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손가락
오명옥
가로수길의 단풍나무에 새로 돋아나는 빨간 단풍잎이 아가의 보드라운 손 같다. 빛깔 고운 단풍잎을 보며 쭈글쭈글 주름진 내 손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인생의 굽이진 세월이 흘러 곱던 손이 울퉁불퉁 모양도 바뀌었다. 뽀얗고 포동포동하며 보드레하고 고왔던 손에서 어느결에 주인도 알지 못하는 딱딱하게 굳은살이 생겨있고 손등에는 주름살이 세계지도를 그렸다. 세월의 흐름이 고스란히 손에만 내려앉은 것 같다.
오월이 되니 부모님 생각에 고향을 찾았다. 옛날 옹기종기 올망졸망했던 동네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자꾸 도시의 모습이 보여 생경하다. 야트막한 산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새집 자리가 생겨나 도시에나 어울릴 예쁜 양옥집들이 많아졌다. 어쩐지 이색의 풍경 같고 순박하기만 한 내 고향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다.
어릴 적 우리 동네에서 제일 높은 산으로 올라갔다. 음력 정월 보름날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농악대를 앞세우고 산으로 올라 달맞이하던 신성시했던 산이다. 몇십 년 만에 산 위에 올라서니 초록의 물결이 내 발아래서 넘실넘실 춤추고 있다. 내가 서 있는 산봉우리에서 출발한 작은 산줄기들이 크고 작은 손가락처럼 뻗어 내려가 저수지에 담그고 있는 듯 보였다.
큰 골짜기 아래로 내가 살던 동네가 있다. 산줄기 중 검지손가락처럼 보이는 마을 뒷산에 눈길이 머물렀다. 우리들의 놀이터였던 할아버지 산소 앞 상석 위에 올라가 춤추고 노래하는 내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어느 날 잔디밭의 언덕을 뒹굴며 놀다가 친구의 발에 내 손이 밟혔다. 예쁜 손등에는 알 수 없는 검정 고무신의 밑창 무늬가 그려졌고 피가 주르륵 흘렀다. 손을 들어 보니 손등엔 피가 조금 묻어 있었고 약지손가락의 손톱이 빠져있었다. 생으로 손톱이 빠졌는데도 피도 많이 나지 않았고 심하게 아프지도 않았다. 손등의 붉은 피를 갈잎으로 쓱쓱 닦아내고 또 놀이 삼매경에 빠졌다. 치료를 받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고 그냥 시간이 흘러 새 손톱이 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손톱이 쉽게 나오지는 않았다. 결국 빠진 손톱 자리가 곪아서 통증이 심했다. 욱신욱신 쑤시며 옷깃만 스쳐도 심하게 아파 잠을 자다가 깨서 울기도 했다.
아버지는 노랗게 고름이 들어 돼지 발톱처럼 뚱뚱해진 손가락의 고름을 인정사정없이 짜내셨고 어머니는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기도 했다. 예쁜 새 손톱이 나오기를 고대하고 기대하면서 아파도 꾹 참고 지냈다.
하얀 반달처럼 손톱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조심했지만 무엇엔가 걸려 올라오던 손톱이 또 빠지고 말았다. 다시는 예쁜 손톱이 나오지 않을까 봐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그 후에도 서너 번은 더 손톱이 빠졌다가 나기를 반복하더니 다섯 번째 올라오던 손톱이 빠진 후에는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이대로 그냥 손톱이 없이 흉물스러운 손가락이 되겠다고 생각하니 무척 슬펐다.
손톱이 빠진 지 1년도 더 지난 초등학교 3학년 어느 겨울 손톱도 없는 손가락이 며칠 동안 간지럽고 가렵더니 절대로 손톱이 아닌 녀석이 누에머리처럼 삐죽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뒤틀리고 뭉그러진 손톱은 보기조차 흉했다. 누구 앞에서도 선뜻 손을 내놓지 못했다. 그제야 선 머슴아이같이 놀았던 어린 시절이 후회되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항상 왼손을 숨기기에 바빴다. 눈에 띄게 큰 장애는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들과 달라 늘 손이 창피했다.
살면서 못생긴 손톱 한 개가 큰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기타를 연주할 때도 피아노나 풍금을 칠 때도 리코더와 단소를 불 때도 손톱 때문에 쉽게 하지 못했다. 정말 꼭 해야 할 때를 제외하고는 악기를 사서 두고도 배우려고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한 것이다. 악기를 연주할 때는 눈에 금방 보이는 손가락이 매우 중요했다. 왼손이 아니라 오른손이었으면 조금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우연히 어느 잡지에서 읽은 구절이 떠오른다. 옛날 ‘규중칠우 쟁론기’처럼 손가락들이 서로 잘났다고 싸움이 벌어졌다. 엄지는 엄지를 척 치켜들며 자기가 최고라고 했고 검지는 총을 쏠 때 꼭 자기가 있어야 한다고 거드름을 피웠다. 장지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키가 제일 크다고 싱겁게 말했다. 이어 약지는 탕약을 달여 온도를 확인할 때 쓰고 일생의 큰 약속을 할 때 반지를 끼는 손가락이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귀엽기만 했던 새끼손가락이 자신은 기도할 때 하나님이나 부처님을 제일 앞에서 마주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중요한 약지손가락이 작은 장애를 가지게 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내 약지손가락을 보면 뭐 그까짓 것 가지고 그러나 할 테지만 나에겐 아주 큰 상처가 되어 어디에서도 마음 놓고 손을 내어놓지 못하고 늘 숨겼다.
40여 년 전 약혼식 날 가장 중요한 예물교환의 시간이었다. 반지를 들고 있는 남편 앞에 선뜻 손가락을 내밀지 못했다. 변형되어 못생긴 손톱 때문에 오른손을 내밀까하고 순간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울퉁불퉁 못생긴 손톱을 잡고 떨리는 손으로 반지를 끼워준 남편이 그 손톱이 제일 구엽고 예쁘다고 했다. 그랬어도 부끄러운 마음에 늘 그 손톱을 숨겼다. 그렇게 숨겼는데도 지인들의 눈에 띄는 때가 가끔 있었다. 처음 손톱을 보는 지인들은 깜짝 놀라며 왜 그러냐고 묻는다. 그때마다 내가 더 화들짝 놀라 손을 숨기느라 바빴고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초등학교 시절 언니는 내 손을 꼭 잡고 쓰다듬으며 예쁜 손톱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그때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의문을 가졌다. 그런데 지금은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미용을 위한 예쁜 인공손톱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 손톱으로 보기 흉한 내 손톱을 가려 감쪽같이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아직 보기 흉한 약지손가락을 다른 사람 앞에 내어놓을 용기가 나지 않아 한 번도 가 보지 못했다. 나도 언젠가는 문명의 도움을 받아 약지손가락의 흉한 모습을 가리고 어릴 적 예뻤던 손가락으로 돌아가 볼 것이다. 다시 한번 누에머리 같은 약지 손톱을 어루만져 보았다.
수필가 오명옥
Profile
2021년 푸른솔문학 신인상 등단. 푸른솔문인협회 회원
제9회 푸른솔문학 카페문학상 수상.
제9회 우리 강산 푸르게 우리 숲 이야기 공모전 대상 수상. 2023년 정은문학상 수상
저서 수필집 「아버지의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