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루 중수기〔聞韶樓重修記〕
풍고楓臯 김조순金祖淳
문소루(聞韶樓)는 의성현(義城縣)의 공관(公館)이다. 처음 세워진 것이 어느 때인지는 모르지만, 문소루에 고려 정포은(鄭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과 김 학사(金學士) 지대(之岱)의 제영(題詠)이 판각되어 걸려 있다. 정 선생은 참으로 고려 말 사람이고 김 학사의 이름은 고려 초에 보이니, 이로써 유추하건대 문소루가 처음 세워진 것은 아마도 신라 시대였으리라.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늙었고 발걸음이 조령(鳥嶺)을 한 발짝도 넘어본 적이 없기에 조령 이남 칠십 개 고을의 산천과 풍속에 대해서는 오히려 그 중요한 것을 어렴풋이도 알지 못한다. 하물며 정자와 해우(廨宇 관사(官舍))의 유무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또 하물며 그곳의 풍광과 감상의 훌륭함에 대해 도리어 어찌 알겠는가.
생각건대, 옛날 정묘(正廟 정조) 기해년(1779, 정조3)에 백부(伯父 김이기(金履基))가 이 고을의 현령을 지냈는데, 종형인 헐암공(歇菴公 김명순(金明淳))이 임지로 따라갔다가 돌아와 나를 위해 이 누각의 승경을 말해 주었고 이어 정 선생의 시를 읊어 주었다. 나는 아직 아이의 식견으로 견문이 적었던 터라 기쁘게 마음에 담아 두었기에 지금까지도 마치 옛날에 유람한 적이 있는 듯하다. 금상 경진년(1820, 순조20)에 아들 원근(元根)이 의성의 현령이 되었을 때는 문소루가 무너져 간다고 하기에 중수를 권하였는데 곧 체직되어 실행하지 못하였다. 5년 뒤에 홍근(弘根)이 또 의성 현령이 되었는데, 부임한 지 겨우 몇 달 만에 편지를 보내 알리기를 “문소루는 천 년의 고적(古迹)이라 차마 끝내 무너지게 할 수 없어 이미 중수하였으니, 숙부의 기문을 얻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훌륭한 일이다. 내가 문소루를 알게 된 것은 나의 종형(김명순)을 통해서였고 너는 또 내 종형의 아들이다. 내가 일찍이 이 누각을 한번 보고 싶었으나 백발에 이르도록 뜻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 너를 통해 이 기문에 이름을 의탁하여 정 선생의 시와 나란히 걸려 후세에 전해진다면, 비록 종신토록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아침저녁으로 올라서 굽어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나는 유감이 없다.
그렇지만 내가 옛날에 들으니, 의성은 이름난 고을로 백성은 많고 아전들은 착하며 관아의 모든 일은 번거롭게 명령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는데, 근래에는 도망하는 자가 이어지고 간사함과 거짓이 날로 불어나 피폐해져서 장차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진실로 이 말대로라면 백성을 구휼하려는 정성이 진실하지 못하고 아랫사람을 단속하는 정사가 행해지지 않은 것이니, 어찌 현령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고을이 있고 누각이 없으면 그래도 편안히 누릴 수 있지만, 누각만 있고 고을이 없다면 장차 누구와 즐기겠는가. 나는 홍근이 마음을 다해 정사를 펼치며 쌓인 병폐를 제거하고 여러 폐단을 개혁하는 데 힘을 다 쏟고 있음을 잘 안다. 그러나 이 말을 말미암아 더욱 힘쓴다면 또한 좋지 않겠는가.”
[주1] 문소루 중수기 : 1825년(순조25)에 의성(義城)의 문소루를 중수한 의성 현령 김홍근(金弘根)의 부탁을 받고 지은 기문이다. 문소루는 의성현에 있던 누각으로 창건 시기는 불분명하다. 고려 공민왕 때 현령 이광제(李光濟)가 중건하였고, 순조 때 김홍근이 다시 중건하였다. 6ㆍ25전쟁 때 없어졌다가 1983년에 복원하였다. 진주(晉州)의 촉석루(矗石樓), 밀양(密陽)의 영남루(嶺南樓), 안동의 영호루(映湖樓)와 함께 영남의 4대 누각으로 불린다.
[주2] 정포은(鄭圃隱) …… 있다 : 정몽주와 김지대(金之岱, 1190~1266)가 문소루를 읊은 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5 〈경상도 의성현(義城縣)〉 누정(樓亭)조에 수록되어 있다. 김지대의 본관은 청도(靑道), 초명은 김중룡(金仲龍), 시호는 영헌(英憲)이다. 청도 김씨(淸道金氏)의 시조이다.
[주3] 백부(伯父)가 …… 지냈는데 : 풍고의 백부인 김이기(金履基)는 1778년(정조2) 12월 27일에 의성 현령에 제수되었다. 《承政院日記 正祖 2年 12月 27日》
[주4] 아들 …… 못하였다 : 김원근(金元根)은 1818년(순조18) 6월 25일에 의성 현령에 제수되어 1820년 1월 13일 재령 군수(載寧郡守)에 제수될 때까지 재직하였다. 《承政院日記 純祖 18年 6月 25日, 20年 1月 13日》
[주5] 홍근(弘根)이 …… 되었는데 : 김홍근(金弘根)은 김명순(金明淳)의 아들로, 1824년(순조24) 12월 22일에 의성 현령에 제수되었다. 《承政院日記 純祖 24年 12月 22日》
[주6] 백성을 구휼하려는 : 원문은 ‘구추(求芻)’인데, 소와 양을 기르기 위해 꼴을 구한다는 말로 고을 수령이 되어 백성을 위해 힘을 쏟는 것을 가리킨다.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고을 수령이 백성을 구휼하는 일을 비유하여, “지금 남의 소와 양을 받아 그를 위해 기르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목장과 꼴을 구하려고 할 것이다.[今有受人之牛羊而爲之牧之者, 則必爲之求牧與芻矣.]”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7] 아랫사람을 단속하는 : 원문은 ‘속신(束薪)’인데, 상관이 아랫사람을 단속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한나라 때 관리인 영성(甯成)이 상관이 되어 아랫사람을 다루기를 마치 젖은 나무를 묶듯이 했던[操下如束濕薪] 데서 나온 말이다. 《史記 卷122 酷吏列傳 甯成》
聞韶樓重修記
聞韶樓者。義城縣之公舘也。其刱未有知所自。然樓有高麗鄭圃隱先生及金學士之岱題詠。板刻而揭之。鄭先生固麗末人。金學士之名見於麗初。以玆推之。樓之刱。其在新羅之世歟。余生老京師。足不踰鳥嶺一步。故嶺以南七十州山川風俗。尙未能髣髴其 要領。况其亭臺廨宇之有無。又况其景槩眺賞之佳否。顧何以知之。惟昔正廟己亥。伯父宰是縣。從兄歇菴公隨之任。歸而爲余道玆樓之勝。仍誦鄭先生之詩。余尙童識寡聞。欣然在心。至于今如舊。嘗遊覽也。今上庚辰。兒子元根爲宰。則樓將圮矣。勸其重修。徑遞未果。後五年而弘根。又爲宰。纔數月書報云。玆樓千年古蹟也。不忍以終廢。旣修之。願得叔父記之。余曰。善。吾之知玆樓。因吾兄。而汝又吾兄之子。吾嘗願一見。而至白首未諧。今因汝而託名玆記。與鄭先生之詩。並揭而垂傳。雖終身不見。與夫朝夕登臨 者奚異。吾無憾焉爾。雖然。吾舊聞義名邑也。民殷而吏馴。公門百事。不煩申令。挽近來逃亡相續。奸僞日滋。弊弊然將至於危亡。信斯言也。求芻之誠不實。束薪之政不行也。庸詎非縣令之責乎。有邑而無樓。尙以安享。有樓而無邑。將誰與爲樂。吾固知弘根之存心爲政。汲汲於蘇積瘼革衆弊。然因之而又勉之。不亦善乎。