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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오늘 이 거룩한 성일을 맞아
주의 백성이 두 손을 모았습니다.
주 성령께서 우리 공동체에 임재하시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더 깊이 뿌리내려,
주님과 온전히
동행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참 맘으로
주님을 새롭게 영접하는
복된 자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살며시 찾아든 행복
마태 5장 5절
예수님은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행복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행복한 사람은,
첫째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요,
둘째는 “애통하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온유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셨고
“나는 마음이 온유하다.”
(마11:29)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을 닮으면 행복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온전한 성품을 표현하는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보면
그 안에 온유가 들어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3절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9가지가 모두
예수님의 한 인격,
성품을 드러내는 요소입니다.
그 가운데 온유가 들어있지 않습니까?
이 온유를
성령께서 우리 안에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을
우리 마음에 모시면
그 성령께서 우리의 기질을
온유한 사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럴 때 비로써
우리는 온유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성령을 모시고 삽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십니다.
우리 안에서
왕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다스리시고
천국을 이루도록 하시는
절대자입니다.
절대자로서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 성령은 우리의 성품을
온유하게 바꾸어 놓으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성령을 모시고 산다고 하면서
성격이 온유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요,
모순에 빠지는 것임을
꼭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온유한지 아니한지를
어떻게,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먼저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마음자세를 놓고 따져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떻게 처신을 하는 사람인가를 보면
온유한 자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는 욥처럼 처신해야 합니다.
욥처럼 처신하면 온유한 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욥은 동방의 최고 부자였습니다.
그렇게 많은 재산,
10남매나 되는 자랑스러운 자녀들,
천하에서 가장 미인이라고 하는 아내,
어느 것 하나 부러울 것이 없을 정도로
생의 모든 쾌락을 만족시킬 만한 조건들을
다 충족시키면서 살던 욥이지만
하루 아침에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내가 쥐고 있는 재산, 내가 자랑하는 자녀,
자랑하지 마십시오.
하루 아침에 다 없어질 수 있습니다.
욥이 바로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다 없어지고 몸에 병까지 들어
가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기와조각으로 온 몸에 피가 흐르도록 긁어야하는
너무나 불쌍한 사람이 되어 버렸어요.
하루 아침에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욥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처신했습니까?
욥은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알거지가 된 다음에,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었고
머리털을 밀었고
그 다음에는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를 일컬어
하나님 앞에서 온유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거세게 항의하고 싶고
고개를 쳐들고 따지고 싶을 때,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회개하는 자와 같이
옷을 찢고 베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한 것입니다.
이것이 온유한 자의 태도입니다.
그가 무엇이라고 고백했습니까?
'내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사온즉
또한 벌거벗은 채로
모태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아멘'
(욥1:21) 그는 절대로
입을 열어 범죄하지 아니했으며,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욥1:22) 욥은 온유한 자의 기념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런 자세를 취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온유하다고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땅을 주십니다.
욥은 나중에 땅을 얻었습니다.
잃은 것 보다 몇 배로
하나님께서 다 보상해 주셨습니다.
욥은 인생을 실패자로 산 것이 아닙니다.
땅을 얻은 사람은 승자입니다.
옛날에 땅을 소유하면
승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욥은 승자로서 인생을 살았습니다.
어째서 그럴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 앞에
온유한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현재 욥과 같이
기가 막힌 상황은 아니라 할지라도
자신이 생각할 때
이해가 안 되는 불행,
이해가 안 되는 고통과 문제를 안고
씨름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기도를 할 힘도 없습니까?
하나님 앞에
계속 따지고 싶은 마음 밖에 없습니까?
'그래도 이만큼 신앙 생활을 했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나에게 이런 대우를 하실까?'
이런 편치 못한 마음 때문에
계속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이 사나워집니까?
욥처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시를 바랍니다.
어떤 형편에서도 신뢰하십시오.
그의 성실하신 약속들을 소망하십시오.
그리고 기다리십시오.
저녁에 울음이 있다고 해서
그 다음 날도
울음이 계속 된다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따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는 사실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 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자세가
온유한 자의 자세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땅을 주십니다.
한편 온유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태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향해서 어떤 마음,
어떤 태도를 갖는가도
온유와
대단히 중요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그가 온유한가
그렇지 않은가 판단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자신을 비난하거나 대적하거나
모함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
그 마음 태도가 어떠한가를 보면
온유한 자인지 아닌지
금방 판단할 수가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철학자는
원래 중용의 도를 많이 이야기한 사람입니다.
온유에 대해서도 똑 같이 말했습니다.
'온유는 격렬한 분노와
전혀 화를 내지 않는 것의 중간이다.'
즉, 미칠 정도로 화를 내는 것과
전혀 화를 내지 않는 것의 중간이
온유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 온유를
힘과 부드러움의 조화로 설명한 것 같습니다.
격분하거나 복수를 할 수도 있지만
자기 힘을 쓰지 않고
용서해 주는 것을
온유라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온유는
힘을 가진 자, 능력이 있는 자와
결부를 시켜서 설명합니다.
힘이 없어서 온유한 채 하는 것은
유약함일 뿐입니다.
그런 경우는 감동이 없습니다.
'어린 애가 온유하다.'고 하면
별 감동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온유하다.'고 하면
그것은 굉장히
진한 감동이 오는 것입니다.
온유는
힘과 많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잘못하면 폭발하기 쉬운
'분노'라는 강력한 폭탄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잘 다스리고 길들일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없으면
언제든지 폭발해서
사람들을 다치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분노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얼마나 잘 다스리는가,
얼마나 잘 조정하는가,
얼마나 균형을
잘 이루게 하는가에 따라서
온유한 자가 될 수도 있고,
온유하지 못한 자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오랜 시간의 훈련과 자기 수양을 통해서
자기 감정을 통제할 수 있고
화를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온유는
사람들이 자기 힘으로
적당히 조절하면서 얻을 수 있는,
수양하면서 얻을 수 있는
온유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이
철저하게 나를 다스림으로써 나타나는
온유입니다.
차원이 다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언제 화를 내어야 합니까?
언제 화를 내지 말아야 합니까?
화를 내어도 온유할 수 있는 경우는
어떤 경우입니까?
이런 질문들을 많이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보면서 배우는 것이
가장 정확한 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 20절에 보면
온유하고 겸손한 자기 모습을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셨습니다.'
꺾을 힘이 얼마든지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꺾지 않았습니다.
온유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셨습니다.'
훅 불어 버릴 수 있는 힘이 있지만
끄지 않고 조용히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온유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 유익을 위해서 화를 내신 일이 한번도 없습니다.
'나사렛 예수 저 촌놈'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욕하고 경멸했을 때에도
그것 때문에 화를 내신 일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바리새인 집에 초대를 받아서
식사를 할 때도
거지를 초대한 것처럼
전혀 예우를 해 주지 않고
박대를 당했지만,
그것 때문에
화를 내신 일이 한번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화를 내신 일은 언제였습니까?
백성들의 유익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할 때
화를 내셨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서
경건하게 기도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장사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경건하게 기도하지 못하는 것을 보실 때
화가 나셨습니다.
그래서 회초리를 가지고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 내셨습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나를 위해 화를 내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화를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온유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들을 멸망으로 끌고 가는
불의와 죄악을 보실 때
화를 내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불행한 자리로 끌고 가는 것을 볼 때
그 불의를 참지 못하시고
'독사의 자식들아, 뱀의 새끼들아'
하면서 화를 내셨습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온유하신 예수님이 보여주신
이와 같은 태도를
우리가 가만히 배우고 묵상하면
온유한 사람으로서
화를 낼 때가 언제이고,
화를 내지 말아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별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화를 내어도 온유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화를 안 내도
온유가 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온유는 강한 것이지
약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온유한 자가 됩시다.
누구처럼 해야 합니까?
욥처럼 합시다.
나를 대적하는 사람 앞에서
온유한 자가 됩시다.
사람을 대할 때
화를 낼 것인지 안 낼 것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온유인지는
누구에게서 배웠습니까?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이렇게 배운 것들을
작은 일에서부터 적용해야 합니다.
온유한 자가 되면,
제일 먼저 행복해지는 사람은
가족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부터
내가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가정에서 온유하지 못하면
제일 먼저 불행해지는 사람들이 식구들입니다.
부인이 다칩니다.
온유하지 못하면
주변에 있는 식구들이 다 다칩니다.
가정 상담자들의 말을 들으면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부부 사이에
제일 어려운 문제가
상존하는 분노라고 합니다.
쉽게 가라앉지 않는 분노가
남편의 마음에도 계속 남아있고,
아내의 마음에도
계속 떠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이런 분노를 일컬어서
얼어 붙은 분노라고 말합니다.
얼어 붙으면 잘 떨어지지 않습니다.
잘 안 없어집니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서로 날카로워지기도 하고,
서로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상처를 주고
독한 말로 상대방의 감정을
뒤집어 엎기도 합니다.
부부 사이가
굉장히 살벌해 지는 것입니다.
부부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그 마음에 모시고,
성령이 자기의 감정을
다스려주시고 통제하도록
전적으로 의뢰하면
성령의 손 안에서 그런 악한 것들이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반드시 온유한 자로
만들어 주시는데,
만일 성령께 순종하지 아니할 경우에
온유는 저만큼 가 버리고
자기 감정과 분노만
쉴 사이 없이 끌어오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가정이 평안할 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온유가 부족하면,
우리의 감정, 우리의 분노는
언제든지 터질 수 있는
시한폭탄이 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부터 온유해야 됩니다.
최근에 상담가인 모 교수에게
목사 사모님이 찾아와서
상담한 내용을 써 놓은 글을 본 일이 있습니다.
이 사모는 40대 초반의 나이에
똑똑한 목사를 남편으로 둔 부인입니다.
이 남편이 명문대를 나왔는데,
처음에 얼마 동안
직장생활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날마다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시시한 놈들,
이 지저분한 놈들 하고는
도무지 일을 못하겠어.
나까지 더러워지겠어.'
이처럼 직장 동료들을
날마다 비난하더랍니다.
그러더니 어느 날 갑자기
아내와는 의논도 하지 않은 채
신학교에 가더랍니다.
그래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명문대학 출신이어서 그런지
그런 대로 괜찮은 교회를 맡아서
목회를 잘 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교인들로부터는
영성과 지성이 겸비한 지도자요,
또 세속적인 것과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아주 정의로운 지도자라고
존경을 받고 있답니다.
그런데 왜 상담을 왔습니까?
사모의 말에 의하면
다른 사람은
남편을 어떻게 보든간에
그가 밖에서 알려진 것처럼
그렇게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그 성격이 너무 비판적이기 때문에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엄격해서
그런 인상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슬픈 것은
자기 가정이
너무나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가정의 날씨는 쾌청이 아니라
늘 비가 오려는 듯 답답하기만 하답니다.
그래서 살 맛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잘못 됐는지,
어떻게 하면 되겠는지 가르쳐 달라고
상담을 청한 것입니다.
상담자인 이 교수가 대답했습니다.
'사모님, 사회적인 성공은
주로 능력과 관계가 있지만,
가정적인 행복은
주로 성격과 관계가 있습니다.
목회자가 목회에 성공하려면
남다른 능력이 필요하지만,
목회자의 가정이 행복하려면
능력이 아니고
건강한 성격이 필요합니다.
성격을 잘 설명하는 우리나라 말로는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제 눈의 안경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칭찬의 안경, 비난의 안경입니다.
비난의 안경을 쓴 사람은
좋은 배우자를 만나도
항상 불행하기 마련이고,
칭찬의 안경을 쓴 사람은
어느 배우자를 만나도
행복하기 마련입니다.
사모님, 심리학에서
'거래 분석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이론에 의하면
나의 과거가 변하지 않는 것처럼
상대방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변하면
상대방이 변한다는 이론입니다.
우리는 모두
당신부터 변해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먼저 변하는 것입니다.
내가 변하면 상대방이 변합니다.
사모님이 변하면 목사님이 변합니다.
그러므로 사모님의 가정문제는
꼭 목사님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둘 다 문제가 있기 때문에
다음에 어느 날 두 분이 다 오셔서
이 사무실에서 성격 검사를 좀 받으십시오.'
매우 정곡을 찌르는
지혜로운 상담 처방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건강한 성격이
행복의 지름길입니다.
그렇다면 건강한 성격 중에
예수님이 교훈하신 온유한 것만큼
건강하고 좋은 성격이 어디 있습니까?
남편이 온유하면, 가정이 행복해집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건강한 성격이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사람이
아내를 함부로 비난하고 비판합니까?
온유한 성격을 가진 아내가
남편 마음에 있는 분노를
자꾸 충동질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목사의 가정이지만
두 사람의 마음을
성령이 다스리도록
전적으로 의뢰하고, 기도하고,
그 분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보려는
진지한 노력이 없기 때문에
마음에 여전히 상존하는
얼어붙은 분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로 부인은 부인대로
남편을 날카롭게 쳐다보고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를 마음 편치 않게 생각하면서
계속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데
가정이 쾌청할 날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 가정에는
고등학교 1학년짜리 딸 하나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울증에 걸려서
학교도 안 가고, 친구도 사귀지도 않고,
그냥 방구석에 쳐 박혀 있다는 것입니다.
온유하지 못한 아빠, 엄마와 함께 살면
아무리 목사 집안이라도,
또 그가 설혹 목회를 잘한다고 할지라도
제일 먼저 피해를 보는 대상은 식구들입니다.
행복을 잃어 버립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당신은 온유한 남편입니까?
당신은 성령의 손에 빚어지고 있는
온유한 아내입니까?
행복을 논하기 전에
자기 자신의 성격부터 먼저 따지십시오.
온유하면
주님이 기업으로 땅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총, 칼을 가지고 땅을 빼앗는다는 말이 아니고,
유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 주의하십시오.
유산을 받는 것입니다.
싸울 필요도 없고,
빼앗을 필요도 없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손 안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는 것이
유산입니다.
온유한 자가 받는 것은
남의 것을 훔쳐 내는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온유하면
처음에는 손해보는 것 같습니다.
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땅을 얻게 됩니다.
온유한 아내는 남편을 땅으로 얻습니다.
온유한 남편은 아내를 땅으로 얻습니다.
온유한 부모는 자녀를 땅으로 얻습니다.
가족들이 온유하면
그 가정에는 행복을 땅으로 소유하게 됩니다.
기쁨과 만족을 땅으로 소유하게 됩니다.
심령의 자유를 땅으로 소유하게 됩니다.
특별히 여러분들을
비난하고 헐뜯는 이웃이 있습니까?
가족이 있습니까?
온유 하십시오.
그러면 틀림없이 그 사람을
하나님이 땅으로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화를 내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예수님처럼 화를 내십시오.
악에 대하여는 화를 내십시오.
용기가 필요할 때는
누구보다도 우리는 강자로서
악과 대결해야 합니다.
이 사람이 온유한 자입니다.
잠언 16장 3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누가 용사보다 강합니까?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온유한 자입니다.
누가 성을 정복하는 군사보다 강합니까?
성령의 통제를 받으면서
화를 낼 때와 내지 아니할 때를 분명히 알고
자기의 감정을 균형있게 유지하는 사람이
가장 강한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은 온유한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땅을 소유하는
가장 멋진 아름다운 생을
우리 모두가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여",
주님의 거룩한 말씀을
이시간 우리가 들었습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이 되어
우리 마음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해 주시옵소서.
설교만 듣고 돌아가는 자가 되지 말게 하시고,
성령의 손에서
온유한 자가 되어 돌아가는 시간되게 하옵소서.
온유한 자가되어,
우리의 가정을 살리고,
온유한 자가 되어
이 악한 세상을 바로 잡고,
온유한 자가 되어
이 땅을 천국으로 만드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돕소서.
주님! 아직도 성령의 손에
우리의 감정, 우리의 성격, 맡기지 못하여서
되는대로
하나님 아버지여 감정을 노출하고
화를 내는 자가 있습니까?
성령님! 그를 꼭 치유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온유한 자 만들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를 통해서
수 많은 가족들이,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행복을 맛보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땅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축복들을 누리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봉헌기도
주님은 기쁨의 잔치를 위해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고,
주의 백성이 능력으로 살아가도록
성령의 은사를 골고루 나누어주셨습니다.
우리 앞에서 행하시는
주님의 신비로운 현존 앞에
두려움과 떨림으로 나아가오니,
아낌없이 베푸시는 주님께
마음과 뜻과 정성으로
봉헌하는 이 시간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가식과 인색한 마음일랑
성령으로 녹여주셔서,
참되고 진실한
살아있는 제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축도
이제는 기쁨의 잔치를 위해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황무지와 같은 우리 인생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삶을
복되고 유익하게 이끄시는
성령님의 은사가,
날마다
정결한 영혼으로 살기를 소망하는
모든 믿는 자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히 함께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