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으로 달라지는 삶
약 1장 19-27절
오늘 우리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신앙에 따른
삶이 없는 경우입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지만
삶 가운데 열매가 없는 경우입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주여 주여 하고,
선지자 노릇을 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해도
열매가 없으면
절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오늘 읽은 이 야고보서가
이런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단순히 우리가 배불리 먹고
우리 욕심을 채우고
내가 받고 싶은 것만 받기 위함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인의 삶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은
우리의 주되신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신앙의 성공과 실패의 척도는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
(즉 소유)가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에서
찾아야합니다.
즉 그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예수님의 삶을 살았느냐가
신앙생활의
성공과 실패의 기준입니다.
또 목표입니다.
저는 구약성경을 계속해서 묵상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에게 예수님의
형상이 나타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독자 이삭을 바침으로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또 이삭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형상이
나타나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통해서도
섬기는 예수님의 형상이
나타나기를 바라셨습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시는 것도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이웃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형상이
나타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는
우리를 구원받기로 예정하신 목적은
예수님의 형상이
나타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예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물론 우리가 완벽하게
예수님처럼 살아가기는 어렵습니다.
또 예수님처럼 살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의 삶을
우리의 삶의 목표로
삶고 있느냐 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기준을 너무 낮추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뒤처지지 않는 사람,
그들보다 조금 나은 사람,
또는 그들과 비슷한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표가 되어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의 목표는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날마다 실패하지만
예수님처럼 살려고
노력 해야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본문에 나타난
야고보 사도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합니다.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듣기는 속히 하라는 말씀은
단순히 우리가 대화를 할 때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말씀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잘 들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듣기는 속히 하라는 말씀은
다른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우선시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서
먼저 제일 우선시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물론 우리가
교회 봉사도 해야 하고,
헌신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헌신과 봉사 이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들음이 없이
봉사만 하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그 봉사가
식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제일 중요한 헌신은
말씀에 대한 헌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가려는 것에 대한
헌신이 없으면
그 어떤
그리스도인의 삶의 헌신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 가는데 있어서
힘든 과정을 거치지 않는 사람은
그 어떤 그리스도인의 힘든 삶도
살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말씀을 잘 들을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에 보면
듣기는 속히(우선으로)하고,
성내기는 더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을 내기를 더디하라는 말씀도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성을 내지 말라는 말씀도 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성을 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분을 낼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일이
과연 있을 수 있겠습니까?
있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분노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말이
너희 마음 가운데 들어갈 곳이 없는 고로
너희가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본성과 거슬릴 때가 많습니다.
내 본성으로는
나를 힘들게 한 사람에게
복수를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내 본성은
나의 의를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네가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과 거슬릴 때가 많습니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현실가운데
온유한 자가 된다는 것은
실패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느껴집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생각과
맞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현실과 맞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보이지 않지만
은근히 분을 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20절에 보면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분을 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뜻)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또 21절에 보면
이런 생각을
더러운 생각이라고 하고,
넘치는 악이라고 합니다.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우리 안에는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밭에 비유하셨습니다.
밭을 먼저 기경해야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좋은 씨앗을
길가나 돌밭에 뿌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좋은 열매를 얻기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가시를 제거하고,
돌을 제거하고,
흙을 부드럽게 합니다.
그 다음에 씨를 뿌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이런 악한 생각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온유함이란
성냄으로 말씀을 받는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각과 맞지 않더라도
온유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신앙이
예수님의 삶을 따르기 위해서
먼저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들었던 말씀을
하나라도 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야고보서에서
제일 중요하게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또 지금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말씀입니다.
말씀을 온유하게
잘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더러운 것, 넘치는 악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잘 받지 않는 것보다
더 큰 악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듣기만 하고
하나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2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면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됩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예를 들어
우리가 기도에 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기도에 관한 말씀을 들으면
마치 나는 지금 기도를 하고 있다고
착각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에 관한 말씀을 들으면
나는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헌신에 관한 말씀을 들으면
나는 헌신하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전도에 관한 말씀을 들으면
나는 전도를 하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이와 같이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됩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착각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또 23절과 2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또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거울을 보고
자신의 얼굴을 잊어버리는 자와 같습니다.
그당시의 거울은 청동거울입니다.
그래서 거울이 희미합니다.
그래서 희미한 청동거울로
얼굴을 보고 나면
금방 자신의 얼굴 생긴 것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그 말씀을 듣고
금방 잊어버리게 됩니다.
또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행하지 아니하면
그 말씀을 완전히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이해할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은
그 말씀대로 행할 때
비로소 이해가 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게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 말씀을
관찰하고 해석하고 분석해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진짜로 그 말씀대로 염려하지 말고
염려를 기도가 되게 할 때
평강의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2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여기서 보면
왜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말합니까?
왜 율법이
자유하게 하는 율법이라고 말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아가면
그 율법은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율법이
우리에게 속박이라고 느껴지는 이유는
그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하고 행하면
그 말씀은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여러분
율법이 자유가 없다고 느껴지십니까?
그 이유는
그 말씀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율법은
절대 우리를 속박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오히려 자유하게 합니다.
율법의 핵심은
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만 사랑하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입니다.
정말 그 말씀대로
실천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그때 자유가 있습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25절 말씀보면
어떤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까?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적인 대화를 할 때
종종하는 말이 있습니다.
“복 받을 짓을 하라” 는 말입니다.
복 받을 일을 하지 않고
복을 받기 원한다면
그것은 종교 생활입니다.
마지막 결론적으로
26절과 2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경건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종교적 경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말씀보고
자신을 죄에서 멀리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종교적 경건만 있다면
그 경건은 참된 경건이 아닙니다.
이런 종교적 경건의 바탕 위에
입술의 경건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삶으로의 경건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고아와 과부로 대표되는
약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아보는 삶으로서의 경건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말씀만 보는 경건이 아니라
구체적 삶으로 행동으로 나타는
경건의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세상을 이기는 참된 경건의 능력이
우리 안에 있게 하옵소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우리 마음에 잘 담아서
순종하게 하옵소서.
어려운 이웃들을 돕고 섬기며
자기를 깨끗하고 거룩하게
지켜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