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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고향 심상과 우환의식
정홍순(시인)
서정적인 시들과 혁신적 기교로 많은 소비에트 시인들에게 영향을 준 마야코프스키는 “자신을 표현할 수 없는 수단이 오로지 시뿐일 때 펜을 잡아야 한다”고 하였다. 마야코프스키의 말처럼 김종옥 시인이 유일한 수단으로 삼은 시는 질박하다. 세련되고 화려한 언술들이 아니라 토속적이고 향토적인 질감 넘치는 언어를 통해서 삶의 세계를 관조하고, 구도적 실체를 함께 실현해 나가고자 하는 추동적인 힘이 배어 있다.
또한 단순한 비관적 정서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정보나 제공하는 정감어린 시에 빠지지 않으며, 구호적인 담론을 붙들고 응원을 바라는 시에 서있지 않다는 것이 김종옥의 시를 읽은 솔직한 고백이다. 그의 시가 축을 이루고 있는 고향 심상(image)과 우환의식(憂患意識)이 「시인의 말」에서 밝히고 있는 물 끝처럼 어디까지 밀고 가는지 따라가 보고자 한다.
김종옥의 고향은 해룡면 상비마을 ‘바구배기’다. 바구배기는 큰 바위가 일직선으로 삼태성(三太星)처럼 박혀 있는 데서 유래하였고,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라 믿고 있는 곳이다. 이러한 공간적 배경을 이루고 있는 고향에 대하여 시인은 “난 고향 바구배기를 떠났다”는 상실감으로부터 고향을 적고 있다.
난 고향 바구배기를 떠났다
바구배기 모퉁이 밭 70여 평 남은 밭대기
울 엄니 살아생전에
함께 일궜던 밭이다
매실나무 걷어 내고 감나무 석류나무 앵두나무
몇 그루 심고 빈 땅에 콩을 심었다
호랑이 콩을 심었다
—「바구배기 모퉁이 밭」 부분
늙으신 어머니와 70여 평 일군 밭에 “감나무 석류나무 앵두나무”와 “호랑이 콩”을 심어두고 왜 그는 고향을 떠났다고 말하는가. 고향이 그를 버린 것이 아니라 “그 언제인가 사람 하나 걸어오겠지”(「바구배기 모퉁이 밭」)라는 희망을 심어두고 떠난 고향은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여성들의 4대 가족사가 가슴 아픈 역사를 품고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백계동의 할머니(외할머니), 백계동의 할머니로부터 모질게 외면당하고 바구배기로 재가한 어머니, 시인의 아내, 서울과 양평으로 떠난 두 딸에게 이어지는 가족사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표제시(標題詩)「울 엄니 시집가는 날」은 유교의 우환의식(도덕적 책임)이 짙게 깔린 아들 선호사상이나, 남성의 부재 혹은 폭력으로 나타난 현실 속에서 어머니의 한 많은 일생이 그려지고 있다.
아하 그때 어린 자식 명섭이 한 아들 남겨두고 일찍 떠난 서방님 뒤로하고 아들 들쳐 업고 홀 엄니 모시며 평생 살려고 백계동으로 들어갔다 호되게 쫓겨나서 새시로 성가롤로 앞 동네 바구배기(상비)마을로 시집와 삼 형제 낳고 배다른 세 형제를 홀로 키우며 남의 택호로 살았다 느그 아부지는 술과 노름으로 가산 다 탕진하고 도저히 살 수 없어 일본 큰 아부지에게 살려 달라 애원해 2년 동안 철공소로 보내 놓았더니 얼마나 욕을 먹었던지 몸서리가 난다 매봉 동네 길목 모퉁이 밭을 나 혼자 쟁기질하며 밭고랑을 일궜다 여순 반란군이 민간인 집단 학살한 반송쟁이(주령골) 아래 논 닷 마지기 추수해서 나락을 죄다 짊어 나르며 살았다
—「울 엄니 시집가는 날」부분
어머니는 첫 결혼에서 사별의 아픔을 겪는다. 아들과 함께 친정, 백계동으로 돌아왔지만 친정어머니는 당신의 한을 대물림할 수 없다는 단호한 처사로 바구배기로 재가시키는데 아들 “명섭”을 두고 떠나야 했던 상처는 정체성도 없이 남의 “택호”를 쓰며 살아야 한 어머니의 비운의 세월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술과 노름으로 가산 다 탕진”한 “몸서리나는” 가장이었다. 어머니 홀로 감당해야 했던 노동과 “자식새끼들 살리겠다”(「울 엄니 시집가는 날」)고 살아온 바구배기를 시인은 어머니 돌보는 일로 가끔 찾아가지만 폭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당사자이며, 폭력(폭언)의 주체자로서 갈등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지를 모색하고 있기 때문에 고향을 떠났다고 바구배기를 술회하고 있다.
아내가 처음으로 우는 날 나는 온 몸 무너졌다 아내가 온 몸 흐느끼며 속울음 터져 나와 엉 엉 울어버린 날 난 어깨와 다리 온 몸이 껍데기만 남은 허물마냥 흐물흐물 무너졌다 비바람 모질게 불어와도 어미 닭은 새끼를 품고 나오지 않더니 새끼가 태어나면 어느 누구도 두렵지 않고 적들과 생사 결투 치열하게 싸우며 새끼들 지키는 암탉
비바람 천둥 번개 우르르 꽝꽝 쳐대는 날 땅도 들썩 들썩 찌르르 진동하고 바다도 요동칠 때 땅위의 조그만 새들 바다의 고기들은 자식들을 철저히 보호하려 안으로 안으로 숨어든다 날벼락 같은 눈물바다 속에도 온 눈물 다 삼켜내며 바다를 지키는 작은 고래새끼 지키러 온 어미고래
비바람 천둥 번개 다 멈추고 언제 그랬냐는 듯 화창한 아침에 활짝 웃는 아내의 얼굴을 보니 그래도 다시 세운다 새 아침 새 바람 불어 새롭게 새 맘 새 몸 곧추 세워야한다 무너졌던 몸 다시 치열하게 일으킨다
밤새도록 자식을 지키려 온 몸 피투성이 되도록 싸우다 지친 아내의 얼굴
볼 낯짝 세우려 나도 다시 일어선다 눈물바람 제대로 세례 받는 아침
—「아내 울음소리」전문
시인의 아내는 “새끼를 지키는 암탉”이고 “고래새끼 지키러 온 어미고래”다. 시인의 어머니처럼 새끼를 키우고 지키는 모성이 가득한 어미지만 시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왜 울고 있는가. 그리고 그 울음 앞에서 “온 몸이 껍데기만 남은 허물마냥 흐물흐물 무너진” 시인의 상태는 무엇인가. 폭력적인 언사와 태도에서 발아된 아내의 분노가 “밤새도록” 울음으로 표출되었다. 시인은 아내에게 면목이 없어졌다. “눈물바람”이야 말로 영혼을 씻고, 폭력에서부터 새롭게 태어나는 아침을 맞게 된 것이다. 흔히 세례(baptism)를 ‘죄를 씻는다’고 말하지만 ‘물들다’라는 의미도 있다. 시인은 아내의 눈물에 물들었다. 눈물 또한 인성의 물 끝이 되어 시인의 가슴과 가정을 다시 일으키는 카타르시스(catharsis)가 되고 있는 것이다. 3대에 걸친 고향에 대한 서사와는 다르게 “환상의 고향”을 통해 소멸되고 있는 안타까움은「고향 이민자」에서 4대로 이어지는 다른 이미지가 그려지고 있다.
그냥 풍세 따라 농사짓고
씨앗을 뿌릴 때 거둘 때를 잘 맞춰
순리 따라 살아왔다
시골살림 이젠 되는대로 호박밭에 호박잎 따먹고
거저 고구마 순 따서 무쳐 먹고 되는대로 살아왔다
그런데 이젠 아니다
장마 틈에 풀들이 난리 나듯
손주 손녀라도
반갑지 않은 손님 같아지니 세상사 인심 요상하다
환상의 고향
시골로 유학 온다는 말 같지도 않은 말
50여년 살아봐도 소멸위기를 이길 재간 없다
농어촌은 바보처럼 살아야 잘 사는 것이다
—「고향 이민자」부분
시인은 소멸하는 고향 위기의식 가운데 “바보처럼 살아야 잘 사는 것이다”는 능청스런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만 도덕적 책임(우환)의식 속에서 치유될 수 있는 천명(天命)을 따르지 못하고 사는 현실이 매우 안타까운 것이다. “손주 손녀라도/반갑지 않은 손님 같아지니 세상사 인심 요상하다”고 주저 없이 드러내 놓고 있다.
이제 김종옥은 시안(詩眼)을 확장하여 구도의 길을 떠나고 있다. 성지순례를 통한 출애굽여정을 따라 아내와 함께 세계여행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 길은 약속의 길이다. 어머니의 “광양 백운산 백계동 거닐게 할머니 곁에 묻어두라”(「울 엄니 시집가는 날」)는 유언과 모세가 죽음을 맞이한 느보산에 오르는 것은 하늘나라를 향한 동일한 여정이 중첩되어 나타나고 있다.
드디어 느보산에 도착했다
둥근 수레바퀴 같은 문이 턱 버티고 서 있다
문을 열면 하늘 길 열려
하늘로 들어간다는
많은 영웅들이 문기둥에 새겨져 있다
모세는 그 중 한 인물일 뿐
모두가 이뤄낸 거대한 민중들의 뿌리 이동
느보산에 서니 헬몬산도 단도 보인다
흘러가는 물
보내지 않는 것이 없고
맞아들이지 않는 것도 없다
무너뜨림 없이
흘러 흘러간다
모든 건 변화를 겪게 될 터
죽어서 환히 열린 하늘 길
두 마리 뱀이 서로 물고 도는 문양
모스크 사원의 상징도 뱀
모세의 지팡이 상징도 뱀
모세는 느보산에서 생을 마감했다
자신 속에 변화의 씨가 있다
새롭게 여호수가아 그 뒤를 이어가고
장대 뱀 너머
팔 벌려 죽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도 양팔을 벌리고 편안히 누었다
—「편안한 죽음」전문
느보산에 올라 분명히 시인이 모세의 죽음을 통해 말하게 된 것은 “죽어서 환히 열린 하늘 길”이다. 어머니가 “열린 하늘 길”로 가시는 날 백운산 백계동에 모셔드리마 한 약속과 모세의 죽음 속에서는 단순한 죽음으로 끝나는 산자와 죽은 자의 종말을 의미하지 않는다. 산자와 죽은 자를 위한 축제의식 속에서 “변화의 씨”가 탄생하는 결합, 즉 어머니의 죽음은 “시집가는 날”의 결혼이며, 모세의 죽음은 “새롭게 여호수아가 그 뒤를 이어가”는 “편안함”이 내재되어 있는 “변화를 겪게 될 터”인 것으로 연결되고 있다.
이처럼 이 순례의 길은 과거를 기억해보는 성스런 여정으로만 만족하고 있지 않다. “불멸을 꿈꾸는 인간”(「신이 되고 싶은 인간 」)과 “사람이 주인인 길에서” 오히려 “길 잃어버린 나”(「사람 없는 길」)를 발견하고 당황하고 있는 시인은 “나는 어디로 가나”(「낙타길」) 자문하게 되었고, 두렵거나 혐오적인 삶의 군상들로 생각하고 있던 베두인들을 만나 오히려 정상성이 비정상성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또 하나의 삶의 방식을 광야에서 얻게 된다.
춤추듯 신명난 모습으로 한 바퀴 빙 돌면서 인사한다
특유한 유목인의 멋
아이들이랑 아내 여섯 식구 유유히 양 떼를 몰고 광야길을 걸어간다
—「자존심 팔지 않는 사람들」부분
베두인들과의 만남은 잠간 사진 찍는 시간뿐 이었지만 “특유한 유목인의 멋”을 발견하게 되었다. 작별인사인 “춤추듯 신명난 모습으로 한 바퀴 빙 돌”던 그들에게서 자존심을 단 몇 푼의 돈으로 거래하고 살지 않는 의연한 광야의 사람들과 의식이 내 가족에게로 투사되고 있다면 억지스럽다고 말 하겠는가. 시인은 “유유히 양 떼를 몰고 광야길을 걸어가”는 저들과 헤르몬산에서 흘러 갈릴리를 적시는 물줄기(물 끝)에서 민초들의 삶을 읽는다.
헤르몬산에서 흘러 갈릴리를 적시는
물
만국사람 먹여 살리는 사람들
물과 바람 그리고 어부들
민초들의 삶
우리 한국이나 무엇이 다를까 싶다
—「예루살렘 새벽 4시」부분
김종옥은 민초들의 삶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함께 실천하며 살고자 하는 시인이다. 작은 마을 어촌과 농촌에서 그가 할 수 있는 행동하는 양심으로 헌신하고 있는 예수의 제자이기도 하다. 갈릴리 사람들, “물과 바람 그리고 어부들”을 보면서 “우리 한국이나 무엇이 다를까 싶다”는 고진한 삶을 “민초들의 삶”이라 단순히 치부해버리지 않는다.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깨어나 삶의 현장을 직접 보게 되었고 인력시장을 전전하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그는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이다.
그래서 김종옥은 북을 메고 장단을 치며 소리를 놓아 대동하는 일에 일가(一家)를 이루어 가고 있다. 꽃의 연작시(꽃-민족혼)를 통해 그의 가락이 한층 더 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북 하나 둘러매고 당산나무 아래 정자에 앉아
판소리 한 장단 풀어볼까나
저절로 나오는 인생풀이 한풀이 흥얼 흥얼
서럽다 못해 절규 한없이 가냘프게 떨려와
하늘의 별들도 깜빡 깜빡 놀래 파르르 떤다
—「별밤지기」부분
시인이 풀어보는 판소리는 “하늘의 별들도 깜빡 깜빡 놀래 파르르 떠”는 “한풀이”고 “절규”이며 “인생풀이”다. 이러한 장단에 피는 꽃들은 「농투산이」들의 밭과 들에 흔히 있는 지천의 것들이다. 들꽃을 따로 말하지 않더라도 민초에 다름 아닌 「박꽃」「앉은뱅이꽃」「호박꽃」「분꽃」「찔레꽃」「자운영」「탱자꽃」「보리꽃」등 시인이 농사하며 가꾸는 터전에서 피는 꽃들이다. 토종인 것들도 있고 귀화식물로 자리 잡은 것들도 있지만 그가 꿈꾸는 꽃에서 민족혼을 읽는 것은 값지고 즐거운 일이다. 그 가운데 「분꽃」이 눈에 들어온다.
안개 걷으며 부스스 깨어난 아침
새벽 기도 마치고 돌아오는데
교회당 조그만 텃밭 바윗돌 틈바귀에
올라온 분꽃들
고사리 손 합장 아침노을 붉어진다
장마 지나고
삼복 무더위 기승부린다
아침 일찍 풀 베고 오는 엄니 아부지
열 식혀주려 씽긋 씽긋 미소 짓는다
오므렸다 폈다
기도하는 고사리 손 마디
신랑 맞이하는 신부의 어여쁜 얼굴
꽃분 향기 가득하다
늙으신 울 엄니 얼굴
오색 빛 무지개 손주 손녀 피어나고
참새 한 마리
까만 희망 물고 온 봄
바위틈에 똑 떨어져 여름 익혀둔다
—「분꽃」전문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꽃잎을 오므리는 분꽃은 혼자 피고 있지 않다. 아침을 붉게 물들이며 기도하는 “고사리 손”이며 “풀 베고 오는 엄니 아부지/열 식혀주려”는 “씽끗 씽끗”한 “미소”이고, “늙으신 울 엄니 얼굴”속에서 피어나는 “오색 무지개 손주 손녀”이다. 이 분꽃 까만 씨 하나를 물고 온 “참새 한 마리”는 희망이라는 “봄”을 물고 와 “여름 익혀둔” 혼불과도 같은 꽃이다. 작은 씨앗 하나에서 자라 사람의 혼을 담는 꽃을 두고 시인은 “신부의 어여쁜 얼굴”에서 “꽃분 향기”도 맡아내고 있다.
이제 시인은 꽃의 향연에서 삼가 “꽃비”를 받는다. 시인만이 받을 수 있는 계시가 아닐까. 하나님은 시인을 통해 계시하신다는 말처럼 말이다.
온 천지에 꽃비 내린다
소화 테레사 기도할 때
하늘에서 꽃비 내려 모든 사람들 살려주듯
나도 오늘 간절히 기도한다
꽃비만 내려
이 세상 더 이상 아픔이 없길
—「꽃비」전문
시인에게 꽃비는 낭만의 한 자락이거나 향수에 젖게 하는 노스탤지어가 아니라 “이 세상 더 이상 아픔이 없길” 바라는 치유의 염원이며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한결 같은 마음, 평화의 계시를 담지하고 있다. 시편에서 자주 보이는 “별”과 “파란색”은 시인이 바라는 따뜻한 세상과 희망을 내재하고 있는바 하늘에 있는, 하늘로부터의 계시적 상관물로 이 땅을 통해 이루어질 이상적인 세계를 많은 시편을 통해 매개적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가 직면한 현실은 과학시대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과학만능주의에 빠질 수 없는 것은 이상 기후에 지구가 편치 않다는 사실과 아직도 어느 하나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슬픈 역사를 시인은 마주하고 있다. 이 공간 속에서 누구보다도 아파하고 몸부림치는 이웃과 가족을 만나게 된다.
보성 삼베랑 이찬식 장인께서 시퍼렇게 멍든 가슴 속 응어리 넋두리 풀어내신다 온 정신이 하늘로 날아 가버린 듯 멍해진당께 갈수록 무거워진 몸 삼베옷마냥 튼실한 실오라기 종이옷처럼 얇어도 고래 심줄보다 찔긴 게 인생인지 모르것당께 나비마냥 가벼워야 쓴디 속 씨언허면 좋을건디 따숩고 폭신폭신 살면 좋것는디 영 맴이 쓰려 못 살 것으라 아부지 5살 때 여의고 얼굴도 모른디 의사 선상님은 한 장 남은 아부지 사진 계속 보고 생각허면 빙이 심해 여순을 생각지 말라 흔디 우짤까 모르것으라
보고도 못 본대끼 해야쓰고 알아도 모른대끼 허야 쓴당께라 먼 놈의 시상 와 그런가 모르것으라 연좌제 고것 땜시롱 요렇코롬 보성서 삼베 대마쟁이로 살아간 것이 일평생이 되어 뿌럿으라 베틀 위에 북 간 거 맹키로 달이 가고 해가 가는디 맴이 항상 씨려 오는 건 무신 빙인지 모르것으라 한 시상 모질게 살았제라 뭣 땜시 서로 직이고 그런지 몰랐지라 빨갱이 죄악이라 험시롱 죄다 잡아 죽였는디 쥑인 놈은 없고 죽은 사람만 있당게 말이 돼요
하늘도 차마 눈 뜨고 못 보고 피 밭은 땅도 물라라 흔지 70여 년 지난 시상이 돼부럿네요 좌익 빨갱이 물들었다 무답시 허벌나게 조심허고 쥐 죽은 듯 살았지라 눈감고 귀 막고 살아온 시상이었지라 골로 간다 바른말 허면 옆구리 총 들어온다는 말 많이 들었어라 아무리 작은 목숨도 하찮게 여겨선 안 되는데 죄 없는 목숨들 무답시 다 쥑여서야 쓰것소 죽어서라도 울 아부지 한 번만 봤으면 여한이 없겠서라
—「한국의 매카시즘」전문
여순사건이 발발한 지 벌써 76년 이란 세월이 흘렀다. 아직도 특별법이 시행되지 못하고 있는 비극적 사건이다. 이찬식 장인은 삼베 일을 하는 “대마쟁이”로 여순사건의 유족이기도 하다. 어쩌면 대마쟁이 하며 숨어서 살아온 “고향 이민자” 중에 한 사람이다. 시인이 구술 채록하여 쓴「한국의 매카시즘」은 이찬식 장인의 증언이며 기록물이기도 하다. 여순사건은 “보고도 못 본대끼 해야쓰고 알아도 모른대끼”해야 하는 침묵을 강요당한 사건이며, “연좌제”와 “빨갱이 죄악”으로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사건이고, “쥑인 놈은 없고 죽은 사람만 있는” 사건이다. 5살 어린 나이에 당한 사건으로 이찬식은 지금도 아버지를 “한번만 봤으면 여한이 없는” 잘못된 시상(세상)을 베틀에 올려놓고 보내고 있다. 그가 직조한 세월을 누가 “나비마냥 가볍고” “속 씨언허”게 만들어 줄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물 끝처럼 밀고 온 시인의 시(고향—성지순례기—꽃—한국의 매카시즘)를 통해서 귀결되고 있는 것은 “가족(Family)”에 있다. 이에「아궁이 한 가족」이 절묘하다.
콩대 태워 콩 삶으니
솥 안에 콩이 울고
완두콩대 태워
완두콩 삶으니
솥 안에 완두콩
외돌아 논다
영등바람 일어
바람 죽 삶자
솥 안에 빠진 선문대할망
허연 이 드러내 화들짝 웃네
한 뱃속에서 나온 것들
서로 볶아대며
왜 죽이려 하느냐고
—「아궁이 한 가족」전문
설문대할망을 선문대할망이라 부르기도 하는 이 설화는 제주특별자치도의 산과 섬을 창조한 존재로 일컬어지는 설문대할망에 관한 이야기이다. 시인은 설문대할망의 설화 가운데 한 대목을 빌려 쓰고 있는데 “설문대할망에게는 5백 명의 아들이 있었다. 어느 날 설문대할망은 큰 솥에 아들들을 먹일 죽을 끓이다가 잘못해서 솥 안에 빠져 죽고 말았다. 죽을 먹던 아들들이 그 사실을 알고 크게 슬퍼하다가 영실기암의 오백 장군이 되었다고”(다음사전)하는 다섯 번째 이야기다. 설문대할망 설화는 지리산의 노고할미나 마고할미처럼 창조신앙과 대모사상을 떠받치고 있다. 이제 백계동의 할머니는 자연스럽게 설문대할망 설화의 자리에 놓여 지며 “한 뱃속에서 나온 것들//서로 볶아대며/왜 죽이려 하느냐고” 웃고 있는 할망의 웃음으로 환치되고 있다. 한 나무, 한 깍지 속에서 나온 것들(콩, 완두콩)이라는 메시지를 가지고 말이다. 어쩌면 “하나님은/허허”(「허허」)와 같은 양상이다. 김종옥 시인은『울 엄니 시집가는 날』을 통해 할망의 웃음이나, 하나님의 웃음을 토대로 한 가족의 구성으로 살아갈 것을 염원하고 있는 ‘엄결’(엄숙하고 정결한)성으로 시의 서사를 발랄하게 끌어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