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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에는 왜 산신각(山神閣)이 있을까?
작성자 최영근 선생님
역사가 오랜 우리나라의 경우 태초에 신교 즉 단군교가 있었고 다음에 불교가 들어왔다. 이런 경우 단군이 주신(主神)이 되고 부처는 객신(客神) 즉 손님신이 되는 것이다. 두 신은 한동안 서로 힘겨루기를 하다가 결국에 가서는 싸움을 멈추고 서로 손을 잡고 공존공생하기로 결심한다. 이것을 신불융화라 하는 것이다.
대웅전(大雄殿)이란 이름도 한국에만 있는 명칭인데 그 어원을 따져보면 환웅전(桓雄殿)이 대웅전이 되었으며 환웅은 단군의 아버지요 천신인 환인의 아들이다. 이 산신을 믿고 살아온 우리에게 손님신인 부처가 들어와서 자리를 빼앗았으니 이름이라도 ‘환웅전’으로 살려주겠다는 것이었다. ‘환’은 크다는 뜻이니 이를 큰 대자를 써서 대웅전이라 한 것이다.
"단군 = 산신이다" 는 생각은 불교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통념화 되어 왔으며로 절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유입되었을 때 神佛相爭(신불상쟁)의 비극을 일으켰던 것을 알 수 있다. 목을 잘렸다는 순교자 이차돈(異次頓)의 이야기는 신불상쟁의 대표적인 참극이라 할 수 있다.
경상북도 김천의 直指寺(직지사)에는 아도화상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구려에서 신라에 와서 처음 불교를 전한 분이 阿道和尙(아도화상)이었는데 그는 병으로 죽어가는 신라의 공주를 살려놓고 왕의 신임을 듬뿍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여러 신하들의 모함을 받아 직지사에서 멀지 않는 선산으로 낙향하여 끝내는 입적하였다는 것이다.
그런 아도화상이 생전에 손가락으로 이곳을 가리키며 직지사를 지어라 하였다는 것이니 김천 직지사는 신불상쟁의 아픔을 참고 탄생한절이요 그 안의 산신각 역시 종교전쟁이 낳은 귀중한 옥동자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직지사에는 한국 최고의 걸작품으로 알려진 산신도(山神圖)가 있으며, 한국 제일의 탱화 부처님 초상화가 있다. 특히 직지사의 산신각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어 절 본채와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다른 절에서는 산신각이 따로 있지 않고 경내에 같이 있다. 그런데 직지사의 산신각은 절의 여러 건물과는 담을 쌓고 독립해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독채를 쓰고 있는 셈이다.
그런 산신각에 들어가면 먼저 삼성각이라 쓴 액자가 있다. 산신각의 원명이 三聖閣(삼성각) 이며, 성(聖)과 신(神) 사이에는 생과 사를 가르는 선이 그어져 있다. 성은 이승의 인간으로서 최고의 존칭이다. 가령 공자를 가리켜 성인이라 한다.
그러나 신은 성인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존재에 대한 칭호이다. 직지사에서 산신각 주인을 삼성이라 한 것은 단군을 신이 아닌 인간으로 본 탁견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삼성각 안에는 유명한 산신도가 있다. 얼굴의 수염이 검다. 다른 절의 산신도를 보면 산신의 수염이 허옇게 백발인 것은 중국의 도교의 산신도이다. 산신 무릎에 안기듯이 바짝 붙은 호랑이 역시 위엄이 있다. 호랑이 그림은 그 생명이 눈에 있다. 직지사 산신도의 호랑이 눈은 상대를 노려보는 것이 무섭다. 눈빛이 살아 있는 것이다. 산신의 뒤에는 늙은 소나무(노송)가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는데 이 또한 수작이다. 이 노송이 다름 아닌 환웅이 태백산에 내려 와서 神市(신시)를 열었고 또 그곳에서 웅녀를 만나 단군을 낳았다는 神檀樹(신단수)인 것이다. 신단수 옆에는 불로초를 달여서 산신에게 갖다 바치는 선녀 두 사람이 있다. 산신도 다른 한쪽 벽에 걸린 그림에 那般尊者(나반존자)가 보이며, 나반은 천신(天神)이며 산신은 지신(地神)이다.
우리나라를 가리켜서 산신당의 나라라 했다. 불교가 들어오고 유교가 들어온 뒤에도 마을마다 산신당이 있고 신단수가 서있는 농촌풍경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정월 당산제, 2월 영둥제, 6월 농신제, 10월 告祀(고사) 등 모든 연중행사는 단군 이래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어 아무리 나라에서 금지하여도 사라지지 않는 우리 민족문화의 핵심이었다.
모든 축제는 산신을 불러 내리는 강신(降神) 행사에서 시작된다. 산신은 본시 천신(天神)이어서 마치 환웅이 그랬듯이 먼저 하늘과 가장 가까운 큰 산에 내리신다. 백두산, 묘향산, 구월산, 금강산, 치악산, 오대산, 태백산, 지리산, 한라산 등 팔도의 모든 명산에서 강신제를 올린다. 고을마다 鎭山(진산)이 있는데 이들 작은 산에도 신이 내린다. 이렇게 지상에 내린 신은 모든 마을에 풍년이 들고 가정에는 질병이 없는 행복한 새해가 될 것을 약속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어느 절에서나 볼 수 있는 산신각은 이것은 왜 절에 있는 것일까? 다른 나라 절에도 산신을 모시었을까? 그리고 절 입구에 쌓여 있는 돌무더기나 우뚝 서 있는 장승, 이것은 또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이곳에 있는 것일까?
역사 공부를 하면서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에 의해 절이 도성에서 쫓겨나 산으로 옮겨가게 되어 민간신앙과 야합하게 되면서 산신을 모시는 산신각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를 보면 절에서 산신을 모셨다는 기록이 신라시대부터 나타난다.
경주의 서쪽에 있는 선도산에 신라 진평왕 시대에 지혜라는 비구니가 절을 짓고자 하였으나 재력이 없어 고민을 하고 있었다. 꿈에 선도산의 성모(山神)가 나타나, 어떤 장소를 가리키며 그 곳을 파면 금이 나올 것이니 그것을 가지고 절을 지으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절을 지을 때 부처님과 함께 산신을 함께 모시라고 하였다. 비구니 지혜가 꿈에서 깨어나 그 곳을 파 보니 과연 금이 있어 이를 가지고 절을 지었으며 선도산 산신의 말대로 부처님과 함께 산신을 모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신라시대 진평왕 시대에 이미 절에서 부처님과 아울러 산신을 함께 모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이 기록은 절에서 부처님과 함께 산신을 모셨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산신을 모시는 산신각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삼국유사를 보면 신라시대 최초의 절인 흥륜사를 지을 때, 거기서 석감 등 건축자재가 이미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즉 절을 지으려던 그 장소에 이미 다른 건조물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더구나 그 지역의 명칭이 천경림(天鏡林)이라는 데서 천신 신앙과 관련된 토착 신앙의 신성 공간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그렇다면 토착 신앙의 신성 공간에 하필 절을 세우려 하였을까?
이차돈이 순교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바로 토착신앙의 중심에 절을 지으려한 데에 있는 것이다. 법흥왕은 평소에 불교를 좋아하여 부처님을 모시는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이를 이룰 수 없었다. 이차돈은 법흥왕의 뜻을 알아차리고 귀족들의 반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절을 짓는 것을 강행하였다. 귀족들은 그들이 전통적으로 신봉하던 토착신앙을 지키고 싶어 하였고, 절을 짓는 것은 반대하였지만 법흥왕의 뜻에 정면으로 맞설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차돈이 흥륜사를 짓는데 그들이 신봉하는 토착신앙의 중심인 천경림에 흥륜사를 지으려하자 귀족들이 반대를 하고 나선 것이다.
법흥왕은 절을 지으라고는 하였으나 귀족들이 신봉하던 토착신앙의 중심인 천경림에 지으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한편, 이차돈은 이왕에 절을 지을 바에는 토착신앙의 중심인 천경림에 지어 불법을 믿는 것을 확실히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에 귀족들이 법흥왕에게 왜 천경림에 절을 짓느냐고 따지니, 법흥왕의 입장이 난처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법흥왕은 이차돈을 왕명을 어긴 죄로 다스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차돈은 순교하면서 불법이 신기하다면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의 목에서 흰 젖이 솟아나고 그의 목이 경주 소금강산에 날아가 떨어졌다. 그러자 귀족들도 이러한 신이한 기적을 보고는 더 이상 절을 짓는 것을 반대하지 않게 되어 진흥왕대에 흥륜사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토착신앙과 불교는 갈등을 벌이게 되었지만 부처님을 모시는 대웅전과 함께 기존의 토착신을 모신 산신각을 함께 짓게 되는 것이다. 절이 토착신앙의 센터에 들어서게 되니, 원래 있던 토착신앙의 신성공간의 배치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지금 남아 있는 토착 신앙의 신성 공간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삼중 구조로 되어 있다. 맨 아래쪽에 하당으로 불리는 장승과 솟대, 중간에 중당으로 불리는 돌무더기 서낭당, 맨 위쪽에 상당으로 불리는 산신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은 이 상․중․하당이 하나 혹은 둘이 생략되어 있는 경우가 많지만, 원래의 구조는 상․중․하당의 삼중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절을 살펴보면 맨 아래 쪽에 장승, 중간에 대웅전, 맨 위쪽에 산신각이 배치되어 있다. 결국 토착 신앙의 신성 공간의 상․중․하당의 구조가 유지되면서 부처님을 모시는 대웅전이 중당에 배치된 것이다.
즉 장승에서 산신각을 잇는 선을 지름으로 하는 원형의 공간 안에 부처님을 모시는 대웅전을 비롯한 불교의 전각들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따라서 산신각은 대웅전 뒤로 밀려난 것이 아니라 대웅전 위쪽에 상당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절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을 모시는 대웅전에서 예불을 드리지만, 또 많은 사람들이 바램을 기원할 때는 반드시 산신각까지 올라가 산신에게 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절에 가 보면 산신각에는 산신 탱화 뿐만 아니라 칠성탱화와 독성탱화가 함께 모셔져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또는 칠성을 모시는 칠성각과 독성을 모시는 독성각이 따로 있는 경우도 있으며, 산신과 칠성 및 독성 등 삼성을 모시는 삼성각이 있는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의 사찰은 대개 산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토착신인 산신을 모시는 산신각이 가장 많다. 산신탱화는 산신이 흰 수염을 흩날리며 호랑이를 타고 있거나 호랑이가 옆에 앉아 있고, 어린 동자가 천도 복숭아를 산신께 바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칠성은 북두칠성을 가리키는 중국의 민간신앙에서 모시는 신으로 중국에서 들어 온 것이다. 또 독성은 나반존자로서 인도의 토착신앙에서 모시는 신으로 인도에서 들어 온 것이다. 따라서 이 삼성각은 인도, 중국, 한국의 토착신으로 세 나라의 토착신이 각각 불교와 융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융화(融和)라는 개념은 불교는 불교 그대로, 토착신앙은 토착신앙 그대로 있으면서 서로 조화롭게 공존하는 부분이 있다는 의미이다.
지금은 무당집에서 산신을 모시고 있어서 산신 신앙을 무속 신앙이라고 하지만 고대사회에서는 ‘선’(仙)이라고 표현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왕검선인’(王儉仙人)이라는 기록이 있고, 신라에서는 유․불․선(儒.佛.仙)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단재 신채호는 이를 ‘낭가사상(郎家思想)’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 고대의 토착신앙을 부르는 용어로는 선도라는 표현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선. 불 융화라는 표현이 더욱 적절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산신신앙에 대한 기록은 단군신화에서부터 나타난다. 단군이1,000여 년간 고조선을 다스리다가 장당경에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살펴본 선도산의 성모도 산신이며, 신라시대에는 국가제사의 가장 중요한 대상이 산신이었다. 물론 천신이 고대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신앙 대상이었지만 천신이 하강한 곳이 산이기 때문에 산신은 천신과 동급으로 존숭되었다. 그래서 신라에서는 산신을 대․중․소로 나누어 대사, 중사, 소사로 편제하였다. 대사는 삼산으로 나력산(경주), 골화산(영천), 혈례(영일)가 그것인데경주지역 근방의 산신으로 호국신이었다.
김유신이 고구려의 첩자인 백석의 꼬임에 빠져 고구려로 갈 때 이 호국 여삼신이 나타나 김유신을 구해 주었다. 중사인 오악은, 신라의 통일 전에는 경주지역을 중심으로 동쪽의 토함산, 서쪽의 선도산, 남쪽의 남산, 북쪽의 금강산, 가운데 명활산이었다.
신라의 통일 후에는 동쪽의 토함산, 서쪽의 계룡산, 남쪽의 지리산, 북쪽의 태백산, 가운데 팔공산으로 이 또한 호국의 산들이었다. 소사에도 많은 산들이 편성되어 있는데 설악, 감악, 무진악 등 지역의 진산들이 지역 신들로 신앙되어 제사를 지내었다. 이러한 전통은 고려에도 이어져 국가의 위기가 닥쳤을 때는 이러한 삼산과 오악에서 국가적인 제사가 거행되었다. 그러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이 산들이 각 지역별로 동제를 지내는 대상으로 되어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의 위치를 유지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고대의 산신들이 대개가 여신(女神)이라는 것이다. 선도산의 산신은 성모로서 여성이며, 신라의 삼산도 호국 여삼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리산의 노고단도 할미산이라는 의미이다. 고대인들에게 있어 산은 어머니나 할머니라는 의식이 강하였던 것 같다. 고대인들은 산에서 나무를 하여 땔감을 구하고, 열매를 따서 양식으로 하기도 하였으며,
산에서 짐승을 사냥하여 먹거리를 구하기도 하였다. 또한 산은 식수를 제공하였으며, 바람을 막아주기도 하였다. 따라서 고대인들에게 있어 산은 그들의 젖줄이며 수호자였다. 그래서 산을 어머니 또는 할머니로 인식하여 모악산이니 대모산이니 할미산이라는 명칭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또한 산신할머니라는 표현에도 이러한 의식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다 가부장적 사회가 되면서 산신의 성도 바뀌어 산신할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남아있는 산신도의 모습이 대개 남성인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래된 산신도를 보면 할머니나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지금 우리는 단군할아버지라는 표현을 하고 있지만 고대인들은 아마도 단군할머니라고 불렀을 것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고대의 종교전문가 중에 노구(老嫗)라는 존재가 보이는데 이는 할머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불교가 수용되고 나서는 할아버지를 뜻하는 노옹(老翁)이라는 명칭으로 바뀌게 된다. 또한 불교 수용 이후 산의 이름도 비로봉이니, 금강산이니, 반야봉이니 하는 불교식 명칭의 산 이름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변화 중에 절도 산신각과 장승을 잇는 선을 지름으로 하는 원형의 토착신앙의 공간 안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절 아래에 여전히 장승이 버티고 서 있고, 절 위쪽에 산신각이 우뚝 솟아 위용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찰에서 산신각은 대부분 산신탱화로 산신을 모시지만, 가끔 석상으로 산신상(山神象)을 모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할아버지 산신도 있지만, 할머니 산신도 있습니다. 가령 지리산 쌍계사 삼성각에는 비녀를 꼽고 있는 할머니 산신이 계십니다. 물론 그 옆에 호랑이도 함께 합니다. 보통 호랑이와 산신을 같다고 봅니다. 즉 호랑이가 바로 산신이라는 것입니다. 또 동자가 천도복숭아를 들고 있기도 합니다.
산신각에 가면, 가끔 재미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공양물에는 오이나 미나리 등이 있거나 혹은 술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농사가 잘되었다고 산신께 고마움으로 올린 것입니다. 또 한해 잘 지내기를 기원하는 마음입니다. 또 어떤 이는 산신상의 손에 지폐를 꽂아두기도 하며 옛날부터 사찰은 내호조왕(內護竈王) 외호산신(外護山神) 이라하여 사찰 내부는 조왕신이, 사찰 외부에는 산신이 보호해 준다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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