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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2장 1-7절.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가 되라
1절.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New American Standard Bible: You therefore, my son, be strong in the grace that is in Christ Jesus.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Σὺ οὖν, τέκνον μου,
you therefore, children of me
‘너는’(Σὺ: You)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ἐνδυναμοῦ ἐν τῇ χάριτι τῇ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be strong in the grace that in Christ Jesus
‘강하고’(ἐνδυναμοῦ)는 현재 명령형으로서(be strong) 항상 강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1. 바울이 서신 중간에서 ‘내 아들’이라고 호칭한 것은 강한 애정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란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버렸으나 오네시보로는 충성스럽게 바울을 격려했으므로’ 디모데도 많은 사람들처럼 약해지지 않고 오네시보로 같이 충성스러우려면, 주의 은혜 안에서 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핍박 속에서 신앙적인 충성이 개인의 의지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을 의미합니다.
2. 바울이 디모데에게 ‘강하라’고 권면한 것은 디모데가 육신이 병약하고(딤후 5:23, 1:7), 성격도 심약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강함은 인간 자신의 결심과 노력으로 강해지는 것을 가리키지 않고, 주님께 은혜받아서 강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은혜는 주님이 주시는 것이고, 이 은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은혜받아서 강해지는 것은 우리가 기도하고 주님께 성령의 은혜를 받을 때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안수함으로써 은사를 불일 듯하게 하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딤후 1:6).
3. 이처럼 은혜 속에서 강해지는 것은 바울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교훈한 말씀입니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즉 성령 안에서 살아왔고, 수많은 박해와 고난을 이겨낸 근본 동력이 주님이 공급하시는 은혜였음을 고백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2절.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The things which you have heard from me in the presence of many witnesses, entrust these to faithful men who will be able to teach others also.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καὶ ἃ ἤκουσας παρ’ ἐμοῦ διὰ πολλῶν μαρτύρων,
and the things which you heard from me among many witnesses
직역하면 ‘또 많은 증인들 가운데서 나에게 네가 들은 것들을’이란 뜻입니다.
‘네가 들은’(ἤκουσας)은 부정과거로서(you heard) 과거에 확실히 들은 사실을 가리킵니다.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ταῦτα παράθου πιστοῖς ἀνθρώποις,
these entrust to faithful men
‘부탁하라’(παράθου)는 부정과거 명령형으로서(entrust) 반드시 부탁하라는 것이고, 원형(παρατίθημι)는 ‘곁에’(παρά)라는 접두어와 ‘두다’(τίθημι)라는 동사의 합성어로서, ‘곁에 두다, 위탁하다, 맡기다’(place beside, deposit with, entrust to)는 뜻입니다,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οἵτινες ἱκανοὶ ἔσονται καὶ ἑτέρους διδάξαι.
such sufficient will be also others to teach
직역하면 ‘그러한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에 충분할 것이다’는 뜻입니다.
‘가르치기에’(διδάξαι)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teach) 확실하고 단호하게 가르치는 것을 가리키고, ‘충분할 것이다’에서 동사(ἔσονται)는 미래형입니다(will be).
1. ‘네가 많은 증인들 앞에서 내게 들은 바’란 바울이 전하는 복음과 가르침을 가리키며, ‘많은 증인들‘이란 바울이 전도하고 가르칠 때 듣고 믿은 사람들을 가리키며, 디모데가 안수받을 때 바울의 설교를 듣고 함께 디모데에게 안수했던 사람들도 가리킵니다.
2.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는 것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수한 복음 진리를 디모데는 충성된 사람에게 전수해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게 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 진리는 나 혼자 믿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었으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복음 진리를 믿고 구원받은 것은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특권이요, 내가 다른 사람에게 복음 진리를 전하여 믿게 하는 것은 구원받은 자의 의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의 기능과 복음의 역할은 단순히 내가 믿고 구원과 복을 받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제자를 길러내는 제자훈련이고, 어떤 의미에서 주일학교나 기독학교나 신학교육과 같은 것입니다.
3. ‘그들이 또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는 것은 바울이 디모데를 목회자로 길러낸 것처럼, 디모데도 제자를 교사나 전도자로 길러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제자훈련은 계속 확대 재생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계승적 제자훈련은 교회 학교에서도 계속 이루어져서 주일학생으로 자란 사람이 다시 주일학교 교사가 되어서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고, 가정에서도 부모가 목사나 장로가 되었으면 그 자녀들이 교회 중직자로 성장하고, 그 자녀들이 또 손자 손녀들을 잘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4. 이처럼 제자를 선택할 때는 조건이 ‘충성된 사람’을 선택해서 제자로 성장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충성된 사람들’(πιστοῖς ἀνθρώποις: faithful men)이란 믿음직스럽고 성실한 사람을 가리키는데, 한 사람만 제자 삼을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여러 명을 제자 삼으라는 것입니다.
3절.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Suffer hardship with me, as a good soldier of Christ Jesus.
συνκακοπάθησον ὡς καλὸς στρατιώτης Χριστοῦ Ἰησοῦ.
Share in suffering as good soldier of Christ Jesus
본 문에 ‘나와 함께’라는 단어는 없으나 번역상 넣은 것입니다.
‘함께 고난을 받으라’(συνκακοπάθησον)는 부정과거 명령형으로서(Share in suffering) 단호하게 각오하고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것이고, 원형(συγκακοπαθέω)은 ‘함께’(σύν)라는 접두어와 ‘고난을 당하다’( κακοπαθέω)는 동사의 합성어입니다.
1.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란 말은 제자들을 길러내야 하는 스승으로서 디모데는 좋은 병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디모데에게 좋은 병사로서의 스승의 모습은 바울이 보여주었습니다.
즉 바울은 복음 전도자로서 복음 진리를 가르치는 스승으로서 디모데에게 모범을 보여서 많은 고난을 당해왔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복음 전도자로서 당한 고난 25가지가 나와 있고, 사도행전에는 바울이 1-3차 전도 여행을 하면서 매을 맞고 죽었다 살아났고, 감옥에 갇히고 파선한 수 많은 고난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두 번째 갇혀있으면서도 복음 전도자와 교사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고, 충성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전쟁을 수행하는 병사가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임금과 백성들을 위해서 충성하는 것과 같습니다.
전쟁하는 병사는 딱딱한 임시 천막에서 자고, 여러 가지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는 밥상에서 먹지 못하고 주먹밥과 건빵을 먹고, 자다가도 진격명령이 떨어지면 진격해야 합니다.
이처럼 복음 전도자와 목회자가 주님과 교회를 위해서 충성해야 하는 병사라는 것이 성경에 많이 나와 있습니다. (고전 9:7, 고후 10:3-5, 엡 6:10-17, 골 2:15, 딤전 1:18)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함께 군사된 자라고 했고(빌 2:25), 아킵보를 함께 병사된 자라고 했습니다(몬 1:2).
AD 2세기에는 하도 핍박이 심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병사’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였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디모데에게 바울처럼 고난을 견디는 그리스도의 병사가 되라고 말합니다.
2. ‘좋은 병사’의 특징은 3절에 고난을 견디는 것과 4절에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 것과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는 것 세 가지라고 했습니다.
3.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것은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파수하다가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죽음을 앞 두고 있는 바울이 자유스럽게 목회하고 있는 디모데를 향하여 안일한 생활에 빠지지 말고,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악한 마귀와 악한 불신자들에 싸여 있으므로, 마귀에게서 예수님 안으로 불신자를 빼내는 복음 전도자는 당연히 마귀와 싸워야 하고, 불신자들의 핍박과 고난을 이겨내야 합니다.
이 세상은 마귀와 예수님의 전쟁터입니다.
전도자는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는 죽을 인생들을 예수님께로 빼어내오는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또 교회에서 목회하는 목회자도 교인들을 악한 마귀와 질병과 불행으로부터 지켜야 하므로, 자기를 돌보지 않고 타인을 도와야 하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고난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목회자가 교인들 돌보지 않고, 목사들끼리 모여서 놀고 음식이나 사 먹고 다니면 그런 고난이 없겠지만요.
이제 세상을 떠날 시간이 가까운 바울은(딤후 4:6)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바울처럼 전도자로서 고난을 감당하도록 유언처럼 당부하고 있습니다.
4절.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o soldier in active service entangles himself in the affairs of everyday life, so that he may please the one who enlisted him as a soldier.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οὐδεὶς στρατευόμενος, ἐμπλέκεται ταῖς τοῦ βίου πραγματείαις,
no one serving as a soldier, entangles himself in the of this life affairs
‘병사로 복무하는’(στρατευόμενος)은 현재분사로서(serving as a soldier) 현재 병사로 복무하고 있는 것을 가리키며, 원형(στρατεύομαι)은 ‘전쟁하다, 병사로 복무하다’(make war, serve as a soldier)는 뜻입니다.
‘얽매이는’(ἐμπλέκεται)은 현재형으로서(entangles himself) 현재 얽매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ἵνα τῷ στρατολογήσαντι, ἀρέσῃ.
so that the (one) having enlisted him, he might please
‘병사로 모집한’(στρατολογήσαντι)은 부정과거로서(having enlisted him) 과거에 확실히 병사로 모집한 사실을 가리키고, 원형(στρατολογέω)은 ‘군사로 징집하다’(enlist soldiers, collect an army)는 뜻입니다.
‘기쁘게 하려 함이라’(ἀρέσῃ)는 부정과거 가정법 동사로서(he might please) 확실히 기쁘시게 하는 것을 가정한 말입니다.
1.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자기 생활’(τοῦ βίου πραγματείαις: of this life affairs)에서 마지막 단어(πραγματείαις)는 ‘사업, 직업’(business, occupation)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오늘날도 군인은 입대하기 전에 하던 사업이나 직장을 그만두고 군 생활을 하게 됩니다.
오늘날도 목회자는 교회의 일에 전념하고, 교인들은 목회자의 생계비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7장 26-34절에는 일반 성도들도 세상일을 염려하지 말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라고 했습니다.
2. 그런데 문제는 바울 사도가 천막 장사를 하면서 자비량 전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 사도도 빌립보교회나 데살로니가 교회나 다른 교회에서 선교비를 받은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에서 전도할 때 바울은 천막 장사를 하면서 전도하고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행 18:3)
오늘날 각 교단에서는 성직자가 다른 직업을 갖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나, 일각에서는 성직자도 다른 직업을 갖도록 해야 한다는 여론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교회 역사상 451년 칼케돈 회의에서는 성직자가 상업에만 종사하지 않고는 다 허용했고, 갑바도기아의 성직자들은 앉아서 하는 생업에 종사했고, 아프리카의 교회에서는 성직자가 상업에 종사하는 것을 권장했고, 앵글로 색슨 교회에서는 성직자들이 수공업을 부업으로 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고 합니다. (이상근 265.)
3.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고대에 병사들은 국왕을 위해 목숨 바칠 것을 맹세했는데, 그리스도의 군사들인 바울이나 디모데나 목회자들이나 제자들도 왕 되신 주님을 기쁘시도록 충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충성은 매일 매일 순간순간마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모시고, 순종하며 따라가는 훈련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매일 순간마다 성령님의 감동과 인도를 따라가지 않으면, 어느 절대적인 순간에 목숨 바쳐 충성한다는 것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매일 기도하여 성령 충만을 받고, 매일 순간마다 성령의 감동과 인도를 따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찬송가 191장]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주의 팔이 나를 안보함이요, 내가 주의 큰 복을 받는 참된 비결은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하시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함이라.
5절.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lso if anyone competes as an athlete, he does not win the prize unless he competes according to the rules.
경기하는 자가
ἐὰν δὲ καὶ ἀθλῇ τις,
if now also will compete anyone
직역하면 ‘또한 만일 어떤 이가 경기한다면’이란 뜻입니다.
‘경기한다면’(ἀθλῇ)은 현재 가정법 동사로서(will compete) 현재 경기하는 것을 가정한 말입니다.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οὐ στεφανοῦται,
not he is crowned,
동사(στεφανοῦται)는 현재 수동태입니다(he is crowned).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ἐὰν μὴ νομίμως ἀθλήσῃ.
if not lawfully he shall have compete
‘경기하지 아니하면’에서 동사(ἀθλήσῃ)는 부정과거 가정법 동사로서(he shall have compete) 확실히 법대로 경기하는 것을 가정한 말입니다.
1. 신앙생활과 사역자의 삶을 4절에서는 전투로 비유해서 교훈했고, 5절에서는 운동 경기에 비유해서 교훈하고 있고, 6절에서는 농사에 비유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 운동경기의 비유를 바울은 성경 여러 곳에서 했습니다( 고전 9:24-27, 빌 3:12-14, 딤전 6:12, 딤후 1:5, 딤후 4:7-8, 히 12:1-3).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사람들이 경기를 무척 좋아해서 많은 경지장을 지었고, 그 유적들이 지금도 있습니다.
경기의 종목으로는 달리기, 마라톤, 마차경주, 레슬링, 권투, 투창, 투포환 등이 있었습니다.
2. 그런데 경기마다 법칙이 있어서 법칙을 어기면 상을 얻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달리기에서 출발 신호보다 먼저 출발하면 상을 얻지 못했고, 줄을 그은 선을 넘어서 달리면 상을 얻지 못했습니다.
3. ‘승리자의 관’이란 통치자가 쓰는 왕관이 아니라, 운동 경기에서 승리자가 쓰는 면류관(στέφανος:crown)을 가리킵니다.
전쟁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도 여러 종류의 면류관이 주어졌습니다.
개선장군에게 주는 승리의 면류관, 포로들을 적군에게서 구원한 자에게 주는 해방의 면류관, 적군의 진지에 침투해서 공을 세운 침투의 면류관 등이 있었습니다.
6절.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The hard-working farmer ought to be the first to receive his share of the crops.
τὸν κοπιῶντα γεωργὸν δεῖ πρῶτον τῶν καρπῶν μεταλαμβάνειν.
(for) the hardworking farmer it ought to be first of the fruits to partake
직역하면 ‘수고하는 농부가 열매들의 첫 번째를 차지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수고하는’(κοπιῶντα)는 현재분사로서(hardworking) 열심히 수고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마땅하다’(δεῖ)는 현재형으로서(it ought to be) 언제나 마땅하다는 것이고, ‘차지하는 것이’(μεταλαμβάνειν)는 현재 부정사형 동사로서(to partake) 언제나 차지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이고, 원형(μεταλαμβάνω)는 ‘함께’(μετά)라는 접두어와 ‘취하다’(λαμβάνω)는 동사의 합성어입니다.
1. 4절의 병사의 비유와 5절의 운동 경기의 비유에서 이제는 농사의 비유로서 신앙생활과 사역자의 삶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농사의 비유를 여러 번 하셨는데(마 13:1-30, 21:33-46, 요 4:35-38), 바울도 농사의 비유를 여러 번 했습니다(고전 9:7-11, 고후 9:6-10).
복음 전도와 목회를 하는 사역자들은 병사와 같이 자신의 생계에 매이지 않고, 주님께 충성해야 하지만, 전도자가 설립한 교회나 목회자가 사역하는 교회에서 주는 사례비를 마치 농부가 열매를 받는 것처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교훈의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9:10-11, 14.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바울 사도는 자신이 전도하여 설립한 고린도 교회 같은 곳에서는 사례비를 받지 않고, 천막 장사를 하면서 사역했지만(행 12:3), 자신이 전도하고 설립한 빌립보교회 같은 데서는 선교비를 기쁘게 받았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전도하고 목회하면서 사례비를 받지 않은 것은 되도록 교회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지만, 원칙상 선교사가 교회에서 선교비를 받는 것이나, 목회자가 시무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는 것은 마땅하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배려해서 사례비를 받지 않았으나, 디모데 같은 사역자를 생각해서 사역자가 사례비 받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농부의 비유로 가르쳐주었습니다.
즉 수고하는 농부가 열매를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 것입니다.
2.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다’는 것은 농부가 자신이 직접 수고하여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주기 전에 먼저 자신이 곡식과 열매를 먹는다는 뜻입니다.
물론 자신이 먼저 먹고, 자기가 다 먹을 수 없기 때문에, 나머지는 자식들도 주고,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도 나누어주거 팔기도 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고한 농부가 곡식을 먼저 먹는다고 한 것입니다.
3. ‘수고하는’((κοπιῶντα:hardworking)이란 말은 땀 흘려서 수고하고 애쓰는 것을 가리키는데,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땀을 흘려야 땅에서 먹을 것을 얻는다고 말씀하셨는데(창 3:19), 과연 농부는 땀을 흘려서 농작물을 가꾸어야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거름하고 땅을 갈고, 비닐을 덮고, 잡초를 제거하고, 벌레를 잡아주고, 가지 치기를 하고, 거두는 수고를 해야 농산물을 수확할 수 있습니다.
보통 봄에서 가을까지 농사일을 하면 옷이 땀에 젖어서 흥건할 정도로 수고하게 됩니다.
이처럼 전도자나 목회자는 충성스럽게 수고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전도자 바울은 자신을 수고하는 사람이라고 했고(고전 15:10, 고후 11:15-27, 갈 4:19, 골 1:29, 살전 2:9, 살후 3:8, 딤전 4:10), 말씀과 가르침에 종사하는 목회자도 수고하는 사람으로서 존경하라고 했습니다(딤전 5:17).
바울은 로마서에서 일반 성도로서 교회를 위해 수고한 사람들(드루배나, 드루보사, 버시, 마리아)에게도 문안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롬 16:6,12).
선교사나 목회자는 마치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수고하는 것과 같은 ‘사랑의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살전 1:3).
제 경험상 목회자가 되면 주님이 교인들을 마치 자기 자녀를 사랑하는 것 같은 사랑의 마음을 주십니다.
그러면 교인들도 그 사랑을 느끼고, 마음을 기울여 목회자를 사랑하고 대접해줍니다.
물론 이 사랑의 수고로 인해서 목회의 큰 기쁨과 애정을 갖게 되지만, 궁극적으로 전도자와 목회자는 주님이 재림하시고 부활할 때, 주님의 칭찬과 사랑을 바라보면서 수고합니다. (딤후 4:7-8)
4. ‘수고의 열매’는 전도자가 얻는 회심자들을 가리키고, 목회자가 얻는 교인들의 신앙 성장과 교회 부흥이고, 성도들이 성령님께 충성하여,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들을 맺는 것을 가리킵니다.
5. 4-6절의 병사의 비유, 경기자의 비유, 농부의 비유는 첫째 자신을 사역자로 부르신 주님께 충성하라는 것이고, 둘째 경기자와 같이 성령의 인도와 말씀 따라 법대로 사역하라는 것이고, 셋째 수고하는 농부와 같이 열심히 충성해서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7절.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Consider what I say, for the Lord will give you understanding in everything.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νόει ὃ λέγω·
consider what I say
‘내가 말하는’(λέγω)은 현재형으로서(I say) 현재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을 가리키고, ‘생각해보라’(νόει)는 현재 명령형으로서(consider) 현재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δώσει γάρ σοι ὁ Κύριος σύνεσιν ἐν πᾶσιν.
will give for you the Lord understanding in everything
직역하면 ‘왜냐하면 주께서 너에게 범사에 총명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주시리라’(δώσει)는 미래형으로(will give) 장차 주실 것을 가리킵니다.
1. ‘내가 말하는 것’이란 4-6절에서 말한 병사의 비유, 경기자의 비유, 농사의 비유로서, 바울이 앞에서 비유로 말한 교훈의 실체를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생각하다’(νοέω)는 말은 ‘생각하다, 이해하다, 깨닫다’(think, understand, realize)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생각하라’는 것은 바울의 말을 곰곰이 깊이 생각해보고 깨달아 알라는 뜻입니다.
2. ‘총명’(σύνεσιν)이란 단어는 원래 ‘통합하다’(συνίημι:set together)란 동사에서 나온 말로서, ‘통괄적으로 이해하는 것’(holistic understanding, synthesized comprehension), ‘비유적인 진리를 이해하는 것’(reasoning that joins implicit truths), ‘통찰력’(insight), 신중함이나 분별력‘ (prudence), ‘실제적인 분별력’( practical discernment)을 가리킵니다.
참고로 새번역과 공동번역과 현대인의 성경에는 ‘깨닫는 능력’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특히 이단 사설이 횡횡하는 시대에 진리를 올바로 분별하고, 이단을 퇴치하는 것을 가리키며, 여러 목회자가 여러 가지 설교를 해도, 그것을 듣고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고 가려서, 취사선택하는 지혜를 가리킵니다.
비슷한 단어로 에베소서 1장 8절에 나오는 ‘총명’( φρόνησις:insight, prudence, understanding)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단어 ‘분별력’( φρόνησις, σύνεσις)이란 단어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성령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매일 기도하고 순간순간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을 잘 연구하여 분별력을 얻어야 합니다.
또한 부모와 같은 목회적인 심정으로 목회한 경험을 바탕으로, 주님의 마음으로 분별하는 것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매일 기도하여 순간순간 성령님의 인도를 받고, 성경을 통해 은혜받아서 주님께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맺고, 가정과 자녀에게 주신 복된 축복의 증거를 통해서 이웃들에게 전도하시고,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