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서 좌측 숲으로(시그널)으로 들어가 송전탑을 지나 급한 절개지로 내려 대치고개로 이어지나 대치고개가 지나는 43번 도로도 건널 수가 없어 43번 도로의 지하통로가 가까운 곳의 산줄기를 따라 등로가 만들어 진 듯하다.
▲눈이 쌓여 길은 아예 보이지 않는데 마침 선답자의 발자국이 눈에 덮여 희미한 자국을 따라 내려간다.
▲시그널이 보이고 우측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높은 절벽이라 위험하여 좌측 계곡 사면으로 조심해서 따라 내려간다.
▲우측 유진레미콘공장이 보이는 곳으로 진행해야 하는데 절벽이라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다 좌측으로 내려간다. 43번 국도로 내려가는 데평상시에는 10분 정도 걸릴 것을 눈길 때문에 30~40분 걸려 겨우 쉴락원 장례식장으로으로 내려간다.
▲43번 국도가 지나는 대치고개가 보인다.
▲무단횡단은 엄두도 못내는데 그마저도 횡단보도도 없어 좌측 죽전쪽이나 우측 모현쪽으로 가서 지하차도로 건너야 하는데 양쪽 다 거리가 만만찮으나 우측 모현쪽이 조금 더 가까워 모현쪽으로
향한다.
▲대치고개(大峙峴:180m):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에서 처인구 모현읍을 지나서 광주시 오포읍을 넘어가는 43번국도가 지나는데 서울근교에 있는 도로라서 차량 통행이 굉장히 많 고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곳이다. 고개 북쪽은 대지산·숫돌봉 등 300m 내외의 산으로 되어 있으며, 동쪽은 능원천이 발원하여 경안천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는데 대지산 아래에 위치한 고개로서 예전에 임금님이 행차하시어 꽤 넓은 들이라 했다는데 유래하여 넓은 들을 가진 고개라는 의미의 ‘대지고개(大池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대지고개에는 수도권이라 교통량이 많아 무단횡단을 할 수가 없어 도로 우측 모현간판 쪽으로 가서 지하차도로 건너기로 한다.
▲43번 국도로 애버랜드 방향가는 데, 차량이 쌩쌩달려 무섭다. 특히 대형 화물차량들....
▲43번도로를 따라서 모현쪽으로 내려오니 우측에는 유진레미콘 공장과 희창냉장 좌측 넓은 도로를 버리고 우측 도로를 따라서 내려간다.
▲유진레미콘 공장에서 구도로를 따라간다.
▲ 43번국도 아래 지하통로(오산육교)를 통과하여 좌측도로 따라 대치고개로 되돌아간다.
▲좌측 43번 신도로이고 우측 구도로 따라 진행한다.
▲ 대치고개에 접근하여 천주교 용인공원묘원에서 내려온 마루금과 절개지를 건너본다.
▲대치고개/ 43번도로/ 돼지고개/ 대덕고개: 대지고개로 내려서면 좌우로 굴다리를 찾아 통과해야 한다. 굴다리를 통과하면 다시 대지 고개 정상으로 올라 마루금에 복귀하고 폐업한 산마루촌 가든 옆 샛길로 대지산에 오른다. 이곳이 평야지대도 아닌데 왜 큰 땅이라는 이름의 대지(大地)가 되었을까? 이곳에서 대를 이어 살고 있는 많은 문중의 족보에는 조상의 묘의 위치가 대부분 대지산(大地山) 선영이라 고 땅지(地)자로 기록되어 있음은 물론이고, 마을에 내려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옛날에 는 서울에서 임금님이나 관리들이 지방 나들이를 할 때 주로 사용하던 큰 길 중의 하나가 서울 양재와 판교를 거쳐 신갈로 이어지는 지금의 23번 국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임금님이 경복궁에서 아침을 먹고 행차를 하면 남산을 지나 서빙고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오면 점심때가 되어 말에게도 말죽을 먹였다하여 그 곳의 이름을 말죽거리(지금의 양재동)라 부 르게 되었으며, 점심 후에 다시 발길을 재촉해 달래내 고개(지금 경부고속도로 위)를 지나 판교에 이르니 소나기가 쏟아져 운중천이 범람하여 길이 막히자 마을 주민이 널빤지를 가져 다 임시가교를 설치하여 임금님을 무난히 건너게 하였다 하여 그곳을 '널다리' 즉 판교(坂 橋)라 부르게 되었으며, 또 한참을 내려오다 보니 모처럼만에 그래도 다소 넓은 들이 나타 나자 '이곳이 어디냐?'고 물으니 한 백성이 농사를 지어 군량미를 조달하는 군량뜰(지금의 수지 레스피아 일원)이라고 말하자 임금님이 대지고개 쪽을 바라보며 '그래도 이곳은 꽤 큰 땅 이구먼!'하였다고 말하여 그 때부터 이곳을 큰 땅 즉 대지(大地)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 다. 임금님의 행렬은 계속되어 양고개(현 운전면허 시험장)를 너머 신갈 역말(지금 기흥구 신역동)로 이어진다. 역말이란 공무로 지방에 출장을 갈 때 하루 쉬어 가며 말에게도 저녁 을 먹이고 재우던 곳이다. 특히 암행어사 이야기에 등장하는 마패에 그려져 있는 말의 수에 따라 이곳에서 말을 갈아타거나 재우고 먹일 수 있었던 곳으로 지금도 서울에서 동서남북으 로 통하는 약 1백여 리 길목에는 역말이라는 지명을 지닌 곳이 더러 남아 있다. 그 예가 경 기도 광주시 역동에도 남아있다. 이렇게 해서 임금님의 하루 행차는 역말에서 마무리 되며, 임금님의 발길 따라 수많은 지명이 지어지기도 하고 바뀌기도 하였던 것이다. ▲대지고개 마루금 복귀하여 우측 녹색 철망울타리와 도로경계 철책울타리 사잇길로 진행한다. ▲녹색울타리 우측으로 계속 따라간다. 길은 뚜렷하다. ▲대지산정상0.7km 방향 녹색철망 울타리 계속 따라간다. ▲묘지공원에서 내려온 트랙 ▲94번 송전탑 아래를 지나간다. 송전탑을 지나면 등로는 좋아진다. ▲등로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竹田洞)의 모습: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북쪽에 위치하는 동으로 조선 시대 십청헌 김세필 선생의 묘소가 있다. 본래 용인군 수진면(水眞面) 지역으로 큰 못이 있어 대지 또는 죽전(竹田)이라 하였다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대지 · 감바위(玄岩) · 내대지(안대지말) 등 죽전동 일부를 죽전 리라 해서 읍삼면(구성면)에 포함시켰다가 1973년 수지면에 이속시켰다. 전해지는 이야기로 대지(大池)는 어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이 마을에서 득세하였을 때 마을 앞에 큰 연못을 파고 대지라 부르게 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데, 고기는 물이 있어야 살 수 있다는 풍수적 소응을 관련짓는 속설로 이해된다. 또 다른 설로 모현면으로 넘어가는 고개의 명칭인 돼지고개는 대치(大峙)의 변음으로 결국 대치고개 아래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대지라 부른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지 마을 앞에 있는 다리를 죽전교(竹田橋)라 부르는 것을 보면 오히려 대지는 죽전(竹田)의 한 글 표기가 아닌가 한다. 『1872년지방지도』에도 죽전이라는 명칭이 확인된다. 이것은 이 마을이 어떤 식으로든 대 나무와 관련되어 있음을 짐작케 하는데 대나무하면 충절 · 절개를 상징하는데, 모현면 능원 리에는 고려 말 충신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소가 있는데 전해지는 이야기로 본래 개성의 풍 덕에 있던 선생의 묘소를 이장하려 할 때 이 지역이 면례과정에서 용인으로 묘소를 결정하 게끔 하는 의미 있는 장소로 떠오른다. 만약 그렇다면 포은 선생의 충절을 의미하는 대나무 를 떠올려 이 마을의 이름을 죽절(竹節) · 죽전 등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한다. ▲우측의 골프연습장에서 조림한 소나무 사이 넓은 임도길을 걷는다. ▲오르막길에 좌측으로 납골묘지들이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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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대지(內大池)마을 갈림길이정표(대내지마을, 대지산정상150m) 죽전동에 있는 마을로 안대지, 안대지말 등으로 불리며, 내지마을 중 안쪽에 있기 때문에 내대지라 하였다. 대지(大池)마을은 어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이 마을에서 득세하였을 때 마을 앞에 큰 연못을 파고 대지라 부르게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고기는 물이 있어야 살 수 있다는 풍수적 소응을 관련짓는 속설이다.
▲ 골프연습장 울타리인 녹색철망을 만나 좌측으로 따라 조금 올라가면 대지산정상이다.
▲대지산(大地山:326m):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와 모현읍, 광주시 오포읍의 경계능선에 있는 산으로 지도상에는 326봉이라 표기되어 있는 그냥 밋밋한 산이다. 용인시 최북단 죽전동에는 대지라는 마을이 있고 대지산이라는 산도 존재한다. 대부분 慶州 金氏 門中소유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곳이 평야지대도 아닌데 왜 큰 땅이라는 이름의 대 지(大地)가 되었을까? 많은 사람들은 옛날 이곳에 큰 연못이 있다가 매몰되어 못 지(池)자 를 써서 대지(大池)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표기라고 본다. 이곳에 서 대를 이어 살고 있는 많은 문중의 족보에는 조상의 묘의 위치가 대부분 대지산(大地山) 선영이라고 땅지(地)자로 기록되어 있음은 물론이고, 어려서부터 어른들에게 전해들은 이야 기도 그렇다. 전해들은 이야기는 대충 이렇다. 옛날에는 서울에서 임금님이나 관리들이 지방 나들이를 할 때 주로 사용하던 큰 길 중의 하 나가 서울 양재와 판교를 거쳐 신갈로 이어지는 지금의 23번 국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임금 님이 경복궁에서 아침을 먹고 행차를 하면 남산을 지나 서빙고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오면 점심때가 되어 말에게도 말죽을 먹였다하여 그 곳의 이름을 '말죽거리'(지금의 양재동) 라 부르게 되었으며, 점심 후에 다시 발길을 재촉해 달래내 고개(지금 경부고속도로 위)를 지나 판교에 이르니 소나기가 쏟아져 운중천이 범람하여 길이 막히자 마을 주민이 널빤지를 가져다 임시가교를 설치하여 임금님을 무난히 건너게 하였다하여 그곳을 '널다리' 즉 판교 (坂橋)라 부르게 되었으며, 또 한참을 내려오다 보니 모처럼만에 그래도 다소 넓은들이 나 타나자 '이곳이 어디냐?'고 물으니 한 백성이 '농사를 지어 군량미를 조달하는 군량뜰'(지금 의 수지 레스피아 일원)이라고 말하자 임금님이 대지고개 쪽을 바라보며 '그래도 이곳은 꽤 큰 땅 이구먼!'하였다고 말하여 그 때부터 이곳을 '큰 땅' 즉 '대지(大地)'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정표(내대지마을, 대지고개. 숫돌봉1.4km) 숫돌봉을 갔다 오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어 그 냥 좌측 불곡산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