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밀양? 밀양(密陽)!! - 남편과 사별하고 아들과 함께 밀양에 온 신애는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그리고 자신이 도착한 곳이 어딘지 모른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요." "어디서 왔냐구요? 글쎄요, 어디서 왔나?" ) 신애는 종찬에게 밀양이 어떤 곳이냐고 묻고, 그 의미를 '비밀의 햇볕'이라고 해석한다. 신애는 밀양에서 인생을 다시 살고 싶어한다. ("난 서울이 싫어. 여기가 좋아, 여기가 왜 좋은지 아니? 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거든. 난 여기서 새로 시작할 거야." <동생 민기와의 대화중>) 신애는 그러나 밀양을 오인한다. 신애는 너무나 환한 햇볕 아래서 자신의 비밀을 숨기고 싶어 하지만 너무나 빽빽한 햇볕 (密陽) 아래 신애의 삶은 온전히 노출된다. 밀양은 신애의 해석과 달리 자신의 삶이 소문과 풍문, 이야기와 이야기로 온전히 노출되는 공간이다. 그곳은 비밀의 빛이 지배하는 공간이 아니라 비밀이 과잉되어 흘러 넘치는 공간이다.
2. 두번의 선언, 두번의 파국 - 신애는 두번 선언한다. 한번은 이전의 삶을 지우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이라는 선언, 그리고 한번은 자신의 아들을 납치해 살해한 박도섭을 용서하겠다는 선언.. 하지만 신애의 이 선언은 모두 두 번의 파국을 맞는다. 한번은 너무나 빽빽한 햇볕 아래서, 한 번은 신의 용서 아래서... 신애의 두 번의 선언은 자신의 삶에 대한 인간적 형상-그 불완전성, 그 불안- 모든 억압된 것은 되돌아온다는 형상-으로 인해 이미 파국은 예고되어 이었다. 선언은 그 예언적 성격으로 인해 절대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신애의 선언은 수많은 억압된 것이 은폐된 것- 종찬과 식사 약속을 어기고 김집사와 만나고 와서 종찬의 카센터로 다시 돌아왔다 뛰처나와 광기에 사로잡혀 거리를 걸으며 홀로 중얼거리는 신애의 독백 -"그것도 모른다고 욕실에 가둬두고 벌줬잖아. 자기 집에서 막 담배 피우면서 숟가락으로 머리 때리고 씨/웃기시네/쳇 그런 데 왜 가려고 하냐고?/내가 간다고 했는데 당신이 못가게 했잖아. 이 씨팔 놈/쳇, 좆같은 놈이/ 색골, 으이씨/(어두운 하늘을 올려다 보면) 난 너한테 안 져. 절대 안 져." 은 그 억압되어 은폐된 것 정체를 드러내는 것으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인 한, 선언일 수 없다. 인간은 구슬프게도 자신을 미래(未-來)로 지연하면서 약속하는 존재(니체)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절대 지금-여기에서 실현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존재가 있다면 그가 곧 신일 것이다. 그러므로 신애의 두 번의 선언은 어쩌면 신적인 선언이며, 그것은 필연적인 파국을 안고 있는 선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박도섭을 용서하러 갔던 신애에게 신에 의해 이미 용서와 구원을 받았다고 선언하는 박도섭의 그 고통없고 자비없으며, 무구한 얼굴에 충격을 받은 신애가 졸도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은 또한 자신의 선언이 신적 선언임을 깨달은 신애의 깨어남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3. 용서와 구원, 그 불-가능성 - 인간은 용서할 수 있을까? 신애는 박도섭을 용서하고자 한다. 그러나 박도섭은 너무나 편안한 얼굴로 자신이 신에 의해 용서받고 구원받았음을 선언한다. 박도섭의 선언 앞에서 신애는 절망하고 기절한다. 그리고 항변한다. "용서요? 어떻게 용서해요? 용서하고 싶어도 난 할 수가 없어요! 그 인간은 이미 용서받았대요! 하나님한테! 그래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대요./ 이미 용서를 받았는데, 내가 어떻게 다시 용서할 수 있어요?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먼저 그를 용서할 수 있어요? 난 이렇게 괴로운데 그 인간은 하나님 사랑으로 용서받고 구원받았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왜? 왜애?"
용서의 주체는 누구이며, 용서의 대상은 누군인가? 누가 용서를 원하는가? 용서는 과거로 회귀하는 것인가? 아니면 미래로 지연되는 것인가? 즉 우리는 용서를 통해 과거(죄 이전의 상태)로 회복될 수 있는가? 신애의 절망은 어쩌면 용서할 수 없는 인간의 실존적 한계, 나아가 용서라는 폭력을 휘두르는 신에 대한 분노와 절망일지도 모른다.
4. 속세, 그 빛나는 신성? - 밀양에서 종찬(송강호분)의 존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는 이 영화에서 공기와 같은 존재가 아닌가? 아니(면),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어쩌면 그는 신(과 같은)이 아닌가? 지극히 세속적이고(신애는 그를 속물이라고 규정한다.), 지극히 현실적이며(우리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밀양에 대한 두번의 질문(신애의 질문과 신애 동생 민기의 질문)에 대한 종찬의 대답에 주목해야 한다.), 지극히 속물적이고 저속하여, 오히려 너무나 신적인 존재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적 캐릭터로 보더라도 종찬이 배경으로 등장하지 않으면 신애의 그 빛나는 연기는 갈 길을 잃어버릴 것이고, 과녁을 놓쳐버릴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그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눈부신 절정, 결말을 상기해 보자. 스스로 머리를 자르는 신애에게 거울을 들어 보여주는 종찬의 모습이야말로 신의 형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신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하고 존재하는 곳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 곳에서 말하는 존재가 아닌가? 이런 해석은 너무 과잉된 해석일까?
5. 구원은 예기치 않은 곳(순간)에서 오고 -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보자. 미용실로 머리카락를 자르려갔던 신애가 커트를 하러온 정아(박도섭의 딸)에게 자신의 머리카락(그 신체의 경계, 내부와 외부의 경계, 머리카락은 무엇인가?)을 맡긴다. 용서에 실패한 신애가 용서와 구원의 경계 지점에서 망설이다, 그 초월의 지점을 견디지 못하고(인간은 결코 초월할 수 없다. 이게 이 영화의 위대한 점이다.) 뛰쳐나와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거울을 마주하고 스스로 머리카락을 자르려한다. 종찬이 들어가 거울을 들어준다. 잘린 신애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깨진 콘크리트 바닥으로 떨어지고, 카메라는 잠시 깨진 콘크리트 바닥에 고인 물에 비친 햇볕 한 줌을 비추며 막을 내린다. 이 장면의 숭고함은 용서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라 용서의 불-가능성으로 인해 용서해야 하는 인간의 절망에 대한 알아차림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김수영/절망>
사족(蛇足)
어제 샘들과 같이 본 밀양이 좋아, 두서없이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을 적어본다. 이런 생각들의 편린들이 모여 다양한 사유의 공화국이 구축되면 좋겠다는 생각에.. 영화보고 떠오른, 떠올린 생각들을 우리 같이 정리하고 공유해 보면 하는 마음에...
첫댓글 책을 먼저 읽고, 영화를 봤어요. 오래전에 나온 영화라 지인들은 '아~! 그 영화! 전도연이 정말 소름끼치게 잘하지', '밀양'의 뜻이 빽빽한 햇볕이라는거 알고 있어요?', '용서하러 교도소에 갔는데 이미 신에게 용서를 받았다고 한 장면이 떠올라요.' 등 다양한 말들을 하더라요. 저는 사실 어제 영화를 처음 봤어요. 책의 문장도 기가 막혔는데 그 책을 해석한 이창동 감독도 놀랍더라구요. 이 이야기는 신을 믿지 않는 저에게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바라보게 했던 영화입니다.
더불어 사운드가 정말 좋아서 몰입해서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이청준 작가의 소설도 그렇고 이창동 감독의 영화도 그렇고, 삶의 본질을 건드리고 다루는 어떤 힘이 느껴지네요. 저는 소설보다 영화가 생각할 거리들을 더 던져주는 것 같아 좋았습니다. 영화와 책에 대한 양샘의 글도 읽고 싶어요.^^ 시간 나실 때 후기 남겨주세요.~~
용서는 왜 불-가능한가? 그것은 무엇보다 용서하는 주체와 용서받는 대상의 모호성에서 비롯된다. 누가 용서하는가? 신애는 박도섭을 용서하려고 하지만,여기서 용서하는 자가 신애라고 하기에는 뭔가 결여된 부분이 있다. 용서는 무엇보다 능력, 힘의 문제이다. 약자는 강자를 용서할 수 없다. 그것은 기꼇해야 정신 승리일 뿐이다. 약자의 용서는 강자들에게 비웃음거리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용서는 무언가를 회복하는 일인가? 죄 지은 자를 용서를 통해 죄 이전의 상태로 되돌릴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용서는 무엇보다 선언이다. 군주들의 사면권이 대표적이다. 군주의 사면으로 인해 죄 지은자의 죄가 사라질리 만무하다. 그것은 단지 죄를 사하노라는 선언에 불과하다. 그 선언을 내릴 수 있는 자는 법적 초과, 인간적 삶의 초과이며, 인간 사회가 이런 초과를 허용한다는 것은 그런 초과가 없이는 인간사회가 지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용서가 없다.!!! <밀양>의 결말이 숭고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 아닌가? 신애라는 약자의 용서라는 행위에 대해 <밀양>은 우리를 쉽게 초과의 지점을 데려 가지 않고 그 절망의 경계 지점에서 자신을 비추어 본다.
<밀양>은 우리에게 고통 없는 앎이란 없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무지를 선택하라고 말하고 있다. 신애가 지워지는 존재 - 누군가가 호명할 수 없는 존재, 그 익명성이 삶 그자체가 되는 존재-가 되고자 했더라면- 철저하게 가면을 써야 했다. 하지만 신애는 밀양을 오인하고 - 신애는 밀양을 비밀의 햇볕이라고 오인한다.- 그 빛 아래서 자신을 지울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신애가 쓴 가면은 어설픈 배우의 연기를 해나가는데. - 옷가게 주인은 신애를 이상한 여자로, 정신 나간 여자로 해석하는데, 이 해석은 정확하다.-그 연기의 충동은 신애가 자신도 모르게 내뱉는 그 무서운 충동의 산물이다.(다시 한번 종찬의 카센터를 뛰쳐나와 중얼거리는 그 무서운 독백을 상기해보자.) <밀양>에서 신애의 행동, 말, 연기를 추동하는 힘은 그 억압된 충동-이것이 진실, 진리의 위치를 점한다.-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신애가 밀양에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 하는 것은 자신도 모르는 그 심연, 그 충동을 은폐하는 것이다. 충동을 수많은 우연에 의해 외상을 남기는데, 신애의 그 돌발적이면서 아직 어린아이같은 감정도 태도의 변화는 이런 충동들의 증상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