 그렇게 소리를 낼 수 있는 거예요. 자연이잖아요. 그렇죠? 나를 괜히 나하고 비교해서 주눅 들,고 괜히 우쭐거리고 그런단 말이죠. 저는 전데, 자기 소리를 내면 되는 건데, 그게 자연의 소리한테 배울 거란 말이죠.
사람이. 얼마나 좋을까? 그렇죠? 지 생긴대로 살아,
그냥 있는 대로 무심코 제 소리를 낼 따름이다. 다만 그 소리에는 한결같음이 없다. 덧없는 소리다. 바람이 불면 소리가 나다가 바람이 멎으면 사라진다. 완전한 피동을 얻긴 했으나 완전한 능동에는 이른다. 바람이 한 번 불매, 온갖 소리를 내다가 이고 바람이 멎으면 모든 구멍이 잔잔해지고, 나뭇가지들만이 한들거리다가 그마저 멈추고 만다. 이 과정이 짧은 문장에 생생하게 묘사된다. 그러나 아무리 장황하고 거칠 게 없다 해도 언젠가는 끝나기 마련이다. 바람이 멎으면서 땅 소리에 대한 장자의 입심도 쓰러지고 만다. 이것이 땅 소리의 한계다. 저 스스로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에크하르트가 말하는 피조물성을 아직 열지 못한 까닭이다. 자유가 아는 체 하고 말한다. 땅 소리는 온갖 구멍에서 나는 소리요. 사람 소리는 피리에서 나는 것이려니와 산과 하늘 소리가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스승이 대답한다. 그래? 땅 소리는 모든 구멍에서 나는 소리라고? 사람 소리는 피리에서 난다고? 니 말이 옳다. 모두가 저로 말미암아 소리를 내지. 피리가 없으면 피리 소리가 날 수 없으며, 북이 없으면 북소리가 날 수 없으니까. 그러나 부는 사람이 없는데도 피리가 소리를 내며 두드리는 손이 없는데도 북이 소리를 내느냐? 저로 말미암아 소리를 내긴 내되 저 혼자서 소리를 내지는 못하지. 저마다 제 소리를 낸다고 하는데 옳은 말이긴 하나 과연 그 소리가 나게끔 하는 소리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그것은 무엇이겠느냐 이 질문에서 이야기는 잠시 멈추고 장자는 숨을 돌린다. 다음에 이어지는 긴 논설을 위해서다. 이제부터 하늘소리를 말해야 한다. 말로써 닿을 수 없는 경지를 이야기해야 한다.
이런 게 있습니다. 대테레사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 그분이 우리에게 침묵에 대한 얘기를 하세요. 침묵, 침묵에 세 가지가 있다고 얘기합니다. 첫 번째는 언어의 침묵, 말의 침묵, 우리가 보통 무관한다 이렇게 말하잖아. 말하지 않은 침묵, 이게 첫 번째 단계고, 그다음에 침묵을 얘기할 때, 더 중요한 침묵이에요. 나는 의지의 침묵이라 그래요. 의지, 뜻의 침묵이에요. 말이 없어진 게 아니라, 뜻이 없어지는 거야. 뭘 하겠다. 하지 않겠다. 하는 그런 의지가 다 없어지는 거 요까지 얘기해요. 그다음에 얘기하는 게 뭐냐 하면, 의지의 침묵이 아니라, 그 위에 올라가면 소위, 존재의 침묵이라고 하는 게 있어요. 존재의 침묵, 뭘 의지한다니까, 누가 있으니까, 의지가 나오잖아요. 근데, 있는 것 자체가 없어진다는 거죠. 이렇게 침묵을 세 가지 얘기를 하시면서 그 침묵의 효과가 어떠냐 하면, 첫 번째 말의 침묵이 가져다 준 효과는 밭에다가 이제 가물 때 물을 떠다가 밭에 부어주는 그와 같은 효과가 있다. 그렇게 얘기를 해요. 그다음에 의지의 침묵의 단계에 들어가면, 어떤 효과가 오냐 하면, 그것은 그 밭에다 물통을 줘다가 붓는 게 아니고, 그 밭에 물 수로를 들어서 물이 흘러가. 밭으로. 이렇게 해서 저절로 관개하는 그 정도의 효과가 있다. 마지막에 존재의 침묵 그 정도 가면 어떤 효과냐. 그건 수로도 아니고, 물통도 아니고, 하늘에서 비가 내린 것과 같다. 그런 얘기야. 그러면서 침묵의 세 단계를 얘기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우리 모두 알고 있는 거야. 말하지 않는 겁니다. 저도 한 1년 동안 말하지 않고 살아봤습니다마는, 그러니까, 우리가 보통 무관이라고 얘기해요. 근데,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의지가 없어지는 거야. 뭘 하고 싶다 해야 되겠다. 그게 다 사라진 겁니다. 거까지는 우리가 노력을 하면, 할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우리가 거기까지는, 내가 뜻을 가지고, 그렇게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나, 제 3의 침묵은 그거는, 100% 주어지는 거지, 내가 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늘에서 비가 오는 거, 우리하고 관계없잖아요. 그런 것처럼,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하늘의 소리에 가 닿는다는 얘기를 하지만, 그게 어떤 건가 하는 건 가본 사람이나 알지. 우리 같은 사람은 모른다고 얘기하는 게 맞을 겁니다. 지금 이 사람은 어떻게 하면 그리 갈 수 있느냐 그 얘기를 우리에게 해주고, 우리는 그것까지 배우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만큼 하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가운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다인들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밤에 예수를 찾아와서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정말 잘 들어두어라.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라고 하고 말씀하셨다. 이곳 니고데모는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새로 나야 된다는 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바람은 쟤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낳은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같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시자.
예 이거 아주 유명한 구절입니다. 그게 거듭나야 하늘로부터 난다.
불고 싶은 대로 부는 바람. 그러나 그 나온 곳과 돌아가는 곳을 알 수 없는 바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바로 그 바람과 같다. 소리를 내되 소리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다.
소유라는 말 소유라는 말 대신 행위라고 하는 말이 되는데요. 제가 뭐 하잖아요. 그것을 내 거로 생각하지 않아요. 내가 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해가 됩니까? (네.) 그러니까, 내 것이 아니에요.
바람 소리는 있으나 바람의 소리는 없다. 큰 구멍을 만나면 큰 구멍 소리를 내고, 날카로운 칼을 만나면 날카로운 칼 소리를 낸다. 모든 것을 만나 모든 것이 되지만 그 어느 것에도 붙잡히지 않는다. 성령으로 거듭난 바람 같은 사람은 더 이상 사람 소리에 구애되지 않는다. 사람 소리에 대하여 죽고 하늘 소리로 살아나기 때문이다. 모든 때의 모든 곳에 있으나 그 어디에도 있지 않은 따로 머리 둘 곳 없으면서 온 누리가 자기 안방인 존재로 마침내 거듭난 것이다. 남곽 자기는 바로 그 경지에 서서 아직 거기에 미치지 못한 제자 안성자유를 위하여 구차스러운 언어를 기록한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읽고 나머지 부분은 집에 가셔서 여기서 보시기에 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말 한마디만 하고 마칠게요. 여기 지금 그 팩 안에 뭐가 담겨 있는지 아세요? 감자 알아요? 모르죠? 몰라요. 나는 알아요. (웃음) 뭐가 담겼는지 알아? 모르지? 꿀물이예요. 사람은 사람이 사람을 보는 모양을 보는 사람이 있고요. 그 속을 들여다보는, 보는 게 달라요. 겉모양만 보고 얘기하면, 그냥 저 사람 누구야? 사람이야, 남자, 교수,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죠? 선생, 농사꾼, 그렇게 될 겁니다. 그게 그 사람 정체는 아니죠? 정말 중요한 건 그 사람 안에 뭐가 담겨 있느냐죠. 그렇죠? 그걸 들여다본 사람은 다르게 말하죠? 그렇지 않을까요? 그러면, 이걸 관찰하면, 그 겉만 보면, 그건 컵이예요. 그렇죠? 컵이잖아요. 근데, 그걸 마셔본 사람은 꿀물이 담겨 있는 컵이네요, 꿀물이 담겨 있다는 거예요. 저 속에. 꿀물이 담겨 있는 컵이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이게 사도 바울이에요. 바울이 사람을 잘 보니까, 사람마다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다 있다. 하나님이 저 안에 있다고 본 거예요. 그게 바울이에요. 바울은 사람 겉모습만 본 게 아니라, 속을 봤어요. 모든 사람 속을 보니까, 그 안에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하나님이 그 안에 있더라. 그걸 봤어요. 바울은 그래서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묻혀져 있는 집이다. 이렇게 본 거예요. 성전이다. 거룩한 집이다. 예수님은 어떻게 보시느냐? 이게 뭐냐 하고 물을 때, 이 컵에 담겨 있는 꿀물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꿀물이 담겨 있는 컵이다. 하고 컵에 담겨 있는 꿀물이다. 어떤 게 더 본질이예요? 꿀물 때문에 컵이 있는 거예요. 꿀물 때문에, 그렇죠? 컵 때문에 꿀물이 있는 거 아니에요. 내가 아는 하나님이 영이 있기 때문에, 이게 있는 거예요. 이게 있기 때문에, 이게 있는 게 아니고. 그러니까, 이 눈으로 본 사람은 모두가 저런 모양을 하고 있는 하나님이네. 저런 모양을 하고 있는 하나님이다.
겨우 눈을 뜬 게, 이게 장자가 말하는 사람 소리, 땅 소리, 하늘소리 거친 사람의 눈이 아니겠는가. 예수는 바로 그 눈으로 봤어요.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식이다. 하나님의 자식이라는 말은 뭐예요? 하나님이라는 말이죠. 그렇죠? 거미 새끼를 낳으면 거미잖아요. 하나님 자식을 낳으면 하나님이야. 너희 모두가 다 하나님이다. 라고 하는 것을 봤단 말이죠. 우리가 그 눈을 뜰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 수 있잖아요. 싫으면 말고. (웃음) 내가 그 눈을 뜨고 세상을 본다면, 세상이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 마냥 소중한 게 아니라, 저 사람도 나하고 똑같은 소중해. 왜? 하나님이니까. 그런 거야. 제가 한 30년쯤 전에 포항에 어떤 분이 저한테 편지를 보냈어요. 자기가 병원에 있는 약사인데, 당신을 좀 꼭 만나고 싶은데, 자기가 올 수 없으니 혹시 금방이 오면 나 좀 만나게 찾아와 달라고. 그래서, 제가 어느 날 기회가 돼서 물어물어 찾아갔어요. 이만한 약방이야. 작은 약방이야. 약국도 아니고, 약방. 그게 여자가 나보다 한 여섯쯤 연상인 여자가 혼자 사는 분이야. 가족도 없이. 그렇게 사셔. 그래서, 내가 이현주입니다. 그러니까, 아유 남자였어요? (웃음) 자기가 여자인줄 알았대. 왜 날 만나자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제가 한 3년 전에 아주 마음이 많이 고통스럽고, 어려웠는데, 제가 어떤 잡지에 제가 쓴 글을 읽고 많은 위로를 받았대요. 용기를 얻고 힘을 얻었대요. 그래서, 거기서 나올 수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현주목사라는 사람이 고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때부터 봉투에다가 5천 원짜리 돈이, 약값이 들어오면 따로 놨대요. 5천 원짜리만. 그랬더니 제법 두툼해졌어요. 이거 좀 전달해 주고 싶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갔어요. 그 봉투를 나한테 줘요. 예. 그 돈이요. 받아주시오. 그 얘기예요. 그래서, 제가 이걸 받기 전에 제가 한마디 말씀드리고 내 말에 동의하신다면, 내가 받을게요. 그랬어요. 눠라 했냐면, 김 집사인데, 김 집사님은 이 돈을 이현주 목사에게 줬다고 말하지 마세요. 생각도 하지 마세요. 나는 이 돈을 하나님께 바쳤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이현주 목사 줬다.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라고 생각하세요. 할 수 있겠어요? 그렇게 하겠대요. 나는 이 돈을, 어느 집사한테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말도 하지 않을 겁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통해서 나눠주셨다고 생각할 겁니다. 이 돈은 하나님이 하나님한테 주고, 하나님 하나님한테 받은 겁니다.
당신과 나는 중간에서 심부름한 것뿐입니다. 동의하십니까? 동의하겠다고. 제가 받아 있었습니다. 그런 겁니다. 말만 그런 게 아니라, 정말 그런 거예요. 만사가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게 소위, 하늘 소리를 들은 사람들의 삶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오늘 얘기가 좀 길어진 것 같습니다만 무슨 마칠까요?
고맙습니다. 또 오늘 공부한 내용을 또 잘 실천하시고 또 고민하시고 또 즐겁게 행복하게 사시다가 2주 후에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관옥의 노래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