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으로 달라지는 삶
약 1장 19-27절
우리가 이전보다
경제적으로 잘 살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좋은 집에서 살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땀을 흘렸습니다.
그 결과 경제적으로 풍성해진 반면
사람들은 사치와 쾌락을
좇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이 발달하고 풍요로워질수록
사람들은 점점 이기적으로 생각합니다.
자기중심적이어서
더욱 냉정한 세상이 되어갑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한 모습을
점점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가장 큰 손실은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관심조차 없습니다.
여러가지 시험을 이기는 힘은
경건입니다.
경건 외에는
시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지식, 권력, 돈으로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유혹을 이기는 힘은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를 지키는 경건입니다.
경건은 우리에게
유혹을 이길 힘과
세상을 이길 힘을 줍니다.
진정한 자유와 참된 평안을 줍니다.
이것이 경건입니다.
경건을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세상을 추구하고
돈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경건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고
유혹을 이기는것이 무엇인지
오늘 본문이 잘 말하고 있습니다.
19,20절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경건은 어렵지 않습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를 더디하기만 해도
경건해 집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듣기를 싫어합니다.
말하기를 좋아하고
조급합니다.
쉽게 화를 내고 분노합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모습이고
경건함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경건이 없으면
사람들은 말을 함부로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잘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십시오.
상담은
잘 들어주는 기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내적치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의 형편과 처지를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것이
어떠한 해결책보다도
나을 때가 많습니다.
현대인들은 잘 살지만
외롭고 고독합니다.
자기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가져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말을 잘 들어주지 않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말이 많아집니다.
그리고 소리가 커집니다.
결국은 화를 내고 맙니다.
그러면 더 듣지 않게 됩니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경건을 이야기 할 때
침묵은 기본입니다.
침묵하는 이유는
듣기 위해서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도
귀를 기울여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
침묵하십시오.
참된 말, 창조적인 말, 생명이 있는 말은
침묵에서 나옵니다.
깊이 묵상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나오는 말이
사람을 살리고, 용기를 주며,
영향력을 줍니다.
말이라고 다 말이 아닙니다.
들을말이 아닌 것은
다 소음입니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면
반드시 화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화를 내면 20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물론 의로운 분노는 있습니다.
불의한 것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런 정당한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 앞에서
신경질을 내고 소리를 지르고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계속하게 되면
결국 살인으로까지 발전하고 맙니다.
홧김에 저지르는 실수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때 한번 참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얼마나 후회를 많이 합니까?
인내는
자기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분노와 상처가 치유되어야
내 분노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말을 충분히 듣지 않기 때문에
화를 냅니다.
충분히 듣지 않고
조급하게 말하고
자기 의견과
자기 주장을 듣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화를 냅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사람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광야에서 40년 동안 훈련시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며
그는 정말 놀라운 인내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화를 내실 때
모세는 자기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실지라도
이들을 살려달라고 기도도 했습니다.
그랬던 그도
한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했습니다.
므리바에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
라고 혈기를 부렸습니다.
결국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지 못했다고 말씀합니다.
분노하지 마십시오.
심판하는 일은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내가 분노하는 것은
내가 심판자의 자리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을 더디하고
분노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21절을 보면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우리가 말을 더디 하고
듣기는 속히 하며, 성내지 않기 위해
꼭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든 악을 내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먼저 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는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밭에 비유하셨습니다.
밭을 먼저 갈아 엎어야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좋은 씨앗을
길가나 돌밭에 뿌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좋은열매를 얻기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가시를 제거하고
돌을 제거하고
흙을 부드럽게 합니다.
그 다음에 씨를 뿌립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도 잘 듣습니다.
사람 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도 잘 듣지 않습니다.
그의 고집과 강퍅함 때문입니다.
평소에 사람 말에 귀를 기울이고
듣는 훈련이 되어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냥 듣는다고 해서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영어가 그냥 들리십니까?
듣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소리가 있어도
들을 수 없습니다.
관심이 없거나 다른 생각을 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 말을 듣는 훈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훈련이기도 합니다.
잘 듣기 위해
우리 안에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다 뽑아내야 합니다.
모든 더러운 것과 음란함이
다 제 안에 있습니다.
만물보다 심하게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다윗은
자기 안에 있는 죄악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내 안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여 주옵소서’
라고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듣기 위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교만과 불순종과
더러운 죄를 낱낱이 고백하고
주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십시오.
억지로 교회에 와서는
은혜를 받기 힘듭니다.
기분이 나쁘거나, 화가 나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겠습니까?
겸손한 마음으로 들어야
하나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도
변화되지 않는 것은
말씀을 들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심긴 것이 아닙니다.
모든 죄악을 뽑아 버리고
온유함으로 말씀을 받을 때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자기 생각과 맞지 않는다고
무시하는 사람은
참으로 무지합니다.
수 천년에 걸쳐
수 많은 사람을 변화시킨 말씀이라면
적어도 한번 정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22~24절입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듣지 않은 것입니다.
듣고 행하지 않는 것은 불순종입니다.
듣고 행하지 않는 것은 불신입니다.
귀담아 들으면 변화 됩니다.
행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기꾼의 말도 귀담아 들으면
결국 속고 마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치 않습니까?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들음과 행함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듣기는 잘 했는데
행동이 안된다는 것은 핑계입니다.
행동이 없는 것이 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행하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말씀은 길입니다.
길은 가야 합니다.
길은 보기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행해야 합니다.
가야 합니다.
거울 비유를 아십니까?
거울을 보는 것은
자기를 단정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거울을 보고서도 자기의 허물을 고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울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얼굴을 기억하십니까?
다른사람의 얼굴은 잘 알아도
자기 얼굴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진을 찍으면서
가장 생소하게 느끼는 사람이
본인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늘 거울 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을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외모를 보듯이
내 속사람을 늘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말씀에 비추어 보십시오.
말씀이 영혼의 거울입니다.
말씀 앞에 서야
비로서 자기 영혼의 모습이 보입니다.
말씀 앞에 서야 온전케 됩니다.
반대로 말씀 앞에 서지 않으면
영혼은 더러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온갖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 있을 때
제거 할수있습니다.
성경을 읽고,들 을 때
그 말씀은 여러분 개인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비추어 주는 말씀을 통해
날마다 자기 영혼을 가꾸어 가야 합니다.
아름다운 정원을 꾸미기 위해서는
가꾸고 또 가꾸어야 합니다.
정원보다 더 예민한 것이
우리 영혼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날마다 돌보지 않으면
금방 오염되고 맙니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25절을 읽겠습니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꼭 지켜야 하기 때문에
율법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얽매지 않습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고 온전케 합니다.
우리의 속사람을 영혼을
더러운 것과 악으로부터 정결케 하고
자유와 평안과 기쁨을 주는 힘은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기쁨과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자유케 하고 온전케 합니다.
그 말씀을 듣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26,2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26절은 다시 한번
혀를 절제하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말이 많은 사람은
경건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경건한 사람의 말에는
힘이 있고 깊이가 있습니다.
교회가 시험에 드는 것도
말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언제나 축복의 말, 찬양의 말,
감사의 말, 믿음의 말 이기를 바랍니다.
경건에도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자비와 사랑과 긍휼이 먼저입니다.
자기를 지킨다고 노력하다 보면
정작 사랑을 실천하고
긍휼을 베풀고 자비를 베풀 때
인색해지기 십상입니다.
이 내용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자기를 지키려다가
강도만난 자를 멀리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런 형식적인 경건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우리의 이웃들이 신음하는지 모릅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은
모두 조금씩은 더럽고 불결하고 추합니다.
그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들의 어려움에 동참해야 합니다.
27절에서
고아와 과부를
돌아 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가장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도움을 주었을 때
보답할 수 있는 사람을
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가 도움을 주었을 때
갚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
진정한 경건은
구름 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한 삶은 이웃에 있습니다.
경건한 삶은
가난한 이웃에게 있습니다.
이웃과 사랑과 자비를 나누고 함께 할 때
세상을 이기고, 유혹을 이기고
주께 영광을 돌릴줄 믿습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세상을 이기는 참된 경건의 능력이
우리 안에 있게 하옵소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우리 마음에 잘 담아서
순종하게 하옵소서.
어려운 이웃들을 돕고 섬기며
자기를 깨끗하고 거룩하게
지켜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