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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수리 - 신성교사 독서 동아리
 
 
 
카페 게시글
2024 영화와 소설 사이 밀양, 密陽, secret sunshine
야간비행 추천 0 조회 26 24.06.13 12:13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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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4.06.13 14:02

    첫댓글 책을 먼저 읽고, 영화를 봤어요. 오래전에 나온 영화라 지인들은 '아~! 그 영화! 전도연이 정말 소름끼치게 잘하지', '밀양'의 뜻이 빽빽한 햇볕이라는거 알고 있어요?', '용서하러 교도소에 갔는데 이미 신에게 용서를 받았다고 한 장면이 떠올라요.' 등 다양한 말들을 하더라요. 저는 사실 어제 영화를 처음 봤어요. 책의 문장도 기가 막혔는데 그 책을 해석한 이창동 감독도 놀랍더라구요. 이 이야기는 신을 믿지 않는 저에게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바라보게 했던 영화입니다.
    더불어 사운드가 정말 좋아서 몰입해서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 24.06.14 06:10

    네. 이청준 작가의 소설도 그렇고 이창동 감독의 영화도 그렇고, 삶의 본질을 건드리고 다루는 어떤 힘이 느껴지네요. 저는 소설보다 영화가 생각할 거리들을 더 던져주는 것 같아 좋았습니다. 영화와 책에 대한 양샘의 글도 읽고 싶어요.^^ 시간 나실 때 후기 남겨주세요.~~

  • 작성자 24.06.14 10:50

    용서는 왜 불-가능한가? 그것은 무엇보다 용서하는 주체와 용서받는 대상의 모호성에서 비롯된다. 누가 용서하는가? 신애는 박도섭을 용서하려고 하지만,여기서 용서하는 자가 신애라고 하기에는 뭔가 결여된 부분이 있다. 용서는 무엇보다 능력, 힘의 문제이다. 약자는 강자를 용서할 수 없다. 그것은 기꼇해야 정신 승리일 뿐이다. 약자의 용서는 강자들에게 비웃음거리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용서는 무언가를 회복하는 일인가? 죄 지은 자를 용서를 통해 죄 이전의 상태로 되돌릴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용서는 무엇보다 선언이다. 군주들의 사면권이 대표적이다. 군주의 사면으로 인해 죄 지은자의 죄가 사라질리 만무하다. 그것은 단지 죄를 사하노라는 선언에 불과하다. 그 선언을 내릴 수 있는 자는 법적 초과, 인간적 삶의 초과이며, 인간 사회가 이런 초과를 허용한다는 것은 그런 초과가 없이는 인간사회가 지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용서가 없다.!!! <밀양>의 결말이 숭고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 아닌가? 신애라는 약자의 용서라는 행위에 대해 <밀양>은 우리를 쉽게 초과의 지점을 데려 가지 않고 그 절망의 경계 지점에서 자신을 비추어 본다.

  • 작성자 24.06.14 11:03

    <밀양>은 우리에게 고통 없는 앎이란 없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무지를 선택하라고 말하고 있다. 신애가 지워지는 존재 - 누군가가 호명할 수 없는 존재, 그 익명성이 삶 그자체가 되는 존재-가 되고자 했더라면- 철저하게 가면을 써야 했다. 하지만 신애는 밀양을 오인하고 - 신애는 밀양을 비밀의 햇볕이라고 오인한다.- 그 빛 아래서 자신을 지울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신애가 쓴 가면은 어설픈 배우의 연기를 해나가는데. - 옷가게 주인은 신애를 이상한 여자로, 정신 나간 여자로 해석하는데, 이 해석은 정확하다.-그 연기의 충동은 신애가 자신도 모르게 내뱉는 그 무서운 충동의 산물이다.(다시 한번 종찬의 카센터를 뛰쳐나와 중얼거리는 그 무서운 독백을 상기해보자.) <밀양>에서 신애의 행동, 말, 연기를 추동하는 힘은 그 억압된 충동-이것이 진실, 진리의 위치를 점한다.-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신애가 밀양에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 하는 것은 자신도 모르는 그 심연, 그 충동을 은폐하는 것이다. 충동을 수많은 우연에 의해 외상을 남기는데, 신애의 그 돌발적이면서 아직 어린아이같은 감정도 태도의 변화는 이런 충동들의 증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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