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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성경에 나타난 세 영적 존재(삼위일체 하나님)
요1:18절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무도 눈으로 볼 수가 없다. 그것은 뱃속에 있는 아이가 어머니를 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아버지는 매우 크신 분이기 때문에 아무도 볼 수 없다.
하나님 아버지는 뜻을 정하시는 분이고, 아들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는 분이시고, 성령은 그 뜻과 성취된 것을 보존하는 일을 하시는 분이시다. 성부는 뜻을 정하시고, 아들은 성취하시고, 성령은 증거하고 보존하신다. 성부는 하늘에서 모든 뜻을 정하시는 분이다. 모든 뜻은 아버지가 작정하신 것이다.
하늘의 뜻과 땅의 뜻, 하늘의 것과 땅의 것 등 모든 것을 정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는 “나는 내 뜻을 행하려 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 왔다”고 하셨다. 아들 자신에게도 뜻이 있고 의지와 견해가 있는데, 자기의 독립된 뜻대로 행치 않으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하신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과 자기의 뜻을 독립시키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을 자기의 뜻으로 삼으셨다. 아들이란 말 자체가 복종하는 존재임을 밝히고 있듯이, 이 땅에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려고 오셨을 때 “아들”로 불리게 된다. 아들이라는 개념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는 뜻이 있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 그것을 성취해야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뜻을 실망시키지 않고 다 성취하신 분이 아들이시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다 성취했기 때문에 아들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자기 뜻대로 하시는 분이 아니고, 아버지가 정하신 것만을 성취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생과 사의 양극을 사용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다. 아버지의 뜻에는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도 있다. 죽음에 대한 명령도 있고 삶에 대한 명령도 있다. 죽음에 대한 능력도 있고 삶에 대한 능력도 있다.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서 다 성취하셨다. 하나님 아버지도 아들이 없이는 뜻을 성취하실 수가 없다.
창조도 아들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창세기 1장 2절의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분이 아들이시다. 이 빛은 요한복음 1장 1절의 빛이다.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설계도는 먼저 아들을 위하여, 아들에 의하여, 아들을 통하여 이루신다. 하늘의 설계도가 제일 먼저 내려온 사건이 바로 천지창조로 나타났다. 아버지는 아들이 없이는 아무것도 하실 수 없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뜻하신 것은 오직 아들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또한 아들은 아버지 없이는 아무것도 하실 수 없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대로만 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 잔이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하신 것도 아버지의 뜻을 피하시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들에게도 자기 뜻이 있으나, 자신의 뜻보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순종하셨고, 아버지의 뜻은 아들 없이는 성취할 수 없다. 아들은 아버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버지도 아들이 없이는 아무것도 하실 수 없다. 아버지는 뜻을 정하시고, 아들이 그것을 성취하시고, 성령은 그것을 증거 하신다.
그러나 일하시는 이는 한 분이시다. 다만 그것이 사람의 눈에는 각기 다른 분이 다른 일을 하는 것으로 보일 따름이다. 하나님의 뜻은 말씀으로 세상에 나타나시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 임하셨다.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셔서 세상에 자기의 뜻을 이루셨다. 예수는 이 땅에 오셔서 아버지의 뜻을 보여 주셨고, 성령은 우리 안에 오셔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나타내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세례를 받고, 성령 충만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일이 내 안에서 나타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버지의 뜻대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셨으니 이제 성령께서 아버지의 뜻대로 우리를 감동하시고 드러내시게 해야 한다.
행9:1-20절은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치려고 여전히 위협과 살기를 내뿜으며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마스쿠스의 회당들에 가져갈 편지를 그에게 요청하니 이것은 그가 이 길에 속한 사람을 만나면 남자와 여자를 막론하고 그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더라.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이 나와 그를 둘러 비추더라. 4 그가 땅에 쓰러져 들으매 한 음성이 있어 그에게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5 그가 이르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가시 채를 걷어차기가 네게 고생이라, 하시거늘 6 그가 떨며 놀라 이르되, 주여,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시나이까? 하매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도시로 들어가라. 그러면 네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듣게 되리라, 하시니라. 7 그와 함께 길을 가던 사람들은 음성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한 채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도 보지 못하므로 그들이 손으로 그를 인도하여 다마스쿠스로 데려가니라. 9 그가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더라.
10 다마스쿠스(다마섹)에 아나니야라 하는 어떤 제자가 있더라. 주께서 환상 중에 그에게 이르시되, 아나니야야, 하시거늘 그가 이르되, 보소서,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1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곧은 거리라 하는 거리(직가)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사울이라 하는 다소 사람을 찾으라. 보라, 그가 기도하고 있느니라. 12 그가 환상 중에 아나니야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 자기에게 안수하여 시력을 받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 이에 아나니야가 응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해 내가 많은 사람에게 들었는데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들에게 많은 악을 행하였다 하더이다. 14 여기서도 그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니라.
15 그러나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길로 가라. 그는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 앞에 내 이름을 전하기 위해 내가 택한 그릇이니라. 16 그가 내 이름으로 인하여 얼마나 큰일들로 반드시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야가 자기 길로 가서 그 집에 들어가 그에게 안수하며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올 때 길에서 네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사 네가 시력을 받게 하시고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되도록 하셨느니라, 하매 18 즉시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고 그가 곧 시력을 받으니라. 그가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 음식을 받으매 강건해지니라. 그 뒤 사울이 다마스쿠스에 있던 제자들과 며칠을 지내며 20 즉시 회당들에서 그리스도를 선포하되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거늘”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거듭남(구원)과 성령세례가 별개의 사건임을 알아야 한다. 사도행전 9장 1-9절까지는 거듭남, 곧 구원을 얻은 사도 바울의 모습이고, 10-19절까지는 성령세례를 받고 또한 성령충만한 상태를 의미한다. 제자들은 3년 반 동안 예수님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고, 또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도 가르침을 받았다.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생활하면서 가르침을 받고 구원(거듭남)을 받았으나, 그러나 오순절 성령세례를 받기 전에는 예수에 대한 지식과 경험은 있었으나 지혜와 능력이 없었다. 오순절날 강한 위로부터의 성령을 받음으로써 담대히 사역에 임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구원과 성령세례는 다른 것이다.
다마섹 도상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를 만난 후 거듭나고 구원을 받고 생명책에 그 이름이 적혔으나, 직가에서 아나니아로부터 안수를 받고 성령세례, 곧 위로부터의 경륜적인 영을 받은 후에야(행9:17-18), 예수님이 위임하신 능력 있는 사역을 담당하기에 충분해졌던 것이다(15-16).
하나님도 그 뜻을 이루실 때는 아들을 통하여 하셨고, 그 뜻을 보존하시는 것은 성령께서, 모든 뜻은 아버지에게서 나오고, 그것을 성취하시는 분은 아들이시며, 아버지의 뜻을 영원히 기억하시고 보존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또 그 뜻을 성취하시는 아들을 도우시는 분도 성령이시다.
마치 아버지는 설계사와 같고, 아들은 시공자와 같으며, 성령은 그것을 영원히 보전하시는 자와 같다. 창세기 1장에서 다 이루시니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고,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아들은 성취하시는 분이시다. 아들이 없이는 아버지의 뜻을 이룰 수가 없다.
하나님은 영원한 태초, 그 이전부터 뜻을 정하셨다. 그리고 이천 년 전에 그 뜻을 성취하려 예수님께서 오셨다. 하나님의 아들을 통하여 태초에 정하신 뜻을 성취하신 것이다. 그리고 성취하신 뜻을 성령께서 오늘날까지 믿는 이들 속에서 역사하신다. 이렇게 성령은 하나님의 사역의 현재성을 나타내신다.
만일 성령의 사역을 무시한다면, 예수님께서 성취하신 일은 이천 년 전의 역사적 사실로 끝난다. 성경은 태초부터 계신,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의 뜻을 그 아들을 통해서 이천 년 전에 성취하신 것을 보여 주고 성령으로 어느 시대 사람이건 오늘 믿는 이들 안에 그 사실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성부는 설계자이시고, 성자는 그 설계도대로 그 일을 완성하신 분이시며, 성령은 지어진 집 안으로 인도하여 살게 하시는 분이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뜻을 정하시고, 아들은 뜻을 성취하시며, 성령은 뜻을 영원히 보전하시고 그 뜻을 나타나게 하신다. 성경은 바로 이와 같이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하여 기록했다.
예수님은 아담의 죄 때문에 죽으셔야 하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죽으신 분이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은 우연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신 그분의 공생애다. 그래서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목수의 설계에 따라 일하듯이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아버지가 시작하신 것을 마지막에 아들로 나타내셨다(히1:1-2).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하늘까지 높이시는 일이고, 아들의 뜻은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아들을 절대로 초월하지 않는다. 아들만이 지금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고 있다. 이것이 의(義)가 된다.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옮기려고 오신 분으로서 아버지 뜻대로 가신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들은 자기의 뜻을 기도했지만, 아버지는 침묵을 지키셨다.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알고 고난의 길을 가셨다. 예수가 창조주이시라도 자기의 뜻대로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진리가 되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알고 오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시고 아들과 함께 하신다. 아들이 아버지의 품속에 계실 때, 하나님 아버지는 그 아들을 후사, 곧 상속자로 정하시고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창1:3절에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죽고 부활하여 하늘 보좌에 오르게 하셨고, 하늘을 아들에게 주시어 예수가 통치하게 하셨다.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신 후 하늘은 완전히 그리스도의 주권 안에 들어 있다. 하늘은 아들의 것이다. 하늘과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모든 영이 그분께 나아와 경배하고, 우리도 그에게 나아가 경배한다.
예수는 만물을 발아래 두시고 온 하늘을 주관하시고 통치하신다. 그렇다고 아버지를 무시하고 그리스도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 전체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아들은 사람의 아들(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받으시고(요5:27),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사 만국을 다스리신다.
아버지는 영원하신 분이시고 아들은 창조된 하늘과 만국을 다스리신다. 심판이 끝나고 이 세상이 없어지면 아들은 하늘에서 영원히 통치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그에게 굴복하게 하시고, 예수를 주라 시인하게 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 그러므로 그에게 영광 돌리는 것은 곧 아버지께 영광 돌리는 것과 같다(빌2:6-11).
아들이 없이는 아버지의 뜻을 한 가지도 이룰 수 없다. 우리가 아버지의 뜻을 귀로 듣지 못해도, 눈으로 보지 못해도,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볼 수 있다. 구약에서는 아들이 아버지 안에서 나오지 않으시고 아버지 품속에 계셨다. 성령도 아들과 함께 아버지 안에 계셨다.
구약 때는 나타나지 않으셨지만 아버지 품속에 계신 독생하신 하나님이 이 땅에 나타내셨을 때, 성령도 나타내셨다. 산을 볼 때 정면에서만 보면 그 산 하나밖에 없는 것 같지만, 측면에서 보면 여러 개의 산들이 겹겹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구약 때 사람은 하나님 안에 아들이 계시고 성령이 계셨지만 삼위를 볼 수 없었다.
신약시대 사람은 아버지 안에서 아들과 성령이 나타나셨으므로 삼위를 볼 수 있다. 만일 예수께서 오시지 않았으면 아무도 하나님이 계심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우주 안에서 하나님을 보았다면 곧 아들을 본 것이다. 마치 보이지 않는 씨가 땅 속에서 땅 위로 올라와 열매를 맺고 다시 그 열매로 말미암아 싹이 나오듯이, 하나님의 속성은 예수로 말미암아 보이는 데로 나타났다.
하나님의 속성이 우리 안에 그대로 드러나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시는 일을 보면 아버지의 뜻을 볼 수 있고, 아버지의 뜻을 귀로 들을 수 있다. 예수를 보면 아버지를 뵙는 것이다. 우리는 아들을 봄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보았다. 아버지는 아무도 보지 못한다. 그분은 영이시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뵐 수가 없다.
그러나 그분에게는 뜻이 있다. 제자들이 “내게 아버지를 보여 주소서”라고 하자, 예수께서 “어찌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 네가 아버지를 보지 않았느냐”라고 하셨다(요14:9).
“아버지를 보여 주소서”라는 것은 “설계도를 보여 주소서”라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집이 설계도와 같은 것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일을 통해서 아버지의 뜻을 보는 것이다. 곧 예수를 봄으로써 아버지를 보았다.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지만 그 아들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 주신 분이다. 아무도 하나님을 볼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본다.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 오신 것이다.
예수 이전의 하나님의 뜻은 비유요 예표였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직접 이루신 일만이 아버지의 뜻에 대한 실상이다. 롬12:2절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한 것같이 예수만이 하나님의 뜻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 하는 기준은 예수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없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이다. 과거의 뜻은 아버지와 아들에 의해 이미 완성되었고, 현재의 뜻도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이루어 가신다. 미래의 뜻 역시 그렇게 하실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
첫댓글 아멘감사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